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낯섦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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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내게 마치 어릴 때 성탄절날 아버지에게 받았던 '과자종합선물세트' 같았다. 다양한 과자들이 하나로 담겨 있던 그 상자처럼 지금까지 내가 읽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부가 이 한 권에 투영되어 있었다.'  최근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마음의 낯섦'을 읽은 소감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싶다. 정녕 내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열 두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와 무려 43년 넘게 그 도시의 온갖 골목을 걸어다니며 터키의 전통 음료 중 하나인 보자(boza)를 팔아온 메블루트란 남자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형 하산과 함께 6년 전에 먼저 이스탄불에 와서 정착했는데, 바로 그 형인 하산의 가족이 오르한 파묵의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의 제브데트 가족을 연상시킨다. 제브데트처럼 하산 역시 두 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산을 비롯하여 두 아들, 코르쿠트와 쉴레이만은 민족주의자로 서구 문화를 동경하여 유럽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제브데트와 거리가 있지만 잇속에 밝은 자본주의자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룬다는 점은 닮았다. 그런 면에서 이상주의자로 개혁 성향이 강했던 제브데트의 차남 레피크와 쉴레이만 역시 매우 다르다. 그런데 메블루트가 스스로 가장 고귀한 우정을 나눈다고 여기는 친구이자 개혁을 지지하는 쿠르드족인 페르하트는 레피크와 많이 비슷하다. 자신의 욕망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머지 아내가 떠나버린다는 것 또한 유사하다.




 '내 마음의 낯섦'이 가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특히 메블루트를 비롯하여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아주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미하를 둘러싸고 벌이는 얽히고 설킨 사랑의 행로는 압권이다. 그들 모두 정작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데, 이건 두 번째 작품, '고요한 집'과 닮았다.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두고 사랑의 경쟁을 벌인다는 점에선, 이스탄불 최고 미녀인 세큐레에게 똑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던 카라와 하산이 등장하는 '내 이름은 빨강'이 떠오른다. 쉴레이만이  갑자기 사라진 사미하를 찾아다니는 모습은 그대로 어느날 불현듯 실종되어버린 아내, 뤼야를 찾아다녔던 '검은 책'의 주인공 남편 갈립을 연상시키고,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메블루트의 모습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터키 전역으로 버스 여행을 떠나는, 소설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 '오스만'과 모든 것이 눈에 뒤덮인, 하얀 설원의 도시 카르스를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배회하는, 소설 '눈'의 주인공 시인 '카'를 떠올리게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내 마음의 낯섦'이 내게는 오르한 파묵이 여기까지 걸어온 문학적인 여정의 집대성으로 보인다고 말해도 그리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파묵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그 작품의 세부적인 것이나 하나의 문장에서 나온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이란 책에서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며,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만큼 소설의 정신에 충실한 작가도 또 없다고 하겠다. 또한 '내 마음의 낯섦'은 쿤데라의 언급처럼 그 전까지 나온 오르한 파묵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듣고 누군가 내게 '그렇다면 메블루트를 중심으로 1968년 9월부터 2012년 10월 25일까지 모두 635 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이들의 방대한 삶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대답은 과연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암흑의 포용(包容)'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어둠을 싫어한다. 그것이 불안정과 불확실함의 형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빛을 원한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구분되어 그것으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자신에게 뭐가 위험이 되고 이득이 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그런 인간의 염원을 배신한다.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의 현대가 매우 유동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바다. 마치 가상화폐 시장 상황처럼 오늘의 삶은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국적이나 인종 등 태생적으로 타고난 정체성과 종교에 더욱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발밑이 허공 뿐이라고 느껴진다면 본능적으로 매달릴 곳을 찾듯이, 불확실과 불안정으로 혼란과 불안이 생길 때마다 사람은 자연히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권위 있는 무언가나 늑대와 개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표식에 들러붙기 마련이다. '내 마음의 낯섦'에서 쉴레이만이 속한, 우익이며 터키인 중심인 둣테페와 '페르하트'가 속한, 좌익이며 쿠르드족 중심신 퀼테페가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극명하게 대립했듯이 말이다.


 안 그래도 이러한 쌍방 대립 구도는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데뷔작을 포함하여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터키 자체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동양과 서양 문명 모두에게 그 영향을 부단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의 투사(投射)이자 역사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문명의 융합체였던 오스만 제국이 남긴 유산일 것이다. 소설 '눈'을 보면 이 대립이 현재의 터키에서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잘 목도할 수 있다. 터키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주의와 거기에 반발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립 사이에서 도시 카르스에 가득한 눈처럼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불행한 삶이 즐비한데도 개인은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로지 집단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 강의실에 여성이 히잡을 쓰고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치열하게 대립할 때 정작 당사자인 소녀들은 자살을 한다. 누구도 자신을 삶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그 대립 속에서 자살만이 유일하게 진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살은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 자신이 탄 버스가 사고를 당하자 오스만이 얻게 된 깨달음과 유사하다. 그는 느닷없이 찾아온 죽음을 천국의 빛처럼 환영하는데 그것은 죽음으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비된 몸과 의식.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 p.72)




 오르한 파묵이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허무주의자라거나 죽음 예찬론자라서가 아니다. 죽음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삶에 있어 죽음은 광막한 암흑이다. 죽음이 무엇이고 언제 찾아올지 아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압도적인 불확실함이고 그로 인해 삶은 불안정하다. 죽음이란 갑자기 눈 앞에 암막이 내려진 것과 같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내던져진 것과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기피하기 마련인 그런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포용하라고 권한다. 그것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권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면 얼른 '내 마음의 낯섦'을 들춰봐야 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나는 소설의 시작 부분을 특히 눈여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은 메블루트의 인생을 시간 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바로 메블루트의 진정한 사랑이 될 라이하와 단 둘이 몰래 도망치는 시간이다. 


 '스물다섯 살에 고향 처녀와 함께 도망쳤다. 이것은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이었다.'(p. 17)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 오르한 파묵은 몇 번이나 아주 어두웠다고 강조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만났다', '어둠 속에서는 여자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등등. 메블루트가 실체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알린다. '암흑'이다. 물론 이렇게 할 이유는 있다. 실은 지금 메블루트가 데리고 도망치는 여인이 원래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블루트는 셋째 딸, 사미하를 사랑했다. 그녀의 순수한 검은 눈에 매혹되어 군대에 가 있는 3년 동안 내내 사랑을 갈구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름을 잘못 알았다. 둘째 언니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하와 도망치는 것을 유일하게 도와준 사촌 쉴레이만의 술책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미하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메블루트가 이름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로잡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메블루트는 쉴레이만이 운전하는 트럭의 밝은 빛 아래에서야 자신이 데리고 온 여인이 사미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어둠에 있었을 때 놀랍도록 충만한 사랑이 삽시간에 식고 그는 밝은 빛 속에서 '삶이 놓은 덫' 속으로 들어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메블루트의 삶 속으로 평생토록 지니게 될 낯선 감정이 쓰윽 들어온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순간을, 그 낯선 감정을 자주 떠올릴 것이었다.(p. 22)


 보시다시피,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삶 전체를 규정지은 이상한 사건'의 전모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여인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우연이 만든 그 인연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메블루트가 이스탄불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운명이 된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p. 635)


 그러므로 그 암흑은 메블루트에게 결코 방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자신도 몰랐던 진정한 사랑을 찾아준 큐피드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린다. 이처럼 '내 마음의 낯섦'은 전작들에 이어 다시 한 번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건 묘사에서 어둠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또 하나를 본다.

 그건 바로 '개 짓는 소리'다. 낯선 감정과 함께 메블루트가 평생 짊어지는 감정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메블루트가 라이하와 도망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소리로 소설에 출현하여 소설의 중요한 계기마다 등장한다. 메블루트가 처음으로 보자 파는 일을 그만 둘 결심을 했을 때, 개 짓는 소리가 궁극적인 원인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이스탄불에 와서야 비로소 생겼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모든 개가 자신을 잘 알아 전혀 짓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개 짓는 소리란 메블루트에게 '넌 이방인이야! 우리와 달라! 넌 여기 섞일 수 없어!'하고 외쳐대는 것과 같다. 아니나 다를까 메블루트가 개 짓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지혜를 빌리러 찾아갔던 선지자 에펜디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개들은 우리 편이 아닌 사람들을 감지하고 안다네.(...) 이 모든 수난을 겪은 개들은 이제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를 깊이 감지하고 있다네.(p.505)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소리를 진짜 개 짓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메블루트가 가지고 있는, '이스탄불에서 어쩌면 내내 이방인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오르한 파묵이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진실은 정반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소설 '눈'에서 주인공 카의 말을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다.


  "나에게 시를 보내는 것은 신입니다. (...) 나는 모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두려워하고 있군, 자네를 비난하고 싶네."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눈' 1권, p. 186)




 메블루트 또한 두려움이 많은 자다.

 그는 쉴레이만과 페르하트가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과감하게 쭉쭉 뻗어나갈 때,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그 어디에도 들러붙지 않고 홀로 남은 채로 제자리를 맴돈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메블루트가 여전히 거리에서 보자를 판다며 때로는 어리석다고도 하고 또 때로는 불쌍하다고도 하지만 삶 전체를 통해 끝내 승리한 사람은 메블루트라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누구도 찾지 못한 진짜 사랑과 행복을 그는 찾았고 누렸으며, 또한 이것이 더 큰 것인데, 그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문학에서 구원은 언제나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 있을 때 찾아온다. 소설 '검은 책'의 2권 후반에 왕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드러낸 바 있듯 말이다.


한때,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될 수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임을 발견한 왕자가 살았다.('검은 책' 2권, p. 259)


 이 이야기 속 왕자가 평생 추구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느냐가 작가에겐 중요하다.

 터키 사회에 종교, 정치, 문화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는 대립관계처럼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한 적대와 차별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타자에게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것에만 기반하여 주체를 정립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암흑과 두려움은 귀중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갖는다. 모두 타자의 생각에 무분별하게 섞여드는 것을 막아주고 어떻게든 먼저 자신의 생각으로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보다 더 크고 위대한 뭔가에 들러붙은 껌이 되어 기생을 통해 성장하려는 생각을 차단하여 어디로든 기울지 않고 혼자 힘으로 우뚝 서는 오뚝이가 되도록 한다. '검은 책'에 나오는 왕자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자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울리는 기억의 음악에 저항해야 한다.('검은 책' 2권, p. 272)


 하지만 여기서 오해해선 안 될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된다고 하여 오르한 파묵이 오만과 독단까지 하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파묵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원한다. 바로 그것이 두려움과 소심함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묵의 주체 정립 과정은 서양 철학이 말했던 주체 정립 과정과 다르게 어디까지나 겸허(謙虛)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구분과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포용하고 그 타자의 입장에서 그를 헤아리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이다.


  소설 '하얀 성'에서 이탈리아인 기독교도 '나'와 터키인 무슬림 '호자'의 관계가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눈'의 주인공 카도 자신의 말을 들려주기 보다는 먼저 많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르한 파묵에게 정체성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겸허를 통한 타자 중심이기에 정체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교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얀 성'에서 나와 호자가 정체성을 바꿔 호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나는 터키에서, 그렇게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상대방의 나라에서 잘 살아가듯 그리고 '검은 책'에서 주인공 변호사 갈립이 아내와 같이 사라진 자신의 사촌이자 칼럼니스트인 제랄과 아주 쉽게 정체성을 바꾼 것처럼.




 이렇게 정체성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보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변화 무상하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곳이라는 생각과 이어져 있다. '새로운 인생'을 비롯하여 그의 소설이 자주 순례에 가까운 여행을 통하여 각성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 세상이기에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거나 고집하는 것만큼 어리석어 보이는 것도 또 없다. 그것은 자신의 변화를 통해 맞이할 수 있었던 삶 속에 내재된 무한의 가능성을 그대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메블루트가 이 소설에서 보자를 팔기 위해 이스탄불의 수많은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는 삶과 인간 관계 속에서 느끼는 피로와 아픔을 거리에서의 상상력을 통해 치유한다. 골목마다, 방문하는 집마다 그가 마주하는 도시의 다양한 변모가 삶에 수많은 의미와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밤에 밖으로 나가 보자를 팔 때는 창문 하나 열리지 않아도, 아무도 보자를 사지 않는 텅 빈 거리에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걸으면 상상력이 가동하고 메블루트에게 이 세상에, 사원 벽 뒤에, 무너져 가는 목조 가옥들에, 묘지들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p. 436)


 아마도 이러한 가능성을 독자도 느껴보라고, 파묵은 하필이면 많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할 보자 장수를 주인공으로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메블루트는 소설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완전히 소속되거나 고정된 장소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나온다. 메블루트 자신이 시골에서 올라온 이방인인 데다 그가 오래도록 살고 있는 '게제콘두' 또한 실은 소유권을 등기할 수 없는 땅이다. 나라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사는 퀼테페는 시골과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이방인들로 가득하다.


 2008년에 나온 '순수 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이 '퀼테페'라는 공간이 가지는 특성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스탄불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순수 박물관'에선 그러한 이스탄불의 상류층 문화를 그렸다. 그것은 중심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은 '퀼테페'가 잘 보여주듯이 그와 정반대인 주변의 이야기다.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망각의 존재가 되어가는 보자 장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도 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순수 박물관'에서 사라진 여성 퓌순은 주변적인 존재였다.

 주인공 케말은 중심에 있기위해 그녀를 배신했고 결국 그녀를 잃어버렸다. 그녀의 부재로 중심의 허망함을 깨달은 케말은 비로소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거기에 남은 사물을 통해 이제 중심의 의미를 거꾸로 구현한다. 이러한 케말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의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 나는 지금 나온 '내 마음의 낯섦'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메블루트와 같은 주변적인 사람들은 그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 '해골'의 말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스탄불의 상류층이란 중심에서 잘 보이지 않거나 쉽게 무시되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을 결코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바로 2010년에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으로 번진, 후에 '아랍의 봄'이라 불리게 된 반정부 시위의 불길이다. 그것은 그동안 억압과 차별 속에 있었던 자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아래 하나의 신체 같았던 그 곳에도 실은 '계급'이라는 분열의 지점들이 있었다는 게 전면으로 드러난 것과도 같았다. 신체는 '순수 박물관'에서 퓌순의 부재처럼 낱낱이 해체되었고 이제 더이상  하나의 신체로 묶어둘 수 없다는 것도 명약관화해졌다. 이러한 외부 사정이 파묵으로 하여금 더욱 메블루트와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다. '순수 박물관'에 온당히 보존되어야 할 존재이니까 말이다.





 박물관에 보존되는 존재들은 '순수'해야 한다.

 여기서 순수란 있는 그대로 즉 인위적인 가공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존되는 것은 존재에 깃든 역사니까 말이다. '내 마음의 낯섦'이 한 사람의 43년에 걸친 긴 삶의 시간을, 그것도 놀랍도록 생생한 리얼리티와 함께 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는 '내 이름은 빨강'과 유사한 소설의 형식에도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내 이름은 빨강'처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등장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이어 받으면서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했으며 또한 행동했는지, 자신의 육성으로 독자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각 개인들을 보존한다. 순수 박물관에 보존되는 사물과 같은 것이다. 설령 그것이 등장인물이라 하여도 작가가 서사의 주도권을 가지지 않고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런데 박물관에 전시되는 사물들 사이엔 간격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저마다 홀로 침묵한 채, 감상자의 자의적 해석에 자신을 내맡길 뿐이다.


 이처럼 많은 소설들은 작가의 주도권 아래 등장인물들이 수렴되지만, 이 소설은 거꾸로 등장인물 각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산포한다. 그리고 그 산포(散布)를 통해 생겨난 간격 속으로 독자의 참여를 이끌어 독자 스스로 작가가 주려는 것 이상으로 메블루트가 거니는 골목과 방문한 집만큼이나 다양하기 그지 없는 삶의 결을 체득하도록 만든다. 파묵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겸허의 태도를 독자에게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최대한 감정 이입을 자제한 채, 담담히 모든 이의 삶을 서술하는 것 또한 문학 보다 더 거대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겸허의 태도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기왕에 산포란 말이 나왔으니 이제 오르한 파묵의 진짜 주제로 들어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왜 우리가 암흑을 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산포가 바로 열쇠다. 산포는 틈을 만들어낸다. 파묵에겐 그 '틈'이 아주 중요하다. 분리는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낳는다.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분리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연인과 이별로 분리되는 것도 피하고 싶어하며 모두에게 분리되어 외톨이로 남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또 없다. 그러나 파묵에겐 그 분리가 오히려 구원이 발아되는 장소가 된다. 소설 '눈'에서 그동안 시를 쓸 수 없었던 주인공 카가 폭설로 완전히 격리된 '카르스'에서 시를 쓰게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틈이 바로 암흑이다. 이것은 파묵의 소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그건 '검은 책'처럼 아내의 실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얀 성'처럼 터키 함대에게 납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새로운 인생'에선 한 권의 책, '눈'에선 돌연한 정전으로 도래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낯섦'에선 때로 지진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스탄불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집에서 뛰쳐나온 메블루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건 예전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죽음 역시 그 틈이 극대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건, 예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능성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순간들은 사실 이전의 삶이 가동을 멈추는 정지(停止)의 시점이기도 하다. '검은 책'에 나왔던 왕자의 말을 다시 빌어 말하자면, 기억 속에 알알이 박힌 과거의 소음들이 침묵하는 정적(靜寂)의 시간이다. 죽음은 그 정적이 극대화된 형태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이 찾고 갈구하던 것이 바로 이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말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만이 자신이 되는 것에 아주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왕자는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말해 줄 것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에만, 과거와 책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억 그 자체를 잃어버렸을 때만, 그 깊은 정적을 들은 후에만, 자신을 자신이게 할 진짜 목소리가 허락될 것이다.('검은 책' 2권, p. 276)



 이렇게 하여 우리는 왜 이 소설이 상대가 누구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어둠으로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어둠이 예전 삶과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란 걸. 그 간격으로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존 사회의 모든 소음과 현혹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파묵은 강조한다. 진정한 자신이 되고 싶으면 그 틈을 억지로 메우지 말라고. 간격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박물관에 전시된 사물처럼 정적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내맡기라고.

 여기까지 오면, 이제 우리는 왜 소설에서 메블루트와 쉴레이만 그리고 페르하트가 똑같이 사미하를 사랑하고 또 잃어버리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사미하를 잃어버리는 것은 '검은 책'의 뤼야와 '순수 박물관'의 퓌순이 그러하듯 갑작스럽다. 불현듯 자기 삶에 드리워진 암막 같다. 그것은 소설 처음에 메블루트를 찾아온 암흑 그대로다. 그렇게 틈이 생겼다. 그런데 셋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르다. 쉴레이만과 페르하트는 그 틈을 억지로 메우려 한다. 문득 가지게 된 간격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사미하를 끝까지 찾아다닌다. 페르하트는 더 심하다. 그는 사미하와 같이 살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흑심을 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홀연히 사라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녀만 찾아 다녔다. 그러다 결국 사미하도 떠나가게 만들고 말았다. 한 번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시도가 비극으로 끝났음에도 그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또다시 잘못을 반복했다. 페르하트는 끝내 살해당한다. 이러한 죽음은, 살해라는 점에서 틈을 억지로 메우려는 집착이 종국에는 무엇을 가져오는 지에 대한 작가의 불길한 예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블루트만은 달랐다. 그는 메우려 들지 않는다. 그대로 내버려 두고 오히려 그 틈에다 자신을 길들인다. 오직 메블루트만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행복을 경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틈으로 남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이 돌아보았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광장으로, 자신만이 가득했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타인들을 널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메블루트가 자신을 내내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의 차이'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보자 장사를 하면서, 후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이들을 단속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알지 못해 곤란을 겪는다. 페르하트는 사적인 관점과 공적인 관점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그가 흐르는 삶의 시간 속에서 축적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이윽고 깨닫게 된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차이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의 의도는 의도대로, 말의 의도는 의도대로, 그냥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이다. 그 후, 그는 전기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단속하면서 페르하트가 가르쳐준 온갖 꼼수들을 전혀 쓰지 않는다. 누가 되었건, 그저 정직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의 판단은 운명에 맡긴 채로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하게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운명이라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삶의 궤도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왜 자신이 사미하가 아니라 라이하와 도망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 사이에 놓인 다리는 물론 운명이었다. 사람은 어떤 의도를 두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 운명은 이 두 가지를 합치할 수 있다. (...) 라이하와 함께 발견한 행복은 메블루트의 인생에서 커다란 운명이었다. 그것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p. 534)


 운명은 삶이 간직한 신비다. 그것의 운행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삶에 내재된 신비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문명은 과학으로 이러한 신비를 가급적 제거해 왔다. 진리는 비밀스런 빛처럼 감춰진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되었고 그러자 자기가 바로 그 진리를 가지고 있다며 주장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그런 그들의 선동과 이데올로기로 일어난 전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지금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터키의 역사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러나 동양에선 원래 진리는 신비의 베일에 감춰진 것이었다. 노자는 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고 부처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소로 화답했다. 신비는 대립을 낳지 않았다.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누구도 진리에 기대어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우월도 배척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묵은 신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 메블루트가 말한 삶의 존경은 거대한 삶이 포용하고 있는 신비에 대한 겸허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은 '검은 책'에서 F.M. 위췬지의 말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난 바 있다.

 "동양과 서양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던 각 시기는 우연이 아니라 논리적인 결과였다. 그 특별한 역사적 시기에 승기를 잡은 쪽은 세계를 비밀과 이중적 의미로 가득 찬 신비스러운 장소로 보는 쪽이었다. 세계를 단순하고 단일한 의미로, 신비스럽지 않는 곳으로 보는 사람들은 패배했고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할 수 없었다."('검은 책' 2권, p. 106)

 위췬지는 문명이 '신비'의 개념을 상실하는 것은 사고의 '중심'에서 박탈되어 그 질서를 상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세계는 신비를 잃어버렸으며, 우리의 얼굴도 글자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얼굴은 공허하고, 과거와 같이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읽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우리의 눈썹, 눈, 코, 눈길, 표현, 공허한 얼굴은 무의미하다."(같은 책, p.107)


 얼굴을 잃어버림은 진정한 자신으로 만드는 고유한 개성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연결된다. 암흑의 포용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왔던 삶의 신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런 수용을 통해 우리는 누가 가르쳐 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내면에서 길어올린 자신의 고유한 모음(母音)으로 말할 줄 아는,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제목인 '내 마음의 낯섦'은 이걸 그대로 집약하고 있다. 메블루트가 끝내 몰개성과 획일화의 공간인 아파트를 거부하고 끝까지 골목 순례를 선택하는 것처럼 마음에 깃든 낯섦을 낯익은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곧 암흑을 포용하듯이, 불확실함과 불안정성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에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서야 우리는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삶의 모든 어귀와 순간마다 깃들어 있는 운명과 신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 '신(神)'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저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기 저 아름다운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을 믿고 싶습니다. 세상의 은밀한 균형을 주시하고, 인간을 더욱 더 문명화하고, 더 섬세하게 만들 신은 있습니다."

 "물론 있지."

 "하지만 그 신은 이곳 당신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밖에, 텅 빈 밤에, 어둠 속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눈 속에 있습니다."('눈' 1권, p. 148)


 다치바나 다카시가 우주로 나갔던 경험이 있는 이들과 인터뷰 한 바에 따르면, 한 번 우주에 갔다 왔던 이들은 한결같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광막한 우주의 크기에 압도되어 신이 아니고서는 이런 거대한 질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연적으로 들기 때문이란다. 이는 곧 먼 우주에서 보면,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이런 왜소함은 우리 역시 굳이 우주를 나가지 않아도 현실 속에서 매번 경험하는 바다. 


 왜소하기에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왜소하기에 나보다 더 거대한 것에 착 달라붙어 호가호위 하듯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왜소함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 왜소함이 만들어내는, 삶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암흑들을 무작정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것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함께 어울리며 천천히 동행하라고 권한다. 어떤 암흑이 삶이 감춘 또 어떤 신비와 연결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에 오스만이 본 천사처럼, 신은 자신의 것을 모두 내려놓은 순간 문득 도래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올 다양한 가능성들을 큼직한 자루에 넣어 산타클로스처럼 등에 지고서.

 이래도 파묵의 조언에 설득되지 않는다면, 버트란드 러셀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떨까?


 인간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왜소함에 직면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내 마음의 낯섦'은 당신에게 잠재된 위대함에 다가서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위대한 여정이다. 아니, 앞서 내가 파묵의 다른 소설들을 인용한 것처럼 실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의 여정을 이룬다. 밀란 쿤데라의 말 그대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특히 연속성이 강하고 전과 후의 작품들이 상호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뷰도 비록 '내 마음의 낯섦' 한 권에 대한 것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소설들을 아우르며 썼다. 덕분에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졌는데 이게 다 내가 느낀 파묵의 진심을 당신에게 잘 전하기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파묵을 본받아, 내 필요에 따라 그의 주제를 재단하지 않고 가급적 그가 주려고 했던 말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나름 작가에 대해 내 겸허의 태도를 보이려 한 것이니 더욱 아량를 베풀어주길 빈다.


 새벽 내내 이 글을 썼다. 그렇게 파묵과 동행했다. 문득 커피가 그리워 부엌으로 가보니 창으로 아침이 어느새 찾아와 있고 바깥 풍경이 하얀 설원으로 변해있다. 문득 소설 '눈'에서 시인 카가 카르스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렸던 '눈의 정적'이란 말이 생각났다. 파묵에게 있어 정적은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다. 과연 그런 것처럼, 눈 앞의 하얀 세계가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였다. 한동안 틈을 두고 풍경을 조용히 응시했다. '순수 박물관'의 사물이라도 된 듯.



 [소설에서 메블루트를 매혹시켰던 그림이다. 그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하여 페르하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가계 벽에 걸어두기까지 하면서 바라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묘지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묘지란 대표적인 정적의 장소다.  소설 '검은 책'에서 왕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속의 고요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될 수 있는 황량한 사막에 있는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 사이에 있는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에 있던 나무를 부러워한다고도 말했다. 메블루트 또한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가고 이 그림을 바라본다. 정적을 두고 신이 도래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을 통해 영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자신이다앞으로 무엇이 그려질지 모르는,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순백의 영혼이다.]


 긴 겨울은 내면의 순례를 떠나기에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 안내자요 동반자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권해 본다. 당신도 이 겨울의 어느 순간, 당신의 신을 만나게 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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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7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12-1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반칙, 헤르메스님. 이건 리뷰가 아니잖아요. 한 편의 버젓한 평론이지.....

도대체 헤르메스님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헤르메스님이 리뷰를 쓰신 책을 syo는 절대 리뷰하지 않겠습니다......

ICE-9 2017-12-17 22:54   좋아요 0 | URL
앗! syo님!! 이런 졸문을 감히 평론이라 추켜세워주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빨리 댓글로 인사드려야 했는데, 요즘은 너무 바빠서 이렇게나 늦었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댓글에 진짜로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