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스 수상한 서재 1
김수안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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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어로 '양쪽'을 뜻하는 '암보스'는 바디 스위치(body switch) 장르의 소설입니다. '암보스'란 말을 들으니 문득 헤밍웨이가 그렇게나 좋아했다는 하바나에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 생각나네요. 아무튼 '바디 스위치'란 사람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것을 다루는 장르로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아빠는 딸'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장르는 대부분 '아빠는 딸'처럼(혹은 미국에서 엄마와 딸의 영혼이 바뀌었던 '프리키 프라이데이'처럼) 서로 극심한 갈등을 겪는 두 사람이 몸이 뒤바뀐 것을 계기로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주로 얘기해 왔기에, 이 소설처럼 스릴러 소재로 삼은 적은 거의 없어서 일단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선해 보이는 시도가 독자들에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궁금했구요.


 초반에 나오는 하나의 허들만 독자가 잘 넘길 수 있으면 이 소설은 끝까지 꽤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허들이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기자 이한나와 은둔한 소설가 강유진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것이죠. 소설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장면도 보여주지 않아요. 아예 뒤바뀐 것에서 시작해 버리죠. 마치 독자들에게 그렇게 뒤바뀐 상황을 그냥 납득하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죠. 소설 끝까지 어떻게 가능했지는 나오지 않아요. 마지막 부분은 그것의 단서 같아 보이지만, 그조차 모호한 지라 딱 '이거다!'라고 말하긴 쉽지 않아요. 그러니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냥 소설이 보여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일단은 자신의 손을 소설에 허락하고 소설이 이끄는 쪽으로 무작정 따라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 한 걸음만 수락하면 소설이 준비한 게임이 아주 흥미롭게 당신 눈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내용이죠. 그 다음, 우리가 보는 건 강유진의 몸으로 병원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이한나의 모습입니다. 초반 전개는 '바디 스위치'에서 흔히 보는 대로예요. 결국 자신의 몸이 강유진과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한나는 자신의 몸이 되어 있는 강유진과 독대를 하게 되죠. 강유진은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다가, 이한나는 건물 방화 현장을 취재하다가 화염에 포위되자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이 너무 힘겨워 살려는 의지를 스스로 내려 놓다가 영혼이 교체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왜 하필 바뀐 대상자가 그들이었을까요? 거기에 대해 이한나는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내가 갈구한 것.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여유, 누구의 삶과도 무관한 글을 마음 편히 쓰는 것, 쫓기지 않는 삶.

 그게 전부 강유진에게 있었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 가족, 사회적 관계, 반듯한 외모, 건강.

 이건 고스란히 내게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답은 전율을 몰고 왔다. 완벽하게 대조된 삶이었다.(p. 102)


 모두 자신의 삶에서 달아나고 싶었기에, 그들은 현재 주어진 육체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딱 1년 만, 이한나는 강유진으로, 강유진은 이한나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걸 바란 건 강유진이었습니다. 사실 이한나는 강유진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예전 자살한 청소년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가 강유진의 소설 '글루미 선데이'에 영향 받아 자살했다고 기사를 쓴 바람에 강유진이 사회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1년 후에 강유진의 말대로 몸이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 때를 위해 서로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주자는 계약까지 한 채, 둘은 새로 거주하게 된 육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한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강유진이, 그러니까 이한나의 몸이 연쇄 살인마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당하여 양손이 잘린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살인이 실은 모방 범죄라는 걸 알아냅니다. 그런데 연쇄 살인 방식은 오직 경찰만 알고있을 뿐, 언론으론 전혀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과연 범인은 어떻게 그 정보들을 얻은 것일까요? 그래서 경찰은 죽은 이한나가 통칭 '812'라고 부르는 연쇄 살인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자 범인은 분명 이한나에게서 그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한나의 주변 인물들을 수사합니다. 그러다 최근 가장 많이 연락하고 돈까지 오고간 정황이 드러난 강유진(실은 이한나)가 주요 용의자로 수사망에 포착됩니다.


 졸지에 돌아갈 몸도 잃은데다, 그래서 이젠 너무나 싫어하게 된 강유진의 삶을 계속 살아야하는 것도 모자라 살인 용의자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걸 안 이한나는 강유진의 돈을 사용해 스스로 강유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과연 이한나는 자신에게 씌어진 모든 누명을 벗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도대체 강유진은 어쩌다 그렇게 죽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또 프롤로그에 나왔던 살인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소설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주면서 전혀 뜻밖의 진실 앞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표지는 이렇게 양면으로 펼쳐야 온전히 보이도록 되어 있는데, '바디 스위치'라는 걸 잘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소설에 대한 제 인상을 말하자면, 바디 스위치란 소재를 재치있게 사용한 지적 게임에 가까워 보입니다. 소설은 이한나와 탐정 역할을 맡는 형사의 시선이 번갈아가면서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간 순서가 다소 얽혀 있어 앞에 등장한 사건이 나중에 가서 커다란 문제라는 게 비로소 밝혀지는 등,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후반에 이르면 경찰이 사건 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작가가 꽤 논리적으로 공들여 설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그 정도라면 작가의 설명 없이 독자 스스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적 게임이란 말을 해봤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 그냥 이야기 하나만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도 그다지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아요. '바디 스위치'는 정체성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솔직히 욕심껏 철학이나 사회적인 의미들을 곁가지로 얼마든지 넣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오직 '육체 교환을 통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창출'이라는 이 하나에만 매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몰입감이 더 컸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제게는 경찰에 대한 부분과 조연급 인물들에 대한 부분이 너무 상세하게 나와 분량이 필요 이상(이 소설은 무려 500페이지 입니다.)으로 늘어난 느낌이었습니다. 장황 하다고 해야할지, 하여간 그것이 조금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군요. 뭐, 어디까지나 '조금'입니다. 재밌는 소설이라는 건 변함 없어요.


 오직 재미만 추구한다고 해서 아무런 주제의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소설에 대한 오해가 될 것 같아 꼭 얘기해야겠네요. 이 소설에도 주제가 있다고 말이죠. 이한나와 강유진이 육체 교환을 받아들이게 만든 이유가 바로 소설의 주제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가 전혀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당사자가 깨닫는 것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라는 거죠. 타인의 삶이란 그저 아주 멀리서 바라 본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랄까요.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바라다 보면, 높은 빌딩도 낮은 움막도 그저 2차원의 사각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거리가 동경과 부러움을 만드는 것이지, 그 누구의 삶이든 실제 안으로 들어가보면 내 삶만큼이나 모나고 아픈 것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아니, 당신도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오직 TV나 영화관 화면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사막을 정처없이 헤매이게 만드는 오아이스의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신기루에 대한 현혹이 내게도 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재미를 떠나 자신에게 경고를 준다는 의미로도 '암보스'를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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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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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라는, 참으로 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대만 작가 우밍이가 썼습니다. 우리나라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만에선 꽤 유명한 작가로 2018년엔 '자전거 도둑'으로 맨부머상 인터내셔널 후보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중화상창'이라는, 30년간 타이뻬이의 랜드마크로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가를 중심으로 10개의 단편을 옴니버스로 엮은 소설입니다. 단편들 모두 중화상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육교와 거기서 마술을 벌이던 마술사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죠. 회상의 색채가 많이 가미되었기에, 읽다보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느낌이 많이 납니다. 아니, 정말로 '대만판 응답하라 1988'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드라마만큼 밝지도, 사람들 사이의 정겨움은 없지만 이제 사라져 버린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이 소설엔 어린 시절 골목에 가득 퍼지던 김치 찌개나 된장 찌개 내음만큼이나 흠뻑 배여들어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고, 마술사가 나오는만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듭니다만 그래도 자신합니다. 한 번 잡게 되면 몰입해 읽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이야기란 것을.





 소설은 예전에 내 세계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그것이 마음에 남긴 여파 같은 것을 뒤쫓고 있습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중화상창'이 소설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죠. 등장인물들에게 과거란,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너머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는데 해까지 저물고 있어 이제 볼 수도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곳은 한 때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했던 곳. 흐르는 시간처럼 쉽게 망각 속에 던져줄 수 없습니다. 그건 곧 거기에 속했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들을 거기에 가 닿고자 합니다. 마치 중화상창의 상가 양쪽을 이어주던 육교처럼.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게 해 준 그 육교처럼 말이죠. 소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육교엔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로의 회귀를 마술처럼 가능케 하는 것. 그래서 마술사가 모든 단편마다 등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기억이란 때로 마술 같죠. 늘 잊고 살았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언제 잊고 있었냐는 듯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때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니까요. 마술이 일상을 장악하는 현실의 중력을 없애버리듯이, 기억은 망각에 붙들린 과거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묻습니다. 오늘의 내가 고통스러운 건, 과거의 나에게서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하고.


 그런 질문 또는 파문을 조용히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것도 조용히. 마치 천에 스며드는 염료와 같은 속도로.


 '새'의 단편엔 1979년이란 시간이 명시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을 대만의 역사와 연계시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은 대만이 중국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가 끊어진 때이거든요.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꺾이고 새장에 갇히는 시기인 것이죠. 소설 역시 새를 사랑해 계속 키웠으나 그 어떤 새도 오래 기를 수 없었던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단편마다 다른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는 그 단편에선 죽은 새를 살리는 마술을 보여주는데, 마술이 성공하기 위해선 누가 새에게 절대 손을 내밀어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죠. 단편의 주인공도 마술사를 믿어 죽은 새를 되살리는 마술을 하는데, 오빠가 결정적인 순간 손을 내밀어 실패하고 맙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손이 강조되는가? 그건 수교를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죠.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서로 손을 내밀어 하는 악수니까요.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내민 손이 그대로 새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에서 수교 단절말고 달리 뭘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대만 역사를 알고 있으면 여기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돌사자와 같은 소재도, 자살이나 방화 혹은 죽음으로 이르는 연애 같은 이야기도 과거 대만 역사가 남긴 것을 슬쩍 암시하거나 드러내고 있거든요. 일일이 다 밝히면 글도 너무 길어지고 직접 소설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재미가 반감되기에 '새'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유감이네요. 그러니까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비록 우리가 대만인도 아니고 중화상창에 대한 아무런 추억이 없더라도 이 소설을 재밌에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랬습니다. 꽤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밍이란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둘만큼.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네요. 소설의 주인공이 중화상창의 마술사에게서 잘 떠나지 못했듯, 저 역시 한동안 우밍이가 만나게 해 준 세계의 여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왠지 이 노래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가사에 흐르는 정조가 소설과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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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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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이게 참 대단해 보이는 것이 담고 있는 게 예수와 초대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약'이라고 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따분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소재인데다 분량도 무려 700 페이지에 가까운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 둘은 아무런 장애가 안된다. 그저 비탈길을 빠르게 굴러가는 둥근 돌마냥 이 뒤엔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끝까지 내처 읽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겐 '콧수염'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2014년 발표한 '왕국'이란 소설이다.


 '왕국'이란 제목에서부터 이 소설이 기독교에 대한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바울과 루카를 다룬다. 그것도 픽션의 형식이 아니라 르포 형식에 가깝게. 자전적인 경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어 어떻게 보며 에세이로도, 또 어떻게 보면 인문서로도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카멜레온. 그만큼 다양한 색채로 자유분방하게 진행되기에 몰입력이 강한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본편이 되는 4부와 하나의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뤄져 있다. 프롤로그에선 이 소설이 무엇을 주제로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믿음'이란 걸. 1부인 '위기'에선 자신이 어떻게 '믿음'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불현듯 자신에게 찾아온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와 그것을 계기로 열심을 다하게 된 신앙 생활과 엮어 말해준다. 2부는 제목처럼 '바오로(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다. 루카의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심정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는지 말하고 있다. 이왕 '루카'가 나온김에 나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




 신약에는 유명한 네 개의 복음이 있다. 모두 예수의 행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중 '누가복음'은 가장 이채로운 빛을 지닌다. 누가(소설에선 루카)는 생각해 보면 참 특이한 복음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복음 작가들과 달리 예수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직업이 의사로 지식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가 복음은 가장 유려하고 세련된 그리스 문체로 씌어졌다. 그는 다른 작가들처럼 예수의 그 어떤 이적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말씀도 귀로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예수를 풍문과 기록으로만 접했다.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이. 그 때만 해도 예수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변방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오늘날로 치면 뭐랄까 '구루' 같은 존재였다. 


루카는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표현대로 백인 엘리트가 어쩌다 동방에서 왔다는 불교를 접한 것과 같았다. 요즘 백인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흥미 그대로 그 역시 예수라는 존재에게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현장으로 가 살펴 볼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었다. 이 소설이 천착하고자 하는 '믿음'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루카에겐 믿음의 근거라는 게 없었다. 그건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스스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가 믿기로 결정했기에 형성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결실이 지금은 네 복음서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건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희망 혹은 절망인가?


 700 페이지를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 단 하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실체를 지향하는 마음의 움직임인가? 아니면 외부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혼자만의 결단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확신과 의심 사이를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게 숙명으로 주어진, 오히려 인간이 가진 내적 한계를 드러낼 뿐인 걸까? '왕국'은 믿음이 가진 이러한 다차원적인 면모를 엠마뉘엘 카레르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어 하나하나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신과 가장 닮은 '루카'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사용하면서...


 이렇게 보자면 1부에 가득 재현되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담은 결코 본편과 유리된 게 아니다. 그 경험 모두가 실은 믿음이 가진 이러저러한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오직 '필립 K 딕'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채용한 자식의 보모 이야기가 그렇다. 그녀는 보모가 되자마자 면접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작가를 당황케 만든다. 작가는 그녀에 대한 것을 그녀의 전 고용인인 미국 외교부 직원에 대해 알아보기까지 하면서 고용했는데, 보모는 완벽하다는 그들의 말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보는 것(이적)과 들은 것(복음)과 너무 다른 실체로 집약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카레르가 신앙에 대해 가지는 불안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 보모에게 집약된 의혹은 그대로 소설 후반 루카의 복음(4부)으로 이어진다.


 나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p. 389)


 최근 나는 카레르의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든 두 개의 뉴스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들었다. 하나는 세간에 '무안단물'로 유명한 이단인 '만민중앙교회'의 담임 목사가 여러 여신도를 성추행 하고 돈으로 입막음 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인 비무장 민간인을 저격하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과연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 되묻게 만들었다. 하나는 믿음(목사가 아니라 신도들을 말한다.)이 범죄를 방관하며 조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맹신 또는 광신 그리고 확신만큼 위험한 것도 또 없다는 것을 이 두 뉴스는 잘 보여준다. 믿음은 결코 이성의 제어에서 놓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믿음이란 확신을 지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식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다. 확신은 온전히 인식하고 판단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 없는 상황이 살아가는 데는 편안함을 주겠지만 역사나 주위에서 흔히 보듯 결국은 스스로 어리석게 만드는 길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카레르는 소설에서 예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상식을 전복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들었다는 비유가 그러하다. 서로 다른 노동 시간을 한 일꾼들에게 동일한 달란트를 주는 것이나 '돌아온 탕자'(도덕적으로 살아온 99명 보다 비도덕적으로 살아온 1명의 영혼은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의 이야기는 예수의 왕국이 세상의 꼴지가 거기선 1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합리와 가치와 전혀 다르게 운영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전복이 믿음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왕국'의 후반부는 그것에 대해 짚고 있는 것 같다. 무턱대고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속에서 이성으로 열심히 헤아리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믿음. 그러면서도 그렇게 나온 믿음을 오로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기고 또 다른 길이 열리면 또 언제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리로 훌쩍 나아갈 수 있는 믿음. '왕국' 전체에 오롯이 새겨진 카레르 자신의 지적 탐구는 그러한 믿음의 모습을 물씬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은 레닌과 똑같이 말로만 존재했던 것을 세계에 실재로 구현한 자였다. 왜 지젝이 레닌을, 알렝 바디우가 바울에 천착하는지 알 듯 하다. 그들의 행로는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념의 구현이 그들의 말만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울과 레닌이 꿈꾸었던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바울과 레닌의 시대에서 그들 역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세계를 만들었다. 이는 루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믿음은 때로 기적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는 늘 물음의 상태로 남는다. 바울이 자신의 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믿었던 신자들이 로마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레르도 소설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아낌없이 나누었고 존중과 배려가 삶의 기본 태도로 배여 있었다.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를 생각한다면 이건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을 믿음이 만든 것이다. 삶이 뒷받침된 믿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믿음은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일 때가 많다. 돈 혹은 권력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믿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내 찌푸린 눈쌀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때로 범죄와 학살을 태연히 저지르는 괴물까지 양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이 인류에게 점점 장애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은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를 매섭게 묻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논란에 집중하기 보다는 배후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작품이 가진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며 당신의 대답 또한 찾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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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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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미 도미히코. 참 독특한 작풍을 보여주는 소설가죠. 현실과 환상, 일상과 비일상을 자연스럽게 뒤섞는 그의 재능 때문인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참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온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비롯하여 뒤이어 나온 '유정천 가족' 그리고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와 '펭귄 하이웨이'까지 무려 네 작품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거든요.('펭귄 하이웨이'는 개봉 예정입니다만.) 분명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하는 그의 이야기가 영감의 텃밭을 만들어준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라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러한 작가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인 것 같습니다.


 한 남자(이름은 나오지 않고 내내 '선배'로만 불립니다.)가 대학 동아리 선배 결혼식 뒷풀이 자리에서 거기에 참석한 '검은 머리 아가씨'(소설은 여주인공인데 남자처럼 역시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를 우연히 보고는 첫 눈에 반해 그녀를 뒤쫓아 교토(작가가 쓴 모든 소설에 배경이 되는 도시입니다.)를 밤새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렇게 '선배'는 '검은 머리 아가씨'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게 그와 비슷하죠. 한 편, '검은 머리 아가씨' 또한 이제껏 알았던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을 만나게 됩니다. 럼주에 빠져 있는 그녀는 좋은 술을 찾아 밤의 거리로 나섰다가 세상의 과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야말로 '환상 속 세계'를.




 밤이라는 것이 몽환의 시간이기에, 거기다 그 몽환을 더욱 부추기는 술이 있기 때문에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가 히구치와 하누키(이 두 인물은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에도 등장합니다.)를 만나고 '가짜 전기 부랑'이라는 환상의 술을 찾아 '이백'(당나라 시인인 그 이백일까요? 술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긴 한데.)이 모는 3층 전차에서 '술 마시기 시합'을 벌이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전 설명 같은 게 하나도 없더라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많이 따지는 독자들은 이러한 작가의 전개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달테지만 작가는 시침을 뚝 때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진짜 이런 장소와 존재들이 있을지도 모르잖느냐'라고 말하듯 잘도 현실과 환상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인 섬 문화의 성격 상 애미니즘적인 전통이 우리나라보다 강하고 '교토'라는 도시 또한 다른 데보다 전통적인 게 많이 살아있는 장소이기에(작가가 이 소설에서 일부러 옛날 투의 문장을 쓰는 것도 이 '교토'라는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게 아닐지) 작가가 소설에 이백을 비롯하여 '헌책 신'이라든지 하는 기이한 존재를 마구 등장시켜도 독자들이 별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리라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소설엔 5월에서 12월까지, 사계절에 얽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있으며 구성은 '선배'와 '검은 머리 아가씨'가 차례를 번갈아가며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누군가를 뒤쫓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는 점에서 '검은 머리 아가씨'를 뒤쫓는 '선배'의 모습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이백'이 모는 커다란 3층 전차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하울'이 2004년에 나왔고 이 소설이 2006년에 나왔으니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아가씨'를 뒤쫓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하진 않았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던, 곤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과도 비슷한 설정이군요.


 이제야 왜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이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만들어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인물과 이야기가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 딱이거든요. 소설이 그 어떤 고정틀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전개되는데 알고 보면 애니메이션이야말로 그러한 비현실적인 환상성을 한껏 표현 가능한 미디어이니까요. 그만큼 이 소설엔 '식상함'이란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상식과 현실이 가진 중력은 모조리 휘발되고 마치 소설에 나왔던 회오리 바람에 휘말린 잉어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보여준 선배의 활공처럼 상상력이 달아준 날개로 모든 구획과 경계를 뛰어넘어버리니까요.


 모리미 도미히코가 능청맞을 수 있는 것은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를 구속하는 현실과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환상은 주먹을 쥘 때 엄지 손가락을 밖으로 빼느냐, 안으로 넣느냐의 별거 아닌 차이일 뿐이라는 믿음 말이죠. 아마도 그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 처음부터 '친구 펀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성인 군자는 그야말로 한 줌, 남은 건 썩은 못된 놈이든가 멍청이든가, 아니면 썩은 못된 놈이면서 멍청이야. 그러니까 때로는 그러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철권을 휘두르게 되지. 그럴 때는 내가 가르쳐 준 친구 펀치를 써. 굳게 쥔 주먹에는 사랑이 없지만 친구 펀치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이 가득 찬 친구 펀치를 구사하며 우아하게 살아갈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이 열린단다.(p. 9)


 저는 이 '조화'라는 말에 주목하게 되네요. '삶은 현실이라는 하나에만 주목해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 이면에 있는, 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환상도 껴안을 수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며 작가가 방점을 찍는 것 같아서. 그런 믿음이랄까, 마음이랄까 그런 것이 향신료처럼 듬뿍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미각까지 높여주지요.


 사실 전 이 작가를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애니메이션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2010년에 '노이타미나'로 편성되어 방영한 애니메이션인데 높은 작품성을 인정바다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대상까지 수상한 바 있습니다.(그 애니메이션의 감독이 이번에 개봉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감독했습니다.워낙 작품이 좋다보니 당연히 원작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만나게 된 것이죠. 이번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어보니 이 소설이 그의 작품 세계의 원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집니다. 밤이 가진 몽환의 동경, 환상의 포용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는 현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들이 굳건히 배인 그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거의 회색빛에 가까운 제 대학 생활이 절로 후회되면서 왠지 앞으로의 시간만은 절대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게 되네요.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또 내일도 그대로일 것 같아서 심드렁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면 어떨까요? 환상의 향과 맛으로 가득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한 잔을 살짝 음미해 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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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 상
오타 아이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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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너' 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0년부터 방영을 시작하여 현재 16번째 시즌으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형사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등극한 작품이죠.




 이번에 나온 '범죄자'는 드라마 '파트너'의 각본가(8번째 시즌부터 참여)인 오타 아이가 2012년에 발표한 데뷔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 오른 바 있었던 '잊혀진 소년'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들이 같아요. '잊혀진 소년'에서 인상 깊었던 활약을 보여주었던 소마 형사와 청년 슈지 그리고 전직 방송국 PD였던 야리미즈가 두 작품 모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저처럼 '잊혀진 소년'을 읽고 '범죄자'를 읽는다면 그들의 과거를 읽게 되는 셈입니다. '잊혀진 소년'에서 찰떡 같은 팀 플레이를 보여주던 그들이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나를 바로 '범죄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직 '잊혀진 소년'을 읽지 않으셨다면 '범죄자'부터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잊혀진 소년'을 읽으신 분들도 마찬가지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도원결의'를 하게 되는 계기인 사건이 무척이나 흥미롭거든요.


 '범죄자'는 시작이 아주 강렬합니다.



 슈지가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아렌이란 여성에게서 메일 하나를 받습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진다이지 역 남쪽 출구에 있는 역 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은 다짜고짜 메일 주소를 달라고 해서 준 것이 인연의 전부였기에 열 일곱살 때부터 건설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슈지는 근무까지 빼먹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갑니다. 평일 오후의 한산했던 역 앞 광장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상인 풍모의 남자와 노부인 그리고 주부로 보이는 여자와 자신보다 뒤늦게 도착한 여대생까지 합해 다섯 뿐. 그런데 여대생이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다스베이더와 함께 무차별 칼부림 학살이 시작됩니다. 눈 앞에서 다섯 사람이 순식간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을 본 슈지는 그 자신도 살인마에게 희생당할 뻔 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한 편, 현장으로 출동한 소마 형사는 원래 무차별 칼부림 범죄는 동기도 없고 용의자 특정도 어렵기 때문에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것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의 신병이 확보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놀랍니다. 범인은 근처 공용 화장실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다량의 헤로인을 투약하여 이미 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변엔 학살에 썼던 흉기며 복장이 있어 그가 범인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고 결국 약에 취해 그토록 엄청난 학살을 벌인 것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살아남아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는 슈지에게 낯선 남자가 나타나 이런 말을 함으로써 사건은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맞습니다. 슈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자기 얼굴을 알아보았고 달려와서는 다른 네 사람은 무사한지 물었고 죽었다고 대답하자 절망에 빠진 남자가 쥐어짜낸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 달아나.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p. 57)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p. 58)


 남자가 슈지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는 것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슈지는 자신이 당한 사건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뭔가 다른 흑막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서 그의 말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한동안 기거 하기로 합니다. 소마 역시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범인이 정말로 약에 취해 무차별 살인을 하기로 작정했다면 겨우 다섯 밖에 없는 한적한 역 광장이 아니라 사람으로 북적한 거리를 고르는 게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 고발로 조직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소마의 의혹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결국 소마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쫓게 됩니다. 그러다 슈지가 며칠이 지나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집에 들렀다가 암살자에게 죽을 뻔하게 된 걸 구해주면서 소마는 역시 자신이 의심했던 대로 사건엔 다른 진실이 있으며 그것이 온전히 밝혀질 때까지 슈지를 자신의 친구인 야리미즈의 집에서 보호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마와 슈지 그리고 야리미즈가 한데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슈지가 자신도 모르게 연루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아무런 접점도 없고 죄를 짓지도 않은 다섯 명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은 것일까요? 241 페이지 분량의 티저북이지만 그 내막을 짐작케 할 단서는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한 방송국의 오래도록 장수한 다큐 프로그램을 폐지시켜 버린 '멜트페이스 증후군'이 그 중 하나죠. 얼굴이 녹아내린다니,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이 증후군은 '원인 불명의 고열이 나다가 안구를 포함한 안면 조직이 차례차례 괴사하는 무서운 병으로, 괴사 조직을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심각한 손상이 남는다.(p. 169)'고 합니다. 이토록 끔찍한 증후군은 특히 갓난 아이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데 그것이 특정한 시기의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이 감염으로 마구 희생되었다고 하니까 얼른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이대 목동 병원에서 일어난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이 떠오르는군요. 주사제를 무려 25년 동안 나눠쓰는 등 환자 위생을 위한 비용을 아끼려는 병원의 탐욕과 그만큼 환자 위생에 관심이 없었던 의료진의 무책임이 불러온 참사였죠.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이것에서 어떤 분들은 저처럼 소설 '범죄자'가 1960년대 초에 독일에서 일어난 유명한 약물 사건 떠올리지도 모르겠어요. 캐나다의 영화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감을 받아 '스캐너스' 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콘테르간' 말이죠. 



 산모의 입덧을 완화시켜준다고 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꽤나 팔린 이 약은 탈리도마이드 성분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한 산모들이 사지가 아예 없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기형아를 낳게 만들었죠. 그 수가 전 세계적으로 1만 2천명 이상이라 현대 의학이 가져온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 사건이 일어났던만큼 오타 아이가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국회의원이자 정치 실세인 이소베 미쓰타다가 사사키 구니오란 인물로 인해 위기를 느끼고 있고 그의 수행비서이자 최측근인 핫토리 역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다 그것이 이소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제약 회사 때문인 걸 보면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파트너' 각본가가 쓴 소설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트너'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잇속만 밝히는 사회 권력층을 비판하는 면모가 강하게 나타났던 작품이었으니까요. 일본 미스터리는 흔히 미스터리 풀이에만 집중하는 '본격파'와 사회 비판을 위해 미스터리를 빌려오는 '사회파'로 나뉘는데, '범죄자'는 티저북만 읽고 이렇게 결론내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서 '아마도'란 단서를 굳이 달고 말한다면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잊혀진 소년'은 온전히 '사회파' 쪽이었기에 이런 심증이 더욱 굳어지는군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읽고계신 분들은 티저북에 꽤 많은 정보가 나온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실 것 같네요. 그러나 실은 '범죄자'가 두 권으로, 그것도 1권은 656페이지이고 2권은 536페이지인 방대한 분량이라 티저북의 내용은 고작 20%에 불과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80%에서 이 이야기가 또 어떻게 뒤집어질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그건 그렇고 20%만으로도 이렇게 흥미를 돋구는데, 80%는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쟁여져 있을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네요. 


 물론 무차별 학살 사건의 진실과 희생자들이 가진 접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기에 더하여 과거에 자신의 실적을 위해 친한 친구를 비극에 빠뜨렸던 경찰관을 만나 경찰에 대해 불신을 가득 가지고 있는 슈지가 소마에게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여는 지도 궁금하고 '잊혀진 소년'에 나왔던 것처럼 야리미즈와 슈지가 어쩌다 합심하여 흥신소를 열게 되는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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