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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커버인데,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저나 라이블리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부커상을 받았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정작 펭귄출판사에서 모던 클래식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스릴을 느꼈다고 한다. 정확히 그녀가 한 말은 이랬다. "It made me feel dead." 문장만 놓고보면 과연 이게 좋다는 뜻인지 나쁘다는 뜻인지 잘 알수가 없는데 원래 라이블리 자신이 이렇게 모순적인 단어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니 그대로 수긍할 밖에... 그런데, 왠지 '문타이거'의 주인공 클라우디아와 어쩐지 좀 닮은 것 같다. 기성의 관습을 제멋대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서두를 이렇게 라이블리 개인으로 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사실 '문타이거'가 추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문타이거'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타이거'는 종군기자였고 또한 대중 역사서로서 성공한 역사가이기도 한 여자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객적은 회고담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자기 개인의 역사이지만 세계의 역사 처럼 쓰겠다고!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그렇게 이 소설은 그 두개의 역사(라기 보다는 시선)이 교차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혹은 단독성(가라타니 고진식의 개념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따로 설명을 할 것이다.)과 일반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 부터 확실히 드러난다. 소설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장면을 보게 된다. 하나는 '그녀'로 지칭되어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라고 간호사에게 말하는 장면. 다른 하나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제 '나'로 지칭되어 자신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로 쓰겠다고 말하는 장면.
이 연속해서 나오는 두 가지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장면이 가지는 관계가 바로 '문타이거'가 직조하는 세계의 핵심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얘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일단 이 둘을 대립관계로 놓고 보자. 여기서 대립되는 두 관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첫 장면은 '그녀'에게서 드러나듯이 3인칭 객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그대로 일반 역사 기술과도 같다. 역사란 언제나 3인칭으로 기술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뒤이은 장면은 '나'에서 드러나듯이 1인칭 주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역사적 기술로는 불가능한 온전한 내면의 영역이 된다.(그렇게 '문타이거' 자체가 소설이니까 소설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첫장면은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 다음 장면은 그대로 고유한 개체로 남아있는 클라우디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는 그대로 고유의 개체성을 잃고 그저 하나의 이름만 남은 익명적 존재가 된다. 라이블리는 뒤이은 간호사들끼리의 대화에서 그 간호사들이 저 할머니가 과연 유명한 역사를 썼는지를 두고 수군거리는 장면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되자 역사가로서의 클라우디아는 사라지고 간호사들로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늙고 병든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편의상 둘을 대립관계로 세운다고 했는데 사실 소설 초반에서 부터 이렇게 둘의 대립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라이블리가 '문타이거'를 통해 하려는 말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보편화로서 개인을 그저 익명적 존재로 만드는 역사에 대항해 그 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는 것을.
따라서 바로 뒤이어 보여지는 클라우디아의 선언은 사실 이 소설을 시작하는 라이블리 자신의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내 머리속에 연대기는 없어. 나는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처럼빙글빙글 돌고 뒤섞이고 갈라지는 무수한 클라우디아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내가 들고 다니는 카드 한 팩은 한 없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지. 연속성은 없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 (...) 희한하게도, 집단적 과거라는 게 죄다 이런 식이야. 공공의 자산이지만 심오하게 사적이기도 하거든.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나의 7세기는 당신이 7세기가 아니야. (..) 내 과거의 신호들은 내가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거야. 타인들의 삶은 내 삶의 틈새에 끼워져서 칠해지기 마련이라고. 나, 나, 바로 클라우디아 H.(P. 9 ~ 10)
이 선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기술의 철저한 파행이다. 클라우디아는(그렇게 라이블리는) 보편적인 역사적 기술 방법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전혀 새로운 규칙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그것도 오로지 자기가 중심인 역사를.
이 흐름에 대한 거스름과 개체성의 전면적인 내세움은 나로 하여금 문득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10대에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부터 거기엔 언제나 '이 나'가 빠져 있다고 느껴왔다. 철학적 담론은 반드시 '나' 일반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관이라 해도 실존이라 해도 인간 존재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만인에게 타당하지만 언제나 '이 나'는 빠져 있었다. (...)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나'가 특수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고 있다. 그러한데도 '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의 '이'이지 나라는 의식이 아니다. (...) 예컨대 내가 '이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라는 유(類)속의 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둑이라 불리는 이 개의 '이'것임은 외양이나 성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이 개'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나'나 '이 개'의 '이'것임을 단독성(SINGULARITY)이라 부르고 그것을 특수성과 구별하기로 한다. 단독성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수성이 일반성에서 본 개체성인데 대해 단독성은 이미 일반성에 속하지 않는 개체성이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 P.11 ~ 12)
일부러 길게 인용한 것은 '단독성'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단독성'은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나는 클라우디아가 스스로를 '나'로서 말하며 그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고진이 말한 '단독성'의 표출이라 여긴다. 사실 클라우디아 존재 자체가 아예 '단독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 속 그녀의 모습은 정말 남다르다. 특히나 엄마로서의 모습은 기성의 관습을 철저히 벗어난다. 딸 리사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남편 재스퍼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별거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결혼생활 또한 일반적인 결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더구나 그녀는 오빠 고든과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애적 관계마저 맺는다. 그녀는 어디서나 논쟁을 벌이고 스스로 그것을 즐긴다. 마치 모든 것과 철저하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그녀는 바위산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적 존재, 즉 일반성의 그물로는 도저히 건져올릴 수 없는 '단독성'의 존재인 것이다. 초반부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맺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클라우디아를 포섭하는데 결국 실패함으로써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의 단독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단독성'의 존재로 만들고 늘 고유한 단독자로서의 존재를 익명화 시켜서 그저 보통명사화 시키는 역사 자체를 가로지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단독성과 일반성을 서로 대립각으로 세운다. 하지만 이 대립관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 이 단독성과 일반성의 대립을 더욱 더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가 바로 '신화와 이야기'이다. 앞에서 클라우디아를 프로메테우스적 존재라고 말했지만 이는 그녀 스스로 소설속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더구나 어린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온 '엄마를 주눅들게 했던 부유한 친척'마저 그녀를 '신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계속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적' 외피를 둘러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신화가 무엇이길래 라이블리는 이토록 클라우디아에게 그 외피를 입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마치 답하기라도 하듯 라이블리는 소설에서 클라우디아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신화는 역사보다 훨씬 훌륭한 소재야. 형식도 있고 논리도 있고 메세지도 있거든. 한 때는 내가 신화인 줄 알았지 (p.19)
이 단순한 비교.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신화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언급되는 것은 역사다. 대체 역사는 또 무엇이관대 라이블리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일까? 정말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쩐지 그것을 제대로 밝혀야만 이 소설에서 신화가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역사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당신의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서양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셨는지? 그 책을 보시면 헤로도토스가 마치 호메로스가 청중들 앞에서 '일리아드'를 읊어주듯이, 그렇게 하나 하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실 것이다. 그렇게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그의 이야기 'HIS STORY'였다. 결국 역사란 이야기인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이야기와 역사가 동일한 단어로 쓰이지 않는가. 그렇게 라이블리는 이 소설에서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말하기와 소설가의 말하기는 겹치는 것이다. 라이블리에게 있어서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은 사실 '신화와 역사'의 대립이지만 여기에 라이블리는 소설가의 시선까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아우르기 위하여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으로 또 하나의 항목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사가 이야기라고 치고 그것이 신화와 무슨 대립을 이룬다는 거야? 신화도 어차피 이야기 아닌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끌어들이려 한다. 거기에 나와있는 폴 리쾨르의 논의가 라이블리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시킬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풍덩 뛰어들어 보자.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이야기와 시간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의 '뮈토스' 만드는 법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뮈토스'는 이야기를 뜻하며 시학에서는 '줄거리 만들기'를 의미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이란 오로지 현재밖에는 없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고 미래는 아직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 사라져버려 한 마디를 이루고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또 한 마디를 이루는, 균열과 불협화음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작용은 이 균열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로 메우려고 드는데 바로 여기서 '시간 경험'이라는 게 생긴다고 하였다. 즉 사람들이 시간을 순서대로 여기는 것은 그렇게 균열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것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보려는 의지의 작용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람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로 여겼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뮈토스'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뮈토스'란 이리저리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사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말하고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모아야 제대로 모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제대로 모으는 방법은 바로 '시간'을 참조하여 그 순서대로 모으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바로 여기서 '시간'이 나온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시간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 처럼 하나의 작위적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좋은 이야기를 짓기 위해서 끊임없이 참조해야만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외부의 엄연한 실재로서 존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이야기 짓기에 간섭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경험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시간이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한 그렇게 보편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트랜스포머'와 같은 것이 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 만들기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이란 외부적 규칙에 맞도록 다듬어야 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가 보편적인 집단에 편입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규격화시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라이블리가 '신화와 이야기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시각도 이와 똑같다. 라이블리가 그렇게 신화가 역사(실은 이야기)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가 그렇게 단독성의 주체들을 그 고유성을 잘라내어 그렇고 그런 일반적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성의 표출인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의 외피를 둘러씌우는 것은 라이블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내가 빠뜨린 것 때문인데, 아마도 그 의문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화가 어떻기에 굳이 그것의 외피를 둘러씌우려드는 것인가?"라고. 그건 신화가 보여주는 특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다시 떠올리자면 우리는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보다 연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얼른 앞서 인용한 클라우디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바로 이 대사에서도 라이블리가 이야기를 왜 싫어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신화는 왜 클라우디아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화가 연대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의 대부분은 파편적이다.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의 순서들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저자 토마스 불핀치 조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화엔 연대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신화는 이야기와 달리 철저하게 오로지 개체에만 집중한다. 모든 신화는 그저 개별적 존재하나만 담는다. 이야기가 보편성의 공간이라면 그렇게 신화는 오로지 개체의 공간이며 그렇게 단독성의 공간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신화가 가지는 특성 때문에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클라우디아와 마찬가지로 단독성의 표출이라 할 만한,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유일하게 온전히 사랑했던(바로 그 사랑의 모습이 톰 역시도 클라우디아 만큼 단독성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근거가 된다.) 톰과 만나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집트'가 내내 소설의 다른 곳과는 달리 신화적 색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그 이집트에서 클라우디아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늘 한 마디라도 더 보태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가(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개척민시대를 재현한 곳에서 그 과거의 개척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클라우디아가 참견하던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클라우디아의 대표적인 관광 경험 두 가지를 병치함으로써 이집트가 가진 '신화적 공간'으로써의 특성과 아울러 클라우디아의 '신화적 존재'로서의 특성마저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만큼은 내내 톰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에서는 누구의 말이 다른 이의 말을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목소리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한다. 더구나 그 당시가 2차대전와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전체주의와의 투쟁이 가열차던 시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이집트에서 보여주는 톰과 클라우디아의 관계는 정말 동등한 단독성들이 만나 이루어가는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루트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같은 시대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라는 것에 가장 많이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개인만 있을 뿐 그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오로지 단독성들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 단독성 존재를 그는 '원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원자'말이다. 무엇으로도 쪼개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개체 '원자'말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것을 '모나드'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 원자들이 늘 평행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원자들로 가득한 자연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지금의 세계란 온갖 존재들로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자손들이 생겨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이 비처럼 떨어지다가 무슨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어떤 의도의 개입없이 아주 우연하게 원자들이 만나는 바람에 존재들이 지금처럼 생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루크레티우스가 하는 말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라든가 섭리 같은 것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연에 의해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 그렇게 '보편'이라든지 '일반'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로지 단독성의 '원자'들 뿐이라는 것. 톰과 클라우디아의 만남은 바로 이와같은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루크레티우스의 이와 같은 말은 정확히 라이블리가 왜 하필이면 소설을 이렇게 여러명의 목소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다중 화자'적으로 구성했는지, 또 모든 사건들이 시간적 순서에 관계없이 그 때 그 때에 따라 '만화경'적으로 펼쳐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라이블리 자신이 루크레티우스의 말로 정의내려지는 신화적 특성들을 소설 자체에 아로새겨지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단독성의 복권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반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지극히 자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그녀를 전면에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보편을 담는다. 역사가들은 거기에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를 주저하면 덧붙일때 조차 늘 그것이 설득가능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보편적인 둥지에 깃들수 있도록 말한다. 어디까지나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단독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원하는 라이블리는 기존의 이러한 역사적 글쓰기는 불편했다. 그래서 교감하지 않는, 교감될 수도 없는, 그래서 일반성의 그물로는 절대 건져낼 수 없는, 그렇게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편성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그렇게 오로지 단독성으로 충만한 존재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울리는 목소리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감으로써 라이블리는 그녀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 대해 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은 라이블리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식 개체들이 되기만을 바라는 소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충격 혹은 낯설음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퍼니게임'하고도 비슷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극장에서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날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속에서 보았는데(같이 관람한 한 여성 역시 내내 충격에 의한 창백한 표정으로 영화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그저 부정적이라고만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는 그런 영화들 그리고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같은 작품들은 바흐친이 말했던 일종의 '카니발적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으로 본다. 그렇게 그 작품들은 우리의 굳건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결국은 그 토대를 허물어 전복시키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늘 돌아다보게 만드는 생채기가 되어 나를 둘러싼 이 일상을 늘 다시금 반추시키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열어보이는 다른 가능성으로 나를 둘러싼 이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도 결국 하나의 가능한 세계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나를 '보편'으로 억누르지 않게 하며 '일반'에다 날 맞도록 타협하지 않게하며 그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을 나 역시 단독자로서, 하나의 대등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제목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제목인가!
'문타이거'는 모기향을 가리킨다. 라이블리는 어느날 우연히 2차대전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어린시절 있었던 이집트에서 매일 맡았던 '문타이거', 즉 모기향의 향기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2차대전이 배경이 되는 이 소설에 그것을 제목으로 쓴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소설에서 '문타이거'는 이집트에서 톰과 같이 있던 어느 새벽에 등장한다. 바로 그 새벽에 클라우디아는 처음으로 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톰의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클라우디아의 귀를 거쳐서 톰의 얘기를 듣게된다. 기이하게도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상징인 톰에게 왜 라이블리는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 역사서를 쓴다. 그 역사서들은 모두 한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톰의 이야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서들을 쓸 때 클라우디아는 늘 자신만의 개인적 견해를 꼭 덧붙였다. 아니 아예 자기식으로 해석한 그들의 얘기를 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맞도록 타인의 이야기를 교정했고 재배치했다. 그런데 톰의 얘기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톰의 얘기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 톰의 일기는 일기 그대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클라우디아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존재인 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톰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밤. '문타이거'는 홀로 피어오른다. 단 하나의 어둠의 장막으로 모든 걸 '보편'으로 만드는 그 밤에, '문타이거'는 라이블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가운데서도 문득 떠올릴 수 있었을 만큼 강한 향내를 그 밤 전체에 걸쳐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연기는 이내 어둠에게 먹혀 사라지더라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톰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내내 클라우디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밤에 들었던 톰의 이야기는 결국 나중에 실체로 나타나게 된다. 향기는 실체를 잃은 오히려 그 '흔적'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실체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 그 실체 자체를 보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극으로 그리고 그 자극에 기반한 기억이 되어 늘 실체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렇게 떠오른 실체는 일상속에서 그렇게 균열을 만든다.
문타이거의 '향기'는 이 모든 것이다. 일반화에 대항하는 단독성의 상징이자 일반화와 대등하게 싸워가면서 오래도록 단독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상징임과 동시에 단독성이 바흐친의 '카니발적 효과'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저 펭귄클래식의 잠든 여인의 머리맡에서 그녀를 모기로 부터 보호하고 있는 모기향을 그린 커버처럼 그렇게 보편성에 짓눌려 우리의 단독성이 잠들게 되더라도 언제 어느때라도 그 향기로 균열을 일으키고 보편성을 전복하여 우리의 단독성을 보존해 줄 것이라는 수호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일반성이라는 장막으로 모든 고유한 존재들을 덮어씌워 익명화시키려 것에 맞서 끝까지 개인이 가지는 단독성을 보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소설! 라이블리는 문학적으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단독성에 새로운 목소리를 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이렇게 라이블리가 새로운 목소리를 단독성에게 주려하는 것은 어쩌면 남성 중심으로 씌여진 그 보편적 역사에서 소외되고 묻혀진,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돌려주려는 시도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문타이거'는 그러한 무시된 여성성을 단독성으로 새로이 복원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가 가능한가에 대한 탐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독특한 독서 경험만으로도 단독성을 체감하게 만들었던 이 소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여름내내 모기향 내음을 맡을 때 마다 이내 '문타이거'를 떠올리게 만들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