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농담 -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마크 S. 브룸버그 지음, 김아림 옮김 / 알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 괴물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의 ‘농담’은 단도직입적으로 ‘기형’이고 ‘괴물’을 말한다. 라틴어로 두 다리가 없는 염소로 태어났지만 그런대로 걷게 된 동물을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 자연의 농담이라고 불렀다. 괴물이라는 단어도 라틴어로 ‘경고하다’라는 뜻인 모네레(monere)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농담 중에서도 가장 뼈있는 자연의 농담은 경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인간에 경고하는 신호라 보아도 좋을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반인에게 기형은 불행이고 비극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과학자에게 기형은 ‘선물’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유별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생명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자가 말하는 농담이 모두의 불행이 아닌 행운의 기회가 되길 바라는 책이다.

 

사전적 의미로 전형(典型)은 모범이 되는 본보기이며 이형(異型)은 보통과 다른 모양이고, 기형(畸形)은 보통과 다르면서 비정상적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전형과 기형 사이에 이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어떠한 변이를 일으켜 이형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오답인 이유는 전형이 정답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오히려 이형이야 말로 진화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의미하지 않느냐 질문한다. 전형이라는 고정관념이 완성과 미완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선택의 편견을 낳게 되는 건 아닌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착화하는 것은 아닌지 제고해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괴물을 만드는 발생적 메커니즘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서 다양한 종류의 발생적 이형이 왜 다양한 괴물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기형이 유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그 바탕에는 진화와 DNA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찍이 위대한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다른 많은 학문 영역들은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 p. 20,  최재천 <다윈지능> 中에서

 

저자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자연이 완벽하며 더불어 진화론도 완벽한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설계와 조절 및 통제능력을 갖고 있어 동물이 조립되어 가는 설계도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DNA를 잘 계획된 프로그램이나 조리법, 청사진 등으로 은유하고 발생적 이형은 돌연변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는 급작스런 사건으로 치부한다. 통섭학자 최재천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보잘 것 없는 DNA라는 화학물질이 단세포생물을 거쳐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살아남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니며 내 생명의 주인은 꼭 나만 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도킨스는 끊임없이 그 명맥을 이어온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른다. 이 완벽해 보이는 이론은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듯이 공존, 공생의 개념을 떠올리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관점에서만 재해석한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이형의 발생, 이어지는 기형이라는 판단의 소용돌이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각기 다른 자세로 소변을 보는 것은 본능인가 유전인가 학습인가. 신체적 형태가 달라 다른 행동이 나타나는 차이는 유전적 행동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평범한 외부요소의 상호 영향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뇌에 유전적으로 배선된, 계획적으로 특성화된 행동 유전자와 연결 짓고 싶어 한다. 발가락이 네 개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발가락 네 개 유전자로 기형이 된 것이 아니다. 발가락 갯수는 사지가 처음 자라나는 뿌리인 사지싹의 발생과정과 크기와 관련이 있다. 괴물 같은 팔다리 기형이 가장 빈번한 동물은 양서류인데 이들은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에 팔다리 기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과성이 용이한 피부특질과 표피 없는 알의 특성 때문에 배아가 이루어 질 때 환경적 요소가 보다 쉽게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팔다리 없는 양서류가 많이 출현한다면 환경의 오염도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딱정벌레의 경우도 뿔이 크면 혼자서 공급하는 똥이 많기 때문에 유충이 더 잘 자라게 도움을 준다. 결과적으로 몸집이 큰 아비 밑에 큰 새끼가 자라나게 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가 진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발생을 특징짓는 상호작용의 속성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유전과 DNA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후세에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것도 유전이요, 더 나쁜 쪽으로 대물림 된 것도 유전이라는 식이다.

 

저자는 DNA를 모든 발생을 위해 원료제공을 돕는 분자 정도로 인식해야지 통제 가능한 만능 프로그램으로 인식하지 말라 충고한다. 이 책은 불완전한 자연과 그 속에서의 진화보다는 발생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전통적인 다윈주의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유전자 중심적의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유전적으로 예정된 산물보다 발생적인 과정에 더 집중하는 후성설을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과학적인 평가는 전문영역이겠지만 DNA 만능이론에 안주하던 독자들에겐 의미 있는 반론인 듯하다. 무엇보다 기형이 유전이 아닌 발생의 문제라면 괴물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공동으로 인식해야 할 인재일수 있으며, 어쩌면 괴물이 괴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쩌다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괴물은 그다지 운명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린 괴물을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2. 괴물은 인간인가 초능력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산모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이미지는 흉측한 기형아의 모습이 많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기형아들을 티베르강에 익사시켰다고 한다. 산모는 한번쯤 자신의 태아가 기형아인 꿈을 꾼다고 한다. 만약 태아가 기형이라는 결과를 받았다면 충분히 낙태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이 아닌 것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심경은 이해가지만 정상이 아닌 이유가 곧 죽거나 불행해야 할 조건인가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알려준 외눈증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정상의 경우는 외눈증과 두얼굴 증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경우의 수 일 뿐이다. 새로운 형태라고 무조건 돌연변이라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싶어진다. 정상인 얼굴이 더 완성된 것이고 더 완벽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면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 손을 들고 싶다. 외눈증이 비정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전형의 관점에서 다르게 생긴 이형일 뿐이다. 이러한 발생적 이형은 배아 초기에 가해진 어떤 원인에 의해 드러난 복잡한 발생의 연쇄적 산물일 뿐 신적인 유기체가 있어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계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머리 하나를 생성하는 가능성을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연히 머리 두 개의 가능성이 진화한 것이라 부연한다. 머리가 하나일 확률이 많아지면 마찬가지로 머리가 두 개일 확률도 많아진다는 것이 진화론에 입각한 논리 일 것이다.

 



 

- 외눈증에서 정상적 형태를 거쳐 두얼굴증에 이르는 와일더의 전체 '코스모비아'계열.
두얼굴증 너머에는 두머리증이 보임. 두머리증은 두얼굴증이 심화된 형태가 아니라 결합쌍둥이의 변형된 형태 -

 


저자는 이처럼 난자가 수정된 직후의 초기 배아에서 일어난 ‘무차별적 순간’, ‘최고의 순간’을 기형을 유발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은 “무언가 중요한 발생학적 단계가 빠르게 진행 중이거나 빠른 변화로 막 진입할 예정이어서 특정한 부분의 발생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p 80

 

역으로 이 시점에 수많은 환경적 조작을 가함으로서 다양한 기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점에 환경적 손상을 입히면 어떤 특정 기관의 발생도 괴물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병아리 배아단계에서 온도나 화학처리 같은 부화환경을 조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한다. 어떤 종은 온도를 달리할 경우 성별이 달라지는 것도 있다. 따라서 진화와 발생은 분리 될 수 없으며 어떤 기형도 유전이나 환경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발생 메커니즘을 알면 진화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무엇도 정해진 발생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는 곧 괴물로 정해질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괴물일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괴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생에서의 실패자일 뿐이다. 무차별적인 괴물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 좋게(?) 괴물이 된 후엔 어떻게 생이 달라질까.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두 팔로도 걷기를 배우고 다리를 두 개만 가지고 태어난 염소는 절룩거리며 두 다리로만 걷기를 습득한다. 기형이 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정상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구이지만 생애초기부터 두뇌는 새롭게 조직화되고 사지가 없는 신체에 연관된 행동적 적응을 포함한 특별한 발생 경로를 겪기 때문에 외려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팔로도 잘 걸어 다니고 세심한 동작을 해낼 수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두뇌의 조직화를 통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게 되는 보상작용이 이루어진다.(장님이지만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정상인 보다 더 발달한 이유가 대뇌피질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달리기나 수영하기 같은 움직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이는 타고난 능력이 아니고 신체 각 부분 발생적 대화와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생명체에 있어 발생의 각 단계는 여러 선택의 나열로 구성될 뿐 최후의 완성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의도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삶의 단계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스스로 발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절대로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유전적으로 조절되는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제 괴물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부족한 조건으로도 자기 발전을 이루었으니 우리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인 것은 아닐까.

 

3. 괴물은 친구인가 적인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선과 악, 유전자와 환경,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의 구분이 익숙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적 모호함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단성unisexual, 간성, 다중성multisexual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성별이 남성과 여성만 존재해야 한다는 시각은 자연이 어떠해야 한다는 인간이 만든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동성결혼' 찬성의 입장을 밝힌후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오바마를 떠올렸다. 등을 돌린건 우파 여성이었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성별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새삼 궁금하다) 환경에 따라 성전환이 가능한 열대어의 사례는 충격적이기 보다 부러웠달까. 저자는 인간과 동물계에 존재하는 가지각색의 성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모호한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나 사회의 관점으로 일방적인 수술을 하기 보다는 아이의 성정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보았듯이 태어난 직후 시행한 성 재지정 시술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의 결정에 더 이성적이고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충고가 선뜻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이형이나 기형이 그 전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후성유전학적인 관점으로 발생기간에 형태와 기능이 상호작용한다는 인식은 신선하고도 인상적이다. 기형에 대한 동질감까지는 아직 이지만 적어도 혐오나 공포감은 많이 사그라든 느낌이다. 자연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 놀라울 수 없다’는 저자의 깨달음이 새삼 자연 앞에 숙연해지는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은 괴물을 만든 적이 없지만 인간만이 인간을 괴물이라 부른다. 인간이 괴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괴물이 아닌 것에 감사한 적이 있을까. 살아가면서 실은 괴물이 아니었던 사람이 더 괴물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신체가 멀쩡하다고 해서 꼭 정신도 같이 정상이라는 법은 없다. 대개 정신적 괴물은 신체가 정상인 사람에게 더 빈번한 후천적 발생과정인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어차피 괴물은 서로에게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일 수밖에 없으며 누가 누구의 조연이 아닌 각자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 우리 자신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겠다.

 

우리는 수많은 부분과 과정의 총합이며 생식기의 성장을 촉진하고 두뇌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생식선, 호르몬분비 간 연쇄효과의 산물이다. 이 모든 요소가 협력해 거울 앞에 보이는 우리 자신을 만든다. 게다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궁극적으로는 가족과 문화 안에서, 시대 속 개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거울에는 단 한 명의 모습만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셈이다. -p 212

 

우리는 지금 나 아닌 괴물, 그리고 옛날에 나 일수도 있었던 괴물, 앞으로 나 일지도 모를 괴물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 존재이다. 괴물은 곧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괴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므로 괴물이 아니라 좋아할 것도 괴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다. 괴물이 아니라면 괴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괴물이라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공평하다. 농담은 아마 우리 모두가 괴물이기도 하고 또 모두가 괴물이 아니기도 하다는 괴물 같지만 괴담은 아닌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지금 잠시 어떤 이유로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다. 인간은 괴물이 될 가능성과 괴물로 변할 잠재력을 이 세상 어느 존재보다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만이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한번만 손가락질을 해보자.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의심할 수 없는 괴물을 향한 것이라면 그 방향은 아마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괴물의 얼굴은 아닐까. 그때라면 지금처럼 웃으며 농담이라 말할 순 없지 않을까.

 

 

 

 

 

* 이 리뷰는 yes 24와 조선일보에 먼저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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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1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적 이형 혹은 기형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허약한 사람들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망케해야 한다고 주장 하던 플라톤과 그의 시대보다
현대는 좀더 포용적인 개념의 시대에 와있어보입니다.

또,
말씀해주신 정신적 이기형은 그 수가 더욱 증가하는 듯 합니다만...
오늘은 저의 손가락을 거울을 향해 한 번 찔러보겠습니다 ㅠ.ㅠ
이거...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는걸요 ㅡㅠㅡ.

차트랑 2012-05-19 16:44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시니 기억이 납니다.
언제나 페이퍼를 써놓고도 잊고 있었더군요 ㅠ.ㅠ.
그것도 물과 얼마전에 말입니다 ㅠ.ㅠ

자연의 농담이 농담이 아닌가 봅니다요.
재미있는 책이라구요..?
그럴 것 같아요..그것도 아주아주..

 

 

 

#1.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과학자가 꿈이다. 어쩌면 저렇게 나와 틀릴까, 나는 아이를 보며 매번 놀라곤 한다. 유치원 시절 과학관련 전시관에 많이 데리고 다니긴 했다. 일학년 때 어느 과학관에서 행사하던 과학 잡지를 6학년인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는 유일한 책은 ‘내일은 실험왕’이다. 기타 추리소설에 열광하고 영어도 특히 사이언스 과목 선생님들과 친분이 깊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시작된 의학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최근 ‘싸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주말 예능 할 시간에 EBS에서 하는 건강, 생로병사, 암, 한국인의 밥상 같은 다큐멘타리를 스스로 챙겨본다. 책상에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리 드라이버, 펜치, 망치, 기타 알 수 없는 종류의 공구들이 박스로 가득하다. 여섯 살 때 잠긴 안방 문을 옷핀으로 열었다. 그래서 손에 맨날 상처투성이다. 욕실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 슬그머니 열어보면 샴푸와 린스를 비율에 맞춰 실험용기에 자기 스타일대로 섞고 있다. 향수도 섞고 화장품도 섞고 음식도 섞고 도대체 왜 섞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섞어 본다. 요즘도 재활용쓰레기를 제발 버리지 말라고 다 쓸 때가 있다고 해서 매주 월요일이 되면 실갱이가 벌어진다. 스티로폴이나 페트병은 망치기 좋은 실험재료이기 때문이다.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아이와 추상적, 은유적 대화를 선호하는 엄마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나는 과학을 제일 싫어했다. 생물과 화학은 거의 암기과목이어서 그런대로 잘했지만 물리와 지구과학은 정말 싫었다. 달과 별과 해가 왜 뜨고 지는지 나는 그런 게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계절이 왜 바뀌고 무지개는 왜 뜨고 지진은 왜 일어나는지 세상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참으로 무심했다. (달을보며 아이는 저 달이 상현달이지? 묻지만 나는 그저 반달일 뿐이다.) 그렇게 공부고 일이고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무슨 악연인지 사회에 나와서는 과학관 사업만 계속 맡게 되었다. 하필 전공이 과학교육을 어떻게 하면 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를 수 있나, 그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지개의 원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면 사람들이 더 빨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까, 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방식으론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학 선진국에 나가보면 우리처럼 어렵고 재미없게 과학을 가르치는 나라도 드물다.

 

과학 공부를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도대체 왜 자신들이 이해하는 현상을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까 궁금해 한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라 말한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설명을 안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겐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천재에 가까울수록 설명은 바보 수준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분명 잘 가르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러나 잘 가르치는 재능을 타고 났다 해서 그 사람이 꼭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얄궂은 운명인가 보다. 나는 많이 알면서도 아주 쉽고 재미나게 가르치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일단은 내가 정확하게 알아야 가르치는 방법도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사회에서 가끔 그런 분을 만나면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는데 과학관 일을 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최재천 교수였다.(나는 최재천 교수야 말로 마법사라 생각하는데 아이가 닮았으면 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욕심이 너무 큰 것일까) 당시 최교수는 서울대에 재직중이었고 지금처럼 유명하진 않았다. 문과냐 이과냐 하는 이분법에 익숙했던 나로선 문학적 수사가 가득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분이 과학자인가 작가인가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왜 산에 나무가 있어야 하는지를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스토리텔링기법을 구사하셨다. ‘지속가능한 생태계’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결론이 구체적인 영상으로 표현되려면 과학적 지식 외에 특별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상상력은 과학만 잘해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다른 무엇을 보았고 들었고 읽었고 해보았기 때문에 떠올려지는 2차적인 사고의 영역이다. 그때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이분은 무언가를 엄청나게 많이 보고 읽은 분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놀라운 분이 자신의 책에서 다른 책을 이야기 할 때 꼭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인물이 바로 리처드 도킨스 이다. 최재천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최재천 교수 덕분에 그 책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재해석하는 책이라는 사실만 여러 번 확인한 독자가 되었다.

 

 

 

 

 

 

 

 

 

#2. 과학이 가슴뛰는, 마법이야

 

 

그런데 나는 정작 필독서를 들지 못하고 신간을 펼쳐들었다. 각 분야에서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그들을 모두 거슬러 올라가기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땐 지금 출간된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다음에 또 이 책을 보아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과학을 떠올릴 때 누구나 쉽게 하게 되는 아주 오래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대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생을 고민할 때 인간은 왜 죽어야 하나,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되듯. 이 책에 가장 끌렸던 이유도 바로 목차 때문이다.

 

저자는 현실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태양이란 무엇이며, 세상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왜 나쁜 일은 일어나며, 기적이란 가능 한 것인지 같은 아주 원초적인 질문들로 이 책을 구성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장마다 화려한 일러스트와 함께 이야기 초두에 신화나 전설을 알려준 다음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진짜 마법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저자는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 즉 현실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이 경이로운 현실이라는 마법의 세계를 강조하기 위해 데이브 매킨의 일러스트는 무척 효과적이다. 사실 일러스트는 비과학적인 예술의 영역이고 이 책에서는 특히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은 현실에 대한 소중함 보다는 현실 너머, 혹은 말도 안되는 환타지의 세계로 우리의 영감을 이동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의 효과가 3:7로 보인다. 내용은 고교 수준인데 그림은 유치원수준도 많으므로 아이들에게 이해가 안 되면 그림만 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판본과 그림 때문에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인데 이 부분은 서점에서 그림을 넘겨보고 결정해도 좋을 것 같다. 기타 과학교육에 곤란을 느끼는 학부모 외에 이차원적인 내용을 3차원적으로 연출하거나 공간화가 필요한 분들도 유용할 듯 하다.

 

인상 깊었던 그림을 하나만 소개하면 진화와 약간 비슷한 개념의 생명창조 신화를 표현한 그림이다. 가장 가운데 곤충의 세계인 붉은 세상이 있고, 이 곤충들이 기어 올라와 푸른 세계의 새가 되고, 새와 곤충들이 다음 노란 세계로 올라와 보니 그곳에 다른 포유류가 살고 있다. 모든 동물이 마지막 네 번째 세계로 올라오니 그곳에 낮과 밤이 있는 흑백의 세계가 있더라, 하는 생물의 다양성을 말해주는 그림이다. 생물의 다양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그림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나뭇가지 계통도가 아니던가) 이 평면적인 그림을 입체화, 영상화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공간연출이 떠올려지지 않는가.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생명창조' 신화 (56p) -

 

이 책의 결론을 말하기 위해 마지막 장은 ‘기적이란 무엇일까’ 를 질문한다. 저자는 기적을 옹호하지 않기 위해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가 데이비드 흄의 문장을 인용했다.

어떤 기적에 대한 증언이 그것이 확증하려고 하는 사실보다 그것의 반증이 더 기적적인 종류가 아닌 이상, 어떤 증언도 기적을 확증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254 p

 

예를 들어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을 보았다는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친구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 그 기적적인 일을 믿을까 말까 한다고 치자.

 

“나는 친구를 맹세코 신뢰해. 친구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친구가 거짓말을 한번이라도 한다면 그건 기적이지.” 라고 말했다면 흄은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

 

“친구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아무리 낮은들, 친구가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기적일 가능성보다 더 낮을까?”

 

친구가 거짓말을 하는 일이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하는 일보다 덜 기적적이라면 우리는 친구가 거짓말을 한다는 설명을 선호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흄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았다.(그러니까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할 수도 있다 ㅋ) 대신 기적을 개연성 낮은 사건으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기적이라고 주장되는 사건의 개연성을 모종의 잣대에 올려 놓을 수 있다면 환각이나 거짓말 같은 터무니 없는 일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불성실한 자세라 말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엔 컴퓨터나 휴대전화 같은 기술이 초자연적인 마법의 현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그러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 함은 우리는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창 고민하는 중이고 앞으로 더 관찰하고 연구하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야 한다는 것. 쉽게 말해 평생가도 겪지 못할 확률의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위화 시키는 환상에 의지하지 말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으라는 충고인 것이다.

 

#3. 종교가 가슴 뛰게 하는, 마법이지

 

 

하지만 기적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은 무용하니 과학적으로만 사고하자, 내 아이에게 그렇게만 주지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종교적 해답이지만 나는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도 상반되는 대답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꼭 리처드 도킨스라는 과학자의 질문을 종교적인 버전으로 변환한 내용 같다. 리처드 도킨스의 질문과 겹쳐지는 질문이 꽤 있다.(언제부터 세상이 생겼는가,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기적은 가능한 것인가 등) 하지만 답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살다보면 처음엔 과학문명의 분명한 혜택에 놀라다가도 곧 그것의 냉정함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다음의 기술을 좇아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꼭 마지막 해답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의 터무니 없는 환타지나 미신의 비과학적인 논리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쩐지 현실 너머에 초현실적인 마법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한번은 죽게 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끝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건 없건 신이 존재하건 하지 않건 그런 생각과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학자의 질문이나 종교인의 질문이나 모두 궁극의 리스트에 가까운데 우리는 그들의 영역을 피해갈만큼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동엽 신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과학과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는 학부모로서 다음의 대답을 기억해 놓으려 한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맞고 차동엽 신부가 틀리고(혹은 그 반대이고) 하는 정답 가리기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분야를 말할 때 그것이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종교인이라면 종교는 마법이요, 문학인이라면 문학이 마법이다. 과학도 마법이고 예술도 마법이고 음악, 미술, 철학, 건축, 역사, 모두모두 가장 진실한 마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것을 평생 즐기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었을 것인가. 마법이 되는 논리는 그 분야 전문가라면 전문가의 수 만큼 다양할 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저자만큼 다양한 마법 중에 어떠한 마법을 우리 현실의 답으로 택할 것인가 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마법을 가장 근접한 삶의 해답으로 제시해줄 것인가 이다. 한가지 마법만 가르쳐 준다면 마법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법의 종류가 많다면 아이들도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과학적 증명이 가능한 현상과 그로 이루어진 충분한 현실도 마법의 세계이고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기적 같은 우연으로 생명을 건진 신앙의 힘도 마법의 세계이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배운 사람들이 더 무당굿을 찾아 엄청난 돈을 쓰는 것도 마법의 세상이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마술사의 속임수도 그 순간엔 마법의 무대이다.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도 강력한 마법의 상상력을 불러온다. 세상은 한 가지 방법의 마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저마다 마법이라 믿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다 구경하고 그 중에서 자신만의 마법을 찾는 일은 어쩌면 모든 마법을 거부하고 곧 자신이 마법이 되는 일은 아닐까 싶다. 어떤 분야이건 그 분야의 마법사가 되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마법을 찾아라가 아닌 네가 마법이 되어라, 바로 네 자신이 마법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우린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지.

 

물론 우리 자신은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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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1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리처드 도킨스..저거 표지.. 진짜 잼없게 생겼어요! 추천이예요, 한사람님? 책값이 비싸서 실물을 보고 싶어요, 인문서는 이상하게ㅋㅋㅋ

cyrus 2012-05-17 16:46   좋아요 0 | URL
저도 추천이요!! 오늘 학교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방금 빌렸어요.
판형이 조금은 크고요, 생각보다 그림이 많아요 ㅎㅎㅎㅎㅎ
 

 

 

 

 

오늘은 스승의 날. 아이는 어제 밤늦게 까지 예쁘게 꽃을 만들어 학교를 가더군요. 좋아하는 학원 선생님도 드려야 한다면서 옷도 신경 써서 입었습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학부모들의 선물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많아 선생님 선물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어졌어요. 그래서 일까요...

 

 

아이가 아닌 나의 선생님이 생각나더군요. 학교 때 그분들이 생각나 홈피를 기웃거려보니 세상에 아직도 교편을 잡고 계시더군요. 저 다닐 때 선생님이 지금 교장, 교감 선생님이 되셨고 국, 영, 수, 생물, 음악, 한문 등 당시 선생님들이 아직도 계시다는걸 알았습니다. 벌써 고인이 되신 분도 계셔서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이었습니다. 25년 전에 지금의 저보다 젊었던 선생님들이 이제 초로의 신사가 되셨고 그 사이 나는 이렇게 나이들었구나 싶어 새삼 울컥했습니다.

 

 

같은 반이었던 동창생중 한 명(같은 중고등학교,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온 친구입니다)이 얼마 전에 하필 저 읽는 신문에 커다랗게 사진까지 함께 기사화 되었죠. 엄청난 성공과 부를 거머진 비결에 대해 특집으로 다룬 기사였는데 그날은 서재에 사과글을 올리던 날이었습니다. 내가 잘 알던 친구의 성공을 기뻐하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추락해 있는 제 자신이 한심해 울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그날 TV를 틀었더니 뉴스에서 같은 반이었던 친구, 같은 과 였던 동기들이 작정을 하고 시리즈로 기자가 되어, CEO가 되어, 무슨 단체 임원이 되어 근사하게 인터뷰를 하더군요. 뭐 이런 날이 다 있나 싶었죠. 얘들이 오늘 날을 잡아서 나를 약올리려고 약속을 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가도 왜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언론에 소개되면 나는 무언가, 그동안 나는 뭐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 들 때 있잖아요. 물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니고 어디 소개 되는 게 인생 전체의 행복과 성공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머리로 잘 알면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그들과 나를 자꾸 비교해가며 그들보다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현재 내 자신이 소름끼치게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예, 저는 사실 현재의 제 자신이 몹시도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고 보기 싫은 경우입니다. 친구들처럼 잘나가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스스로 내면을 투시해보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엊그제 만난 강상구 기자가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한번쯤은 스스로 잘나간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구요. 그런데 그 시기엔 자신이 잘나서, 혹은 마땅한 노력을 해서 보상을 받는 것이라 믿기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커다란 행운이라 여기진 않는다고 해요. 그런 시간이 행운이었다고 여기는 순간은 그 잘나가던 시기가 지나간 뒤 뜻하지 않은 실패나 좌절을 맛본 후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만약 지금 잘나가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행운이니 잘난 척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이 말도 결국은 잘나가 보았다가 다시 못나가 보았지만 지금 잘나가고 있으니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싶었어요.

 

 

저는 그 행운의 시기를 지나 불운의 시간을 몇 년 보내었더니 이것도 적응이 되어 그런지 앞으로의 행운을 바라기 보다는 그저 더 이상 불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 더 커지더라는 것입니다. 희망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되면 아무것도 도전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근 한 달간 우울한 심경으로 뚜렷한 대책 없이 책만 대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이름 석자와 주름진 사진을 뵈니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분은 저에게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가 되거라, 이런 말씀도 해주셨어요. 꿈의 리스트에 작가를 올려놓지 않았던 저는 그 말씀을 흘려 들었고 <데미안>을 읽고는 이런 지루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죠. (중학생때이니 그 책을 제대로 이해나 했겠어요?) 그 중 한분은 정치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제게 '선동'의 에너지와  '설득'의 정신이 공존한다, 뭐 그런 어려운(당시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해주신 분도 있었어요. 물론 그 말씀도 아주 훗날 생각이 난 것이지만요. 제가 아주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은 제가 국문학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당시 저는 시나 시조, 산문쓰기 같은 학교 백일장 대회에서 미리 여러 작품을 생각나는 대로 써 놓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어요.(대충 같은 계절에 시행되기 때문에 주제도 거기서 거기니까요. 또 벗어나더라도 상관없었으니까요, 하하) 빨리 제출하고 남은 시간 최대한 놀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셨죠. 하지만 돌아보면 직업적으로 늘 펜대를 굴려야 했고 시나리오니, 큐시트니, 기획서니 하는 문서상의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작위든, 효율이든, 감동이든, 어떻든 제가 쓴 글에 세상은 반응을 보였고 글과 관련된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더군요. 스스로도 싫어했고 매력있다 여기지 않았지만 저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게 제 현실이고 현재의 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가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일치시키는 과정이 제게는 불운의 시기였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글과 불운을 분리하고 어떠한 인과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 불운의 시기가 끝이 안 보인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욕망 사이의 불일치는 연속적이라는 것. 이것이 현재 제가 가진 딜레마이고 모순이며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죠. 추측컨대 불운이 지속된다면 계속하여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이런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들이 해주신 말씀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창피하지만 1년 동안 강의를 한 적이 있어서 아직까지 스승의 날이 되면 메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제자가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떠한 답장도 쓰지 못 하겠더라구요.(벌써 삼년 째 씹었네요 ㅠ) 살면서 도덕에 어긋나거나 법을 위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온 것 같진 않은데 누군가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많은 요즘입니다. 방황이 생각보다 길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잊고 오늘의 친구는 내일이 적이 되기도 합니다. 계절은 번뇌를 기다려주지 않고 노화는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한때 스승을 꿈꾸었거나 스승이었던 적이 있었던 분들을 그립니다. 잊지 못할 스승으로부터 잊지 못할 한마디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을 떠올립니다. 지금 누군가의 스승인 분들도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승이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일 년이 가도 여간해선 스승 생각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기에 오늘 하루만의 감사가 어색하고 인위적이기 짝이 없는 꼴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이곳에다 아쉬움만 남겨놓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조용히 뱉어 봅니다. 여지없이 목에 걸립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보고 싶네요...

내년엔 좀 더 떳떳해질 수 있겠지요... 그래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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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6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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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6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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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5 1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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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6 13: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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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와 얼굴 마주하기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은 것 같다. 더 정확히는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되어 거액의 인세를 챙기고 대형서점에서 개최된 근사한 사인회에서 줄서 있는 독자에게 덕담을 적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를 써내는 사람들은 많다. 최근엔 기성작가들이 아닌 각 분야 전문가들이 외려 더 베스트셀러에 가까운 듯하다. 그래서 출판기획이 사회적 요구와 잘 부합해 인기를 얻은 경우 작가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운발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어제 그렇다고 여겨온 저자를 만났다. 하지만 만나보니 그는 나름 고전해설을 위해 시간을 많이 투자해온 분이었고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편견을 가진 내가 부끄러웠다.

 

 

 

 

 - 강상구 저자와의 만남 / 홍대 리브로 , 2012. 5. 10. PM 7:30 -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저자도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시상식엔 딱 한번 가보았는데 그것도 아이와 함께 고궁을 관람하는 기회라 참석한 것이었다. 날짜가 다가오자 참석을 촉구(?)하는 연락이 왔고 빠지면 식순에서 하나의 순서가 날아가는 상황이라 할 수 없이 참석했다. 리뷰를 직접 낭독해달라는 난감한 경우였다.

 

 

내가 쓴 리뷰를 저자 앞에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들 앞에서 내 글을 읽는다는 것도 창피했지만 그 책을 쓴 저자 앞이라 더 어려웠다. 평소 내가 써온 리뷰에 비하면 굉장히 짧은 글이었음에도 낭독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쓴 글을 한자 한자 끝까지 내가 책임지는 기분 이었달까.(글을 읽으면서 리뷰에 저자나 작품을 비판하는 내용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리뷰를 읽어내려 가면서 나는 순간 스스로 내 진실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오글거렸다 ㅠ) 내가 느끼고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쓴 글자가 다시 내 입을 통해 진짜 가슴에 와 닿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이런 말을 했었지... 그때 이런 심정이었지... 그 옛날 이런 일이 있었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으면서도 그 글을 쓴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새롭고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곳에 리뷰를 올려놓고도 내가 그런 내용의 책을 읽고 글을 남겼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가 세상에 떠든 말, 내가 쓴 모든 글들을 어떻게 다 갚고 살아가나 새삼 걱정이 되었다.

 

 

책이라는 것이 그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는 해당 책의 주장과 문장의 감동에 빠져 있기 때문에 사실 사고의 폭이 넓어질 것 같아도 의외로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래서 그땐 칭찬을 마구 했다가도 다음번 작품엔 반대로 욕을 퍼부을 수도 있다. 책 쓴 사람과 리뷰 쓴 사람이 같은데도 그런 일은 빈번하다. 그런데 막상 내 리뷰를 해당 저자들 앞에서 읽는 상상을 해보았더니 얼굴이 뜨거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저자는 자기 책의 리뷰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다고 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흠칫 했을 땐 해당 독자에게 몰래 댓글도 남기고 했단다. 가끔 나도 저자나 편집자의 댓글을 받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땐 좋은 평이었기에 서로 웃을수 있었다. 잔뜩 비판만 늘어놓았다면 댓글도 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책값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솔직하게 비판하는 것은 독자의 권리라 생각했는데 저자가 컴퓨터 화면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고 또 그렇다고 솔직하지 않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복잡한 마음이었다.

 

 

-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의 한사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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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맡은 첫 프로젝트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시행사 공모전이었다. 나는 싸우는 방법도 이기는 방법도 모르는 신참이었다. 공모는 1등만이 설계와 공사권을 얻게 되는 전쟁. 단 한 번도 질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코끝이 시큰한데, 나는 거의 한 달을 집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잡아준 호텔방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최선을 다하게 되면 최종 결과물을 보고 우리 것이 최고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아쉽게도 2등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명 우리 작품이 1등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에 충격이 컸다. 나는 바보같이 과로와 탈진으로 회사 근처 병원에 삼일동안 입원했다. 퇴원하고 나서야 대표는 처음부터 회사가 정해져 있었지만 들러리가 필요해 이해관계상 형식적으로 참가한 것이라 고백했다. 기왕지사 직원들에게 경험을 시켜주려 했는데 정도 이상으로 열심인 나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당선만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 억울하진 않았다. 대기업의 공식 협력회사로서 따로 내정된 회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았다. 아직 물정을 잘 모르는 신입사원을 기만한 대표가 야속한 것도 아니었다. 사회 첫 발을 내디딘 내게 있어 첫 패배는 이긴다는 것의 의미와 싸움에 뛰어드는 투사의 자세를 질문하게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로비도 실력이고 운도 실력이다. 모든 것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싸움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옳은 처사이다. 즉,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하는 일은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이 책을 읽고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래도 그때 혹독한 경험으로 전쟁의 기술을 빨리 깨우쳤구나 하는 것이었다.

 

첫 프로젝트의 대 실패 이후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회사의 경험을 위해 투입되는 일은 시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승률이 없는 게임은 하지 않겠다고 당돌하게 선언을 했고 승률이 반 이상 되는 경우엔 영업팀에게 70%까지 가능성을 올린다음 맡겨 달라 요구했다. 영업팀은 가능성을 항상 부풀려 보고하고 변수가 많기 때문에 다 잡았다고 하는 건 반 정도라 생각하면 되었다. 영업이 확실하다 할 경우 그 다음으로 프로젝트 참여자를 분야별 최고 실력자로만 구성해 달라 요청했다. 용역비 조금 아끼겠다고 B급의 인력을 쓴다면 B급의 작품밖에 나오지 않음을 설득시켰다. 그 다음엔 공고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작업을 반 이상 해 놓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보통 공모 작업기간은 길어야 두 달이기 때문에 수준 높은 작품을 제출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기간이었다. 날짜를 받아서 그때부터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간다는 건 지려고 하는 게임에나 해당된다. 실제 공모기간 중엔 완성도를 높이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완벽한 차별화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외에도 프로젝트에 키key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를 참여시켜 핵심자료들을 다 받아놓고 다시 그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전통적인 로비는 기본이었다. 공모 작업 중간에 경쟁사에 역정보를 흘려 함정에 빠트리게 하는 것도 필수적인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당선 시 사장으로부터 참가자에게 지급되는 보너스나 혜택을 미리 받아 놓고 프로젝트가 삼분의 이쯤 진행되었을 때 사기차원에서 흘리기도 했다.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지만 나는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팀장이 되었고 내가 팀장이던 시절 우리 회사, 우리 팀, 그리고 나는 승승장구 했다.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 살에 팀장을 달고 임원회의에 참석했다. 공모에서 진 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그것도 1등한 회사와 사전에 협약이 되어 있어 결국 시공권은 우리가 가져오게 되어있는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영업, 기획, 디자인, 자문, PT에 있어 자타공인 막강한 팀으로 성장했다. 내 역할은 모든 사람을 모으는 프로젝트 매니저이자 기획 및 연출이었다. 공모는 속도전이기에 시간이 생명이었고 순발력, 추진력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고 어떤 직원은 회사에서 잠시 눈 붙인 사이 꿈에서도 내가 결과물을 닦달 하더라며 볼 멘 소리를 하곤 했다. 지는 건 죽는 만큼 싫었고 이기려면 확실히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기기만 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업계에서 가장 표독하고 악명 높은 팀장이 되어 있었다.

 

마흔이 넘어 이 책을 읽으니 새삼 이 삼 십대의 내가 생각나 감회가 새로웠다. 돌이켜 보니 나는 회사 입장에서 썩 괜찮은 장수였다.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우리에게 져야 했으며 자주 우리에게 속아야 했다. 패배한 사람의 사정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승리한 것은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이라 믿었다. 이기는 것도 습관이 되다보니 싸우기 전에 판세를 읽는 능력은 물론이고 되지 않을 싸움엔 과감히 도전하지 않는 판단력도 생겼다. 즉,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이길만한 싸움에서 쉽게 이기는, 진짜 싸움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전제로 할 때만 유효했다. 그것도 한 십오 년 이상 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만 맡겼다. 나로선 매번 내 승률을 걸고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니 한 치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는 최상의 완벽함만이 요구되던 지독한 시간들. 내게 있어 한 번의 패배란 곧 추락이요 잠정은퇴와 같았다. 그건 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옥쇄였달까. 딱 한번만 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었을 때. 어떻게 하면 일등을 하는지도 잘 알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지만 어느 순간 승리의 목전에서 청개구리처럼 반항심이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나는 왜 일등만을 해야 하는가. 나는 왜 이기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 나는 왜 싸우기만 해야 하는가......

 

전쟁터에서 승리의 의미와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 그 전쟁은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일등을 만드는 일이 지겨워서 서른 여덟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접었다. 말리는 사람이 많을 것을 예상하고 아예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누군가를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이겨야 할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허전해지고 점점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싸움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패배해버린 느낌은 또 다른 싸움이었다. 싸움꾼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겨야 할 상대는 내 자신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목이 메었다. 자신과의 싸움은 사는 동안 누구도 피할 수도 중단할 수도 없는 예약된 전쟁이었다. 그때 내가 저자가 발견한 손자병법의 미덕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마흔이 넘어 돌이켜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진정한 싸움의 바탕에 상대를 짓밟는 기술이 아닌 상대를 끌어안는 배려가 숨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저자가 결론으로 말하는 ‘서로에 대한 존중’, 나아가 ‘공존의 철학’이 싸움의 기술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임을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조금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늦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손자가 지적했듯이 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싸워서 얻을 것이 없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전쟁의 기술은 신중한 판단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지 전쟁을 선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싸움의 비법은 싸우기 위해 마련한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린 살다보면 자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질 것을 예상하고도 할 수 없이 싸워야 할 때도 있다. 마지막 승리를 위해 그 전까지 지는 시간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오늘 내가 배운 지혜는 바로 피할 수 없는 경쟁자를 공존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자세이다. 상대가 없다면 나는 싸울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얻는 것도 발전도 없을 것이다. 여의치 않다면 싸움을 포기하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고 상대라는 적을 함께 가는 친구로 여기는 것도 대단한 용기이다. 무엇보다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라야 가능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이 들면서 점점 상대에 지는 것보다 내 자신에 지는 것이 더 슬프고 분하게 느껴진다. 내 자신에게 먼저 혹은 나중에 무너지는 것이 가장 뼈아픈 패배라 생각된다.

 

내게 마흔 이전의 손자병법은 세상을 향한 처세술에 불과했다. 그런데 마흔을 지나 다시 만난 손자병법은 내 자신을 향한 잠언집에 가까운 듯하다. 그것은 아마 저자처럼 지난시절 수없이 싸우기도 이기기도 지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싸움의 시작은 자신과의 싸움이고 싸움의 끝도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사람들이 싸움을 기피하는 이유는 패배때문이 아니라 시작하기가 두려서가 아닐까.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전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히 내일의 인생을 떠올린다. 그것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싸움이어야 할 것이다. 싸우지 않고도 충분히 이길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고 싶다. 상처와 실패가 없는 완벽한 승리를 위해 싸움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가슴이 아련하다. 아마 인생은 이렇듯 싸움을 포기 하지 않기 위해 내 자신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지독한 여행인 것인가 보다. 이 전쟁 같은 여행길에서 오늘 단비와도 같은 가이드를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부끄럽게 리뷰 읽는 한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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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참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무언가를 끄적였고 리뷰도 책보다는 그저 내 과거사가 중심이 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저자도 직장인이다 보니 조직에서 승리만을 위해 단맛 쓴맛을 처절히 겪어온 시간에 많은 공감을 해주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가깝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짧은 악수와 눈웃음 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듯 했다. 언젠가 저자와의 만남에만 일 년을 쫓아 다녔는데 남는 게 별로 없었다는 이웃 분이 생각났다. 어떤 기분인지 알 것도 같았고 그렇지만 결국 부러워하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해석하고 싶다. 집에 돌아와 보니 책에 뜻밖의 문구를 적어주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2. 저자와 마음 마주하기

 

 

저자가 내 리뷰를 읽고 무언가 반응을 보여준 경우는 작년에도 한번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의 리뷰를 올렸는데 이 리뷰를 읽고 작가는 내게 책을 한권 보내주셨다. 작가는 내가 팔로잉하는 트위터 팬이었다. 트위터에서 내가 작가의 책을 떠들었더니 어디가면 볼 수 있냐고 하셨다. 그때도 진짜 읽어 보실 줄은 몰랐다.(다행이 어떤 흉도 없었다 ㅋ) 워낙 팔로워도 많고 팬도 많으실텐데 일일이 다 읽어보고 답을 해주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트위터를 요즘은 자주 하지 않지만 팔로잉하는 작가는 이외수, 박범신 딱 두명이다. (황석영 작가도 있지만 거의 트위터를 안하심) 박범신 작가는 작년에 교수직을 그만두시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혼자 계실 때 가끔 트위터에 달보고 예쁘다는 식의(?) 글을 올려주셨다. 손수 찍은 호수사진과 여행사진, 취미로 만든 가구 사진들도 기억난다. 막내까지 결혼시키고 신변에 많은 변화를 겪으신 듯했다. 가끔 술을 드시고 음주 트윗을 발사하셔서 담날 후회하는 글도 여러 번 보았다. 작가이면서 생활인으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말씀 하실 때 울컥하여 아버지 생각에 꼬박 답을 해드린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바로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통해 심경을 알려주실 때, 작년과 올 초까지 작가의 일기를 모은 에세이이다. 이 책을 마립간님에게 선물 받았다. 한동안 내가 이 책을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기분전환하라고 보내주셨는데...참...당연히 고맙다는 인사를 할 타이밍도 놓쳤다.(죄송합니다 ㅠㅠㅠ) 마음이 진정되고 빡빡한 인문서에서 벗어나 휴식 같은 에세이를 집어드니 그제서야 이 책이 내게 흘러 들어온 인연의 궤적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트위터, 리뷰, 답장, 다시 리뷰, 낭독, 같은 기억, 그리고 선물... 모두 내가 이곳에 글을 쓰고 올리면서 이어진 일이고 내가 허공에 떠든 말, 써댄 글 때문에 비롯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 다시 재구성된 글을 쓰고 있다.

 

 

소설도 글에서 솔직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평소 나는 박범신 작가의 소설에선 다른 작가들보다 더 솔직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표현의 가공이나 기법을 떠나 그냥 내 직관으로 판단하게 되는 영역인 듯하다. 그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꼭 그 단어를 쓰시는 분. 이번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그야말로 인간 박범신의 날것 고민과 벌거벗은 영혼에 대한 기록인 듯하다. 작가도 인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장점도 단점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평소 트윗에서의 문장을 보면 여성적인 감수성이 물씬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 책은 사진과 함께 더욱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로서 큰 부자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권력도 영향력도 없다. 그러나 좌고우면하지 않고 작가의 길 걷다보면 이웃들로부터 이런, 애련한 사랑을 얻는다. 내겐 산삼이 산삼이 아니라, 사랑이 산삼이다. “사랑이 없으면 /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괴테의 시구가 떠오르는 아침이다.      -192p

 

 

아는 후배가 산삼주와 야생국화차를 들고와 일상에서 느낀 소회를 적으신 글이다. (물론 혼자 술 드신다는 시간이 많으니 선물이 남달랐을 듯 ㅋ) 작가는 평소에도 자본주의의 폭압에 대해 ‘정치적’이 아닌 아주 ‘개인적’인 감상을 많이 남겨 놓으셨다. 작가로서 사적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자신의 작가생활에 대한 위로이자 연민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음이다.

 

 

각설하고, 작가로서 살아, 내가 받은 축복이 있다면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는 것과 정체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의 자유란, 이를테면, 청와대에 들어간다 해도, MB가 결코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아울러 그곳의 수위, 청소원이 결코 나보다 낮지 않다는 식의 믿음, 인간중심주의 자유를 말한다. 권력 중심, 돈 중심의 서열에 눌려선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소중한 것은 지향과 감각이다. 내 손, 내 눈, 내 오장육부에 찍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진 그 무엇이야말로 참 자유일 것이다. 예컨대 고산에 오르는 알피니스트는 발걸음 하나마다 목숨이 걸려 있으니,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할 만하다.     -269p

 

 

작가는 자본이 만들어준 편리성에 따른 자유란 다시 우리를 속박하는 프로그램일 뿐이라 말한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소중한 지향과 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온 작가로서의 자유는 박범신 작가가 이루어온 다른 성취보다 부럽고 근사하게 느껴진다. 무엇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작가가 되기보다는 유명해지고 인정받기 위해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작가가 유명해지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저러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명해지고 인정받는 일은 돌아보니 자유와 사랑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는 말씀은 아닐까...

 

 

박범신 작가는 능력에 대한 자유가 아닌 의지에 대한 자유를 말했다. 얼마 전에 박진영이 자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최대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17년 동안 자기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패티김도 오십 년 동안 최고의 가수로서 인정받는 공연을 하기 위해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혀 왔다고 회상했다. 대중들이 보기에 한 분야에서 대단히 자유로와 보이는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다른 자유를 희생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도 누구보다 자유롭고 사고나 의지의 발현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의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지경의 인물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생의 목표로 삼아도 좋을 모델이 아닐까...

 

 

 

 

덧붙임)

 

 

 

 

 

- '바람의 노래'(1997. 16집)는 내가 아는 조용필의 가장 마지막 히트곡이다.
영상은 90년대 후반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한 장면이다.
엊그제 ‘나가수 2’에서 이영현이 불렀고 작년에 ‘위대한 탄생’에서 손진영도 불렀다.
최근 40주년 콘서트 영상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이 영상을 올린다.
가사 중엔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 하겠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린 해답이 사랑인 줄도 얼추 알지만 어쩐 일인지 그렇게 살기가 쉽지가 않다.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의 강상구 저자와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박범신 작가를 떠올리며 이 노래의 가사를 조용히 새기고 싶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 김순곤 작사, 김정욱 작곡, 조용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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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1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3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5-1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능력에 대한 자유가 아닌, 의지에 대한 자유..말씀하신대로 목표가 되는 삶이기도 하고, 부러운 삶이기도 하네요. 조금 더 치열하게(오랜만에 쓰는 단어인 것 같은데..)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해야겠지요. 갑자기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한사람 2012-05-13 15:53   좋아요 0 | URL

자유라는 건 혼자사는 세상에선 중요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단어인듯해요.
억압과 규제, 관계와 속박, 책임등이 있기 때문에 간절한 것이겠죠..
자유로와 보이는 사람들은 참 부럽긴 한데,
저더러 그렇게 살아라 한다면..
자신없습니다 ㅋㅋ

엄청난 자유는 곧 그만큼의 외로움인 것 같아서요 ㅠㅠ

마립간 2012-05-1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쟁의 의미와 이유를 곱씹으면서 종종 전쟁에 패배합니다. (옛 직장 상사는 저를 looser라 비판을 했지만,) 스스로 패배한 삶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지만.
밑줄긋기 ; 전쟁터에서 승리의 의미와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 그 전쟁은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사람 2012-05-13 15:56   좋아요 0 | URL

이미 참여한 이상은 되돌아보지 말아야 승리할수 있겠죠..
발 들여 놓기 싫은 싸움이 많은데
조직논리에선 의미를 따지는 순간 바보가 되기 쉽상인 것 같아요.
하지만 조직에서 성공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도 성공한 건 아닐 겁니다.
그 직장상사분 같은 분들이 우리사회에 많다는 것이 슬프지만요 ㅠ

숲노래 2012-05-1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홀가분하게 좋은 사랑 꽃피우셔요.
책을 쓰는 사람도 작가고
느낌글 쓰는 사람도 작가겠지요

한사람 2012-05-13 15:57   좋아요 0 | URL

하하~
갑자기 대박나세요~ 하는 하하 엄마가 생각나요 ㅋ
저는 책이 되었든 느낌 글이 되었든
홀가분하게 사는 분들은 작가의 인생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까...싶은데요 ㅋㅋ

가연 2012-05-1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글보다 솔직히 사진에 더 관심이..ㅋㅋㅋㅋㅋ 클릭해도 확대가 안되네요, 풋.

낭독하시는 순간, 무언가 글이 한사람님에게 육화된.. 그런 느낌이네요..ㅎ 저야 제 글을 지금껏 낭독해본 적이 없으니ㅋㅋ 어떤 기분일지는 그저 상상만 할 뿐이지만.. 그나저나 리뷰대회였군요. 리뷰대회에서 수상하시고 낭독을 부탁받으신건가요? 어느 쪽이든.. 낭독 자체만으로도 정말 좋은 일 같네요. 축하드려요, 하하.

한사람 2012-05-13 16:03   좋아요 0 | URL

사람들 앞에서 리뷰를 소리내어 읽는다는 경험이 참 새로왔어요.
정말로..창피하더라구요...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낭독할때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사진은 저 정도면 크게 올린 것 아닌가요?? ㅋ

철수 2012-05-1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내놓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세상의 반응이 궁금하겠지요.
제기준으로... 책을 읽으면서 저자를 마주할수 없다면 그 책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가벼운 맘으로 가볍게 읽는 책도 있지만..나름의 색깔은 있기 마련입니다.
집요한 생각의 고리속에서 고민하고 또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글을 좋아합니다.
그런책을 읽음으로 내가 변화되고...변화함으로 인해 독서는 가치를 가지는것이 아닌가..
단지, 내가 그런 책을 읽었노라...이런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한사람 2012-05-13 16:07   좋아요 0 | URL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라는 말씀이
흠칫 합니다.

가끔은 아주 유명하고 작품성 높다는 책을 읽어도 그 생각이 제게는 별 의미가 없을때가 있고
반대로 세상의 비난을 받거나 유명 작가는 아니지만 그 생각이 저를 변화시킬 때가 있어요.
결국 독서도 다른 누가 아닌 나의 고민과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종종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때문에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것 같구요.


철수 2012-05-14 12:40   좋아요 0 | URL
댓글 하나를 삭제합니다.
댓글에 달린 글도 같이 삭제가 되어 버리네요.
궁색한 변명조차 구차할 지경입니다.
전혀 상황에 맞지 않은 농담이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아..진짜..미안합니다.
인터넷 상의 댓글달기...이거 조심해야 되는데..
무심코 댓글을 읽다 감정선이 오버된..실수 입니다. 부디..

한사람 2012-05-14 14:21   좋아요 0 | URL

에고..제가 답이 늦어서 맘을 불편하게 해 드린게 아닐까..싶은데요 ㅠㅠ
(오전에 남겨주신 글은 보았는데 어딜 좀 다녀오느라 ㅠㅠㅠ)
전혀 그렇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농담이신거 충분히 알았는데 혹시
당시 현장에 참여하셨던 분들도.. 보실줄 몰라서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 마음 털어버리시길^^

비로그인 2012-05-1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문고에서 했던 리뷰 백일장 이벤트 당첨자 발표 나왔는지 혹시 아시나요?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블로그 보다가 한사람님 교보블로그까지 가봤거던요. 한사람님 블로그란 거 어떻게 알았냐면 (스토커는 아니예요 오해는 마세욬) 예전에 알라딘 당선작에서 봤던 리뷰들이라서 누구 글이었지? 하다가 찾아보니까 한사람님이었어요. 4월 말에 발표난다고 한거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네요. 저도 전에 썼던 리뷰 재탕한 것도 있어서 좀 걸리긴 하는데 다른데다 올린 거 또 올리면 안된다는 둥 그런 내용은 공지에 없었겠죠? 1등 상금이 와방 커서 자꾸 미련잌ㅋㅋ 혹시 한사람님 당첨되셨을수도 있겠다 해서 여쭤보아요~ 전 떨어졌겠지만ㅠ.ㅜ

한사람 2012-05-13 16: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유림님.
그 이벤트는 교보문고에서 벌써 발표하지 않았나요??
열개 정도 리뷰를 올렸었는데 저도 탈락되었는걸요 ㅠㅠ
선정과 심사에 리뷰재탕을 검열하겠다는 공지는 없었던 거 같아요.
그때 1등 상금이 크긴 했죠, 하하

참 오해하실 줄 몰라서 덧붙이면,
알라딘 당선작을 재탕해서 올린 적은 없구요.
대회 참여 글 중에는 이미 올려 놓은 다음에 4월인가 당선작이 된 글은 있어요.(자본주의 그 이후)
다른 글들도 이미 어디서 수상한 글들은 올리지 않았던 거 같아서요 ㅋㅋ
그 이벤트 참여한 다음에 평소에 교보에서 열심히 활동도 안했으면서
상금에 눈이 멀어서 괜히 글을 올렸다는 반성 ㅠㅠ 을 했죠, 하하
(사실 그 이후에 혼자 찔려서 마흔이나 주기자 같은 리뷰도 올려 놓고 그랬습니다 ㅠ)

유림님, 교보 블로그까지 가셔서 제 리뷰 읽어보시고 저를 기억해주셨다니
고맙네요^^ 이곳에서도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2-05-13 17:3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신가요
몇달 전에 당선작 봤던거 같은데 제가 착각했나봐요
다 이렇게 하는데 뭘 함서 제 꼼수를 합리화했는데 저만 꼼수 썼나봐요 부끄ㅠ
재탕이란 표현은 제가 그랬단 말이었어요
저도 라고 한 게 실수였던거 같네요 지송ㅠ
저야말로 상금에 눈 멀어서 올렸는데요ㅠ.ㅠ
교보 이벤트 발표란 쭉 찾아봤는데 없네요 아마 떨어졌겠죸

한사람 2012-05-13 18:20   좋아요 0 | URL

http://booklog.kyobobook.co.kr/kyoboevent/1124140

죄송은요 ㅠㅠㅠ
제가 다시 확인해보니 이벤트 당첨자가 아니고 광화문 사람들이라는 공식 북로그에 공지를 했네요
(다시 확인 한번 해보세요^^)

평소에 교보쪽에서 활동 많이 하신 분들이 수상하는게 맞는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운영측에서 참여에의 개방성을 넓힌다면 더 좋긴 하지만요 ㅠ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 번 쓴 리뷰를 다른 서점에 올리는 것이 그다지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안하게 되었어요.
(우리도 독자이고 꼭 한 곳에서만 책을 사고 한 곳에만 글을 올리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것도 결국 부지런해야 되는 일이더라구요..
다만, 이곳에서 이미 상탄 글은 다시 다른데 (수상을 목적으로)올리는게..
좀 속물적이지 않나..그런 생각은 들어요, 하하
동시에 올려놓고 어디서 안주나 하는 것도 뭐 다를 바는 없지만 ㅋㅋㅋ

요즘은 기업들의 꼼수가 많기 때문에
독자들만 깨끗할 필요가 있나..우리도 우리 이익을 보아야 하지 않나,
사실 그런 생각이 많거든요^^

꽃도둑 2012-05-14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독한 사람이에요...^^
실루엣도 이쁘고...글도 잘 쓰고...일도 똑소리 나게 잘하고..
외모라도 좀 엉망으로 생기시지..그게 뭡니까?...
오늘은 그냥 갈랍니다..ㅡ.ㅡ

한사람 2012-05-15 09:53   좋아요 0 | URL

헤헤, 예전에 좀 독했죠 ㅋ
패션도 나름 진보주의자(?)였는데
것도 나이드니 소심해지더라구요 ㅋㅋㅋ
스타일만 그렇고 자세히 보면 늙었죠 ㅠㅠㅠㅠㅠ
요즘은 거울보기가 참 민망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5-1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한사람님?
하트 좀 치워봐요............ 하트..하트..

한사람 2012-05-15 18:22   좋아요 0 | URL

흐흐흐 안되요^^

icaru 2012-05-1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ㅊ도둑 님 말씀이 웃겨서 ㅋㅋㅋ (실은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아! 독하다!!

한사람 2012-05-16 15:28   좋아요 0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
피터 노왁 지음, 이은진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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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은 인간을 선택 했나 기술을 선택 했나

 

 

1996년도에 아이네트라는 회사에서 인터넷을 처음 배웠다. 그땐 전화선으로 PC통신이 대중화된 시기였다. 브라우저도 익스플로러가 아니고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가 대세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강사 중 한분이 인터넷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모든 건 미 국방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말이다. 컴퓨터 끼리 데이터 통신이 가장 절실한 곳이 미 국방부였고 무언가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누드 사진도 주고받고 싶어진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리하여 인터넷 기술의 정점은 포르노가 될 것이라 말했다. 생각해보라고 사진이 될수록 빨리 떨어지고 동영상이 빨리 전송되어야 할 것 아니냐고, 그것도 실시간의 고화질 화면으로. 가끔은 우리끼리 무언가를 찍어서 돈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고. 모두 회사원들이었고 당시 강의는 한 달에 오십 만원이나 하는 고액의 특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말하던 기술들은 거의 실현이 된 듯하다. 그리고 강사가 농담 반으로 부연하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십 오년도 더 지나 나는 이 책에서 농담이 진담이 되는 과정을 목격한 것이다. 새삼 그때 넷스케이프를 띠우고 알타비스타에 검색문구를 쳐대던 모습이 떠올라 빙긋 웃음이 났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 북에서 사진을 공유하며 네비게이션은 물론 쇼핑, 게임, 강의, 영화, 음악, 라디오, TV등의 다양한 손바닥네트워크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 모든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사실은 미 국방부에서 만들었고 포르노에 가장 안성맞춤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놀랄만한 뉴스는 아니다.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본 뉴스에 속한다가 맞을 것이다. 허나 이 책은 그것이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의 기술은 나쁜 전쟁의 기술이 착한 일상의 기술로 전이된 것이므로 우리는 그동안 악의 축을 기둥삼아 열심히 개인의 욕망을 실현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미래란 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로 상징되는 욕망의 삼위일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악덕과의 공존 전략을 세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모든 현대기술의 핵심은 20세기 중반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다. 자본주의 주권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저자의 논리는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소유하고 많은 권력을 가진다’는 데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미국은 적보다 유리한 기술을 찾아 유능한 과학자를 대거 투입시켰다. 당시 천재들은 모두 비밀리에 군사기술에 투입되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은 군사기술에 쏟는 투자가 곧 과학연구의 중추로 자리 잡았고 신기술은 산업으로 빠르게 이전되어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미군의 피나는 기술개발이 가전제품의 대중화를 가져왔고 식품가공의 혁명을 이끌었고 컴퓨터 산업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성혁명이 상업화, 개인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 섹스, 음식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둘러싸고 거대산업이 발전한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성욕, 경쟁,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대변하므로 3대 악의 축은 곧 3대 욕망의 뿌리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건 미국 탓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탓이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순서대로라면 맞는 말이긴 하나 읽다보면 서서히 갑갑해지고 우울해지는 책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생각에 관한 생각>에 의하면 이미 결과가 드러난 상태에서 모든 과거의 일은 사후에 얼마든지 편향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만 있으면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개연성과 타당성, 합리성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저자는 기술발명이라는 것이 늘 의도하지 않는 결과의 법칙으로 이어진다고 했는데 과연 초창기 기술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일까? 기술전이의 핵심이 된 사람들이 모두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그 의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알지 못해서 선택을 이어왔던 것일까. 예를 들어 새로운 전쟁기술을 개발하는 목적은 고귀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함이라 떠들지만 기술이 개발된 시점엔 바보가 아닌 이상 그 기술을 어디에 응용하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일까.

 

 

젊은 시절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살았던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은 이 책에 언급된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증인중 한 사람이다. 파인만은 그의 저서와 전기 등에서 폭탄을 제조해 실험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분명히 ‘사회적 책임’을 언급한 바 있다. 모두 천재수준의 과학자들로만 구성된 팀원들은 사막 한 가운데서 폭탄이 터질 때 성공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돌아올 때 침묵하였다. 원래는 독일의 위협으로 그들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실험에 성공한 원자폭탄은 일본에 떨어졌다. 파인만은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 것이 도덕적인 면에서 실수였다고,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그 이후로 국가의 기밀작업엔 참여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 파인만은 당시에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했는지 생각해본 사람이 분명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은 단지 기술을 의뢰할 뿐이며 과학자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할 뿐이며 상인은 기술을 응용해 팔기만 할뿐이고 소비자는 그것을 이용만 할 뿐이라면 인간은 로봇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선택해온 사실들은 잊어버린 듯하다. 이 책은 지난 시절 미국이 해온 일들을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결과지향적인 가치관으로 상당부분 합리화하고 있는 경향이 짙다. 문제는 지금 이후인 듯하다. 그래도 의미 있고 감사한 건 지금까지의 전개과정을 낱낱이 알려준 성실함이다. 현대문명에 있어 미국의 기여도와 과정을, 그 속내와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의 미래와 직결되는 일일 것이기에.

 

 

 

2. 미국 음식을 먹는 것은 미국식 삶을 먹는 것이다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해 많은 인명을 살렸으나 마찬가지로 적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살인광선으로 레이더를 활용했다. 이 살인기술은 전쟁이 끝나고 전자파를 이용한 전자레인지로 거듭나 일반 가정의 부엌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테프론도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 과정에서 발견된 화학물질이 프라이팬으로 변신한 결과였다. 오늘날 식용유 없이도 계란 후라이가 가능한 테팔 프라이팬은 사실 폭발물 제조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기술이었다. 전쟁덕분에 세상에 등장한 플라스틱은 다양한 밀폐용기로 널리 보급되었고 건강을 해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회용품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밤새워 공부하고 난 뒤에 또 밤새워 논다고 총력전 뒤에는 총력생활이 뒤따랐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번영과 사치, 즉각적인 쾌락이 더 중요했던 5,60년대는 환경이나 생태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시에 개발된 기술은 가정의 요리기술로 안착했고 사람들은 전쟁을 잊고 풍요를 꿈꾸었다.

 

 

우리 집 아이는 대표적인 정크 식품인 스팸과 햄, 소시지를 좋아한다. 이것저것 온갖 종류의 햄이 들어간 부대찌개도 유난히 좋아한다. 어린이 성장과정에서 특히 두뇌와 골격의 발달에 좋지 않다는 뉴스와 연구결과를 보고도 아이는 스팸의 맛을 잊지 못한다. 스팸은 알다시피 미군이 전시식량으로 택한 음식이었다. 전 세계 식품가공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와 동일하다. 아마 당시 미국의 군부대에 스팸을 납품한 업체는 떼돈을 벌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통계상으로 스팸을 즐겨먹는 나라에선 하나같이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 같은 성인병 발병이 높게 나타난다. 주부의 경험으로 보자면 식품 첨가물과 나트륨의 함유량도 대단한 중독성이 있는 듯하다. 그만한 맛과 그 정도의 간에 익숙해진 입맛은 꼭 일정량 이상 마셔야 술을 마셨다 생각하는 알코올 도수 및 주량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요즘은 감자튀김도 양파맛, 치즈맛 등의 화학조미료를 즉석에서 첨가해 더 강한 맛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화 되었다. 뉴스에선 하루가 지난 감자튀김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알려주지만 담배 피지 말라고 해서 알아듣는 성인이 드물듯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아이 따라 먹어보면 확실히 순간의 자극은 더 심화되었고 그 기억은 또 새로운 맛이 나타날 때 까지 유효할 듯하다. 나는 아직도 태어나 처음 롯데리아에서 감자튀김을 먹었을 때 그 맛을 기억하는데 한창 성장기에 인스턴트 식품과 화학조미료의 맛이 얼마나 맛날 것인가.

 

 

냉동감자의 시작도 알고 보면 고기와 채소를 냉동식품으로 팔아온 군납업체에서 비롯되었다. 인스턴트 커피도 마찬가지다. 군인이 지치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먹기 위해선 필히 탈수, 냉동, 건조 기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부지런히 전시에 오렌지주스, 감자, 우유, 달걀 등을 실험함으로써 음식맛을 가공하는 법을 알아내었다. 김연아가 광고하는 믹스커피는 전장에서 군인이 그토록 그리워한 커피 한 모금의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질량분석기는 방부제와 첨가물을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식품가공기술의 발달은 대량생산 기술과 함께 패스트푸드의 발달을 가져왔다. 잠수함 주방을 설계하던 기술자는 맥도날드 주방을 표준화했고 맥도날드는 기술혁신과 품질관리로 엄청난 수익을 올려 물류공급의 표준모델이 되었다. 미국 전체 식품 생산 시스템은 맥도날드의 모델을 따랐고 별 대안 없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렇듯 미국은 60년대 이미 식품혁명이 완료 된 나라였다.

 

 

고등학생 때 처음 압구정동 한양쇼핑 맞은 편에 맥도널드가 문을 연 날을 기억한다. 한동안 줄을 서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90년대 맥도널드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보면 반드시 유명 연예인을 볼 수 있었다. 맥도널드는 당시 압구정동의 젊은 소비문화를 리딩하던 대표적, 상징적인 브랜드였다. 강남역 뉴욕제과가 지하철을 매개로한 만남이었다면 압구정동 맥도날드는 자가용을 전제로 한 만남을 의미했다. 미국이 전수한 패스트푸드는 우리에게 단순히 식품혁명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대형할인점에 가면 프라이팬, 타파웨어, 감자튀김, 믹스커피, 일회용 식품들이 즐비하다. 군인을 위한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온 것이 우리자신이라 보았을 때 우린 미국식 풍요를 향해 삶의 궤도를 수정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 왜냐하면 우린 미국을 알기 전엔 미국처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인류가 미국식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나라인 것이다.

 

 

 

3. 미국이 전쟁을 벌이는 대상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다

 

 

식품 혁명 이후의 욕구는 성혁명으로 이어졌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 한국, 일본이 포르노 매출이 가장 높은 3대국가라 하여 흠칫 놀랐다. 전쟁, 섹스, 음식 중 섹스의 발달이 제일 믿기지 않으면서도 한편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인간이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은밀한 욕구를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전투장면을 찍어야 했던 필요성과 당위성이다. 미군은 훈련용 영화를 만들어 나중에 분석을 해야 했고 따라서 헐리우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카메라 작동법을 배운 군인들은 전쟁이 끝나자 무엇을 만들었을까. 영화계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쳤고 기술과 장비는 나날이 발전해 표준화되기 시작한다. 53년 <플레이보이>지의 창간은 소비 지상주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욕구였을까. 남성용 영화제작도 활발해져 6,70년대엔 B 급 포르노 영화가 성행을 이루고 80년대엔 비디오테잎과 캠코더의 보급으로 개인 비디오 촬영이 가능해진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포르노는 더 이상 장롱 속에 숨겨둔 비밀이 되지 못했다. 군사기술은 장난감과 게임발전도 견인했으며 가상현실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역으로 전쟁이 게임화되기에 이르렀다. 종이인형이 관절이 꺾이는 바비인형이 되기까지 미사일 기술자가 미사일이 견뎌야하는 중력이나 속력, 항력을 계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인형은 로봇공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가정용 로봇, 섹스용 로봇으로 발전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군대에서 비롯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파인만과 함께 핵폭탄에 필요한 타이밍 회로를 만들었던 히긴 보덤은 같은 시기 연구소에서 간단한 비디오 테니스 게임을 고안했다. 하필 이 게임이 전신이 되어 전자오락산업의 길을 열었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회사들은 10년 간 군에서 쓰는 전자장치만 만들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회사였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인텔과 소니의 탄생에 기여했다. NASA 가 미국 산업계에 넘겨준 기술의 양은 곧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갈 첨단 기술과 동일하다. 구글의 위성 사진 서비스도 지상원격탐사를 위한 미군의 프로젝트가 상업화 된 것이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미국이 무엇과 전쟁을 벌이고 있느냐가 곧 향후 산업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미국을 위협하는 무엇이 곧 적대적 대상이 될 터이다. 우주개발이든, 질병이든, 테러이든, 무역이든,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자의 논리 전개에서 본의 아니게 발견하게 된 것은 미국의 전략적인 세계지배 구상이다. 현재 전 세계 유전자변형 농산물 생산량의 60퍼센트는 미국에서 나온다. 미국산 유전자 변형 농산물로 가공된 식품은 우리 대형마트에도 수두룩하다. 미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형식품의 유해성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교묘히 옹호한다. 꼭 월가와 관계를 맺은 경제전문가들이 미국의 은행을 비난하지 않는 이치와 같다. 미국이 고안한 논리는 가난한 나라에 보다 많은 식량을 분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가난하면 절망하고 절망하면 더욱 테러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전 세계가 테러와 전쟁을 하느니 아예 애초부터 원인을 없애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많은 기술을 가진 자가 많은 식량을 가지게 되고 많은 권력을 얻는다는 논리로 보았을 때 미국은 식량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할 수 있다. 여전히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쟁기술을 연구하고 신 무기와 첨단 장치를 개발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군에서 나온 부산물이 모두 자기네 나라를 먹여 살리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이제 안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구하는 무기로 적이 되는 나라의 사람을 대량 살상해온 이력을 안다.

 

 

그렇다고 갑자기 환경과 생태를 위해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편리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버리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복원이며 미래지향적인 방안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분명히 새겨야 할 사항은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인류 문명의 자산이 ‘나쁜 것들’을 통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나쁜 것들이 좋은 것들을 창출했다고 해도 나쁜 것의 원래 나쁜 속성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나쁜 것들이라도 지금 좋은 것이 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나쁜 것들은 분명 나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훗날 좋은 것들이 될 확률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것들을 택할 당시 그것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야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 좋아진 사실과 결과가 나쁜 것을 택한 자들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될 것이다.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택했던 이유는 그것이 택하는 자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된다.

 

 

파인만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초에 폭탄을 제조했던 이유는 그 폭탄으로 사람을 살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폭탄을 제조한 적군에 맞서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레이더를 만들 땐 야간폭격을 대비해 사람을 대피시키려 했던 것이지 역으로 야간에 목적물을 찾아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저자는 패리스 힐턴의 섹스 비디오에 나오는 속살이 분홍색이 아닌 에메랄드빛임을 보고 조명 없이 어둠 속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힐턴의 비디오와 1991년 걸프전 당시 CNN을 통해 중계된 야간폭격 장면이 같은 색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다. 인간은 대단히 실망스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생존을 위협해도 결국은 다 같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믿고 싶다. 선택의 기준이 오로지 욕망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인간으로 남게 되지 못할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것을 택하여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는 인간과 나라가 더 자신들에게 떳떳한 일일 것이다. 불가피하게 나쁜 것을 택했다면 파인만처럼 최초의 그 불가피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의 선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존은 결국 수많은 인간들의 다양한 선택을 인정하고 손 잡는 일이다. 순간의 선택이 어떤 한쪽의 피해와 상처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알고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선택은 궁극에 공멸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미국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유아독존이 아닌 서로를 위한 상존, 모두를 위한 공존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계속하여 그들의 나쁜 선택을 미화하고 정당화하기에 지구촌은 더 이상 공멸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패리스 힐턴의 초록 비디오가 걸프전의 초록 영상이 부디 원래 초록이 의미하는 자연과 희망의 상징으로 변화하는 선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저자가 오랜 기간 준비 끝에 이 책을 발간한 이유는 미국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책임을 더 자각하기 위함이었다고 믿는다. 저자가 바라는 다음의 초록은 아마 우리가 모르는 초록은 아닐 것이다.

 

 

 

덧붙임)

 

 

12.jpg


이 책의 결론은 '악덕이 베푸는 미덕'이다.

이른바, 본능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논리다.

가장 거슬렸던 표현은 발전했다, 진화했다가 아닌 베풀었다는

내재된 우월감의 잔상이다.


앞으로 더욱,

공존을 위한 책임있는 '선택'이 본능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미덕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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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고마워요 :)

계속 리뷰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요. 그리고 이제 취소. 발병 안 나실 거예요 히히히히히히히

차트랑 2012-05-0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워낙 적나나해서 관심밖이었는데...
한사람님의 리뷰를 읽으니 생각이 완전 달라지는데요??

저는 아직도 고리타분한 티를 벗지 못했나 봅니다 ㅠ.ㅠ
저 책을 어떻게 서재에 꼽아둔다?...생각 하면서 걱정부터 했거든요^^
저의 초등학교 동창생 이야기가 딱 맞나봅니다.
'너는 조선에서 왔냐??, 공간은 같되 시간은 왠지 다른 것만 같아...' ㅠ.ㅠ

2012-05-09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5-1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말씀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님,
고맙습니다

꽃도둑 2012-05-1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흥미롭겠는데요?... 세 개의 단어로 현대과학의 기술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칼자루였던 거군요,,,
이 저자의 관점이 다분히 미국에 손을 들어준거라면 그 칼자루를 던져버리고 새로이
갈아 끼우는 방법을 모색하던가..아니면 미국의 손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너무 깊숙히 너무 광범위하게 손길이 뻗어 있어서 어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