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필립 K 딕의 '토탈리콜'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처음으로 가상 여행 회사 ‘토탈리콜’에 갔을 때다
  그 회사의 사장이 주인공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다녀온 모든 여행의 공통점이 뭐였죠?”
  “네?” 주인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사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그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여행이란 이미지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가는 것으로 흔히 그려진다. 그렇게 만일 이 이야기가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에 관해서도 역시 이와 똑같이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시간에 있던지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라고! 당연한가?  하지만 물론 여기엔 몇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시간이 오로지 당신만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시계로 재곤하는 그런 테일러가 만든 이래로 규격화된 근대의 시간말고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흔히 '배꼽시계' 같은 것으로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오로지 주관적인 개인만의 시간말이다. 그런 시간 안에서라야 모든 시간에 있어서 공통점은 당신이란 말이 가능할 것이다. 하긴 결국 달리 생각해보면 공간이든 시간이든 어차피 당신을 떼놓고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을 경험할 주체가 없다면 시간이든 공간이든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말대로 공간이든 시간이든 오로지 경험으로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그 둘을 경험할 수 있는 당신이야말로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참 많은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베르그송도 근대적 시간이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성토한다. 특히나 근대적 시간은 시간을 단위별로 하나하나 쪼갬으로써 무엇보다 그저 순수한 흐름일 뿐일 시간을 억지로 공간화시키고 있다고 일갈한다. 베르그송은 그래서 주장한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자고! 근대가 행한 시간의 공간화로 부터 시간을 해방시키면 시간에게 남는 건 오로지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흐름, 한 마디로 '지속'밖에는 없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시간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시간이 절대로 나눠질 수 없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순수한 '지속'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경험할 수 있는 주체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시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건 그것을 그대로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주체, 즉 당신 뿐인 것이다. 결국 시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베르그송에 의해서도(나만의 자의적 왜곡이라면 죄송하지만) 시간이란 당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보면 하나마나한 얘기를 이렇게 장황스럽게 늘어놓는 것은 그저 단순히 당신을 어지럽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공간이든 시간이든 따지고보면 당신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해서 만들어지는 '시공'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숟가락 장면 처럼 사실은 숟가락이 휘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 숟가락을 의지로 구부렸기 때문에 정말 구부러진 것이 아니겠냐는 그런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지금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를 길게 늘어놓고 있을 뿐인 것도 같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리도 장황한가 하실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정말 이 심심풀이 땅콩으로도 쓰이지 못할 얘기를 하게 만든 이유를 말해야겠다. 그것은 한 권의 소설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찰스 유의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짐작하지 못할 이 책은 단순하게 말한다면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제목 만큼이나 내용 또한 종잡을 수 없다. 왜냐면 이 소설은 우리가 익숙한 그런 시간 내용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전에 그 어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을 읽었든, 그것이 웰즈의 '타임머신'이든 패리 앤더슨의 '타임패트롤'이든 코니 월리스의 '둠스데이 북'이든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그 어떤 소설과도 같지 않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읽어보면 아실 것!'이란 말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그 이유는 이렇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룬다기 보다는 '시간 여행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얘기했던 대표적인 시간여행을 만일 당신이 읽고 있다고 한다면 찰스 유는 당신의 머리속으로 들어가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의식을 그대로 타자기로 재현해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신이 아니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하고 그러니까 그런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밟을 것 같은 그런 사유의 과정들을(이것도 모호한가? 그럼 관습화된 장르적 독서 행위는 괜찮은가?) 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언제나 사물을 온전히 담기엔 모자름이 있다고 말했던 건 노자였던가? 아무튼 그의 말대로 아무리 내가 정확하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려해도 제논의 거북이 처럼 어쩔 수 없이 남는 간극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간극은 내버려두고 바로 작품으로 뛰어들자! 수영을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따지지 말고 무조건 뛰어드는 것이란 말도 있듯이! 물론 익사의 위험이 있지만 어쩌면 돈오점수와도 같은 개안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니... 

  소설의 배경은 타임머신이 상용화된 시대다. 이것은 시간여행 소설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를 비유한 것과도 같다.  소설을 한 번 직접 인용해볼까? (( )안은 나의 말이다.)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빌린다. (사람들은 서점에 가서 웰즈의 '타임머신'을 산다.)
  사람들은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웰즈는 미래로만 가잖아! 그는 그 책을 다시 꽂고 비디오방으로 향한다. 과거를 바꾸려 노력하는 마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벡투더퓨처'를 보기위해서) 


  그리고 과거로 돌아간 후에야 인과율이 자신이 생각하던 방식대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붙들려버린다. (이런 마틴이 엄마랑 연애를 하니까 자신이 사라지네...) 

 자신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에,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에, 가려고 시도하면 안 되었던 곳에, 문제가 발생한다. (웰즈의 타임머신이 어마어마한 미래로 가버리자 거기서 차마 믿기힘든 인류의 몰락을 보게되고, '벡투더퓨쳐' 2부에서는 욕심 때문에 가져온 스포츠 연감 기록으로 마틴의 현재가 지옥으로 바뀐다.) 

 (...) 내가 개입하는 곳은 바로 그 시점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구출해오는 것이 내 일이다(p.36) (그래, 당신은 찰스 유 작가이니 모든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얼마든지 펜으로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액션'을 외침으로서 구해낼 것이고...) 

  자아, 이렇다. 이렇게 찰스 유의 소설 속 문장들은 얼마든지 현재 시간여행 장르를 소화하는 우리의 독서경험, 영화경험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읽기'를(혹은 '보기'를) 쓰는 소설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경험을 또 달리 재현해내는 것이며 그렇게해서 내용 자체 보다는 그 내용을 음미했던 당시의 자신으로 되돌려보내는 소설인 것이다. '시간이란 무엇보다도 집착의 산물이다.'란 말이 소설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시간과 감각(그렇게 경험)을 분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경험 속에서 체험된 시간만을 진정한 시간이라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시도하며 그렇게 소설 자체가 하나의 마들렌으로써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집적된 그 무수한 시간 경험중 어쩌면 아주 특별했거나 아니면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경험이었으나 왠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색다른 빛을 내면서 다가오는 그런 시간 경험으로 돌려보내는 타임머신으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타임머신은 누군가 시간을 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운전자가 있다. 시공을 멋대로 횡단하면서 온갖 우주의 시공간에 간섭가능한 운전자는 신과도 같다. 그렇게 그 타임머신이 운신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운전자는 전지전능한 신이나 다를바 없다. 그런데 그것이 소설속 우주라면? 그렇다면 모든 문장마다 간섭가능한 작가야말로 신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찰스 유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우주를 특별히 'SF 우주'라 부르고 아예 고유한 이름마저 붙인다 'TN-31' 우주라고. 그것은 모든 소설이 아닌 단 하나의 이 소설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만을 위한 우주임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수리공으로 일한다. 그의 임무는 시간 속에 조난당한 자들을 구해내는 것인데 그 행위는 주로 그들의 시간 문장을 시제 문법에 맞게끔 적절하게 고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지고보면 그는 수리공이 아니라 차라리 '교정자'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 시제 고치기는 자의적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이 되는 문법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그 문법이 바로 '시간문법학'이다. 그 때 그 때의 시간에 알맞은 시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문법이다. 이쯤 풀어놓고나면 앞서 내가 얘기했던 그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조난자들을 구조하는 것은 작가가 곤경에 빠진 주인공들을 문장을 고치거나 새로 씀으로서 구하는 것과 똑같고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문법을 무시할 수 없으니 그렇게 시간문법학에 맞게끔 고치는 것과 또 똑같다. 그러니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찰스 유'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인 것이다. 이 소설은 마치 진짜 찰스 유가 하나의 시간 여행 소설을 쓰면서 의식속에 일어나는 자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의식적 시간을 다룬다고 해서 이 소설이 정말 시간 여행을 다루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앞에서 찰스 유의 소설이 가진 독특성을 말하면서 '이 소설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소설을 읽는 경험을 다룬 소설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사실 그 말도 틀린 것이다.  이 소설을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에 충실하자면 그 어떤 소설보다도 '진정한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이라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왜냐면 누누히 말해온 대로 정말 시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베르그송의 말 그대로 순수한 지속 밖에는 없는 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개인' 밖에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다 사람마다 다르며 지극히 상대적이다. 굳이 그것에 관해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구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같은 1시간이더라도 내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느껴졌던 적이. 싫은 사람이 있을 때면 1년 보다도 길어보이고 사랑하는 연인과 있으니 1분 보다 더 짧게 느껴졌던 적이 말이다. 바로 그 경험이 진짜 시간인 것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이란 어디까지나 그렇게 서로다른 상대적 시간들을 형식적으로 일치시키기 위한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H.G 웰즈의 '타임머신' 같은 것은 굳이 '양자이론' 때문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 어떤 기계도 오로지 주관적으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단일한 수치로 절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렇게 외부적 세계로의 시간여행이야 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정말 가능한 것은 그렇게 철저하게 자의식적 시간 여행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만일 어린시절을 회상한다면 바로 그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고 만약 당신에게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 그것으로 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 있어 당신에겐 그 어떤 시간도 흐르지 않는 것이 된다. 마치 소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영원히 하나의 시간만을 사는 '타임루프'에 갇혀있듯이 말이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당신이 현재 있는 그 공간에 집착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 이상 당신은 늘 시도 때도 없이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소설 속 찰스 유가 시간 시제를 살짝 바꾸는 것 만으로도 시간 패러독스에 빠져버린 이들을 구해내듯이 당신 역시 그 기억을 뇌리에 새길 때마다 당신에게 존재했었던 그 다른 시간대로 여행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최초로 시간 여행기를 만든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고 과거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데자 뷔가 바로 현재의 기억이 아닐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현재를 기억할 수 있다면, 과거를 경험하는 일이 불가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계일까요? 이 기계, 저와 제 아들이 함께 만든 이 기계는, 그런 일종의 인식 기계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장소에서와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탑승자의 마음안에서도 작동하지요. (p.258) 

  이 말대로 타임머신은 인식 기계다. 당신의 마음에 나이테처럼 그려진 그 모든 기억들을 인식하는 기계.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아마도 진정한 타임머신의 정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는 바로 당신의 머리 자체 내부에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을 당신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궤변인가? 아니 그만큼 우리가 근대가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관념에 너무 뼈속 깊이 지배당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만큼 시간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관념은 라캉이 말한 일종의 초자아(인간을 멋대로 규정하려는 외부적 사회적 권력 같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가 싶다.)이다. 우리의 내부적 시간을 거기에 맞춰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그러니 사실은 나이라는 것도, 늙음과 젊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시간은 오로지 당신 혼자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누구의 시간을 대신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나이라든가 젊음과 늙음 식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실 시간으로 부터 자유로운 자들이다. 공간은 우리를 가둘 수 있지만 그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 공간을 횡단하고 때로는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찰스 유의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렇게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당신 자신이 얼마든지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찰스 유가 앞서 말했듯 SF를 읽는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약속된 '시간'이란 형식으로 서로의 시간들을 맞추듯이 그저 오로지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시간 경험을 '장르 소설을 읽는 경험'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추체험'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당신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찰스 유의 시간'을 경험하지만 거기에 또 그것을 읽고 있는 '당신 자신의 시간'마저도 경험하는 것이다. 글이란 바로 그것이지 않은가. 그것을 쓴 자와 읽는자의 시간이 서로 중첩 하는 것이지 않은가. 찰스 유가 계속 장르소설적 독서 경험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간의 중첩'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누구의 시간도 다 개별적으로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로 겹쳐질 수 없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여기서 찰스 유가 인도하는 여행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 소설을 따라 이동하면서 여기에 있는 그 어떤 문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억 속의 어떤 시간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면 거기에 따라 그렇게 당신만의 시간 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광대한 우리만의 시간이 있으니까... 이것을 소설에서 찰스 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극한이며, 그 극한이란 현재이다 (P.323) 

  멋진 말이다.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숙고해보면 이 말이야 말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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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6-2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책이죠.

ICE-9 2011-06-23 20:46   좋아요 0 | URL
이프리트님도 벌써 읽으셨군요^ ^
한 편으론 이민자의 시간 경험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 해요.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시간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은 이 소설의
시간 처럼 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