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소년이 본 전쟁, 잔혹함
출처 : <경향신문> 2007년 11월 02일
▲ … 이스마엘 베아|북스코프

“처음으로 전쟁이 내게 현실로 다가온 것은 열두살 때였다.”

아프리카 적도 부근 국가 시에라리온 태생 이스마엘은 랩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소년이다. 그가 열두살 되던 해, 1993년 어느날 그는 친구들과 도시에서 열리는 장기자랑 대회에 참가하러 집을 나섰다. 그는 갈고 닦은 랩 실력을 뽐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여행길은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행이 돼 버렸다. 반군이 일으킨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이스마엘은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낸다. 총알을 피해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피난민이 된 것이다. 혼자서, 때로는 또래 아이들과 목적지 없고 굶주린 여정이 이어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밤이면 버려진 마을에서 잠을 잤고, 아침마다 어느 길로 갈 것인지 결정함으로써 내 운명은 결정됐다.” 그는 홀로 수십일을 밀림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의 지옥 같은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 소년의 회고담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비현실적 소설 같은 인상을 받는다. 소년의 눈에 비친 내전은 너무 잔혹한 나머지 한 편의 허구 드라마로 비친다.

그는 내전의 마수를 피해갈 수 없었다. 정부군에 발견돼 강제로 총을 들어야 했다. 이른바 소년병이 된 것이다. 처음 총을 잡았을 때 그는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열세살짜리의 전투를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그는 첫 교전에 나설 때를 “생애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검을 허리에 차고, AK47을 어깨에 메고 시신과 총성,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은 익숙해졌다. 그 힘은 마약에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주던 날 알약도 함께 주었는데, 다름 아닌 코카인이었다.

“어느샌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워졌다.”

그에게 분노와 살인은 일상이 돼버렸다. ‘런 DMC’와 ‘LL 쿨 J’를 좋아하던 소년은 마약과 무용담을 좋아하게 됐다. 낮엔 방아쇠를 당기고 밤엔 마약을 흡입하거나 ‘람보’ 같은 전쟁영화를 보며 보낸 시간은 무려 2년. 그는 “어느샌가 어린 시절이 끝나 버리고 심장도 얼어붙었다”며 소년병 시절을 회고한다. 전쟁의 상처를 더듬으면서도 천진함이 묻어 있는 문장들은 독자의 아픔을 배가시킨다. 공포스러운 기억을 불러내는 문체는 군더더기 없지만 섬세하다.

옛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찾아준 것은 유니세프였다. 유니세프는 소년병들을 막사에서 빼내 재활센터에 보냈다. 마약 중독자 이스마엘은 힘겨웠지만 재활에 성공했다. 그리고 수도 프리타운에서 삼촌을 찾아 평범한 생활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평화는 잠깐이었다. 시에라리온은 다시 반군과 일부 군인이 합작한 쿠데타로 폭행과 살인이 판을 치게 된다.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 그는 다시 사선을 넘기로 한다. 다시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홀로 이웃나라 기니의 국경으로 향한다.

그의 고백은 인간의 비이성에 대한 고발이다. 일부 내전 국가엔 아직도 소년병이 존재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의 고발은 더욱 생명력을 얻는다. 이스마엘은 현재 뉴욕의 어느 미국인 가정에 둥지를 틀었다. 고향의 ‘달 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었던 소년은 대학을 졸업한 뒤 소년병 근절을 위한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송은주 옮김. 9800원

〈서영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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