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공지영 비평이 시작됐다

<[문학이야기] 가을 문예계간지 김훈, 공지영 평론 줄이어

 

출처:컬쳐뉴스(www.culturenews.net) / 2007-09-18 오후 3:04:56

 
  [ 위지혜 기자]
 


▲ 이번 가을호 문예지들이 베스트셀러 작가 김훈과 공지영을 집중 조명했다.


한국문학이 ‘휘청’하는 속에서도 꿋꿋하게 100만 독자를 거느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군림하고 있는 두 작가 있다. 바로 김훈과 공지영. 대중들로부터 집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 두 작가가 유독 문단 내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는데, 그동안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 작품에 대한 비평이 거의 전무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간혹 나오는 문단 평론이나 기획들은 그들의 대중영합주의적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거나, 김훈, 혹은 공지영 신드롬을 분석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에 대한 반성일까? 평단이 그들의 작품을 문학작품으로 두고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번 가을호에서 계간 『창작과비평』과 『문학과 사회』는 물론 최근 창간된 『문학의 문학』에서 나란히 김훈의 평론을 실었는가 하면, 반년간지 『작가와 비평』은 이번 호에서 공지영의 신드롬에서부터 그의 최근 작품에 대한 비평까지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김훈과 공지영에 대한 문단의 본격적인 비평이 시작된 것이다.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영찬 문학평론가의 평론 「김훈 소설이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은 김훈 소설의 문제성에서부터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지지 기반을 분석하고 작가의 소설세계가 가진 특징과 한계를 진단하고 있다.

김영찬 평론가는 “김훈 문학의 문제성은 유달리 그의 소설이 각기 서로 다른 문학적 관점과 취향, 이데올로기가 투사되거나 그것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면서 때문에 “김훈의 소설을 놓고 어느 쪽이 옳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며 “엇갈림 자체가 바로 김훈의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남한산성』을 위시한 김훈의 역사소설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지지가 “포스트 IMF 시대의 대중의 현실감 또는 정치적 무의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의 개성적인 소설세계 속에는 2000년대 문학의 행로를 짐작할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다”고 진단했다.

계간 『문학의 문학』에서는 장석주 문학평론가가 김훈의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하고 있다. 장석주 평론가는 「김훈 소설, 혹은 그 이마고 관하여」라는 글에서 작가가 ‘역사’를 불러 온 것은 “지금-여기의 얼크러진 현실의 대용물이자 임시방편이며, 차선책”이라며, 작품의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개별자가 감당하는 구체적인 허무”라고 말했다.

“김훈의 역사소설은 피를 뿌리며 무사의 도를 추구하는 무협도 아니요, 역사에 근거해서 작성하는 연의는 더더구나 아니다. 김훈은 다만 무와 협에 끼여 가위에 눌리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개별자들의 사연과 곡절을 적는다.” - 장석주 「김훈 소설, 혹은 그 이마고에 관하여」 중에서

한편 반년간지 『작가와 비평』에는 ‘우리 시대의 상상력’이라는 기획으로 소설가 공지영을 집중 조명했다. 최강민 문학평론가는 「팜므파탈과 공주병의 화려한 만남」에서 공지영의 전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본질적 측면에서부터 공지영 신화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공지영의 신드롬은 적당한 고민과 적당한 오락을 욕망하는 중산층 여성 내지 독자들의 욕망에 기반”한다고 보았다.

또 양윤의 평론가와 장성규 평론가는 공지영이 2000년대에 발표한 소설을 중심으로 작가론을 펼치고 있는데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 흥미롭다. 양윤의 평론가는 「미완의 귀향과 벌거벗은 구원을 위하여」에서 공지영의 문학적 화두를 “상처투성이 인간이 행복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규정하면서 “작가의 최근작은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한층 성숙하고 넉넉해진 사유를 보여준다”고 긍정했다.

반면 장성규는 평론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위험한’ 귀환」에서 공지영 소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적 시선을 던진다. 그는 “크루소의 항해는 자신의 ‘발견’이전에 고유한 형태로 존재하는 대륙을 야만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대륙에 살고 있는 낯선 존재를 철저히 ‘타자화’ 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한데, “공지영은 이러한 이중의 위험성을 지닌 로빈슨 크루소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한편 계간 『문학수첩』은 이번 가을호에서 ‘이 작가는 왜 읽히는가’라는 주로 김훈, 공지영에 대한 작가 분석을 담은 특집을 마련했다. 특집에는 김훈, 공지영 외에도 시인 류시화, 그리고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분석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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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민주의가 필요한 이유

무상교육·노동자 경영참여 등 1956년 조봉암의 정책도 실현되지 못해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21>제673호 2007/08/16


동구권이 몰락한 뒤로 1980년대 후반 국내 혁명적 급진주의 진영은 몇 가지 노선으로 갈라졌다. 소수는 서구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선례를 참고해 국제주의적 혁명 노선에 들어섰지만, 다수는 미 제국에 대한 혐오감에 휩쓸려 이북의 ‘민족 자주’를 지표로 삼았거나, 동구권과 달리 몰락하지 않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운동들이나 복지 국가를 현실적 모델로 삼아 기존 체제 안에서 변혁의 길을 택했다. 체제 안에서의 변혁 노선을 택한 이들이 비록 원론적으로 ‘사민주의 한계 극복’을 이야기하지만, 그 현실적 정책 비전은 넓은 의미의 사민주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민주의적 선택에 장단점이 있지만, 그들의 선택에는 우선 이해가 간다.


△ 1956년 대선에서 대규모 부정이 없었다면 이승만이 아닌 조봉암이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그를 구속해서 법살했다.

부양가족이 없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월 36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 등 복지제도가 한국에서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 국내외에서 ‘혁명적 상황’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들어지지 않을 듯한 정세이기에, ‘혁명’을 당분간 유보하고 복지주의적 사회로의 ‘변혁’에 골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망각하면 큰일이지만, 좋은 의미에서 ‘개량주의’는 이 단계에서 전략·전술상 필요하다.

‘애국적 병사’와 연대한 일본 사민주의자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의 전제 조건이 사민주의적 대중 정당과 노조의 투쟁으로 얻어내는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적 ‘양보’인데, 이 양보를 얻어낼 만한 힘이 개혁가들에게 확보돼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량’ 작업을 벌이려고 집권하거나 기존의 정계에 진출한 사민주의적 정당이 체제와의 긴장을 잃어 아예 원칙까지도 ‘타협을 위한 희생’으로 삼을 정도로 체제에 포획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20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사민주의 세력들이 이 두 문제에 좌초돼 방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보를 따낼 만한 세력 규합도 거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개량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원칙을 희생시킬 정도의 너무나 큰 양보들을 국가와 자본에 먼저 하곤 했다.

일본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는 1924년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갈라서게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검거·투옥·전향 공작의 대상이 됐지만, 사민주의자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각종 선거에 출마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28년 총선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전체 표의 4.7%를 득표해 466석 중 8석을 얻었다. 그런데 두 정당으로 분열되는 내분으로 의석 수가 그 뒤로 몇 년간 줄어들기만 하는 등 정치적 소수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만주 침략 이후로는 자꾸만 전쟁 광풍에 휩쓸렸다.

소수 정치 세력으로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상황이다 보니 체제에 압력을 넣는 것보다는 오히려 체제가 내세우는 조건을 다 받아들여 타협을 무조건 추구하는 꼴이 되는데, 체제의 가장 우선적 조건은 ‘총력 전쟁에의 협력’이었다. 노조 간부들과 기독교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사회민중당이 1931년 만주 침략을 반대했다가 바로 그 다음해에 그 후신 정당인 사회대중당은 만주 침략에 대한 반대를 싹 빼버리고 말았다. 1933년에 이르러 ‘국가의 신성한 가치’를 거의 내면화한 사회대중당은 아예 ‘이기적인 계급 이익’을 비난하고 ‘국민의 영구성’을 내세웠다. ‘국민 생계 문제 해결’을 내건 사회대중당은 1937년 총선에서 9%를 득표해 37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은 중국 형제들과 손을 잡아 같이 투쟁할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 침략에 총알받이로 나설 ‘애국적 병사’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민초들의 전선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파시스트 국가와 거의 동질화된 사회대중당의 사민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체제 안에서의 개량은 불가피한 선택일지라도 국가가 이용하는 ‘국민’ 담론을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여 자본과의 ‘국민적 타협’을 시도하는 순간에 ‘악마와의 거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진보 운동가들이, 현 정부가 범죄적으로 이라크에 파병한 군인 중 희생이 있는 경우에라도 ‘우리 국민’의 편을 무조건 드는 대신 미 제국과 어려운 전투를 벌이는 이라크 독립운동가들을 이해해주는 국제주의적이며 노동계급다운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갈수록 한국 군대가 미 제국을 위한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건수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는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니다.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당분간 추구한다 해도 한국의 반예속적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들러리로 끼어들게 되는 각종 국제적 살육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삼균주의’ 주장한 조소앙의 변화

보통 사민주의는 계급혁명을 당분간 내지는 예측 가능한 장래에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급진주의자 출신들이 하게 돼 있는데, 1930∼40년대 조선의 경우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사민주의를 방불케 하는 미래 구상들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1920년 후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라는 공격에 당황한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의 공산당원에 의해서 1억4천만 명의 평민이 지배를 받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 소련”을 비판하고 소련식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기독교적 사회주의와 평화적인 점차적 개혁”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1930년대에 민족주의 세력들을 규합하려 했던 유림 출신의 민족주의자 조소앙(1887∼1958)은 ‘삼균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해 공산주의를 나름대로 지양해보려 했다. 보편주의적 지향과 종교성이 강한 조소앙은 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사해일가’(四海一家·전세계의 평화적 통일)를 정해놓고 일제의 마수로부터 조선을 되찾고 나서 정치·경제·교육을 다 고르게 하자(三均·세 가지 고르게 하기)는 의미에서 토지와 대규모 생산시설의 국유화, 그리고 무상 의무교육을 새 나라의 국시로 제시했다.

1941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에까지 수록된 이 요구는 지금도 급진적으로 들린다. 과연 광복 이후에는 조소앙이 그 실천을 어떻게 추구했는가? 광복된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소앙은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한다”고 기염을 토하곤 했는데, 국내 정치판에서 쓰라림을 많이 겪고 나서는 가시적으로 온건화됐다. 그가 창당해 이끈 사회당은 ‘결당대회 선언서’(1948년 12월)에서 ‘민족자본의 축적’을 사회의 목표로 인정한데다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사비 부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6·25 전쟁을 앞둔 조소앙은 영국 노동당을 능가할 생각을 버리고 ‘영국 노동당의 사회 개혁 작업’을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했다.

그가 이처럼 온건화된 이유는 간단했다. 진보적 노조들이 파괴·와해되고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할 정도로 어용적 성격이 강한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의 영역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자가 권력에 압력을 넣을 만한 대중운동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조소앙은 전쟁통에 납북돼 김일성 정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립화 통일 방안’을 내세워 단식 투쟁하다가 죽었고, 비슷한 사민주의적 노선을 걸었던 여운형(1886∼1947)은 ‘파업 자제’ 당부로 진보적 노동자들의 지지를 거의 잃은 채 극우파의 손에 암살됐다. 지배자들이 대중에게 양보가 아닌 학살로 대응하고, 좌절한 대중이 당분간 조직적 투쟁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사민주의자들의 운명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가장 성공적 사민주의 정치인은 아마도 조봉암(1898∼1959)이었을 것이다. 1956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진보 인사들을 ‘사민주의’라는 화두로 규합해 진보당을 만든 그는, ‘소련의 세계 침략’을 규탄해 ‘자유 진영의 보루 미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만큼, 그리고 대규모 기간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해도 중소기업의 육성을 요구할 만큼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봉암은 1956년 5월15일 대선에서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건다. 그 결과 그는 23.8%의 표를 얻어 정계를 당황케 했다. 그는 ‘냉전적 사민주의’라는 한계에도 관료집단과 독점자본 위주의 한국 정치 패러다임 전체를 확 바꿀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위험을 알아챈 이승만 정권은 용공 조작이라는 낯익은 수법으로 1958∼59년에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한국적 사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조봉암을 옹호해 구원해낼 만한 힘을 가진 대중적인 사민주의 운동은 당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노총 지도자들이 조봉암을 두둔하기는커녕 그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을 정도였다.

국민주의·민족주의의 함정을 피하라

조봉암이 이야기했던 무상교육제도나 노동자 경영 참여 등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좋은 의미의 ‘개량’은 지금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개량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우리가 그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려면 사민주의적 개혁가들은 국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함정들을 피하는 한편, 비정규직을 비롯한 광범위한 ‘피해 대중’들의 조합화·조직화를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튼튼한 운동적 기반을 다지고 급진적 노동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과 국가에 압력을 넣어 의미 있는 ‘양보’를 따낼 수 있다.

참고 문헌

1. <일제하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사상> 강명숙, 백산자료원, 1999, 60∼82, 194∼246쪽
2. <조소앙이 꿈꾼 세계> 김기승, 지영사, 2003, 193∼315쪽.
3. <조봉암과 1950년대> 서중석, 상권, 역사비평사, 1999, 309∼454쪽.
4.〈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Andrew Gor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pp.12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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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난 그 어떤 민족주의도 혐오한다. 윤도현이 <오, 필승코리아>를 외칠 때 난 냉소했다.

"이 자식(죄송.-.-)도 맛이 갔군!"

록의 진정성을 이야기 하는, 그건 권위에의 '저항'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했던 자칭 '락커'라는 인간이 월드컵 응원가를 부른다? 하지만 뭐, 그의 선택이니 어쩌겠는가. 딱, 저 한 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그게 민주노동당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당원으로서 나름대로 욕할 자격이 있으니까. 뭐 굳이 대선후보 선출과정이 아니라도 비판할 건덕지는 많았다. 그 동안 짜증나서 잘 쳐다보지를 않았지만, 엔엘 애들 하는 짓거리 보고 있노라면 탈당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번 후보 선출과정에서도 엔엘 애들하고 권영길이 한 건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엔엘 애들의 조직적 지지 표명에 이 '늙은이' 감동먹었는지 '혁명열사릉 참배'와 '조선노동당사 공유'를 외치며 화답한다. 나 참, 진짜 환장하겠다.

이게 진보정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인간이 대중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국민경선을 치르는 와중에 할 수 있는 소리인가? 그렇게 주사파 애들의 정신건강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걔네들의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제발 헛 짓거리 하지 말고 나 좀 투표에 참가하게 해주면 좋겠다. 지금 같아선 이 주사파 애들 정신건강 염려하는 권영길에 투표하기보다는 차라리 기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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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식객>17권을 읽다가 국밥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았다. 나에겐 무척 실감나는 에피소드다. 나 역시 어떤 음식 하나를 무척이나 갈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던, 별 것도 아닌 시락국밥, 돼지국밥 한 그릇을. 국밥 한 그릇이 무에 그리 맛일을까만, 단순한 맛이 아니라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추억이라고 하기보다는 조금 슬픈 기억이랄까.

지금도 부산엘 가면 자주 돼지국밥집에 들린다. 싫다는 아내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서는 거의 반 강제로 먹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뭐, 아내도 쫑알쫑알 대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거부하지는 않는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먹고 싶었던 게 돼지국밥이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게 아래의 글이다. 아 참, 지난 여름에 안경 맞추러 가서 보니까 3,500원으로 올랐던 거 같다.




서울엔 돼지국밥이 없다


돼지 국밥,,,

먹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고기 국밥 보다 훨씬 더 맛있다(뭐 상대적이겠지만).

학교 다닐 때, 돈이 없어 소주 한 잔 하기도 만만찮던 시절,
학교앞 시장통 입구에 위치한 시락국밥집에서 파는 돼지국밥은
불과 300원의 돈도 아까워 시락국밥으로 대체당하곤 했다.
(시락국밥 500원, 돼지국밥 800원)

그 한을 품고 살아서인가?

서울 생활을 하면서 최소한 먹는 거에 대해선 궁핍하지 않던 시절,
그 돼지국밥을 먹고픈 생각이 들어 수소문 했지만
서울에 돼지국밥을 파는 곳은 없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93,4년 경엔 없었다.

그 이유를 파헤쳐보니 돼지국밥은 대구 이남 지방에서만
주요 먹거리로 인정되고 그 이북 지방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놈들과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말하곤 했다.

"야, 다 때려치고 돼지국밥집이나 하나 하자!"


또 하나의 차이는
부산쪽 보통의 돼지국밥 집엔 순대를 같이 판다.
500원 짜리 순대 한 접시 시켜 놓구선 소주 몇 병을 비우던 시절,
딥따 소주만 시키면서
"어무이, 국물 좀 더 주이소." 하는 소리가 당당하게 나오던 시절...

그 순대 또한 서울은 부산과 달랐다.


오랜만에 만난 부산 친구놈과
서울의 어느 순대집으로 가서 순대와 소주를 시켰는데, 뭔가 한 가지가 빠졌다.

"아주머니, 여기 된장 주세요~."
"댄장요?"(으~씨, 우리 발음이 그렇게 들렸나 보다...-.-..)
"네에, 순대 찍어 묵구로요..."
"여는 된장 없습니다. 그기 소금 있잖아요?"
..ㅡ.ㅡ...

서울 사람들은 순대를 소금에 찍어먹는 거였다.
우리는 된장(엄밀하게 말하면 막장)에 찍어 먹었는데....

부경방에 올리신 월유님의 뒷풀이 먹거리들을 보니,
불현듯 그 옛날의 돼지국밥이 그리워진다.

지금도 가끔 부산을 가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일부러라도 부산대학교 앞을 찾아 돼지국밥집을 들린다.
지금은 3,000원씩 하는데,
그 옛날, 친구들이 모여 해장하러 아침밥 먹으러 가서는
각자 돼지국밥 하나에 소주를 1병씩이나 비우던 그때의 추억은 못 살리지만
그래도 땀 흘리며 비우는 돼지국밥 한 그릇은 여전히 '추억'으로 존재한다.



200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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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순이 2007-09-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대 앞 국밥집도 괜찮지만 남산동 새벽 시장 근처에 괜찮은 국밥집이 있습니다. 24시간 영업이라 가끔 새벽에 가기도 하는데 부대 앞 못지 않은 맛입니다~ 한 그릇 사죠~^^

내오랜꿈 2007-09-19 20:18   좋아요 0 | URL
'못지 않다'? 우리 말은 참 비교급이 덜 발전한 것 같아. 덜 발전했다기보다는 일상 생활에 덜 활용된다고 해야 하나? '못지 않다'라면 '나쁘지 않다'는 것이고, 영어식 표현으로는 'not better'인데, 좋은 말로 알고 있어.

그런데 우리 생활에 있어 '못지 않다'고 하면 '그럭저럭 먹어줄 만하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표현 아닌가? 내가 우리 말 이해에 문제가 있는건가? 전문가의 견해를 한 번 듣고 싶다.

그리고, 한 그릇 먹으로 갈테니 여기서 부산 갔다 오는 차비까지 준비하고 있기 바란다!

점순이 2007-09-20 17:46   좋아요 0 | URL
'못지 않다'는 못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최소한 같거나 낫다는 뜻이겠죠.
not better과는 의미가 반대같은데.. 오늘 새벽에 수업 듣는 애 중 2명이 생일이래서 그 집 가서 국밥 먹고 헤어졌는데, 역시 맛 있더이다~ 순대도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이던데 또한 일품~(비싸서 몇 점 못 먹었지만..^^;) 이름은 금문돼지국밥~ 내려오는 길이 있으면 한 그릇 대접한단 뜻인데, 차비까지 대라는 어거지를 쓰시다니.. 서울살이 꽤나 팍팍한가 보네요.. 빨리 귀농하소서~^^

내오랜꿈 2007-09-20 19:51   좋아요 0 | URL
뭔, 억지? 살 거면 화끈하게 사라는 거지...

근데, 그게 왜 'bad'가 아니라 'better'로 되어 있지?

antitheme 2007-09-19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대학교 앞 비봉식당의 돼지국밥이 생각나네요. 거기에 부산식 막장에 찍어먹는 순대.
비가 와서인지 더 그립습니다.
제가 있는 남대문 주변 어디서 돼지국밥집 간판은 봤던 것 같은데...

내오랜꿈 2007-09-19 20:20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다른 인터넷 매체에 올렸더랬는데, 몇 가지 반응들이 오더군요. 서울 어디 어디에 돼지국밥집이 생겼다,는 류의 댓글들 말입니다. 가장 신빙성 있는 제보로는 강남 역삼동 먹자골목 뒤편으로 하나 생겼다면서 전화전호까지 남기더군요. 실제 확인은 못해 봤습니다.

아사히 2007-09-2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 토요일 비가 내리는 출출한 늦은 저녁시간 밥을 먹고 들어갈까라는 남편말에 모두 동의하고 그럼 뭘 먹지? 돼지 국밥 먹을까 돈까스 먹을까? 딸과 나, 남편은 돼지 국밥, 아들은 돈까스. 하나로 통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아들이 고집을 피운다. 다수결로 해도 돼지국밥이고, 누나와 가위바위보에서도 진 주제에 아들은 눈물로 고집을 피운다. 돈까스라는 단어를 꺼낸 남편이 미워졌다.
진짜 그런날에 돈까스 먹기 싫은데.
거금도에서 모언니가 말했던 부모의 권력 행사를 떠올리며 그래 돈까스 먹고 싶은 아이들의 입장을 백번 고려해도 난 그 순간 돈까스 먹기가 싫었다.
결국 돈까스 집앞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돈까스 하나 포장해서 돼지 국밥집에 가서 우린 돼지국밥 먹는다. ㅋㅋㅋ

내오랜꿈 2007-09-20 13:21   좋아요 0 | URL
짜~~식, 꽤 고집 있네.
누구 닮았지?
 


지금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다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유능한 시험 감독관은 대개 교실 뒷편에 선다. 가끔 헛기침이나 발소리를 효과음으로 덧붙이면 효과는 훨씬 커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학생들을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은 그를 볼 수 없다.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이상 학생들은 시험 시간 내내 '바른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처럼 단순한 감시의 원리는 19세기 초 제레미 벤덤이 설계한 판옵티콘(원형감시장치)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왕없는 권력'은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발견했다면, 벤덤이 찾아낸 것은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벤덤이 구상한 것은 집단적 격리와 통제가 필요한 영역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원리였다. 그는 판옵티콘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부류든 감시되어야 할 사람들을 수용하는 사회시설, 특히 감화원, 감옥, 공장, 작업장, 구빈원, 제작소, 정신병원, 검역소, 병원, 학교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 원리."

판옵티콘은 사회 전반의 조직 원리였다는 점에서 벤덤식 유토피아였다.

판옵티콘은 빛과 시선을 교묘하게 배치한다. 벤덤의 계획은 중앙의 감시탑 주변에 독방들로 채워진 원형의 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중앙의 감시탑에는 감시자 한 명을 배치하고 독방 안에는 광인이나 병자, 죄수, 노동자, 학생 등 누구든지 한사람씩 감금한다. 중요한 것은 빛과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중앙의 감시자는 독방을 볼 수 있지만, 독방에 감금된 자는 결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감금된 자는 빛에 노출되지만 감시자는 어둠 속에 숨는다.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 각자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할 때 판옵티콘의 효과는 정점에 달한다.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눈'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동료가 감시자다." 이것이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하는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규율이 존재하는 어떤 집단에서도 시선의 권력은 작동한다. 군대와 학교, 직장, 심지어는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안에는 늘 우리를 지켜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다.

'자율'이 준법의 동의어로 쓰일 때, 그것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결과에 가깝다. 가령 경찰 대신 교통법규 위반자를 감시하는 '카파라치'의 효과가 그것이다. 그들의 사진기는 경찰의 시선을 무한대로 복제한다. 제복을 걸치지 않은 감시자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 덕분에 운전자는 곳곳에서 감시자의 존재를 실감한다. 이 제도의 진정한 효과는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자율'은 자발적 복종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감옥에 대한 책이 아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한없이 촘촘한 권력의 시선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권력을 자유의 억압 정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푸코는 말한다. '보이지 않는 눈'은 개인들에게 일일이 번호를 부여하고 관찰하며 세심히 기록한다. 훈련과 평가가 뒤따르고 규준에 못미치는 자에게는 처벌이 가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길들여진 신체는 개인과 집단의 생산적 능력을 증대시킨다.

대신 권력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뺀다. 자기 안에서 감시자의 눈빛을 느끼는 자의 복종은 체념을 동반한다. 신체의 효율성은 극대화되지만 '쓸모 없는' 힘은 제거되는 것이다.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주어진 질서의 밖에서 종종 겪에 되는 당혹감을 생각해 보라. 혹은 명예퇴직한 은행원과 제대 군인이 맞닥뜨려야 할 무력감 따위들!

푸코는 낡은 문서 창고에서 자질구레한 삶의 조각들을 끄집어 내 권력의 격자 위에 펼쳐 놓는다. 권력은 사소한 것들을 통해 작동하며, 일상은 낱낱히 감시의 시선에 노출된다. 근대의 개인은 권력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그물코다. 그래서 권력의 그물망이라는 푸코의 비유는 섬뜩하다. 지나치게 비관적이거나 무기력한 결론인가? 그러나 저항은 이 책의 숨겨진 주제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감시와 처벌』은 "전투의 흙먼지로 술렁인다." 이 책이 돌연 "멀리서 들려오는 전투의 아우성"으로 끝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최태원, 「지금 누군가 날 감시하고 있다」,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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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람돌이의 서재"에서 CCTV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접했다. 이 CCTV를 통해 감시 문제는 단순하게 사생활 침해니 아니니 하는 차원으로 접근해서 인권의 문제로 나아가는 게 가장 일반적인 접근일 것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 글을 쓴 바람돌이 역시 자신이 어느 정도는 거부하는 CCTV와 같은 '일상적인 감시자의 시선'이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교사라는 그의 신분적 위치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지만 그도 자신이 거부하는 감시자의 시선을 일상적으로 발휘할 수밖에 없는 이 기묘한 이중성.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교실의 배치에서 '교단'이란 게 아직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피감시자보다 높은 위치에 서는 교단의 위치. 하지만 사실 이것은 벤덤의 판옵티콘과 같이 눈에 보이는 감시자의 시선이기에 즉자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통제 메카니즘이다. 바람돌이의 에피소드에서 CCTV의 존재라는 말 앞에서 스스로 자수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은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통제 메카니즘'에 길들여진 주체에 다름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CCTV라는 권력 앞에 게겨봤자 자기한테 더 큰 손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자수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감시자의 시선을 스스로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내면화한 감시자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분석한 책이 바로 <감시와 처벌>이다.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의 분석을 통해 우리가 흔히들 우리 행동의 규범적 준거틀로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CCTV라는 존재 앞에 '알아서 기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성의 역사1 :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자그마한 인내력만 담보된다면 <감시와 처벌>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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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궁금증에 대한 답변- 요즘은 교탁 없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키작은 사람은 슬퍼요.
학교에서 교사의 역할은 감시자 맞죠? 공부 하나 안하나 청소 하나 안하나 사고 치나 안치나 끊임없이 감시하고 협박하고 또 때로는 처벌하는.... 가끔은 이게 뭐하는건가 싶을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점순이 2007-09-19 16:37   좋아요 0 | URL
가르치는 위치에서 권력을 포기하면 좀 많이 힘들어지지~ 학원은 학교와 또 달라서 강사라고 해봤자 그렇게 큰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 많은 경험과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가끔은 체벌이나 어른이라는 권위에 기대 아이들로부터 자기가 필요한 거리를 충분히 확보한 채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금 부러울 때도 있지. 하지만 학생들과 눈높이를 비교적 맞추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지내는 학원이 학교보다 낫지 않나 싶을 때도 가끔은 있다. 최소한 수업을 들어오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는 충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해서 골치아플 때도 있지만..^^;

내오랜꿈 2007-09-20 09:49   좋아요 0 | URL
뭐, 그런 감시자/피감시자는 괜찮지 않나?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고 서로를 이겨낼(=속여낼) 궁리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각자 서로 기술이 느는 것 아닌가?

내가 문제시하는 건 그런 즉자적 감시/처벌은 아니지... 네 직업이니까, 좀 즐겨도 괜찮을 거 같애. 그 속에서 감시받는 아이들의 재능도 발전하는 것이니까...^^

누에 2007-09-1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런 감시체제에서 탈출하는 법에 대해 쓴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

내오랜꿈 2007-09-20 09:50   좋아요 0 | URL
후후. 안녕하세요... 글쎄요. 탈출하는 법은 책이 아니라 생활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보편적 ‘민족주의’는 있는가


폴란드·핀란드에서는 ‘독립 은인’으로 여겨지는 조선의 적 일본 경무총장 아카시…
특정 제국을 혐오했을 뿐 제국주의에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민족주의자의 근시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 21> 제640호 2006/12/21


필자가 아는 구미의 한 일본사 전문가는 언젠가 한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두고 “한 국민의 영웅을 죽인 사람이 그 공로로 다른 국민의 영웅이 된,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비꼰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역사에 없다는 가정법을 억지로 적용한다면 이토 히로부미와 다르지 않은 부국강병 위주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 개화파 인물들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약해진 청나라의 분할에 참여하는 식으로 이토와 동격의 침략자로 나서는 등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는, 신생 제국의 수반 중 한 명을 처단한 이는, 당연히 그 제국의 희생자에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에서는 가해 집단의 기억과 피해 집단의 기억은 극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 안중근(왼쪽)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사진 왼쪽)처단을 두고 ‘영웅의 상대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안중근과 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까.


러시아를 ‘변방’부터 무너뜨려라

그렇다고는 해도 안중근과 같은 영웅들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가? 아쉽게도 꼭 그렇지도 않다. 안중근 의거 당시에 조선에 헌병대장으로 들어와 의병 탄압에 열을 올렸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라는 일제의 고급 군인을 둘러싼 기억의 대립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집단적 기억들이 얼마나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인에게, ‘합방’과 함께 경무총장이 되어 1914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해온 아카시는 ‘적’이 아닐 수 없었다.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 계몽운동가들에게 수십 종류의 가혹한 고문을 가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아카시였다. 조선의 적이기도 하지만, 1914년부터 중국을 ‘조선화(化)’하는 일, 즉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따먹어 식민지 내지 반(反)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만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아카시는 중국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적’일 것이다. 그런데 1900년대의 계몽운동가들이 조선과 그 비극적인 운명이 흡사하다고 동병상련을 느꼈던 폴란드의 민족주의나, 러시아 제국의 또 하나의 속령이었던 핀란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아카시가 다름 아닌 ‘독립운동의 은인’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의 벽두, 조선을 놓고 대립했던 러시아와 일본…. 덩치가 훨씬 작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않는 부위에다 불의의 타격을 가하는 것이 거인 러시아를 쓰러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02년부터 이 계획이 일본 군부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출신으로서 육군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한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대령)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부임됐다.아카시는 한 헝가리 계통의 엔지니어를 통해 러시아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로부터 더욱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던 핀란드의 헌정당(온건 민족주의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1904년 1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시를 포함한 일본 외교단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적국에서의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서구의 매너에 밝고 사교성이 탁월했던 아카시는 짧은 기간에 여느 열강의 정보장교가 부러워할 정도의 넓은 첩보·공작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스웨덴 군부와 러시아 군부 간의 전통적인 적대관계를 이용해 스웨덴의 군사첩보부를 통해 러시아군에 대한 정기적 사찰을 시작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핀란드 헌정당의 가장 급진적 활동가인 콘니 질리아쿠스(Konni Zilliakus·1855~1924)를 가까이 사귀어 그를 통해 러시아의 혁명가를 비롯해 폴란드, 그루지야, 라트비아, 벨로루시의 민족주의자까지 알게 됐다. 핀란드를 ‘러시아화’해 그 자치를 말살하려는 러시아 정부가 미웠던 헌정당의 일부 지도부는 “일본 쪽에서 총 5만 정 정도를 공급해주면 러시아의 후방을 크게 교란시킬 수 있다. 대신에,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핀란드 독립을 요구해달라”는 대담한 제안까지 내놓았다가 유럽의 정치에 그 정도로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 외무부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 요즘 일본에서는 아카시를 “일본의 승리를 이끌어준 위대한 첩보전의 왕”으로 치켜세우는 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왼쪽). 대만에 남아 있는 아카시의 묘지에는 일본식 신사 문인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오른쪽).


핀란드 등이 받은 혁명 자금은 3500만달러

‘마당발’이었던 아카시를 통해 폴란드의 온건 민족주의 지도자인 로만 드모브스키(Roman Dmovski·1864~1939)는 1904년 5월에 도쿄에 온다. 그리고는 일본군과 전투 중인 러시아군에 속한 폴란드계 군인들을 어떻게 스스로 항복하게끔 유도할 수 있는지 참모본부의 관계자들과 의논했다. 그 뒤를 이어 급진적 민족주의 지도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ozef Pilsudski·1867~1935)도 도쿄를 찾는다. 그는 아예 일본 자금으로 폴란드에서 무장 반란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지만 역시 일본 군부로부터 퇴짜를 맞고 폴란드계 군인들 사이의 선전선동과 후방 교란 비용으로 2만파운드 정도만 받아냈다. 러시아의 패배를 틈타 폴란드를 독립시키려던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여 일본군에 항복한 폴란드계 군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관 암살과 격렬한 데모 등을 위시한 폴란드에서의 피우수트스키 추종자들의 활동이 러시아 내부 사정의 전체적인 악화에 기여했음은 틀림없다. 즉 폴란드 민족운동에의 일본 군부의 ‘투자’는 그 나름의 ‘부가가치’를 생산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성공은, 그루지야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의 급진파 민족혁명가들에 한 ‘투자’였다. 아카시는 그 지역에 8500정 정도의 스위스제 총을 수로를 통해 공급해주었는데, 그 무기는 1905년 겨울의 포티·수후미 등 그루지야의 여러 도시에서 무장 반란을 가능케 했다.

아카시를 통해 핀란드, 폴란드, 그루지야, 그리고 러시아 내의 혁명세력들이 받은 돈은 당시의 화폐 단위로 약 100만엔, 즉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약 3500만달러에 달했다. 아카시의 공작이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러시아 제국 안에서의 중앙정부와 피압박 민족 간 갈등의 표면화에 공헌했다고 생각된다. 사실, 굳이 ‘돈’이라는 요소가 없었다 해도, 억압자 러시아의 패배 자체가 그 내부의 소수자들에게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카시라는 일제 군인과 러시아 제국 안의 혁명세력의 협조는 ‘동상이몽’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혁명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아카시가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일체의 혁명 지원을 중단해버린 반면, 러시아 혁명세력 안에서도 애당초부터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제국과 협력관계를 곱지 않게 보는 여론들이 있었다. 예컨대 주로 농민들에게 기댔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의 사회혁명당이 일본 지원을 즐겨 받았지만, 레닌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세력들은 혁명의 계기로서 자국 러시아의 패배를 기원하면서도 일본 돈에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윤치호의 표현대로 “조선 독립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았던” 일본군의 승리들에 대해 폴란드나 핀란드에서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내고 기회 닿는 대로 일제와 협력하고 싶어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폴란드와 조선은 식민화의 고통을 공유했지만, 조선을 짓밟았던 일본 군부에게 거금을 요청해 ‘일본과 폴란드의 동맹’을 갈구했던 피우수트스키는 지금도 수많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압제를 비판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라는 청나라 계몽주의의 ‘스타’ 논객의 글을 조선 계몽주의자들이 읽어 핀란드의 비운에 동감을 느꼈지만, 악질 헌병 아카시는 질리아쿠스의 회고록을 탐독했던 1920~30년대의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존경스러운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해서 한 약소민족에게 ‘원흉’으로 기억되는 제국의 충견이, 다른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은인’으로 기억되는가? 문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본질에 있다.

미국이 은인인 쿠르드 민족주의자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독립만을 원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는 하나의 특정 제국인 러시아를 혐오했을 뿐이지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조선을 불법 점령한 일본의 돈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 적의 적과의 연대’일 뿐이었다. 오늘날의 일부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를 불법 점령한 미군을 “민족 독립의 은인”으로 오해해 미국 쪽의 장기적인 유전 지역 장악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근시안이 아닌가?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특정 압제자를 상대로 하는 국지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도 세계적인 압제의 그물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초민족적·초인종적 투쟁의 수준으로 이를 잘 승화시키지 못한다. ‘반러 코드’ 하나로 일본 군부와 친해질 수 있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 일제의 감옥에서도 ‘황색인종의 대동단결’과 ‘백색 인종과의 대결’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안중근의 수준을 넘어 보편적인 반제 투쟁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아카시와 손을 잡는 대신에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반전 연대를 만들고 있었던 레닌이 이미 그때부터 외쳤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이외에 과연 있겠는가?


참고 문헌:

1. Akashi Motojir?, Helsinki: SHS, 1988.
2. <明石工作―謀略の日露戰爭> 이나바 치하루(?葉千晴), 丸善ライブラリ一, 1995. 3. Michael Futrell, London: Praeger, 1963.
4. <Японские деньги и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Русская разведка и контрразведка в войне 1904-1905 гг.: Документы> Павлов Д., Петров С.,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кая группа “Прогресс”: “Прогресс-Академия”,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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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박노자의 거의 대부분의 견해에 200% 동의한다.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견해라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의 균형 잡힌 시각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한 절대 보편타당한 비판은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세계사를 돌아봤을 때 '민족주의' 치고 '사고치지 않은 민족주의'가 존재하기나 했을까? 결국은 국수주의, 국가파시즘, 전체주의로 전락하게 되는 빌어먹을 넘의 민족주의. 세계사의 독재자, 파시즘 치고 '애국', 민족', '국익' 외치지 않은 것들이 있었나? 그래서 난 '민족'이니 '애국'이니 '국익'이니 하며 벌어지는, 혹은 벌일려고 하는 그 모든 일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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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편적 민족주의는 없죠? 보편적 인류애가 있을뿐.... 한때는 그래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진보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그건 반쯤은 의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이고 더더욱 지금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는 오히려 반동이 되고 있지 않나 싶을정도예요.

내오랜꿈 2007-09-19 01:04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난 '광화문에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 하나에 '목숨 거는 슬픈 애국'.

지금 20대 초반의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각 팀 선수들에 대해 우리가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이나 술술 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의 시발점은 아마도 2002년 월드컵이겠지.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너 대한민국 사람 아니냐, 심지어 매국노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위기.

이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것이 바로 '황우석 사건' 아니겠나.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황우석 사태 당시 MBC 보도가 나가고 MBC가 취재윤리 문제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자 MBC 시청거부해야 된다고 흥분한 인간들도 여럿 된다.

그런데 그 인간들, 한때는 '운동권'이었단다. 시부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엔엘 애들 대부분이 내가 아는 이 운동권 인간하고 똑 같았을 걸?

누에 2007-09-19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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