전쟁과 평화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5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난 이 작품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5월의 어느 날. 아버지 책장에서 두툼한 양장본에다 여러 권으로 된 '전쟁과 평화'를 발견했다. 그 때 내겐 두 가지가 왕성했는데,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도전 의식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그 둘 모두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로 줄에다 엄청난 분량의 그 소설을, 모르는 단어도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6월 초까지 다 읽고 말았다. '한 번 잡은 책은 무조건 끝까지 다 읽는다'가 당시의 내겐 금과옥조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을 주려 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주 어렵고 정말 글밥이 많은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만 가득 남았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옆집에 사는 누나를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 누나가 톨스토이를 무척 좋아했다. 누나의 환심을 사려면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모조리 읽었던 것 같다. 따로 노트를 마련해 국어 공부를 하듯, 등장인물과 사건, 대사와 주제들을 정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시험 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걸 보면 당신도 이제 알 것이다. 문학을 가까이 하는 가장 좋고 빠른 길은 다름아닌 문학을 좋아하는 이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걸. 여하튼 '전쟁과 평화'는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한 번은 호승심으로, 다른 한 번은 사랑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전쟁과 평화'를 세 번째로 만났다.

 첫 번째는 멋 모르고 읽었고 두 번째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문학 자체로 순수하게 음미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또 손에 잡았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것으로. 이번엔 '전쟁과 평화'를 그 자체로 감상하기 위하여.


['전쟁과 평화' 1권과 '톨스토이 미션 카드'의 모습]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구상하고 집필, 퇴고하는데 모두 24년이 걸린 작품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만 해도 무려 559명에 이른다. 문학동네에선 모두 네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1권의 이야기는 상 페테르부르크에서 안나 파블로브나 세레르가 주최한 야회로 시작한다. 이 야회는 마치 연극에서 개막을 하기 전에 미리 주요 등장인물들을 무대로 불러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처럼 앞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갈 인물들을 독자에게 첫 선을 보이기 위한 장치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 불콘스키 공작과 피예르를 만난다. 둘은 친구지만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극과 극이다. 안드레이가 유명한 불콘스키 공작의 첫째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와 결혼까지 하는 등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면 피예르는 비록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베주호프의 유일한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적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에다 용모는 뚱뚱하고 볼품이 없어서 사교계가 썩 환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위치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공평하게 둘 다 더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던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을 맞아 왕정 중심의 구체제 수호를 위해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하고 자신도 자기가 부관으로 모시는 쿠투조프 장군(실존 인물이다.)을 따라 전쟁에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사생아란 신분과 가진 것도 별로 없어서 상류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던 피예르는 임종을 맞이한 베주호프가 자신을 적자로 인정하고 엄청난 재산의 유일한 상속자로 만들어주면서 상류 사회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신이 바라던 것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운명은 돌연 그 표정을 바꾸고 먼저 주었던 기회가 마치 덫 안의 치즈이기라도 하듯 눈 앞에서 그들이 바라던 것이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보여 낭패를 경험토록 한다. 물론 피예르가 1권에서 그런 경험을 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안드레이 뿐이다. 그래서 1권의 진짜 주인공은 안드레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1권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 이후로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유역과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이는 전투가 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우스터리츠 전투'란 말에서 눈이 번쩍 뜨일 것 같다. 나폴레옹의 유럽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이니까 말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세력에 비해 정말 약했지만 오히려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적을 함정으로 유도하고 자신이 창조했고 특기이기도 한 대포를 적극 사용하는 전술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대파한다. 결국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승리함으로써 유럽에 자신의 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유럽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안드레이의 운명 또한 크게 바뀌게 되니 이런 겹침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평소 안드레이는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명예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혈육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자신이 곧 '명예의 한 순간'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운명이 변덕을 부려 명예는 커녕 나폴레옹의 포로가 된다.


 사실 포로가 된 게 그의 낭패가 되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낭패는 포화로 들판에 쓰러졌을 때 찾아왔다. 그 때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하늘이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명예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오직 하나만 보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려왔는데 실은 이토록 공허한 것이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워졌다고 느낀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있던 콩깍지가 벗겨진 것처럼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현혹에서 벗어났으니까. 과연 그랬는지, 안드레이는 자신이 인간적으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겼던 나폴레옹을 직접 눈으로 대면하고 그에게 칭찬까지 받아도 심드렁하게 대한다. 이런 안드레이의 모습은 황제를 보고 그 빛나는 모습에 그만 눈이 멀어버린 나머지 한없이 그 권위를 동경하게 되는 로스토프와 대비하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 로스토프의 모습은 각성을 하기 전의 안드레이와 같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다. 로스토프와 똑같이 안드레이 역시 황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를 만났으나 오히려 그가 본 것은 그만한 커다란 영광도 쉽게 가리지 못하는 허무였다.

 1권은 바로 이렇게, 속세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실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드라마였다.


 안드레이를 보니 어쩔 수 없이 톨스토이가 떠올랐다.

 안드레이에게 딸려있는 불콘스키는 사실 톨스토이의 어머니 쪽 가문의 이름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작가였다. 아버지는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공작의 딸이었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불콘스키 공작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안드레이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모습 중 많은 부분에 톨스토이의 자전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 역시 안드레이와 똑같이 장교로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5년이나.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되는 전쟁이 더없이 생생한 것도 이런 군대 경험 덕분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군대에서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년 내내.

 그 전까지 톨스토이는 글과 먼 생활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그는 내내 '전쟁과 평화'에서 나왔던 이폴리트 공작의 저택의 술 파티 못지 않게 방탕한 생활을 했다. 피예르가 거기서 한 위험한 내기도 어쩌면 톨스토이 자신 역시 했을 지 모른다. 그러다 성병에 걸렸고 병원 신세마저 졌다. 입원해 환자로 있으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쓰기는 톨스토이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톨스토이가 방탕한 생활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도 일기 쓰기가 가져온 변화가 아닐까 싶다. 글은, 특히나 일기란 자신을 계속해서 되돌아보게 만드니까 말이다. 톨스토이에게 글은 구도의 여정이었다. 군대에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글을 통해 비로소 시작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으려는 여정이 도달한 또 하나의 단계였을 것이다. 안드레이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마침내 세상이 가져다 준 현혹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엔 바로 이런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우러나 있다고 보인다.


 가장 정평이 난 톨스토이 전기를 쓴 영국 작가 앤드루 노먼 윌슨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내적 모순이 가득한 존재였으며 그 중 가장 격렬했던 모순은 '탕자와 성자' 사이의 모순이라고 했다. 그 모순은 '전쟁과 평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나니 탕자와 성자의 관계가 내겐 대립 보다 연속의 과정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탕자의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성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탕자'란, 방탕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 그대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유랑하는 존재로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에서 이탈한다는 뜻이다. 현실 질서와 일상의 궤도에서 탈주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탕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 '탕자'로 가장 잘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무엇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이 되어보는 것으로 여자에 대해 글을 쓰면 '여자-되기'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쓰면 '동물-되기'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쉽게 말해 글을 쓴다는 것은 바로 '타자-되기'의 체험인 것이다. 나를 떠나 남이 되는 것. 그것은 그대로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벗어남'이 본연의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안드레이가 거쳤던 과정 그대로 말이다.


 성자는 바로 그런 탕자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톨스토이의 삶 자체가 증거다. 그는 1878년에 영적인 각성을 하고 새로운 종교적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안나 카레리나'를 완성하고 난 뒤였다. 소설의 여정이 기반이 되어 성자의 삶이 구현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그런 '탕자의 여정'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경험토록 해 준다.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대에 거꾸로 거기에서 이탈하려는 흐름을 포착하고 두드러지게 만들면서 누구나 정답으로 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하고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의 삶에도 정답인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필 이 시점에 '전쟁과 평화'가 도래한 것은 어쩌면 운명의 손길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소설 속 나폴레옹 시대만큼이나 권력이든, 자본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시대이고 그 수렴이 그 바깥에 존재하는 이는 물론이고 안에 속한자마저 고통을 주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수렴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가 '탕자의 여정'을 통해 강조하는 산포(散布)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전쟁과 평화'이니만큼 '추천합니다' 같은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의 150년이 되는 과거의 작품('전쟁과 평화'는 1869년에 발표되었다.)이라 오늘날에 이런 소설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지는 분이 있을지도 몰라 굳이 말씀드려 본다면, 단언컨대 '전쟁과 평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에도, 아니 이런 현대이기에 더한층, 의미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작품인 것이다.


 특히나 이번 문학동네에서 나온 '전쟁과 평화'는 러시아어를 번역한 것이고 거기다 톨스토이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모스크바 예술문학출판사가 발간한 것을 원본으로 삼고 있는 데다 번역도 좋아서 더욱 읽어볼만하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더 추워서 한 번 탕자가 되어보려고 해도 그러기가 참 어렵다. 그럴 때는 '전쟁과 평화'가 딱이다. 육체는 비록 '방콕'을 하고 있더라도 내면 속에서 탕자의 여정을 거침없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니까 말이다. 부디 톨스토이가 선사하는 탕자의 여정을 깊이 체험해 보시기를. 어쩌면 안드레이가 그랬듯, 당신의 인생을 마구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을 만나볼 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미션 카드을 펼친 모습. 이렇게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체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느낌이 뭐랄까?, 어떤 역에 가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스탬프를 받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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