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혹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감싸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우리까지 덩달아 빨라야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면 마치 세상의 낙오자라도 된 듯한 기분인지 그저 그 스피드에 자신을 내맡기기 바쁘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영화도 우리의 시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양 '너희가 스피드를 믿느뇨'란 식의 영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대개 한 편의 버라이어티쇼를 보는 듯한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한 볼거리의 향연을 관객은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한다. 관객은 그 볼거리 밖의 공간, 이를테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거나 그것과 관계하는 사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 예컨대 『터미네이터』, 『트루라이즈』, 『다이하드』 같은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스모크』는 참 '지리멸렬한' 영화일 수 있다. 이른바 영화적 '볼거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일 수도 있는 것.

대신 『스모크』는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길거리를 거닐며 쇼윈도나 여타 거리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도 조금 전에 본 것이 뒷머리를 잡아당기면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보아도, 혹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도 되는 것처럼...

『스모크』는 이렇게 다중적인 시점을 택하면서 관객에게 프레임, 곧 영화적 공간의 앞과 뒤 그리고 위아래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원형적 과정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유하게끔 자극하는 그런 영화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스모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소비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게끔 유도한다. 이제 우리는 이 속에서 무엇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생산하기 위해선 먼저 재료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프롤로그


1990년, 뉴욕 브룩클린의 여름. 3번가의 모퉁이에 위치한 담배 가게. 14년간 이곳에서 담배를 팔아온 '오기'(하비 케이틀)와 소설가인 그의 단골 손님 '폴'(윌리엄 허트)을 축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허풍쟁이 소년 '라시드'(해롤드 페리누), 음주 운전으로 아내를 죽인후 평생 그 죄책감에 쫓겨다니는 라시드의 생부 '사일러스'(포레스트 휘태커), 옛 애인을 찾아와 애원을 하는 외눈여인 '루비'(스톡커드 캐닝), 세상의 밑바닥까지 타락한 루비의 딸 '펠리시티'(애슐리 쥬드)…. 이들은 폴과 오기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뒤엉켜 각자의 혹은 서로의 삶을 엮어나간다. 퍼즐의 한 부분을 조각조각 맞춰가듯이 이들의 이야기는 전개되며, 이렇듯 각각의 귀퉁이를 맞춰나가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것은 '인생'이다.

폴과 오기


한때는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임신한 아내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손에서 펜을 놓은 폴. 자신의 담배가게에서 한심한 동네 한량들이랑 수다나 떨며 살고 있는 오기. 그 두 사람은 가게 주인과 손님의 관계이지만 어느 날 그들은 친구가 된다. 14년 동안 한결같이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3번가 풍경을 찍어왔던 오기는 폴에게 그 앨범을 보여 준다.

“모두 같은 사진이군.”
“같아 보이지만 천천히 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네. 밝고 어두운 아침… 여름과 가을 햇살… 아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낯선 이도 있어. 낯선 이가 어느덧 이웃이 되기도 하지.

폴과 라시드


마치 꿈 속에서 사는 양 허풍을 떠는 흑인 청년 라시드는 폴을 사고의 위험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폴의 집에서 며칠 묶었다가 길을 떠난다…. 얼마후 라시드의 이모가 찾아온다.

“맨하탄의 부촌에 사는 부모한테 간다던데요.”
“완전히 혼자 소설을 썼군! 그애 이름은 토마스 제퍼슨 콜이고, 우린 빈민가에 살고 있죠. 그애 엄마는 죽었고, 생부란 작자는 지난 12년간 소식조차 없어요. 얼마전 누가 그 애비를 교외 주유소에서 봤다길래…”

라시드와 사일러스


생부를 찾아간 라시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생부의 허름한 주유소에서 일하며 그와 얘기를 나눈다. 한쪽 팔을 잃은 사일러스는 12년전 무모했던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며 살고 있다.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12년전 받은 벌이야. 신이 말씀하셨지. '네 여인은 데려가겠다. 하지만 네 놈은 살려주지. 때론 사는 게 더 큰 고통이니까.' 난 이 팔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못된 놈이었는가를 생각하지.”

루비와 오기


어느 날 오기의 담배 가게에 외눈의 여인이 찾아온다. 언뜻 보기에도 살아온 인생이 그리 평탄치 않은 모습이다. 그녀는 18년전 오기를 배신하고 떠난 루비였다.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
“설마 돈 얘긴 아니겠지.”
“우리 딸을 위한 거예요.”
“당신 딸이지 우리 딸은 아닐 걸.”

느닷없이 나타나 딸이 있었다는 루비의 말을 오기는 믿을 수 없었다. 그 애가 임신 4개월에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도…

에필로그


과거에 얽혀진 혹은 현재에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이제 한데 어울어져 멋진 인생의 단편을 만든다. 앞으로 그들의 인생 퍼즐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뒤로 미룬 채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그리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선율의 음악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단순한 소비행위가 아니어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스모크』의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담배가게 주인 오기 렌, 작가인 폴 벤자민, 벤자민을 구해주는 흑인소년 라시드, 애꾸눈 루비, 루비의 딸이자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가는 펠리시티. 이들을 한데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웨인 왕의 전작들, 곧 『딤섬』이나 『조이 럭 클럽』을 상기한다면 아무래도 그것은 '가족'(가족주의가 아닌!)의 형상이 아닐까?

영화의 겉면은 분명 거대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배여 있는 쓸쓸함과 그 쓸쓸함의 동명이인인 인간주의적 따스함에의 그리움 등으로 부드럽게 감싸여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거대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고독, 소외 등을 화두로 끄집어내고 있는 것 같다. 분명 영화는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에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소외에 관한 텍스트로 읽힐 여지를 주고 있긴하다. 하지만 『스모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상투적 텍스트 읽기가 아닐까?

등장 인물 모두가 한두 개씩 안고 있는 상처나 결핍은 대개 가족의 불안정성이나 부재에 기인한다. 또 그 상처나 결핍의 해결책은 라시드와 그의 생부 사일러스의 화해, 영화 마지막 부분의 흑백 시퀀스 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가족의 복구이다. 그렇다면 작가 웨인 왕이 생각하는 현대의 가족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웨인 왕의 전작인 『조이 럭 클럽』에서 어느 정도 그 윤곽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이 럭 클럽』의 가족은 너무나 '복고적'이다. 예컨대 『조이 럭 클럽』에서는 가족의 존재 및 정체성의 기원을 핏줄 이데올로기에 두고, 그 핏줄이데올로기를 가족공동체의 근경으로 삼고 있다. 반면에 『스모크』에서는 그러한 핏줄 이데올로기를 덜 부각시킨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관계를 생각한다면, 핏줄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이란 게 도대체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스모크』에서는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담배가게 주인인 오기 렌과 펠리시티의 관계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게 대표적인 예다. 루비와의 관계 회복에 있어 '펠리시티가 그의 딸이냐 아니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석한다면 현대인의 새로운 유대나 결연의 방식과 붕괴된 전통적 가족공동체와의 비교대목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웨인 왕이 현대의 가족관계에 대한 새로운 '모랄'을 제시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그가 일상의 편린들로 직조하듯 짜낸 따듯한 질감의 해피엔딩은 지나치게 인정적이고 위안적인 것 같다.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영화는 분명 관객들에게 가족의 문제를 새로이 되씹어 보게 하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기는 하되 작가의 시선은 결국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마지막 흑백 시퀀스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따듯한 시선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스모크』의 감동적인 장면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부분에는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노래가 흐른다. 끈끈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You are innocent when you dream" 이라는 노래가 그것인데,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탐 웨이츠'다. 70년대 초반부터 포크송으로 시작하여 전위적인 팝과 락을 구사하며 극작가, 영화배우로서도 활동한 그는 영화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영화 음악도 작곡하고 영화에도 직접 출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멋진 모습을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숏컷』, 짐 자무쉬 감독의 단편인 『커피와 시가렛』 등에서 볼 수 있다.



1987. Frank's wild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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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9-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오래전에 본 영화라서 기억도 안나는구만요. 기억나는 거라고는 하비 케이틀의 그 시니컬한 표정밖에.... 근데 그때는 저 영화를 이해하기에 내가 너무 어렸던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지금 보면 좀 달라보일까요?

내오랜꿈 2007-09-18 16:53   좋아요 0 | URL
나도 이걸 쓴 게 94년인지 95년지 헷갈린다. 당시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혼자서 2회 연속 봤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글쎄, 무엇을 얼마 만큼 어떻게 달리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의 연륜이 쌓여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맞는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