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강고한 네트워크 ‘민족’ 사유로 뚫지 못한다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④ -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③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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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지식논쟁 /

3. 현실·이론적 대안 아니다

이번 주제의 첫 필자인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적극 강조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오래 유지해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민족이 진보진영의 중심 구실을 해야 한다고 했다. 외세가 지금도 “기득권층을 숙주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관점도 이런 견해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해 지난 주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탈민족 담론을 폈다. 그는 조선 말기까지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주 임지현 교수도 탈민족적 관점을 보였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를 특색으로 하는 ‘3차 지구화’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임 교수는 신자유주의는 서울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면서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설명했다. 다음 주에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구화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류의 전지구적 분포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지구화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론이나 18세기 동아시아의 경제 네트워크론은 말할 것도 없고, 고대 세계를 ‘아프로-유라시아’라는 하나의 역사공간으로 파악하려는 ‘세계사’의 새로운 패러다임 등은 역사적 지구화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이미 아프리카와 유라시아가 상업과 교역의 단일한 네트워크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최근의 연구들에 힘입어 실증적으로 입증되었다. 인도양이 중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묶는 네트워크의 허브로 ‘아프로-유라시아’라는 역사 공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우리는 이를 1차 지구화라 부를 수 있다.

역사적 지구화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 대 비서구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비판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아프로-유라시아’라는 역사공간은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명을 서구의 전사로 설정하고, 서구와 비서구를 아테네식 민주주의와 페르시아의 전제정,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신중심적 세계관 등으로 나누는 기존의 역사 이해가 서구중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지구화는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강력한 국민국가 체제를 먼저 정립한 서구가 비서구를 식민화하는 양상이 그것이다. 서구의 식민주의에 대해 비서구는 민족주의로 대항한다. 식민주의와 민족주의가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16세기 자본주의 세계체제 이후의 지구화를 우리는 2차 지구화라 부를 수 있다. 2차 지구화에서는 국민국가가 주요한 역사적 행위자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구화는 다국적기업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신자유주의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는 3차 지구화라 하겠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매트릭스는 그대로이나 식민주의는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로 자태를 변환했다. 또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대규모의 노동이민과 인간의 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도 신자유주의와 결합하기도 하고 다문화주의의 옷을 입는 등 다양한 자태전환을 시도한다.

지금 세계는 ‘3차 지구화’ 시기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다양한 ‘외피’ 차용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와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가 있는가 하면, ‘열린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외국인 노동자들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국민통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어느 편향이든 민족주의는 3차 지구화의 위기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국체’를 지키는 데 열심이다. 그러나 어느 편향이든 21세기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3차 지구화의 새로운 현실을 뚫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이론적·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오랜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민족의식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은 공허하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날조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라 비판하고 공동체적 전통에 기반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적 공동체 형태인 가족은 시민적 공동체와는 질을 달리한다. 시민사회나 공공영역 등의 서구적 역사개념으로 한국 사회를 읽자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공동체가 민족공동체로 등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랫동안 단일한 정치체를 유지해왔다는 것이 민족 공동체의 역사적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신분제에 기초한 왕조국가의 공동체는 지배신분의 공동체일 뿐이다. 1910년 상주 양반의 일기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한일합방 이후 그는 집밖으로 나가길 꺼려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종묘사직을 잃었다거나 하는 식의 정치적 명분 때문이 아니라 상놈들이 양반인 자신한테 ‘호형호제’하는 꼴을 못 보기 때문이었다. 서발턴(하위 주체) 식으로 그의 일기를 뒤집어 읽으면, 양반한테 ‘호형호제’하는 상놈들에게 한일합방은 양반 세상이 끝나고 신분제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다가온 측면도 있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포수들의 일부가 양반 의병장에게 고용된 용병이고, 더구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관군 포수의 경력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반 만 년 가까이 단일민족으로 살아왔다는 한국사의 신화를 사실로 친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민족주의가 자본 주도의 3차 지구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2차 지구화 단계에서 국민국가의 형성은 다른 국민국가에 대한 식민화뿐만 아니라 국내적 식민주의를 수반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방에 대한 중앙의, 농촌에 대한 도시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식민주의가 그것이다. 서울이 주변부·동양이고 뉴욕이 중심부·서양인 것이 아니라, 서울에도 중심과 주변이 있으며 뉴욕에도 서양과 동양이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서울 내부의 중심과 주변,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가리고, 국내 식민주의를 은폐한다. ‘식민지 없는 식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3차 지구화단계에서 국내적 식민주의의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민족주의는 국내적 식민주의를 은폐한다.

‘민족’은 중심과 주변의 차이 은폐
뉴욕-서울 지배엘리트 네트워크에
피지배계급 국제적 연대로 맞서야


넷째, 3차 지구화 단계에서 지배-피지배 관계의 축은 더는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당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서울의 중심과 뉴욕의 중심이 연합하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주의 네트워크를 표상한다. 문제는 지배엘리트의 국제적 연대와 비교할 때,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극히 약하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지배엘리트 간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 토빈세 논쟁이나 유럽의 노동운동 지도부의 헤지펀드에 대한 공동대응 움직임 등에서 보듯이, 자본 주도의 지구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효율적 무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연대인 것이다. 3차 지구화의 긍정적인 점은 피지배계급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향한 다양한 인프라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다섯째, 동북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한-미, 북-미, 미-일, 중-미관계 등 각개 격파된 동아시아 각국과 미국의 양국관계를 축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동아시아 각국의 첨예한 민족주의적 갈등을 제어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보장한다는 논리로 미군의 주둔을 정당화한다. 미국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당시 미 국무부 차관 아미티지의 2005년 4월 29일 발언은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야말로 동북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비결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다. 반미 민족주의가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임지현 교수
 
여섯째, ‘진보’의 고지를 선점한 ‘수구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현실에 대한 기계적 이해와 자신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도덕주의로 방어한다. 적과 우군을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도덕주의적 의사소통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새로운 전망과 상상력을 질식시킨다. 민족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사유하는 본질주의적 사유방식의 폐해가 이미 자기 방어의 선을 넘어 수구화된 것이다. 임지현 교수/한양대



임지현 교수는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민족주의, 유럽 사회주의 사상사, 민족주의 역사서술 비교 등의 주제에 대해 8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대중독재 1~3> <우리 안의 파시즘> 등의 책을 펴내거나 엮었습니다.


내오랜꿈 --------------------------------------------------------------------------------

"통일은 지고지순의 가치다."
"통일은 밥도 주고 떡도 준다."

하나는 문익환 목사의 말이요, 하나는 현재 민주노동당의 정책위의장이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하나는 80년대말 90년대초 전대협이 학생운동의 노선으로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평축투쟁'이란 말을 남기는 것과 연결되고, 하나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의해 '국가비젼' 으로 '코리아연방공화국'이 제시되는 것과 연결된다.

이것은 모두 '민족'이란 개념을 그 어떤 것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놓고 사고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통일은 지고지순의 가치이기에 다른 것들,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의 민중생존권 투쟁은 통일운동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통일은 떡도 주고 밥도 주는 것이기에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코리아연방공화국이 국가비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통일만 되면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오는데, 지금 좀 어렵다고 앵앵거리는 것은 운동의 대의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것. 참 어이가 없지만 현실이 이렇다.

그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할지라도 민족은 반드시 내셔널리즘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파시즘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진보적 민족주의? 차라리 삼성이 민족자본이라고 우기는 게 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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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있다. 아래 소개하는 『루시퍼 이펙트』에서 다루는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을 영화화한 것인데, 정작 영화는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1971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Philip Zimbardo 박사의 지휘 아래 <환경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을 실시한다. 목적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인간은 극한 환경을 선한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의문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 이를 위해 거대한 가상 감옥이 설치되고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예정된 기간은 2주일. 그러나 실험은 5일만에 끝나고 만다. 영화 는 ‘스탠포드 감옥 시뮬레이션‘에 기초한 5일간의 드라마틱한 기록과 미완성으로 남겨진 9일간의 劇的 구성이다.

아래는 『씨네21』에서 인용한 영화의 "시놉시스'다.

심리학의 권위자, Dr. 톤은 이 야심찬 실험을 위해 신문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한다. 그리고 14일간 이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거대한 미로같은 지하 임시감옥을 셋팅한다. 연구자들은 감옥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실험자들의 모습을 감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절대 연구자의 개입은 없다... 오직 실험실의 생쥐처럼 이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이름대신 번호표를 달고 고개를 숙인 채 일렬로 걸어가는 죄수들과 곤봉을 차고 이들을 통제하는 간수들... 엄격한 심리테스트를 걸쳐 선발된 20명의 표본들 - 전직기자인 택시운전자 타렉, 7년간 한 번도 지각을 해 본적이 없는 항공사 직원 베루스, 엘비스 모창가수 등... 이들은 12명의 죄수와 8명의 간수로 나뉘어 14일간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실험 1일 - 처음은 게임처럼 즐거웠다. 그러나 간수는 여섯 개의 규칙에 따라 죄수를 통제해야 한다.

실험 2일, 3일... 한 잔의 우유, 치기 어린 장난들이 점차 그들을 진짜 간수와 죄수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실험 5일째...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하고 실험은 연구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러나 아직 9일이 남았다... (『씨네21』 2002 03 06)

영화는 물론 가상공간에서의 실험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실제 상황이며 지금도 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미군의 행태, 르완다에서의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 등. 어쩌면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의 체험공간인 군대 역시 이러한 '루시퍼 이펙트'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의 『루시퍼 이펙트』에 대한 서평이다. 책읽기가 만만찮은 사람들은 영화 「엑스페리먼트」부터 볼 일이다.

2001년, 영화가 공개되자 엄청난 반향을 몰고다니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언론은 '독일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세계를 완전히 넉다운시킨 최고의 스릴러'라는 평을 쏟아내었으며,  「엑스페리먼트」는 그해 전 세계 영화제에 최다 초청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스쳐지나간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혹시 영화에서 다루는 가상공간은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는 늘상 경험하는 실제상황의 하나이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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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한승동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루시퍼 이펙트〉
 
 
〈루시퍼 이펙트 〉
필립 짐바르도 지음·이충호 임지원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8000원


평범한 인간이 악인으로 돌변하는
루시퍼 효과 검증한 ‘스탠퍼드 실험’ 분석
“개인 기질보다 환경이 결정적 역할” 주장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적나라한 사진들과 함께 외부에 공개되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해 9월 만행의 중심인물 칩 프레더릭 하사를 만난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37살의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2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침례교 교회에 나갔으며,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프레더릭은 아부그라이브 학대 만행에 가담한 뒤에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심리학자들은 모범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그가 자신의 근무환경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대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정신병적 성향의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정신분열증·우울증·히스테리를 비롯해 주요 심리학적 병리학과 관련해 그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범위”에 속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악마’로 돌변했을까? 짐바르도 교수의 <루시퍼 이펙트>(웅진지식하우스)는 바로 그 문제,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를 구체적 실험을 통해 추적해가는 방대한 저작이다. 루시퍼(Lucifer)’는 원래 하느님이 가장 사랑한 천사였으나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사탄이다. 그러니까 ‘루시퍼 이펙트’는 멀쩡한 사람이 악마로 돌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지은이는 본장 첫머리에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그림 <서클 리미트 Ⅳ>를 보여준다. 둥근 구 표면에 날개를 편 천사들이 셋씩 짝을 이뤄 나뭇잎처럼 촘촘히 그려져 있는데 묘하게도 초점을 천사한테서 그들 옆 빈공간으로 옮기는 순간 뿔달린 박쥐모양의 악마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도로 변한다.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심리학적 진실은 이렇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천사가 악마로 될 수도 있고, 악마가 천사로 될 수도 있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이웃으로, 친척으로 함께 오손도손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날 살인마로 돌변해 1백만 이상을 죽인 르완다의 후투족-투치족 비극,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영국군의 미국독립전쟁 당시 주민학살 등의 예를 들면서 만행 당사자들이 칩 프레더릭처럼 평소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었음에 주목한다. 그 ‘정상’ 뒤 깊숙한 곳엔 악마가 도사리고 있었을까?

<루시퍼 이펙트>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악행은 개개인의 기질 탓인가, 아니면 그가 놓여 있는 상황 탓인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상자 안의 사과가 썩는 것은 사과 자체가 먼저 썩었기 때문이냐, 사과는 원래 멀쩡했는데 썩은 상자가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냐?

»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며 천사와 악마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모리츠 에셔의 그림 <서클 리미트 Ⅳ>. M.C.Escher's 'Circle Limit IV' ⓒ 2007 The M.C.Escher Company-Holland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여기서 짐바르도의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이 등장한다. 이 실험이 책의 뼈대다. 아부그라이브 만행이 자행되기 33년 전인 1971년 8월14일 짐바르도는 하루 15달러씩 주기로 하고 실험참가자를 모집해 그들 중 24명의 ‘지극히 정상적인’ 대학생들을 뽑았다.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 지하실에 모의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모집학생들을 교도관과 수감자 두 그룹으로 나눠 2주간 일반 교도소와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해 그들 사이에 어떤 심리·행동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경찰에 부탁해 일반적 절차에 따라 그들을 체포한 뒤 3 × 3. 크기의 방 3개에 각각 세 명씩 수감자를 넣고 1개조 3명씩의 교도관 3개조와 지원근무자, 교도소장이 배치됐다. 두 그룹으로 나뉜 학생들은 그것이 실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실험을 포기할 수도 있으며, 부모들도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험 시작 첫날 점호시간부터 상황은 그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교도관 역을 맡은 학생들은 진짜 교도관처럼 행세하기 시작했고 그들 정체성마저 거기에 맞춰 변해갔다. 수감자들 역시 저항도 하고 일부 탈락하기도 했으나 심리상태는 일반 교도소 수감자들을 닮아갔다. 책은 그런 변화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보여주는데, 실험의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기는 이 책이 처음이라 한다.

실험은 사태가 매우 우려할 만한 지경으로 번져가던 제6일째 중단되고 말았다. 교도관과 수감자, 그리고 관찰자, 외부방문자들의 시선을 교차편집해 실험 당시의 사건과 참가자들의 심리상태, 종료 뒤의 평가, 회고 등이 종합적으로 제시돼 있다. 참가자들은 왜 실험인 줄 알면서도 극한상황으로 빨려들어갔는가. 왜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실험은 33년 뒤 아부그라이브 비극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났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루시퍼 이펙트는 개인 기질보다는 상황, 상황을 조성하는 시스템, 곧 썩은 사과보다는 썩은 상자 탓이 더 크다는 게 결론이다. ‘밴두라 실험’ ‘깨진 유리창’ 이론 등도 등장한다. 물론 그것이 개인의 비도덕적, 불법적 악행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고 책임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걸 짐바르도는 거듭 강조한다. 그는 누구든 악마로 전락할 수 있지만 누구든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악에 맞서 싸우면서 루시퍼 이펙트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웅적 노력을 보통 사람들에게 촉구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책과 삶] ‘상황’이 바뀌면, 누구라도 악랄해진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23일


▲루시퍼 이펙트…필립 짐바르도|웅진지식하우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라는 유명한 심리 실험이 있다. 1971년 8월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평범한 대학생들을 무작위로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로 나눠 모의 감옥 실험을 했다. 그런데 실험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수감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도 갈수록 ‘창의적’으로 악랄해졌다. 성적 수치심을 주는 학대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수감자 역할의 학생들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거나 교도관에 무조건 복종하는 등 진짜 수감자처럼 행동했다. 감독관으로 참여한 짐바르도마저 참가자들을 쥐고 흔드는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해갔다. 실험은 결국 6일 만에 중단됐다.

35년 뒤, 그동안 세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이 충격적 실험의 전말이 공개됐다. ‘루시퍼 이펙트’(The Lucifer Effect)는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과 실제 사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선과 악,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뒤늦게 책이 나온 데에는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TV에서 나오는 사진들을 보고 저자는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수감자들의 ‘피라미드’ 뒤에서 웃고 있는 병사들, 수감자의 목에 개줄을 묶어 끌고다니는 여군, 자위를 강요당하고 있는 수감자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이 사건의 군법재판에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30여년 전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부활을 목도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루시퍼’가 천사에서 사탄으로 돌변한 것과 같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적당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사악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건 하얀 천사들인가, 검은 악마들인가. 그림은 M C 에셔의 ‘Circle Limit Ⅳ’. ⓒ 2007 The M.C.Escher Company-Holland
저자는 ‘사악한 행동은 개인의 기질에 원인이 있다’는 통념을 거부하고, 상황과 시스템의 힘에 주목한다. ‘썩은 사과’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썩은 상자’, 나아가 ‘썩은 상자 제조자’가 문제라는 것. 선량한 소시민이 죄의식 없이 포로를 학대하는 잔악한 병사로 변하게 된 데에는 공격과 폭동에 대한 두려움, 열악한 근무환경 등 상황적 힘과 ‘학대 문화’를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시스템의 압력이 컸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이라크 주둔 미군 고위 지휘관은 물론 럼즈펠드 국방장관, 체니 부통령, 부시 대통령까지 심판대에 세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공포를 조장하고 학대와 고문 행위를 부추긴 ‘행정 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을 사악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다양한 심리적 동인들을 소개한다. 집단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는 집단 동조의 힘과 권위에 대한 복종이 대표적이다.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정글 속에서 목사 짐 존스의 명령에 따라 900명이 넘는 신도들이 집단자살한 ‘존스타운 사건’은 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규칙과 역할, 익명성, 탈개인화, 비인간화 등도 ‘썩은 상자’를 구성하는 심리적 절차들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결코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뿌리째 뒤흔들기 때문이다. 책에는 겉보기에 선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행을 일삼는 경악할 만한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1994년 르완다의 후투족은 어제까지 친구나 이웃이었던 투치족을 100만명 가까이 살해했다.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 수 만명을 학살한 독일 101예비대대는 막 징집된 신병들로, 모두 노동자 출신의 가정적인 중년 남자들이었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웃고 있는 미군 병사들.
저자는 아울러 “도와주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하거나 내부고발의 필요성이 있을 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악”이라고 규정한다. 엔론 같은 부패한 회사에서 회계장부가 조작됐을 때 이를 못본 척한 직원들이나 르완다나 수단 다르푸르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을 때 이를 묵인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역사를 통해 악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하지 않는 악’의 역할이 컸다고 질타한다.

저자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인용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아이히만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와 같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도착자나 사디스트가 아니었으며, 무섭고도 두려울 정도로 정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악의 평범성’에 대비해 ‘영웅적 행위의 평범성’도 강조한다. 악의 유혹에 저항하고 불복한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고, 이들은 ‘평범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사람들을 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힘을 억제하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회가 시민들에게 ‘(평범한) 영웅에 대한 상상’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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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삼성 행정부문 '바지 사장'
대통령은 위장취업, 이건희는 불법파견

이재영 기획위원
출처 : <레디앙> 2007년 11월 22일


청와대가 공직부패수사처법을 삼성 특검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왕 인심 쓰는 김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댔으면 더 그럴싸하지 않았을까?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 선서했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집권기 동안 국민 복리가 좀 증진되었다는 말은 전혀 안 들리고, 삼성이 엄청나게 돈 많이 번다는 소리만 들린다.

지난 5년 동안 비정규직은 폭증했고, 구속 노동자 수는 군사독재 시절 이후 최초로 1,000명을 넘어 섰다. 5대 그룹 중 삼성의 자산, 자본, 이익 등이 차지하는 비율은 노무현 이전 30~40%에서 노무현 집권 이후 50~60%로 늘었다. 그래서 삼성 임원들은 청소 아줌마들 970년치 임금을 연봉으로 번다.

이는 물론 “기업이 바로 나라(2004. 9. 20)”라는 노무현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다. 민주노총은 955번, 재계 3위인 SK는 2,959번 말하지만, 삼성은 8,114번이나 읊고 또 읊는 노무현 정권 덕택이다(이상, 청와대 홈페이지 통합검색, 11월 22일 기준).

노무현은 공무원 교육을 삼성 인력개발원에 맡겼고, 삼성그룹 이사들과 장차관과 고위 판검사들을 회전문 인사했다. 국무총리실, 통일부,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의 고급 관료 천 명 가까이가 삼성에서 예비군 동원훈련 같은 숙박 교육을 받았다.

진대제 삼성전자 부사장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주미대사로, 삼성경제연구소 이언오 전무는 국가정보원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취임했다.

 
  ▲투명사회협약 대국민보고회 자리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노대통령과 이건희 회장.(사진=뉴시스)

노무현 정권은, 삼성이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아젠다」에서 시킨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니 ‘동북아 허브’니 그대로를 국정 목표로 삼았다. 삼성이 원하는대로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세법 등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었고, 삼성이 시킨대로 의료를 영리화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규제를 풀어줬다. 삼성의 수출 돈벌이를 위해 세금 수십조 원을 환율 조정에 쏟아 부었다.

노무현은 고작 7억밖에 못 모아준 ‘희망돼지’가 아니라, 30억을 보낸 삼성 이건희를 위해 일했다. 결국 지난 5년 동안 노무현이 한 일은 국민 복리 증진에 멸사봉공한 것이 아니라, 삼성 수익 증대에 멸공봉사(滅公奉私)한 셈이니,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배임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성의 이익을 위해 공직에 위장취업한 것이다.

따라서 ‘떡값’이니 ‘당선 축하금’이니 하는 추문도 ‘임금’과 ‘상여금’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만약 떡값과 당선 축하금이 없었다면, 일 시키고 돈 떼먹은 이건희를 임금 체불로 처벌해야 한다.

삼성이 근로자 파견업에까지 손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세콤이 파견업을 하고 있을 듯싶고, 노무현 대통령의 주 업무가 삼성 일족 재산 지키는 것이니, 세콤 파견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행정직이 근로자 파견업종에 해당되지 않으니, 이건희는 근로자 파견법 위반으로 처벌받아야 한다.

2년 전 최장집 교수는 “참여정부는 삼성의 하위 파트너”라 갈파했었다. 이제 와 다시 보니, 노무현은 삼성그룹 행정 부문 바지 사장이다.

“제 것 아닌 것을 가지는 것을 도(盜)라 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고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하는데, 너희들은 밤낮으로 분주하게 팔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노략질하되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며, 심지어 돈을 형님이라 부르고, 장수가 되고자 아내를 죽이니, 그러고도 인륜 도덕을 말할 수 있겠느냐?

또한 메뚜기에게서 그 밥을 빼앗고, 누에에게서 그 옷을 빼앗고, 벌을 몰아내고 꿀을 빼앗으며, 심지어 개미 알로 젓을 담가서 조상의 제사에 바치니, 그 잔인하고 야박한 행실이 너희 인간보다 더한 자가 어디에 있느냐?

너희들은 이(理)를 말하고 성(性)을 논하여 걸핏하면 하늘을 일컫지마는 … 그 선과 악을 따진다면, 공공연히 벌과 개미의 집을 약탈해 가는 놈이야 말로 홀로 천지 간의 큰 도둑이 아니겠느냐?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물건을 훔쳐 가는 놈이야 말로 홀로 인의(仁義)의 큰 도둑이 아니겠느냐?” - 박지원, 「호질(虎叱)」, 『열하일기』, 1780


내오랜꿈 -----------------------------------------------------------------

88년이었나? 89년이었나? 5공청문회때, 전두환을 향해 고함지르며 핏대세우던 노무현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게 아마도 오늘의 노무현 대통령
 있게 한 시발점이 되었으리라. 이른바 노무현식 '포토제닉 정치'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라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종착점은 선거홍보 영상인 '노무현의 눈물'일 것이고...

그런 노무현이 또다시 청문회 스타가 되어 눈물 흘리는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그 자신이 피의자 신분으로 바뀐다는 것. 그러고보니 '참여정부'에서 제대로 '참여'한 건 삼성밖에 없는 것 아닌가.

(참여정부와 삼성의 공생관계에 대한 글은 진보정치연구소의 "상처만 남긴 노무현정부ㆍ삼성 동맹" 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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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4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처음 본 게 뉴스로 보여주던 어떤 청문회에서 였습니다. 88,89년이라면 제가 아주 어릴 때이니 봐야 기억할리 만무하고, 대략 10년 안쪽이었던거 같은데, 그때도 정확히 내용을 파악하고 본 건 아니라 그냥 그 모습만 기억에 남는군요. 그런 정의를 향한 외침과 뜨거운 가슴을 보여주길 기대했는데, 아니었죠.

내오랜꿈 2007-11-24 13:3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아프님이 보았던 그 모습이 20년 전의 5공청문회에서 노무현의 모습이 맞을 겁니다. 자주 리바이벌 해서 보여주었거든요.

그 당시 5공청문회는 TV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더랬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국민적으로 엄청난 관심이 있었죠. 87년 6월 항쟁의 열기가 아직 살아있었거든요.

마늘빵 2007-11-25 00:1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거군요. 제가 재방송을 본거였군요. -_-a
어쨌든 매우 인상적이었답니다. 그대로 쭉 가주길 바랬는데 왼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회전하다니. 어쩌면 왼쪽 깜빡이도 눈속임이었을 수도 있고, 켜지도 않았는데 뒷차들이 그렇게 잘못 본 것일수도.
 

한 남편에게 학대받던 두 부인의 연대

최재봉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의 질곡을 그린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번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칸다하르 외곽 마이완 난민촌의 한 아프간 여자 어린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왕은철 옮김/현대문학·1만3500원


2003년에 나온 할레드 호세이니(42)의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열다섯 살 나이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실제로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낯선 작가의 등단작은 출간과 동시에 평론가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1997)이 거둔 성공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호세이니가 지난 5월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린다. 앞선 작품과 마찬가지로 1979년 소련군의 침공을 전후한 아프가니스탄 현대사가 바탕에 깔리면서 개인들의 수난과 저항의 드라마가 그 위에서 펼쳐진다. 앞선 소설이 남자 주인공을 택한 반면, 이번 소설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전작이 아프간 사회의 복잡한 부족 구성을 배경으로 배신과 환멸, 용기와 화해의 그야말로 개인적인 드라마를 보여준다면, 신작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아프간 사회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의 두 주인공은 마리암과 라일라. 그들은 지극히 남성우월주의적인 늙은이 라시드의 부인들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마리암과 라일라가 각각 어린 나이에 차례로 라시드와 결혼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부자 아버지와 하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마리암, 그리고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으나 부모님이 폭격으로 희생된 뒤 갈곳이 없어진 라일라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늙고 탐욕스러운 라시드의 ‘소유물’이 된다. △화장품과 장신구를 금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웃어서는 안 되고 △학교에 다닐 수 없으며 △간통을 하면 돌로 쳐죽인다는,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법률’은 라시드의 남근주의와 결합해 두 여성을 한갓 물건의 차원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소련 침공 전후 아프가니스탄 배경
남성들 억압 뚫고 꽃피운 여인들의 우정
비극적 결말 속에서도 희망은 싹트네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라일라에 비해 스무 살 가량 연상인 마리암은 처음에는 라일라에게 적대적이지만, 두 사람은 결국 동일한 독재자에게 공통의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피해자로서의 연대의식을 발휘하게 된다. 도망치려다 붙잡혀 온 라일라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던 라시드를 마리암이 삽으로 쳐 죽이는 장면은 궁지에 몰린 여성들 사이의 절박한 ‘자매애’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던져 라일라를 구한 마리암이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505쪽)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총괄하며, 옛 연인과 재회한 라일라가 새로 낳을 아이의 이름을 마리암으로 정하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의 눈물샘을 한껏 자극한다. 악의 화신과도 같은 라시드와 온전한 피해자일 따름인 두 여자 사이의 선명한 대립구도, 그리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는 결말도 전작에 비해 다소 단순해 보인다. 탈레반과 바미안 석불처럼 뉴스를 통해 익숙해진 이름들을 소설에서 만나는 느낌이 각별하다. 제목은 17세기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가 카불에 대해 쓴 시 중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현대문학 제공


[문학] 아프간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한윤정기자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23일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현대문학| 왕은철 옮김| 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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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그녀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에스더 기자
출처 : <중앙일보> 2007년 11월 23일

>> 접힌 부분 펼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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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탈목적’ 넘어설 날은

최재봉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2007년 한국 소설의 화두를 ‘역사’와 ‘장편’이라 한다면, 그 둘을 단순 결합한 역사장편소설은 작가들의 손쉬운 출구였다. 작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역사장편소설들을 쏟아냈다. 지나간 과거가 한국 소설의 미래를 책임지고자 나서는 듯한 형국이었다. 계간 <문학동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겨울호 특집을 ‘역사의 귀환’으로 삼은 것은 그런 맥락에서였다.

이 특집에 글을 보탠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근대적 역사관으로부터 탈근대적 역사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문학에서 나타난 것이 “역사소설의 ‘소설역사’로의 변형”이라고 본다. “역사소설이 ‘역사 속의 인간’의 전형을 추구했다면, ‘소설역사’는 ‘인간의 역사’를 구현하고자 한다.” 역사 또는 거대담론 대신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김 교수가 주장하는 ‘소설역사’의 핵심이다. 그는 특히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데, 그에 따르면 “김훈은 인간의 계속 이어지는 삶 그 자체를 역사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근대역사소설과 다르게 목적 없는 목적론을 내재하는 탈근대 ‘소설역사’를 지향한다.”

<남한산성>을 포함한 김훈의 역사소설들에 대한 좀 더 본격적인 논의는 신형철씨의 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에 담겨 있다. 그가 보기에 김훈 소설의 핵심은 말할 수 있는 것(객관적 사실)과 말할 수 없는 것(주관적 의미와 가치) 사이의 간극에 있다. 그런 김훈의 역사소설은 기왕의 역사소설들과는 다르다. “김훈의 역사소설은 역사소설이되 역사의 목적과 진보를 승인하는 ‘역사주의’와는 무관한 곳으로 간다.” 이런 김훈 역사소설의 특징을 가리켜 신씨는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자연사소설’에 가깝다고 본다. “(김훈은) 인간을 긍정하지 못하면서 인간을 말하고 역사를 믿지 못하면서 역사소설을 쓴다. 이 역설이 김훈 소설의 힘이다.” 역사학자와 평론가의 결론은 이 지점에서 일치한다.

소장 평론가 이경재씨는 ‘2000년대 역사소설이 넘어선 것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정래의 <오 하느님>과 조두진의 <도모유키>,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을 통해 고향과 민족이라는 가치가 최근의 역사소설들에서 유지되거나 폐기되는, 또는 폐기되는 듯하면서도 위장된 형태로 유지되는 양상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오 하느님>은 비록 무대가 한반도 바깥으로 확장되기는 했지만 전형적인 ‘내셔널 히스토리로서의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서 고향과 민족의 가치는 가히 신성불가침이라 할 법하다. ‘임진왜란’을 일본군 하급 무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도모유키>, 그리고 조선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를 주인공 삼은 <천년의 왕국>은 나란히 이방인의 시선을 동원하고 있어서 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듯 보이지만, 오히려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민족의 통일적인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글쓴이의 판단이다.

김기봉 교수와 신형철씨의 글에서 보다시피 역사와 소설에서 목적과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최근 역사소설 논의에서 지배적인 경향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경재씨의 글의 결론은 목적과 의미로부터의 무한 탈주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위선과 폭력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에서 나아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건설적 사유인지도 모른다.” 탈주와 해체로부터 참여와 건설로 우리 소설은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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