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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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우! 결말에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도진기 작가의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읽고 난 뒤 든 첫 소감입니다.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 있군요.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도진기 작가의 초기작입니다. '붉은 집 살인사건'에 이은 두 번째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그것이 이번에 새로이 '황금가지'에서 나왔네요. 눈길을 확 잡아끄는 노란 표지로.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제목이기도 한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잃어버린 여인'을 뜻합니다. 살해된 정유미를 뜻하는 것일까요? 표지의 열쇠는 사라진 104호의 현관 열쇠입니다. 그 곳은 정유미와 함께 발견된 시신의 남자가 거주하는 곳이죠. 아마도 범행 방법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라 표지에 나온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가지 시리즈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활약하는 시리즈고, 다른 하나는 해결사 '진구'가 활약하는 시리즈죠. 그동안 진구 시리즈는 제법 많이 만나봤는데, '고진' 시리즈는 처음입니다. 아, '진구' 시리즈에서 그가 한 번 까메오처럼 출연한 것을 본 적도 있군요. '가족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말이죠. 어쨌든 그렇게 '라 트라비아타'로 고진 시리즈와 첫 대면을 해봤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진구에겐 미안하지만 '진구' 시리즈 보다 더 좋았어요. 아마도 제가 '본격파'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순도 100%의 본격 미스터리이니까요.


 아, 본격이라는 말은 순수하게 추리로 트릭을 풀고 범인 찾기에만 집중하는 소설을 말합니다. 그동안 도진기 작가의 본격 미스터리를 안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모두 단편이었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처럼 장편으로 만나본 것은 처음인데, 정말 잘 썼더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잔뜩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은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등장한 이유현이 법정에서 커다란 실망감을 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초구의 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아 재판에 넘겼는데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것이죠. 그 방법이 실로 절묘했기에 이유현은 그 변호사가 누군지 능히 짐작합니다. 바로 '붉은 집 살인 사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것을 깨달은 이유현이 고진에게 전화로 연락하면서 이야기는 이제 독자를 그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피해자는 정유미라는 25세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인 204호 거실에서 목에 송곳이 박혀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시신 한 구가 더 있습니다. 남자로, 그는 나중에 바로 아래층인 104호에 사는 사람이고 살해된 정유미를 예전부터 스토킹해 오던 인물로 밝혀집니다. 이 사건을 경찰이 발견하게 된 것은 정유미의 애인 김형빈의 신고였습니다. 김형빈은 정유미와 통화하다 '강도다'라는 말을 듣고 얼른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이제 서초경찰서 강력반 팀장 이유현의 수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 난해하기 그지 없습니다. 정유미의 현관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도어락이 걸려 있는데, 그 비밀번호는 정유미와 애인 김형빈만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집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할머니도 한 분 드나들고 계셨는데 정유미는 자신에게도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녀가 먼저 열어줘서 들어갔다고 진술합니다. 살해된 현장엔 그 어디도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확인된 김형빈을 용의자에서 제외하면 침입 경로는 오직 베란다 하나 뿐입니다. 이것은 아파트 입구 CCTV를 확인한 결과 다른 외부 침입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기에 더욱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혹시 동기를 가진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여 정유미 주변 인물을 샅샅이 탐문했지만 너무나 깨끗하여 결국 동기가 아니라 범행 방법에 치중하여 베란다 침입이 가능한 물품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자를 체포합니다. 그런데 그 자가 고진의 조력으로 풀려난 것입니다. 따지듯 자신을 찾아온 이유현에게 고진은 범인이 정말 흥미로운 존재라며 자신의 추리를 들려줍니다. 이 때부터 고진의 추리쇼가 3회에 걸쳐서 상연됩니다. 한 번에 그 세 가지를 다 말하는게 아니고 하나씩 풀어놓는데 그 하나만 듣고 이유현이 수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히고 그러면 고진이 두 번째 가능성을 들려주고 또 막히면 세 번째 가능성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마치 3막으로 된 추리극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고진의 추리 정말 탁월합니다. 그 방법에 나름 놀랐습니다. 이 사건엔 두 가지 트릭이 있습니다. 하나는 '심리트릭'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차 트릭'입니다. 이 트릭을 하나하나 논파해 내는 고진의 추리가 정말 절묘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려운 트릭을 정교한 추리를 통해 아귀가 딱딱 맞게 해결하는 것을 보는 쾌감 때문이죠. '라 트라비아타'는 그런 쾌감을 충분히 선사합니다. 소설에서 고진은 이유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의 기술 앞에 범죄의 설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고들 말하지. 지문, DNA, 혈흔 분석 같은 거야 물론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은 사건 생기면 딱 세 가지만 보면 되잖아? 휴대폰, 이메일, 그리고 통장 계좌. 이거만 뒤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 나와.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 소설의 트릭은 대부분 현대에는 성립이 안 돼. 하지만 말이야. 난 좀 생각이 달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트릭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진 거야. 수사 기관을 속일 수단도, 기발한 범죄의 여지도 얼마든지 더 생겨난 거야. 그런 내 이론을 범인이 그대로 실현해 보여 줬어. 정말 재미있지 않나? 하하하."(p. 160 ~ 161)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그야말로 그런 고진의 생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놀라운 반전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이것이 또 전혀 뜬금 없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전에 단서가 다 제시되어 있으며 꼼꼼하게 읽고 잘 추리했다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한 번 도전해 보시죠. 당신은 과연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런 점까지 더해 도진기 작가가 왜 초기에 발표한 두 작품만으로도 명성을 얻었는지 잘 알겠더군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면 한 번 꼭 읽어보세요. 분명 어릴 때 셜록 홈즈나 엘큘 포와로의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정작 도진기 작가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고 미스터리계에 입문했다고 하지만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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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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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브 콘스탄틴의 '마지막 패리시 부인'을 읽었습니다.

 리브 콘스탄틴은 원래 필명으로 실은 린 콘스탄틴과 발레리 콘스탄틴 자매가 함께 썼다고 하네요. 얼른 사촌이 함께 썼던 '엘러리 퀸'이 생각납니다. 이야기가 워낙 재밌고 구성도 탄탄하기에 기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하네요. 하지만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와 비슷한 몇 작품이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한 번 열거해 볼까요? 아이라 레빈의 '죽기 전의 키스', 아가사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많은 리플리씨' 등. 그 중 가장 많은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아이라 레빈의 것입니다. 레빈이 23세 때 썼던 이 작품은 '버드 콜리스'란 남자가 주인공 입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야심은 너무 큰 이 남자는 소시오패스이기도 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대학 때 우연히 만나 도로시란 여자가 구리 재벌로 유명한 사업가 킹쉽의 딸인 것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쪽으로 머리 회전이 빠른 그는 계획대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제 결혼한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도로시가 임신을 하고 맙니다. 혼전 임신은 엄격한 청교도인 킹쉽이 결코 용서하지 않아서 도로시와 결혼해도 원하는 돈을 전혀 얻지 못하리라 생각한 콜리스는 도로시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둘째 언니 엘렌을 유혹할 계획을 세우죠. 이처럼 콜리스에겐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신경쓰는 야수일 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는 자신을 포식자로 여기니 야수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주연 중 하나인 '앰버'도 이와 같습니다. 주연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이 각 부마다 화자를 달리하여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소설의 주연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부의 화자, '앰버'이고 다른 화자는 2부의 화자, '대프니'입니다. 3부는 1인칭 주관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던 1부, 2부와 다르게 3인칭 객관적인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3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네요. 아무튼 앰버와 대프니는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입니다. 앰버는 가진 것이 오로지 몸밖에 없는 존재인 반면, 대프니는 아름다운 미모에  엄청난 재산, 거기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편을 비롯 귀여운 두 딸까지,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존재이죠. 앰버에게 있어 대프니는 거의 아무리 손을 뻗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하지만 앰버는 그 별에 닿고자 합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은 대프니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여기니까요. 앰버는 그 자리로 가기 위해 일단 대프니부터 공략하기로 합니다. 콜리스가 도로시부터 공략했던 것처럼 말이죠.



 대프니는 예전에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 때 겪은 상실감이 하도 커서 지금도 여동생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지금의 남편 잭슨과 결혼하게 된 것 결정적인 계기도 여동생과의 이별 때문이었죠. 앰버는 바로 그런 대프니의 상실감을 공략해 들어갑니다. 자기에게도 대프니와 똑같이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시작으로 앰버는 대프니의 마음을 차례 차례 얻어갑니다. 사전에 대프니의 취향이나 가치관등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종종 방해되는 인물도 나타나지만 그 때마다 술수와 거짓말로 능수능란하게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잭슨과 단 둘이 있게 될 기회를 얻습니다. 1부는 그런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앰버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더욱 읽는 이의 기분을 쫄깃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욱 쫄깃하게 만드는 전개가 펼쳐집니다. 바로 2부, '대프니' 입니다. 대프니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반전들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게 유감이네요.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이렇게만 말하겠습니다. 끝까지 계속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고. 거기다 결말 또한 시원, 상쾌하다고. 그 통쾌함 때문에 저는 이 글의 제목을 하마터면 '악인이여, 지옥행 특급 열차를 타라!'라고 적을 뻔 했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결핍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앰버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는 대프니와 그녀의 남편 잭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만족에는 절대 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오로지 상대 평가 입니다. 자신의 만족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비교해 우월해야만 이뤄지니까요. 아무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더라도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 만족감이 덜하거나 사라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정되기에 인간은 늘 결핍을 느낍니다. 세상엔 자기보다 잘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즐비하기 마련이니까요. '엄친아'란 말이 존재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듯 질투도 늘 그림자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결핍과 질투는 사이좋은 연인처럼 꼭 붙어 다니는 한 쌍과도 같습니다. 사실 결핍이 없으면 질투할 것도 없겠죠. 때로 이것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결핍과 질투 또한 양날의 검이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죠. 현재의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르고 가진 것이 많아져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지존무상'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말이죠. 아니, 그런 자리에 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우리는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다."


이처럼 결핍과 질투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죠.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도 막상 갖고 보면 얼마안가 그 뿌듯함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살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요. 갈증의 끝에 허망함이 있다는 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핍과 질투의 끝없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을 당신도 가지고 있다면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인물 하나가 그것을 넌지시 알려주니까요.


 각설하고, 이 자매 작가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이곳저곳에 미리 던져 놓았어요.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길에 조금씩 빵조각을 흘린 것처럼 말이죠. 일단 제목의 '패리시 부인'에서 '패리시'가 그러합니다. 제목의 패리시는 철자가 'PARRISH'이지만 이와 같은 발음이 나는 'PERIS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이 참 재밌습니다. '몹시 괴롭히다', '멸망하다'란 뜻이거든요. 분명 이 'PERISH'란 단어 때문에 '패리시'란 이름을 썼을 것 같아요. 소설을 읽어보면 '패리시'가 단순한 이름만이 아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주연의 이름 또한 재밌습니다. '앰버'는 얼른  'AMBITIOUS'의 야심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선 아이가 유괴 되었을 때 전국적으로 경보를 내는데, 그것을 바로 '앰버 경고'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경고'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앰버'란 이름은 그 존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대프니'란 이름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이 영향 받았을 작품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는 '레베카'란 소설 말입니다. 그 소설의 작가가 바로 '대프니 듀 모리에'였죠. 아마도 소설 속 '대프니'란 이름은 바로 그 작가 이름을 따온 것 같습니다. 소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주인공이 생각했던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거든요. 그처럼 '대프니 패리시'도 앰버가 생각하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이런 것을 보노라면 이 자매가 소설의 디테일을 무척 공들여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재미를 더욱 돋궈주는군요. 앞에서 열거한 '죽기 전의 키스', '끝없는 밤' 그리고 '재능 많은 리플리씨'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만나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어쩌면 자신의 결핍과 질투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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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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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상상, 한 번 해 봅니다.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옥을 정상적인 세계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옥에서 갑자기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까요? 과거를 모조리 잊고 새로운 삶을 마냥 껴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새롭게 가지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자신이라 여기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정체성을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성별이 그러하죠. 국적이나 지역,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살아가면서 형성하는 정체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저런 지위를 갖거나 경험을 하게 마련이고 거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가치관과 신념도 갖게 됩니다. 이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지요.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된 것이지만 살면서 만드는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체성이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타고난 정체성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일까요? 혹시 살면서 이런 의문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그러셨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미국 작가 카렌 디온느의 소설, '마쉬왕의 딸'은 흥미롭게도 이런 질문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으니까요.




 먼저 제목인 '마쉬왕의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쉬왕의 딸'은 서양의 유명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합니다. 이집트 공주가 하루는 백조로 변하는 깃털 옷을 입고 늪지대에 놀러왔다가 그만 늪을 다스리는 마쉬왕에게 납치됩니다. 그 후, 공주가 늪 아래로 끌려간 자리에 꽃봉오리 하나가 자라납니다. 그 꽃봉오리 아래엔 여자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마쉬왕의 딸'인 것이죠. 이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것을 본 황새는 근처 바이킹 왕비가 자식이 없어 슬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갖다 줍니다. 아이는 바이킹 왕 부부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비치는 낮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인데, 밤만되면 개구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운 사람의 모습일 때는 성격이 그야말로 악하며 난폭하기 그지 없고 개구리일 때는 한없이 온순하고 착한 것입니다. 마치 외면과 내면이 작정하고 서로 반대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운 외모는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외모는 사랑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이 아이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 과정과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화 '마쉬왕의 딸'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마쉬왕의 딸'은 한 마디로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입니다.


 

삽화는 마쉬왕에게 끌려가는 이집트 공주를 그린 것입니다.


 카렌 디온느의 소설 주인공 헬레나 역시 그야말로 '마쉬왕의 딸'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십대 때 아버지에게 늪지대로 유괴되었고 자신은 그 유괴범 아버지와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녀는 12살이 되어 거기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늪지대의 오두막을 세상의 전부라 여겼습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에게 인정받으려 애썼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이 그에겐 진리였고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뭐든지 의심하지 않고 쏙쏙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사냥하는 법과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 있어 그 세계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물론 바깥 사람들에겐 오로지 비정상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다 동화 속 '신부'와 같은 자가 나타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어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비정상이라 말하는 세계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입혀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듯 내재된 정체성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문득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늪지대의 삶이 그립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현재 헬레나는 결혼하여 두 딸까지 있는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쉬 지워지진 않습니다. 때로 그리움이 사무치면 2 주일 정도 야생으로 홀로 가서 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헬레나는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새로 입게된 정체성에 완전히 동화하지도 못한 채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경계선 상의 존재입니다. 동화 속 '마쉬왕'의 딸과 같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외면과 그 외면과 상반되는 내면 속에서 커다란 갈등을 겪는 동화 속 '마쉬왕의 딸' 그대로 헬레나 역시 어디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요.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가 닥쳐옵니다. 자신이 탈출할 때 체포된 아버지가 간수를 죽이고 감옥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다가온다는 것은 과거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조여오는 과거 앞에서 헬레나는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마쉬왕의 딸'은 이런 심리적인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된 드라마입니다. 그 생생함의 정도를 아버지와 같이 살던 과거와 홀로 삶을 꾸리고 있는 현재로 이야기를 서로 교차하며 전개시키는 것으로 한껏 높이고 있죠. 상이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이란 테마로 읽으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란 얼른 미국의 트럼프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타고난 정체성을 한없이 강조하는 시대이니까요. 타고난 정체성에 관대했던 유럽 연합조차 시리아 난민 사태를 맞아 다시금 타고난 정체성에 집착하며 영국 민중은 아예 '브렉시트'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혈통과 국적 그리고 성별의 원본을 중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자꾸만 뚜렷해지는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타고난 '원본'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라는 화두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타고난 정체성'에서 쉽게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있게 들려왔구요. 오늘의 시대 흐름과 관련하여 그저 스릴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특히나 페미니즘과 관련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헬레나의 과거 세계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 전부를 오로지 아버지 혼자 결정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일은 사실 신이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그 아버지란 지금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처럼 남성중심문화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이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실현된다는 것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으로 읽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이 남성중심문화가 마녀로 치부하여 배제하려 했던 모습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네요.


 생각해 보면, 동화 '마쉬왕의 딸'은 무엇보다 같은 작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와 대비되는 작품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쉬왕의 딸'은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실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같은 작가가 쓴 이 두 동화는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1843년, 그러니까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이 전체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한창 민족주의를 형성해 가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은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미운 오리 새끼'는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한 것이지요. '마쉬왕의 딸은 그보다 15년 후인 185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아마도 '마쉬왕의 딸'이 '미운 오리 새끼'와 완전 다른 얘기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바로 1848년에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잘 분석했듯이 계급 투쟁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국가 내부의 문제가 그로 인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2월 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한 나라 안에도 계급이란 분열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따라 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쉬왕의 딸'은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육체가 상이한 정체성으로 분열되어 있고 각 자의 모습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후자의 외면과 내면의 상반은 2월 혁명 이후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이데올로기'를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데올로기는 보이는 외면과 그 안에 깃든 내면이 실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것이었죠.


 

 이 소설은 그러한 '마쉬왕의 딸'이 가진 의미에 집중하고 그것을 스릴러로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텍스트 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런 역량이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또 발현될 지 기대 되네요. 차기작을 얼른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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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7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헤르메스님의 리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잘 쓰셔서 내가 직접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 분 글을 보는 쪽이 훨씬 남는 게 많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거예요......

양철나무꾼 2017-12-08 18: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로 어찌표현해야 좋을지 몰랐거든요.
이런 글을 쓰는 분도, 이런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도 완전 멋지십니다~^^

ICE-9 2017-12-09 19:51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나 과분한 칭찬의 댓글을 받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syo님, 양철나무꾼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 주말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늘 한국은행이 무려 6년 반만에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리뷰가 작성된 시점이 금리 인상한 날이었습니다^^;)

 이는 양적 완화가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양적 완화'란 중앙 은행이 금리 인하로도 경기 부양이 안 될때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자본의 유동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금리 인상이란 곧 양적 완화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가 거듭될수록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제동 조치를 요구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이 그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낙수 효과'요, 다른 하나는 '양적 완화'였다. 낙수 효과는 경제 정책이 오로지 대기업과 가진 자들 위주로 펼쳐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벌면 넘쳐 흐른 물처럼 아래 사람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는 주로 불경기일 때 돈을 많이 풀면 모두의 주머니로 고루 들어가 쓸 돈이 생겨나니 경기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돈을 마구 풀어 집값과 전셋값이 해마다 올라 주거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판인데 물가마저 도무지 내려갈 줄 모르니 실질 임금이 자꾸만 하락하는 것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누그려뜨리는 데 일조했다.

 

 낙수 효과는 거짓이었다는 게 애시당초 판명났지만, '양적완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조차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저널리스트이자 현재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특별 자문이기도 한 스티븐 D 킹(호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과는 혼동하지 말자.)이 집필한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양적 완화라는 프로그램은 주식이나 국채, 회사채 등의 금융 자산 가치를 높이고 세계의 자산 귀족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p. 253)'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을 그동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국의 통화 정책과 국제 자본 흐름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말하기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양적 완화'를 거두겠다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한 오늘의 금리 인상이 더욱 반가웠고 이 글 첫머리에 언급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으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런 통찰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감사부터  먼저 표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화의 종말'은 과연 어떤 책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탈퇴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창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붕괴의 현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 또 이런 추세는 정녕 바람직한지를 과거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시사적인 문제들과 돌아가고 있는 경제 상황에 유독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세계 문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동기와 분야로 펼쳐지기에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움직임을 간파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데다 워낙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이 활발하고 무작위적이라 지극히 복잡하여 여기서도 내게 유용한 정보들을 찾아 취합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마냥 엉킨 실타래와 같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헤아려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문학적 통찰'의 요지 또한 그것이 아니었던가? 미래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그렇다.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워낙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이 한정된 지면으로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본적 태도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어떤 이념이나 상황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쉽게 풀이해 말하자면,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눈앞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조사하여 그것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된 과정이나 아래 놓여 있는 동기도 살펴 이면에 감춰진 내막도 헤아리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내가 낙수효과나 양적완화를 말했던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 둘은 이면에 깃든 내막을 짚어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쉽사리 속아 넘어간 대표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말 저자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그러므로 제목인 '세계화의 종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세계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거의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세계화'가 이제 쓸모없는 개념이 되었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더욱 주력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처럼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된 세계화 관념을 우리의 뇌리에서 불식(拂拭)하고 보다 올바른 세계화의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각 교정이다. 그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취하면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원하는 사람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무작정 반대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화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오직 한 쪽만 보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티븐 D 킹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 있었던 세계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국면에서도 이면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4년, 44개국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 결과 전후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이 될 세 개의 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그리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원화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걸음이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미국의 속셈은 사실 그것에 있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때 미국이 의욕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세계에 영국과 같은 제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으려는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이처럼 세계화의 모든 국면엔 사실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는 현재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실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다보스의 요양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실은 '다보스 포럼'의 실체가 그 요양원의 다음과 같은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그들은 온종일 먹고, 생각하고, 발코니에 앉아 휴식 치료를 하면서 동료 환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기막히게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폐병 환자의 성적인 장난 소리를 듣고, 가끔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에 걸린 허약한 폐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도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p. 132)


 '세계화'나 '다보스 포럼'이나 모두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저마다 이타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면엔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면모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이뤄지는 공정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하는 경제 개방 압력에서도 허다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서 잘 설명했듯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 개방을 거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데 있었다. 수입품에 많은 관세를 매기는 굳건한 보호무역주의와 외국과의 경쟁에 뒤처진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그런 정책들이 오늘의 강대국을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강대국들은 자기가 경험한 바 약소국들이 어떻게 해야 부강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완전히 개방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발달된 기술을 가진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경쟁에 있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공정한 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약소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대국이 이익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방해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한 공정의 진짜 의미는 불공정이었고 그들이 말한 '세계화'란 자기보다 약한 국가가 거기에 속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지니계수를 측정한 그래프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며 클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 세계화는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심화할수록 세계적인 불평등 정도도 더 심해졌다는 게 그래프로 분명히 확인된다.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하는 사람이 주장하듯 평평하지 못한 운동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모든 '세계화'의 발자취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굳이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저자 자신이 국가의 이익을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설령 그것이 된다고 한들 항구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신화와 역사의 해석도 달라진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에는 영원한 '국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들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대로 행동하며,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몇 주나 몇 달, 몇 년, 때로는 몇십 년까지도 유지하지만, 동맹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한편, 각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화와 역사이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경이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부끄러움의 원천에 가깝다.(p. 146)


 그건 곧 세이렌의 노래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그 노래에 무작정 도취되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세계화'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눈 앞의 친절한 미소와 들리는 허황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자신을 기다리는 건 끝내 파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자가 국가 이익마저 실은 신화와 역사의 해석에 불과하다며 누군가의 해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언제나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리려 노력하라고 독자에게 누누이 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길어낸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은 작가가 서문에 제시한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여섯 개의 명제에도 깃들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인 진보로 국경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둘째, 세계화를 증진시킨다고 믿었던 과학 기술이 오히려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셋째, 경제 성장이 국가 간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반면 국가 내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한 국가가 국제적 생활 수준에 비추어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국내의 사회, 경제적 안정 추구 사이의 긴장 또한 필연적으로 고조시킨다.

넷째, 21세기의 거대한 이민 물결이 국내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 진전에 기여했던 국제 기구들이 신뢰를 잃어간다. 

여섯째, 세계화엔 한가지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가 두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19세기 제국주의 경쟁 때처럼 다수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p. 12 ~ 13에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정리함.)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들이 무언가에 대한 반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 세계화를 긍정하고 그 추세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 주장했던 자들이 제시했던 근거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경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세계화 흐름을 과학기술이 통신과 고통을 한껏 발달시켜 가속할 것이라 내다 보았으며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국내의 불평등도 해소될 거라며 세계화를 찬양하기 바빴다. 또한, 거센 이민의 물결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한없이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의 충돌'을 조소 거리로 만들 것이라 여겼고 앞으로는 국제기구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열강들이 과거처럼 약소국에 큰소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은 현재 하나도 들어맞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단순히 그 지지와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핵심 명제들을 만들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의 핵심 명제를 굳이 세계화와 그 심화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으로 형성한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면을 헤아릴 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 지는 이 책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지만 특별히 3부, '21세기의 도전'이 압권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서 세계화를 더욱 진전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이민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돈이 실은 거꾸로 점점 더 강하게 세계화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걸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것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현혹하고 판단을 착란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이 횡행하는 요즘엔 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당부하는 세계화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대로 그 반대에 있는 국가의 이기주의적 면모를 대할 때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응원 또는 비난을 하기 전에 그 근저에 가로 놓여 있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체적 모습을 이루었는지 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선동으로 장차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 민중처럼 나중에 더 뼈아픈 후회를 남길테니까 말이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정책 결정자들은 돈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다른 나라로 떠넘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자꾸 할수록 세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분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승자 독식의 양상을 더욱 인식할수록 점점 더 세계화를 뒤로 돌리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p. 258)


 세계화이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든,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으로 낙관이나 비관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쉽게 굴하지 않고 그나마 잔존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최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화의 종말'을 쓴 궁극적인 동기도 바로 그런 사유와 실천의 움직임에 대한 희구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래란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것에서 발아되고 결국 그것이 모이고 쌓여 구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현명한 생각과 행동이 현명한 미래를 낳는다. 분명 '세계화의 종말'은 그런 미래를 출산하는데 좋은 산파가 되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이 다른 이에겐 불공정이었듯, 누군가에게 종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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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지음, 안정희 옮김 / 아작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의 SF 작가  클레멘트 1952 4월부터 7월까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연재한 '중력의 임무' 제게 오래도록 전설의 작품이었습니다일단 어디서 역사상 가장 좋은 SF 베스트 10 꼽을  항상 들어가는 작품이었고 그토록 공인된 걸작이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에 번역 소개   있지만 SF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상황  많은 관심을 받진 못하고  절판되어 이후 참으로 만나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작품은 실체와 만나고 싶은 갈망이 무럭무럭 생기는 법입니다저도 그랬습니다아주 오랫동안 얼마나  책을 읽게 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그래서 다시 나온  책이 정말 반가웠습니다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전설을 확인할 기회가 드디어 제게 주어진 것이죠.




  '중력의 임무' 흔히 하드 SF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SF  독특한 문학입니다. '과학'이라는 요소와 '이야기'라는 요소가 결합된 것이니까요무조건  둘이 함께 있어야 사이언스 픽션 SF 됩니다여기서 어떤 SF 과학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대하고  어떤 SF 이야기를  중요하게 대할  있습니다 , '과학'  작품의 초점을 맞추는 SF '하드 SF'라고 하고 반대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소프트 SF'라고 합니다쉽게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그러니까 '중력의 임무' '하드 SF'라는 것은 과학에  중심을 두었다는 뜻이겠죠과연  소설은 그러합니다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어쨌든 작품의 중심점을 보다 과학적인 것에 두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은 '메스클린'이라는 행성입니다태양계 너머  우주 어디엔가 있는 별입니다 행성은 참으로 독특합니다중력이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입니다극지방의 중력은 무려 지구의 거의 700 입니다 중력 때문에  별은 좁고  타원형으로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54년에 나온 초판본은 이렇게 기묘한 형태의 행성 모습을 표지로 삼았습니다.

 토성처럼 고리가 있고 납작한 타원형의 별이 메스클린인 것이죠.


 이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행여나 우주에서 만나면 시선을 떼기가 어려울  같습니다보통 사람의 몸무게가 중력의 크기입니다우리가 지구 중력의 6분의 1 달로 가면 우리 몸무게 또한 6분의 1 줄어들지요반대로 지구 보다 중력이 6배인 별로 가면 몸무게가 6배나 늘어나구요그렇게나 몸무게가 늘어나면 엄청난 비만의 몸을 가진 것처럼 아무래도 행동하는  어려울 것입니다그런데 중력이 6배도 아니고  백배나  곳이라면 어떨까요과연 생물이 살아갈  있을까요?

 

  클레멘트는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오로지 천문학적 지식과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메스클린행성을 설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줍니다그러한 중력이 생명과 삶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말이죠.



 그림에 나와 있듯 메스클린의 중력은 위도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예로 자전축이 기울어진 이 행성에서 궤도가 지나가는 곳의 중력은 지구의 212배라고 나와 있네요.

 아래 3이라고 쓰인 곳이 바로 적도 입니다. 인류는 거기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메스클린'에도 생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인간과 언어 소통이 가능한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말이죠그런데 어마어마한 중력 때문에 그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집니다몸은 납작하고 다지류이며 중력으로부터 장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껍질을 둘러싼 존재로 말이죠우리가 갯벌에서 흔히   있는 갑각류인 것입니다그것도 가재만큼 아주 작은.



이것이 바로 그 생물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플라이어'라고 부르는 인류는 중력이 지구의 3 밖에 안되는 적도에만 간신히 있을  있어서 행성 전체를 탐사할 수는 없습니다어쩔  없이 메스클린에 살고 있는 생명체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데그렇게 해서 '발리넌'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와 거래를 하게 됩니다발리넌은 '브리호'라는 배의 선장으로  배로 인류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정보를 모아 가져다 주는 대신 그들이 필요한 물품을 인류에게서 조달받는 거래인 것이죠.



 앞에 뗏목 같은 게 보이시나요? 그것이 바로 발리넌이 지휘하는 배 '브리 호' 입니다.

 배 위에는 발리넌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메스클린의 종족들이 보이네요.


 바로  브리호의 여정 '중력의 임무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여정을 통해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진 행성의 모습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경험시키죠전설의 확인인 지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은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정말 재밌게 읽었을 겁니다무엇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정교하게 설계된 행성의 묘사를 보는 것만 해도 놀라웠으니까요도대체 이런 상상  천체를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있을까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그런데 그럴만한 까닭이 있더군요   편에 있는 저자  클레멘트의 후기로   있었습니다그는 여기서 소설에 나와 있는 행성 묘사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정확한 이론에 기반한 정교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정말로 있을  있는 모든 자연 조건의 변수를  생각했고 그것을 실제 자연 법칙에 따라 가능한 모습을 계산했더군요그러니 오히려 행성 묘사가 실감나지 않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과정까지 합하여과연  책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SF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만 읽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하지만 '중력의 임무' SF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아주 흥미로운 과학적 가설의 실험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했습니다그래서 더욱 SF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네요또한 과학을 아직도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도 그러고 싶습니다소설과 저자의 후기를 읽으면 분명 없던 과학에 대한 흥미도 용솟음   같으니까요정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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