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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첫 장면에서 기겁했다. 안그래도 제목이 으스스한데 첫장면부터 고어적 연출이 심상치 않아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려고 이렇게 세게나가는가 싶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다 작품에 대한 정보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얼른 든 생각으론 정말 제목처럼 내내 사람으로 만든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두번째 소설인, '식인종의 요리책'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요리와 정치의 관계를,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와 요리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른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영국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라는 영화다. 상영되자마자 컬트의 반열에 올라서버린 그 영화에서도 이 소설 처럼 카니발리즘(食人)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루었었다. 아마도 결말이 요리사가 독재자를 정성껏 요리해 파티에 참석한 고관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 영화처럼 이 소설도 그렇게 카니발리즘과 독재와의 관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세계1차대전으로 갑작스레 부흥하게된 한 해변 도시의 레스토랑 알마센의 70여년에 걸친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그렇게 허구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교묘히 교차시켜 70여년에 걸친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겨우 274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공간에 집약된 기다란 역사적 줄기를, 그것도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내력을 동등하게 소상히 다뤄가며 드러낸다는 점에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한편,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요리사들과 그들의 요리책을 마치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은 그렇게 그야말로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행복한 결합이라 할 만하다.
기이하게도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을 끌어들인다. 모두 파시즘이란 전체주의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소설의 초반 그러니까 알마센의 근원이 되는 레스토랑을 세웠으며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기도 한 신비의 요리책 '남부해안지역 요리책'을 쓴 저자이기도 한 카글리오스트로 쌍둥이 형제는 어쩐지 로마를 세웠던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이 그렇게 고향을 떠나 로마라는 나라를 건국했듯이, 카글리오스트로 형제도 고국을 떠나 머나 먼 아르헨티나에서 그들만의 레스토랑을 만든다. 그렇게 레스토랑은 어쩌면 정말 '로마'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에 있으면서도 '로마'인,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서 존재하는지 모른다. 카글리오스트로 형제에게 신비의 요리법들을 전수했던 마시모 롬브로소 역시도 이탈리아인이었다.(롬브로소란 이름때문에 자꾸만 '생래범죄인설'을 만든 체자레 롬브로소가 떠올랐다. 롬브로소는 현재 프로파일링 기법의 창시자라고도 일컫는데 그렇게 그는 범죄인의 외모를 집중 연구하여 범죄인이 가지고 있는 외모적 특징들을 추려내어 진짜 범죄 수사에 응용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범죄인의 외모를 찬찬히 관찰하는 롬브로소의 모습은 왠지 어떻게 요리할까 하면서 사람 고기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는 세사르 롬브로소의 모습과 많이 닮아보인다. 아무래도 그런 이미지의 연상적 작용을 위해서 롬브로소의 이름을 정말 택했던 것은 아닐런지....) 알마센은 바로 이들 세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었는데, 사실 마시모는 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꿈꿨지만 1차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아르헨티나에 눌러 앉아 레스토랑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1차대전은 알마센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고 더구나 앞서도 말했듯, 알마센을 부흥시킨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1차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바다를 넘어 아르헨티나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불행이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고, 재앙이란 사회적 계층 같은 건 무시하기 마련이며, 처절한 액운이란 혈통 같은 건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민자들 역시 유럽에서 먼저 건너온 친지들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 거지꼴이 되어버렸고, 그러는 사이 엉겁결에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되돌가갈 수 없는 철조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탓에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고, 수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잃은 홀아비 신세가 되었으며,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든 전쟁이라는 괴물은 마을 곳곳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아르헨티나에도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돌아갈 곳을 잃고 눌러앉게 되었다(p.43)
이렇게 말하자면 알마센은 1차대전으로 고향을 잃은 자들로 만들어진 그들이 아르헨티나에 만든 새로운 영토 혹은 고향이었으며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외부였다. 그렇게 발마세다는 이 알마센이 가진 '아르헨티나의 외부로써의 특성'을 형성하고는 뒤이어 바로 그 외부적 성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바로 그 뒤 초창기 맴버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다시금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새로운 후손들이 알마센으로 오게되는 장면을 통해서다. 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되었던 것은 바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체주의화되어가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마센으로 오게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발마세다가 알마센이 가진 외부적 특성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하는 것인지 알 수있다. 그것은 '알마센'이 다름아니라 바로 전체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알마센을 만든 카글리오스트로의 형제가 사실은 로마의 창시자 로물루스,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했던 우리의 의심이 사실은 맞는 것임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그 쌍둥이 형제에 의해서 건국된 로마가 초창기에 공화정의 형태를 띄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더 그렇다. 그렇게 로마 초창기 공화정은 전체주의에게 있어 극단의 정치적 형태라 할 만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에 있어 알마센의 의미를 아르헨티나 독재에 대한 저항 공간으로 만든다. 그가 이렇게 하필이면 레스토랑을 그런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요리가 가진 이타적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요리는, 특히 레스토랑의 요리는 더욱 더 그렇듯이,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을 위해 혹은 더불어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초부터 이타적 행위인 요리와 오로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독재적 권력을 그렇게 대비시키려는 뜻에서 레스토랑을 그런 저항의 공간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방증이라도 하듯, 소설은 알마센을 거쳐가는 세대들이 모두 전체주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신념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희석되어 가듯이 그렇게 알마센을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온 그들의 모습도 끝내 그들의 가장 마지막 후예 '세사르 롬브로소'에 이르러서는 단절되고 마는데, 바로 그가 소설의 초반부 자기 엄마를 물어뜯었던 그 사람이다.
마지막 후손, 세사르에 와서 알마센은 열린 이타적 공간에서 폐쇄적인 이기적 공간으로 변질되고 요리의 의미도 더이상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그것은 그가 그의 이모와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지는데, 발마세다는 여기서 궁극적으로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 지 드러내준다.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아르헨티나의 정국은 육식문화를 부채질했다. 역사르 되짚어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어떤 스타일의 음식이 유행했는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각각의 시기는 나름의 음식 문화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며, 유행하는 맛과 풍미는 늘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과 별개일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머리' 보다는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음식을 보면 시대적 열광과 두려움이 무엇인지, 결함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혐오하고 집착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결점과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의 기록에 따르면 독재정권이 마련한 화려한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재자가 군림하면 대다수의 대중은 굶주리고 허기지게 되며, 대부분의 평범한 가정에서는 최후의 만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차분한 슬픔 속에서 빵 한조각을 나누었고, 그런 그들에게 포도주는 수세기 전 부터 그래왔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여겨졌다.(p.238 ~ 239)
이렇게 독재정권과 인육이 자주 관계를 맺는 것은 인육이야말로 여기 언급한 대로 독재정권의 얼 그렇게 정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인간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향연이란 오로지 내 배를 불리기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핍박 받고 고통받는 가난한 서민들이 빵 한 조각이나 포도주 한 잔을 나누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마지막에서 발마세다가 굳이 예수님의 보혈을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이타적 향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세사르의 존재를 통해 발마세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쩌다 세사르가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엔 무엇이 작용한 것일까? 소설은 세사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상세하게 말해준다.
세사르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취해서는 우연히 경찰청장의 장례식을 차로 들이받는다. 그리고 그 때문에 테러리스트로 오해 받아 총알 세례를 맞고 숨진다. 그 후 정권에 의해서 앎센 자체가 반정부테러세력으로 의심받으면서 알마센 마저 폐쇄되기에 이른다. 세사르의 엄마는 세사르를 임신한 채 경찰에 끌려가 모진 심문을 받는다. 이전에도 페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탄압은 받았지만 지금에 비하면 오히려 하찮을 정도다. 세사르는 바로 그러한 와중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 완전한 단절이 있고나서 변해버린 세사르가 태어난 것이다. 지금까지 이 소설이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아왔음을 상기한다면 이것 역시도 어쩌면 오랜 군부 독재를 거친 탓에 이전의 아르헨티나와는 결정적으로 변해버린 지금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은근히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사르'는 발마세다가 바라보는 현대 아르헨티나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오랜 군부독재를 경험한 탓에 이제는 완전하게 변해버린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인지도 모른다.(어쩐지 현재 한국의 모습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역사가 어쩌고 카니발리즘과 독재가 어쩌구 했지만 이 책은 작고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 가벼운 소설이다. 그리고 그 크기와 무게 만큼 놀랍도록 빨리 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담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해온 것 처럼 그렇게 작거나 가볍지가 않다.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작품으로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의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더더욱 추천한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배고플 때는 이 책을 읽지마시라는 것! 여기엔 아주 많은 상세한 음식의 묘사가 나온다. 읽으면 절로 식욕이 인다. 그래서 깊은 밤에 읽으면 문득 라면 생각이 간절해지곤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