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민족주의’는 있는가


폴란드·핀란드에서는 ‘독립 은인’으로 여겨지는 조선의 적 일본 경무총장 아카시…
특정 제국을 혐오했을 뿐 제국주의에는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민족주의자의 근시안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 21> 제640호 2006/12/21


필자가 아는 구미의 한 일본사 전문가는 언젠가 한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두고 “한 국민의 영웅을 죽인 사람이 그 공로로 다른 국민의 영웅이 된,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비꼰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역사에 없다는 가정법을 억지로 적용한다면 이토 히로부미와 다르지 않은 부국강병 위주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 개화파 인물들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약해진 청나라의 분할에 참여하는 식으로 이토와 동격의 침략자로 나서는 등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역사 속에서는, 신생 제국의 수반 중 한 명을 처단한 이는, 당연히 그 제국의 희생자에게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에서는 가해 집단의 기억과 피해 집단의 기억은 극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 안중근(왼쪽)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사진 왼쪽)처단을 두고 ‘영웅의 상대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안중근과 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까.


러시아를 ‘변방’부터 무너뜨려라

그렇다고는 해도 안중근과 같은 영웅들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집단기억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는가? 아쉽게도 꼭 그렇지도 않다. 안중근 의거 당시에 조선에 헌병대장으로 들어와 의병 탄압에 열을 올렸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라는 일제의 고급 군인을 둘러싼 기억의 대립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집단적 기억들이 얼마나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인에게, ‘합방’과 함께 경무총장이 되어 1914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해온 아카시는 ‘적’이 아닐 수 없었다.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 계몽운동가들에게 수십 종류의 가혹한 고문을 가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아카시였다. 조선의 적이기도 하지만, 1914년부터 중국을 ‘조선화(化)’하는 일, 즉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따먹어 식민지 내지 반(反)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하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대만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아카시는 중국 민족주의 입장에서도 ‘적’일 것이다. 그런데 1900년대의 계몽운동가들이 조선과 그 비극적인 운명이 흡사하다고 동병상련을 느꼈던 폴란드의 민족주의나, 러시아 제국의 또 하나의 속령이었던 핀란드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악명을 떨쳤던 아카시가 다름 아닌 ‘독립운동의 은인’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의 벽두, 조선을 놓고 대립했던 러시아와 일본…. 덩치가 훨씬 작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전혀 예상하지 않는 부위에다 불의의 타격을 가하는 것이 거인 러시아를 쓰러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902년부터 이 계획이 일본 군부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후쿠오카 출신으로서 육군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한 아카시 모토지로 대좌(대령)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부임됐다.아카시는 한 헝가리 계통의 엔지니어를 통해 러시아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로부터 더욱 많은 자율성을 획득하려 했던 핀란드의 헌정당(온건 민족주의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1904년 1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시를 포함한 일본 외교단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적국에서의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서구의 매너에 밝고 사교성이 탁월했던 아카시는 짧은 기간에 여느 열강의 정보장교가 부러워할 정도의 넓은 첩보·공작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스웨덴 군부와 러시아 군부 간의 전통적인 적대관계를 이용해 스웨덴의 군사첩보부를 통해 러시아군에 대한 정기적 사찰을 시작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핀란드 헌정당의 가장 급진적 활동가인 콘니 질리아쿠스(Konni Zilliakus·1855~1924)를 가까이 사귀어 그를 통해 러시아의 혁명가를 비롯해 폴란드, 그루지야, 라트비아, 벨로루시의 민족주의자까지 알게 됐다. 핀란드를 ‘러시아화’해 그 자치를 말살하려는 러시아 정부가 미웠던 헌정당의 일부 지도부는 “일본 쪽에서 총 5만 정 정도를 공급해주면 러시아의 후방을 크게 교란시킬 수 있다. 대신에,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핀란드 독립을 요구해달라”는 대담한 제안까지 내놓았다가 유럽의 정치에 그 정도로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 외무부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 요즘 일본에서는 아카시를 “일본의 승리를 이끌어준 위대한 첩보전의 왕”으로 치켜세우는 책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왼쪽). 대만에 남아 있는 아카시의 묘지에는 일본식 신사 문인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오른쪽).


핀란드 등이 받은 혁명 자금은 3500만달러

‘마당발’이었던 아카시를 통해 폴란드의 온건 민족주의 지도자인 로만 드모브스키(Roman Dmovski·1864~1939)는 1904년 5월에 도쿄에 온다. 그리고는 일본군과 전투 중인 러시아군에 속한 폴란드계 군인들을 어떻게 스스로 항복하게끔 유도할 수 있는지 참모본부의 관계자들과 의논했다. 그 뒤를 이어 급진적 민족주의 지도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ozef Pilsudski·1867~1935)도 도쿄를 찾는다. 그는 아예 일본 자금으로 폴란드에서 무장 반란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지만 역시 일본 군부로부터 퇴짜를 맞고 폴란드계 군인들 사이의 선전선동과 후방 교란 비용으로 2만파운드 정도만 받아냈다. 러시아의 패배를 틈타 폴란드를 독립시키려던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여 일본군에 항복한 폴란드계 군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관 암살과 격렬한 데모 등을 위시한 폴란드에서의 피우수트스키 추종자들의 활동이 러시아 내부 사정의 전체적인 악화에 기여했음은 틀림없다. 즉 폴란드 민족운동에의 일본 군부의 ‘투자’는 그 나름의 ‘부가가치’를 생산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성공은, 그루지야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의 급진파 민족혁명가들에 한 ‘투자’였다. 아카시는 그 지역에 8500정 정도의 스위스제 총을 수로를 통해 공급해주었는데, 그 무기는 1905년 겨울의 포티·수후미 등 그루지야의 여러 도시에서 무장 반란을 가능케 했다.

아카시를 통해 핀란드, 폴란드, 그루지야, 그리고 러시아 내의 혁명세력들이 받은 돈은 당시의 화폐 단위로 약 100만엔, 즉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약 3500만달러에 달했다. 아카시의 공작이 일본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러시아 제국 안에서의 중앙정부와 피압박 민족 간 갈등의 표면화에 공헌했다고 생각된다. 사실, 굳이 ‘돈’이라는 요소가 없었다 해도, 억압자 러시아의 패배 자체가 그 내부의 소수자들에게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아카시라는 일제 군인과 러시아 제국 안의 혁명세력의 협조는 ‘동상이몽’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혁명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아카시가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일체의 혁명 지원을 중단해버린 반면, 러시아 혁명세력 안에서도 애당초부터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제국과 협력관계를 곱지 않게 보는 여론들이 있었다. 예컨대 주로 농민들에게 기댔던 소부르주아적 경향의 사회혁명당이 일본 지원을 즐겨 받았지만, 레닌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세력들은 혁명의 계기로서 자국 러시아의 패배를 기원하면서도 일본 돈에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윤치호의 표현대로 “조선 독립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았던” 일본군의 승리들에 대해 폴란드나 핀란드에서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내고 기회 닿는 대로 일제와 협력하고 싶어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폴란드와 조선은 식민화의 고통을 공유했지만, 조선을 짓밟았던 일본 군부에게 거금을 요청해 ‘일본과 폴란드의 동맹’을 갈구했던 피우수트스키는 지금도 수많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 핀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압제를 비판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라는 청나라 계몽주의의 ‘스타’ 논객의 글을 조선 계몽주의자들이 읽어 핀란드의 비운에 동감을 느꼈지만, 악질 헌병 아카시는 질리아쿠스의 회고록을 탐독했던 1920~30년대의 핀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가장 존경스러운 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어떻게 해서 한 약소민족에게 ‘원흉’으로 기억되는 제국의 충견이, 다른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은인’으로 기억되는가? 문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본질에 있다.

미국이 은인인 쿠르드 민족주의자

자본주의 국가로서의 독립만을 원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는 하나의 특정 제국인 러시아를 혐오했을 뿐이지 제국주의와 세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조선을 불법 점령한 일본의 돈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 적의 적과의 연대’일 뿐이었다. 오늘날의 일부 쿠르드족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를 불법 점령한 미군을 “민족 독립의 은인”으로 오해해 미국 쪽의 장기적인 유전 지역 장악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민족주의적 근시안이 아닌가?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특정 압제자를 상대로 하는 국지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도 세계적인 압제의 그물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초민족적·초인종적 투쟁의 수준으로 이를 잘 승화시키지 못한다. ‘반러 코드’ 하나로 일본 군부와 친해질 수 있었던 피우수트스키나 질리아쿠스, 일제의 감옥에서도 ‘황색인종의 대동단결’과 ‘백색 인종과의 대결’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안중근의 수준을 넘어 보편적인 반제 투쟁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아카시와 손을 잡는 대신에 일본의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반전 연대를 만들고 있었던 레닌이 이미 그때부터 외쳤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이외에 과연 있겠는가?


참고 문헌:

1. Akashi Motojir?, Helsinki: SHS, 1988.
2. <明石工作―謀略の日露戰爭> 이나바 치하루(?葉千晴), 丸善ライブラリ一, 1995. 3. Michael Futrell, London: Praeger, 1963.
4. <Японские деньги и русская революция. Русская разведка и контрразведка в войне 1904-1905 гг.: Документы> Павлов Д., Петров С., Москва: Издательская группа “Прогресс”: “Прогресс-Академия”,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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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박노자의 거의 대부분의 견해에 200% 동의한다. 읽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견해라면 동의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은 그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의 균형 잡힌 시각 때문이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한 절대 보편타당한 비판은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세계사를 돌아봤을 때 '민족주의' 치고 '사고치지 않은 민족주의'가 존재하기나 했을까? 결국은 국수주의, 국가파시즘, 전체주의로 전락하게 되는 빌어먹을 넘의 민족주의. 세계사의 독재자, 파시즘 치고 '애국', 민족', '국익' 외치지 않은 것들이 있었나? 그래서 난 '민족'이니 '애국'이니 '국익'이니 하며 벌어지는, 혹은 벌일려고 하는 그 모든 일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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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편적 민족주의는 없죠? 보편적 인류애가 있을뿐.... 한때는 그래요. 저항적 민족주의의 진보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죠. 하지만 그건 반쯤은 의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이고 더더욱 지금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는 오히려 반동이 되고 있지 않나 싶을정도예요.

내오랜꿈 2007-09-19 01:04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난 '광화문에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 하나에 '목숨 거는 슬픈 애국'.

지금 20대 초반의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각 팀 선수들에 대해 우리가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이나 술술 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의 시발점은 아마도 2002년 월드컵이겠지.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너 대한민국 사람 아니냐, 심지어 매국노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위기.

이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것이 바로 '황우석 사건' 아니겠나.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황우석 사태 당시 MBC 보도가 나가고 MBC가 취재윤리 문제에 대해 사과방송을 하자 MBC 시청거부해야 된다고 흥분한 인간들도 여럿 된다.

그런데 그 인간들, 한때는 '운동권'이었단다. 시부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엔엘 애들 대부분이 내가 아는 이 운동권 인간하고 똑 같았을 걸?

누에 2007-09-19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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