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 춤에 반했지?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김소민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02


»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1960년대 배경 십대 ‘뚱보’ 소녀의 티브이쇼 입성기
‘비주류’들 유쾌한 자기긍정 춤판에 관객도 ‘덩실’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가공할 만한 자기 긍정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 속 비주류 인물들의 정서는 대충 이렇다. “나 뚱뚱하고 키 작고…. 그게 어쨌다고. 그럼 그렇지 너도 나한테 반했구나.” 칭찬은 고래를 춤 추게 하고 ‘대책 없는’ 낙관은 10대 뚱녀 트레이시, 그런 유전자를 트레이시에게 전수한 장본인 엄마 에드나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긍정의 엑스터시 판에 뛰어들게 만든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자학할 거리를 꾸러미로 안기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토록 올바른 힘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기에 <헤어스프레이>는 판타지에 가까운 2시간의 짧은 해방구다. 아무렴 어떤가. 관객은 음악·춤과 어우러진 이 환타지에 참여하길 주저하지 않아 1988년 존 워터스 감독이 만든 원작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대박을 쳤고, 2002년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태어났다. <웨딩플래너>의 감독 아담 쉥크만이 만든 이번 영화도 올 여름 대작들 틈바구니에서 개봉해 1억2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
 
1960년대 방식 그대로 머리를 산처럼 세운 10대 트레이시(니키 블론스키)는 첫 장면부터 조증 상태처럼 보인다. 볼티모어 거리를 거닐며 “매일 아침은 기회로 반짝이고 매일 밤은 환타지로 가득 차 있다”고 노래한다. 그가 하루라도 놓치고는 못사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코니 콜린스 쇼>다. 늘씬 미녀 미남들이 최신 춤을 추는 프로인데 트레이시는 모든 스탭을 섭렵한 지 오래다. 콜린스 쇼에서 댄서를 한명 더 뽑게 되니 트레이시의 눈에 불 켜졌다. 엄마 에드나(존 트라볼타)는 딸이 상처 받을까 말려보지만 그 말을 들을 트레이시가 아니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호락호락하겠나. 방송국 매니저인 벨마(미셸 파이퍼)는 금발에 미인대회 수상자인데 흑인이나 못생긴 여자는 질색이고, 자기를 꼭 닮은 딸 엠버를 스타로 만들 궁리밖에 안한다. 쇼 제작진 앞에서 오디션을 보는 날, 트레이시를 벨마는 어이없게 쳐다보는데, 그 눈빛을 트레이시의 친구 페니는 이렇게 독특하게 해석한다. “너한테 완전히 빠졌구나.” 트레이시의 역동적인 춤솜씨에 다른 스태프들이 반하는 바람에 트레이시는 쇼에 입성한다. 그런데 이 쇼에서도 춤 잘 추는 흑인들이 되레 차별당하니, 정의의 트레이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영화 속에서 흑인, 뚱보 등 미국 사회 비주류는 모조리 반짝이는 별인 반면 주류는 창피한줄 알아야 하는 비웃음거리다. 빨래방을 운영하며 오줌 자국을 빼느라 진땀을 빼는 엄마 에드나(존 트라볼타)는 뚱뚱해서 20년 동안 외출을 삼갔다. 아버지 월터(크리스토퍼 월킨)는 에드나가 자기를 꼬시는 줄을 5년 뒤에야 알아챘을 정도로 눈치가 없다. 그는 “나는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는데 그 꿈이 작은 장난감 가게를 열고 똥 모양 초콜렛 등을 파는 것이다. 하지만 비쩍 마른 월터와 월터의 두배는 돼 보이는 에드나가 빨래 더미 앞에서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는 거의 위대할 정도로 아름답다. “당신은 냄새 나는 치즈, 나에겐 숙성된 맛으로만 느껴져. 당신의 머리는 계속 빠지고 나는 계속 뚱뚱해지겠지만 당신은 나에게 세월을 뛰어넘는 존재….” 이런 괴짜 비주류 정서에 “평등은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이를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주제를 직설적으로 버무린다.

<헤어스프레이>에는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오로지 못된 소수의 탓으로 덤터기 씌워버리는 단순화의 함정도 있다. 흑인 차별을 주도했던 게 진정 벨마 등 일부 소수였을까? 대중은 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울까? 그런 의문이 들어도 화끈한 드레스를 입은 엄마 존 트라볼타가 30년 전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보여줬던 만큼 유연한 웨이브는 아니더라도 <유 캔트 스탑 더 비트>에 맞춰 춤출 때 밀려오는 흥은 막을 도리가 없다. 6일 개봉.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케이디미디어 제공




화끈한 그녀가 ‘존 트라볼타’라고?

» 존 트라볼타
 
영화 <헤어스프레이>는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월킨 그리고 1000대 1의 경쟁을 뚫었다는 트레이시역의 니키 블론스키 등 배우들의 딱 맞게 수위 조절한 코믹 연기가 압권이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것은 14킬로그램 짜리 살덩이 옷을 입고 엄마 에드나로 등장한, 올해로 53살의 존 트라볼타다.

엄마 에드나 역할은 전통적으로 기괴하고 목소리 걸걸한 남자 배우들이 맡았다. 트라볼타는 약간 더 사랑스럽고 다소곳한 에드나다. 원작 영화에서는 한번 보면 잊혀질 수 없이 괴상한 남자인 해리스 글렌 밀스테드(일명 디바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선 하비 피어스테인, 내년 2월17일까지 한국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엔 정준하가 이 역을 맡았다. 존 트라볼타는 리처드 기어가 맡았던 <시카고>의 빌리 플린역을 마다하고 에드나가 됐다.

원작을 만든 존 워터스 감독은 원래 따뜻한 가족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독이었다. 그는 디바인과 함께 개똥을 먹는 장면 등이 들어가는 지저분하고 광기어린 영화들을 양산했다. 트레이시역은 신인이나 알려지지 않는 배우에게 맞기는 게 전통이어서 원작에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리키 레이크, 뮤지컬에선 마리사 위노커가 맡았다. 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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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꾸하는 펑크의 방식
[음반리뷰] 럭스 《The Ruckus Army》와 썩스터프 《Rough Times Ahead》


나도원 / 대중음악전문기자
출처 : <컬쳐뉴스> 2007 10 26


1968년 유럽의 대학생들은 ‘금지를 금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든 기성권위를 부정했다. 당시 19살의 이탈리아 대학생 카를로 페트리니도 신좌파의 세례를 받은 ‘68운동’의 일원이었다. 20대를 혁명가로, 30대를 음식평론가로 보낸 페트리니는 86년 패스트푸드의 세계화에 맞서 ‘음식 혁명가’로 재변신한다. 환경·전통의 보존과 느림의 미식을 강조하는 그는 ‘슬로푸드’ 운동으로 속도 맹종의 권위에 도전했다. 토속 농법과 종자를 찾아내 지키고, 제철 제땅에서 이슬맞고 자란 것들로만 맛있게 만들어 먹자는 것이다.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럭스와 스컹크 동료들
▲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사진은 럭스와 스컹크 동료들

[포용과 묵인의 차이는 인식과 반성의 선행 여부에 있다. 거쳐야할 단계를 건너뛴 것은 포용일 수 없음에도 확성기는 종종 두루뭉술하게 이런 구호를 내뱉는다. 비단 정치구호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펑크는 한국에 인디 씬이 형성될 즈음 펑크가 붐을 이루면서 가장 먼저 매체의 주목을 받았고, 마치 인디를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매체들이 인디·클럽 문화를 ‘젊은이들의 반항적인 분출구’ 따위로 단순화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보수적인 음악인들은 펑크를 음악적으로는 말할 게 없는 장르로 오해했다. 그리고 팝음악을 제국주의의 무기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들은 펑크가 세계 노동자 계급의 공용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물론 펑크가 가진 세계관의 스펙트럼은 ‘좌우’ 180도에 가까울 정도로 각이 크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몇몇의 태도와 음악적 행보는 오해를 가중시켰다. 크라잉넛은 논외로 하더라도 《청년폭도맹진가》(2000)로 기성체제에 통렬한 한방을 휘두른 노브레인의 변화에는 투항이라는 비판이 가해질만했다. 하지만 선의를 가장한 선정주의와 상업주의가 상식화된 세상, 즉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전쟁과 폭력이 스펙터클로 서비스되는 문화 속에서, 녹아버린 펑크의 조각들은 충분한 표본이 되지 못한다. 거품 아래에 가려져 있던 모습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거품이 꺼져가는 동안 스컹크레이블, GMC, 타운홀레코드, 유니온웨이를 비롯하여 각 지역의 공동체들은 연대와 경쟁을 통하여 서로를 잊지 않고 서로를 잇고 있었다. 럭스(Rux)도 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무수한 펑크밴드들 중 하나였지만, 그 진가는 붐이 잦아들고 매체의 주목도 약해진 이후에야 드러났다. 썩스터프(Suck Stuff) 역시 그랬다.

럭스의 걸작인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힘들어도 잘 버텨왔지만 앞으로가 문제인 걸 어떻게 또 견디라고” <부둣가>에서 토로했고, “지금껏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었건만 … 이제 와서 돌아봤더니 나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병신이라니”라며 <세상의 중심>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에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나 잘 알기에 오늘도 또다시 일어선다”라고 다짐했다. 진정한 ‘대변’이었다. 신실함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왜 진정성을 이야기하는지, 태도만 있고 음악은 없는 펑크 또한 왜 공허한지를 보여주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 럭스《The Ruckus Army》(2007)
그런데 기대하지도 못한 비평적 찬사와 주목에 럭스는 적잖이 부담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의도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한다. 그런 의도가 있었던 EP 《Another Conception》(2004)마저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말았으니까. 이처럼 좋든 싫든 현재의 한국 펑크를 대표하는 밴드로 지목받고 있을 때 럭스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는데, 주지하다시피 화살은 그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라이브 클럽과 댄스 클럽을 구별하지 못한 무책임한 보도와 비난이 뒤따랐고,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클럽 일제 단속을 언급했다가 라이브 클럽으로부터 직접 와서 한번 보라는 초대를 받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슈가 아니라 음악과 행동으로 인정받았던 럭스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 앨범에 대한 기대에 “부담스럽다”고 럭스의 리더 원종희는 말해왔다. 모르긴 해도 두 번째 정규앨범 《The Ruckus Army》(2007)에는 부담이 어떤 식으로든, 최소한 의식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식으로라도 작용했을 것이다. 동료를 응원하는 <Our Life, Our Stage>이나 긴 기타 연주가 삽입된 <세상의 중심에서>는 럭스답게 음악과 메시지를 놓치지 않은 곡들이다. 미디어와 비평가들을 포함한 외부의 시선에 직접 대꾸하는 듯한 <21 & 56 & 45>도 있다. 그런데 한편에는 그들의 것이 맞는가 싶은 곡들이 적지 않다. 확신 대신 인간적 공허함을 숨기지 않고 때론 자조적 긍정으로까지 보이는 모습은 왠지 좀 여위어 보인다. 그렇다면 고집스러운 두 번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그럼에도 럭스가 어떤 단계 속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반을 내줄 회사가 없어 스스로 ‘스컹크레이블’을 만들고, 공연할 무대를 찾기 힘들어 라이브 클럽 ‘스컹크헬’을 스스로 세웠다. 이상은 현실과 불일치하기에 이상이다. 이 둘의 일치를 위해 스스로 토대를 만들어온 것이다. 또한 스컹크에는 럭스를 중심으로 신실한 태도와 음악적 성과를 함께 중시하는 펑크 음악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외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여전히 <Fight for Your Identity>에서 “국가를 위한 승리의 희생, 또 국가경제를 위한 교육인적자원,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빼앗기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를 말한다. 스스로 자신을 다그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너무 너그럽거나 게을러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 썩스터프 《Rough Times Ahead》(2007)
“우린 저지당했어. 우린 반역자야”라고 노래하는 썩스터프의 《Rough Times Ahead》(2007)에는 그 아쉬움을 채우는 울림이 있다. 《City Rebels》(2006) 이후 두 번째 정규앨범인 《Rough Times Ahead》는 근래에 발표된 펑크 계열 앨범들 가운데에서 기타 리프와 멜로디, 그리고 코드의 연결이 단연 돋보인다. 럭스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미국인 청년 폴 브리키가 구성원으로 참여한 썩스터프의 연주는 이른바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면이 있다. <Rough Time Ahead>와 <Where I Belong>의 컨트리 펑크는 무척 흥미롭고, 13스텝스와 49몰핀스의 탁월한 드럼연주자였던 류명훈이 가세한 조합은 <This Wasteland>처럼 근사한 펑크연주로 이어진다.

또한 <우리 그 밑에 있다면>에서처럼 위악적이지만 분명한 어조를 지닌 유철환의 노래와 ‘비문’에 가까움에도 힘이 강한 가사의 결합은 썩스터프의 미덕이다.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멜로디와 코러스가 인상적인 <선택받은 자여>는 기억할만한 펑크 곡이다. 이 결과물은 재료를 노출시킨 건축물과 같고, 핏줄을 드러낸 팔과 같다. ‘생각하는 펑크’를 강조하는 유철환은 원종희와 함께 ‘스컹크 헬’을 운영해왔으며, 그간 적극적인 움직임을 모색해왔다. 벽은 보호를 위해 존재하기도 하고 감금의 용도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림이 걸리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벽이 치열한 음악을 태어나도록 한 것이다.

윤리를 스스로 세워야하는 원점의 시대이다. 그러다보니 경우에 따라선 방향이 모호해질 수 있고, 더구나 모호함은 포괄적인 것과 쉽게 혼동된다는 위험이 항시 존재한다. 이 문제는 현재 한국 펑크음악인들의 과제이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외부의 관점도 달라질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세상은 그들을 제대로 보려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세상을 스스로 보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는 사실 말이다.



*나도원 _ 대중음악평론가. 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비평계로 입문했다.
지금은 <가슴> 편집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의회 회원이며, 2005 · 2006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매체팀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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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의 열광 끌어낸 재발매 앨범

[세상을 바꾼 노래]⑧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전선인 미국에서는 예술분야 종사자들도 노조활동을 통한 이윤추구에 적극적이다. 최근 미국작가노조의 파업이 그 단적인 예다. 음악계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음악가연맹’은 1896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두 차례의 대대적인 파업을 감행한 바 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말(일부 레코드회사와는 1944년)까지 이어진 1차와 1948년의 2차 파업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노조위원장 제임스 페트릴로가 매번 파업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노조 소속 음악가들의 연주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 때문에 음악가 노조의 파업은 이른바 ‘페트릴로 금지령’이라 불린다.

1차 ‘페트릴로 금지령’은 음반판매량의 증가가 레코드회사와 라디오 방송국의 배만 불린다는 주장에서 시작하였다. 공연활동의 기회와 방송에서의 라이브 연주가 줄어들면서 연주인들의 기회가 제한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파업의 여파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음반제작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출시작의 재발매가 속출했고 악기 연주자가 필요없는 아카펠라 음악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레코드회사들의 궁여지책에서 비롯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요컨대,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우가 그렇다. 1943년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메이저회사인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으면서 스타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노조의 파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몸이 단 시나트라와 컬럼비아는 고심 끝에 기존 음반이라도 재발매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나트라가 해리 제임스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1939년 발표했던 〈올 오어 너싱 앳 올〉이다. 처음 발표했을 당시 유명 라이브클럽(빅토르 위고 카페)의 매니저로부터 “파리 한 마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까지 했던 곡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앞섰다.

인생이 흥미로운 것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39년 녹음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고스란히 재발매한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대히트를 기록했다. 경쟁상대가 많지 않았다는 정황적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시나트라의 개인적 매력이 새로운 세대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욱 주효했다. 평이한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 좀더 로맨틱한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프랭크 시나트라는 소녀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열광을 끌어낸 최초의 스타로 등극했던 것이다.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전성시대 개막을 알린 ‘슬리퍼 히트’(예상치 않은 성공작)였다. 더불어 “사랑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노랫말은 악명 높은 바람둥이로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개인사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세기의 목소리’로 불린 ‘20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화려한 경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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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되 아름다운 루시드 폴의 '귀환'

과학도 조윤석의 <국경의 밤>에는 얼마 전 그가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 가십을 가벼이 압도하는 깊이와 서정이 심해의 물처럼 흐른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 출처 : <시사 IN> 제 660호 2007년 11월 26일


 
   
2006년 9월23일 새벽, 부산 앞바다에서 익사 사고가 일어났다. 고인의 이름은 김정찬. 향년 33세. 강원도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에게는 17년 지기가 있었다. 그 친구는 음악을 했다. 이름은 조윤석.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사고 후 약 20일이 지나 루시드 폴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노래 가사를 하나 올렸다.

‘노래할게’라는 제목으로 몇 시간 만에 만든 곡이었다. 스위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과학도이기도 한 조윤석은 유학 생활이 끝나기 전에는 앨범을 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노래할 결심을 하게 한 건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었다. 그는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정신 차리고, 노래 많이 쓰렵니다. (중략) 정찬이가 노래를 하고 싶다면, 내 목으로 같이 노래하고 기타 치고 그러렵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때 우리가 그랬듯이요.” ‘곡: 윤석+정찬, 사: 윤석’이라는 크레딧이 이 노래에 달렸다. 루시드 폴의 세 번째 앨범 <국경의 밤>은 그렇게 출발했다.

<국경의 밤>이라는 제목은 고국과 외국의 사이, 음악인과 과학자 사이, 언더와 오버 사이에 있는 경계인 같다는 생각에서 지었다고 한다. 루시드 폴의 인생이 늘 국경에 있었다. 부산 출신인 그는 인디 신 초창기 홍대 앞에서 레이니 선, 앤, 피아 등 부산 출신 밴드가 끈끈한 정으로 뭉쳐 활동할 때, 부산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가 처음 공연을 시작한 곳은 홍대 앞이 아닌 서울대 앞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3년에는 유재하 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았지만 주류 음악계에 그가 설 곳은 없었다. 심지어 대학가요제에서는 예선 탈락의 고배도 들었다.

루시드 폴의 인생은 늘 국경에 있었다

조윤석의 1998년 데뷔작인 밴드 미선이의 앨범은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닌 음악을 담고 있었다. 주류는 아이돌 그룹의 천하였다. 인디에서는 펑크와 하드코어가 대세였다. 델리 스파이스나 언니네 이발관과는 또 다른 미선이의 음악은 모던록에서도 비주류였다. 그러나 그해 음악 잡지 <서브>에서 실시한 독자 투표에서 이 앨범은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가 서 있던 국경이 단절과 소외가 아닌, 이음과 계승에 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포크의 감성과 진솔한 가사를 미선이가, 조윤석이 드러낸 것이다.

방위산업체에 복무하던 시절 내놓은 루시드 폴의 1집은 그런 감성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었다. 시인과 촌장, 박학기, 유재하 등에서 출발해 윤상과 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는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은 한국 인디 신이 내놓은 첫 번째 포크 앨범이기도 했다. 2001년 발매된 이 앨범은 미선이 못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방송 출연 한 번 하지 않았지만, 공연조차 그리 많이 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팔려나갔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루시드 폴은 노래했다. 조용히 감성적 음악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슬며시 큰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에는 영화 <버스 정류장>의 음악을 맡아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은 대중에게 알렸다. 어쩌면 작은 스타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조짐이 충분히 있었다.

   
  루시드 폴의 메시지는 어떤 선동 구호나 도구화된 음악도 전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조윤석이 전한 다음 뉴스는 새 앨범이 아닌 유학이었다. 소속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직접 원인이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기보다는 또다른 도피였다. 방구석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1975년생 물고기자리의 경계인은 그렇게 스웨덴으로, 스위스로 헤엄쳐 갔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있는 음악 친구들과 계속 교류했고 유희열이 속해 있는 토이 뮤직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05년 루시드 폴의 두 번째 앨범 <오, 사랑>을 내놨다. ‘물이 되는 꿈’ ‘들꽃을 보라’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등 여전히 주옥같은 트랙을 담고 있는 앨범이었지만 약간의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평생 사랑을 숨길 것 같았던 그가 사랑을 정면에 내걸었다. 1집에서 빛나던 아마추어리즘은 함춘호, 김광민, 유희열 등이 세션으로 참여하며 고급화됐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변했다”라며 지난 시간, 자신이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밝혔지만 변해온 길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 사랑>은 그래서 아쉬웠다.

다분히 개인사에서 출발한, 자칫 먼 훗날 다른 모습으로 만날 뻔했던 <국경의 밤>은 그러나 그 아쉬움을 모두 달래주고도 남는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찾아온 이 앨범에서 뮤지션과 과학자, 고국과 외국, 언더와 오버의 국경은 무의미하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곳, 그가 그리워하는 곳, 그가 바라보는 곳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이다.

12월22~25일 공연 위해 귀국할 듯


그는 올해 초, 이 앨범의 레코딩 세션을 하며 연주자들에게 반복을 시키지 않았다. 두세 번 연주하고 느낌이 오면 다소 모자라도 그대로 갔다.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도한 연습으로 순수함이 사라지기 전의 느낌을 담아냈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그래서 더 매력적인 감성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미선이와 <버스 정류장>, 그리고 루시드 폴의 1집과 2집이 모두 느껴지는 루시드 폴, 혹은 조윤석의 현재완료형 음악이 <국경의 밤>을 관통한다. 얼마 전 그가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 가십을 가벼이 압도하는 깊이와 서정이 심해의 물처럼 흐른다. 그는 고국의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가족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치열한 삶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세상을 이야기한다.

미선이의 앨범에서 이미 보수 신문에 대한 짜증을 ‘치질’이라는 곡을 통해 노래했던 그였다. 그의 눈은 더욱 넓어졌다. 사유는 깊어졌다. 루시드 폴은 ‘사람이었네’에서 자본과 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kid’에서 차별과 폭력을 노래한다. 뜨거운 소재다. 하지만 그는 더없이 담담하다. 격하되 차갑고 치열하되 아름답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어떤 선동의 구호나 도구화된 음악도 전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카에타노 벨로소, 메르세데스 소사 등 그가 심취했던 제3세계 저항 뮤지션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메시지가 얼마나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김민기나 한대수의 옛 음반이 아닌 지금 여기의 음반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들을 음악이 없다고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대중이 이런 음악을 외면하면,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국경의 밤>은 발매 닷새가 채 되기도 전에 초판이 모두 팔렸다. 아직 스위스에 있는 루시드 폴은 오는 12월22일부터 25일까지의 공연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다. <국경의 밤>을 들으면 혼자서 일기를 쓰고 싶어진다. 공연을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꽁꽁 숨겨뒀던 마음의 이야기를, 루시드 폴이 끄집어낸다.


낮은 음성, 깊은 울림
루시드 폴 새 음반 ‘국경의 밤’

▣ 이재성 기자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9일


» 루시드 폴
 
 
루시드 폴(본명 조윤석·32)은 그룹 동물원과 공일오비의 계보를 잇는 인텔리형 가수다. 동물원과 공일오비가 그랬듯, 20대~30대 전문직 여성과 대학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최근 발표한 3집 음반 <국경의 밤>은 낯선 영토에서 보낸 슬픈 엽서 같다. 노랫말은 예명(맑은 가을)을 닮아 가을처럼 투명하고, 멜로디는 나른하고 외롭다.

타이틀곡 ‘사람이었네’는 그의 지식인적 특성을 오롯이 담고 있다. “어느 문닫은 상점/길게 늘어진 카페트/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난 중동의 소녀/방안에 갇힌 14살/하루 1달라를 버는…” 노래는 페르시아 양탄자와 아프리카산 커피를 생산하는 어린 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낮게 읊조린다.

무거워보이는 주제를 노랫말로 옮긴 감수성도 좋지만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용기는 더욱 놀랍다. “이란 출신 친구와 함께 양탄자 가게를 지나가고 있었어요. 양탄자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는데, 그걸 만드는 여자 아이들은 하루 1달러밖에 벌지 못한다고 친구가 말하더군요.” 국제전화 선을 타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을 법한, 모범생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위스 유학중인 ‘과학자 가수’
고향 생각·노동자들 현실 노래
다음달 22일부터 귀국 콘서트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스위스 로잔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의 전공은 재생의학(조직공학)이다. 로잔공대 생명공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겸하며, 세포나 조직의 재생을 돕는 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교수와 함께 대기업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며 쓰고 있는 논문이 곧 박사 논문이 된다. 네슬레, 노바티스, 로슈 등 초국적 자본의 본거지에서, “청년이 된 그러나 내겐 소년인”(‘국경의 밤’) 그의 여린 가슴을 치는 것은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이다.

그는 “스위스의 제약회사들이 약을 개발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 사람들이 헐값에 임상실험에 동원된다”며 “내가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내년 여름이면 박사과정이 끝날 듯하지만, 계속 이 길로 가야하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향후 진로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쌀쌀한 서양인들 틈에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진 그는 “요란스런 한밤의 불빛은 없지만/어디에서나 보이는 크고 소담스런 사람들”(‘라오스에서 온 편지’)을 그리워하며, “걱정마, 넌 우리보다 더 따뜻하단다/자랑스런 네 검은 피부 가리지마라”며 흑인 소년의 어깨를 주물러준다.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고향 생각을 부추기지만, “올해 달력 위 붉은 글씨/추석이 와도 약해지지 않으려”(‘마음은 노을이 되어’) 마음을 다잡는다.

루시드 폴은 최근 ‘과학자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료들과 함께 작성해 그가 발표를 맡은 논문이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받은 것이다. 낮에는 연구에 매달리고 밤에는 음악을 하는 이중 생활을 용케도 이어가고 있다. “딴 짓을 안 하기 때문”이라며 그는 겸손해 했다.

대학생 때 인디밴드 ‘미선이’를 만들어 활동하느라 학부 성적이 나빴다. “제가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걸 대학 동창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며 그는 웃었다.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흑석동 중앙대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3집 발매 기념 콘서트를 연다. 벌써 매진 상태여서, 26일 앵콜 공연을 하기로 했다. 30일에는 그의 고향인 부산 을숙도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 루시드 폴은 공연 시작 일주일 전인 15일 귀국한다. 1544-1555.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안테나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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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글렌 굴드가 연주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하는 CBC 스튜디오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0호 2007년 5월 17일


글렌 굴드 하면 떠오르는 음반이 있다. 1955년, 그를 스타덤에 올렸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그의 인생은 어찌 보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서 이 작품으로 끝났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64년, 콘서트 활동을 중지하고 오직 레코딩에만 몰두하던 그는 1981년 다시 한 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1981년의 레코딩은 그야말로 거장의 비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23살의 천재가 뿜어내는 현란한 테크닉과 비범한 곡 해석 따위, 나이 먹으면 다 부질없다는 듯 말년의 글렌 굴드가 이렇다 할 기교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다시 한 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다. 아니, 끝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982년, 글렌 굴드는 죽었으니까.

연주를 데이터로 만든 뒤 피아노가 재현

△ 1964년 콘서트 활동을 중지하고 죽을 때까지 레코딩에만 몰두했던 글렌 굴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CBC 스튜디오는 그의 연주를 데이터로 만들어 재생시킨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내놓았다.(사진/ 한겨레)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데, 죽은 자가 연주를 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또 한 번 등장한 것이다. 옛날 음원이 발달된 음향 기술로 새롭게 포장되는 경우는 많았다. 최근 화제가 됐던 사례를 꼽아보자면 비틀스의 〈Love〉일 것이다. 모든 레코딩 소스를 전부 디지털로 되살려 최상의 음질로 재조합한 이 음반은 마치 엊그제 비틀스가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준다. 비틀스뿐 아니라 구시대의 음원들이 속속 디지털 리마스터링의 힘으로 새 단장을 하고 다시 발매되고 있다. 놀라운 음질로. 테크놀로지의 힘은 그만큼 놀랍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음원’을 토대로 이뤄진다. 즉, 아티스트가 남긴 결과물에 음향 기술로 계속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본이 존재한다. 아무리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해도 몸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몸통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유는 이렇다. 이 음반은 글렌 굴드가 직접 연주한 게 아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조작되는 피아노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원리는 간단하다. 프로그램이 글렌 굴드의 1955년 레코딩을 분석한다. 그래서 당시의 레코딩 기술로 녹음된 ‘음원’을 배제하고 스튜디오에서 울리는 그의 연주만을 남긴다. 이를 데이터로 만들면 이 데이터에 의해 작동되는 피아노가 오리지널 연주를 ‘재현’한다. 어떤 건반을 얼마나 길게 눌렀는지는 물론이고,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는 물리적 과정까지 모두 고스란히 이 피아노는 연주한다. 따라서 1955년 뉴욕 CBS 스튜디오에서 울리던 글렌 굴드의 피아노가 2006년 토론토의 CBC 스튜디오에서 ‘원음’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연주를 녹음한 게 이 음반이다.

이 음반은 듣는 사람에게 혼돈을 준다. 비록 원음을 바탕으로 재탄생한 음반이라지만 정작 CD 안에 담겨 있는 건 가공된 원음이 아니다. 기계에 의해 새롭게 연주된 음악이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이 음악에서 일종의 설계도 구실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음반을 글렌 굴드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건반과 페달이 혼자 위아래로 움직이며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1955년 글렌 굴드가 연주했던 바로 그 소리다. 따라서 이 음악은 글렌 굴드의 연주이자, 연주가 아닌 셈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통상,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가 발달한 지금도 결국 붓이 프로그램으로 바뀌었을 뿐, 사람의 손이 만든다. 우연성의 예술이든 해프닝이든 뭐든, 어쨌든 인간의 땀이나 하다 못해 잔꾀가 들어간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골드베르크 연주곡>에는 사람이 없다. 데이터와 프로그램, 그리고 기계장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로 그 소리를 생생한 음질로 듣고 있다. 1955년 레코딩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한 울림과 공간감, 세밀한 음감의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을 이 음반은 재현한다. 그렇다면 이 음반은 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니기도 하다.

글렌 굴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말장난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테크놀로지가 보잘것없는 몸뚱이에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몸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이 음반은 시사한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르크 그 자체다. 그것도 원작의 위조와 모방이 아닌, 원작이 소멸된 자리에 독자적인 현실로 존재하는 시뮬라르크다. 만약, 글렌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작품’이란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그는 ‘20세기 예술가에게 필요한 건 익명성’이라는 철학으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자로서 절정기이던 32살에 콘서트 생활도 접고 스튜디오 작업으로만 연주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편집’이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여러 번의 반복 녹음에서 좋은 부분만 짜깁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예술가를 증발시키고 음악 그 자체만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골드베르크 연주곡>은 글렌 굴드 정신의 절대적 구현이라 부를 수 있다. 클래식 시장의 침체기에서 돌파구로 만든 상업적 기획으로 끝날 수도 있던 한 음반이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원작자의 철학과 맞물리면 해석의 여지는 더 다양해진다. 아이러니하다. 지금,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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