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또 한국은 세계에서 최단기간에 가장 많은 건축물을 만들어낸 도시와 나라의 하나일 것이다. 거기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소위 압축 성장은 새로운 시설물을 끊임없이 요구하였고,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도시 이동은 도시 주거 문제를 가장 큰 사회문제의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산업화가 일정한 단계에 이른 지금에도 건축은 계속되고 있고 파고 부수고 쏟아 붓고 하는 건축 작업의 소란함은 세계의 다른 도시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상 환경의 일부가 되어 있다.
-기능 벗어난 건축물의 번창-
의식주라는 말은 최소한도의 생존 조건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주’도 최소한의 주거 요건을 의미할 것이다. 해방 후 그리고 근대화가 시작된 1980년대부터 서울에 지어진 집들이 대체로 이 최소한도의 요건을 채우는 종류의 건조물이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연발생적인 판자촌이 그 대표적인 예겠지만, 60년대 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와 같은 것도 도시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주거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건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가 향상된 다음에도 이러한 기능주의적 건축물은 오랫동안 우리의 주된 건축의 형태였다. 그러다가 반드시 긴급한 필요에 답하는 것이 아닌 건축물--치장을 하고 모양을 낸 건축물들을 짓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제 비로소 단순한 필요나 쓸모를 넘어서서 그 아름다운 모양으로 우리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하고 다음 세대들을 위한 좋은 유산이 될 만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전통적으로 좋은 산수가 좋은 인물을 낳는다는 생각이 있다. 사람의 심성이 환경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조절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풍수에 대한 생각은 이것을 더 심화하여 좋은 풍경이 심성에 항구적인 정향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도시 환경에서 나고 자라는 것이 일반화됨에 따라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단순히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 환경을 정비하고 도시 건축물을 아름답게 짓는 일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사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쓸모 이상의 것을 생각하면서 짓는 최근의 건물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참으로 만족할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필요에 의하여 짓게 되는 건조물은 그것이 설사 아름답지 않더라도 받아들여야 할 삶의 조건이지만, 아름다움을 표방하면서 아름답지 않은 건물을 짓는 것은 헛된 일에 노력과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다. 더 직접적으로, 최근에 건조되는 건축물들은 많은 경우 공적 자금으로 지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건물의 남조(濫造)는 국고의 남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건조물들은 대체로 도시 개발이나 지역 개발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전 지역을 추하게 하고 또 황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새로 짓는 건물들은 많은 경우 보통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거대하고 기괴한 디자인을 자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도 그렇지만, 지방에서 그것은 더욱 흉물스러운 표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건조물이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문화를 드높이는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건조물들을 보면, 소박하게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최소한의 것을 만드는 데에 만족했던 시대가 그리워진다.
20세기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었던 것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이었다. 건축은 과장된 장식을 배제하고 실용적 목적과 기술적 요구에 맞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 따르면, 쓸모는 쓸모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의 요소이다. 이것을 큰 효과를 가지고 처음 실천한 것은 19세기 후반 시카고에 철강조 콘크리트의 실용적 고층 빌딩들을 세운 루이스 설리번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건축가들--가령,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등이 20세기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아파트를 “삶을 위한 기계”라고 말한 코르뷔지에의 생각에도 그러한 기능주의가 들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형태와 기능의 일치를 기한다고 하여 그것이 간단한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쓸모와 함께 아름다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하다. 서울을 비롯하여 한국의 도처에 솟아있는 아파트들에 어떤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형상과 기능의 일치를 원리로 받드는 ‘국제적 현대 스타일’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다만 우리 건물에서 동기로 작용한 것은 심미적인 고려보다도 그 단순성이 주는 비용 절감이었을 것이다. 기능주의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은 그 형식의 기하학적 단순성과 공간적 구조의 명증성에서 온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기능적 건물들에 가장 부족한 것이 기하학적 공간의 명증성이다. 금싸라기 토지에 기하학을 위한 공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건축물들의 문제는 그보다도 우리가 공간과 삶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지 않나 한다. 서울에서도 그렇지만, 지방에 가면 토지나 건물의 크기나 모양에 있어서 기능에 대한 고려는 물론 비용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거대 공공건물들이 많다. 조형물에 있어서의 형식과 기능의 일치를 말한 미학 이론의 계보는 19세기 초의 미국의 조각가 호레이쇼 그리노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는 건물의 모양과 크기가 기능에 맞아야 된다는 것과 함께 대지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주로 공공건물들을 두고 말한 것이지만, 건물과 토지 사이에 유기적 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새로 지은 거대 건물들의 경우, 문제는 그 과장된 형태에 못지않게 건물과 토지 그리고 공동체와의 부조화에 있다.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들어서고 있는 건조물들의 어떤 것은 그 자체로는 볼 만하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주변과 함께 본다면, 그것은 저절로 추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동시에 주변의 건물과 촌락을 추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부조화의 극대화에 기여하는 것이 각종의 신도시 계획이다. 이 계획들은 기존의 동네나 촌락과 대조되는 새로운 거리를 조성하여 그 곁에 웅크리고 있는 옛 거리들을 초라한 것이 되게 한다. 기존의 주거지나 작업지는 이 새로운 테마파크의 건설을 위한, 지나치게 넓고 많은 도로를 비롯한 여러 인프라 건설로부터 그 일체성에 상처를 입게 된다.
-주변 건물·동네 추물로 전락-
이러한 국토 개발 계획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참으로 사람의 삶의 기능에 봉사하는 것인가, 그리고 공동체와 사람들과 거리의 내적 필요로부터 발전하여 나오는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건축의 기능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들어 있는 도덕주의를 지적한다. 그리고 탈현대주의자들은 그 도덕주의적 억압성을 말한다. 그러나 토지와의 부조화로 저절로 키치(kitsch)가 되는 건조물들을 보면, 건축과 토지의 개발에서 도덕은 미학의 일부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건축에도 참된 것이 있고 거짓이 있다. 키치란 삶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건축물이다.
기능을 벗어난 건조물의 번창은 대개는 공공 개발정책과 수익을 추구하는 돈의 산물인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도, 그것이 어떤 정부이든지 간에, 이러한 국토 개발의 흐름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삶의 내용을 떠난 장식과 판타지--기능을 떠난 형태의 키치를 사회와 문화 발달의 표지로 생각하는 데에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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