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열 두 편의 단편이 희한하게도 술술 읽혔다. 몇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다. 다만 그땐 왜 읽다가 그만두었는지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만 읽었을 것이다. 얄미운 고양이 독서를 해놓고선 이 책을 다 읽은 척, 작가를 아는 척 했던 것도 같다. 이런 책은 다시 집어 들기가 참 싫은데 그래서 더 용기를 내보았다.

 

   순서대로 소설을 읽었고 책을 덮고 난지 며칠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소설의 해석이나 감상보다는 작가의 삶을 그려보게 되었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이 소설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내게 열 두 편의 소설은 같은 이야기로 들렸고 주인공도 한사람으로 보였다. 그 한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 지나가버린 어느 한 시기를 몹시도 안타까워하고 남몰래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지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살지 못한 회한은 왜 꼭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것일까. 누구보다 담담한 척해도 나는 그 무심함의 지나침이 바로 간절함의 다른 표현임을 알 것 같았다.

 

   알려졌듯이 레이먼드 카버는 주로 부부를 등장시켜 일상의 한 단면을 현미경처럼 관찰하고 시시콜콜하게 포착해낸다. 이들 부부는 한때 죽도록 사랑했고 그 죽을 만큼으로 미래를 약속한 채 달려왔지만 현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실제로 일찍이 알코올 중독과 가정불화로 별거와 이혼을 해 본 사람이고 치료차 입원도 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단칼에 금주결심도 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알코올 중독인 화자가 현재 별거중이거나 이혼한 상태에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리거나 더 확실한 이별을 예감하는 이야기는 원인과 배경만 달라졌지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화자들은 공교롭게도 툭하면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낸들 알겠는가’ 하고 태연스레 반문한다. 내 삶의 문제이니 ‘그들이 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고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 있었겠’느냐 자조를 일삼는다. 그렇지 않고 ‘괜찮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쩌겠는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생 앞의 무력함을 호소한다. 결국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제와 괜찮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게 남은 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첫 번째 이야기 <깃털들>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문제의 깃털을 선물한 ‘올라’였다. 나와 직장동료인 버드의 부인 올라는 센스가 결여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호감의 민폐형 인물이다.(물론 내 기준에서) 이해는 하지만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은 올라가 어리숙한 척하며 할 말은 다하는 사람임을 나는 아직 아이가 없는 프랜에게 자식자랑을 하던 - ‘정말 똑똑해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니까요. 무슨 말을 하면 그걸 다 알아들어요. 그렇지, 해럴드? 한번 아기를 낳아보세요, 프랜. 금방 알게 될 거예요.’ - 장면에서 깊이 공감했다. 가끔 (현실에서도)못생기고 뚱뚱하고 총명하지도 않은 것 같은 여성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직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을 향해 우월감의 수사를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다. 그런 유형은 내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너는 왜 아직도 남자가 없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없느냐는 핵심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 한다. 또 그런 유형은 외모적으로 평균치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와 지나친 배려를 통해 상대방을 더욱 숨막히게 하곤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 천천히 시작되는 변화와 그것을 감지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사후평가가 굉장한 쓸쓸함으로 남겨지는 글임에도 나는 그저 올라의 역겨운 치열과 그녀를 닮은 못생긴 아이의 얼굴만 강렬하게 남았다. 소설에서 강한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한 작품이다. 

 

   <체프의 집>에서 인상적인 대화는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는 화자의 항변같은 대답이다. 별거중인 아내에게 답하긴 했지만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하며 더 이상 같이 살수는 없는 이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답하는 말이기도 했다. 웨스는 여름 한동안 남의 집에 머물며 아내와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불태워보았지만 결국 그 집은 주인의 상황에 때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하는 집이었다. 아무리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도 과거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작가는 아마 술을 끊기 위해 마음으로는 어떤 결심도 하였겠지만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당시 (작가가)술을 끊으려 했던 이유가 아마도 같이 사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갈등과 함께 문제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누군가를 위해서 누구 때문에 끊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한 리뷰는 故 박완서 작가의 수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작가가 이미 아들을 사고로 먼저 보낸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심정을 더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줄거리 말미에 ‘삶이란 존엄한 것인지, 치사한 것인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하셨다. 왜냐하면 아들을 잃고도 빵집아저씨와 밤새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는 모습을 보니 부부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퉁명스러워만 보이던 빵집주인 -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 같은 - 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밤새 굽는 빵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하나 이 소설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 즉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입장과 그 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장이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 일 없는 일상과 무슨 일이 터진 일상의 합이 결국 한 사람 인생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침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운행되기도 한다.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때가 언제이고 무슨 이유때문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이 원칙은 일상을 운행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사실 중단되기 직전까지 우린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곧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하는 다음의 예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p102

 

   배경이 집이고 관계가 부부이니 인물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집을 방문해 현관을 통과하고 문을 열고 등장하는 모습도 빈번하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이지만 작가는 그곳을 불길함을 제공하는 상황으로 이용하고 섬세한 디테일은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소파, TV, 냉장고, 전화, 책상과 같은 소품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각종 음료수 및 음식을 놓고 대화가 이어진다. 대단한 사건이나 특별한 갈등이 아니라 단지 어제도 하던 일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할 줄 알았던 일,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존>은 바로 냉장고가 고장 난 일이 어떻게 일상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보존하지 못하게 하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일마치고 돌아온 저녁 왜 갑자기 냉장고의 프레온 가스가 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운전 중 중고차 바닥에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에 질식해 사망한 아빠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단지 음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이 잠시 고장 난 것일 뿐인데 그날 저녁의 풍경은 앞으로 더 크고 많은 것이 보존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나 역시 언젠가 세탁기가 고장나고 TV가 고장 난 적이 있다. 한 겨울 세탁기 AS는 그날 일과 중 가장 큰 스트레스였고 TV는 결국 새 제품으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며칠 괜히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집안 가전제품이 우리 일상을 아무 일없게 무사히 가동시키는 핵심 장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막이 객실>은 목적지가 분명하고 만나는 사람이 확실함에도 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하는지 이동 중인 화자를 통해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외려 스스르 ‘잠속으로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얼마나 무수히 잠 못드는 밤을 지내고 난 뒤 깨달았을까. 사실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어떻게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어떨 땐 앞일을 모른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일 때가 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어떤 일을 겪고 난 후 그 일을 겪기 전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우친 인생의 진리는 아닐까 싶다.

 

    <비타민>에선 어쩌다 복합비타민 방문 판매 일을 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아내는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른이 돼서 비타민이나 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남편에게 넋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남편은 골치가 아프므로 비타민이 아닌 아스피린을 찾으며 늘 필요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한 인생의 무엇을 환기시키며 피식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인생은 이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정답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사는데 정답은 없다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조심>에서는 별거중인 남편을 찾아온 아내가 정작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귀지만 파다가 돌아간다. 이때 작가는 어쨌거나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작가의 자전소설 느낌이 많이 드는데 왜 술 마시는 버릇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독백이 잊혀지질 않는다. <조심>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남편인데 이들은 절대 혼자서 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자신들을 예전처럼 돌보아주지 않는 것을 다시 알코올 의존에의 이유로 치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 중 만난 굴뚝 청소부 J.P의 아내가 외모도 건실한 여장부처럼 묘사되었고 다른 중독자의 아내들도 무척 현명하고 능력 있는 고학력자로 보인다. 이들은 <열>에서처럼 자신의 전공이나 사랑을 이유로 집을 나가거나 혼자인 남편을 - 혼자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 방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떠나가는 쪽이 아내이고 버려지는 쪽이 언제나 작가와 같은 남자 쪽이다. 그들 화자들은 누구를 탓하느냐 하면서도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신의 확신을 탓’하기도 한다. 즉, 버려질 만 했다는 자책과 반성인 것이다. 허나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제 앞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 p284

 

   상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과거의 연을 좇아가던 한 시기,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이라 인지한 바로 그 순간의 슬픔과 충격이 작가에겐 한 평생 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의 여주인공이 총구를 겨냥해야 했던 주인공은 바로 작가 자신은 아니었을까.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여자가 목격한 장면은 늙어서도 티격태격하는 老커플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시간이 되어 기차는 도착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기차에 올라탔건만 승객들은 도통 심드렁하다. 원래부터 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 p241

 

   ‘기차가 움직이면 저마다 기차가 서기전에 빠져들었던 생각, 자신들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라는 작가의 결론이 나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살짝 경마도박꾼으로 바뀌어 등장한 <굴레>에선 추락중인 가장이 아파트를 떠나면서 ‘낡은 검은 가죽의 말굴레’를 두고 간다. 굴레를 두고 간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이사를 핑계삼아 굴레를 버리기 적당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니 이사를 가게해서라도 굴레를 잊어버리게......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은 어쩌면 작가의 이루지 못한 소원처럼 느껴져 여운이 길었다.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각하나를 잃어버린 사람과 정상인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소통이라는 것이 꼭 정상적인 사람들끼리의 축복된 전유물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요즘 같으면 서로 테이프에 녹음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일랑 무슨 전쟁세대의 낭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 말미에 도저히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남편이 맹인과 짜릿한 공감을 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남편이 살면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맹인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 p351

  나는 그 순간 맹인이 작가라 확신했고 남편은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과 소통하지 못한 세상 모든 이의 표상이라 믿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모든 독자들이 그에게 ‘It's really something’, 이거 정말 뭔가가 있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고 느꼈다. 열 두 편의 이야기 중 가장 해피엔딩이면서 또 가장 울림이 크고 넓었던 이유는 마지막 대사가 마치 어느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소설은 지으려고 꾸미려고 노력해서 나오는 이야기 같진 않다. 인생이라는 게 대단히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라는 이것이 정말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별의 별 종류의 일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내일을 기다린다. 결코 아무 일 없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을 리 없겠지만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으므로 주어진 일을 닥쳐온 이별을 버려야 할 굴레를 내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 받아들이고 나서 정말 뭔가가 가득하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행인건 누구에게도 그 순간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작가는 너무 오래전에 그것을 알아버렸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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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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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녁장을 보다가 선생의 선종(善終)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두망찰한 가운데 문득 마트를 채운 사람들의 활기가, 일용의 먹거리들이 담긴 장바구니가, 살아가기 위한 나날의 노역과 노력이 퍽 낯설게 보였습니다. 가던 길이 뚝 끊긴 것 같은 당혹스러움은,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이었을까요?

 

  소설가 오정희님이 이제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에게 쓴 편지이다. 갑자기 오래된 작가의 이름이 검색어 1위로 올라섰을 때 나는 거의 부고임을 확신하며 바로 기사를 클릭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면 같이 혹은 멀리 있던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주며 세상에 그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세상에 이제는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한 시간이면 누구도 속일 수 없이 세상을 뒤덮고 남는 시절이 왔다. 그러나 소식을 모두와 공유했다고 그 슬픔의 크기까지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게 사람들을 더 슬프게 만드는 건 왜일까. 내가 아는 걸 너도 알지만 결국 내 슬픔은 내 몫이고 네 슬픔도 똑같다는 걸, 어쩌면 삶이나 죽음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걸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순간. 세상 모든 부고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날아오는 삶의 경고장일지 모른다.

 

  책도 잘 굴러가고 있던 일상에 우연처럼 나타나 때 되면 탁자위에 던져지는 월말 고지서처럼 서늘하고 불쾌할 때가 있다. 이언 매큐언의 책을 읽는 내내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았는데 - 물론 기분 좋으라고 소설 읽는 건 아니지만 - 한편씩 이야기가 쌓여갈수록 좋지 않은 기분은 더 확실하고 분명해졌달까. 한 권 들면 웬만해선 다른 책을 기웃거리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이 책보다 더 빨리 끝낸 책만 두 권이었다. 어쩌다 이 책이 한참을 내기 싫은 세금처럼 그렇게 하기 싫은 최후의 숙제로 느껴졌는지 이 불쾌감이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차분히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건 아무래도 여러 차례 배신을 당했음에도 그것을 제공한 가해자가 원망스럽지 않고 외려 더 공감하게 된, 더 배반당한 마음 때문인 듯하다. 여덟 개의 작품이 대부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청소년이거나 성인이 되었어도 비정상적인 정신 소유자로서 미성숙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허나 이들의 강박과 폭력, 만행, 강간, 살인은 그들의 일상과 패턴 속에서 대단치 않게 스쳐지나가거나 독자에겐 그다지 큰일이 아닌 양 비추어진다. 작가가 흔한 일처럼 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폭행범이고 강간범이고 살인자에 아동 학대 및 성추행자이지만 어느새 그들에 동조되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잘못되었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하는 내 자신과 언제나 마지막에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런 결말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몰랐다고 생각되는 배신감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고만 스스로를 속일 수 없으니 좀 더 지속되지 않는 이야기에 속절없이 당혹감만 느낄 수 밖에.

 

  모든 작품에서 어른은 가난과 질병, 우울을 물려주는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 6,70년대 영국의 경제위기를 상징하듯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며 그들은 비틀거리고 뒤틀린 모습이었다. 사춘기 화자인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매일 저녁 더 늙고 피곤하고 가난해져서 집에 가는 수많은 사람들’(『가정처방』)이었고 영국에서 시작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은 등수에서 밀려나 ‘아무 보답 없이 폐인이 되도록 달리는 패배자들의 정복욕’ 으로 그려진다.

 

- 한갓 의미 없는 자신의 왜소한 운명을 가늠하며 저린 발을 서서히 젖은 풀밭으로 내딛는 인간, 숨 막히는 거대도시의 하늘 아래, 인간의 도전욕과 유기체의 진화과정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의지를 시연하듯, 광장 저편에서 작은 아메바 덩어리 같은 것이 나타나 점차 사람의 옷을 입으며 도전욕과 결승점을 통과하려는 헛된 노력으로 무장한 채 비틀거리며 뛰어왔다. 그건 순간순간 새롭게 얼굴을 바꾸는 삶, 바로 우리 삶 자체였다.   - 48p

 

  인생이 가혹한 장거리 경주인 크로스컨트리라면 당시 영국 어른들은 뒤늦게 결승점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오는 패배자의 얼굴이었다는 통찰에서 나는 이 모든 작품 속 결말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입체기하학』에서 화자는 ‘45년 동안 잠자리에 들기 전 일기장을 써온 증조부’의 습관을 따라한다. 일기장에 집착하고 골몰할수록 아내와의 불화는 심화되어 가고 급기야 부부간의 폭력적인 상황으로 까지 치닫는다. 화자는 일기장에서 갑자기 M이 사라진 이유를 당시 입체기하학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서 찾아낸다. 일기장에서 증조부와 M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19세기 세계 패권을 장악한 영국 지식인으로서의 우월감이 가득하다. 화자인 나는 증조부에게서 상속받은 ‘방부 처리된 페니스’가 담긴 유리병을 ‘나와 증조부의 삶을 연결해주는 고리같던 물건’이라 칭하는데 이는 곧 고집스럽게 후대에 전수되는 영국의 우성 유전자로 보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징적인 유전물질을 깨트리는 주인공은 바로 그 유전자를 품고 길러야 할 화자의 아내였다. 여기서 작가는 과거 대영제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실에 머물러 있는 오늘의 성인 패배자 - 작품 속 청소년들의 부모 - 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일기장에서는 헌터라는 젊은 수학자가 세미나에서 발표한 ‘표면이 없는 평면’이론이 싸구려 속임수라 비난 받자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이론을 증명하고 자신은 사라졌다는 기록을 확인한다. 마치 M이 사라진 미스터리를 발견해낸 것이 대단한 일인양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화자가 진짜로 실행하고 싶었던 것은 아내(현실적 장애물)의 제거가 아니라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쉬지 않고 충고하는 현실의 잔소리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내에게 똑같은 실험을 해보지만 아내는 사라지는 듯 끝까지 사라지지는 않고 메아리처럼 목소리만 울려댄다. 어찌보면 우스운 이야기를 이토록 심각하게 전개하는 작가의 계략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작가는 시종일관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대단하게 말하거나 아주 심각한 일은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능청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결핍된 욕망이 자신의 자식에게 투사된 어머니상은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가장무도회』등에서도 나타났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는 작품들 중에 가장 문체의 온도가 높았는데 고백화자인 나의 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언뜻 보면 작가가 벽장 속에 틀어박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남자의 편에 선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없이 나를 혼자 키우면서 집에 가두고 밤낮으로 지킨 엄마 때문이라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 스스로도 ‘내 삶의 첫 두해를 언제까지나 반복해서 살아가며 불행하다는 생각없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오븐 속으로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 남몰래 문이 닫히기도 바랐고 교도소에서 농아인 데피와 차를 마셨던 석 달 동안이 가장 행복했다고도 기억한다. 이토록 자발적 자폐공간을 꿈꾸고 오래 유지하려는 화자에게 독자가 진심으로 연민을 표하려 할 즈음 작가는 슬며시 물음표를 던진다.

 

- 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기들이 부럽습니다. 이불에 싸인 채 엄마 품에 꼭 안겨 돌아다니는 모습이.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난 왜 그럴 수 없죠? 왜 나는 왔다갔다 일하러 가고 식사 준비하고 살기 위해 수백 가지 일을 해야 합니까? 난 유모차에 타고 싶어요. 천치 같은 짓이죠. 180센티나 되는 내가.   -140p

 

  나는 왜 이 문장들이 언제까지 부모 탓을 하며 어릴 적 유모차나 그리워 할 것이냐는 따끔한 조롱으로 들리는 걸까. 설령 부모가 그렇게 키웠다 하더라도 ‘180센티나 되는 내가’ 유모차 타령을 하는 건 똑같은 전철을 밟겠다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나 하는 자조섞인 질타만 같다. 『가장무도회』도 피해자로서의 조카 헨리의 상처보단 가해자로서의 이모 미나의 책임에 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은퇴한 연극배우 미나는 엄마를 잃은 열 살 조카 헨리에게 초현실적인 엄마로서 역할하며 매순간 자신들의 현실을 잊고 싶어 한다. 연극대사처럼 대화하고 무대의상을 입은 채 식사하고 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가장을 일상화하여 진짜 자신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것이다. 미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이 순간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자신이다. 헨리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이모(를 포함한 세상 모두가)를 통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미숙한 자신이 보기에 어디까지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 누군가가 다른 사람처럼 입고,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면, 그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타인으로서 했던 짓에 대해……?    -206p 

 

  즉, 예술가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이 창조해낸 ‘새로운 자기’가 벌인 행동은 과연 누가 책임 질 것인지 가면만 쓰면 잘못도 용서되고 따라서 벌도 받지 않는 것인지.

 

  부모의 역할을 다정한 소꿉놀이로 시작해 서늘한 근친상간의 이벤트로 발전시킨 경우가『가정처방』이었다. 사실 이 작품은 ‘근친상간’이라는 심각성 보다 사춘기시절 남매끼리의 해프닝 정도로 이해했다. 나를 성인세계로 인도한 친구 레이몬드에 지지 않으려고 집에서 성행위 예습을 한 것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화자는 어설픈 성교에도 불구하고 처음을 치루고 성인으로 입장했다는 자부심만큼은 만족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돌아보는 화자에겐 당시 일이 가정 ‘폭력’이 아닌 ‘처방’으로 기능하므로 사실 굉장히 남성중심의 시각이 배어 있다고 느껴져 내겐 불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름의 마지막 날』과 『나비』는 한 번의 실수와 이어지는 우발적인 사고의 반전을 위해 그 전 장면 모두가 더욱 아름답고 외로워야 했던 이야기들이다. 마치 어디서 들은 이야기처럼 전혀 내 경험이 아닌 것처럼 남일 전달하듯이 담담하고 차분히 상황을 묘사하는 작가가 소름끼치도록 오싹해졌달까. 우리 집 다락방에 이사 온 너무 뚱뚱한 제니는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전형적 인물인데 제니는 그러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함과 섬세함, 인내심을 무기로 집안 엄마의 공백을 메우려한다. 그러나 제니의 자발적 엄마되기는 사람들의 몸을 편하게 만들었을진 몰라도 마음은 불편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제니와 제니에게 맡겨진 앨리스, 그리고 내가 만든 여름날의 추억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이다. 나는 정말로 제니와 앨리스가 보트가 뒤집혀 빠져 죽을지 몰랐었기에 읽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멈칫 했었다.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같이 겪은 다른 이에게는 잊어야 할 사고가 되는 일 이것이 인생이라는 입체기하학일까 싶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여름날 강가의 보트에 탄 사람은 엄마를 사고로 잃은 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제니와 엄마가 내 팽겨쳐둔 앨리스였다. 세 명 모두 진짜 자신의 보호자가 부재한 무방비 위험 상황에서 가장 약자(여성과 아이)가 희생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는 뜻으로도 읽혀 덮고 나서도 씁쓸했던 이야기다.

 

  『나비』역시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일을 끝내 확인해야 하는 잔인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반전은 - 목과 턱이 구별되지 않아 불신감을 주는 - 용의자로 지목될 만한 인상을 가진 내가 결국 소녀의 살인자였다는 게 맞다는 사실에 있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아이를 죽인 원인과 그 배경에 있었다. 나는 아이를 성폭행해서 죽인 것이 아니고 내 욕망을 목격한 그 아이를 살려봤자 어차피 성폭행범으로 지목받을 것이라 믿었기에 살리지 않았을 뿐. 화자에게 살인 자체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죽은 사람, 시체를 처음 보았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이전에도 차에 치인 개와 어머니의 시체를 보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시체란 것은 삶과 죽음이 대조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인데 늘 죽음처럼 살다간 어머니의 죽음은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땐 시체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나 화자는 소설 맨 첫 문장에 ‘목요일에 나는 난생 처음 시체를 보았다’라며 자신에게 특별한 에너지를 주었던 제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곤 제인과 뜻밖의 산책의 실마리가 된 나비에 대해 강렬한 싯구를 선사한다.

 

“조금만 더 가면 나비가 나와. 빨강나비, 노랑나비, 그리고 어떤 땐 초록나비도.”

 

  그에게는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일상들이 ‘손을 내미는 순간 날아가는 나비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던 것. 그러니 운하에 빠져 익사한 제인은 결국 나에게 한 마리 핑크빛 나비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화자의 어머니는 화자에게 얼굴기형을 물려주며 삶에 무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상하게도 아이가 머리를 하천에 쳐 박은 광경이 영화 <시>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을 한 여고생과 겹쳐졌다. 나는 이 작품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고 특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소녀를 밀어버리는 장면과 마지막 돌을 주머니에 넣고 피해자 부모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결말이 그래도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잘 살아보고픈 의지로 다가와 응원을 하기까지 했다.

 

  표제작이었던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사실 그다지 인상 깊진 않았다. 그나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우리가 그 놈을 아는 이상으로 그놈은 우리를 잘 알 터였다’고 언급한 쥐 한 마리였다. 두렵고 끔찍하지만 첫사랑에 빠진 자신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판단되는 쥐를 때려잡는다는 것의 의미가 더 이상 덜 익은 첫사랑은 의미가 없고 끝이 났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 부분은『입체기하학』에서 아내가 깨버린 유리병과도 같은 장치여서 충격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실제로 고양이만한 쥐와 대치한 순간이 있었고 그때 이 쥐를 잡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함을 실감해 본 적이 있어서 쥐로 인한 공포감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여자 친구의 이혼한 아버지는 화자를 주점으로 불러내 경제적으로 화자를 이용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작품 전반에 미성년자들의 부모, 즉 기성세대로서의 장년층은 피곤하고 무력하며 무례하거나 무식하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들의 위험한 무의식의 세계는 어느날 갑자기 도래한 특별한 징후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혔다.

 

  가장 짧았던 『극장의 코커씨』는 사람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꼬집는 일종의 풍자극으로 이해했다. 연극연출가와 안무가, 음악담당의 스탭들이 자본을 향해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갑이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드러워도 노동해야 하는 을로 비쳐졌다. 그들 중 스스로 코커를 자처한 한 배우가 당신들이 진짜로 보고 싶은 장면은 흉내가 아니라 실제가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위질하듯 무대를 걸어가고 가위질하듯 사라지던 데일이라는 인물이었다. 예술작품에의 가위질(검열)을 상징하는 것인지 의아했고 다른 작품들과 지향하는 지점이 틀린 것 같아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진짜 속내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도 여덟 작품을 덮어온 내가 최종적으로 이해하고픈 작가의 공통된 주제의식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고통스런 의식, 그 혼자만의 절차이다. 오랜 세월 계승되어온 과거라는 관습에서 벗어나고, 당당하게 성인 남자의 세계로 입장하고, 한 시절의 아픈 추억은 마감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첫사랑도 고별하고, 자신을 버리거나 가둔 부모와도 화해하고, 거추장스런 가면을 벗어던져버리고 누구보다 자신을 만들어온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들이 꼭 필요하다는 당부로 들려온다. 중요한 건 어느 시기, 어떠한 방식의 의식이건 의식이후의 삶일 것이다. 무의식의 통제는 결국 의식意識에서 가능하고 살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는 자기만의 의식儀式을 통해 인간은 무의식과 의식의 불균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와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육체만 성장한 ‘성인(成人)’이 아니라 무의식마저 의식화되어 그 경계가 없어진 ‘성인(聖人)’을 어른이라 부르고 싶은 건 아닐까. 다행히 누구도 완성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욱 삶의 완성은 죽음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이 언제부턴가 - 대략 어머니를 보내고 부터인 듯 -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고 그 며칠은 함께 상중인 경우가 많은 요즘이다. 안 그래도 가을의 시작과 함께 환절기를 잘 통과하자 굳게 마음먹었던 게 엊그제 인데 금새 비보하나로 일상의 축이 흔들리는 게 우리네 중생 삶인 듯 하다. 오정희 님의 말씀처럼 ‘오늘이 변함없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그 당연함이란 필히 배반당하게 되어 있다는 섬뜩한 자각’을 잊지 않는다면 바로 지금이 마지막 성인식을 위해 마음을 일으켜야 할 시간은 아닐까. 지난날의 무언가를 꼭 버리고 싶은 사람, 알면서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잘못들에 자주 패배하는 사람, 그것들이 자꾸 앞으로 나가려는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경우라면, 이 책이 꽤 훌륭한 수단이 되어드릴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진행형이지 완성형은 아닌 존재들이니까. 성인이라고 다 성인은 되지 못한 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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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골에서 살며 지켜보니,
모든 풀과 나무는 가을에 꽃을 마지막으로 피우고 씨를 맺어
흙에 떨구고는
이 씨앗들이 흙 품에서 겨울을 나도록 해서
봄에 새싹이 돋게 하더라고요.

가을이란, 참 아름다운 철이지 싶어요.
가을빛 한껏 누리셔요.

아이리시스 2013-10-0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게 단편이었구나.. 잘 지내시는 거죠?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일정시기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음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시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데 더 낫다고 판단한 그 사람의 본능적 의지라고 믿는 편이다. 즉, 한 사람의 生에 있어서 가장 잃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그 사람 본인이 가장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실제로도 나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이 이상하게도 사고 일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 있다. 가족이 다 같이 둘러 모여앉아 같이 운명적인 한 순간을 공유했는데도 그 중 한사람은 자신이 그 순간에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심지어는 그 자리에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몇 가지 실례를 시작으로 그렇다면 치매에 걸리는 사람은 혹시 인생에 있어서 남들보다 잊고 싶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궁극에 걸리는 병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본 적도 있다. 여하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기억을 찾아야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건 이제는 그 기억을 되찾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떤 독자이건 자신의 삶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에 나라면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추적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기억만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가, 그렇다면 기억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닌가 하는 소설의 텍스트적인 질문들에 예정대로 한껏 시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느 상식 시험지의 정답같이 결정 되어 버린 답 - 십 년 전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망연자실하던 롤랑에게 신분증명서는 물론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던 위트가 은퇴를 하면서 니스로 떠나기 전 그에게 했던 말 -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라는 뻔 한 문구를 연결 지으려 습관적으로 뇌가 작동함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술 먹으면 절대로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어느 캠페인 문구의 반복적 피로 유발성 멘트로 느끼지 않기 위해 나는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쯤 롤랑의 미래분신으로 보였던 위트가 미래보단 과거가 중요하다는 말이 맞았다고는 했을지언정 그 정도는 그토록 과거를 찾아 헤매던 롤랑을 배려한 예의쯤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추적 여행이 그다지 흥미로와 보이지 않았음에도 책을 덮은 후엔 적잖이 밀려오는 아련함, 설레임 비슷한 진동들에 꽤 고개를 끄덕인 하루였다. 화자도 필요를 언급했듯이, 로마에 있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 명칭만으론 꼭 명품 패션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부티크 옵스퀴르가, 그러니까 화자가 프랑스로 건너오기 전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이 막 시작되던 장소에 가보았자 더 분명해지는 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복원이 아니라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완성일 뿐이라는 충고. 그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지워질 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너무 빨리 지워질 것을 안다는 슬픔인 것이다. 모든 사람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들 수만큼 똑같이 소멸될 것임을 알아버린다는 것. 작가는 이 거대한 슬픔의 크기를 위로하려 아이스크림 소녀와 어린 위트와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우리 모두의 어린 아이를 내세우고 있다.

 

 

  저녁 무렵 집 앞에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그 어린아이의 찰나적 슬픔을 오래 붙들고 있었던 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막연한 소회의 실체를 어렵지 않게 건져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시절 내가 잊고 싶은 과거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 이었고 결국 망각에 대한 갈망은 그 간절함만큼이나 언젠가 그리움으로 환원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잊고 싶은 것들은 결국 그 전에 갖고 싶었던 것들이었고 단지 나중에 (기억을)잃어버렸다고 잃어버리기까지의 좋았던 모든 것이 잊혀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것들의 ‘잊을 수 없음’은 잃어버릴 수는 있었던 기억과는 별도로 내 몸속에 혹은 내 마음의 나머지 속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과 그럼에도 그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이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람의 뇌는 고통을 기다리며 고통에의 반응을 쾌락과 똑같이 즐겨한다는 뇌과학의 연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단지 오래전에 지나갔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를 관통한 시간들에 대한 전관예우. 어쩌면 가장 기억하기 싫어하는 그 시간들이 바로 내가 가장 돌아보고 싶은 시간들이며 가장 나를 만들어온 재료들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다시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가장 유력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작가도 실은 전후 어느 시기를 가장 고통스러워 했겠지만 사실상 그 시기가 가져다 준 가장 큰 행복을 잊을 순 없다고 뒤집어서 항변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때 잃어버린 가족, 이제는 사라진 장소, 어쩔 수 없이 소멸된 관계들이지만 천천히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보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일이야 말로 고통과 상처를 더 확실히 마주하며 상처만큼이나 함몰되어 있던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이 되지는 않았을까.

 

 

 

 

  롤랑은 위트와 지낸 8년 동안은 자신의 기억상실을 문제 삼지 않고 흥신소 일에 잘 적응했던 것 같다. 위트와 나눈 편지들을 보면 롤랑과 위트가 서로 배려하며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호흡이 잘 맞았던 동료로 보인다. 허나 기억상실 이후 내 삶의 이정표를 제공한 동료가 은퇴를 하니 더 이상은 잃어버려서 잊고 있었던 과거를 묻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시간이 흘러 이제는 흥신소 팔년간 길러진 추적의 근육으로 과거를 대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도 생긴 것이다. 나를 찾아나서는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타당하고도 기대되는 장치, 늘 누군가를 찾는 직업에서 내가 누구인지 찾도록 한 의도된 역설, 주인공에게 도서관과도 같은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열람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단서들, 사색과 산책을 하면서 과거라는 낭만에 흠뻑 빠져들 수 있게 한 파리라는 배경, 이러한 조건들은 과연 프랑스 사람이 아닌 이 남자에게 그때 파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밝혀진 단서들은 전쟁 속에서의 ‘망명자’라는 신분과 ‘국적’이라는 안전 보호망, ‘국경’을 넘다가 벌어진 사고로 요약된다. 위조된 증명서로 파리 시내를 걷던 한 외국인 남자는 언제 어디서건 증명서를 보자고 검문당할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방법에 목숨을 건다. 그는 스위스를 통해서 포르투칼로 넘어가는 방법에 무리한 베팅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하지 못한 채 자신마저도 잃게 된다. 한 시절 그에게 있어 내가 누구라 말할 수 있는 떳떳함은 가족이나 사랑, 돈보다 중요한 가치였을까. 그에게 ‘망명’이 우연한 원인이라면 ‘국경’은 선택된 과정이고 ‘국적’은 보상같은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사례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환경과 조건이 집요하게 질문하는 정체성문제로 환원되고 독자는 전쟁과 국적과 상관없이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궁금했던 건 안전한 장소라 판단된 므제브의 남십자성 산장에 같이 간 게이와 프레디, 페드로는 외국인이었기에 이러한 여정이 이해가 갔지만 프랑스인이었던 드니즈는 왜 페드로와 함께 국경을 넘는 것에 쉽게도 응해야 했던 것일까. 당시 직업적으로는 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게이와 드니즈지만 소설 속에서는 유독 존재감 없고 생각 없는 여성인물로 그려진 것 같다는 불만은 나만의 과잉반응일까. 그래서인지 화자는 드니즈가 실종되어 행방불명이라는 문서를 보고도 어떤 흔들림이나 슬픔 따윈 내비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사실조차 화자의 과거를 찾기 위한 단서로 활용할 뿐 작가는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소식에 애타하거나 그녀 자체를 인간적으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때 그러했던 나를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는 나, 내가 나를 알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듯 했다.

 

 

  그런데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없다는 슬픔이 사랑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일이 되어 가고 있음을, 사실 요즘에서야 더 실감하곤 한다. 나이를 들면서 점점 과거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비슷한 아련함, 문득 다가오는 당황스러움이 그것이다. 시간의 속도에 대한 감각도 둔해져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찾아보면 삼 년 전이고 삼 년 전이라 생각했던 그때는 거의 7,8년 전이고 십년이라는 단위가 거칠고 무디게 잘라놓은 야채 한 토막처럼 덩그러니 간결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도 정확하고 공평하게 기억하기 보다는 각자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저장하고 살아간다는 사실도 깨닫곤 한다. 우리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아닌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진 그들과 만나고 살고 나누었다 여기며 오늘도 그 기억 속에서 웃고 울며 떠들진 않았을까.

 

 

  그곳에는 지난 오십년 동안의 각종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들을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 깊다. 이와 연계 해 기억에 남는 건 니스로 간 위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도서관 사서를 꿈꾸고 있다고 한 부분이다. 전화번호부와 연감을 뒤지며 한 평생 타인의 삶을 좇아온 그가 이제는 무수한 기록이 담긴 책들을 정리, 관리하는 사서로 살겠다고 하는 모습이 어쩐지 롤랑의 미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자신이 과거를 추적한 방법 그대로 미래도 정리할 것 같다는 예감. 롤랑은 어렵게 찾아간 사람들이 남겨준 비밀상자들을 건네받고 이제는 사라진 상자 주인의 일생을 떠올린다. 누구라도 그래봤자 거기 담긴 건 사진 몇 장이나 아끼던 기념품, 편지나 사소한 기록들이 전부일 것이다. 문득 우리네 인생의 도서관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싶어진다. 인간이 소멸되는 방법 중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외의 다른 공통된 모습을 떠올리기 힘든 내게 이 책은 삶이라는 도서관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들었다. 글쎄, 그건 아무래도 부티크 옵스퀴르가 2번지처럼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시작되는 바로, 그 거리의 빛나는 혹은 침침한 표정들이 아니겠는가. 한번쯤 다시 돌아갈 필요는 있지만 다행인건 소설속 주인공처럼 그것이 도서관을 짓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고마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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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3-09-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도서관 사서였었는데....

기억의집 2013-09-2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지금 아주 오랜만에 서재 들어왔는데 한사람님 글이 딱 보이네요. 반가워요~ 이 글 쓰고 잠깐 스크롤 해보니 계속 글 쓰셨군요. 알라딘 들어와 인사나 해야지 하다가도 잘 안 들어오게 되서 한사람님 계속 활동하고 계시는지 몰랐어요. 가만보면 책 읽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책 읽을 수 밖에 없어 나의 서재 못 버리나 봐요~ 저도 작년부터 딴곳에 정신 팔려 있다가 이젠 슬슬 서재 좀 신경써야지 하고 있어요. 여튼 반가워요~
 
혼 불어넣기 아시아 문학선 8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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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옛날

 

 

  어렸을 때 고무줄과 공기를 쓸데없이 잘했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같이 놀았던 친구들 얼굴이 아니라 불렀던 노래와 들려왔던 싸이렌 소리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불렀던 노래의 첫 구절은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이거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이 세곡이 전부였다. 이 세곡은 평생을 통틀어 애국가보다 많이 부르고 들었다고 자부한다. 한 달에 한 번 민방위 훈련을 한다고 책상 밑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을 땐 선생님 몰래 공기를 하곤 했다. 그때도 우린 무슨 지나간 유행가 가사처럼-어른들 고스톱 치며 흥얼거리시듯-이 노래들을 중얼거렸다. 북한을 꼭 ‘괴뢰군’ 혹은 ‘괴수’라 지칭하며 초전에 박살내고 쥐처럼 ‘때려잡자’고 열심히 포스터를 그려댄 시절이었다. 어림잡아 70년대 후반까지 반공의 정서는 내 말랑하던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다가 80년대 청소년시기에는 거의 10여 년 간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게)올림픽 꿈나무가 되어 무조건 일본을 이겨야 하는 반일감정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종목이건 한번이라도 일본을 이겨보는 것이 가장 큰 민족적 승리이자 공통된 기쁨이었다. 돌아보면 숨 가빴던 80년대에 어느 분야건 일본을 따라잡느라 국민 모두가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소니의 워크맨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일본음악을 듣지 말라 했었고 일본잡지를 가져오면 불온서적이라도 지녔다는 듯 교무실에 불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진국이 된 일본을 동경하고 일본의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는 누구보다 높았으나 그렇다고 일본의 문화예술에 감동하는 꼴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건 알지만 좋아하진 말아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심리가 또 하나의 우리들 성장 호르몬이었다. (나중에 올림픽을 치르고 나라전체가 좀 살만해지니 고개를 든 정서는 반미감정이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굳이 서두에 옛날이야길 한건 요즘 들어 더욱 젊은 친구들과 세대 차이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과 반일, 반미 정서는 그 기저가 국민적 피해의식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의식들인데 확실히 요즘 세대들은 우리가 뼛속깊이 교육받아 벗어날 수 없었던 민족적 열등감에서 많이 탈피된 모습들이다. 역사적 의식과는 별개로 문화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개인 취향대로 작품에 선호도를 드러낸다. 그런 모습들이 부럽진 않은데 사실 이질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일본작품을 맘 놓고 좋아해도 되나 자기검열을 하는 자신에 놀라곤 한다. 특히 전쟁의 상처나 피해를 말하는 경우 더 괴롭다. 이 책도 읽는 내내 자애와 연민의 정서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공감했으면서 마음 한 구석 좋은 책, 좋은 작가, 좋은 소설이라 소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엊그제도 아베 총리가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분개하는 한 지인이 일본작가의 작품은 감정적으로 꺼려진다고 하길래 그건 초등학교적 유치한 사고라 충고까지 했는데 이 책을 덮고 나서 더욱 나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스스로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쓴 유홍준은 이렇게 표현했다. 왜곡도 무시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과거사의 갈등을 느끼지 않는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직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은 세대에게 이 책은 어쩌면 공감의 다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한국의 제주도나 부산 해안가로 바꾸고 주인공 이름을 김씨나 박씨로 바꾸면 놀랍도록 일치하는 정서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밑바탕엔 ‘전쟁으로 피해당한 지역에서의 희생된 가족’이라는 공통분모가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나라나 누구나 상처의 유형 및 결과가 비슷하다면 비슷한 시각으로 인간을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근육처럼 길러진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은 사라지고 술은 물이 되고

 

 

  <혼 불어 넣기>의 주인공 우타는 전쟁 중에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아이 없이 홀로 살아온, 마을신과 교류하는 신녀이다. 우타는 친자식처럼 여긴 고타로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유일한 이웃이다. 고타로는 갓난아기 때 부모를 잃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툭하면 혼이 나가는 인물이고 우타는 그때마다 집나간 혼을 불어 넣어 살려주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소설의 사연이다. 즉, 혼 불어넣기는 처음으로 실패했고 실패는 곧 영혼분리, 죽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떠나간 혼은 누군가에 의해 돌아오지 않는다고 읽었다. 여기서 혼 불어넣기가 실패한 요인을 작가는 고타로의 몸을 껍질삼아 기생한 소라게 때문으로 보이게 한다. 작가는 이 소라게를 바닷가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아 숨진 오미토, 즉 고타로의 생모이자 우타의 친구가 환생한 존재라 말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궁극엔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리고 싶어 하는 듯 했다.

 

  인간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나는 생선을 먹고 자라서 바다에 의지해 살다가 죽어서는 바다 저편 세계로 가는 거라고 우타는 배웠다. - 53 p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건 조상들이 바다를 의지해 살아왔기에 자신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다짐하는 듯 보였다. 그 와중에도 고타로의 특별한 증세가 마을에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계산하는 이웃들의 대화에서 오키나와라는 지역이 일본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사실 끝까지 우타가 할머니로 인식되진 않고 고타로의 친구(작가 자신)쯤으로 보였는데 이 부분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완벽한 할아버지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작가와 동성화자가 아닌 한)어쩔 수 없는 한계는 존재하는가 싶었다.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은 이 책의 표제작이면서 다른 제목보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제목으로서의 매력이 충분했다. 메도루마 슌의 작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키나와 전통시대(오키나와 전투, 미국의 통치 등)를 살아오면서 오키나와가 반환(1972)되기 전, 그러니까 반환사실 자체를 모르는 세대의 안타까운 증언자들이다. 주로 죽은 이의 영혼을 본다던지 조용히 어린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던지 하는 죽음을 초월하는 캐릭터로 화하여 시대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관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젠가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 버린 일본 바닷가 마을의 한 생존자로 보였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의연하게 인터뷰에 응했고 마치 전에도 이런 일을 겪고 살아 온 것처럼, 그러나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읊조리셨다. 그때 여러 번 죽음을 지나쳐 온 (것 같은)노인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평안해 보였는데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도 같은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의 화자(초등 4년)는 (다른 작품보다 더)작가 자신인 듯 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20대에 브라질로 건너가 30년 가까이 남미에 살다가 온 문제적 70대 인물로서 오키나와 전투로 가족모두를 잃은 희생자이다.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총에 맞은 상처와 광산에서 생매장 됬을 때 생긴 상처, 미국인과의 격투에서 얻은 상처를 훈장처럼 지니고 산다. 타자가 목격할 뿐이지 본인이 절대 증언하지 않는다. 아마존 오지에서 금을 캐고 철광석 운반선으로 미국을 왕복하고 상파울루에 세탁소를 차리고 이발사도 했다는 할아버지는 어쩌면 일본이 들쳐보고 싶지 않은 기밀문서와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네 과일이나 훔치던 내가 할아버지와 비밀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가장 자랑하고 싶은 추억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이별의 순간에 마시게 된 술을 평생 혼자 간직하다가 꼭 한사람, 나와 마신 후 세상을 떠난다. 내가 진 술빚은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아마도 작가는 그 빚을 이렇듯 소설로 승화한 게 아닐까.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는 시점에 자연스럽게 죽어버리며 더 이상 술로 견뎌야 할 고독이 남이 있지 않았음을 항거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키나와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자유와 평화를 누구도 폄하하는 사람은 없었다. 늘 이유를 묻지 않아온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오키나와가 반환되는 것에 온몸으로 거부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기에 할아버지의 혼이 담긴 술 단지를 무참히도 깨어버리는 청년들은 과거 한 시대를 상징했던 비련의 역사 따위 돌아보지 않겠다는 새 시대의 냉철한 선언으로 들렸다.

  화자의 입을 통해 작가는 미군의 통치가 끝났음에도 일본 본토의 법대로 살아가기 싫은 지역적 저항감을 곳곳에 내비친다. 엔화의 디자인이 달러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평가와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언제 피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심드렁함은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미군의 달러가 지역민을 먹고 살게 해주었다 여기기 때문 아니겠는가. 사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강제적으로 이민(이나 이주)을 가고 가족 모두가 전쟁에 희생된 후 혼자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꽃보다 진한 향기는 바로 피보다 진한 ‘술’이었다. 지역적 특산물이 술이 되어가는 과정, 역사적 사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술의 역사, 그 술이 숙성되는 시간이 상징하는 한 세대의 고독, 같은 술이 다음 세대로 지나와 맹물보다 못한 액체가 되어 버린 광경, 그것들의 여정이 누구라도 이 작품에 흠뻑 취하게 만든 원인인 듯 하다.

 

 

나쁘게 자라고 나쁘게 싸우고

 

 

  <붉은 야자나무 잎사귀> 역시 미군 통치하에서 겪은 소년시절의 추억을 아프게 그려낸 이야기다. 나는 미군기지 출입문 앞 환락가 골목에 살고 있는 S와 복싱을 매개로 친해진다. 학교가 끝나고 S가 데려간 곳은 ‘오키나와 남자들보다 배나 큰 미군들이 싸우는’ 뒷골목이었다. 성적인 면에서 개방적인 S와 S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데 작가는 처음 가져보는 성적인 감정보다도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고 부끄러워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치 우리가 미군부대 근처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그 시절 양공주를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영양부족으로 성장이 나쁜 야자나무의 불긋한 잎사귀들을 빗대어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던 환락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조용히 사죄하려 했던 것 같다. 지금껏 나쁘게 자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쁘게 커서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나쁘게 살아왔다 평가하고 나쁘게 살 것이라 예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오랫동안 그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지 못했던 과거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똑같은 피해자인데 그 안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집단의식을 구분하는 인간의 본성은 같은 가해자인데 그 속에서 더 나쁘고 덜 나쁜 놈을 나누는 심리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투계>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온도가 뜨거웠던 글로 기억된다. 작가는 계획적으로 길러진 싸움닭의 처절한 싸움과 예정된 최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인간이 직접 키운 병아리가 도박장에서 어엿한 투계가 되어 피와 살이 뜯기는 싸움에 길들여지는 과정은 점점 목적 없이 호전적 투사가 되어가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에 이기지 않으면 죽는 것이고 이겼다 하더라도 다음엔 죽는 운명.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조차 모른 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수단이 되어야 하는 전장. 싸움은 목적이 아무리 휼륭해도 나쁜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비겁한 아버지는 일본 본토를 아무 힘없는 자신은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 싸움에 진 다우치에 비유하며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작가는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내해>는 강물과 섬을 배경으로 하면서 서늘하고 우울한 문체가 비슷해서 덮고 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글이었다. 두 작품 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여성들을 애도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은 말야. 죽으면 모두 바다를 건너서 저 섬으로 가. 그러고는 우리를 지켜봐 주지.” -234p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한 말씀이다. 어떤 여자는 ‘죽어서도 사람은 혼자가 아니야. 언제나 영혼으로 되살아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승의 상처를 이끌고>에서는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여성의 영혼이 자신처럼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나같이 어린 여자애에게 고백하는 인생이야기이다. 이미 죽은 여성이 자신의 서러운 죽음을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살 수도 있었지만 결국엔 삶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여자의 할머니는 ‘마을의 신녀들 중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었던’ 분이고 여자는 학교에 못가고 할머니랑만 살면서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들로 혼자서 살게 된 경우이다. 작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는 어머니와 선생님, 배우자를 대신하면서 삶과 죽음 모두를 의지할 수 있는 절대적 대상이었던 가보다.

 

  낮에는 밭일을 거들어 드리고, 밤에는 아홉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어. 잠들기 전에 할머니가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걸 듣는 게 가장 큰 낙이었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라든가, 젊은 시절 가나가와로 가서 방적 공장 여공으로 일하던 때 일이라든가 말이야. 전쟁 얘기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잘 말해 주었단다.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나는 무엇이든 다 할머니한테 배웠단다. 글도 돈 계산하는 법도 할머니와 함께 야채를 팔거나 빈 병을 모아 팔면서 배웠고, 몸의 변화, 마을 행사, 제사를 지낼 때 신을 모시는 법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도 다 할머니가 가르쳐 주었어. 내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다 할머니 덕분이지.   -175p

 

  불행하게 태어나 불행하게 살다간 이 여성은 같은 일본사람이지만 오키나와 외부인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살려는 의지를 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오키나와 여성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정을 준 외부남자를 끝까지 믿고 기다리지만 돌아온 건 약자를 무참히 짓밟는 집단이었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오키나와 출신이 아니거나 혹은 오키나와의 전통사회 규범을 무시하거나 본토의 (경제적)마인드를 향한 인물들은 어쩐지 모두 가해자로 등장하는 것 같다.

  기지촌 술집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조폭이나 미군을 상대하던 양공주, 신규 건설현장에 나타난 용역 일꾼들, 생필품을 팔러 오는 장사꾼……. 이들은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파생된 인물이자 오키나와 반환 시점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런 인물군은 전후 기지촌이 생성되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었고 70년대 말까지 지속된 이러한 풍경을 목격했던 내 세대까지는 대충 기억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그러니 다음 세대부턴 이러한 소설이 더 이상 등장하지 못할 역사적으로 귀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내해>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자신과 자식을 모두 버린 어머니의 슬픈 운명에 관한 기록이다. 할머니는 미군을 상대로 물건을 팔던 - 처자식이 있는, 무정하게 떠나버린 - 장사꾼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내 어머니가 된다. 나는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했기에 아버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해 여자를 안으면 발기가 안 되는 남자이다. 이 부분은 침략을 주도한 일본이 다음세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암시하는 것으로 읽었다. 할머니는 40여년 파초섬유로 옷감을 짜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영혼이 보이는 경우이다. 나에게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내해’는-나 역시도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기에-나를 반겨줄 진정한 고향인지 모른다. 마을의 공동묘지처럼 섬에 떠 있는 묘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슬프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내면 깊숙이 영혼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이긴 하지만 나는 결국 하나의 장편으로 받아 들였다. 전쟁의 상처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인간에 대해 실망하거나 인간끼리 복수하려는 정서는 읽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 바닷가와 숲을 배경으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작가의 고요한 외침을 그저 둔중한 메아리로 확인한 듯 하다. 남의 피해를 확인하니 내 피해도 사그라드는 감정만은 아니다. 외려 모든 피해를 낱낱이 소리쳐 전달하고 내가 더 피해를 보았다고 설득, 강요, 주장하는 심리가 부끄러워진다. ‘조용하고 고독하게 살면서도 힘들어하지 않는 강인함’,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이렇듯 브라질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 모습은 어떤 파도가 휘몰아쳐도 멈추지 않고 변함없이 흘러가는 바닷가의 풍경과 같지 않을까.

  작년인가 배경이 오키나와였던 미니시리즈가 기억난다. 그땐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 따윈 알지도 못했었고 그저 동양의 하와이로서 놀러가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태양이 이글거리는 산호초 바닷가 시골정경이 새삼 궁금해진다. 바닷가에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얻어 올지 벌써부터 마음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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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1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우큐우섬은 일본과 다른 겨레요 삶이에요. 류우큐우섬에서도 더 작은 섬은 또 류우큐우와는 다른 태평양 삶이고요. 아름다운 이야기 만나셨겠지요~ 오늘 달빛 한껏 누리셔요~
 

 

#1. 이별의 계절

 

 

여름이 끝나갈 즈음 어떤 인간관계가 멀어질 때가 있다. 어느 날인가부터 더 이상 서로 열대야를 안주 삼을 필요가 없어질 때, 아침이면 제철을 맞아 떼 창을 해대던 매미들이 슬그머니 조용해질 때, 한 시간씩 해가 짧아지더니 마침내 하루가 짧아진 기분이 들 때, 바로 그때 여름 내내 연락하고 시시콜콜 안부를 묻던 누군가와 시들해지는 중은 아닐까.

 

지난 이십년 간 여름에 특히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여름을 사람에 기대며 여름을 견디는 사람은 아닐까, 청소를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과 가을이 뭐가 틀린 줄 알아?”

이렇게 묻고 나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빛의 무게야.”

이렇게 답했다.

“더 단단해지고 건조해진 빛들이 내 눈엔 여름보다 선명하게 보여.”

“사람 눈이 여름보다 한 곳을 더 오래 응시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사람은 계절이 변하려고 할 때, 그때야 비로소 내가 지나온 계절을 곱씹어보거든.”

 

우리는 여름과 가을 사이를 이야기 했고 아직 가을이 오기 전에 서둘러 멀어졌다. 어떤 이와는 전화를 끊을 때 다시는 전화 할 일이 없겠구나 예감하듯, 또 어떤 이는 ‘잘가’ 라고 인사할 때 다시 볼일은 아주 멀겠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시 볼 것 같지 않아도 문득 마주치게 되는 이가 있으니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 말로 내 뜻과는 무관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저런 경험에 의한 삶의 법칙들이 하나둘 쌓여 - 아니 쌓이는 줄도 모르던 그 어느 날 - 자신만의 패턴이 되었음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 오늘 아침 비로소 빈번하게 반복되는 여름마감 이별의 법칙을 발견하곤 그것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공식을 알고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없어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여름 이별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2. 이별의 약속

 

 

<마지막 4중주>라는 영화를 보았다.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슬프지 않은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옴을 스스로 이해시키느라 오랜 시간 마음정리가 필요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서 전혀 상관없는 영화를 보았지만 전에 일어난 일이 마음의 박동에 관여한 것이라 누군가 내게 이야기했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을 것이다. 나는 온전히 이 영화에 몰입했고 영화는 내가 잊고 있었던 슬픔을 가동시켰고 그것들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이렇게 우겼을 것이다.

 

요즘 나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나이드는 것, 늙어가는 것, 그래서 잘 늙고 그것에도 만족하는 것이다. 은퇴라는 것은 저렇게 - 지금까지 행복하게 해왔습니다. 이제는 이 자리와 이 역할을 나보다 건강하고 총명한 젊은 사람에게 양보합니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 하는 것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것이리. <설국열차>나 <감기>도 <숨바꼭질>도 좋았지만 어느 순간 자극적인 소재는 마치 음료수처럼 갈증만 유발하는 것 같다면 이 영화를 꼭 추천한다. 돌아와 OST를 찾아서 다시 들었다. 바로 지난주에 하루키책을 덮고 다자키 스쿠루가 들었던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하루 종일 들었는데 갑자기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이 연주한 건 자신들의 인생이라기 보다는 모두의 인생에 기여하는 자기 역할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 2012 -

 

 

#3. 이별의 방식

 

 

 

“......거기서 벗어나 뭔가를 한다는 건 거의 생각할 수 없었어.”

“거기에 멋진 조화가 있었으니까?”

“거기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부분이 된 듯한 느낌이 있었거든, 그건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감각이었어.”

 

 

- p259,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등장하는데 한 개인이 전체의 일부분에 속해있다는 소속감, 일체감, 조화감이 주는 안정과 평화는 적어도 그 하나가 깨어지기 전까지는 아니 어쩌면 언젠간 깨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을 덮고 한 참 지나 - 막상 그땐 별 감흥이 없었지만 - 나는 여름 내내 그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관계가 일방적으로 단절되었을 때 - 주로 내가 아닌 상대 혹은 타의 및 환경에 의해 - 그것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보다 잘 헤어지는 다시 말해 이별이 더 익숙한 그러니까 이별 후 상처에 덜 민감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 그의 내적자아는 어디서부터 단단해진 것일까.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가정 하에 나는 이 소설이 좋지 못한 이별을 한 주인공이 뒤늦게라도 좋은 이별을 하고 돌아와 비로소 단단해진 자신과 마주하는 여정으로 읽었다. 나는 이별의 방식도 습관이 된다고 믿는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이별법은 하루라도 빨리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4. 이별의 대처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거나 떠나버리곤 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일터이다. 모든 일상이 잠시 정지되고 더 이상 삶이라는 그릇에 아무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다.

 

꼭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야 자폐공간에 숨어든 건 아닐테다. 어떤 사람은 방에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집과 회사만으로 최소한의 동선을 유지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취미삼는 특정 모임 혹은 장소를 자폐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다니는 장소만 다니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도 비슷한 심리에서 파생되는 증상이다. 불안하거나 위험요소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해당 장소에서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거의 24시간 잠을 잔다. 최소한의 기초대사량만 소모하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말수가 줄어들며 행동반경은 최소화한다. 잠들지 않아도 누워서 눈을 감고 잠들고자 더 정확히는 깨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슬픔을 감당하려면 일정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나는 그 슬픔의 무게에 압도되어 얼마간 항복해버린다. 그러니 이별한 후 내 자폐공간은 침대인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몸을 움직임으로써 마음을 조절한다고 하는데 나는 내 마음과 몸이 가장 일치하는 장소를 찾게 된다. 고통을 인식하고 슬픔, 분노, 원망과 화해할 용기가 일어 날 때 비로소 한발짝 내밀어 걷기라도 가능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오래 걸으면서 무언가를 떨쳐버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이도 나이 들어서 그런 건지 일단은 드러눕는다.

 

어떤 방법이 되었건 좋게, 이해할 수 있게 이별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인연따라 만났다가 인연따라 헤어지는 것이니 슬퍼할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슬픔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번 이별을 겪었고 그때마다 슬픔을 잘 극복했다고 해서 다시 슬퍼질때 덜 슬퍼지지는 않는다. 외려 어떻게 슬프고 얼마나 견뎌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그 경험치 만큼의 플러스 알파가 더해지기까지 하는 게 나이듦의 서러움일 것이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죽을 것 같던 모든 이별도 결국은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나는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이별들이 새로운 이별들을 견디고 보내게 하는 아주 고마운 시간들. 그래서 여름과 이별하는 것도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애도 과정에서 내면에 통합되어야 할 것은 떠난 사람이나 그와의 추억만은 아니다. 애도과정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도 의식속으로 통합해야 한다. 고통을 조절하고 슬픔과 화해해야 한다. 애도작업을 이행한 사람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거나 사망한 후 훨씬 의미가 풍부해지고 역량이 커진다. 내면화, 통합이 영원한 성장법임을 알고 적극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 <좋은 이별>, 김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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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8-25 0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사랑스레 사귄 이들과 즐겁게 놀고 나면
즐겁게 헤어지고, 다시 즐겁게 만날 날을 기다릴 수 있어요.
가을이 다가오는 소리도 즐거이 누리시기를 빌어요.

2013-08-25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3-08-3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다른 곳에 살았지만,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군^^*
다자끼 스꾸루와 마지막 4중주.

당신에게 여름과 함께 이별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가을과 함께 다시 만난 사람으로 해주라~

각자의 자리겠지만,
잘 지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