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뒷계단>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출처:<한겨레신문> 2007-05-11
문학평론가라는 자가 왜 문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한국 소설의 침체가 심각하게 운위되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적인 차원에서 일본 소설 읽기가 선풍인 것처럼 말해질 때, 그 현상에는 동의하지만, 한국 소설도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출판평론가 한기호씨의 견해를 들어보면, 위기의 원인은 명료해 보인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비평의 신뢰성 상실이다. 그간의 한국 소설 비평이 작품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덕담과 주례사로 일관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발언을 신뢰했던 독자들이, 오히려 지금 한국 소설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소설의 단편장르에의 집중현상도 위기의 한 요인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겨레>의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나 문학평론가 남진우씨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데, 한국 문단과 문학상 제도가 단편소설에 편중됨으로써,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장편소설의 미학적 혁신과 문학성이 취약해졌다는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초에 몇 차례 페이퍼로 다룬 바 있다). 설득력이 있는 견해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단편소설이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는 문예지 시장이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설 독자층의 변화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는 현재 한국의 소설 독자층은 대단히 협소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문학지망생 그룹과 20~30대의 여성 독자들은 여전히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이지만, 1970∼80년대의 소설시장의 활황을 가능하게 했던 30대 이상의 남성 독자들과 소설에서 ‘재미’ 이상의 것을 추구했던 계몽독자 또는 지식인 독자들이 대거 소설 시장에서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인 것이 소설보다는 역사 전기물과 인물평전류가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나는 ‘재미’도 중요하고,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미와 의미가 정교하게 결합된 소설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은, 베스트셀러 외국 소설들이 그간 보여주었던 문학시장의 사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한때 폭발적 독서붐을 일으켰던 쿤데라와 베르베르의 소설들, 쥐스킨트와 하루키, 그리고 에코의 소설들은 재미와 결합된 소설적 의미의 파급력을 잘 보여주었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나는 유독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는 성인남성 독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성숙한 고민을 담은 소설도 더 많이 출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시장에서 독자들의 이 압도적인 성적 불균형이 얼마간이라도 시정되기 위해서는, 소설 읽기에서 이탈한 성인남성 독자들과 계몽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일이 단지 ‘시간 때우기’의 수단만이 아니고 성숙한 인간세계에 대한 심원한 고민의 산물일 수 있다는 기대를 충족시키는 소설의 출현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독서열에 대해 치밀한 비평적 분석이 가해질 필요가 있다. 김훈의 소설들은 그가 써내려간 에세이들을 포함하여, 산다는 일의 치욕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구조화된 권력의 냉혹한 질서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력한 개인이 몰락할 것이 분명한 운명 앞에서조차, 그것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 패배를 끝없이 자기화하는 면모를 드라마틱하게 형성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훈 소설에 대한 비평가들의 무관심은 실로 기이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의 소설은 유령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