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지하실에서 듣는 빗소리
90년대 포크를 대표하는 엘리엇 스미스, 〈New Moon〉의 미발표곡으로 다시 만나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2호 2007년 5월 31일


1990년대 대중음악을 열었던 화두가 시대정신이었다면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던 말은 ‘취향’이었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음악이 그런지로 촉발된 얼터너티브 혁명이었고, 포크는 취향을 리스너들의 입에서 꺼내게 했다. 전통적인 포크가 아닌, 90년대의 감성을 담아낸 새로운 포크 말이다.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가 선봉에 있었다. 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믿었던 90년대 초반의 소년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좌절했다. 청년이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힌 그들의 귓가를 적셔주던 음악,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는 필청의 리스트와 마찬가지였다.

전사 커트 코베인, 패잔병 엘리엇 스미스

△ 엘리엇 스미스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었다. 마지막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달랐다. 벨 앤드 세바스천이 마음 한구석에 사랑과 낭만을 간직한 이들의 음악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사랑과 낭만에 마지막 좌절을 경험한 이들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1969년 스티븐 폴 스미스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2003년 10월 엘리엇 스미스란 이름으로 자신의 심장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꽂았다. 그 순간까지 35년.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해지는 걸 누구보다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때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던 노랫말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상처투성이였고 상처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제 발로 상처 곁으로 걸어가는 게 음악 속에서 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지친 영혼일지라도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증’ 쪽이 훨씬 많았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마음속 세상에는 언제나 빗줄기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원할 때 네가 원하는 걸 하라. 비록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을지라도. 거대한 허무일지라도’라고 끝을 맺는 〈Ballad Of Big Nothing〉. 음악평론가 성문영이 ‘거대한 허무의 발라드’로 해석한 이 노래의 제목은 어쩌면 그의 모든 노래에 담긴 주제어일 것이다. 사방이 온통 막다른 골목인 궁지의 공간, 엘리엇 스미스는 그곳의 지하실에서 노래했고 이야기했다. 도피할 곳 없어 세상의 틈새에서 방랑하는 이들에게 그의 노래만큼 위로의 담요 구실을 해주는 도구는 없었다. 소통에 힘겨워하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는, 세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억지로 웃음짓는 개인들에게 엘리엇 스미스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프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군단을 진두지휘하던 장수의 전사였다면, 2003년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와 몸부림치던 낙오병의 고립된 사망과 같았다. 그와 심정적으로 연결된 개인들만이 조용히 추모할 뿐인 쓸쓸한 죽음.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일반화된 인터넷 때문에 더 이상 ‘모여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사라진 이곳에서 그의 죽음은 오프라인 음악 공동체의 부고장이기도 했다.

적나라함 때문에 싣기가 곤란했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허무의 방랑자가 숨겨뒀던 또 하나의 일기장이 공개됐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엘리엇 스미스가 만들었던 노래들 중 미발표 곡을 모은 음반 〈New Moon〉이다. 미발표곡 모음집은 대부분 기대를 배신한다.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음반에 싣기에는 어딘지 함량 미달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음반 발매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곡을 만들고 레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엇 스미스는 일기 쓰듯, 평소에 곡을 만들고 녹음하곤 했다. 그렇게 쌓인 곡들 중에서 추려서 음반을 내곤 했다. 그에게 창작이란 곧 일상이었다. 그의 창작력이 급속도로 치닫던 시기는 1997년에 발표된 〈Either/Or〉 무렵이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가 남긴 여섯 장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New Moon〉은 전작 〈Elliott Smith〉부터 〈Either/Or〉 사이의 시간 동안 만들었던 노래들을 담고 있다. 최고조로 치닫던 창작의 잉여물들이다. 그러나 잉여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좋아 음반에서 누락된 곡들이지, 여기 담긴 스물네 곡의 노래는 마땅히 발표됐어야 할 음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반은 단순한 미발표곡 모음집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규 음반으로 추앙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New Moon〉은 어느 음반보다 감성적이고 적나라하다. 그 적나라함 때문에 오히려 정규 음반에는 싣기가 곤란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될 정도다. 서서히 차오르는 센티멘털이 한순간에 폭발한 뒤 모래처럼 바스러진다. 자물쇠로 묶어둔 비밀의 일기장에조차 쓸 수 없었던, 온갖 감정의 본원과 심연을 엘리엇 스미스는 벌거벗긴다. 그리고 노래한다. 시라고 해도 괜찮을, 아니 시 그 자체인 언어로. 음표와 단어와 목소리는 서로를 힘겹게 부축한 채,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이곳으로 뚜벅뚜벅 다가온다. 애도의 감정이 들기 전에, 경이가 밀려온다. 놀라운 재능과 불편할 정도의 진솔함에 대한 경이가.

돌이켜보면 그런 경이가 취향의 시대를 열었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낙오자들은 그들만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세대’로 90년대를 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취향’으로 그 시대를 마무리했다. 그들 모두 자살했다. 21세기는 20세기를 그렇게 숙청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싱글즈' 흥행과 '황진이' 참패의 요인은
'최근 한국영화 서사의 경향' 포럼 개최

김지연 기자
출처 : <연합뉴스> 2007년 11월 27일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무리하게 도덕적인 결말, 감정적 장면 확장, 지나치게 친절한 전개 등 한국영화의 이야기 구조의 '고질적 과잉'을 해소하려면 기존의 장르적 문법에 안일하게 머물지 말고 관습을 넘어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영화평론가 박유희는 27일 서울 세종로 미디액트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과 영상예술학회 주최로 열린 포럼 '최근 한국영화 서사의 어떤 경향'에서 '청연'(감독 윤종찬)과 '황진이'(감독 장윤현)를 거액의 제작비와 훌륭한 만듦새에도 흥행에 실패한 사례로 꼽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두 영화의 흥행 실패 요인으로 "역사를 허구화하는 방식과 그 안의 멜로드라마 구조, 인물의 조형 면에서 이미 검증되고 진부한 장르 문법에 고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연'에서 박경원(장진영)은 연인 한지혁(김주혁)의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친일 비행을 한다고 설정되는 등 지고지순한 멜로드라마 주인공으로 귀착되며, '황진이'에서 혁명적 동지애 등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황진이(송혜교)와 놈이(유지태)의 사랑도 결국 남녀간의 관습적 사랑으로 고착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결말의 지연, 주정(主情)적 장면 확장, 지나치게 친절한 스토리텔링, 무리한 도덕적 봉합, 이분법적 도식, 장르적 놀이구조와 심리적 동기에 대한 집착 사이에서의 분열 등은 한국영화의 고질적 과잉 또는 분열적 질환"이라며 "이를 단순한 대중의 문제로 말할 수 없으며 관습 안에서 관습을 넘어서는 노력이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토론자인 이상용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공동체가 서사 내에서 자족하는가, 아니면 다른 집단과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는가를 살펴보면 실패한 상당수 영화의 공동체가 자족적"이라며 "흥행한 '싱글즈' '미녀는 괴로워'는 한정 집단에서 출발하지만 '이 시대에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사회의 주요 이데올로기를 자극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임권택의 '천년학', 이명세의 'M', 김기덕의 '숨' 등 중견 감독들이 자신이 이룩한 영토를 다시 확인하는 작품은 단순히 매너리즘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기에는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며 "그러나 이 에너지만으로는 소구할 수 없는 시대에 왔으므로 여전히 마련되지 않은 어떤 시스템을 준비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앞서 발제자로 나선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는 생활과 가족관계에 대한 취사선택, 인과성의 수용ㆍ파괴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의 내러티브 경향을 분석, 소개했다.

   그는 한국영화 속 가족에 대해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처럼 과거의 그림자를 안고 어른거리거나 '싱글즈'(감독 권칠인)처럼 아예 존재를 지워버리고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로 나아가는 양쪽으로 흘러왔다"며 "어느 쪽에서도 새로운 가족의 상은 아직 정립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과성에 대해서는 "'밀양'(감독 이창동)은 고전적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를 파괴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는 반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감독 박찬욱)는 의미의 사소화 또는 공백을 꾀하는데 평자나 관객은 그 무의미를 채울 또 다른 의미가 존재하리라고 기대했다가 그렇지 않자 불편해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판타지를 지향하는 척하면서 현실의 반영이 되는 결론에 도달한 사례로는 300만 이상 관객이 든 '말죽거리 잔혹사(감독 유하)'가 있다"며 "대중영화의 틀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색깔을 지키는 영화이자 판타지의 해방감과 리얼리즘의 성찰적 기능, 인과성의 매듭과 단절에 관한 쓸모 있는 사례"라고 평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김광석 - 다시 부르기 2

박준흠 / 가슴네트워크 대표 (www.gaseum.co.kr)
출처 : <웹진 가슴> 2007년 11월 22일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1995/ 킹레코드)
★★★★★

Track List :
1.  바람과 나
2.  그녀가 처음 울던 날
3.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4.  잊혀지는 것
5.  불행아
6.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7.  내 사람이여
8.  변해가네
9.  새장속의 친구
10.  나의 노래
1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가슴네트워크, 경향신문 공동기획
‘가슴네트워크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5위
(가슴에서는 매주 월요일/목요일, 경향신문에서는 매주 목요일 1~100위 음반리뷰를 순차적으로 올립니다. 총50주 동안 연재할 예정이고, 32명의 필자가 참여합니다.
*별점은 해당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가슴에서 일률적으로 매긴 평점입니다.)


음악사적으로 보면, 1968년 한대수 이래의 ‘모던포크’는 장르로서의 중요성보다는 ‘음악창작에 대한 인식’과 ‘메시지 표현 양식’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킨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즉, 대중음악에서 아티스트의 탄생을 의미하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들이 대중음악 영역에 정식으로 들어옴으로써 대중음악을 단순한 ‘딴따라판’ 이상으로 자리매김 시켰으며, 70년대 초반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대중음악을 편입시켰다. 60년대 영미권의 록과 포크를 들었던 당시 대학생들에게 모던포크는 낯설지 않은 음악형태였을 뿐만 아니라 자의식 강한 그들이 한국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날릴 수 있는 매개체로써도 적당했다. 왜냐하면 선동적인 록과 달리 포크는 기본적으로 ‘메시지’의 음악이었고, 그래서 음악창작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박정희정권의 청년문화 탄압에 따라 모던포크는 기운을 잃어갔고, 한대수, 김민기를 비롯한 중요한 창작자들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면서부터 더 이상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 마지막은 한대수가 2집 [고무신]을 발표했던 1975년 무렵이다.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오히려 대중음악씬이 아니라 70년대 말의 ‘메아리’와 같은 대학 내의 노래동아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메아리가 단순히 실연 중심의 노래패가 아니라 ‘창작자 집단’이란 정체성을 확고히 한데 비해서 이후로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곳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던포크가 대학 내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무신]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민중음악 진영 내의 메아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새벽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고, 예외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정태춘, 조동진, 김두수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90년대에 들어 ‘모던포크’의 적자임을 자부한 이가 김광석이고, 그 핵심적인 작품이 바로 김광석 4집(1994)과 함께 [다시 부르기 2]였다.

김광석은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1988년 동물원 1집을 정식 데뷔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동물원 2집까지 참여를 하고, 1989년 솔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은 것은 <나의 노래>가 담긴 1992년 3집부터이고, 베스트앨범 형식으로 발표한 [다시 부르기 1](1993)부터는 작품성과 상업성 둘 다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부르기 1]을 동물원과 자신의 앨범에서 뽑아낸 노래들과 한 때 활동하던 민중음악진영에서 김현성, 한동헌, 문대현의 노래들로 구성하면서 ‘자전적인 베스트앨범’으로 만들었던 반면에 [다시 부르기 2]는 자신이 스스로 선정한 ‘한국 모던포크의 대표곡 모음집’이다. 그리고 모던포크를 떠나서 그가 선정한 중요한 음악창작자들에 대한 트리뷰트앨범이었다.

그래서 이 음반에는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와 같은 초기 모던포크 뮤지션들의 노래들이 담겼고, 백창우의 <내 사람이여>, 한동헌의 <나의 노래>와 같은 민중음악 선배들의 노래들이 있고,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속의 친구>와 같은 당대 주목할만한 창작자들의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앨범의 대미는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로 끝맺는다.

대부분의 세션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동익밴드가 맡아서 90년대 국내 세션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편곡자 조동익은 원곡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노래들을 참신한 김광석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리메이크 앨범으로서는 드물게 대다수 수록곡이 원곡을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했고, 이는 자신의 노래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래와 삶, 기쁨과 슬픔 그리고 자유와 외로움이 진득하게 녹아든 이 음반은 실질적으로 그의 유작이라서 더욱 애틋하다.


내오랜꿈 ------------------------------------------------------------------------

김광석.

나는 김광석을 그의 생전에 예닐곱 번은 본 거 같다. 이건 순전히 '어떤 여자'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여자, 완전히 김광석 '매니아'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전교조" 일한다는 핑계로 나하고의 약속은 툭하면 펑크내거나 한두 시간 기다리게 만드는 건 '기본'이었는데, 김광석 공연 보러가기로 한 날은 한번도 시간 약속 어긴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나보다 김광석이 훨씬 더 중요했었던 거 같다. 뭐, 그랬으니 난 지금 다른 여자와 살고 있겠지만.

주로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걸 관객으로 앉아서 지켜봤지만, 한번은 웃기지도 않게 내 뒤에 줄을 서 있는 어떤 여자에게 말을 거는 그를 코 앞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이거 무슨 줄이에요?"

아마 무슨 줄인지 알았으면 물어보지도 않았겠지만, 순간 주변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던 거 같다. 그 줄은 바로 그의 공연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었던 것. 일찍 들어가 앞자리에 앉으려는 열성팬들의 줄....

그게 아마 그가 죽기 3개월전 쯤이었던 것 같다.

4집. 「서른 즈음에」가 들어있는 그 앨범이 발표된 게 94년이었다.

그해, 내 나이 서른이 되던 해였다.

내 '거친' 20대를 마감하며, 숱한 고민과 번민을 하던 시기. 맑스, 레닌, 알뛰세를 잠시 접어두고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 푸코, 들뢰즈를 섭렵하던 시기. 영화와 음악에 몰입하여 일주일에 수십 편의 영화를 섭렵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주변 상황과 맞물려 이전부터 즐겨 듣던 『다시부르기 1집』과 4집, 그리고 얼마 뒤에 나온 『다시부르기 2집』을 한동안 끼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한없이 나를 움츠려들게 만들었었다.

음악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김광석의 노랫말 하나하나는 내 젊은 날에 대한 '은유'로 다가와 사람을 멍하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너무 아픈 사랑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왜 이러지?"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음반을 틀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애써 다른 음반을 찾곤 했었다. 아마도 내가 안치환 4집 『내가 만일』을 좋아하게 된 것도 김광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잔잔하게 움츠려들게 만드는 김광석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안치환 4집이 약간 늦게 나왔을 것이다-안치환의 그 록커 같은 힘찬 보컬을 의식적으로라도 더 즐겨 들을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하여튼 나에게 김광석은 멀리하려 해도 자꾸만 다가오는 그런 존재였던 거 같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와서야 그의 그늘에서 어느 정도 자신있게 벗어난 거 같아 다행스럽다면 다행이라고나 할까....

* 오랜 날들이 지난 뒤에도 *

그대, 무엇을 꿈꾸었기에 어느 하늘을 그리워했기에
아직 다 부르지 못한 노래 남겨 두고 홀로 먼길을 떠나는가.
다시 날이 밝고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데
그대는 지금 어느 구석진 자리에 쓸쓸히 서서 무얼 바라보고 있는가.
고운 희망의 별이었는데 아, 형편없이 망가진 인간의 세상에서
그대의 노래는 깜깜어둠 속에 길을 내는 그런 희망의 별이었는데
그댄 말없이 길을 나서고
우린 여기 추운 땅에 남아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도대체, 무얼 노래해야 하는 거냐!

알 것 같아....
그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언지,
그대 온 몸으로 노래하던 그 까닭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 청춘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들려, 들릴 거야.
그대의 기타소리,
대숲의 바람처럼 몸을 돌아나오던 그 하모니카 소리.
우리,
고단한 삶에 지쳐 비틀거릴 때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소용돌이칠 그대의 노래.

우리들 팍팍한 마음속에 뜨겁게 울려날 그대의 목소리.
....

그대는 그렇게 우리들 탁한 삶의 한켠에
해맑은 아침으로 따뜻한 햇볕으로 남아 있을 테지.
다시 겨울이 오고 오랜 날들이 지난 뒤에도....


백창우 글 - 김광석 추모앨범 『가객』에서 -

2002 03 05


변해가네 - 김광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침체한 주류 대중음악 ... 무슨 일이 일어났나
[칼럼] 소녀시대, 원더걸스, 서태지를 둘러싼 이야기들

나도원 대중음악전문기자
출처 : <컬쳐뉴스> 2007-11-21


원더걸스와 함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시대
▲ 원더걸스와 함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시대
아직 가을인데 저만치서 눈덩이가 몸집을 불리고 있다. 말이 말을 만들어내는 눈덩이효과의 혐의가 짙긴 하지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서태지는 모처럼 주류 대중음악계에 화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신문과 잡지들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원고를 줄줄이 싣고, 개중에는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해가며 진단하는 경우도 있다. 노래의 히트가 히트수로 판가름 나는 상황에서 보면 가시적인 실적도 존재한다. 아이돌시스템을 활용해온 SM 엔터테인먼트와 JYP 엔터테인먼트의 마케팅 전술의 차이가 각각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났다거나 롤리타콤플렉스와 연관성이 있다는 등의 분석들도 나왔다. 전자에는 자본논리만 남고 후자에는 10대 남녀 팬들의 심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구석이 없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대중의 이목을 낚아채는 강점을 지니고 있음은 인정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아이돌시스템에서는 ‘노래’를 위하여 가수가 존재하는 대신 ‘가수’를 위하여 노래가 존재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이른바 히트곡 메이커라는 작곡가 켄지가 어디에선가 들어봤음직한 멜로디의 곡을 주문생산 한 경우고, 원더걸스의 <Tell Me>는 팝 가수 스테이시 큐(Stacy Q)의 <Two of Hearts>를 샘플링한 노래이다. 샘플링은 기존의 곡을 새로운 창작에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기법을 일컫지만 한국에서는 다소 다르게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선율을 가져와 끼워 넣는 수준을 넘어 아예 곡 전체를 짜깁기함으로써 상업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법적인 하자는 없을지언정 창작이라는 측면에선 맥 빠지는 수법인데, 바로 <Tell Me>가 그렇다. 그러니 음악적으로 말한다면 썰렁한 농담이 되고 만다. 국방부로부터 감사패를 받는다면 모를까.

성공을 이루게 한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몰락의 길로 향하는 네메시스와 그 부활은 대중음악에도 적용되어 왔다. 간혹 신중현이 반어적인 체제비판이라 ‘주장’했던 <아름다운강산>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게임을 치르던 시기에 이선희에 의해 체제찬양가로 불려졌던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나기도 한다. 복고취향에 성(Sex)을 가미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이러한 흐름과 무관치 않다. 그들은 각각 주류 대중음악을 몰락시킨 주범으로 지탄받아온 SM 엔터테인먼트(대표 이수만)와 20세기 대중문화의 키워드를 성(Sex)으로 규정한 박진영이 운영하는 JYP 엔터테인먼트의 신상품들이다. 특히 JYP 엔터테인먼트는 ‘비와 한류’ 그리고 ‘박진영과 미국진출’ 등에서 보듯 언론플레이에도 능하다. 그래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신중하지 못한 주목은 한계에 직면한 아이돌양성시스템을 넘어 대안을 찾아야한다는 목소리가 공감대를 넓혀가는 시점에서 자칫 성급하고 잘못된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서태지에 의해 대중음악계의 수위가 동반상승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계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그렇다면 음악적 개성과 충실한 팬덤을 지닌, 그래서 뮤지션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경우는 어떨까. 애니밴드는 실력파(?) 가수들이 웰-메이드 음악을 서비스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니콜이 이른바 ‘브랜디드 엔터테인먼트’로 내세운 애니밴드는 보아, 타블로, 시아준수, 진보라로 구성되었다. 영화에 가까운 뮤직비디오가 케이블을 장악하고 있는데, 생기를 잃은 도시에 게릴라들이 등장하여 음악으로 활기를 되살린다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휴대전화를 수시로 등장시키고 애니콜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가사로 채워진 장편 CF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내용과는 반대로 가수들이 자본에 철저히 예속당한 음울한 케이스이고, 전적으로 자본이 요구한 틀에 끼워 맞춰진 CM송에 불과하다. 문화에마저 개발주의을 가져다 붙이는 천박한 세태에서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 작업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솔직하고 정감어린 스쿠류바송이나 아카시아껌의 CM송이 음악에 가깝다.

이 시점에 서태지가 이슈로 떠올랐다. 15,000장 한정으로 출시되는 서태지의 15주년기념음반은 발매일인 11월 30일까지 한참이 남았음에도 전량 매진되었다. 컴백에 앞서 영향력을 점검하는 프리마케팅 차원의 이벤트가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그래선지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여 지금까지 서태지에 의해 대중음악계의 수위가 동반상승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계는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특정세대를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치고 빠지는 움직임으로 효과를 극대화하고, 해외 트렌드를 수입·재현하면서 앨범마다 장르를 달리하는 전술은 아이돌 양성업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서태지는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사실 15주년기념음반을 사고판 건 서태지와 그 팬들만이 아니다. 한정판매 예약마감 직후 그 몇 배에 달하는 가격이 붙어 물품거래 사이트에 올려지고 있으니까.

이슈의 존재는 긍정적이다. 아이돌 스타의 가치는 존재하며, 상업주의와 대중음악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러나 경계해야할 표본들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막연한 기대심리의 조장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또는 서태지에 대한 기사들에 습관처럼 끼어드는 “침체된 대중음악시장에…”로 시작하는 문장은 그간 질적인 성장과 의미 있는 움직임을 이어온 전체 대중음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재생산할 소지가 있다. 이 와중에 전문가라는 이들은 음악비평이라기보다 상품감정을 위해 불려 다니느라 바쁘다. ‘대중음악’은 모호하게 범주화된 ‘소비군중을 위해 생산된 음악’이라기보다는 ‘동시대를 사는 인민이 생산한 음악’이다. 대중음악에 대한 성찰이 간과된 논의는 농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눈덩이는 결국엔 녹아내린다. 흔적도 없이.



* 나도원 _  대중음악평론가. 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비평계에 입문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의회 회원이며, <가슴> 편집인, 2005 ·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매체팀장 등을 역임했다.



------------------------------------------------------------------------

<원더걸스>는 박진영과 관련이 있는 '가수'라고 알고 있었지만, <소녀시대>는 얼마전까지도 이승철의 노래를 누군가 새로 리바이벌 해서 히트치는 줄 알았다. <마야>의 "소녀시대" 같이.....

서태지를 보니 천리안 시절이 생각난다. 서태지를 두고 새로운 '혁명의 아이콘'이라고 외치던 논객들이 있었다. 누군가 서태지를 약간이라도 비판할라 치면 락을 모른다느니, 음악을 모른다느니 하며 게거품을 물던 친구들... 그 친구들 요즘 뭐하나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상엔 영화 말고도 분노할 게 많다
[영화칼럼] < M >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최광희 _ 영화저널리스트]
출처:<컬쳐뉴스> 2007-11-08


영화 < M >의 포스터
▲ 영화 < M >의 포스터
최근 개봉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을 둘러싸고 말들이 많다. <디 워> 파문 때와는 정반대의 양상이지만, 또 다시 영화를 둘러싼 옹호와 비판(혹은 저주)의 격돌 양상은 비슷한 것 같다. 이번에는 ‘평론가들의 가르치려는 오만한 자세’에 덧붙여 ‘관객을 무시하는 감독의 태도’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번에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논란의 물꼬가 터졌다는 것이다. <디 워>가 애국심 마케팅을 동원한 여론몰이 등 영화 외적인 부분에 치우치면서 소모적인 헐뜯기로 일관했다면, <M>은 영화를 받아 들이는 개별 관객의 반응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건설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현상은 여전하다. 이 글이 <M>을 비평적으로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므로,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바라보는 이 시대 대중 관객의 인식과 그것이 확산되는 과정의 모순에 집중하고자 한다. 대중 관객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관객들이 스스로를 ‘대중’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 정치인 등의 이른바 지도 계층이나 오피니언 리더, 혹은 소수 전문가 집단과 대립하는, 일종의 계층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디 워> 파문은 그 설득력 있는 방증이었으며, <M>은 그 같은 문화적 징후가 더 이상 징후가 아닌 하나의 광범위한 현상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소비 자본주의는 대중을 일상의 고객으로 신격화했다. 그러므로 대중의 선택은 절대선처럼 추앙된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절대선인 척 얼러준다. 이런 숙명은 불가피하게도 대중문화의 소비 패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중성’이라고 통칭되는 ‘상업성’, 또는 ‘상품성’은 다른 어떤 미학적 기준을 압도하는 잣대로 기능하고 있다. 숙명적으로 대중추수주의에 함몰된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여기에 강력한 알리바이를 하나 개발해 냈다. 평점이라는 수치를 통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별점 매기기는 원래 영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시각을 관객들이 일별하기 쉽도록 최대한 간단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 일종의 저널적 선정성의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비판도 많았지만, 관객들이 길고 난해한 평론보다 짧고 간단한 요약문을 선호할 것이라는 가설은 이 우스꽝스러운 도표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별점이 평점으로 둔갑해 네티즌들의 손에 들어가자, 금세 전가의 보도가 됐다.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이 네티즌 평점은 영화의 상업적 성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단순화해 보여주는 이런 방식은, 기존 언론들이 선정적으로 써 먹던 수법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쉽게 권력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 권력을 고안한 당사자인 언론은 자기 꾀에 넘어간 셈이고, 네티즌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는 셈이다. 평점은 관객 일반의 반응이 아니라 영화의 품질을 따지는 점수가 됐다. 그래서 평점이 낮은 영화는 별로인 영화, 평점이 높은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러다 보니 많은 네티즌들이 평단에 대립각을 세우는 근거로 평점을 들이댄다. 평점이 이렇게 낮은데, 당신들은 무슨 근거로 영화를 그렇게 좋게 얘기하는 것이냐, 혹은 평점이 이렇게 높은 영화를 깎아 내리는 저의는 무엇이냐 등등.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아예 평점 권력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믿는다.

▲ 모 포털의 영화평점 사이트
개봉하자마자 5점대의 처참한 평점을 얻으며 부산국제영화제 때의 화제와 상찬을 무색케 한 <M>의 경우, 그러므로 나쁜 영화인 셈이다. 평점이 낮다는 것은 대중성이 없다는 것이며, 평점 권력의 논리에 따르면 대중성이 없는 영화는 영화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관객들이 이 논리를 들이댄다. 영화는 어차피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명세가 자아 도취에 빠져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 놓고 관객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갔다고 말이다. 강동원이 나온다기에, 영상미가 끝내 준다기에 나름대로 기대감을 갖고 이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로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당황한 것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대중 관객들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또는 영화가 낯설다는 이유로 그 고유의 가치와 상관 없이 영화를 쓰레기 취급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말할 나위 없이 관객의 선택은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고객인 자신이 재미 없었으므로 그 영화는 나한테 맞지 않거나 취향과는 다른 영화, 혹은 기대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평점 권력은 그 생각에 발언의 기회를 준다. 그리고 생각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해 준다. 쓰레기라는 말은 생각을 떠나 실체가 된다. 영화가 기어코 쓰레기가 된다.

평점 권력의 반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명세가 관객을 가르치려 들었다’고 훈수한다. 왜 ‘자기만 알아 듣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이게 영화야’라고 하냐며 내러티브의 결핍이 치명적인 오류라고 한 수 가르친다. 예술영화 만들 거면 (본인이 대중영화 전문배우라는 선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알아서 대중 배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강동원을 왜 캐스팅했냐고 지청구다. 한마디로 재수 없다는 거다. 논거는 간단하다. 영화 감독은 관객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업의 종사자일 뿐이다. 그러니 예술가라는 쓸 데 없는 자의식은 버리라는 거다. 예술이 관객의 욕망과 대립된다는 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요설일까? 이 논리라면 영화 감독은 시나리오 쓸 시간에 소비자 분석부터 먼저 해야 할 판이다.

이처럼 낯선 영화에 대한 부적응이 쉽게 반감으로 치환되는 현상의 배후엔 앞서 말했듯 평점 권력이 도사린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인터넷 안에서만 매우 혁명적이어서, 이른바 전문가로 일컬어지는 모든 권위에 대한 냉소와 저주를 부추기고 있다.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 냉소와 저주의 모티브가 단순한 의견의 상이함이 아닌, 잠재된 분노와 증오이기 때문이다. 타깃이 명확하지 않은 그 정서의 마그마는 약한 고리를 타고 분출된다. 영화는 그 마그마가 찾아낸 첫 번째 약한 고리다.

영화 <M>으로 시작했다가 너무 멀리 온 것 같지만, 기왕 얘기 나온 김에 몇 마디 더 보태고 싶다. 나는 <디 워>나 <M> 등을 통해 감지되고 있는 최근의 문화적 징후가 한국사회의 기형적 보수화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기형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이상의 정당성보다 수단의 실효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진, 이른바 집단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부패를 먹고 커왔던, 게다가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들이 노골적으로 응원해 마지 않는 특정 정당에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계층적 이해나 토대와 상관 없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부패고 뭐고, 밥 먹고 살게 해주는 놈이 장땡이라는 근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제 삼겹살은 먹게 됐으니 갈비살도 좀 먹게 해달라는 주문처럼 들린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목전이지만, 여전히 성장주의의 가격이 공공성의 가치를 압도한다. 마치 평점이 영화의 가치를 압도하는 것처럼. 예술이 밥 먹여 주냐는 관객들이 돈 7천 원 냈으면 그에 합당한 상품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는 것처럼.

이 현상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정서가 있다. 그것은 무기력이다. 이상이 현실적 실효를 증명하지 못하자, 배신감은 새로울 것으로 기대됐던 기존 권위로부터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등을 돌려야 할 타깃은 명확했다. 보수 언론이 끈질기게 부추긴 덕분이었다. 그러나 돌린 뒤 보이는 풍경은 모호하다. 그것이 무기력을 이끈다. 분노는 타깃을 구분하지 못하고, 약한 고리로 터져 나온다. 지성은, 그리고 대중문화는 가장 쉽고 편리하게 응징할 수 있는 분노의 타깃이 됐다.  

영화 <M>을 통해 이명세는, 대중을 가르치려 한 게 아니다. <M>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이 무식한 관객들을 계몽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유사 이래 있어 왔던 예술의 본원적 가치가, 상품 사회의 욕망에 그렇게 쉽게 몸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예술의 숙명을 타고 난 영화 매체가 그나마 진화할 수 있었던 힘은, 순진하게도 그 영화 안에서 예술을 추구해보겠다고 애쓰며 자본과 관객들의 냉소에 맞서 싸워온 작가들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려 드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은 룰 바깥의 소통 가능성을 탐문해 보는 것이다. 그러니 그 풍경에는 분노와 저주보다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게 지당하다. 자본을 대신해 ‘대중성’의 채찍으로 예술가의 엉덩이를 때리고 있기에, 이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1995년부터 YTN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영화주간지 FILM2.0의 취재팀장과 온라인편집장을 지냈다. 현재는 기고와 방송 활동을 겸한 프리랜서 영화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

정말이지, 세상은 영화 말고 분노할 게 너무 많다.
이명박,
이회창,
자신이 진보라고 외치는 노무현과 그 아류들,
'삽질'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그리고 삼성,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