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한 주류 대중음악 ... 무슨 일이 일어났나
[칼럼] 소녀시대, 원더걸스, 서태지를 둘러싼 이야기들

나도원 대중음악전문기자
출처 : <컬쳐뉴스> 2007-11-21


원더걸스와 함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시대
▲ 원더걸스와 함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시대
아직 가을인데 저만치서 눈덩이가 몸집을 불리고 있다. 말이 말을 만들어내는 눈덩이효과의 혐의가 짙긴 하지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서태지는 모처럼 주류 대중음악계에 화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문과 잡지들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원고를 줄줄이 싣고, 개중에는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해가며 진단하는 경우도 있다. 노래의 히트가 히트수로 판가름 나는 상황에서 보면 가시적인 실적도 존재한다. 아이돌시스템을 활용해온 SM 엔터테인먼트와 JYP 엔터테인먼트의 마케팅 전술의 차이가 각각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났다거나 롤리타콤플렉스와 연관성이 있다는 등의 분석들도 나왔다. 전자에는 자본논리만 남고 후자에는 10대 남녀 팬들의 심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구석이 없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대중의 이목을 낚아채는 강점을 지니고 있음은 인정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돌시스템에서는 ‘노래’를 위하여 가수가 존재하는 대신 ‘가수’를 위하여 노래가 존재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이른바 히트곡 메이커라는 작곡가 켄지가 어디에선가 들어봤음직한 멜로디의 곡을 주문생산 한 경우고, 원더걸스의 <Tell Me>는 팝 가수 스테이시 큐(Stacy Q)의 <Two of Hearts>를 샘플링한 노래이다. 샘플링은 기존의 곡을 새로운 창작에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기법을 일컫지만 한국에서는 다소 다르게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선율을 가져와 끼워 넣는 수준을 넘어 아예 곡 전체를 짜깁기함으로써 상업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법적인 하자는 없을지언정 창작이라는 측면에선 맥 빠지는 수법인데, 바로 <Tell Me>가 그렇다. 그러니 음악적으로 말한다면 썰렁한 농담이 되고 만다. 국방부로부터 감사패를 받는다면 모를까.

성공을 이루게 한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몰락의 길로 향하는 네메시스와 그 부활은 대중음악에도 적용되어 왔다. 간혹 신중현이 반어적인 체제비판이라 ‘주장’했던 <아름다운강산>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게임을 치르던 시기에 이선희에 의해 체제찬양가로 불려졌던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복고취향에 성(Sex)을 가미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그들은 각각 주류 대중음악을 몰락시킨 주범으로 지탄받아온 SM 엔터테인먼트(대표 이수만)와 20세기 대중문화의 키워드를 성(Sex)으로 규정한 박진영이 운영하는 JYP 엔터테인먼트의 신상품들이다. 특히 JYP 엔터테인먼트는 ‘비와 한류’ 그리고 ‘박진영과 미국진출’ 등에서 보듯 언론플레이에도 능하다. 그래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신중하지 못한 주목은 한계에 직면한 아이돌양성시스템을 넘어 대안을 찾아야한다는 목소리가 공감대를 넓혀가는 시점에서 자칫 성급하고 잘못된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서태지에 의해 대중음악계의 수위가 동반상승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계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그렇다면 음악적 개성과 충실한 팬덤을 지닌, 그래서 뮤지션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경우는 어떨까. 애니밴드는 실력파(?) 가수들이 웰-메이드 음악을 서비스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니콜이 이른바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로 내세운 애니밴드는 보아, 타블로, 시아준수, 진보라로 구성되었다. 영화에 가까운 뮤직비디오가 케이블을 장악하고 있는데, 생기를 잃은 도시에 게릴라들이 등장하여 음악으로 활기를 되살린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휴대전화를 수시로 등장시키고 애니콜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가사로 채워진 장편 CF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내용과는 반대로 가수들이 자본에 철저히 예속당한 음울한 케이스이고, 전적으로 자본이 요구한 틀에 끼워 맞춰진 CM송에 불과하다. 문화에마저 개발주의을 가져다 붙이는 천박한 세태에서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 작업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솔직하고 정감어린 스쿠류바송이나 아카시아껌의 CM송이 음악에 가깝다.

이 시점에 서태지가 이슈로 떠올랐다. 15,000장 한정으로 출시되는 서태지의 15주년기념음반은 발매일인 11월 30일까지 한참이 남았음에도 전량 매진되었다. 컴백에 앞서 영향력을 점검하는 프리마케팅 차원의 이벤트가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그래선지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여 지금까지 서태지에 의해 대중음악계의 수위가 동반상승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계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특정세대를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치고 빠지는 움직임으로 효과를 극대화하고, 해외 트렌드를 수입·재현하면서 앨범마다 장르를 달리하는 전술은 아이돌 양성업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서태지는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사실 15주년기념음반을 사고판 건 서태지와 그 팬들만이 아니다. 한정판매 예약마감 직후 그 몇 배에 달하는 가격이 붙어 물품거래 사이트에 올려지고 있으니까.

이슈의 존재는 긍정적이다. 아이돌 스타의 가치는 존재하며, 상업주의와 대중음악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러나 경계해야할 표본들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막연한 기대심리의 조장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또는 서태지에 대한 기사들에 습관처럼 끼어드는 “침체된 대중음악시장에…”로 시작하는 문장은 그간 질적인 성장과 의미 있는 움직임을 이어온 전체 대중음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재생산할 소지가 있다. 이 와중에 전문가라는 이들은 음악비평이라기보다 상품감정을 위해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대중음악’은 모호하게 범주화된 ‘소비군중을 위해 생산된 음악’이라기보다는 ‘동시대를 사는 인민이 생산한 음악’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성찰이 간과된 논의는 농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눈덩이는 결국엔 녹아내린다. 흔적도 없이.



* 나도원 _  대중음악평론가. 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비평계에 입문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의회 회원이며, <가슴> 편집인, 2005 ·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매체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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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걸스>는 박진영과 관련이 있는 '가수'라고 알고 있었지만, <소녀시대>는 얼마전까지도 이승철의 노래를 누군가 새로 리바이벌 해서 히트치는 줄 알았다. <마야>의 "소녀시대" 같이.....

서태지를 보니 천리안 시절이 생각난다. 서태지를 두고 새로운 '혁명의 아이콘'이라고 외치던 논객들이 있었다. 누군가 서태지를 약간이라도 비판할라 치면 락을 모른다느니, 음악을 모른다느니 하며 게거품을 물던 친구들... 그 친구들 요즘 뭐하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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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퇴행적 확장’과 ‘마르크스의 귀환’
[확대서평] 『대중들의 공포』 엔티엔 발리바르 지음 | 최원․서관모 옮김 | b | 2007

백승욱 / 중앙대·사회학
출처 : <교수신문> 2007년 11월 05일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전화시키려 한 노력으로 한국 사회에 잘 알려져 있는 정치철학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발리바르에 대한 관심은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표면에서 다소 사라졌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마치 ‘마르크스 이후’ 시대에 들어선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는데, 단지 마르크스 아닌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끔씩 마르크스는 초청받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마르크스가 무대에서 사라진 데는 마르크스와 무관하지만은 않던 환상들의 붕괴가 작용했고, 그와 더불어 마르크스도 무대에서 끌려 내려갔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현 시대의 특징들이 어느 정도 전면적으로 드러나면서, 결국 마르크스 없이 갈 수 없다는 것은 좀 더 분명해졌고, 이제는 ‘환상 몰락 이후’의 마르크스가 귀환하고 있고 또 귀환해야 할 때이다. 발리바르의 작업에 다시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렇게 귀환한 마르크스는 이제 좀 더 분명하게 아포리아들과 모순들을 가득 안고 있는 마르크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현 시기의 문제를 풀고, 그 난점을 통해 발전이 가능한 마르크스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왜 아포리아와 모순인가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서 다루는 쟁점은 매우 포괄적이다. 발리바르는 이런 쟁점들과 전면적으로 대결해, 이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마르크스라는 계기의 강점을 충분히 살려, 그것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순과 파국을 돌파해 갈 계기를 찾아낼 수 있는지의 고민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 보자. ‘세계화’라는 시대 규정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는 시장의 세계적 지배와, 또한 전례 없는 세계적 배제와 불평등의 증대라는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 있다. 미국헤게모니 이후 세계체계의 특이성이라 할 이 현상의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가. 발리바르는 이것을 세계가 ‘문턱’을 넘어선 것으로 설명하며, 이를 ‘시장의 퇴행적 확장’으로 이야기한다. 현 시기 세계는 자본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남김없이 자본 축적 속에 포섭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본은 축적의 공간을 선별적으로 장악하고, 나머지의 공간은 배제(그리고 극단적 폭력) 속에 던져 놓고 있다. 이 버려진 ‘배제’의 공간은 자본-노동이라는 적대의 구도조차 성립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런 배제의 공간은 외적으로만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파고들어 지금까지의 노동포섭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다. ‘민족·사회 국가’의 해체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진행된다. 동일화와 인종주의의 문제가 전례 없이 중요해지는 정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가. 노동의 인간학과 노동의 정치만으로 이 쟁점에 마주할 수 있는가. 발리바르가 시민인륜의 정치라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정치의 다른 영역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이는 동일화와 탈동일화의 과정이 동시에 사고돼야 하는 정치이며, 여기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매개’와 ‘헤게모니’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국가라는 ‘매개’가 강조되는 ‘허구적 보편성’을 ‘봉기’라는 ‘이상적 보편성’과 반드시 결합시켜 사고하려는 데서도 보이듯이, 이런 시민인륜의 정치는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없고 다른 두 가지 정치와의 정세적 절합 속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다른 두 가지 정치가 문제가 된다. 인종주의의 문제가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사고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의 자율성은 ‘인민의 해방은 오직 인민 자신에 의해서’라는 ‘해방의 정치’의 주장이다. 이는 근대정치가 늘 열어놓지만 동시에 늘 억압하려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적 쟁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자유로운 평등’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계기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근대정치의 틀 자체 속에서 전복의 계기들을 가지고 있는 ‘내적 전화’라는 쟁점으로 제기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특이점은 이런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 정치의 공간이 다른 곳에, 즉 구조에(또는 ‘경제’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타율성을 강조하고, 이는 ‘변혁’이라는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 특히 주목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노동의 모순을 사고하는 데서 정치경제 비판의 핵심으로서 ‘정치와 경제의 단락’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인륜의 정치에서 ‘노동의 인간학’의 한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노동의 인간학의 핵심을 버릴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노동가치설 때문이 아니라, 적대라는 정치적 의념이 노동과정에 도입되고, 여기서 노동과정의 내부적 분할과 그에 대한 정치적 과정의 작동이라는, 즉 노동과정의 적대와 국가라는 문제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변혁은 노동과정의 내적인 전화(그것은 지식노동과 육체노동 관계의 전화를 말한다)와 동시에 그와 맞물린 국가의 내적인 전화를 요구하는 것이 된다.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

둘째로 주목할 점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에게서 모호하게 남은 이데올로기론의 문제를 분명히 발전시키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요소를 주요한 성분으로 하여 구성된 이데올로기이고, 그렇기 때문에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의 내적 균열이 여기서 동시에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이데올로기는 ‘허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고, 늘 동일성의 형성과 재형성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작동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해 강조하려는 바는, 자본주의 근대세계에서 지배는 피지배자에 대한 내적인 지배를 배제하고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억압할 수 없는 최소한으로 피지배자의 저항과 모순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이렇게 얽힌 과정전개의 역사적 분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발리바르의 논의의 함의는 몇 가지 대립점들을 통해 좀 더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푸코 통해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

첫째로 시민인륜의 정치는 단순한 국가에 대한 개혁의 언사는 아니다. 발리바르는 세 가지 정치가 ‘원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고, ‘정세적’으로만 결합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그가 ‘이상적 보편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한 ‘봉기의 정치’의 우위라는 사고이다. 정치의 자율성이나 노동의 적대를 말하면서, 그가 이미 현 구조 사이에 모순의 전복의 계기가 포함돼 있음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점은 현재의 ‘규칙을 인정함으로써’ 변혁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역자후기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주의해 읽는 것이 좋다.

둘째로, 발리바르의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는 이 대립을 부각시키기 위해 푸코라는 이단점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오히려 마르크스의 강점이 부각된다.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난점은 동형성의 유비가 지닌 한계이고, 서로 다른 구조에 대한 서로 다른 분석의 필요성을 일반성으로 대체하는 한계에서 발생한다.

셋째로, 소수자라는 쟁점이 제기된다. 발리바르는 소수자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운데, 그는 소수자라는 쟁점이 동일성의 정치에서 그 자체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과, ‘세계화’시대에는 다수자조차 점점 더 소수자적 외양을 띠어간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는 ‘소수자 되기’보다는 보편성의 전유의 쪽에 서고 있다. 그가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결책은 새로운 동일성을 갖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변혁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를 귀환시키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주체로서 인민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정치경제 비판’의 ‘변혁’의 마르크스를 발전시키면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지금까지보다 더 넓은 외연으로 일반화시키려는 시도를 동시적으로 수행하려 할 때 발리바르의 시도를 피해간다면 그 모색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욱 / 중앙대·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중국 단위 체제와 국가의 노동력 관리방식의 변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의 노동자와 노동정책』, 『자본주의 역사강의』, 『문화대혁명』 등이 있다.



발리바르는 누구인가

발리바르(Etien Balibar)는 마르크스주의의 근원적 해체를 시도했던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대가로 꼽힌다. 1942년 프랑스 아발롱 출생, 니메그대(네델란드)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파리 낭테르대 명예교수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 비판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유물론연구』, 『민주주의와 독재』,『역사유물론의 진화』, 『마르크스의 철학』 등이 있다.

그의 아포리즘 하나. “어떤 정치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적 시간 속에서 그리고 생의 공간 속에서 각각의 것들은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 없이는 해방도 시민인륜도 없으며, 해방 없이는 시민인륜도 변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체계, 하나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길 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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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365] 이탁오 ‘분서’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년 11월 18일


이탁오를 처음 읽은 것은 39살이었을 게다. ‘분서’(한길사)를 구입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이었지만, 다른 책들에 빠져 있느라,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39살, 나는 마흔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무절제하게 사용했던 신체는 곳곳에서 고장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몸을 추스르며 한동안 숨고르기를 할 때 손에 잡았던 것이 바로 ‘분서’였다. 동심설(童心說)을 위시한 몇몇 글을 조심스럽게 읽어나갔다. 명대 사상사에 대한 선이해가 없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동심설’을 위시한 몇몇 글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충격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정신 전체에 퍼져나갔다. 요약하자면, 개인이 믿고 있는 진리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탁오는 그 당시의 진리였던 주자학에 대해 이 말을 서슴지 않고 퍼부었다.

프란츠 파농은 자신이 제국주의 교육에 의해 식민지인으로 만들어진 인간임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한데 나는 이탁오를 통해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한 국가와 사회 속에서 권력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개인의 대뇌를 프로그래밍하는 일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권력적 관계가 성립하는 그 순간 진리란 이름으로, 교육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주체는 제작될 뿐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국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남김없이 오염되어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분서’를 쓸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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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년 전부터 이탁오 사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것 같다. <분서>는 읽고 싶은데, 끝까지 읽어낼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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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생명의 섬을 걷다
언니들과 함께한 ‘게으른’ 산책… 개발 열풍에 뒤척이는 ‘시시한 풍경’의 애틋함이여

▣ 강화 = 글 김소희 기자 / 사진·정수산 기자
출처 : <한겨레21> 제685호 / 2007년11월15일


강화도는 에로틱하다. 결코 나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곳곳에서 방문객을 조바심나게 만든다. 저 산자락을 돌아볼 수 있다면, 저 너머에 들어가볼 수 있다면…. 교교함은 섬 북단 철책이 둘러쳐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이곳을 살짝이라도 들춰볼 기회를 얻은 이들은 강화도와 혼연한 한 몸이 될 날을 꿈꾼다.

△ 늦가을 강화도는 아늑한 유년의 기억을 떠올려준다. 봉천산 아래에서 창후리 포구까지 들녘 수로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 바다에 닿는다.

한국적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

강화도는 여성적이다. 쏟아지는 햇볕과 날 서지 않은 바람이 섬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들녘은 만추에 빛난다. 아무도 배제하거나 밀어내지 않지만, 누구도 쉽게 파악하거나 귀속할 수 없다. 국내 4대 강 가운데 유일하게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이 트여 있는 한강 하구는 뭇 생명들의 젖줄이다. 섬 북단을 휘돌아 내리며 펄에 몸을 댄 것들을 먹이고 키운다.

강화도는 역설적이다. 군사적 대치가 섬의 평화를 지켰다. 생태와 자연과 토착민의 살림은 쇳스러운 무기들이 결집된 휴전선 끝자락에서 오히려 편안했다. 강화도의 길은 그래서 밟는 길이 아니라 스며드는 길이다. 서울의 지척인데도 수도권에서 시작해 전국을 뒤흔든 개발 광풍은 아직 48번 국도를 휩쓸지는 않았다.

“자 이번에는 랩송을 시작합니다.”

11월3일 오전 11시, 봉천산 꼭대기. 일군의 여성들이 흔들흔들 몸을 놀린다. 산불 감시초소 옆에 써붙여진 시구가 랩 버전으로 바뀐다. “청산은 날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요~요.” 북쪽의 송악산, 광덕산, 물가 마을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북녘 땅이 훤히 내다뵈는 봉우리에서 춤을 추는 이들은 이날 아침 강화군 하점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인 ‘강화 번개’ 참석자들이다. 수년째 강화도 구석구석을 ‘걸어온’ 이유명호 한의사를 중심으로, 오한숙희 여성학자, 서명숙 (사)제주올레 대표,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 정정엽 화가 등이 눈에 띈다.

△ 봉천산 중턱에서 바라본 강화도 일대.

산 아래에서 봉우리까지는 불과 1.2km이다. 운동화 신고 편안하게 산보 삼아 들기에 맞춤하다. 틈나는 대로 쉬고 놀며 올라도 40분이면 족하다. 15분 남짓 올랐을까. 시야가 탁 트이며 섬과 일대가 한 품에 안긴다. 단정하게 구획된 들녘에는 수로가 흐르고, 석모도·교동도 너머 서쪽 바다까지 너르게 펼쳐진다. 늦가을 햇살에 천지가 반짝인다. 봉천대는 예부터 서민들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다. 관이 마니산에서 천제를 지냈다면 민은 봉천산에서 하늘을 모셨다.

제주도에서 걷는 길을 만들고 있는 서명숙 대표는 “제주의 풍광이 드라마틱하고 이국적이라면, 강화도는 유년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적인 것들의 원형질을 그대로 지닌 곳”이라며 “풍경에도 음악과 같은 장르가 있다면 강화도는 편안함과 아늑함으로 분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야, 갯벌, 수로 같은 ‘시시한 풍경’은 현대문명이 굉음을 내며 작살낸 것들이기에 더 애틋하다.

수로를 따라 걸어 바다에 닿다

김포에서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빠져 달리다 보면 어느 틈엔가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멈춘다. 지도에도 길이 없다. 철조망이 삼엄하게 쳐져 있다. 해안에서 꽤 떨어진 봉천산 역시 북쪽 봉우리는 일반인 출입 금지이다. 방문객이 오를 수 있는 곳은 남쪽 봉우리의 서남쪽 능선뿐이다.

고려 고종이 학생들을 모아 공부시켰다는 월곶리 연미정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속해 있다. 연미정 절벽 아래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화강)으로 흐른다.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군부대 허가 없이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북쪽으로 적북돈대, 의두돈대를 거쳐 불장돈대를 꼭짓점으로 돌아 서쪽 구등곶돈대, 인화돈대를 지나 창후리 무태돈대에 이르기까지 철조망이 계속된다. 길은 강에서 멀었다 가까웠다 한다. 허가 없이는 강과 땅이 만나는 경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흐르는 물길이 휴전선이다.

△ 강화도 북단을 돌아 서쪽 인화리에 이르면 48번 국도의 끝자락이다.

강화도 최북단 마을 철산리에서 북쪽 개풍군까지는 지척이다. 가까운 곳은 물폭이 불과 1.7km이다. 두 해 전 빈 페트병 다섯 개를 묶고 헤엄쳐 넘어온 용감무쌍한 ‘귀순 동포’도 있었다. 물길을 잘 만났기에 무사했지, 잘못 탔다면 강화도를 코앞에 두고 백령도쯤 떠내려갔을 것이다.

언니들과 나들이에 나서면 두 가지가 좋다. 첫째, 허덕대며 쫓지 않아도 된다. ‘간세다리’(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제주도 말)가 될 수 있다. 앞사람 발자국만 따라 ‘고지를 정복’하는 식의 등산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쉬고 노는 입산이다. 봉천산은 능선이 완만해, 아이들과 노인들도 쉬엄쉬엄 오를 수 있으니, 정복욕 강한 이들은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 입만 가도 된다. 찐 고구마, 김밥, 떡, 오이, 과일, 각종 차… 이날 등장한 먹을거리만도 셀 수가 없다. 야채수프까지 보온병에 한가득 담겨왔다.

봉천대에서 몸을 풀고 내려오는 길, 석탑을 만난다. 봉은사지 5층 석탑이다.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의 국가 사찰로 고종 19년(1232) 수도를 강화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 강화도는 39년간 고려의 왕도였다. 외침과 부침의 역사가 곳곳에 스며 있다.

석탑 주변은 수십 명이 앉아 수건돌리기를 해도 좋을 만큼 그늘이 넉넉하다. 풀밭도 폭신하다. 두어 시간 등산을 마치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내처 바다까지 걸을 이들은 이곳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는다. 하점초등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 들판으로 내리면, 그때부터 ‘걸어서 바다까지’이다. 수로를 따라 걷고 또 걸으면 바다에 닿는다.

강화도를 걷는 묘미는 섬 북단 군사시설 보호구역의 해안 철책길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성묘 등을 이유로 외지인이 오기는 하지만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은 현지인들뿐이다. 외지인은 신분증을 맡기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앞서 10월7일 현지인과 함께 찾은 강화 북단은 천혜의 ‘생태적 요충지’였다. 부지런한 개리 몇 마리가 벌써 겨울을 나러 왔다. 먹이를 잔뜩 잡아먹었는지, 뒤뚱대며 기분 좋게 ‘과악, 과악’ 놀고 있었다. 인적이 닿지 않은 광활한 습지가 모두 이들의 놀이터다.

△ 10월7일 강화도 북단의 철책 너머로 겨울 철새 개리들이 노닐고 있다.

강화 북단은 남북의 화해 국면에서도 여전히 긴장이 서려 있다. 오랜 대치에 따른 긴장이 아니다. 지금의 것은 개발과 보존이 맞선 팽팽한 긴장이다. 남북 정상이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담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 합의하기 전부터 온갖 장밋빛 개발 구상들이 쏟아져나왔다. 10·4 공동선언은 이들 구상에 날개를 단 셈이 됐다.

계획이 현실 된다면 ‘한심해’ ‘열바다’

한 대형 건설회사는 영종도부터 강화도를 거쳐 개성까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59.9km의 고속도로를 놓을 계획을 짜고 있다. 인천시는 강화 본섬과 석모도·교동도를 잇는 제방을 쌓고 조력발전시설을 두겠다고 나섰고, 환경부는 영종도 북단에서 강화 남단 일대를 매립해 해상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전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 대선 주자는 이곳에 아예 여의도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인공섬을 짓겠다고도 공약했다.

이곳을 찾기 바로 전날, 한강 하구에 쌓인 모래라면 앞으로 20년은 채취해도 넉넉하다는 뉴스가 각종 언론에 쏟아져나왔다. 동행한 고은광순 한의사는 개풍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 자리로 꼽힌 철산리의 한 지점에서 “지금 나오는 계획이 현실이 된다면 저 바다는 ‘한심해(海)’, 혹은 ‘열바다’로 길이길이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뭇 생명들이 다 죽어나갈지 모른다는 우려이다. 실제 김포 쪽 한강 하구가 개발되면서 머나먼 강화 남단 동막의 개펄까지 점점 딱딱해지는 것으로 관찰됐다. 물 흐름이 급격히 바뀌어 먼 바다로 떠나가야 할 퇴적물들이 쌓인 결과로 추정된다. 조류 전문가들은 강화도 개발로 새들이 번식처를 위협받으면 일부 종은 급격히 멸종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들이 즐겨찾는 강화도는 마니산, 전등사, 동막 해변 등이 위치한 섬의 남단이다. 섬의 생태도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한 얘기다. 섬 북단은 체계적으로 조사를 한 적조차 없다. 날아다니는 새들의 개체 수 정도만 파악됐다. “거기 들어가면 지뢰에 다 죽을 텐데 누가 함부로 들어가느냐”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다.

△ 봉천산 봉우리에서 한눈에 내다뵈는 북녘땅. 가운데 뾰족한 산이 송악산이다.

환경·생태주의자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각종 개발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최소한 이곳의 생태 환경이 어떤지, 어떤 생물종이 서식하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하고, 정부와 지자체와 개발업자들은 남북이 공생할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환경·생태적 가치를 유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고속도로를 놓겠다는 건설업체 담당자는 “사과에 머리카락 굵기의 바늘을 찌르는 정도일 뿐”이라고 도로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했다. ‘개발’과 ‘보전’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란 남북 통일보다 요원한 것일까.

강화도가 그저 좋아 12년 전 가족과 함께 들어왔다는 김순래(50) 강화고 교사는 “남북의 화해와 번영을 위해 물길은 풀되, 막개발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가령 교동도는 북쪽 바다가 군사경계지역이라, 강화 본섬을 오갈 때 물때를 잘못 맞추면 15분이면 되는 뱃길이 남쪽으로 빙 돌아 한 시간 넘게 걸린다. 김 교사는 “풀어야 할 것은 이런 소모적인 일들”이라며 “개발 소식에 들썩이는 사람들은 땅을 소유한 이들이고, 절반 이상은 외지인들”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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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은 이유

강화도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탓에 철조망을 걷지 않는 게 좋다고 입을 모은다. 강화도의 자연을 지켜준 ‘생태 보호선’이었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그대로 두고 그 옆으로 평화 순례길을 만들자는 얘기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유명호 한의사는 “분단의 역사, 개발과 생태의 긴장, 미래의 평화까지 고루 체험할 학습장”으로서의 ‘걷는 길’을 제안한다. 돈을 아무리 들여도 이만한 천연 학습장은 절대 만들기 어렵다는 새로운 ‘개발’ 논리이기도 하다.


봉천산에 안겼다가 걸어서 바다까지
강화도를 사랑하는 언니들의 강추 코스 1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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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두루미는 잠을 설친다

한강 하구 깃대종 삼총사 개리, 재두루미, 저어새… 일산대교 등 건설 뒤 찾아드는 수 줄어

한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하는 생물종을 ‘깃대종’이라고 한다.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 가늠할 중요한 잣대라는 뜻이다. 펄 속에 머리를 파묻고 먹이를 찾는 개리, 유려한 맵시를 뽐내는 재두루미, 주걱 같은 부리를 휘휘 저어 먹이를 얻기에 이름이 붙여진 저어새는 한강 하구의 깃대종 삼총사이다. 넓은 습지와 농경지, 다양한 식물과 저서생물, 어패류 등을 고루 갖춘 한강 하구는 새들의 안식처이다. 그중 철조망으로 막혀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강화 북단은 새들의 낙원이다.


△ <철새지킴이 노빈손, 한강에 가다> 뜨인돌출판사 제공


거위의 조상인 개리는 전세계 5만 마리 정도 생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과 동북아로 나뉘어 월동하는데, 동북아에서는 우리나라, 그중 한강 하구에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10·11월에 머물다가 한겨울에는 남쪽으로 이동하고, 2·3월에 다시 나타나 먹이를 얻은 뒤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개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자라는 매자기 같은 기수식물의 알뿌리를 먹고 산다. 최근 들어 급격히 개체수가 줄고 있다.

역시 겨울 철새인 재두루미도 매자기 알뿌리를 파먹는데, 개리가 완전 초식성이라면 재두루미는 잡식성이다. 일반적으로 두루미는 낟알을 먹지만, 강화도를 찾는 재두루미는 펄에서 갯지렁이와 게도 잡아먹는다. 일산대교와 이산포 나들목 등이 건설되면서 이산포와 장항습지를 잠자리로 하던 재두루미가 잠을 설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들이 다니고 불빛이 밝고 소음이 많아지면서다. 먹이가 많아도 잠자리가 뒤숭숭하면 월동지를 바꾸게 마련이다. 1970년대 2천 마리 넘게 우리나라를 찾았으나 지금은 500~800마리 정도를 꼽는다.

저어새는 세계적 희귀종으로 환경부도 멸종위기 야생종으로 분류했다. 지구상에 1천~1500 마리 생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일하게 동북아에서만 서식하고 여름철 우리나라에서 번식한다. 한강 하구의 유도와 강화도 일대 섬과 무인도에서 새끼를 친다. 바위에다 둥지를 틀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낚시꾼을 극도로 경계한다.

*도움말: 윤상훈 녹색연합 국장



붉은발말똥게를 아시나요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61년 만에 발견… 대형 공사는 서식에 치명적 영향


△ (사진/ 백용해 제굥)
강화 북단은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의 서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곳이다. 붉은발말똥게는 1941년 일본 연구자의 보고 이래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가 지난 2002년 한강 하구에서 61년 만에 처음 발견된 종이다. 서식 조건이 까다로운 이들은 해수와 담수가 만나 어우러지는 강 하구에서도 해수의 영향이 가장 높게 미치는 지역에서만 산다. 하지만 바다 가까이 염도가 높은 곳에서는 살지 않고, 참게처럼 완전 담수에서도 살지 않는다. 한강 하구는 서해에서 유일하게 이들의 서식 조건을 갖췄다.

붉은발말똥게의 주 서식처는 장항습지와 곡릉천 하구로 강화 북단과는 거리가 있지만, 강화 본섬과 석모도, 교동도를 이어 조력발전을 하거나 연륙교 등을 건설하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게는 어미 배 속에서 일정 시간 인큐베이팅된 다음 세상에 나오는데, 처음에는 몸뚱이에 눈과 꼬리만 달린 모양새다. 언뜻 보면 장구벌레와 비슷하다. 이들은 꼬리를 흔들며 조류가 흐르는 대로 멀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며 자란다. 수면에 둥둥 떠다니며 플랑크톤을 먹이로 하다가, 어미처럼 10개의 다리가 생겨난 다음에야 땅을 붙잡고 몸을 댄다. 강화 일대가 개발되면 한강 하구 물의 흐름이 크게 바뀌어, 서식 환경이 뒤죽박죽된다. 특히 대형 공사가 진행되면 물속 부유물이 많아져 먹이량과 활동량에 치명적인 역향을 끼친다.

도움말: 백용해 녹색습지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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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소국’ 설움 씻은 ‘해양대국’의 위용
문명과 바다 8. 포르투갈 : 삼대륙에 걸친 해상제국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1 16


» 아프리카인들이 상아로 조각한 포르투갈 상인
 
포르투갈은 세계의 해상 팽창의 뇌관 구실을 했다. 이 나라는 일찍이 1415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북아프리카 이슬람권의 중요한 교역 도시인 세우타를 점령했는데, 이곳은 유럽이 처음으로 자기 대륙 바깥에 건설한 ‘해외’ 팽창의 교두보였다. 이는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70여 년 전 일이다. 그 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따라 남하하며 곳곳에 거점들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의 바다에 들어가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해상교역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동시에 남미의 브라질을 식민화해나갔다. 이 작은 나라가 유럽의 해상 팽창의 전위 노릇을 하면서 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 3개 대륙에 걸친 해상제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해외로 첫발을 내딛던 시점에서 국토 면적 9만㎢에 인구는 백만 명에 불과했던 소국이 어떻게 해서 단기간에 전 세계에 광대한 교역망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포르투갈이 유럽 해상팽창의 서막을 연 것은 십자군 출신의 위험한 ‘정복파’ 귀족들을 나라밖으로 내보내야 했던 사정과 이즈음 형성된 상인층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다. 또한 포르투갈이 서구와 이슬람·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에 있는 나라라는 점도 짚어보아야 한다

흔히 역사가들은 이 점을 두고 ‘미스터리’ 혹은 ‘기적’이라고 불렀다. 설명하기 힘들다고 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 나라의 급격한 팽창에는 분명 특기할 만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은 나라가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인구 유출이 불가피했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의 해외 유출 인구는 1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것이며, 남자 인구로만 본다면 35%의 비중이었다. 또 외국에 나간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사망했는데, 인구 대비 비율을 계산해 보면 각 세대마다 남자 인구의 7~10%가 희생된 셈이다. 이런 정도로 큰 희생을 치러가며 해외 사업을 벌인 경우는 역사상 흔치 않다.

» 칼과 십자가를 들고 싸우는 이사도르 성인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8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가 북부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가 점차 기독교권 기사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되찾았다(이를 ‘영토 재정복 운동’, 곧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는 ‘십자군’, 곧 기독교 신앙을 위해 기꺼이 칼을 휘두르며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사실 이런 위험한 귀족 훌리건들은 국내에 남겨두기보다는 해외로 내보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일이었다. 반쯤 몰락한 귀족들은 국내에서 상실한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해외 모험에 참여해서 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지휘하는 인력을 제공했다. 포르투갈의 초기 해외 팽창에서 유독 ‘칼부림’이 잦았던 것은 이처럼 레콩키스타 정신을 간직한 기사계급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 사업을 전적으로 기사계급이 주도한 것은 아니다. 14세기에 리스본에서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서 아비스 왕조가 들어섰는데, 이때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상인층이 이 사업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와 귀족이 섞여 있다는 것이 이 나라의 해외 팽창 사업의 성격과 방향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칼을 휘두르며 돈벌이를 한다는 특이한 사업방식이 분명 여기에서 유래했다.

» ‘해상왕자’ 엔리케 초상화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 가운데 하나는 ‘해상왕자(the Navigator)’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앙리케(Henrique)를 영웅화하는 것이다. 대체로 2차대전 이후에 시작되어 196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 설명 방식은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을 앙리케의 주도적인 노력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그는 사그레스 반도에 일종의 해양연구소를 세우고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포르투갈의 해상 팽창을 크게 진작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에서 앙리케를 ‘귀족적이고 고매한 인품의 영웅’이자 ‘르네상스적 발견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리곤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경향은 이처럼 한 인물을 강조하기보다는 포르투갈 사회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것이다.

포르투갈 사회의 특징은 ‘경계’ 혹은 ‘변경’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나라는 우선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기독교권의 영토 회복을 완수한다는 강력한 종교·군사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권의 발달된 문화를 흡수하였고, 금과 향신료 같은 아프리카 산물을 교역하면서 부를 쌓아 갔다. 이슬람권에 대한 공격이 국가의 기본 이데올로기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리스본 시내에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슬람 구역이 존재했다. 이런 편협성과 관용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상태가 나중에 아시아의 고아나 말라카에서 한편으로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역과 전도에도 주력하는 모순적인 태도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포르투갈인들이 외지에서 기꺼이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정착하는 태도 역시 일찍부터 이민족 문화와 접촉한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또 대서양 세계와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나라의 해외 팽창은 지중해권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본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은 지중해권이었으며, 유럽의 경제적 무게중심은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부의 원천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는 레반트(동부 지중해 지역) 교역이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터키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동지중해 사업 전망이 어두워졌고 그 결과 이탈리아의 대상인들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업 도시의 자본과 인력이 이베리아 반도로 많이 유입되었다(이탈리아 출신이면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일할 기회를 찾던 콜럼버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포르투갈의 해외 팽창은 분명 매우 독특한 현상이지만 사실 그것은 중세 이래 준비된 것이다.

» 리스본에 있는 ‘해상왕자’ 엔리케 기념상

이탈리아나 프랑스, 혹은 남부 독일과 같은 기성세력이 먼저 해외 팽창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해외 팽창은 모험적 성격이 큰 사업이다. 이미 다른 분야에서 튼튼한 사업 기반을 갖추고 있는 상인들로서는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해외탐험을 스스로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와 같은 주변부 국가들이 힘들고 위험한 사업을 한참 진행하여서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되고 큰 이윤 가능성이 보일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중심부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해외로 과감하게 팽창해 나가는 일처럼,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원동력은 대개 중심권보다는 변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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