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섞여 버린 이야기

 

아이가 수학여행을 가는 바람에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어젠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 놀았습니다. 아이가 온 후에도 밥하기 싫어서 다시 나갔네요. 여행은 아이가 다녀왔는데 그 후유증은 제게로 돌아오는 듯... 그나저나 날씨는 여름인데 수박은 왜 이리 비싼가요? 한 통에 이 삼천 원 하던 시절이 있었나 없었나 싶더군요.

 

저는 혼자 영화보고 서점가고 커피 마시고 하는 걸 좋아해서 영화를 이어서 두 편을 보았는데 하루에 두 편 보는 것이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요. 작품당 여운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쪽도 감동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돈의 맛>은 예상대로 쓸쓸한 맛이었고 <내 아내의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 <마누라 죽이기>가 생각나더군요. 그때 최진실 참 귀엽고 예뻤었는데...

 

<돈의 맛>에서 소름끼쳤던 장면은 하녀이면서 윤회장(백윤식)의 정부인 에바의 관 속 미소였어요. 가끔 관속에 들어갈 때 어떤 기분일까(물론 암 것도 모르겠지만) 상상을 해봤는데 뭘 가져갈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죽어서도 돈의 맛은 짜릿 했던가 봅니다. 천둥이 치는 순간 에바가 눈을 뜨던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는 류승룡이 택시에서 임수정에게 안겨 오열하던 장면. 거절 당한 사람의 눈물이 우스꽝스럽기 보다는 다 큰 남자의 연민이 느껴져서요. 그러니까 하나는 웃는 얼굴이고 하나는 우는 얼굴이다 보니 두 영화가 한 개의 영화인 것처럼 마구 섞여 버린 느낌이네요. 돈에 웃고 사랑에 울고 ㅋ~

 

제 맘대로 연기 점수를 매기자면 백윤식과 윤여정 별 다섯. 김효진과 김강우 별 셋 반. 임수정과 이선균, 류승룡 별 넷. 이광수 별 셋(둘이 아닌 게 어딘가요. 정말 연기 늘었던 걸요, 하하) 이들 중에서 윤여정의 정사신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류승룡의 변신에 즐거웠고 임수정의 귀여움이 같은 여자지만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선균의 자연스러움에도 미소를 짓게 되네요. 기타 김효진의 홈드레스(라고 하기엔 너무나 화려한)는 나도 한번쯤 입어보고 싶었고 하나 부러운 게 있었다면 집에 있는 수영장보다는 영화관이 더. 어느 출판사 창고 같았던 서재(라고 하기엔 너무나 웅장한)에선 책이 너무 하찮아 보였습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셋트는 신혼부부라도 오륙십평 되는 아파트나 고급주택이잖아요. 모두들 돈이 그렇게들 많을까요? 지금도 제일 후회되는 건 결혼하면서 장만한 오븐인데... 후라이팬 정리대까지 가기 싫어서 오븐 공간에 후라이팬 쌓아 놓는 분 저 말고도 많더라구요.

 

 

- 드레스 예뻐요. 다리가 정말 길더군요. <돈의 맛>-

 

 

#2. 난 모욕감을 느끼지 않아

 

영화 속에서 상징적인 단어로는 각각 ‘모욕’과 ‘외로움’을 들고 싶어요.

 

윤회장이 주장하는 모욕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설득력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영화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고 감독이 말하려 했던 메시지이니 접수는 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실컷 한 평생 돈의 맛을 다 보고 난 후에야 모욕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웃기다 싶어서요. 그런 식의 자기학대 정말 싫어하거든요. 자신이 탕진한 돈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돈 많은 사람들을 꽤 아는데 그들은 돈 떨어지면 그전에 하던 가락이 있어서 돈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건 최고로 좋은 음식을 먹어봤기 때문에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죄다 맛없어지는 것과 같은데 돈 중독은 마약이나 도박보다 더 심하다고 봐요. 예전에 하던 걸 못하게 되는 상실감을 사랑이 채워줄 것이라 믿는, 돈 많은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간혹 말년에 진짜 사랑찾았다는 할아버지들 있지만요...)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착각을 했다는 걸 꼭 돈 없어지면 깨닫게 되지요.

 

저는 사실 돈보고 사랑하는 거 인정하는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부자일 때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말해요.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요. 그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본 것에 상처받았다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돈 없이 그 사람이 현재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질수 있었을까요. 그 사람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돈까지 사랑한다가 더 맞다고 봐요. 그리고 그것도 진실한 사랑일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돈 떨어지면 사랑도 떨어져 나가겠죠. 왜냐하면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그 전처럼 살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변한 상대는 그 전에 내가 사랑한 그 사람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돈이 없어졌을 뿐이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닙니다.

 

돈이 있다가 없어졌거나 반대로 없다가 많아졌다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어요.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죠. 돈이 있건 없건 한결 같이 사랑하는 게 진실한 사랑이라 말하고 싶을 겁니다. 글쎄요... 한결같은 건 진짜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사랑, 그러니까 이래야 하고 그러길 바라는 기대수준의 사랑은 아닐까요. 예, 전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서...

 

불행히도 사람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이며 그러고 싶을 뿐이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지 실제로 한결같을 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저는 어찌 보면 사람보다 돈을 더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돈이 하는 게 아니더군요... 돈은 외려 배신한 사람을 돌려놓던걸요. 그러니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사람은 혹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저는 사랑지상주의가 아니라서... 아마 이러한 생각이 불편한 분들도 있을 듯하네요. 그렇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변하는 걸 너무 많이 봐와서 그래요. 그래서일까요... 윤여정의 파렴치함이 하나도 싫지 않았습니다. 돈이 만능인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돈이 많은 사람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자신에게 굽실거리고 위선의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돈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구멍난 양심을 채우기 위해 또 돈을 쓸 수밖에 없죠. 모든 감정과 이성이 돈으로 채워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고독에 취하게 됩니다.

 

윤여정은 극중에서 돈이 많아도 사랑과 행복은 없는 인생인데 그렇다고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봐요. 인간은 다 자기가 가진 조건 안에서 최상의 행복을 느끼니까요. 그리고 자주 느끼는 행복에 동화되어 그 상황에 최적화되니까요. 가장 맘에 들었던 인물은 할아버지의 비서 있잖아요. 비열하게 웃으면서 다 같은 월급쟁이일 뿐이라는 그 분...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 할 자격은 없다고 보았거든요. 무언가를 알았다고 해서 그 전과 달라지는 돈은 하나도 없지요. 그저 돈에 대한 내 생각만 달라졌을 뿐. 만약 임상수 감독이 관객에게 돈에 대한, 돈으로 인한, 돈 앞에 선 인간의 모욕감을 상기시켜주려 했다면 저라는 비순수 관객에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은행금고처럼 돈 창고에 쌓여있던 박스식 돈다발은 조금 설레이긴 했습니다. 벽돌 같은 다발 속에서 한 다발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바보같이 오만원곱하기 몇 십, 몇 백을 하다가 말았다는 고백은 할께요. 흐흐흐...흑흑흑...

 

 

#3. 난 외롭지도 않아

 

 

- 저는 저런 헐렁한 가디건이 좋더군요. <내 아내의 모든 것> -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외로움’은 자주 나오던 단어는 아니였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선균이 임수정에게 네가 그렇게 독설을 해댄 것이 외로워 그랬다는 걸 몰랐다고 할 때 비로소 각인된 메시지입니다. 영화 홍보 인사할 때 배우들이 하나같이 ‘소통’을 이야기 하더라구요. 초반부에 임수정이 아무리 투덜거려도 이선균은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해 들어주지 않잖아요. 처녓적에 저도 임수정처럼 달려가서 또박또박 남의 잘못 지적질 해댄 적이 있어요.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막 바뀌던 순간이었는데 늦게 건너가려던 사람이 있어서 브레이크를 밟았죠. 그런데 당연히 제가 신호를 건너갈 줄 알고 달려오던 택시가 저 때문에 뒤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나봐요. 늦게 건너가던 사람이 건너가고도 저는 일부러 신호를 다 기다렸어요. 그런데 택시 운전사가 열을 받았는지 경적을 마구 울려대잖아요.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차를 세우고 택시 운전사에게 걸어가서 정중히 인사하고 지금 알만하신 분이 저더러 신호를 어기라고 강요하시는 것이냐고 물었어요. 횡단보도 건너는 학생을 치여 죽게 하라는 말씀이냐고도 물었죠. 범법자, 살인자가 되라고 할 당신의 진짜 직업이 무엇이냐 물었고 혹시 내가 여성 운전자라서 그런 것이냐 부터 여기가 학교 앞인데 왜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대냐 짜증이 난다고 자동차에 화풀이를 하면 하루 종일 길바닥에서 일하는 아저씨 일꾼이 얼마나 피곤하겠냐, 기계도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주니까 가끔씩 급발진도 하는 것이다, 등등 쉬지 않고 말했더니 기가 막힌지 뒤에 탄 손님이 대신 미안하다 말한 적이 있어요.

 

90년대 중반, 당시엔- 뭐,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 여성 운전자들이 신호를 제대로 지키고 앞에서 답답하게 길막고 있거나 주차하는데 시간 지체하는 걸 못 견디는 남성 운전자들이 많았어요. 93년에 면허를 땄는데 운전 2,3년 하다 보니까 무서운게 없어진 게죠... 보통 나이가 드신 분들은 말 막히면 너 몇 살이냐부터 나오잖아요. 그럴 땔 대비해서 저는 먼저 인사를 정중히 해요. 그리고 반드시 높임말로 같은 톤으로 말해요. 제가 나이가 적어서 실수한 것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하죠. 그러면 아무 말 못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키득키득 웃음만 나오는데... 스물 대여섯살 때... 그랬네요.

 

감독은 임수정 독설의 배경을 외로움으로 대치 시켰는데 임수정은 그걸 잘 표현한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여배우들이 했어도 무난하게 잘 했을 것 같은 배역이었죠. 독설은 예전에 저도 자주하던 전적이 있어서 그게...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는 부메랑 같은 성질이 있더군요. 하는 순간에 상대만을 향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도 그 독설에 쓸려 있더라구요. 언젠가 부턴 제게도 상처가 되는 것 같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안하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은 임수정을 외동딸로 정해놓고 처음에 지진이나 외부환경의 자극에 보통 사람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일단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건 누가 되었건 지적부터 하며 똑바로 살아라하는 식의 독설을 쏘아대는 캐릭터로 만들었다는 것이어요. 극 중에서 임수정도 외동딸에 대한 편견을 언급했지요. 실은 제가 외동딸이거든요, 하하(괜히 저 혼자 찔려서...)

 

똑같은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이었지만 한 사람은 목사가 되고 한 사람은 조폭이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중요한 건 외동딸로 태어난 변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니고 어떤 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자랐는지가 더 중요하잖아요. 더 독립심이 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꼭 저라고 주장하는 것 같네요 ㅋㅋㅋ) 하여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외로운 임수정에게 마치 그런 네 마음 다 알고 있다는 식의, 류승룡이 불러주는 노래 ‘매일 그대와’를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비정전의 장국영 맘보춤을 따라할 때 나오는 샹송은 알아보니 창작이라 아직 OST가 나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꼭 이럴 때 우연인지 운명인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국화의 노래가 나오더군요. 며칠 전에 전국 투어 콘서트인가 컴백 소식을 듣고 클릭해 본 사진은 정말 충격이었거든요. (많이 늙어 있어서...저 나이 먹은 건 잊어버리고 말이죠...) 20년 전에 학교 앞 베이커리에서 전인권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쉬쉬하며 주변을 피했지요...(행색이 너무 비범해서요 ㅠ) 그때 저는 전인권보다는 최성원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별이란 없는 거야’, ‘색깔’, ‘제주도의 푸른 밤’이 ‘매일 그대와’와 함께 수록된 테잎(1집 말고 콜렉션)을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더군요... 들국화 멤버 중에 허성욱은 벌써 세상을 떴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들국화를 많이 좋아 했는데 그때도 전인권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매일 그대와 아침 햇살 받으며

매일 그대와 눈을 뜨고파

매일 그대와 도란도란 둘이서

매일 그대와 얘기 하고파

새벽비 내리는 거리도 저녁놀 불타는 하늘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걸 같이 나누고파

매일 그대와 밤의 품에 안겨서

매일 그대와 잠이 들고파

 

작사, 작곡, 노래 - 최성원      

            


최성원 1집(1988), 최성원 콜렉션(1992) 

 

 

이 노래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루어 질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울컥할 수가 없답니다. (경험이냐구요??? ㅠㅠㅠ) 류승룡은 노래를 썩 잘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불렀던 것 같아요. 옛날에 노래방에서 회식을 하다가 어떤 분이 이 노래를 하다가 목이 메어서 그만두는 걸 본 적 있어요. 덕분에 영화의 꼬리를 물고 옛날 생각에 빠져 애꿎은 노래만 찾아서 몇 번이나 들었는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걸 같이 나누고파~ 이 부분이 새삼 짠하네요... 나도 그런 간절한 마음이 들때가 있었지 싶어서요 ㅠㅠ

 

<잘가요 엄마>, <사랑의 기초>, <젊은 작가상 수상집>등등 소설을 사놓고 요즘 책이 허무해서 손에 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영어학원 다음 학기 등록하라는 문자가 날아왔고 은희경 소설 예약판매 한다는 문자도 여기저기서 날아왔네요. 창비 계간지에서 몇 페이지 읽었는데 꽤 흥미로왔어요. 작년엔 <7년의 밤>같은 소설 베스트셀러가 있었는데 올해는 벌써 5월인데 소설 쪽은 아예 리스트에서 사라진 듯 합니다. 꼭 제가 소설에 등을 돌린 다음 더 그렇게 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하고 그러네요. 연휴엔 소설을 좀 읽어 볼까 생각중인데 이런 말 하면 이 책 먼저 읽어주세요, 이러는 분 있어요, 하하.(그래서 먼저 읽었습니다 ㅋ)

 

대체로 한국영화 많이 재미있어 지고 수준도 높아진 것 같습니다. 내일이던가 칸느 영화제 본선 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바랍니다. <돈의 맛>이 마지막날 전날 상영된다던데 보통 그런 경쟁작은 상을 타거나 관심을 받은 작품이라더군요... 김칫국부터 마시면 안 되겠지만 부디 선전하기실. 그리고 모두들 연휴에 마음의 평화와 편안한 휴식으로 다가오는 여름을 준비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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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5-26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한사람님이 윤여정의 정사신에 박수를 치고 별 5개를 주셨다는 말에 뜬금없이 윤여정이 돈이 상당히 궁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네요.왜 무릎팍도사에서 윤여정이 자신은 돈이 절박할떄에야 최선을 다해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고 했잖아요^^

아이리시스 2012-05-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전에 말씀하신 거(그건 비밀글로) 이해갈 듯 하면서 안가기도 하고 그게 내가 어려서 세상 때가 덜 묻어서 그런가 이랬는데 이 페이퍼 보니까 알 것 같아요. 몰라도 좋을 것 같지만요 :)

김효진 좋아요. 신혼 어떠냐고 물으니까 아직도 밤새 얘기해요. 너무 행복해요. 하던데 완전 부러워요. 거기 어떤 사람이 나도 밤새 얘기해도 안 질리는 여자가 이상형인데.. 이래논 거예요ㅋㅋㅋ 같은 방향 보면서 취미에 대해 밤새 얘기해도 안 질리는 연인/부부가 드물긴 하죠. 저도 다리는 쫌 긴데..키가 안 커서..요즘 3센치 타령하면서 다녀요. 항상 큰 편에 속했으니까(보통인데!) 학교다닐 때는 중간에 앉아보는 게 소원이었고, 보통인 게 좋은 것 같았는데 요즘은 워낙 다 크니까요. 질 수 없다는 마음! 그리고 남자친구도 좀 키우고 그러고 싶어요!

2012-05-26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5-2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저 사진 다리가 너무 긴 것 아닙니까? 어찌 인간의 다리가 저렇게 길 수가..포샵으로 늘린 것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자'가 '본'이니까. 돈이 모든 것의 주가 되어 있는 이 상황이 뭐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겠죠.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되죠.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패배자가 되고, 파산을 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거의 범법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지요. 그래서 돈들에 그렇게 집착하는 게 이상하지가 않아요. 어쩌면, 그것을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제가 이상해져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뭐 나름 용감한 영화고, 도발적인 영화라고 생각해요. 돈이 모욕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니까. 돈이 모욕일까요.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자기최면을 걸어서야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정말 힘들죠. 그렇다면 전작 <하녀>에서 윤여정이 '아더메치'라며 경멸로 버텨가는 것과 뭐가 틀릴까요.

2012-05-27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2-06-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돈의 맛 친구하고 봤는데 솔직히 윤여정씨 정사씬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봤어요.
근데 예전이야 정사씬 어렵게 생각했지 지금은 오히려 더 당당하고 진정한 연기파 배우의 새로운 잣대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영화 자체는 전 별로였어요. 같은 날 집에 돌아와 방자전을 봤는데 안구정화용으로 그만이었어요.
정말 잘 만들었더라구요. 안 보셨으면 추천 드려요.^^
 
자본주의, 미국의 역사 - 1차 세계대전부터 월스트리트 점령까지
전상봉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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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무엇을 좇고 있나

 

 

이 책은 지루하다. 내용상 화가 나는 구석이 많은 편인데 그 화남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이 지루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1차 세계대전이후부터 지난해 월가의 점령시위에 이르기까지 약 백 년 동안 미국이 돈을 가지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보고서이다. 한평생 자본주의의 역사만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9개 달린 괴물 같은 뱀, 히드라와 같다고 말했다.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다시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신 같은 특질이 자본주의 본성이라는 것. 지난 백년간 자본주의는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언제나 그 변화의 국면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어 자본주의의 본성에 충실함을 증명해 보였다.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싸움을 ‘도덕성’의 싸움이 아니라 ‘현실성’의 싸움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사회주의보다 더 도덕적,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덜 도덕적이고 덜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현실에 바짝 붙어 공생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과거의 모든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그러한 나를 깨달으며 내일을 더 지혜롭고 풍요롭게 살고자 한다. 여기서 어떤 인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누구나 오늘을 산다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현재는 사실 한정된 시간이지만 욕망이라는 현실은 내일도 계속된다. 어제의 오늘, 내일의 오늘에도 변함없이 돈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결국 돈을 지배하는 주체의 역사이다. 돈을 지배하는 것은 이제 인간만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무엇도 인간만큼 돈을 지배하려고 원했던 존재는 없었다. 돈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직접적으로 빠르게 해결해주는 제일 분명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람은 돈의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팔순이 너머 외할머니는 처음 커피 맛을 보시곤 내가 왜 여태까지 커피를 안 먹었을까 하셨다. 그 전까진 아무리 커피가 맛나다는 사람을 보아도 반응이 없으셨다. 쉬운 예를 들었지만 돈의 맛에 길들여져 그것에 눈멀게 되면 자본주의 본성 같은 건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아이를 학원에 잘 보내다가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학원을 보내지 않으면 되는 시절에 살게 되었나, 무엇 때문에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것인가, 왜 아이에게까지 스마트폰을 사주고 또 그것에 중독될까 염려해야 하나,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주변에 한국에서의 교육정책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마침 남편의 공사 해외발령으로 미국과 태국, 홍콩에 살다온 친구가 있다. 원래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오래 살아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온 사람이 아니라 친구처럼 생의 일정 시기에 해외에서 살게 된 경우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들끼리 모여서 특유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 같다. 그곳에서도 서열화 중심의 입학경쟁은 똑같았고 거기서의 창의적(으로 보인) 경험은 돌아와서 그럴싸한 이력서 몇 줄로 대체 될 수 있음을 친구는 더 극명하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일단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아 어디가 되었건 올라갈 수 있을 때 까지 올라가길 바라는 심리는 요즘 거의 습관이나 관행에 가까울 지경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교육정책에도 있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승자독식과 우승열패, 한탕주의 식의 경쟁구조를 나도 모르게 수용하고 좇아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똑같은 학교를 보낸다는 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방식의 경쟁에 놓여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언뜻 보기에 내가 사는 지역과 사는 곳, 학교 등을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택한 것 같지만 우리는 많은 것이 이미 택해진 세상에 발을 들여 놓고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서 일등이 혼자서 엄청난 상금을 다 가져가는 것을 당연히 받아 들이며 경쟁구도에서 탈락한 사람의 눈물에 예전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일진’도 승자독식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학교 밖에서 자기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될수록 눈에 띄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다. 즉,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일진 중엔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크고(발육이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고 외모도 세련되어 인기도 많다. 놀라운 사실은 아이 반에서 일진으로 불리는 친구가 반장이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반장)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모종의 권력을 얻는다. 아직 돈을 모르는 아이들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까. 바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 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일진은 학교폭력이라는 표면적 의미외에도 반에서 최상층의 신분을 상징하고 친구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을 인터넷에 떠도는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이러한 서열화 작업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단순히 높은 위치라 생각되는 아이들을 외려 부러워 한다는 것. 이긴 자, 혹은 높은 자는 다 가져도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어떻게 높은 지위를 만들고 그 위치에 있는 아이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기만 한다. 우리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었는가. 조직 및 계급 서열화, 그리고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결국은 아이들에게 성장한 후에도 권력을 얻기 위해 무조건 노력하라는 것 밖에 더 가르쳐 주었는가. 권력은 곧 돈으로 발생하니 되도록 돈 많이 버는 직업을 택해라, 그럴려면 반드시 일류대에 가야하고 그럴려면 오늘 가기 싫은 학원도 가야하느니.... 아... 우리의 일상은 무엇에 지배받고 무엇에 조종되어 굴러가는 것인가. 주체적인 삶, 인간다운 삶, 나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잘사는 사회라는 듣기 좋고 보기 좋고 허울 좋은 그 옛날 도덕책에나 나오는 소리를 아이들이 진심이라고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 부모들은 기껏해야 일진의 눈에 안띄게 앞에서는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라는 말 밖에 더해왔는가. 우리 부모님들은 그래도 탈선을 방지하고자 날나리와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린 위선을 가르치고자 일진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떠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몸속에 무엇이 흘러 들어왔나

 

 

우연히 올해 들어 자본주의에 관한 책만 몇 권 째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유럽이 되었건 미국이 되었건 혹은 우리나라 이야기건 하나같이 이런 책을 덮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우리나라와 내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이렇게 쳇바퀴를 돌다 영원히 돈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바둥바둥 살아갈 수 밖에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 생활은 40대 주부로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키우는 지극히 평범한 학부모의 일상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어찌 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적 일상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잘 운영해온 미국의 역사를 아는 것과 2012년 우리 일상은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날 유가 폭등을 지켜본 미국은 중화학 공업으로 대표되는 고에너지 산업을 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철강, 조선, 기계 등의 중화학공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룬다. 이때 아랍 산유국들의 막대한 오일머니는 어디로 들어갔을까. 월가는 이 돈을 돌려 개발도상국에 선심 쓰듯 빌려주었고 그 결과 중남미는 80년대 외채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의 판단과 선택이 다른 나라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되었음을 기록으로 부인할 수가 없다.

 

 

비약적으로 말하면 일진과 왕따는 신자유주의 추종과 신봉의 결과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현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스트레스를 감지하는 주체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사회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보편적 스트레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이나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다.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본 것이다.

 

 

지난 일 백년간 우리 몸속에 내장처럼 깊숙이 흡수되어 온 삶은 바로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미국적 삶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가장 앞에서 조종하고 주창하고 운영, 유지해온 주체는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와 낮과 밤도 틀리고 바다건너 먼 곳에 있는 나라지만 그들이 쓰는 돈과 버는 돈의 궤적이 사실상 우리 삶의 궤적을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얽히고 설킨 국제관계속에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치는 영향의 크기와 의미로 보았을 때 그렇다. 그래서 인지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읽는 일은 한국인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 책의 결론은 마음에 안 들게도 새롭게 부상한 중국을 중심으로 경제위기 해결방안을 마련하든가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위기와 혼란을 지속하든가 하는 상당히 자조적인 조언이다. 지난 백년을 미국 중심의 역사로 서술해 놓고 앞으로 탐욕에 눈먼 1퍼센트가 아닌 99퍼센트의 민중이 변화를 선도하도록 ‘미국 없이’ 노력하라고 하니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이 책은 역설적으로 앞으로도 미국중심의, 미국이 해결하는 자본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결론보다는 과거정리 차원의 꼼꼼한 기록의 여정에 더 관심일 기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을 넘기면서 새삼 매 시기 미국의 발빠른 행보와 탁월한 선택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유럽 열강들의 이권다툼은 전쟁을 낳았고 전쟁은 독일이라는 패자를 낳았다. 승자는 패자에 엄청난 책임을 물었고 패자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패자는 기회를 엿보다 어떻게든 계기를 만들어 다시 전쟁을 창출했다. 두 번의 세계 전쟁으로 혜택을 입은 나라는 미국이라는 패권국이었다. 패권국은 끊임없이 주류 담론을 만들고 그에 따라 세계를 지배해왔다. 패권국은 때론 자작극과 조작을 서슴치 않았으며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삼아 왔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을 참여할 때 내세운 논리는 “우리는 독일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는 것이다”였다. 때마다 전쟁특수로 위기를 탈출해온 이력이 곧 미국의 역사를 대변한다. 전쟁이 남는 장사임을 깨달은 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장사로 여긴 나라는 대부분 선진국이 되었다. 피를 흘려도 돌아오는 이익이 많다면 전쟁은 언제나 정당화되는 국가활동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론 언제나 혁명은 공산주의의 전유물이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늘 포악한 공산당 쪽이라 자다가 깨어나도 공산당이 싫다고 외칠 정도로 지겹게 세뇌당해 왔다. 미국은 툭하면 세계의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테러를 뿌리 뽑기 위해라며 전쟁선언을 하곤 한다. 그런 미군이 전쟁 때마다 죽여온 민간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이 책을 넘기다 보면 결국 죽여 온 사람이 많은 나라가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는 구나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돈의 맛을 어디에서 배워왔나

 

 

예전에는 한국이 미국과 얼마나 격차가 있을까 이런 질문과 기사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미국은 1920년대 이미 부와 번영으로 돈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나라였다. 당시 미국인 여섯 명 중 한명이 자동차를 소유했고 미인대회와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했고 주식의 광풍으로 구두닦이 까지 주식시장에 발을 들여다 놓았다. 파산으로 투자자 열 한명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은 1929년의 일이었다. 이후 미국은 30년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문제는 어느 시기건 미국이 공황이면 결국 유럽이고 아시아고 전 세계로 그 여파가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자본에 의지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미국은 대공황을 2차 대전 덕에 잘 극복하게 되고 공황이라는 위기를 잘 학습한 자본주의 경력자로 거듭난다. 공황을 겪었기 때문에 애국심도 생겨나고 국민이 단결해 정부의 개입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미국은 똑같은 이유로 나중에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게 되는데 시장이 중요하냐 국가가 중요하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지금가진 돈을 더 불리고 잃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을 둔 같은 문제였다. 50년대 한국전쟁, 70년대 오일쇼크, 80년대 중동 전쟁, 90년대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을 버라이어티하게 헤쳐 나온 미국은 늘 앞에선 세계평화와 번영을 주장하면서 뒤에선 자신들이 가져갈 돈 계산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1차,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을 살펴보다 보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은 애초부터 미국을 얕잡아 보고 무시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이 미국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 우월감은 지금도 유럽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열패감과 분노를 느끼는 유럽은 연합으로 대항해 세력을 만들고자 하지만 생각만큼 단결이 쉽게 되어 보이진 않는다. 미국은 두 번의 전쟁이후 엄청난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을 이루며 70년대 말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하기 전까지 상당부분 유럽과 격차를 벌여 놓게 된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를 통해 미국은 이미 50년대 다국적 기업을 출발 시켰고 60년대에 식품혁명이 완료된 상태에서 현대문명을 이루는 기술개발이 전문화, 집중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첨단 군사기술은 과학과, 식품, 전자, 영화, 방송, 통신 등 전 분야에 이전되며 미국식 풍요를 전 세계에 전도해왔다. 이제와 부질없는 소리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너무 구석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의 극단이 나치즘이라 보았을 때 정도의 차이만 배제한다면 사실 부시의 애국심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애국심은 강대국이라는 프리미엄 덕에 언제나 세계평화와 안전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며 사회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아니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평화는 매번 소환되어야 하는 허울좋은 태제일뿐이었다.

 

 

한 가지 예로 독일의 폭격으로 자존심이 무척 상한 영국은 미국과 합작으로 레이더 장치를 개발했지만 정작 그 레이더를 대중화시켜 전 세계 가정에 전자렌지라는 새바람을 몰고 온 건 미국이었다. 영국은 자존심은 찾았는지 모르지만 실리는 얻지 못했다. 지금의 미국을 보면 유럽 나라들의 콧대 높은 자존심을 잘 이용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자존심이 상하면 곧바로 애국심이 발동되는 나라였다. 애국심은 세계를 지키겠다는 공명심으로 발전한다. 이 한몸 던져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허리우드 영웅들은 지난 시절 숱하게 반복되어 온 전세계 공통의 영화적 학습장치였다. 미국이 지켜온 건 사실 자국의 이익뿐이었다. 전쟁 이후 만들어진 국제기구들은 대부분 미국이 협상시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본주의 유지 시스템들이었다. IMF의 최대주주는 미국이었고 미국의 지지와 동의를 얻지 못하면 사실상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무역자유화와 외환거래의 자유화로 가장 큰 이득을 볼 나라는 언제나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부업체처럼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 나라가 빚을 못 갚아 파산을 하게 되면 재빨리 투기 자본을 침투시켜 중요기업들을 사들인다. 어떤 협상도 누구를 위한 개방이고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결국 미국을 부자 시켜주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렇게 미국의 파렴치함을 비난하기는 쉬운데 정작 그것을 가장 잘 복제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은 있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로와 질 수 있는가

 

 

최근 그리스가 재정위기에 빠졌다고 우리는 국민이 게을러서 혹은 은행이 방만해서라는 식의 학습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긴축재정에 나선 그리스 정부가 복지 축소로 연금을 삭감했기 때문에 노후 연금이 끊긴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국제 금융 자본가들은 그리스의 방만한 경영, 그리스의 내재적 결함이 재정위기를 초래했다고 18세기식의 청교도 윤리를 들이대곤 한다. 이를 보고 우리 보수와 수구언론은 그리스가 복지를 마구 시행하다가 재정위기가 온 것처럼 떠들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복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일 통화를 사용하지만 단일한 연방국가가 아닌 유로 존 때문이라 한바 있다. 유로 존에서는 화폐만 통합되었을 뿐 자유무역으로 인한 소득격차, 생산성 격차는 모두 각국의 소관이다. 쉽게 말해 관광업 발달한 그리스는 제조업 발달한 독일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장하준은 같은 유로존 속에서 그리스를 도와주지 않는 유럽 국가(특히 독일)들을 강원도가 부도났는데 나라가 해결하지 않는 것에 비유하며 상당히 비윤리적인 행태라 꼬집었다. IMF가 터졌을 때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해서 외환위기가 닥쳤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시절 장롱속의 금반지를 죄다 꺼내어 나라 빚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고자 그렇게 너도나도 줄을 서대지 않았던가. IMF의 근본적 원인은 자유화된 국제 자본의 횡포에 있었다. 동남아 외환위기는 대처리즘과 레이거 노믹스로 가시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지 갑자기 우리나라 혼자서 흥청망청해서 일어난 경제위기가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외환위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만성 고질병쯤으로 생각된다. 단지 이번이 중남미면 다음은 서유럽, 그 다음은 동아시아, 또 그다음은 순서를 바꾸어 등장하게 되는 무슨 당번 같기도 하다. 당번이 죽어라 죽겠다 소리칠 때 미국은 엄청난 규정을 제시하며 도와주는 생색을 낸다. 케인스 주의에 기초한 수정자본주의를 잇는 신자유주의는 지난 시절 신보수주의(반공 이데올로기와 패권주의)와 결탁해 미국의 침략이데올로기로 십분 활용되었다.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냉전과 소련해체도 주도했다. 미국에는 유독 세계 각국의 금융시장을 무대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를 일삼아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투자자들이 많다. 금융자본주의가 활황하기 시작하던 90년대 이후 국제 금융시장은 이들 투기 자본가들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교역 상대국엔 자국의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버젓이 불공정 무역과 시장개방의 압력을 가한다. FTA 가 발효되면 농업, 제조업, 제약업 등에서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이제 중국의 대미 수출 증가는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다른 나라가 외환위기에 닥쳤을 때 미국이 주장했듯이 글로벌 불균형이 미국 내부의 과잉소비가 원인이라 일침을 가했다. 미국이 말하는 균형은 어디까지나 자국이 중심이 된 자국이 흑자를 내는 방식의 균형이다. 그러던 미국에서 드디어 2008년 158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세계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금융자본주의도 파산했을까? 아쉽게도 오바마는 노무현이 검찰개혁을 하지 못했듯이 금융개혁을 하지 못했다. 월가의 집요한 로비는 꼭 검찰이 권력과 멀어짐을 두려워 하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미국은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을 걷어 월가 은행들에 공적자금을 퍼부어 주고 그들은 임원에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는 나라다. 이긴 자가 다 가지는 것이고 다 가졌던 자가 더 가지기 쉬운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라틴어로 미국의 평화를 뜻한다는 ‘팍스 아메리카’는 누구를 위한 평화였는지 명백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는 이겨서 가진 자, 가져서 강해진 자, 이른바 소수 특권층으로 상징되는 1%를 위한 평화였던 것이다. 원래 자본주의는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상층의 상부구조에서 발달해 왔다. 최상층의 경제활동은 독점을 상징했고 독점은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불평등의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듯하다. 불평등은 불공정, 불합리적 경쟁관계를 연차적으로 유도할 것이다. 99퍼센트의 민중이 평화로와 지는 날은 어쩌면 도래하지 않을지 모른다.

 

불행히도 인간은 미래를 낙관한다. 탐욕으로 눈 먼 1퍼센트를 지지해 놓고도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이 실현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미국이 쏘아대는 미사일을 두 눈으로 보고도 세계는 곧 평화로와 질 것이라 기대한다. 99퍼센트의 평화를 원한다면 최상층이 원하는 탐욕의 현실적 욕망을 버리고 공정과 도덕이 지배하는 비현실적인 이상을 택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99퍼센트의 평화는 99퍼센트의 불가능만큼이나 비현실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비록 단 1퍼센트의 희망이라도 그것이 특권층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의 행복과 평화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미국 자본주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99퍼센트 확신하게 된 이 책의 가장 큰 교훈이다. 다행히도 인간은 희망을 절망과 바꿀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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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우리나라의 구제금융 상황은 약과에 불과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매우 컸지만요..

요즘의 그리스처럼 지하금융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은 탓이기도하고
국채와 기업의 외자의 존도가 상대적으로
그리스보다 규모가 적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국가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던 덕분인가 싶습니다.

사실 털어 먹을 것이 적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그지경까지 털리리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는 모습은
그 얼마나 강력한 타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문제는 지적해주신 팍스 아메리카의 개념이
우리의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러의 붕괴가능성 이지 싶습니다.

경제와 역사는 양면의 동전과 같아서
어쩌면 자본이 배제된 순수한 역사의 개념을 기대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아닌가 생각들 때가 많습니다.
역사 연구의 의도가 대부분 불순한 것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구요.

한동안 경제관련 서적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글을 읽으니....
또 이러네요 ㅠ.ㅠ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님~

차트랑 2012-05-27 07:58   좋아요 0 | URL
쿠더덩~
한사람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저는....ㅠ.ㅠ
제가 몸둘바를 몰라
얼굴이 화끈 붉어집니다 ㅠ.ㅠ

연휴에는 경제 역사와 상관없이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부처님께 다녀올 계획입니다^^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를 보기도하고
부처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렇게 가끔 하거든요^^

한사람님께서도 편안한 연휴 되시길 빕니다.

2012-05-25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6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5-2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 책 별 세 개예요? 한사람님도 별점에 후하신 편이라 생각하는데 이거이거 왜 세 개예요? 어떤 의미로? 이 책 장바구니에 끼여있단 말이에요. 세 개짜리는 싫어요. 이건 소설이 아니니까요 :) 근데요,

2012-05-27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2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요즘 아예 ‘놀토’가 없어졌다. 토요일은 그냥 모두 언제나 노는 날이 된 것이다. 우리 땐 토욜 4교시도 참 기다려지는 날이었는데 주 5일 문화는 이제 공교육에까지 확대되었다. 덕분에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아이들은 공부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요즘 토요일에 영화관에 가보면 아침부터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린 사람들 붐비는 게 싫어 늘 조조영화를 보아왔는데 지난 토요일도 아침부터 만원이었다. <코리아>를 좀 뒤늦게 본 편인데 영화는 아이와 함께 보기 재미있었지만 약간 뻔 한 구석이 많아 감동의 수준은 ‘우생순’이나 ‘국가대표’ 급에 못 미친 것 같다. 하지만 배두나(리분희)의 절제와 몰입에 놀랐고 김응수(북한측 조감독)의 멱살 잡히는 장면, 한예리(유순복)의 실감나는 사투리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원 연기는 사투리고 스포츠고 워낙 익숙해서 이제 여간해선 감동을 받기가 힘이 드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버스 떠나는 장면에서 울며 매달리는 특유의 우는 연기는 찡했다. 실제 상황이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우린 항상 버스타고 떠나는 북한사람들을 버스 밑에서 울면서 보내는데 익숙하다. 두 가지 다 해보았는데 확실히 떠나보내는 쪽이 더 안타깝고 눈물이 많이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울음이 터져버렸기 때문에 또 뒤돌아서 잘 일상에 복귀하지 않았을까...

 

 

#2. 어느 쪽이 더 솔직한 걸까

 

 

나는 사람마다 울 때 내는 흐느낌의 소리는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슬픔에 복받쳐서 우는 소리는 연기로 조절하기 상당히 힘든 영역이 아닐까. 왜냐하면 극도로 슬퍼야지만 나오는 그 사람만이 가진 목소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웃어야지만 나오는 소리가 있고 아파야지만 나오는 신음소리가 있듯 울 때 나오는 목소리는 울어야지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표정, 흐느낌의 패턴은 다른 사람이 따라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바꿀 수는 없는 듯 하다. 이것은 신체의 각 조직이 반응하며 일어나는 복합적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고유성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사람은 울 때 꼭 입을 막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꼭 이불을 뒤집어 쓰는 것도 연차적인 행동반응이다. 그런데 우는 건 웃는 것 보다 일반적으로 더 솔직하고 속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는 연기가 다양하다면 연기의 고수가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는 연기가 다양하려면 다양한 상황에서 울어봤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는 연기의 달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웃는 것도 참 억지로 못할 일이지만...

 

 

#3. 많이 운다고 예술이 더 깊어질까

 

 

그런데 가수나 배우들을 보면 인생의 경험과 나이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모두 연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까.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연기와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마 나이 들어서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연기력은 그대로인 중견배우들을 보면 예술이 꼭 인생의 경험과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예술이 탄탄해질 수는 있겠지만 예술가의 역량이 높다고 산전수전 다 겪은 건 아니라는 말씀.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썩 반갑지가 않다. 계속 노력하다보면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에 회의가 많이 든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더 많이 이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더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가진 조그만 재능이 더 빛을 발하긴 커녕 한계만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우울한 요즘이다.

 

 

 

#4. 얼굴이 예뻐야 주연을 하는 걸까

 

 

주말이 지났지만 자꾸 생각나는 배우가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배우였기에 우린 어렵지 않게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기억해냈다. 알고 보니 짧게 나왔지만 미친 존재감만은 강렬하게 기억된 배우였다. 아이와 나는 공교롭게도 그녀가 출연한 <하모니>와 <퀵>을 보았다. <퀵>에서는 폭주녀로 잠깜 나왔는데 이민기에 키스를 한 누나뻘 옛날 불량애인?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진을 못찾아서 아쉬웠다. <여인의 향기>에서도 재일교포로 나왔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이 김재화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눈에도 개성 있는 조연을 하기에 적당한 외모를 가졌고 약간 올라간 눈꼬리와 광대뼈 덕분에 중국인 역할에 딱인 포스이다.

 

 

 

- 중국의 덩 샤핑(영화에서는 덩 야령)을 연기한 김재화. 내 기억으로 덩 샤핑은 아주 단단한 체구의 단신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중국인으로 보이는 강렬한 인상이 얼마나 중국인으로 보이고 싶어했을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모니에서 권달녀 역으로 출연한 김재화. 맨 오른쪽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람. 교도소에서 짧게 나왔지만
존재감만은 최고였다. 완전 범죄포스에다가 욕설이나 행동도 재소자에 빙의된 모습... 노래는 어찌나 또 오버해서 하던지...

 

 


-여기저기 프로필 사진들을 찾아 봤더니 이 사진이 꼭 동남아시아 항공사(싱가폴이나 홍콩)
스튜어디스 같아 슬쩍 가져왔다.

 

 

 


- 전혀 다른 눈빛이 너무 강렬해 오래 매력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녀는 알고보니 중앙대 메릴스트립으로 불리던 한 연기 하던 연극배우였다. 80년생인 것에 비해서는 얼굴이 좀 노안이긴 하다.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김윤석, 황정민의 공통점은 연극바닥에서 발성과 연기를 익힌 배우들. 그러니 그녀도 대성할 배우의 자격쯤은 갖춘 셈이다. 이제 여자 배우들도 저런 개성강한 얼굴이 당당히 주연으로 등극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신문에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하지원'이고 가장 연기 잘한다 생각하는 배우는 '전도연'이었다. 하지만 남자로 가면 얼굴이 매우(?) 잘 생긴 배우는 이제 하향세로 돌아섰다. 감독이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관객이 예쁜 배우를 보기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제작자가 그림이 좋은 것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도 스크린에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가 연기까지 잘하면서 등장하면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언젠가는 김재화라는 배우가 주연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아니 꼭 주인공이 되어 칸느에서 주연상도 타길 바란다. 본인이 칸느 카펫을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실력이 능력이 되고 그것을 실력만큼 인정받길 바란다. 이상하게 그녀와 친분도 전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고 우울하다. 책이 재미가 없다. 글이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이 생각 저 생각

잡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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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2-05-22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모니에 나왔던 배우군요! 이렇게 사진을 보고 나니 알아볼 수 있겠어요. 마지막 사진은 특히 강렬합니다. 저도 이 배우가 칸의 레드카펫을 당당히 밟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

한사람 2012-05-23 11:12   좋아요 0 | URL

그죠~~ 기대되는 배우 맞아요.
칸에 홍상수 감독 가 있던데 좋은 소식 들렸으면 좋겠네요~
마노아님은 바쁘시다면서 영화는 많이 보시더라구요, 하하
저는 하나도 안바쁜데 영화관 가는게 귀찮아요 ㅠㅠㅠㅠ

차트랑 2012-05-2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뜬 구름 잡는 소리이이며
말도 안되는 말씀입니다만
연기자 김재화의 년월일시의 주를 알면
언제뜰지^^ 예측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ㅠ.ㅠ

인생은 'timing의 예술'이라는 말은 참 많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그 timing은 온다^^
다만 그 시기를 알 수 없는 것이 문제입지요 ㅠ.ㅠ
물론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한사람 2012-05-23 11:1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세요???
궁금해요!!

타이밍이라는게 미리 정해져 있는 걸까요?
사람은 정해진대로 살게 되 있는걸까요???

2012-05-24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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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강렬합니다. 색상이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인상은 강렬했어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에둘러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핵심을 전달하는 어법이었습니다. 인문서를 읽다보면 보통 처음에 정의를 하고 부연 설명을 하거나 반대로 설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법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방대한 다른 이야기로만 중심을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말하자면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식의 투어형 탑승기구를 상상하게 됩니다. 모두 둘러보았더니 출구에서야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 남겨지는 것. 여행은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습니다. 호흡도 길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들었다고 꼭 끝에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진 않은데 그 하나의 그림을 무언가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설이 참 고맙더군요. 평소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졌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독자에겐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저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1979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주제를 미리 소개하는 세 차례 강연 모음집입니다. 강연은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어체에다 설명위주로 구성되었어요. 강연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출간되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원저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며 경제사회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강의와 세미나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원저는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 독자외에 전문가로서도 힘겹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인데 15-18세기 세계 경제사를 30년에 걸쳐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30년 세월의 결론을 그려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저술 하는데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저자는 1985년 사망했는데 그렇다면 40대 후반부터 인생 말년기를 통털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집요하게 천착한 것이 됩니다. 바로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말합니다.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제조건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 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룬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표층의 역사’가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좀 섬직한 이야기도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존재이지만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200년, 10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기나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뿐. 자본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 언제를 정확하게 말하려면 인간 생활의 변화부터 포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14-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400-500년 동안 유럽에서의 경제를 해부했어요. 이 책이 의미 있었던 건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 이전에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흐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 서유럽을 살펴보았더니 맨 밑에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구조를 발견했어요. 400년 이상 서유럽에서 장기 지속했던 이 구조의 특징은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주된 특징들(운송, 상인, 화폐, 무역의 역할 등)이었고 이 오래된 역사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탄생케 하였다고 본 것이죠.

 

당시 교환메커니즘은 중국이나 이슬람등 유럽 외에도 있었지만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에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유럽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서 있었다고 합니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시대의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늘 역사가들이 무대의 중앙에 배치했던 주제이잖아요. 브로델은 역사가로서 애석한 점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최하층에서 자본주의 실체가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라 최상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장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어요. 장기 지속하는 역사를 보았더니 자본주의는 결코 경쟁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경쟁을 없애는 반시장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반대되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늘 자동반사적으로 시장은 경쟁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외워왔으니까요. (그런데 독점을 자본주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요즘 동네빵집을 잠식하고 있는 대기업 제과 프랜차이즈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독점으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수직적 위계의 교환의 세계에서 상인자본가들은 선주이면서 보험업자이면서 대부업자, 차입자, 금융가, 은행가이기도 했어요. 한편 농장의 경영주이기도 했죠. 외려 하층은 전문화 되어 있는 반면 최상층은 전문화가 거의 없어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손에 자본을 손에 쥔 상인들의 기득권이 곧 선점효과였고 그것이 전문성 없이 유지되어온 배경이었어요. 당시 원거리 무역이 일어나면서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해당 시대의 굵직한 국제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과정은 곧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에 의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경쟁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데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본질적 요소인데 이 ‘불평등의 힘’, ‘소수 특권층의 힘’은 단지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운 좋게도 전 세계가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어야 하는데 영국은 바로 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안팍으로 갖추어졌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넘쳐났고 그러한 배경이 산업 자본주의를 받쳐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당도하는 ‘밤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좋아서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더 편하게 접근합니다. 또 커다란 문제의 근원보다는 결과를 더 잘 알아 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역사가는 더욱 더 그 근원을 찾는데 열광합니다. 비록 그러한 근원들이 역사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자주 비껴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p94


역사가라는 직업이 원래 유럽에서 발달했잖아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는 건 항상 자신들의 과거였구요. 저자가 보기에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까지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에서 발달했고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구요. 브로델은 자신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를 통해 유럽이 팽창했고 더불어 유럽의 경제계들이 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자본주의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세계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결론 냅니다. 유럽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미국. 크루즈 여행으로 보면 자본주의 탐험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결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최상층의 존재라는 것.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하고 그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의 고유한 본질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 특징이라는 점.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고 언제나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느듯 다시 생환해 있잖아요.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몇번의 위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살아나던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의 부제인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같은 뱀이죠. 머리가 9개 달린 괴물의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고 해요. 바로 자본주의를 불사의 영속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도 끈질기며 탁월한 유연성과 적응력으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는 것.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할 때 이제 곧 자본주의는 사라진다는 기사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책도 보았습니다. 세계의 경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얼마나들 노력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의 역사가 새삼 두려워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변하지 않았던 과거의 원대한 흐름을 뒤돌아 보는 것도 오늘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좋은 거울이 될 듯 합니다. 무엇보다 한 평생 자신들의 과거만 연구한 역사가의 충고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입니다.

 

“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처럼...”


프랑스의 역사가가 그려낸 세계지도는 과거의 강물이 현재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더 입체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진처럼요.

 

 

 

덧붙임)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이 궁금해 찾아보니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중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산 루이지 교회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인데 제목은 <성 마태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이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 그림은 바로 세리(세무관리)인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은유해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면 오른 쪽에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예수이고 놀란 눈을 한 채 왼손으로 ‘나 말입니까’하는 인물이 마태 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세금 징수업자였던 마태가 아닌 고개 숙여 돈을 세고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표지로 한 것일까.

 

 

 

 


자세히 보면 표지에서 돈을 향한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돈에 눈을 맞추고 있는 인물의 손 같지만 위에 손은 바로 마태의 손이고 아랫 손만 고개숙인 인물의 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마태는 왼손으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오른속으로는 계속 하던 일인 돈을 세고 있는 것이었다.

 

악덕업자로 불리던 세금관리는 그 시절 무척 안정된 직업군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의하면 16, 17세기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태동케 한 일등공신이다. 자본주의가 일부 소수 특권층에게만 일어나는 최상층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았을때 이 그림에서 돈을 가리키는 손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정확히 세고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와 상관없이 경쟁을 비껴나와 독점으로 향하는 히드라와 같은 괴물. 그렇다면 아마도 고개를 숙인 청년의 눈은 돈에 눈멀어 자본주의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나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혹 사람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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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5-2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빠서 어리버리하는 사이에 글을 많이 올리셨네요
앞으로 정리 계획에 있으신 자본주의 역사, 저는 기대가 좀 됩니다.
쉬운말로
"'돈'과 무관하게 서술된 세계의 역사는 정말 김빠진 사이다와 다를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저 지금 기대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하는 바보를 위하여

 

이 책을 덮은 느낌을 단 한마디로만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끄럽다’고 할 것이다. 두 마디로 가능하다면 ‘부끄럽다, 그리고 놀랍다’ 일 것이다. 세 마디까지 허용된다면 다음에 붙여질 한마디는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생각의 오류를 낱낱이 해부한 책이다. 나름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과 비례해 꽤 합리적인 인간이라 자처했던 나로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온 것들이 그저 불합리, 불공정, 비현실적인 사고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충격이 적지 않았음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러한 내 사고방식이 여지껏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그동안 건강하리라 여겼던 오장육부에 대한 정밀검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재미있고 인상 깊고 여운이 많아 감성을 자극하는 책을 많이 집어 들었다. 사고를 유도하는 책보다는 사고를 막아주는 책을 원했다. 물론 어떤 책도 그런 책은 없었다. 책을 쓴 사람은 이 책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강렬히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많았다. 어쩐지 기존의 내 사고체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받게 될 것 같아서 였달까. 이 책은 분명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분들에겐 금상첨화일 듯하다. 더 나은 선택은 당연히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틀린 생각, 잘못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이처럼 직접적인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책은 만나기가 어렵다. 누구나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며 그렇다하더라도 또 다른 책에 의해 언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 책이란 그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책이 전하는 세상이 전부인 관계로 책과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저자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책 밖으로 나오면 그 책과 반대되는 논리와 상황은 너무나 수두룩하다. 내 경우 두 권 이상을 동시에 읽지 않는 이상, 그리고 몰입을 전제로 한다면 보통 책 한권이 곧 한 사람의 한 가지 주장이라 여기게 된다. 그 한 가지 주장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놓으면 마치 내가 그 책을 더 잘 소화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익한 순간은 곧 다른 책과 다른 리뷰로 대체되고 독서의 경험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책도 세월이 흐르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내 기억 속엔 분명 여지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는 인식만은 영구 저장될 듯하다. 그 저장된 라이브러리에서 가끔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종류를 다시 꺼내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적용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듯 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이나 책에서 펼쳐지는 논리를 따져보고자 저자의 주장을 다시 뒤져볼 것만 같다. 유익한 책이란 이 순간의 유익함이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책이 유익하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렇지만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바보, 그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다루었다. 이 책에 의하면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은 딱 한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할지 모른다.

 

 

편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말할 때 흔히들 사고가 편향적이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하고 내 판단의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노력을 증명하려 애를 쓰곤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관점을 이동시켜 사고한다는 것의 실현가능성, 그 완벽한 일치를 백으로 보았을때 결과는 반도 되지 않을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제 1의 천성이라고. 그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만 추론하는 휴리스틱으로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온 존재였다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의 직관이 편향을 만든다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편향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은 착각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나아가 확신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일수록 사고 체계의 오류에서 벗어난 판단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자는 여러 실험을 통해 전문가들도 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일반인과 전문인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전문가는 자신의 편향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다 흥미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하 S1, S2)라는 가상의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S1은 노력이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직관에 해당하는 자아이며, 이 책의 주인공에 해당한다.(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증명했다) S2는 노력과 통제를 수반하여 느리게 진행되는, 의식하고 추론하는 자아에 해당한다. S1과 S2는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린 그들의 존재가 분리되어 활동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S1이나 S2는 모두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상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후 반응 혹은 사고 후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난 후 한 사람이 감정상으로는 슬프지만 감정을 통제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행위를 감성 대 이성의 대결로 보고 이 구조가 S1과 S2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대 이성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빠르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 느리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사고주체이다. 흑인으로 제시된 살인범의 몽타쥬를 보고 바로 혐오감을 가졌다면 S1이 작동한 것이고 범인이 여러 정황상 흑인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것은 S2가 작동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S1은 단순하고 S2는 복잡하며, 간혹 S1이 내 사고를 지배하더라도 잘 학습된 S2가 있어 결국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 S2가 내 논리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때로는 S1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직관은 마치 무당이나 역술인처럼 예지능력을 의미하는 나만의 경쟁력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관은 직관대로 나의 장점이며 사고력은 또 깊은 대로 나의 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처음부터 난 예감 했었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았어’, ‘그 팀이 우승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의 직관을 꽤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이 있다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이다. 간혹 실수나 착각을 하긴 해도 크게 봐선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건 전체 생산총량 대비 불량률정도로 치부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간혹 일어나는 실수에 해당하는 사고불량률이 가뭄에 콩 나듯 발생하는 합리적인 경우이고 나머진 대부분 실수와 착각과 오류로 얼룩진 시간이라 설명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결과만 해도 몇 십 개가 등장한다. 이 책의 예문을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일은 흥미롭긴 해도 꽤 머리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배워 온대로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을까, 였다. 논리는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반론을 만들어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구축하면서 직관은 그러려니 해 버리지 않는가. (직관은 그것이 작동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혹은 직관으로 치부하기 싫은 심리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직관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익숙함을 택하고 익숙함은 호감을 낳으며 호감은 기억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가장 허탈한 예로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판사는 배고팠을 때가 식사가 끝났을 때보다 가석방 요청을 거부하는 비율이 크다. 의사 또한 피곤한 상태에선 오진을 할 확률도 수술에서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도 잘 갖추었다.

 

우리는 미모의 상담원, 인상이 좋은 영업사원이 권하는 보험이나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감동받은 영화,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품성 있는 컨텐츠로 대체된다. 잡지의 화보를 본 기억 때문에 그리스 해변 가에 살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광우병 소식 때문에 갑자기 소고기를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다. 노인에 관한 문장, 노후에 관한 기사를 보면 느리게 걷게 된다.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발음이 쉽고 철자도 쉬운 회사의 주식에 끌리게 된다. 같은 결과라도 병원에선 생존률 보다는 사망률에 반응한다. 선거에선 객관적인 능력보단 자기 마음에 드는 외모를 보고 후보를 결정한다. 행복감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 상태만이 기준이 된다. 혜택은 과대평가하고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복권은 아무리 당첨률이 낮아도 상금을 타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당첨 가능성 때문에 계속하여 사게 된다. 테러나 가스폭발은 위험률이 매우 낮지만 걱정하느니 마음 편하게 보험을 들게 된다. 쓰나미나 지진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가 여행을 갈 땐 중요한 변수이다. 새로 생긴 식당에서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후회할까봐 주문을 하진 않는다. 미래의 휴가는 마지막 휴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 돈 주고 샀기 때문에 눈보라나 폭우를 뚫고서도 야구 경기장으로 향한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며 손해를 보아도 다 경험상 좋은 실패였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옳고 좋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판단의 패턴은 반복되며 여간해선 수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까. 저자는 의심을 지속하기 보다는 확신에 빠지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 생각엔 직관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보다 익숙한 그림을 택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즉, S2는 S1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인간은 좀 더 쉽고 편한 S1을 자꾸 지향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부러 그러려고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받아 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주의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사고도 편한 방식을 좇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편한 대로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자기기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인과성이 부여되면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연성은 물론이고 타당성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좋은 일만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는 무책임한 직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비난했다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논리는 차후에 직관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느닷없이 황당한 종류의 비판을 당하는 경우 이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방법과 자료가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직관을 증거로 말하면 아무도 신빙성 있게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함부로 오해하지 말라고 비이성적이라는 핀잔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다) 그만큼 직관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심증정도로 과소평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운 때문에 발생한 일들에도 인과성을 부여해 정합성을 구성하길 좋아한다 말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자주 목격되는 예는 바로 장례식장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그 사람이 직전에 행했던 일들이 모두 사망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이가 죽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나봐... 그이가 그 일을 한 건 며칠 후 죽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이런 판단은 사후편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은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인지적 착각이 내 자신은 물론 내 인생까지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고한다. 바로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착각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평가하는 생각의 오류를 미처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심리는 미래가 불안 할 경우 더욱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가 되는 듯하다. 현재, 과거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착각은 당연히 지금 위치의 자기 능력을 과신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긍정을 지나 낙관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산 주식이 판 주식에 비해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투자자가 판 주식이 산 주식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가장 적게 거래하는 투자자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내며 여성이 남성보다 투자성과가 좋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주식에 있어 낙관은 그저 잘못된 직관의 하나의 유형일 뿐인 것. 대다수의 펀드 매니저는 포커게임이 아닌 주사위게임처럼 주식을 선택해 추천하고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는 운에 좌우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회사가 운을 기술로 착각하고 보상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식을 투자할 기회는 있었으나 주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을 보지 못해 실행에 옮기진 않아 왔다. 저자는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라서 그런 것인지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데이터가 많았고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척 흥미로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심리중 하나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위험회피’를 지향한다는 심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들이 보기보다 파 퍼팅을 할 때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이 심리는 자기가 가진 좋은 재화(예를 들어 와인이나 카메라, 자동차 등)를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재화를 얻음으로써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긴 하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기 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세상과 조직과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저자는 그래서 방어하는 쪽이 이길 승산이 많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변화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 보수지향자들이 왜 확실히 눈에 보이는 혜택보다 손실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이 논리는 이번 진보당 사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비주류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기득권과 비주류가 또 나뉘어 진다. 최소한의 변화만 원하고 손해가 적길 바라는 심리는 진보나 보수나 매 한가지라는 뜻이다. 사회가 진보적이길 바라는 것과 자기 생각이 진보적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와서 좀 충고해주었음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더욱 우리는 인간에게 실망해야지 진보에게 실망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곧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후회에 더 민감하다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지난 4.11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해온 대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당을 지지해서 후회를 할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S1이 직관이고 S2가 이성이라 보았을 때 보수는 직관에 호소하고 진보는 논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내겐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S2는 대부분 S1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기려면 S1을 더 의심하고 더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진보주의자들이 꼭 탐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생각에 관한 생각들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S1과 S2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생활하는 ‘경험자아’와 점수를 매기고 선택하는 ‘기억자아’의 출연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보아도 만약 이혼한 사람에게 당신의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간의 ‘경험자아’를 무시하고 마지막에 불행을 초래한 ‘기억자아’만 우대하여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고 행복의 유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질이 경험자아에 있으니 행복의 의미를 기억자아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결론은 S1와 S2, 그리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 사고하는 자신과 행동하는 자신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선택을 위해 S2에 더 많은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S1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그것만이 바보 같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라 조언한다. 생각보다 생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을 한다고 다 생각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는 일은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일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고 잘못 판단하길 좋아하며 그러는 자신을 가장 편안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완벽한 모순의 존재인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불변하는 딜레마일지 모른다. 생각은 그 자체로 미완을 의미하진 않으나 언제나 미완성의 결과로 인간을 곤경에 빠트린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 또한 생각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만이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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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글을 보면 참 합리적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논리 정연하고, 이론도 제대로 끌어다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픈 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글을 언뜻 보면 S2를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만, 실은 S1이 먼저 작동되어 S1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S2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S1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1은 편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 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S2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때도 있죠.

깨어있는다...........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쉼없이, 이렇게 노력하는 한사람님이 저는, 항상 좋아보이고 멋져 보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가연 2012-05-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네요. 요즘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로그인도 잘 안하는 편이라 그동한 뜸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숲노래 2012-05-19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바보짓을 해요. 사람들은 '느낀 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들어져요.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까닭은, 아이들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아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사랑이라면 이렇게 되야 하거나 믿음이라면 저렇게 되야 하는 듯 자꾸 한쪽으로 내모는 '교육을 제도권에서 주입'시키고 '책으로 읽히'며 '지식으로 가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배울수록 바보가 돼'요.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스스로 손에 호미를 쥐어 들판에서 몸을 놀리며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익혀'야, 비로소 '마음을 슬기롭게 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깨달아요.

차트랑 2012-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성공률은 언제나 80%이상,
타인의 실패율은 언제나 80%이상,
같은 대상을 두고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S1과 S2가 자신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다보면 저는 눈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5분을 못 넘기고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나?? 싶습니다요 ㅠ.ㅠ

서점엘 자주 가시나봅니다.

저의 동네에 참 괜찮은 서점이 하나 들어온지가 오래지 않은데
매장이 얼마나 널찌근하고 좋던지...
교보나 종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여유로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듯...
서적들을 디스플레이한 방식도 이건 정말 독특하다...
책을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의 것이라며
완전 효율성이 떨어지는 책들의 배치...
대신 책을 보기에는 최고의 배치...
서점에서 감동먹기는 처음이었습죠.

그곳에 종종 놀러가곤 했었는데...
어이없게도 지난해 여름 홍수 피해로 그만...
널찌근한 빌딩의 건물 지하 전체를 서점으로 꾸몄는데
홍수때 물이 가득 들어 찬거에요.

결국 그 서점은 없어졌습니다.
홍수피해로 자동차들이 사거리에서 둥둥떠다니던 지난 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하 에어컨을 돌려주는
서점에가서 책을 꺼내들면 바로 피서였는데...

그렇게 저는 서점을 잃었답니다 ㅠ.ㅠ
제가 그 서점 주인은 아닙니다만
어찌나 서운하던지...ㅠ.ㅠ

저는 서점엘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