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스포츠 국가를 세우다

흉악한 전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아낌없는 후원자가 되어 서민 사이로 납시다…국가가 주도권을 장악해‘자율적 개인’이 산산조각난 사연은 한국과는 무관한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 <한겨레21> 제643호 2007/01/11


“그러면 자전거를 내일 사실 것이지요?” 2006년 9월 초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대학에 초빙 교수로 가게 된 필자가 현지에서 들은 첫 질문 중 하나였다. 후쿠오카에 도착하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은 그곳에서 노르웨이 이상으로 일상화돼 있었다. 학생들은 물론 노인들까지도 자전거와 절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자전거뿐인가? 필자의 숙소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의 실내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은 물론 외부인까지도 검도를 즐겼고, 옆의 공원에서는 동네 노인들의 야구 연습 시간이 진행됐다. 필자도 열심히 다녔던 옆 동네의 운동 시설은, 수영부터 가라테까지 온갖 종목들을 즐기려는 주민들로 붐비기만 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필자가 본 일본인들의 대중적인 체육 생활에서 ‘선진 사회’의 면모를 좀 엿볼 수 있었다.


△ 일본의 국민체육대회 같은 행사들은 피지배민을 ‘국민’으로 포섭해 독립적인 개인이나 어떤 특정 계급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율적 의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스포츠를 즐겨라, 그게 진정한 극일

물론 체육이 가장 대중화된 사회를 찾으려면, 이는 노동 시간이 무리하게 긴 일본은 아닐 것이다. 체육 활동 참여도는 프랑스에서는 74%에 달하지만 일본에서는 60%가 안 된다. 일본에 비해 양극화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한국에서는 체육 활동을 즐길 만한 여유를 가진 이들이 약 30%밖에 되지 않으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첨부할 필요가 있는가? 2002년의 월드컵을 앞두고도 각급 정부 예산의 0.16%만을 체육에 이용했던 한국에 비해서 체육 예산의 비중이 0.6%에 달하는 일본은 시민 건강이 훨씬 더 잘 배려되는 곳이지만, 노르웨이는 체육 예산의 비율이 1.6%에 달한다. 유럽 사민주의 국가에 미달하긴 하지만, 일본은 그래도 고강도의 기계적인 노동에 지친 대중의 ‘움직임 욕구’ ‘유희 욕구’를 스포츠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해주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축구에서 일본과 ‘붙기’만 하면 ‘국민 감정’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폭발되지만, 고교 축구팀 수가 한국보다 40배(!)나 많은 일본만큼 한국의 ‘고딩’들도 수능의 악몽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겨야 진정한 의미의 ‘극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농경 노동과 걷기, 승마 등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시간과 강도가 줄어드는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스포츠라는 인위적 ‘대체물’의 발전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스포츠가 어느 사회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도입되지 않고 늘 주류 지식인이나 국가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정형화·보편화된다는 것이다. 근대 스포츠가 그 모양을 갖춘 19세기의 주류 지식인과 국가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유산 계급의 대표자인 지식인들은, 많은 경우 스포츠를 팀워크 속에서 희생과 복종을 잘 익히고, 사회주의나 평화주의와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 여유가 없는 ‘건전한 신체 속의 건전한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도구로 생각했다.

스포츠의 규율화 기능에 국가도 무관심할 리 없었다. 영국에서 1880년부터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자 많은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퇴역 군인들이 고용됐다. 그들은 교련에 가까운 체육으로 남자아이들 ‘군인 만들기’에 나섰다. 보수적 관료, 귀족들의 비호를 받았던 ‘남아훈련협회’(Lads’ Drill Association)라는 어용 체육 단체의 대표자인 미드 경이 1907년 아예 교련을 각급 학교에서 의무화해 국회에서 노동당과 자유당에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의 본고장이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도 체육에 이와 같은 ‘그늘’이 따라다녔다면 권위주의적 근대화를 단행해온 일본은 과연 어땠는가? 천황제 국가를 빼면 일본 체육의 역사를 진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 ‘이미지 세탁’이라 할까? 히로히토는 군국 일본의 수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1945년 직후에는 서민적이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1940년대 후반의 일본. 맥아더 장군 등 미국 보수파의 도움으로 천황제가 패전 이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을 띤 신”(아라히토가미·現人神)이 아니라고 ‘인간 선언’한 히로히토는 수많은 진보파들에게 흉악한 전범으로만 인식됐다. 흔들린 황실의 권위를 어떻게 복원시키는가? 히로히토는 스포츠야말로 ‘국민의 상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국민 통합’ 방책이라 판단하고, 아낌없이 ‘국민적 스포츠 후원자’의 이미지 만들기에 투자를 했다. ‘국민적 단결’을 목적으로 1946년부터 일본체육협회가 ‘국민체육대회’(속칭 ‘국대’)라는 전국적인 아마추어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했는데, 그 제3회부터 종합적으로 가장 많은 우승자들을 낸 지방에 ‘천황배(杯)’가, 그리고 가장 많은 여성 우승자를 낸 지방에 ‘황후배(杯)’가 각각 ‘하사’되기 시작했다.

땀과 환성을 정치적으로 계산하다

천황이 상금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제4회의 ‘국대’부터 친히 관람해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전범 중의 전범이었던 히로히토가 이제는 ‘평화로운 스포츠 애호가’로서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국내외에 과시했다. 국대뿐만 아니라 동서대항 축구대회와 전국 연식 야구대회, 도쿄 육(六) 대학의 야구리그나 전국 농구대회 등 1940년대 후반의 주된 스포츠 이벤트에 ‘천황의 친람(親覽)’과 ‘천황배’ 또는 각종 황족들의 상패 ‘하사’와 같은 ‘특전’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그 당시 사진들을 보면, 관중은 천황과 황후를 향해 그야말로 외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1945년 이전에 특별한 제단에 봉안된 사진으로만 ‘뵈올 수’ 있었던 ‘그분’이 이렇게 ‘서민적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시민 사이로 다가오자 “과연 나의 가족이 왜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느냐”는 질문을 하려는 마음이 절로 녹는 것이었다.

1958년에 일본이 아시아경기대회를 도쿄에서 개최한 것은, 경제가 부흥한 새로운 위상을 과시해 올림픽 유치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때에 1964년의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1960년 6월에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격렬한 데모에 30만 명 이상이 나서는 등 그 당시 일본은 갈등투성이의 사회였지만 도쿄 올림픽은 국내외에 경제 부흥으로 윤택해진 일본 생활의 ‘다테마에’(建前·실제와 크게 다를 수 있는 표면적 모습)를 과시함으로써 알게 모르게 보수 쪽의 입장을 강화했다. 선수들이 흘리는 땀, 관객이 보내는 환성에 국가가 계산적으로 정치적 투자를 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대중적 스포츠는 천황의 사진을 ‘멋있게’ 걸어놓을 수 있는 신흥 부국 일본의 ‘쇼윈도’이자 토건 국가의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1945년 이전 스포츠는 무엇보다 군국주의적·천황주의적 세뇌의 장으로 전폭적으로 이용됐다. 1885년부터 일본 학교의 체육이 기존의 경(輕)체조 위주에서 병식 체조 위주로 바뀌었는데, 1913년 문부성의 훈령으로 학교 병식 체조는 교련의 요소를 내포하게 됐다. 모든 남학생들에게 군사 교육을 하려는 영국 보수주의자들의 열망은, 바로 일본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1931년부터 학교에서 체조와 교련에다 검도나 유도를 의무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강인하고 건전한 심신의 선량한 황민’을 만들기 위해 위로부터 보급됐다가 일제 패망 이후 ‘군국주의적 스포츠’로서 금지됐던 유도가 1964년 도쿄에서 올림픽 종목으로 화려한 ‘컴백’을 이루었을 때에, 기쁨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를 보도했던 기자들이 과연 이 스포츠의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의식하기나 했을까?

‘스포츠가 문명인의 필수’라는 관념은, 국가가 1924년 ‘명치절’(明治節·메이지 천황의 탄생기념일, 11월3일)을 ‘국민체육의 날’로 선포해 ‘불온사상 전염 방지’의 의미에서 모든 학교에서 그 날을 기해 대대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총리 유의 정객들이 그렇게도 좋아한다는 ‘애국 교육’의 원형은, ‘스포츠열’을 통해 ‘딴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고 전쟁과 노동에 쓸 만한 단단한 몸, 명령 듣기에 익숙해진 굳은 뇌를 만드는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이었다.

애국 교육의 원형은 1920~30년대의 스포츠 진흥

스포츠란 개인이 심신을 스스로 ‘개조’해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인 규율성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여가 활동이다. 따라서 스포츠에서의 주도권을 국가와 자본이 장악할 경우, ‘자율적 개인’이라는 또 하나의 근대적인 꿈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이는 과연 역대 권위주의 정권에 이용돼온 한국 스포츠와 무관한 이야기인가? 과연 군부에 의해서 태권도가 만들어지고 보급됐던 것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유도의 창설과 보급의 동기와 그렇게 달랐는가? 과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학교 체육 수업의 형태는, 일본이 1880년대 후반부터 진행해온 군사주의적 훈육을 많이 벗어났던가? 그리고 최근의 월드컵까지 각종 스포츠 이벤트의 관(官) 쪽 이용 형태는, 1940년대 후반에 히로히토가 벌였던 ‘쇼’들과 과연 달랐던가? 일본이란 거울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1. <スポ-ツと政治> 사카우에 야수히로(坂上康博), 東京: 山川出版社, 2001.
2. <戰後日本のスポ-ツ政策: その構造と展開> 세키 하루나미(?春南), 東京: 大修館書店, 1997.
3. ‘2002년 월드컵과 스포츠 문화’(<경제와 사회> 제54호, 2002년 여름, 35∼57쪽), 안민석
4. J. A. Mangan, Viking, Harmondsworth, 1986.

--------------------------------------------------------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인에게서 천황이란 자기네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천황에게 열광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직후 천황의 존재를 알리는 <어론서(御論書)>나 <인민고론>등이 나오고 이를 각 현에 보급시켜 교육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정확하게 표현하면 하급 무사들의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산죠 사네토미 등이 이른바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높은 신분인 다이묘를 억누르기 위해 천황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곧 메이지 유신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정책에 불과한 게 오늘날 일본의 근대천황제라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가리야 데쓰의 <일본인과 천황>의 핵심 주제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상과 같다. 다 읽고 나면 여러 가지로 쓸 게 많은 책 같은데, 일본 내에서도 천황제를 건드리는 문제제기가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천황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각 조직의 '두목'들이 밀실에 모여 앉아 각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각을 구성하고 차기 총리를 결정하는 지금의 일본정치는 변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건 곧 아직 일본에 진정한 주권 민주주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보적 지식을 억누르는 하나의 멍에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베 이후에 누가 일본 총리가 되었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