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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신상 이야기'로 이미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한 번 알린 적이 있는 사토 쇼고의 소설이자 157회 나오키 수장작이기도 한 '달의 영휴'는 환생에 대한 것입니다.
줄거리 소개부터 바로 들어갈게요. 이야기는 오래 전에 아내와 딸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고 혼자 살고 있는 오사나이 쓰요시가 예전 딸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과 그녀의 딸을 카페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딸의 친구라지만 장례식 때 말고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던 이 여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주 어린 딸이 쓰요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제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말이죠.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쓰요시에게 더욱 충격적인 일입니다. 죽은 딸의 친구인 엄마의 딸이 바로 자신의 죽은 딸이 환생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름도 딸의 이름과 똑같은 '루리'라고. 그러나 쓰요시에겐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이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은 죽고 없는 아내가 쓰요시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루리가 심한 고열을 잃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다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쓰요시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루리가 다른 존재가 환생한 것 같다고. 단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또 어떤 남자를 찾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쓰요시는 그런 아내의 말을 묵살해 버립니다. 초등학생인 된 루리가 기억 속의 남자를 만나겠다면서 가출까지 했지만 그냥 덮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자신의 무시와 방관이 어쩌면 커다란 잘못이고 사실 딸과 아내의 죽음 역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때문에 쓰요시는 딸이 환생했다는 그 어린 '루리'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실체로 출현한 '루리' 앞에서 그런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만 가능할 뿐입니다.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했던 현실이 실은 보잘 것 없는 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토록 오만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 닥쳐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달의 영휴'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을 취하는 카멜레온 같은 소설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소설을 환생을 거듭해서라도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루려 하는 아주 애달픈 사랑 이야기로 읽힐 것입니다. 사실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주로 세 개의 가지로 엮어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루리의 원본이 되는 여인이 미사미란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루리가 아니라 저처럼 쓰요시에 주목한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힙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점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왜 환생을 잘 믿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쓰요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소설의 주된 인물로 삼았는지 말이죠. 저는 이것이 환생을 다룬 소설로선 아주 독특한 시점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환생을 다룬 작품들을 생각해 보시면 납득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동안 환생을 다룬 작품들 하면 저는 얼른 일본 애니메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와 우리나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가 떠오르는데요, 그 두 작품 모두 '환생'의 주체 이거나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환생 하기 전의 연인과 같이 환생하는 존재의 직접적인 상대방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또 요번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를 감독한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 감독한 영화 '환생'도 있다는 게 생각나네요. 그 영화 역시 환생한 주체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렇게 환생을 다룬 많은 작품들이 환생한 주체이거나 직접적인 상대방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제 3자 인데다 한결같이 환생을 거부하는 자인 것입니다. 사실 '환생' 장르에 어울리는 주인공은 루리가 사랑한 연하남 미사미일 것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루리를 괴롭혔던 남편도 등장하는데, 이 남자를 악역으로 삼으면 그동안 나온 '환생 장르 공식에 딱 맞아 떨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토 쇼고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미사미와 원래 루리의 남편 모두 쓰요시 보다 비중이 적은 조연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쓰요시'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의문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왜 제 3자인데다 환생을 부정하는 쓰요시가 주인공인 것일까?
그런데 이런 쓰요시의 모습에서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진 않습니까? 현실은 계속 '네 생각을 바꿔, 이제 네가 변화해야 할 차례야!'라고 강권하는데, 땅바닥에 얼굴을 쳐박은 타조처럼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면서 오로지 지금의 현실과 자신의 주관만을 고집하려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서 저는 얼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 정부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그 때의 아베 정권은 정말 쓰요시와 같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환생한 루리처럼 지금까지 아베 정권이 했던 것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자성과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지만 그들을 그것을 쓰요시처럼 깨끗이 묵살했습니다. 현실은 계속 지금 잘못 나가고 있다고 알렸지만 밖으로 열린 귀를 모두 닫고 자기 합리화에만 빠져 있는 일본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내와 딸을 모두 잃은 쓰요시처럼 재생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이건 지금의 일본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로 점점 더 최악이 되고 있다는 것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까닭으로 저는 사토 쇼고가 하필이면 쓰요시를 주인공으로 쓴 것 같습니다. 쓰요시처럼 아주 어리석은 행보를 보여 온 일본 정부와 그것을 지지한 일본 국민에 대한 섬뜩한 경고를 날리기 위해서 말이죠. 너무 나간 해석일까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바로 마지막 장면 때문이죠. 반전이기에 자세히 말하진 않겠습니다만 거기서 루리는 쓰요시에겐 아주 중요할 사실 하나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미 쓰요시 주변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자신의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이제 그것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환생'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엔 이런 쓰요시와 비슷한 인물이 하나 더 나옵니다. 바로 원래 루리의 남편입니다 그 역시 쓰요시처럼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루리의 영혼을 질식하게 만들었죠. 그녀가 미사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일종의 숨통 같은 것이었습니다. 루리는 우연히 찾아온 미사미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루리가 죽음마저 초월한다는 점에서 사토 쇼고가 쓰요시와 루리 남편의 의미를 이 소설에서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네요.
사토 쇼고가 이런 전개를 취한 까닭에 대해서 달리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변하지 않으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희망조차 보지 못한다고 이리도 선명하게 알리고 있는데.
'달의 영휴(盈虧)'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걸 뜻한다고 합니다. 소설이 이것을 제목으로 한 것은 영휴하는 달처럼 사람의 삶과 죽음도 연속된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그것이 바로 '환생'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영휴' 그대로 한없이 변하는 달의 모습입니다.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모습엔 항구적인 것이 없습니다. 부단히 변합니다. 바로 그런 일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기원이 스민 제목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내 자폐(自閉)로만 치닫고 있는 일본 속에서 국민들의 영혼이 모조리 질식하기 전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