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필립 K 딕의 '토탈리콜'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처음으로 가상 여행 회사 ‘토탈리콜’에 갔을 때다
  그 회사의 사장이 주인공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다녀온 모든 여행의 공통점이 뭐였죠?”
  “네?” 주인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사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그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여행이란 이미지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가는 것으로 흔히 그려진다. 그렇게 만일 이 이야기가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도 역시 이와 똑같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시간에 있던지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라고! 당연한가?  하지만 물론 여기엔 몇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간이 오로지 당신만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시계로 재곤하는 그런 테일러가 만든 이래로 규격화된 근대의 시간말고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흔히 '배꼽시계' 같은 것으로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오로지 주관적인 개인만의 시간말이다. 그런 시간 안에서라야 모든 시간에 있어서 공통점은 당신이란 말이 가능할 것이다. 하긴 결국 달리 생각해보면 공간이든 시간이든 어차피 당신을 떼놓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경험할 주체가 없다면 시간이든 공간이든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대로 공간이든 시간이든 오로지 경험으로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그 둘을 경험할 수 있는 당신이야말로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참 많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베르그송도 근대적 시간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특히나 근대적 시간은 시간을 단위별로 하나하나 쪼갬으로써 무엇보다 그저 순수한 흐름일 뿐일 시간을 억지로 공간화시키고 있다고 일갈한다. 베르그송은 그래서 주장한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자고! 근대가 행한 시간의 공간화로 부터 시간을 해방시키면 시간에게 남는 건 오로지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흐름, 한 마디로 '지속'밖에는 없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시간이 절대로 나눠질 수 없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순수한 '지속'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경험할 수 있는 주체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시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그것을 그대로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주체, 즉 당신 뿐인 것이다. 결국 시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베르그송에 의해서도(나만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죄송하지만) 시간이란 당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보면 하나마나한 얘기를 이렇게 장황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그저 단순히 당신을 어지럽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공간이든 시간이든 따지고보면 당신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해서 만들어지는 '시공'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숟가락 장면 처럼 사실은 숟가락이 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숟가락을 의지로 구부렸기 때문에 정말 구부러진 것이 아니겠냐는 그런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길게 늘어놓고 있을 뿐인 것도 같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도 장황한가 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정말 이 심심풀이 땅콩으로도 쓰이지 못할 얘기를 하게 만든 이유를 말해야겠다. 그것은 한 권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찰스 유의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이 책은 단순하게 말한다면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제목 만큼이나 내용 또한 종잡을 수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은 우리가 익숙한 그런 시간 내용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전에 그 어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을 읽었든, 그것이 웰즈의 '타임머신'이든 패리 앤더슨의 '타임패트롤'이든 코니 월리스의 '둠스데이 북'이든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 어떤 소설과도 같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읽어보면 아실 것!'이란 말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그 이유는 이렇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룬다기 보다는 '시간 여행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했던 대표적인 시간여행을 만일 당신이 읽고 있다고 한다면 찰스 유는 당신의 머리속으로 들어가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의식을 그대로 타자기로 재현해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그런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밟을 것 같은 그런 사유의 과정들을(이것도 모호한가? 그럼 관습화된 장르적 독서 행위는 괜찮은가?)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언제나 사물을 온전히 담기엔 모자름이 있다고 말했던 건 노자였던가? 아무튼 그의 말대로 아무리 내가 정확하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려해도 제논의 거북이 처럼 어쩔 수 없이 남는 간극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간극은 내버려두고 바로 작품으로 뛰어들자! 수영을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따지지 말고 무조건 뛰어드는 것이란 말도 있듯이! 물론 익사의 위험이 있지만 어쩌면 돈오점수와도 같은 개안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니... 

  소설의 배경은 타임머신이 상용화된 시대다. 이것은 시간여행 소설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를 비유한 것과도 같다.  소설을 한 번 직접 인용해볼까? (( )안은 나의 말이다.)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빌린다. (사람들은 서점에 가서 웰즈의 '타임머신'을 산다.)
  사람들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웰즈는 미래로만 가잖아! 그는 그 책을 다시 꽂고 비디오방으로 향한다. 과거를 바꾸려 노력하는 마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벡투더퓨처'를 보기위해서) 


  그리고 과거로 돌아간 후에야 인과율이 자신이 생각하던 방식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붙들려버린다. (이런 마틴이 엄마랑 연애를 하니까 자신이 사라지네...) 

 자신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에,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에, 가려고 시도하면 안 되었던 곳에, 문제가 발생한다. (웰즈의 타임머신이 어마어마한 미래로 가버리자 거기서 차마 믿기힘든 인류의 몰락을 보게되고, '벡투더퓨쳐' 2부에서는 욕심 때문에 가져온 스포츠 연감 기록으로 마틴의 현재가 지옥으로 바뀐다.) 

 (...) 내가 개입하는 곳은 바로 그 시점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구출해오는 것이 내 일이다(p.36) (그래, 당신은 찰스 유 작가이니 모든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얼마든지 펜으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액션'을 외침으로서 구해낼 것이고...) 

  자아, 이렇다. 이렇게 찰스 유의 소설 속 문장들은 얼마든지 현재 시간여행 장르를 소화하는 우리의 독서경험, 영화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읽기'를(혹은 '보기'를) 쓰는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경험을 또 달리 재현해내는 것이며 그렇게해서 내용 자체 보다는 그 내용을 음미했던 당시의 자신으로 되돌려보내는 소설인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보다도 집착의 산물이다.'란 말이 소설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시간과 감각(그렇게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경험 속에서 체험된 시간만을 진정한 시간이라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시도하며 그렇게 소설 자체가 하나의 마들렌으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집적된 그 무수한 시간 경험중 어쩌면 아주 특별했거나 아니면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경험이었으나 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색다른 빛을 내면서 다가오는 그런 시간 경험으로 돌려보내는 타임머신으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타임머신은 누군가 시간을 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운전자가 있다. 시공을 멋대로 횡단하면서 온갖 우주의 시공간에 간섭가능한 운전자는 신과도 같다. 그렇게 그 타임머신이 운신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운전자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를바 없다. 그런데 그것이 소설속 우주라면? 그렇다면 모든 문장마다 간섭가능한 작가야말로 신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찰스 유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를 특별히 'SF 우주'라 부르고 아예 고유한 이름마저 붙인다 'TN-31' 우주라고. 그것은 모든 소설이 아닌 단 하나의 이 소설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만을 위한 우주임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수리공으로 일한다. 그의 임무는 시간 속에 조난당한 자들을 구해내는 것인데 그 행위는 주로 그들의 시간 문장을 시제 문법에 맞게끔 적절하게 고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지고보면 그는 수리공이 아니라 차라리 '교정자'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시제 고치기는 자의적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이 되는 문법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그 문법이 바로 '시간문법학'이다. 그 때 그 때의 시간에 알맞은 시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문법이다. 이쯤 풀어놓고나면 앞서 내가 얘기했던 그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난자들을 구조하는 것은 작가가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문장을 고치거나 새로 씀으로서 구하는 것과 똑같고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문법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렇게 시간문법학에 맞게끔 고치는 것과 또 똑같다. 그러니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찰스 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이 소설은 마치 진짜 찰스 유가 하나의 시간 여행 소설을 쓰면서 의식속에 일어나는 자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의식적 시간을 다룬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루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앞에서 찰스 유의 소설이 가진 독특성을 말하면서 '이 소설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소설을 읽는 경험을 다룬 소설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사실 그 말도 틀린 것이다.  이 소설을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에 충실하자면 그 어떤 소설보다도 '진정한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왜냐면 누누히 말해온 대로 정말 시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베르그송의 말 그대로 순수한 지속 밖에는 없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개인' 밖에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다 사람마다 다르며 지극히 상대적이다. 굳이 그것에 관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구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같은 1시간이더라도 내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느껴졌던 적이. 싫은 사람이 있을 때면 1년 보다도 길어보이고 사랑하는 연인과 있으니 1분 보다 더 짧게 느껴졌던 적이 말이다. 바로 그 경험이 진짜 시간인 것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그렇게 서로다른 상대적 시간들을 형식적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H.G 웰즈의 '타임머신' 같은 것은 굳이 '양자이론' 때문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 어떤 기계도 오로지 주관적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단일한 수치로 절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외부적 세계로의 시간여행이야 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정말 가능한 것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의식적 시간 여행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만일 어린시절을 회상한다면 바로 그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고 만약 당신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그것으로 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 있어 당신에겐 그 어떤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마치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영원히 하나의 시간만을 사는 '타임루프'에 갇혀있듯이 말이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당신이 현재 있는 그 공간에 집착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당신은 늘 시도 때도 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소설 속 찰스 유가 시간 시제를 살짝 바꾸는 것 만으로도 시간 패러독스에 빠져버린 이들을 구해내듯이 당신 역시 그 기억을 뇌리에 새길 때마다 당신에게 존재했었던 그 다른 시간대로 여행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최초로 시간 여행기를 만든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고 과거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데자 뷔가 바로 현재의 기억이 아닐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현재를 기억할 수 있다면, 과거를 경험하는 일이 불가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계일까요? 이 기계, 저와 제 아들이 함께 만든 이 기계는, 그런 일종의 인식 기계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장소에서와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탑승자의 마음안에서도 작동하지요. (p.258) 

  이 말대로 타임머신은 인식 기계다. 당신의 마음에 나이테처럼 그려진 그 모든 기억들을 인식하는 기계.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아마도 진정한 타임머신의 정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는 바로 당신의 머리 자체 내부에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을 당신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궤변인가? 아니 그만큼 우리가 근대가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관념에 너무 뼈속 깊이 지배당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큼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관념은 라캉이 말한 일종의 초자아(인간을 멋대로 규정하려는 외부적 사회적 권력 같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가 싶다.)이다. 우리의 내부적 시간을 거기에 맞춰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그러니 사실은 나이라는 것도, 늙음과 젊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시간은 오로지 당신 혼자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누구의 시간을 대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나이라든가 젊음과 늙음 식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실 시간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들이다. 공간은 우리를 가둘 수 있지만 그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공간을 횡단하고 때로는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당신 자신이 얼마든지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찰스 유가 앞서 말했듯 SF를 읽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약속된 '시간'이란 형식으로 서로의 시간들을 맞추듯이 그저 오로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시간 경험을 '장르 소설을 읽는 경험'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추체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당신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찰스 유의 시간'을 경험하지만 거기에 또 그것을 읽고 있는 '당신 자신의 시간'마저도 경험하는 것이다. 글이란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그것을 쓴 자와 읽는자의 시간이 서로 중첩 하는 것이지 않은가. 찰스 유가 계속 장르소설적 독서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간의 중첩'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누구의 시간도 다 개별적으로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로 겹쳐질 수 없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찰스 유가 인도하는 여행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 소설을 따라 이동하면서 여기에 있는 그 어떤 문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억 속의 어떤 시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면 거기에 따라 그렇게 당신만의 시간 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광대한 우리만의 시간이 있으니까... 이것을 소설에서 찰스 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극한이며, 그 극한이란 현재이다 (P.323) 

  멋진 말이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보면 이 말이야 말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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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6-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죠.

ICE-9 2011-06-23 20:46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도 벌써 읽으셨군요^ ^
한 편으론 이민자의 시간 경험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 해요.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시간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은 이 소설의
시간 처럼 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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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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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찬찬히 읽었다. 밤에 조금 아침에 조금 때에 따라서는 가지고 나가서 쉴 때마다 조금씩. 그래서 초반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오웰의 문장들이 그렇게 쉽게 소화되는 것들도 아니곤 해서 가다 끊고 다시 앞에서 읽어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했고 처음엔얼른 마음 속으로 콕콕 박아넣기가 어려웠던 소설이다. 그렇게 볼링의 어린 시절 얘기가 끝나고 나서, 그가 잡지 못했던 거대한 잉어가 가득 있는 연못 얘기가 나오고 나서 5장 부터는 그나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부터는 그저 일상의 빈 부분만을 채우곤 하던 그 책이 오히려 책을 읽다 빈 부분만을 일상이 채우도록 만들고 말았다. 오웰의 이야기는 신기했다. 1939년에 지어졌다는 이 소설이 전혀 쾌쾌묵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세밀하게 복원해내는 일상들은 그대로 지금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많이 겹쳐지기도 했다. 특히나 이런 부분... 

 물론 우리 같은 사람의(주인공은 조금은 아래에 위치하는 중산층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같이 잃을 게 있다고 상상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엘즈미어로드 주민의 9할은 자신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즈미어로드와 그 주변 단지 전체는 사실상 '헤스페리데스 주택단지'라는 거대한 사기판의 일부이며 이 단지는 '명랑 신용 주택금융조합'의 소유다. 주택금융조합은 아마 현대의 가장 영약한 사기 집단일 것이다.( ...) 주택금융조합의 협잡이 놀라운 것은 당하는 사람들이 협잡꾼이 자기들한테 무얼 베푼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기꾼한테 한대 얻어맞고도 그의 손을 핥는 격이다.(...) 우리가 실은 소유주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 모두 집값을 지불하고 있는 중인데 마지막 할부금을 내기 전에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그런 심리를 더욱 부채질 한다. 우리는 모두 매수된 것이며, 더 딱한 점은 우리 자신의 돈으로 매수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하우스 푸어'랑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볼링의 아버지가 하시는 종자 가게가 전국적 체인망의 하나로 들어온 새라진 때문에 서서히 망해가는 모습은 또 지금 한국의 기업형 슈퍼마켓이 골목마다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었던 하루벌이 자영업자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는 것과 또 어찌나 그리 닮아보이던지...  그렇게 오웰의 소설을 읽다보면 무려 7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의 한국 모습을 참 많이도 볼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에 맞먹는 그 오랜 시간동안 자본주의는 어쩌면 그리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인지, 어쩌면 그리도 내내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착취함으로써만 존속해왔는지 참 많이 씁쓸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하여 내가 꼭 산소가 바닥나 조금의 공기를 마시려 오히려 물 밖으로 입을 내밀고 뻐금거리고 있는 언젠가 본 연못의 잉어 같았다. 

  아마도 이 책의 원제 Coming up for Air'가 뜻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상황일 것이다. 조금의 공기를 얻기 위해서 물 속이 아니라 오히려 물 밖에서 구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 그런데 왜 절박하고, 조금의 숨이라도 얻으러 그렇게 나가기를 애쓰는 것일까? 

  그건 한 때 기분전환 같은 것이 아니다. 문득 중년이란 삶이 생각해보니 가족이든 일이든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갑자기 인생의 의미를 잃은 것 같이 느껴져서는 더더구나 아니다.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를 보면 그런 남자가 나온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삶을 살던 남자가 공사장을 지나다가 하마터면 돌에 깔려 죽을뻔 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남자는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경험을 하고서야 문득 자신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알고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홀연히 사라진다. 1930년대 공황기의 미국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살아야했던 미국인은 모두 이렇게 홀연히 자신의 인행으로 부터 달아나는 꿈을 꾸곤 했었다. 당시 유행했던 서부극에서 영웅들이 마지막에 결국은 자신을 붙잡는 연인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터벅터벅 황무지로 사라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저마다 다 그렇게 영화 속 '쉐인' 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웰의 조지 볼링이 그렇게 경마를 하다 우연히 벌게된 17파운드를 가지고 일탈을 꿈꾸는 것은 그런 것과 다르다. 물론 그 역시도 '주당 5에서 10파운드 벌이'의 인생이고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도 서슴없이 반말을 듣는 '터비(tubby: 뚱보)'인데다 사람들이 뚱보에게 가진 선입관에 스스로 끼워맞추며 살아가지만, 그렇게 또 돈에 기갈이 든 것 처럼 구는 밥맛 없는 아내와 애정없는 가정생활을 하느라 힘겹긴 하지만 정작 그가 스스로 '전쟁전 여름'이라 부르는 그 어린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그 곳으로 가고 싶어하고 어린 시절을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자꾸만 엄습해오는 전쟁의 기미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초반에 온 영국인의 관심을 받으며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여자 다리 한쪽'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 한쪽만 남은 다리는 지금은 사라진 나머지 신체가 언젠가는 도래하리라는 예고이며 바로 그 사라진 신체는 전쟁을 의미한다. 소설의 후반부 볼링이 그토록 원하는 곳으로 갔을 때 우연히 훈련중 실수로 그 곳이 폭격을 당하는데 볼링은 거기서 또 다시 떨어져나온 다리를 보게된다. 그 때 볼링은 정말 공습을 당하는 줄만 알았고 그렇게 그건 전쟁 상황에서 문득 뛰쳐나온 다리 한짝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초반은 이렇게 내내 '머리 위로  폭격기 한 대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p.30)' 처럼 끊임없이 전쟁의 분위기가 은근 슬쩍 드러난다. 따라서 그가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전쟁 때문이며 그것은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전쟁을 두려워하는가? 

   낯선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면 모두 밀랍인형 같다는 상상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들 역시 나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지 모른다. 그리고 요즘 내가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이 기분, 즉 전쟁이 임박했으며 전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리라는 기분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터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내 곁을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포탄이 터지고 흙이 튀는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p.43) 

 그것은 여기 나와있는대로 전쟁이 모든 것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세상을 모조리 다른 무엇으로 바뀌버리기 때문이다. 그 어린시절의 전원적인 자신의 마을 로이빈필드가 1차대전을 겪고난 현재 예전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져버린 것 처럼. 그렇게 자신이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연못이 있던 곳이 정신병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되어버린 것 처럼. 조지 볼링에게 익숙했던 모든 삶이, 변함없이 이어지리라 확신했던 모든 삶이 전쟁으로 인해 다 무너지고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숨쉬러 나가고 싶은 곳은 전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함이다.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확고한 무엇을 스스로 찾게되길 바란다. 그래서 '전쟁 전 여름', 그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곳, 성실한 아버지가 열심히 일만하면 어려움 없이 살리라 순박하게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곳, 

  끼니 같은 것들에 관한 한, 우리 집은 모든 게 시계처럼 돌아가는 집들 중 하나였다. 시계 같다고 하면 기계적인 것이 연상되니, 그 보다는 자연적 흐름에 가까웠다고 하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우리는 해가 다시 뜰 것을 알듯이 내일이면 아침 식탁이 차려질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p.75) 

  그가 가고자 했던 곳, 그가 진정 찾고자 했던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 따라서 초반에 조금은 지루할정도로 아주 세세하게 복원되는 그의 어린시절은 사실은 그 만큼 그가 절박하게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례로 그가 지금 그의 현실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라. 어린시절의 묘사에 비한다면 그건 그저 고속으로 질주하는 KTX의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 정도의 묘사 밖에는 안되지 않는가. 

 하지만 물론 그의 그런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한다. 그토록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의 마을을 찾았지만 이미 모든 게 변해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 변모의 절정은 바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에서 나타났다. '전쟁 전 여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의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던 연인 엘시 워터스는 '어깨 퉁퉁하고 몸집 푸짐한 할망구가 다 되어 뒤축이 몹시 닳은 구두를 신고 뒤뚱뒤뚱 가고 있었(P.294)'던 것이다. 그는 경악한다. 전쟁은 실로 너무도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그렇게 거대한 잉어가 상징하듯이 많은 것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 중 어이없는 보직과 그 후 그가 보험회사에 취직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주었던 '죠셉 침 경'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더 확고해진다. 전쟁과 그 후의 영국 자본주의 사회가 모두 '죠셉 침 경'으로 묶이는 것은 전쟁 때와 지금의 영국 자본주의가 전혀 다르지 않은 단순한 연속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죠셉 침경 아래에서 전쟁을 치르며 목숨을 걸었듯이 이제 전후의 영국 자본주의 아래에선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쟁과 전후의 영국이 별로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은 그 모든게 전쟁으로 일어난 결과임을 또 짐작하게 만든다. 따라서 당연히 현실의 영국을 지독히 혐오하고 있는 볼링에게 그 모든 걸 가져온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내내 읊조린다. 다시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면 이제는 진압봉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고 마구 잡이로 끌려가는 그런 개인의 인권이 한없이 유린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는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과감히 길을 나섰던 것이나 결국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초라한 일상인으로 돌아간다. 초반에 그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뭔가를 잃지 않을까 잔뜩 걱정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호기롭게 예전의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힐다가 어떻게 나와도 초연했던 그가 막상 자신의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정말로 힐다를 잃는 건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렇게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된다. 그의 걱정은 기우였고 역시나 그가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힐다의 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계략에 놀아난, '끊임없이 백치짓을 하는' '가치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지 할 시간이 있는' 그런 '주당 5에서 10 파운드 벌이를 하는' 넉살 좋은 '뚱보'로 돌아간다. 곧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거대한 전화의 불길이 닥쳐오는 것도 모른 채... 

  일상은 얼마나 견고한 것일까?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얼마쯤 될까? 비관적인 소설의 결말은 오히려 그러한 희망의 근거를 없애면서 더더욱 독자들에게 일상에 함몰되지 말 것을 호소한다. 일상은 전쟁 한 번으로 확 바뀌어버릴 만큼 여지없이 약한 것이며 거대한 수레바퀴안에 있는 인간의 운신의 폭은 좁을 지 모르지만 그건 그 자신이 그 수레바퀴에 머무르길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견고해 보이는 일상은 볼링이 언젠가 씹었던 '프랑크 프루터'안의 생선살 처럼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은 일상에 함몰되는 것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략에 속아 선택한 것 뿐이다. 힐다의 계락에 빠져버린 죠지 볼링이나 초반과 중반에 나오는 한 개인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자본주의 사회가 구조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우리의 것을 원하는 누군가의 계략과 음모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웰은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 언제나 홀로 깨어있으며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제 머리로 헤아리면서 의심스럽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라며... 

  모로코에 있는 마라케시의 한 요양원에서 오웰은 폐질환을 앓는 가운데 이 소설을 써내려 갔다. 소설의 조지 볼링 처럼 한 번 마음껏 숨쉬어 보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바라는 일이었을 것이다. 닥쳐오는 전화의 예감으로 그러지 않아도 답답증을 느꼈던 오웰에게 이 소설은 그렇게 상상적으로나마 제대로 숨쉴 수 있는 여지가 되어주었으리라. 소설에서 조지 볼링은 제대로 큰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그저 그런 누추한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볼링이 닫아 논 그 문 뒤에서 제대로 큰 숨을 한 번 쉬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웰이 열어놓은 창으로... 그리고 오웰의 속삭임을 듣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네 안에 있다. 네가 원하면 그 무엇이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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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뭐를 좋아하냐고 물을때 선뜻 대답하기 곤란해지곤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일본 여류 장르소설가에 대해서 묻는다면 아무 갈등없이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늘 내게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둘은 바로 '화차'의 미야베 미유키와 '무라노 미로'시리즈의 기리노 나쓰오이다. 다들 '사회파'로 묶일 수 있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그렇게 비슷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미야베 미유키는 풍경화가에 가깝고 기리노 나쓰오는 초상화가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그렇게 같이 범죄를 그리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그 범죄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데 중점을 둔다면 그에 반해 기리노 나쓰오는 그 범죄를 일으키거나 추적하는 사람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둔다. 읽고나면 가슴에 왠지 모를 톱밥을 씹고 있는 듯한 씁쓸함이 나는 것도 같지만 미야베 미유키에선 그것이 머리로 이해함에서 온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선 마치 활자가 그대로 주먹이 되어 가슴을 내리친 듯 멍든 가슴이 만들어내는 공감의 떨림 가운데서 온다. 그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우리의 시선을 희생자 보다는 범죄자에게 맞추기 때문이며 반면 기리노 나쓰오는 범죄자 보다는 희생자에게 더 시선이 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유키에게선 잡기 위한 추적이 되지만 나쓰오에게선 찾기 위한 탐문이 되는 것이다. 추적이나 탐문이나 그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는 동일하다. 언제나 쫓는자 혹은 찾고자 하는 자와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다. 추적하는 자는 쫓기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하고, 탐문하는 자는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한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미유키의 추적에서 타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 되는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 범죄자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사회의 모습이다. 반면 나쓰오의 탐문에서 그 찾고자 하는 자의 입장에 섰을 때 정작 보게되는 것은 오로지 그 개인 뿐이다. 그 개인이 당했던 생생한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당해야 했던 그의 처지 뿐이다. 그런데 나쓰오는 언제나 그 처지가 그리 특별하지 않게 그린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얼마든지 때에 따라서는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그가 특별히 잘나서도 못나서도 아니고 나빠서도 착해서도 아니며 가진게 많다거나 적어서도 아니요 사회적 서열에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언젠가는 죽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이 분명한 고독한 그런 보통의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야베 미유키에게서 범죄는 사회적 모순이 들끓는 용암이 가장 얇은 지층을 찾아 뚫고 나오듯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만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 범죄란 그저 그런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래도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채우며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발악이 된다. 단순한 욕망의 충족만은 아닌 어떡하든 이 삶이란 것에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절박함의 표현이 된다. 그래서 아주 괴물같은 주인공이 나오는 '아임 소리 마마' 조차 그 주인공이 살려고 발악하고 발악하다 끝내 물에 빠져 익사할 때는 왠지 처연함마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나 그 밝고 어둠엔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아예 어둡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에게 있어선 그 어둠을 창 밖에 두고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기리노 나쓰오에게 있어서는 그 어둠 속에 완전히 함몰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야베 미유키의 어둠에선 우리가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지만 기리노 나쓰오의 어둠에선 쉽싸리 빠져나올 수 없다. 이 둘의 우열은 사실 나누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어둠의 매력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따라선 기리노 나쓰오에게 손을 더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둘은 작품에 담는 것도 작품을 통해 바라보는 것도 다르므로 결국은 해와달 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작가들이다. 대낮엔 태양의 하프소리를 듣고 심야엔 달빛의 피리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소슬한 바람이 대나무 잎새를 서걱거릴 때, 개다리 소반 위 호롱불 흔들리는 불빛처럼,  그렇게 지워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지워지는 가느다란 피리소리를, 팔배게를 하고 누워, 호롱불 그림자가 천장에 그려내는 비틀거리는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들에서 그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라면 그래도 - 이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꼽고 싶다. 

  개인적으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다크'를 아주 충격가운데 읽었고 - 이것이 정말 작가가 되기 전에 그냥 평범한 주부로만 살았던 여자의 작품이란 말인가? 하고 정말 놀라기도 했고 이런 어둠을 품고 어떻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새삼 일본 여자가 제일 두렵다는 이토 준지의 말이 가슴에 팍 와 닿기도 했다 - 그것이 만들어내는 블랙홀과도 같은 어둠에 매혹된 탓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 그녀의 다른 소설 '아웃'이나 '아임 소리 마마' '잔혹기' '암보스문도스' '그로데스크'를 다 읽어 보니 역시나 무라노 미로 시리즈야 말로 기리노 나쓰오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내가 기리노 나쓰오에 대해서 읽고 혹시나 그녀를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야말로 그 시작은 무조건 무라노 미로 시리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난 마지막 '다크' 부터 읽었고 그 때는 앞의 시리즈가 번역이 안된 탓에 어쩌다 보니 아직 1권도 읽지 못한 지경에 이렇게 2권부터 읽게 되었지만 당신은 운좋게도 이미 1권이 번역되어 있으니 순서대로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거기다 '다크'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 '물의 잠 재의 꿈'까지 덩달아 나와주었으니 이건 팬으로서 하는 말이지만, '무라노 미로를 벗하라!'는 신의 계시나 다름없다. 

  내용에 대한 언급 없이 오로지 이렇게 추천의 말만으로 리뷰를 끝내는 경우는 전혀 없는 나인데 이것만은 예외로 해야겠다. 입은 근질근질하지만 무라노 미로 만큼 그저 읽고 어둠에 푹 잠겨, 느껴야 할만한 소설은 없는 것 같으니 억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울 수 밖에.(하지만 이래놓고 못 참게되면 언제 여기로 다시 돌아와 마구 입을 놀리게 될 지 모르겠다. 어쩌면 '물의 잠 재의 꿈'에서 같이 얘기해버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장 그르니에 '섬'의 서문에서 알베르 까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여기에 인용하고 싶다 

  "나는 정말 부러워한다. 이 책을 이제 처음으로 펼쳐서 읽게 될 당신을!" 

   나 역시 알베르 까뮈와 똑같은 심정이다.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1권 부터 차례대로 읽게될 당신을 너무도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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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첫 장면에서 기겁했다. 안그래도 제목이 으스스한데 첫장면부터 고어적 연출이 심상치 않아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려고 이렇게 세게나가는가 싶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얼른 든 생각으론 정말 제목처럼 내내 사람으로 만든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두번째 소설인, '식인종의 요리책'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요리와 정치의 관계를,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와 요리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른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영국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라는 영화다. 상영되자마자 컬트의 반열에 올라서버린 그 영화에서도 이 소설 처럼 카니발리즘(食人)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루었었다. 아마도 결말이 요리사가 독재자를 정성껏 요리해 파티에 참석한 고관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영화처럼 이 소설도 그렇게 카니발리즘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으로 갑작스레 부흥하게된 한 해변 도시의 레스토랑 알마센의 70여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게 허구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교묘히 교차시켜 70여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겨우 274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 집약된 기다란 역사적 줄기를, 그것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내력을 동등하게 소상히 다뤄가며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한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리사들과 그들의 요리책을 마치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그렇게 그야말로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행복한 결합이라 할 만하다. 

  기이하게도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끌어들인다. 모두 파시즘이란 전체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소설의 초반 그러니까 알마센의 근원이 되는 레스토랑을 세웠으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기도 한 신비의 요리책 '남부해안지역 요리책'을 쓴 저자이기도 한 카글리오스트로 쌍둥이 형제는 어쩐지 로마를 세웠던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했듯이, 카글리오스트로 형제도 고국을 떠나 머나 먼 아르헨티나에서 그들만의 레스토랑을 만든다. 그렇게 레스토랑은 어쩌면 정말 '로마'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 있으면서도 '로마'인,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서 존재하는지 모른다. 카글리오스트로 형제에게 신비의 요리법들을 전수했던 마시모 롬브로소 역시도 이탈리아인이었다.(롬브로소란 이름때문에 자꾸만 '생래범죄인설'을 만든 체자레 롬브로소가 떠올랐다. 롬브로소는 현재 프로파일링 기법의 창시자라고도 일컫는데 그렇게 그는 범죄인의 외모를 집중 연구하여 범죄인이 가지고 있는 외모적 특징들을 추려내어 진짜 범죄 수사에 응용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범죄인의 외모를 찬찬히 관찰하는 롬브로소의 모습은 왠지 어떻게 요리할까 하면서 사람 고기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세사르 롬브로소의 모습과 많이 닮아보인다.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의 연상적 작용을 위해서 롬브로소의 이름을 정말 택했던 것은 아닐런지....) 알마센은 바로 이들 세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었는데, 사실 마시모는 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아르헨티나에 눌러 앉아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1차대전은 알마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고 더구나 앞서도 말했듯, 알마센을 부흥시킨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1차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바다를 넘어 아르헨티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불행이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고, 재앙이란 사회적 계층 같은 건 무시하기 마련이며, 처절한 액운이란 혈통 같은 건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민자들 역시 유럽에서 먼저 건너온 친지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 거지꼴이 되어버렸고, 그러는 사이 엉겁결에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되돌가갈 수 없는 철조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탓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고, 수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잃은 홀아비 신세가 되었으며,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든 전쟁이라는 괴물은 마을 곳곳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아르헨티나에도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돌아갈 곳을 잃고 눌러앉게 되었다(p.43) 

  이렇게 말하자면 알마센은 1차대전으로 고향을 잃은 자들로 만들어진 그들이 아르헨티나에 만든 새로운 영토 혹은 고향이었으며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였다. 그렇게 발마세다는 이 알마센이 가진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써의 특성'을 형성하고는 뒤이어 바로 그 외부적 성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바로 그 뒤 초창기 맴버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다시금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새로운 후손들이 알마센으로 오게되는 장면을 통해서다. 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되었던 것은 바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체주의화되어가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발마세다가 알마센이 가진 외부적 특성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알 수있다. 그것은 '알마센'이 다름아니라 바로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알마센을 만든 카글리오스트로의 형제가 사실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던 우리의 의심이 사실은 맞는 것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그 쌍둥이 형제에 의해서 건국된 로마가 초창기에 공화정의 형태를 띄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렇다. 그렇게 로마 초창기 공화정은 전체주의에게 있어 극단의 정치적 형태라 할 만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에 있어 알마센의 의미를 아르헨티나 독재에 대한 저항 공간으로 만든다. 그가 이렇게 하필이면 레스토랑을 그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요리가 가진 이타적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요리는, 특히 레스토랑의 요리는 더욱 더 그렇듯이,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을 위해 혹은 더불어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초부터 이타적 행위인 요리와 오로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독재적 권력을 그렇게 대비시키려는 뜻에서 레스토랑을 그런 저항의 공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소설은 알마센을 거쳐가는 세대들이 모두 전체주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신념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희석되어 가듯이 그렇게 알마센을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온 그들의 모습도 끝내 그들의 가장 마지막 후예 '세사르 롬브로소'에 이르러서는 단절되고 마는데, 바로 그가 소설의 초반부 자기 엄마를 물어뜯었던 그 사람이다. 

  마지막 후손, 세사르에 와서 알마센은 열린 이타적 공간에서 폐쇄적인 이기적 공간으로 변질되고 요리의 의미도 더이상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그것은 그가 그의 이모와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는데, 발마세다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 드러내준다.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정국은 육식문화를 부채질했다. 역사르 되짚어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어떤 스타일의 음식이 유행했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시기는 나름의 음식 문화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며, 유행하는 맛과 풍미는 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과 별개일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머리' 보다는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음식을 보면 시대적 열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결함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혐오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결점과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의 기록에 따르면 독재정권이 마련한 화려한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재자가 군림하면 대다수의 대중은 굶주리고 허기지게 되며, 대부분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차분한 슬픔 속에서 빵 한조각을 나누었고, 그런 그들에게 포도주는 수세기 전 부터 그래왔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여겨졌다.(p.238 ~ 239) 

 이렇게 독재정권과 인육이 자주 관계를 맺는 것은 인육이야말로 여기 언급한 대로 독재정권의 얼 그렇게 정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향연이란 오로지 내 배를 불리기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 받고 고통받는 가난한 서민들이 빵 한 조각이나 포도주 한 잔을 나누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지막에서 발마세다가 굳이 예수님의 보혈을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이타적 향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세사르의 존재를 통해 발마세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세사르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엔 무엇이 작용한 것일까? 소설은 세사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상세하게 말해준다.

 세사르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취해서는 우연히 경찰청장의 장례식을 차로 들이받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테러리스트로 오해 받아 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다. 그 후 정권에 의해서 앎센 자체가 반정부테러세력으로 의심받으면서 알마센 마저 폐쇄되기에 이른다. 세사르의 엄마는 세사르를 임신한 채 경찰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는다. 이전에도 페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탄압은 받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을 정도다. 세사르는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 완전한 단절이 있고나서 변해버린 세사르가 태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소설이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아왔음을 상기한다면 이것 역시도 어쩌면 오랜 군부 독재를 거친 탓에 이전의 아르헨티나와는 결정적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사르'는 발마세다가 바라보는 현대 아르헨티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오랜 군부독재를 경험한 탓에 이제는 완전하게 변해버린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도 모른다.(어쩐지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역사가 어쩌고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쩌구 했지만 이 책은 작고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 가벼운 소설이다. 그리고 그 크기와 무게 만큼 놀랍도록 빨리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 처럼  그렇게 작거나 가볍지가 않다.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작품으로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추천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배고플 때는 이 책을 읽지마시라는 것! 여기엔 아주 많은 상세한 음식의 묘사가 나온다. 읽으면 절로 식욕이 인다. 그래서 깊은 밤에 읽으면 문득 라면 생각이 간절해지곤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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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커버인데,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저나 라이블리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부커상을 받았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정작 펭귄출판사에서 모던 클래식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스릴을 느꼈다고 한다. 정확히 그녀가 한 말은 이랬다. "It made me feel dead." 문장만 놓고보면 과연 이게 좋다는 뜻인지 나쁘다는 뜻인지 잘 알수가 없는데 원래 라이블리 자신이 이렇게 모순적인 단어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니 그대로 수긍할 밖에... 그런데, 왠지 '문타이거'의 주인공 클라우디아와 어쩐지 좀 닮은 것 같다. 기성의 관습을 제멋대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서두를 이렇게 라이블리 개인으로 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사실 '문타이거'가 추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문타이거'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타이거'는 종군기자였고 또한 대중 역사서로서 성공한 역사가이기도 한 여자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객적은 회고담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자기 개인의 역사이지만 세계의 역사 처럼 쓰겠다고!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그렇게 이 소설은 그 두개의 역사(라기 보다는 시선)이 교차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혹은 단독성(가라타니 고진식의 개념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따로 설명을 할 것이다.)과 일반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 부터 확실히 드러난다. 소설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장면을 보게 된다. 하나는 '그녀'로 지칭되어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라고 간호사에게 말하는 장면. 다른 하나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제 '나'로 지칭되어 자신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로 쓰겠다고 말하는 장면. 

  이 연속해서 나오는 두 가지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장면이 가지는 관계가 바로 '문타이거'가 직조하는 세계의 핵심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얘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일단 이 둘을 대립관계로 놓고 보자. 여기서 대립되는 두 관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첫 장면은 '그녀'에게서 드러나듯이 3인칭 객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그대로 일반 역사 기술과도 같다. 역사란 언제나 3인칭으로 기술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뒤이은 장면은 '나'에서 드러나듯이 1인칭 주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역사적 기술로는 불가능한 온전한 내면의 영역이 된다.(그렇게 '문타이거' 자체가 소설이니까 소설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첫장면은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 다음 장면은 그대로 고유한 개체로 남아있는 클라우디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는 그대로 고유의 개체성을 잃고 그저 하나의 이름만 남은 익명적 존재가 된다. 라이블리는 뒤이은 간호사들끼리의 대화에서 그 간호사들이 저 할머니가 과연 유명한 역사를 썼는지를 두고 수군거리는 장면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되자 역사가로서의 클라우디아는 사라지고 간호사들로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늙고 병든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편의상 둘을 대립관계로 세운다고 했는데 사실 소설 초반에서 부터 이렇게 둘의 대립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라이블리가 '문타이거'를 통해 하려는 말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보편화로서 개인을 그저 익명적 존재로 만드는 역사에 대항해 그 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는 것을. 

 따라서 바로 뒤이어 보여지는 클라우디아의 선언은 사실 이 소설을 시작하는 라이블리 자신의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내 머리속에 연대기는 없어. 나는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처럼빙글빙글 돌고 뒤섞이고 갈라지는 무수한 클라우디아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내가 들고 다니는 카드 한 팩은 한 없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지. 연속성은 없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 (...) 희한하게도, 집단적 과거라는 게 죄다 이런 식이야. 공공의 자산이지만 심오하게 사적이기도 하거든.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나의 7세기는 당신이 7세기가 아니야. (..) 내 과거의 신호들은 내가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거야. 타인들의 삶은 내 삶의 틈새에 끼워져서 칠해지기 마련이라고. 나, 나, 바로 클라우디아 H.(P. 9 ~ 10) 

  이 선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기술의 철저한 파행이다. 클라우디아는(그렇게 라이블리는) 보편적인 역사적 기술 방법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전혀 새로운 규칙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그것도 오로지 자기가 중심인 역사를. 

  이 흐름에 대한 거스름과 개체성의 전면적인 내세움은 나로 하여금 문득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10대에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부터 거기엔 언제나 '이 나'가 빠져 있다고 느껴왔다. 철학적 담론은 반드시 '나' 일반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관이라 해도 실존이라 해도 인간 존재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만인에게 타당하지만 언제나 '이 나'는 빠져 있었다. (...)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나'가 특수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고 있다. 그러한데도 '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의 '이'이지 나라는 의식이 아니다. (...) 예컨대 내가 '이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라는 유(類)속의 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둑이라 불리는 이 개의 '이'것임은 외양이나 성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이 개'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나'나 '이 개'의 '이'것임을 단독성(SINGULARITY)이라 부르고 그것을 특수성과 구별하기로 한다. 단독성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수성이 일반성에서 본 개체성인데 대해 단독성은 이미 일반성에 속하지 않는 개체성이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 P.11 ~ 12) 

  일부러 길게 인용한 것은 '단독성'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단독성'은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나는 클라우디아가 스스로를 '나'로서 말하며 그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고진이 말한 '단독성'의 표출이라 여긴다. 사실 클라우디아 존재 자체가 아예 '단독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 속 그녀의 모습은 정말 남다르다. 특히나 엄마로서의 모습은 기성의 관습을 철저히 벗어난다. 딸 리사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남편 재스퍼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별거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결혼생활 또한 일반적인 결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더구나 그녀는 오빠 고든과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애적 관계마저 맺는다. 그녀는 어디서나 논쟁을 벌이고 스스로 그것을 즐긴다. 마치 모든 것과 철저하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그녀는 바위산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적 존재, 즉 일반성의 그물로는 도저히 건져올릴 수 없는 '단독성'의 존재인 것이다.  초반부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맺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클라우디아를 포섭하는데 결국 실패함으로써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의 단독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단독성'의 존재로 만들고 늘 고유한 단독자로서의 존재를 익명화 시켜서 그저 보통명사화 시키는 역사 자체를 가로지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단독성과 일반성을 서로 대립각으로 세운다. 하지만 이 대립관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 이 단독성과 일반성의 대립을 더욱 더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가 바로 '신화와 이야기'이다. 앞에서 클라우디아를 프로메테우스적 존재라고 말했지만 이는 그녀 스스로 소설속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더구나 어린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온 '엄마를 주눅들게 했던 부유한 친척'마저 그녀를 '신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계속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적' 외피를 둘러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신화가 무엇이길래 라이블리는 이토록 클라우디아에게 그 외피를 입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마치 답하기라도 하듯 라이블리는 소설에서 클라우디아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신화는 역사보다 훨씬 훌륭한 소재야. 형식도 있고 논리도 있고 메세지도 있거든. 한 때는 내가 신화인 줄 알았지 (p.19) 

   이 단순한 비교.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신화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언급되는 것은 역사다. 대체 역사는 또 무엇이관대 라이블리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일까? 정말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쩐지 그것을 제대로 밝혀야만 이 소설에서 신화가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역사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당신의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서양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셨는지? 그 책을 보시면 헤로도토스가 마치 호메로스가 청중들 앞에서 '일리아드'를 읊어주듯이, 그렇게 하나 하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실 것이다. 그렇게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그의 이야기 'HIS STORY'였다. 결국 역사란 이야기인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이야기와 역사가 동일한 단어로 쓰이지 않는가. 그렇게 라이블리는 이 소설에서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말하기와 소설가의 말하기는 겹치는 것이다. 라이블리에게 있어서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은 사실 '신화와 역사'의 대립이지만 여기에 라이블리는 소설가의 시선까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아우르기 위하여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으로 또 하나의 항목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사가 이야기라고 치고 그것이 신화와 무슨 대립을 이룬다는 거야? 신화도 어차피 이야기 아닌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끌어들이려 한다. 거기에 나와있는 폴 리쾨르의 논의가 라이블리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시킬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풍덩 뛰어들어 보자.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이야기와 시간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의 '뮈토스' 만드는 법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뮈토스'는 이야기를 뜻하며 시학에서는 '줄거리 만들기'를 의미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이란 오로지 현재밖에는 없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고 미래는 아직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 사라져버려 한 마디를 이루고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또 한 마디를 이루는, 균열과 불협화음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작용은 이 균열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로 메우려고 드는데 바로 여기서 '시간 경험'이라는 게 생긴다고 하였다. 즉 사람들이 시간을 순서대로 여기는 것은 그렇게 균열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것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보려는 의지의 작용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람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로 여겼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뮈토스'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뮈토스'란 이리저리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사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말하고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모아야 제대로 모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제대로 모으는 방법은 바로 '시간'을 참조하여 그 순서대로 모으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바로 여기서 '시간'이 나온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시간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 처럼 하나의 작위적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좋은 이야기를 짓기 위해서 끊임없이 참조해야만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외부의 엄연한 실재로서 존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이야기 짓기에 간섭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경험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시간이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한 그렇게 보편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트랜스포머'와 같은 것이 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 만들기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이란 외부적 규칙에 맞도록 다듬어야 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가 보편적인 집단에 편입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규격화시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라이블리가 '신화와 이야기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시각도 이와 똑같다. 라이블리가 그렇게 신화가 역사(실은 이야기)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가 그렇게 단독성의 주체들을 그 고유성을 잘라내어 그렇고 그런 일반적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성의 표출인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의 외피를 둘러씌우는 것은 라이블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내가 빠뜨린 것 때문인데, 아마도 그 의문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화가 어떻기에 굳이 그것의 외피를 둘러씌우려드는 것인가?"라고. 그건 신화가 보여주는 특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다시 떠올리자면 우리는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보다 연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얼른 앞서 인용한 클라우디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바로 이 대사에서도 라이블리가 이야기를 왜 싫어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신화는 왜 클라우디아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화가 연대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의 대부분은 파편적이다.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의 순서들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저자 토마스 불핀치 조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화엔 연대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신화는 이야기와 달리 철저하게 오로지 개체에만 집중한다. 모든 신화는 그저 개별적 존재하나만 담는다. 이야기가 보편성의 공간이라면 그렇게 신화는 오로지 개체의 공간이며 그렇게 단독성의 공간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신화가 가지는 특성 때문에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클라우디아와 마찬가지로 단독성의 표출이라 할 만한,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유일하게 온전히 사랑했던(바로 그 사랑의 모습이 톰 역시도 클라우디아 만큼 단독성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근거가 된다.) 톰과 만나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집트'가 내내 소설의 다른 곳과는 달리 신화적 색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그 이집트에서 클라우디아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늘 한 마디라도 더 보태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가(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개척민시대를 재현한 곳에서 그 과거의 개척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클라우디아가 참견하던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클라우디아의 대표적인 관광 경험 두 가지를 병치함으로써 이집트가 가진 '신화적 공간'으로써의 특성과 아울러 클라우디아의 '신화적 존재'로서의 특성마저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만큼은 내내 톰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에서는 누구의 말이 다른 이의 말을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목소리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한다. 더구나 그 당시가 2차대전와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전체주의와의 투쟁이 가열차던 시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이집트에서 보여주는 톰과 클라우디아의 관계는 정말 동등한 단독성들이 만나 이루어가는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루트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같은 시대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라는 것에 가장 많이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개인만 있을 뿐 그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오로지 단독성들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 단독성 존재를 그는 '원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원자'말이다. 무엇으로도 쪼개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개체 '원자'말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것을 '모나드'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 원자들이 늘 평행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원자들로 가득한 자연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지금의 세계란 온갖 존재들로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자손들이 생겨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이 비처럼 떨어지다가 무슨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어떤 의도의 개입없이 아주 우연하게 원자들이 만나는 바람에 존재들이 지금처럼 생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루크레티우스가 하는 말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라든가 섭리 같은 것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연에 의해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 그렇게 '보편'이라든지 '일반'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로지 단독성의 '원자'들 뿐이라는 것.  톰과 클라우디아의 만남은 바로 이와같은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루크레티우스의 이와 같은 말은 정확히 라이블리가 왜 하필이면 소설을 이렇게 여러명의 목소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다중 화자'적으로 구성했는지, 또 모든 사건들이 시간적 순서에 관계없이 그 때 그 때에 따라 '만화경'적으로 펼쳐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라이블리 자신이 루크레티우스의 말로 정의내려지는 신화적 특성들을 소설 자체에 아로새겨지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단독성의 복권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반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지극히 자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그녀를  전면에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보편을 담는다. 역사가들은 거기에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를 주저하면 덧붙일때 조차 늘 그것이 설득가능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보편적인 둥지에 깃들수 있도록 말한다. 어디까지나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단독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원하는 라이블리는 기존의 이러한 역사적 글쓰기는 불편했다. 그래서 교감하지 않는, 교감될 수도 없는, 그래서 일반성의 그물로는 절대 건져낼 수 없는, 그렇게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편성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그렇게 오로지 단독성으로 충만한 존재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울리는 목소리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감으로써 라이블리는 그녀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 대해 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은 라이블리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식 개체들이 되기만을 바라는 소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충격 혹은 낯설음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퍼니게임'하고도 비슷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극장에서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날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속에서 보았는데(같이 관람한 한 여성 역시 내내 충격에 의한 창백한 표정으로 영화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그저 부정적이라고만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는 그런 영화들 그리고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같은 작품들은 바흐친이 말했던 일종의 '카니발적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으로 본다. 그렇게 그 작품들은 우리의 굳건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결국은 그 토대를 허물어 전복시키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늘 돌아다보게 만드는 생채기가 되어 나를 둘러싼 이 일상을 늘 다시금 반추시키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열어보이는 다른 가능성으로 나를 둘러싼 이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도 결국 하나의 가능한 세계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나를 '보편'으로 억누르지 않게 하며 '일반'에다 날 맞도록 타협하지 않게하며 그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을 나 역시 단독자로서, 하나의 대등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제목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제목인가! 

  '문타이거'는 모기향을 가리킨다. 라이블리는 어느날 우연히 2차대전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어린시절 있었던 이집트에서 매일 맡았던 '문타이거', 즉 모기향의 향기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2차대전이 배경이 되는 이 소설에 그것을 제목으로 쓴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소설에서 '문타이거'는 이집트에서 톰과 같이 있던 어느 새벽에 등장한다. 바로 그 새벽에 클라우디아는 처음으로 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톰의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클라우디아의 귀를 거쳐서 톰의 얘기를 듣게된다. 기이하게도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상징인 톰에게 왜 라이블리는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 역사서를 쓴다. 그 역사서들은 모두 한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톰의 이야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서들을 쓸 때 클라우디아는 늘 자신만의 개인적 견해를 꼭 덧붙였다. 아니 아예 자기식으로 해석한 그들의 얘기를 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맞도록 타인의 이야기를 교정했고 재배치했다. 그런데 톰의 얘기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톰의 얘기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 톰의 일기는 일기 그대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클라우디아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존재인 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톰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밤. '문타이거'는 홀로 피어오른다. 단 하나의 어둠의 장막으로 모든 걸 '보편'으로 만드는 그 밤에, '문타이거'는 라이블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가운데서도 문득 떠올릴 수 있었을 만큼 강한 향내를 그 밤 전체에 걸쳐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연기는 이내 어둠에게 먹혀 사라지더라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톰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내내 클라우디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밤에 들었던 톰의 이야기는 결국 나중에 실체로 나타나게 된다. 향기는 실체를 잃은 오히려 그 '흔적'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실체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 그 실체 자체를 보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극으로 그리고 그 자극에 기반한 기억이 되어 늘 실체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렇게 떠오른 실체는 일상속에서 그렇게 균열을 만든다. 

  문타이거의 '향기'는 이 모든 것이다. 일반화에 대항하는 단독성의 상징이자 일반화와 대등하게 싸워가면서 오래도록 단독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상징임과 동시에 단독성이 바흐친의 '카니발적 효과'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저 펭귄클래식의 잠든 여인의 머리맡에서 그녀를 모기로 부터 보호하고 있는 모기향을 그린 커버처럼 그렇게 보편성에 짓눌려 우리의 단독성이 잠들게 되더라도 언제 어느때라도 그 향기로 균열을 일으키고 보편성을 전복하여 우리의 단독성을 보존해 줄 것이라는 수호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일반성이라는 장막으로 모든 고유한 존재들을 덮어씌워 익명화시키려 것에 맞서 끝까지 개인이 가지는 단독성을 보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소설! 라이블리는 문학적으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단독성에 새로운 목소리를 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이렇게 라이블리가 새로운 목소리를 단독성에게 주려하는 것은 어쩌면 남성 중심으로 씌여진 그 보편적 역사에서 소외되고 묻혀진,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돌려주려는 시도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문타이거'는 그러한 무시된 여성성을 단독성으로 새로이 복원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가 가능한가에 대한 탐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독특한 독서 경험만으로도 단독성을 체감하게 만들었던 이 소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여름내내 모기향 내음을 맡을 때 마다 이내 '문타이거'를 떠올리게 만들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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