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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찬찬히 읽었다. 밤에 조금 아침에 조금 때에 따라서는 가지고 나가서 쉴 때마다 조금씩. 그래서 초반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오웰의 문장들이 그렇게 쉽게 소화되는 것들도 아니곤 해서 가다 끊고 다시 앞에서 읽어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했고 처음엔얼른 마음 속으로 콕콕 박아넣기가 어려웠던 소설이다. 그렇게 볼링의 어린 시절 얘기가 끝나고 나서, 그가 잡지 못했던 거대한 잉어가 가득 있는 연못 얘기가 나오고 나서 5장 부터는 그나마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부터는 그저 일상의 빈 부분만을 채우곤 하던 그 책이 오히려 책을 읽다 빈 부분만을 일상이 채우도록 만들고 말았다. 오웰의 이야기는 신기했다. 1939년에 지어졌다는 이 소설이 전혀 쾌쾌묵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가 세밀하게 복원해내는 일상들은 그대로 지금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많이 겹쳐지기도 했다. 특히나 이런 부분... 

 물론 우리 같은 사람의(주인공은 조금은 아래에 위치하는 중산층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같이 잃을 게 있다고 상상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엘즈미어로드 주민의 9할은 자신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즈미어로드와 그 주변 단지 전체는 사실상 '헤스페리데스 주택단지'라는 거대한 사기판의 일부이며 이 단지는 '명랑 신용 주택금융조합'의 소유다. 주택금융조합은 아마 현대의 가장 영약한 사기 집단일 것이다.( ...) 주택금융조합의 협잡이 놀라운 것은 당하는 사람들이 협잡꾼이 자기들한테 무얼 베푼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기꾼한테 한대 얻어맞고도 그의 손을 핥는 격이다.(...) 우리가 실은 소유주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 모두 집값을 지불하고 있는 중인데 마지막 할부금을 내기 전에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그런 심리를 더욱 부채질 한다. 우리는 모두 매수된 것이며, 더 딱한 점은 우리 자신의 돈으로 매수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하우스 푸어'랑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리고 볼링의 아버지가 하시는 종자 가게가 전국적 체인망의 하나로 들어온 새라진 때문에 서서히 망해가는 모습은 또 지금 한국의 기업형 슈퍼마켓이 골목마다 터줏대감으로 버티고 있었던 하루벌이 자영업자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는 것과 또 어찌나 그리 닮아보이던지...  그렇게 오웰의 소설을 읽다보면 무려 70년이 넘는 시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실의 한국 모습을 참 많이도 볼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에 맞먹는 그 오랜 시간동안 자본주의는 어쩌면 그리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인지, 어쩌면 그리도 내내 자기보다 낮은 자들을 착취함으로써만 존속해왔는지 참 많이 씁쓸하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하여 내가 꼭 산소가 바닥나 조금의 공기를 마시려 오히려 물 밖으로 입을 내밀고 뻐금거리고 있는 언젠가 본 연못의 잉어 같았다. 

  아마도 이 책의 원제 Coming up for Air'가 뜻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상황일 것이다. 조금의 공기를 얻기 위해서 물 속이 아니라 오히려 물 밖에서 구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 그런데 왜 절박하고, 조금의 숨이라도 얻으러 그렇게 나가기를 애쓰는 것일까? 

  그건 한 때 기분전환 같은 것이 아니다. 문득 중년이란 삶이 생각해보니 가족이든 일이든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갑자기 인생의 의미를 잃은 것 같이 느껴져서는 더더구나 아니다.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를 보면 그런 남자가 나온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삶을 살던 남자가 공사장을 지나다가 하마터면 돌에 깔려 죽을뻔 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남자는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경험을 하고서야 문득 자신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알고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홀연히 사라진다. 1930년대 공황기의 미국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맞춰 살아야했던 미국인은 모두 이렇게 홀연히 자신의 인행으로 부터 달아나는 꿈을 꾸곤 했었다. 당시 유행했던 서부극에서 영웅들이 마지막에 결국은 자신을 붙잡는 연인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터벅터벅 황무지로 사라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저마다 다 그렇게 영화 속 '쉐인' 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웰의 조지 볼링이 그렇게 경마를 하다 우연히 벌게된 17파운드를 가지고 일탈을 꿈꾸는 것은 그런 것과 다르다. 물론 그 역시도 '주당 5에서 10파운드 벌이'의 인생이고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도 서슴없이 반말을 듣는 '터비(tubby: 뚱보)'인데다 사람들이 뚱보에게 가진 선입관에 스스로 끼워맞추며 살아가지만, 그렇게 또 돈에 기갈이 든 것 처럼 구는 밥맛 없는 아내와 애정없는 가정생활을 하느라 힘겹긴 하지만 정작 그가 스스로 '전쟁전 여름'이라 부르는 그 어린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그 곳으로 가고 싶어하고 어린 시절을 자꾸만 떠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자꾸만 엄습해오는 전쟁의 기미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초반에 온 영국인의 관심을 받으며 신문에 연일 오르내리는 '여자 다리 한쪽'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 한쪽만 남은 다리는 지금은 사라진 나머지 신체가 언젠가는 도래하리라는 예고이며 바로 그 사라진 신체는 전쟁을 의미한다. 소설의 후반부 볼링이 그토록 원하는 곳으로 갔을 때 우연히 훈련중 실수로 그 곳이 폭격을 당하는데 볼링은 거기서 또 다시 떨어져나온 다리를 보게된다. 그 때 볼링은 정말 공습을 당하는 줄만 알았고 그렇게 그건 전쟁 상황에서 문득 뛰쳐나온 다리 한짝이었던 것이다. 소설의 초반은 이렇게 내내 '머리 위로  폭격기 한 대가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p.30)' 처럼 끊임없이 전쟁의 분위기가 은근 슬쩍 드러난다. 따라서 그가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전쟁 때문이며 그것은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전쟁을 두려워하는가? 

   낯선 인파 사이를 뚫고 지나가자면 모두 밀랍인형 같다는 상상을 하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들 역시 나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지 모른다. 그리고 요즘 내가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이 기분, 즉 전쟁이 임박했으며 전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리라는 기분도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터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내 곁을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포탄이 터지고 흙이 튀는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으리라(p.43) 

 그것은 여기 나와있는대로 전쟁이 모든 것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가 익숙하게 알아왔던 세상을 모조리 다른 무엇으로 바뀌버리기 때문이다. 그 어린시절의 전원적인 자신의 마을 로이빈필드가 1차대전을 겪고난 현재 예전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져버린 것 처럼. 그렇게 자신이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연못이 있던 곳이 정신병자들을 위한 요양소가 되어버린 것 처럼. 조지 볼링에게 익숙했던 모든 삶이, 변함없이 이어지리라 확신했던 모든 삶이 전쟁으로 인해 다 무너지고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숨쉬러 나가고 싶은 곳은 전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함이다. 그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확고한 무엇을 스스로 찾게되길 바란다. 그래서 '전쟁 전 여름', 그 꿈꾸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했던 곳, 성실한 아버지가 열심히 일만하면 어려움 없이 살리라 순박하게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곳, 

  끼니 같은 것들에 관한 한, 우리 집은 모든 게 시계처럼 돌아가는 집들 중 하나였다. 시계 같다고 하면 기계적인 것이 연상되니, 그 보다는 자연적 흐름에 가까웠다고 하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우리는 해가 다시 뜰 것을 알듯이 내일이면 아침 식탁이 차려질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p.75) 

  그가 가고자 했던 곳, 그가 진정 찾고자 했던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 따라서 초반에 조금은 지루할정도로 아주 세세하게 복원되는 그의 어린시절은 사실은 그 만큼 그가 절박하게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례로 그가 지금 그의 현실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라. 어린시절의 묘사에 비한다면 그건 그저 고속으로 질주하는 KTX의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 정도의 묘사 밖에는 안되지 않는가. 

 하지만 물론 그의 그런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한다. 그토록 절박한 심정으로 예전의 마을을 찾았지만 이미 모든 게 변해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 변모의 절정은 바로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에서 나타났다. '전쟁 전 여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의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던 연인 엘시 워터스는 '어깨 퉁퉁하고 몸집 푸짐한 할망구가 다 되어 뒤축이 몹시 닳은 구두를 신고 뒤뚱뒤뚱 가고 있었(P.294)'던 것이다. 그는 경악한다. 전쟁은 실로 너무도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그렇게 거대한 잉어가 상징하듯이 많은 것을 앗아가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그가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 중 어이없는 보직과 그 후 그가 보험회사에 취직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주었던 '죠셉 침 경'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더 확고해진다. 전쟁과 그 후의 영국 자본주의 사회가 모두 '죠셉 침 경'으로 묶이는 것은 전쟁 때와 지금의 영국 자본주의가 전혀 다르지 않은 단순한 연속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죠셉 침경 아래에서 전쟁을 치르며 목숨을 걸었듯이 이제 전후의 영국 자본주의 아래에선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쟁과 전후의 영국이 별로 다르지 않다라는 사실은 그 모든게 전쟁으로 일어난 결과임을 또 짐작하게 만든다. 따라서 당연히 현실의 영국을 지독히 혐오하고 있는 볼링에게 그 모든 걸 가져온 전쟁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내내 읊조린다. 다시 한 번 더 전쟁이 일어나면 이제는 진압봉으로 머리를 두드려 맞고 마구 잡이로 끌려가는 그런 개인의 인권이 한없이 유린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그는 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과감히 길을 나섰던 것이나 결국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초라한 일상인으로 돌아간다. 초반에 그와 같은 계층의 사람들은 뭔가를 잃지 않을까 잔뜩 걱정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호기롭게 예전의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힐다가 어떻게 나와도 초연했던 그가 막상 자신의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정말로 힐다를 잃는 건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렇게 떠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된다. 그의 걱정은 기우였고 역시나 그가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힐다의 계략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계략에 놀아난, '끊임없이 백치짓을 하는' '가치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지 할 시간이 있는' 그런 '주당 5에서 10 파운드 벌이를 하는' 넉살 좋은 '뚱보'로 돌아간다. 곧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거대한 전화의 불길이 닥쳐오는 것도 모른 채... 

  일상은 얼마나 견고한 것일까?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인간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얼마쯤 될까? 비관적인 소설의 결말은 오히려 그러한 희망의 근거를 없애면서 더더욱 독자들에게 일상에 함몰되지 말 것을 호소한다. 일상은 전쟁 한 번으로 확 바뀌어버릴 만큼 여지없이 약한 것이며 거대한 수레바퀴안에 있는 인간의 운신의 폭은 좁을 지 모르지만 그건 그 자신이 그 수레바퀴에 머무르길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견고해 보이는 일상은 볼링이 언젠가 씹었던 '프랑크 프루터'안의 생선살 처럼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은 일상에 함몰되는 것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계략에 속아 선택한 것 뿐이다. 힐다의 계락에 빠져버린 죠지 볼링이나 초반과 중반에 나오는 한 개인의 예측을 훌쩍 뛰어넘는 자본주의 사회가 구조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우리의 것을 원하는 누군가의 계략과 음모로 이루어져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웰은 우리가 속지 않기 위해 언제나 홀로 깨어있으며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제 머리로 헤아리면서 의심스럽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라며... 

  모로코에 있는 마라케시의 한 요양원에서 오웰은 폐질환을 앓는 가운데 이 소설을 써내려 갔다. 소설의 조지 볼링 처럼 한 번 마음껏 숨쉬어 보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무엇보다도 가장 바라는 일이었을 것이다. 닥쳐오는 전화의 예감으로 그러지 않아도 답답증을 느꼈던 오웰에게 이 소설은 그렇게 상상적으로나마 제대로 숨쉴 수 있는 여지가 되어주었으리라. 소설에서 조지 볼링은 제대로 큰 숨 한 번 쉬지 못하고 그저 그런 누추한 자신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지만 우리는 오히려 볼링이 닫아 논 그 문 뒤에서 제대로 큰 숨을 한 번 쉬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웰이 열어놓은 창으로... 그리고 오웰의 속삭임을 듣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네 안에 있다. 네가 원하면 그 무엇이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될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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