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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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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직히 두근거리며 첫장을 넘겼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재림이라는 말마저 듣는 작품이라하니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전 미스터리적 재미를 듬뿍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듯한 작은 시골 마을 '스리 파인즈'는 그 자체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의 작은 시골 마을로 여겨졌고 그렇게 내게는 그야말로 '클로즈드 서클'로 보였다. 배경 설명과 주요 용의자들이 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듯한(그렇게 독자에게 스스로 미스터리 해결을 위한 예비지식을 제공하는 듯한) 첫 장이 지나가고 이 소설에서 명탐정이 될, 캐나다에서는 이미 범죄 해결로 이름이 놓은 가마슈 경감과 왠지 왓슨역을 할 것만 같은 '니콜(결국 그 기대는 뒤에 가서 처참히 무너지지만)'의 소개가 있고나서 드디어 새벽의 한 숲길에서 남에게 원한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지지 않을 듯한 선하디 선한 할머니 제인 닐이 시체로 발견된다. 

 해설을 제외하고는 총 457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서 그 십분의 일 길이의 정도에 이렇게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내심으론 남아있는 저 많은 분량 동안 아마도 제2, 제3의 살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고 예상대로라면 내 관심은 이제 제인 닐이 아니라 그러한 살인자를 은폐하고 있는 마을 '스리 파인즈' 자체에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 마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또 무엇인지 추리해나가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 루이즈 페니는 왜 마을이 '스리 파인즈'인지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신대륙에 와서 더더욱 위협을 받는 왕당파들을 위한 보호처라는 뜻이라니 예감이 맞아지는 것 같고 뭔가 독립의 역사와도 관계있을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욱 더 빨라질 것이었다. 

 캐나다의 여류 작가 루이즈 페니의 2005년도 데뷔작 '정물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스틸 라이프'는 만일 나처럼 그런 기대를 했다면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순수 미스터리적 재미만을 추구했다면 이 책은 그 남은 십분의 구 동안 도무지 나오지 않는 후속 살인, 능력자 가마슈 경감의 부지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는 수사, 거기다 조금은 반칙 처럼도 느껴지는 사건의 현장 등등 상당히 지루할 수가 있다. 특히나 영미 미스터리식의 빠른 속도에 길들여진 분들이라면 그것이 마치 KTX를 타고 지나간다고 한다면 '스틸 라이프'는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느릿느릿 지나간다는 느낌을 더더욱 받게 될 것이다. 사용된 무기는 흥미롭지만 트릭이나 범인 감추기가 그렇게 또 뛰어나지 않아서(처음에 예상했던 사람이 결국 범인으로 밝혀져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뭔가 다른 작가의 계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결말의 해결에서 아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그리고 미스터리라면 무엇보다 명쾌하게 해결하는 명탐정의 매력 또한 돋보여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 명탐정 역할을 맡고 있는 가마슈 경감이 그런 매력을 보여주지 않아 또 아쉬웠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가사 크리스티식의 고전추리의 재미를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 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전혀 사전 정보없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본다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속도도 괜찮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무엇보다 번역이 좋아서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작가는 미스터리 보다는 제목 '정물화' 그대로 '스리 파인즈'라는 마을 자체를 작품에다 온전히 담아내는데 더 치중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제인 닐이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 '박람회 날' 처럼 말이다. 닐은 친구 티머가 죽은 날이기도 한 박람회 날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녀는 거기에 그 마을 사람 모두를 변형하여 집어 넣는다. 그렇게 페인도 마을 사람 모두를 생생히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데 더욱 더 주력한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즈 페인은 왜 미스터리적 재미를 상쇄해가면서 까지 그 마을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 흥미로운 것이 바로 소설 속에 수많은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피터와 클라라의 관계, 루이자와 티머 그리고 제인 닐의 관계 그리고 가마슈 경감과 이제 막 그에게로 배속된 신참 니콜의 관계까지. 루이자 페인이 전해주고 싶은 주제에 맞춰 보자면 특히나 가마슈 경감과 니콜의 관계가 흥미로운데 초반 니콜은 유명한 가마슈 경감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뻐하지만 후반에 가서는 갈수록 일으키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니콜은 뭔가 자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버렸음에 기막혀 하는데 이처럼 루이자 페인이 '스리 파인즈'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변화'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왜 하필 제목을 정물화라는 뜻인 '스틸 라이프'로 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과히 '정물화'를 통해 현대미술 자체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같은 사과를 100번도 넘게 그리곤 했는데 그것은 모두 순간 순간 흩어져 버리는 '진실'을 그림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시간 밖에는 간직할 수 없는 그림에다 그 '시간'이라는 흐름 자체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게 '변화'자체를 2차원적인 평면에다 담으려 했던 것이다. 루이자 페인이 이 소설 '스틸 라이프'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도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제목 마저도 '스틸 라이프'인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소설 속 가마슈 경감과 유일한 책방 주인 머나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머나는 가마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변화에 잘 적응해요. 그게 우리의 생각일 때는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서 부과되는 변화는 일부 사람들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죠. 알베르 수사가 정곡을 찌른 것 같아요. 인생은 상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실에서,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유가 나와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가 적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에요.(P.204) 

 페인은 이렇게 '스리 파인즈'를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어지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대처의 모습들을 제인 닐의 '박람회 날' 그림 처럼 모조리 다 담아내는 것이다. 마치 제목은 정물화 이지만 세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을 따르고 있는 듯이 말이다.  

 

 

           브뤼겔의 '십자가를 진 예수'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주가 되어야 할 예수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페인의 '스틸 라이프'도 이와 마찬가지라 본다. 주가 되어야할 미스터리가 각자가 변화에 대처하는 모습들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 까닭에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해져 버렸다. 남은 건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의 잔상뿐. 그래서 내게 '스틸 라이프'는 브뤼겔적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기대치의 문제다. 그러니까 어떤 기대로 이 책을 잡았느냐에 따라 그 만족도 역시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미스터리적 재미를 추구했다면 재미를 좀 보지 못할 것이고 순수하게 문학적 읽기의 재미를 추구했다면 감성적이며 섬세한 묘사에다 인물을 묘사하는 솜씨 또한 맛깔나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는 완전 전자의 기대감으로만 읽은 탓에 재미를 못 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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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8-1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틸 라이프가 정물화라는 뜻이었군요...

ICE-9 2011-08-19 01:04   좋아요 0 | URL
네. 이프리트님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
 
데몰리션 엔젤 모중석 스릴러 클럽 28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박진재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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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태어난 사립탐정 장르물은 공황 이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세 명의 작가라 하겠는데, 바로 더쉴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다.

 더쉴 해미트가 차디차고 냉정하며 타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을 주로 드러낸다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해미트의 냉정한 관찰자적인 입장을 여전히 유지하긴 하지만 소설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미국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색채를 가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 편 로스 맥도널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 안에서 사건의 무대를 대부분 사회화의 가장 1차적 기관이라 할만한 가정에 국한하여 미국 자본주의에게 팽배한 온갖 모순을 가정 내부의 치정 사건으로 여과하여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었다. 현재 미국에서 나오는 사립탐정물은 대체로 (아마도 어쩌면 지나친 일반화일수도 있겠으나) 이 세 개의 지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미키 스필레인의 마이크 해머가 더쉴 해미트라면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카더나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스 맥도널드의 계승자는? 


  그가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크레이스다. 그의 유명한 시리즈 엘비스 콜은 1987년 레이거노믹스가 한창 붕괴되기 시작할 때 등장했다. 30년대의 '공황'이 샘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우를 태어나게 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80년대의 위기가 엘비스 콜을 태어나게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그 아픔이 가장 절실히 드러나는 곳은 가정이다. IMF 때의 우리나라처럼 2008년 서브프라임의 미국 처럼 그렇게 곳곳에서 경제적 위기에 의해 파탄나는 가정이 속출했다.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에 감명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결국 로스 맥도널드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탓이 아닌가 한다. 사립탐정물이 하나의 '관찰물'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로버트 크레이스는 주로 가정의 변화를 관찰한다고 하겠다.

  내가 여기서 사실은 이 책과 별로 상관도 없는 엘비스 콜 얘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이 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엘비스 콜에서 보여준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만 앞으로 내가 하게 될 '데몰리션 엔젤'에 대한 리뷰가 다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근거 같은 것으로써 먼저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에 나온 이 작품, '데몰리션 엔젤'은 크레이스에게 있어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87년부터 99년까지 여덟 권의 시리즈로 이어져 왔던 엘비스 콜에게서 벗어난 가장 최초의 '스탠드 얼론'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형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란 종종 관점의 변화 그 자체로 연결되기 마련인데 그가 99년 엘비스 콜 시리즈의 8번째 작품 ‘L.A. Requiem’을 내고 나서 1년도 채 안되어 이 모든 시도를 했던 이유는 뭘까? 그런데 그는 바로 다음 해 2001년에 또 다시 또 하나의 스탠드 얼론 ‘호스티지’를 내어 놓는다.(이 소설은 브루스 윌리스의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바 있다.) 이번엔 인질협상가를 주인공으로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던 한 가정의 가장이 관찰의 주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는 또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고 ‘아버지’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필 L.A. Requiem을 내고나서 두 권의 무대와 무대 속 세계는 공유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을 연속적으로 낸 까닭은 뭘까?  

 

                                            

  L.A. Requiem 얘기를 잠깐 해 보자. 혹시 당신이 조 파이크 팬이라면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조 파이크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의 어린 시절과 그와 LA경찰이 왜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어쩌다 조 파이크가 그렇게 도통 알 수 없는 남자가 되었는지 그 고통의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그에게도 있었던 여인의 얘기마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엘비스 콜이 잠깐 잠깐 흘렸던 조 파이크에 대한 얘기들이 궁금했던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다. L.A. Requiem은 파이크가 중심이다. 그렇게 하나의 원초적인 남성성에 대한 얘기다. 그렇다면 바로 뒤이어 나온 ‘데몰리션 엔젤’은 바로 그 가정의 또 하나의 동반자로서의 ‘여성성’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아마도 그렇게 전혀 반대의 얘기이기 때문에 크레이스는 그 시점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렇게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을 읽어보면 이 의문들의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최초의 스탠드 얼론 ‘데몰리션 엔젤’은 여주인공 스타키의 상실한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까 L.A. Requiem, 데몰리션 엔젤, 호스티지. 이 세 작품은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리 하나씩을 각 작품별로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늘 추구해왔던 ‘가정’에 대한 관심이 보다 넓게 그만큼 깊이 확장된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데몰리션 엔젤’이 스타키의 여성성-되찾기의 소설인지 살펴본다.

  스타키, 그녀는 3년 전에 2분 45초간 죽었었다. 당시에는 폭발물 처리반이었던 그녀는 연인이자 동료인 ‘슈가’와 함께 형편없는 솜씨의 사제폭탄을 해체하러 나섰다. 시시한 농담거리도 안 되는 가벼운 해체 작업이었지만 갑자기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폭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의 연인은 죽고 그녀 역시 그렇게 죽었다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그 폭발로 상실된 것 연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육체에도 파편들이 날아와 그 날의 고통을 아주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주로 ‘여성’을 나타낼 수 있는 부분에. 그래서 그녀는 다시는 수영복을 입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심하게 다친 곳이 바로 가슴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기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는 폭발물 처리반에서 내처져 현재의 CCS로 옮기게 된다. 그러니까 그 폭발은 사실 스타키의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폭발’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이자 상실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미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포기했으며 늘 타가메트와 진토닉이 아니면 일상마저 제대로 버텨나가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내 그 폭발의 순간에 붙잡혀있다. 상처의 극복을 위해서 정신과 의사는 그것과 마주할 용기를 내야한다고 말하지만 스타키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한다.

  표면상으로 보면 스타키의 고통은 ‘연인의 죽음’ ‘육체에 새겨진 상흔’이랄 수 있겠지만 심층적으로 보자면 그녀를 3년간 그 지독한 고통의 늪으로 빠뜨렸던 것은 바로 그 폭발로 인해 그녀가 ‘여성성’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크레이스는 여기에 대한 단서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우선 ‘연인의 죽음’을 보자면 그 연인의 이름이 내내 풀 네임이 아니라 ‘슈거(SUGAR)’로 불린다는 점이 그렇다. 왜 크레이스는 하필 연인의 이름으로 남자의 이름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SUGAR’를 붙였을까? ‘SUGAR’는 보통 여성의 이름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보자면 스타키가 ‘SUGAR’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있어 이성적 접촉의 그 어느 한 순간도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거기다 ‘SUGAR’는 프랑스 혈통이다. 미국에서 프랑스는 종종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 않는가. 무리한 해석일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볼 때 우리에게 가능한 해답 하나는 그 때 그 폭발로 잃어버린 연인 ‘SUGAR’는 일종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타키는 자신의 연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연인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육체에 깊이 남겨진 상흔’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레이스는 특히 가슴에 난 상처가 가장 깊었다고 일부러 표현까지 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스타키가 3년 만에 처음으로 폭탄을 마주하고 감상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이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일의 일부였고 늘 사랑해온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의 비밀이었다. 폭탄을 만질 때, 손에 폭탄 조각을 들고 있을 때, 손바닥에 조각을 놓고 주먹을 쥘 때 그녀는 폭탄의 일부였다. 폭탄은 퍼즐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좀 더 큰 전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쩌면 다나의 말이 맞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폭탄과 단둘이 있게 되었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P.1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아림’이다. 즉 스타키에게 있어 폭탄의 해체는 그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과연 그녀는 폭탄을 해체하면서 미스터 레드가 어떠한 인물인가를 점점 알아간다. 여성성에 대해 섹슈얼리티 이론을 따르든 젠더 이론을 따르든 ‘헤아림’ 혹은 ‘이해’는 그야말로 여성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즉, 그녀가 폭발물 처리반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다시금 그녀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염원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잭 펠과의 로멘스도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작품에 부가된 것은 아닌 것이다. 펠과의 만남은 스타키가 여성성을 되찾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스타키가 결국 3년전의 그 비극적 사건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게 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스타키는 어떻게 그토록 피하려만 들던 3년전의 사건을 마주할 결심을 하게 되었나? 크레이스는 그 과정을 이렇게 풀어간다. 3년 동안 전혀 어떤 남자와도 사귀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기 집으로 펠을 초대한다. 둘 사이에 저녁 먹고 사건 얘기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게 오고가진 않는다. 다음 날 스타키는 마직과 함께 찾아낸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을 찾아 떠난다. 거기서 스타키는 마직의 이런 고백을 듣게 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걸 얘기할게요.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나보다 키 큰 사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고, 내가 맥주를 갖다바쳐야 하고, 새벽 3시에 방귀 소리를 들어야 하더라도 집에 누군가 있었으면 해요. 난 크래커 먹는 두 아이 외에 같이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게 신물이 나요. 젠장 난 그렇게나 결혼하고 싶은데, 애들은 천오백 미터 밖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보고 뛰어와요.(P.248)

 
  그리고 테넌트의 비밀작업장을 찾아가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는 그녀가 주문한 3년 전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폭발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한다. 이 과정을 언뜻 보면 왜 그녀가 그 테이프를 돌려볼 결심을 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엔 아무런 결정적 계기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아직 펠을 깊숙이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테넌트의 작업장에서 별달리 얻은 것도 없다. 그런데 왜 대관절 그녀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난 ‘데몰리션 엔젤’에서 그가 보여주는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역량을 느낀다. 마직은 왜 하필 거기서 그 고백을 했던 것일까? 그녀는 계속해서 두 아이에 대한 저주에 찬 말을 쏟아내는데 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일 뿐이라면 크레이스를 너무도 모르는 말씀이다. 그는 그렇게 허투르게 어떤 에피소드든지 삽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거기 있는 것은 반드기 거기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라이프니츠식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마직의 ‘두 아이’이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것이 아직은 독립적이지 못한 그래서 미성숙한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고백 앞과 뒤에 나란히 존재하는 두 남자 펠과 테넌트를 보자. 펠은 이미 한 번 스타키 앞에서 혼절하는 바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독자의 눈에 펠은 완벽한 남자라기 보다는 어딘가 보호가 필요한 아이같은 존재로 인지된다. 크레이스는 종종 이것을 강조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 정도만 말해둔다.) 그럼, 테넌트는 어떠한가. 크레이스는 재치있게도 이름 자체에서 이미 이 남자가 미성숙한 인물임을 드러낸다. 크레이스가 ‘세입자’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여준 이유는 그가 내내 엄마가 물려준 유산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렇게 두 남자 모두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직의 두 아이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문제는 마직의 고백 전엔 스타키는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였고(집이란 종종 그 주인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그 후엔 테넌트의 비밀작업장 방문을 통하여 테넌트의 ‘엄마’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이제 왜 스타키가 그 테이프를 볼 결심을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크레이스가 은밀히 깔아놓은 연속적인 과정을 눈치챈다면. 그렇다. 이 과정은 연속적이다. 펠을 집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스타키가 엄마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하지만 그 때 별다른 오고감 없이 스타키는 펠을 몰아낸다. 그것은 그녀가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뒤 마직이 고백을 한다. 그 고백을 통해 스타키는 자신이 펠을 받아들였던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방문한 테넌트의 비밀 작업장에서 숨겨졌던 엄마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은 그 깨달음으로 인해 스타키 역시 ‘엄마’로서의 여성성을 자각하게 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은밀하지만 연속적으로 스타키에게 여성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모성’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었으며 때문에 여성성을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 자각이 있고나서야 그녀가 그 비디오테이프를 볼 결심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그렇게 그녀는 여성성을 회복한다. 더하여 무엇보다 크레이스가 준비한 소설의 결말 자체가 그 모든 여정이 스타키의 여성성 되찾기의 과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고 단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 말해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러 표현해 본다. 아마도 읽지 못하신 분들은 아리송하실지라도 이미 읽으신 분들은 그것만으로도 이해가 가실 것이다. 지젝의 이 말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읽으면서 지젝이 읽으면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목도 일부러 그렇게 뽑았다. 

여자의 '자리'는 틈새의, 심연의 자리이며, 그 자리는 '남자'가 그것을 채울 때 비가시적이 되는 것이다. (P.115)

 

  리뷰라는 것의 길이의 경제상 이 정도에서 '여성성-되찾기'로서의 '데몰리션 엔젤'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동안 리뷰를 써 온 경험으로 볼 때 너무 길면 아예 시선에서 조차 벗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시선 속으로 들어가려면 이 정도에서 조금 무모하고 급작스럽더라도 마무리하는게 나을 듯 하다. '데몰리션 엔젤'은 그의 이야기 다루는 솜씨가 어느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정말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캐릭터를 빗는 솜씨나 독자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솜씨 그러면서도 긴장감을 극도록 유지한 채 끌고가는 솜씨가 정말 빛을 발하고 있다. 크레이스의 팬으로서 이번 여름 정말 벗해야할 소설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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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가득한 심장
알렉스 로비라 셀마.프란세스 미라예스 지음, 고인경 옮김 / 비채 / 2011년 6월
품절


갑자기 심장에 문제가 생겨 깨어나지 못하는
사랑하는 한 소녀를 살리기 위해
열 개의 사랑으로 빛나는 별을 모아
그렇게 별로 가득한 심장을 만들어
선사하려는 한 소년의 이야기...




때로는 그냥 하릴없이 가벼운게 좋다.
아무 생각없이 뒤적여도 상관없을 것 같은 책이
어떤 땐 더 반갑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콕콕 가슴으로 날아와 박혀주는 문장들이 있으면
더 고맙다.
가지마다 작은 둥지들이 가득차
지저귀는 새소리로 풍성한 나무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게 해준다면 더욱 환영이다

그림만 보아도 절로 이해되면 더 좋다.
눈요기만으로도 눈이 배부르다면 더 고맙다
활자의 중력에서 벗어나서 아무렇게나 시선을
유영시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지구처럼
그 뜻을 느낄 수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가벼워서 어디든 들고다니면서
내키는대로 읽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그렇게 얻어 낸 한줄 글로써 때로 사람들에게
감탄마저 덤으로 얻게되면 더욱 더 좋다.

문득 시원한 바람불고
잎들이 저마다 부끄럽게 속얘기를 하는 것 처럼
속살거릴때 평상에 누워 잎들 사이 조각난 파란
하늘을 보며 읽기에 적합한 책을 찾는다면...

깜빡잊고 끄지못한 모기향 처럼
왠지 헤어진 누군가의 채취가 주위에서
진하게 느껴지는데 마음을 무겁게 하기는 싫고 그저
살짝 손끝이나 발끝만 젖고 싶다면...

한번쯤 벗해보면 좋은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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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의 밤 매그레 시리즈 6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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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이나 되는 매그레 시리즈를 차례로 보았더니 저절로 문리라도 트인 것일까? 

  문득 뭔가 규칙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말하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데 그러니까 다음의 작품은 바로 이전 작품의 일종의 변주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얼 스탠리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와도 비슷하다. 물론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도 변주란 뜻은 아니고 그 시리즈는 언제나 한 작품의 결말에 다음 작품의 시작을 삽입하는데 그렇게 두 작품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농의 매그레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속적인 두 작품은 그냥 연속으로 그치지 않고 변주를 하면서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를테면 매그레의 연속된 두 작품은 에셔의 이 그림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이루어졌던 범죄는 다시 바로 그 뒤의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고(스포일러상 이렇게만 언급한다.) 세번째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피해자로 다루어졌던 삶은 그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는 가해자의 삶으로 다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는 다음 작품 '교차로의 밤'에서는 더이상 믿지 못할 무언가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연속된 두 작품의 변주를 보여주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마치 사건의 양 면을 모두 아울러 고찰해 보려는 태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시 심농이 나름 훗설이라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심농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훗설이 말했던 현상학적 환원 태도와도 닮아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정해진 신체가 있는 이상 인간은 언제나 대상의 한 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궁극적 한계다. 그 사물의 뒤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신체에 갇혀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히 달의 뒤쪽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계지어진 객관 세계를 마치 진정한 객관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사실은 신체적 제약으로 단편 밖에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전부 아는 것 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훗설은 그러한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 착각을 버리기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것이 지금까지 인식한 모든 것의 백지화(에포크). 즉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는 바로 내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로 가서도 보아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앎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앎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란 늘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의 태도이다. 심농의 매그레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의 변주에서 이전에 해왔던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으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아무튼 당신이 '누런 개'를 읽고 바로 이 작품 '교차로의 밤'을 읽는다면 이러한 심농의 면모가 더욱 더 잘 드러나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차로'라는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지만 내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보이는 그대로만은 아님'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타난 버나드 쇼의 '피그마리온'과 완전히 반전된 형태는 이러한 심농의 현상학적 환원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이 소설에 유독 전면으로 나오고 있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심농이다. 

  이 소설은 사건이 복잡하고 용의자도 많은데다 사건 전개가 쉴 사이 없고 유달리 액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사실 '누런개'도 비슷하니 시즌2의 전형적 특성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저번과 같은 차분한 전개 속에 드리워졌던 감상적 필치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묘사에 정확히 사건의 핵심만 짚어 풀어내는 저널리스트적 묘사가 한껏 드러나있다. 아마도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지금까지 이만큼 심농의 저널리스트로적 면모가 드러났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교차로의 밤'은 이전 작 '누런 개'와 비교하자면 보다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묘사되는 계층은 더욱 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누런 개'가 이른바 프랑스의 엘리트 집단을 다루고 있다면 여기서는 전 프랑스의 계급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심농은 193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계급적 갈등 앞에 서 있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분위기를 짐작해보면 소설 속 상황이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프랑스와 어쩐지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그만큼 심농 역시도 당시 프랑스 사회를 덮쳐오던 어떤 파국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던 피그마리온의 반전된 형태는 그가 단정적으로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더욱 그렇다. 

  "자아, 이제 서로가 꿈꾸고 있던 화해의 환상은 모조리 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폐허의 잔재를 보면서 씁쓸히 연민을 곱씹을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하면서 깨어진 환상에 마냥 억지로 매달릴 것인가?" 마치 심농은 '교차로의 밤'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 한데, 정작 심농 자신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해 보여주지 않는다. 매그레는 여전히 교차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사방으로 열려진 그 어느 길이든 그는 갈수가 있지만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난처함이 마치 그 발을 대지에다 그대로 못박아 버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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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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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가였다. 

                          요 네스뵈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최근 밀레니엄의 스티그 라르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된 노르딕 느와르에 있어서 영미 비평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꼭 선정되는 작가이자 벌써 부터 워싱턴 포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등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기사나 인터뷰가 종종 실리는 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비평가들 사이에선 스티그 라르손이 죽고 없는 지금 그 인기를 대신 차지할 가장 유력한 작가로 꼽히는 작가이건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그의 소설이 소개된 적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살림에서 그의 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라서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인가? 지금 나온 스탠드 얼론 '헤드헌터'도 왜 영미 소설계에서 네스뵈가 그토록 각광을 받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는데 말이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링컨차를 탄 변호사와 해리 보슈 시리즈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마이클 코넬리는 THE REDEEMER를 읽고나서 정말 충격이었고 이제 네스뵈는 새로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며 해리 홀은 자신의 새로운 영웅이다라고 말했고 THE REDEEMER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자신의 심장 박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고동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 코넬리가 이렇게 까지 극찬하는 작품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 마구 애가 탈 정도다. 

   네스뵈는 스티그 라르손과 더불어 이른바 노르딕 느와르의 진화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노르딕 느와르의 좋았던 점들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특유의 느린 진행을 과감히 개선하고 영미 스릴러 만큼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한없이 처지고 우울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적당히 가감하여 유머스러운 분위기도 연출한다는 점에서 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르딕 느와르 특유의 첨예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예리한 냉소적 시선마저 더해졌으니 더욱 더 그렇다. 

  어쩐지 오랜 기다림 끝에 읽은 소설이고 거기다 이제 막 소개되는 작가라 어쩔 수 없이 칭찬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또 그대로 허언만은 아님을 소설을 직접 읽어본다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스뵈는 언젠가 자신의 고국 노르웨이가 속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을 두고 '조용한 사회'라 부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일종의 냉소가 섞인 반어법적 표현이었다. 즉, 겉으로는 조용하고 평온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기만이고 치장에 불과할 뿐 내부적으로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이 들끓는 곳임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베르코르의 소설 제목 처럼 일종의 '바다의 침묵'이라고나 할까? 내부적으로는 수많은 물결이 움직이고 요동마저 치고 있지만 늘 잔잔히 너울거리는 수면만을 보여주는 그 바다처럼 네스뵈는 자신의 나라들이 사실은 그렇게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중성, 그 '조용한 사회'의 이면에 가리워진 본성을 파헤치는데 주력한다. 사회가 쓴 기만의 가면을 벗기고 사실은 약자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야수와도 같은 그 사회의 맨얼굴을 보여주려는 작가이다. 네스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KILLER INSIDE ME)를 꼽았는데 그 작품 역시도 평범한 남자의 가면을 쓴 사이코패스의 연쇄살인마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이중성의 테마가 그에게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는 두 작가를 언급했는데 다른 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나브코프 이다.)

  그 드러냄의 대표작이 바로 해리 홀 시리즈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소설 '헤드헌터'도 사실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중성은 여기서도 여전히 테마이다. 그것은 주인공 자체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인 헤드헌터는 바로 주인공의 직업이기도 하다. 그는 그 업계에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유망주다. 하지만 168CM라는 작은 키의 그는(주인공이 이렇게 키가 작은 것은 네스뵈가 그 자신 해리 홀과는 완전 반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새로운 작품을 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해리 홀은 193CM의 거구다.) 아마도 그 키로 어떤 컴플렉스라도 가지고 있었던지, 그 작은 키가 주는 약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결혼을 했고 그 여성이 원하는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늘 아낌없이 돈을 쓰는 바람에 만성 재정 적자에 허덕인다. 그래서 그는 부업을 하나 갖는데 그것은 헤드헌터 대상자를 인터뷰할 때 얻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그들이 가진 미술품을 훔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 밤에는 도둑으로 활동하며 늘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체화된 이중성의 모습은 사실 자본주의에게 보내는 네스뵈의 냉소라 할 수 있다.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고래로 부터 사회가 보다 더 질적으로 잘 살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인성을 중시했으나 자본주의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돈만 잘 벌면 인성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능적인 머리'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자본주의는 그에 맞게 인재를 뽑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분업화된 영역에 잘 맞는 사람인가만을 따지는 것이다. 즉 사람에다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에다 사람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본주의도 네스뵈가 보기에 그리 공정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 자신이 정작 생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약탈인 범죄이듯 그렇게 자본주의 역시도 사실은 누군가로 부터 약탈해야만 그렇게 범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있는게 아니냐고 냉소를 보내는 것이다. 뭐, 어쩌면 보다 단순한 이유일수도 있다. 해리 홀이 형사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범죄자로 주인공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반문은 그가 결정적으로 모든 난관에서 헤어나게 해 줄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범죄에서 훔치게 되는 미술작품이 바로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이라는 점에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루벤스의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집약해놓은 것과 같은 작품인데 가급적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네스뵈가 이 작품에 넌지시 찔러넣은 숨은 저의를 말하자면 칼리돈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던 그 멧돼지가 사실은 누군가가 보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멧돼지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견된 일종의 징벌의 천사라는 점이다. 소설을 읽고나면 이 그림이 얼마나 탁월하게 소설의 내용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는가 놀라게 될 것이 분명하지만(멧돼지에게 상처를 입히는 유일한 여성 영웅 아틀란타의 존재 또한 너무도 절묘하다.) 아무튼 이 그림은 단순히 인물의 형상화를 너머 소설에 나오는 바대로 아르테미스는 미국으로 그녀가 보낸 멧돼지는 바로 미국이 퍼뜨리고 있고 노르웨이가 따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걸 암시하게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가장 전위적 위치라 할 수 있는 헤드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아주 부유하게 됨으로써 자신을 그 모든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이 신자유주의 자체의 상징인 멧돼지에게서 온다는 점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결국 멧돼지가 가져온 것은 칼리돈의 파멸이었다. 즉 이 그림 때문에 단순히 해리 홀의 반대되는 인물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약탈을 그 자체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정확히는 신자유주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에 '헤드헌터'는 노르웨이에서 영화화되었다

  깜짝놀랄 반전도 있고 한번 잡게 되면 그냥 내처 끝까지 읽게되는 진짜 '페이지터너'이지만 이렇게 깊이를 우려내는 솜씨 또한 만만치 않은 작가가 바로 네스뵈다. 이런 저력이 있는 작가이기에 영미 소설계에서 그토록 주목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 소설은 말로만 듣던 그의 명성이 그저 허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지리한 장마비로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면 아니면 지금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노르딕 느와르의 그 진화된 현재형이 궁금하다면 꼭 접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읽으셔서 제발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마구 나왔으면 좋겠다. 마이클 코넬리가 저토록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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