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하는 바보를 위하여

 

이 책을 덮은 느낌을 단 한마디로만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끄럽다’고 할 것이다. 두 마디로 가능하다면 ‘부끄럽다, 그리고 놀랍다’ 일 것이다. 세 마디까지 허용된다면 다음에 붙여질 한마디는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생각의 오류를 낱낱이 해부한 책이다. 나름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과 비례해 꽤 합리적인 인간이라 자처했던 나로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온 것들이 그저 불합리, 불공정, 비현실적인 사고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충격이 적지 않았음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러한 내 사고방식이 여지껏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그동안 건강하리라 여겼던 오장육부에 대한 정밀검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재미있고 인상 깊고 여운이 많아 감성을 자극하는 책을 많이 집어 들었다. 사고를 유도하는 책보다는 사고를 막아주는 책을 원했다. 물론 어떤 책도 그런 책은 없었다. 책을 쓴 사람은 이 책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강렬히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많았다. 어쩐지 기존의 내 사고체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받게 될 것 같아서 였달까. 이 책은 분명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분들에겐 금상첨화일 듯하다. 더 나은 선택은 당연히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틀린 생각, 잘못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이처럼 직접적인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책은 만나기가 어렵다. 누구나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며 그렇다하더라도 또 다른 책에 의해 언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 책이란 그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책이 전하는 세상이 전부인 관계로 책과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저자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책 밖으로 나오면 그 책과 반대되는 논리와 상황은 너무나 수두룩하다. 내 경우 두 권 이상을 동시에 읽지 않는 이상, 그리고 몰입을 전제로 한다면 보통 책 한권이 곧 한 사람의 한 가지 주장이라 여기게 된다. 그 한 가지 주장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놓으면 마치 내가 그 책을 더 잘 소화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익한 순간은 곧 다른 책과 다른 리뷰로 대체되고 독서의 경험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책도 세월이 흐르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내 기억 속엔 분명 여지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는 인식만은 영구 저장될 듯하다. 그 저장된 라이브러리에서 가끔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종류를 다시 꺼내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적용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듯 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이나 책에서 펼쳐지는 논리를 따져보고자 저자의 주장을 다시 뒤져볼 것만 같다. 유익한 책이란 이 순간의 유익함이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책이 유익하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렇지만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바보, 그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다루었다. 이 책에 의하면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은 딱 한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할지 모른다.

 

 

편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말할 때 흔히들 사고가 편향적이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하고 내 판단의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노력을 증명하려 애를 쓰곤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관점을 이동시켜 사고한다는 것의 실현가능성, 그 완벽한 일치를 백으로 보았을때 결과는 반도 되지 않을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제 1의 천성이라고. 그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만 추론하는 휴리스틱으로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온 존재였다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의 직관이 편향을 만든다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편향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은 착각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나아가 확신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일수록 사고 체계의 오류에서 벗어난 판단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자는 여러 실험을 통해 전문가들도 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일반인과 전문인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전문가는 자신의 편향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다 흥미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하 S1, S2)라는 가상의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S1은 노력이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직관에 해당하는 자아이며, 이 책의 주인공에 해당한다.(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증명했다) S2는 노력과 통제를 수반하여 느리게 진행되는, 의식하고 추론하는 자아에 해당한다. S1과 S2는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린 그들의 존재가 분리되어 활동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S1이나 S2는 모두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상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후 반응 혹은 사고 후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난 후 한 사람이 감정상으로는 슬프지만 감정을 통제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행위를 감성 대 이성의 대결로 보고 이 구조가 S1과 S2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대 이성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빠르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 느리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사고주체이다. 흑인으로 제시된 살인범의 몽타쥬를 보고 바로 혐오감을 가졌다면 S1이 작동한 것이고 범인이 여러 정황상 흑인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것은 S2가 작동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S1은 단순하고 S2는 복잡하며, 간혹 S1이 내 사고를 지배하더라도 잘 학습된 S2가 있어 결국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 S2가 내 논리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때로는 S1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직관은 마치 무당이나 역술인처럼 예지능력을 의미하는 나만의 경쟁력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관은 직관대로 나의 장점이며 사고력은 또 깊은 대로 나의 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처음부터 난 예감 했었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았어’, ‘그 팀이 우승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의 직관을 꽤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이 있다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이다. 간혹 실수나 착각을 하긴 해도 크게 봐선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건 전체 생산총량 대비 불량률정도로 치부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간혹 일어나는 실수에 해당하는 사고불량률이 가뭄에 콩 나듯 발생하는 합리적인 경우이고 나머진 대부분 실수와 착각과 오류로 얼룩진 시간이라 설명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결과만 해도 몇 십 개가 등장한다. 이 책의 예문을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일은 흥미롭긴 해도 꽤 머리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배워 온대로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을까, 였다. 논리는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반론을 만들어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구축하면서 직관은 그러려니 해 버리지 않는가. (직관은 그것이 작동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혹은 직관으로 치부하기 싫은 심리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직관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익숙함을 택하고 익숙함은 호감을 낳으며 호감은 기억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가장 허탈한 예로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판사는 배고팠을 때가 식사가 끝났을 때보다 가석방 요청을 거부하는 비율이 크다. 의사 또한 피곤한 상태에선 오진을 할 확률도 수술에서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도 잘 갖추었다.

 

우리는 미모의 상담원, 인상이 좋은 영업사원이 권하는 보험이나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감동받은 영화,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품성 있는 컨텐츠로 대체된다. 잡지의 화보를 본 기억 때문에 그리스 해변 가에 살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광우병 소식 때문에 갑자기 소고기를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다. 노인에 관한 문장, 노후에 관한 기사를 보면 느리게 걷게 된다.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발음이 쉽고 철자도 쉬운 회사의 주식에 끌리게 된다. 같은 결과라도 병원에선 생존률 보다는 사망률에 반응한다. 선거에선 객관적인 능력보단 자기 마음에 드는 외모를 보고 후보를 결정한다. 행복감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 상태만이 기준이 된다. 혜택은 과대평가하고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복권은 아무리 당첨률이 낮아도 상금을 타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당첨 가능성 때문에 계속하여 사게 된다. 테러나 가스폭발은 위험률이 매우 낮지만 걱정하느니 마음 편하게 보험을 들게 된다. 쓰나미나 지진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가 여행을 갈 땐 중요한 변수이다. 새로 생긴 식당에서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후회할까봐 주문을 하진 않는다. 미래의 휴가는 마지막 휴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 돈 주고 샀기 때문에 눈보라나 폭우를 뚫고서도 야구 경기장으로 향한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며 손해를 보아도 다 경험상 좋은 실패였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옳고 좋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판단의 패턴은 반복되며 여간해선 수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까. 저자는 의심을 지속하기 보다는 확신에 빠지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 생각엔 직관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보다 익숙한 그림을 택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즉, S2는 S1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인간은 좀 더 쉽고 편한 S1을 자꾸 지향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부러 그러려고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받아 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주의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사고도 편한 방식을 좇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편한 대로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자기기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인과성이 부여되면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연성은 물론이고 타당성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좋은 일만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는 무책임한 직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비난했다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논리는 차후에 직관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느닷없이 황당한 종류의 비판을 당하는 경우 이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방법과 자료가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직관을 증거로 말하면 아무도 신빙성 있게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함부로 오해하지 말라고 비이성적이라는 핀잔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다) 그만큼 직관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심증정도로 과소평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운 때문에 발생한 일들에도 인과성을 부여해 정합성을 구성하길 좋아한다 말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자주 목격되는 예는 바로 장례식장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그 사람이 직전에 행했던 일들이 모두 사망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이가 죽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나봐... 그이가 그 일을 한 건 며칠 후 죽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이런 판단은 사후편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은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인지적 착각이 내 자신은 물론 내 인생까지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고한다. 바로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착각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평가하는 생각의 오류를 미처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심리는 미래가 불안 할 경우 더욱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가 되는 듯하다. 현재, 과거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착각은 당연히 지금 위치의 자기 능력을 과신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긍정을 지나 낙관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산 주식이 판 주식에 비해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투자자가 판 주식이 산 주식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가장 적게 거래하는 투자자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내며 여성이 남성보다 투자성과가 좋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주식에 있어 낙관은 그저 잘못된 직관의 하나의 유형일 뿐인 것. 대다수의 펀드 매니저는 포커게임이 아닌 주사위게임처럼 주식을 선택해 추천하고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는 운에 좌우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회사가 운을 기술로 착각하고 보상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식을 투자할 기회는 있었으나 주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을 보지 못해 실행에 옮기진 않아 왔다. 저자는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라서 그런 것인지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데이터가 많았고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척 흥미로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심리중 하나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위험회피’를 지향한다는 심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들이 보기보다 파 퍼팅을 할 때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이 심리는 자기가 가진 좋은 재화(예를 들어 와인이나 카메라, 자동차 등)를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재화를 얻음으로써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긴 하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기 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세상과 조직과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저자는 그래서 방어하는 쪽이 이길 승산이 많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변화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 보수지향자들이 왜 확실히 눈에 보이는 혜택보다 손실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이 논리는 이번 진보당 사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비주류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기득권과 비주류가 또 나뉘어 진다. 최소한의 변화만 원하고 손해가 적길 바라는 심리는 진보나 보수나 매 한가지라는 뜻이다. 사회가 진보적이길 바라는 것과 자기 생각이 진보적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와서 좀 충고해주었음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더욱 우리는 인간에게 실망해야지 진보에게 실망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곧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후회에 더 민감하다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지난 4.11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해온 대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당을 지지해서 후회를 할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S1이 직관이고 S2가 이성이라 보았을 때 보수는 직관에 호소하고 진보는 논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내겐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S2는 대부분 S1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기려면 S1을 더 의심하고 더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진보주의자들이 꼭 탐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생각에 관한 생각들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S1과 S2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생활하는 ‘경험자아’와 점수를 매기고 선택하는 ‘기억자아’의 출연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보아도 만약 이혼한 사람에게 당신의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간의 ‘경험자아’를 무시하고 마지막에 불행을 초래한 ‘기억자아’만 우대하여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고 행복의 유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질이 경험자아에 있으니 행복의 의미를 기억자아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결론은 S1와 S2, 그리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 사고하는 자신과 행동하는 자신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선택을 위해 S2에 더 많은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S1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그것만이 바보 같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라 조언한다. 생각보다 생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을 한다고 다 생각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는 일은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일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고 잘못 판단하길 좋아하며 그러는 자신을 가장 편안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완벽한 모순의 존재인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불변하는 딜레마일지 모른다. 생각은 그 자체로 미완을 의미하진 않으나 언제나 미완성의 결과로 인간을 곤경에 빠트린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 또한 생각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만이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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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글을 보면 참 합리적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논리 정연하고, 이론도 제대로 끌어다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픈 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글을 언뜻 보면 S2를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만, 실은 S1이 먼저 작동되어 S1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S2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S1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1은 편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 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S2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때도 있죠.

깨어있는다...........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쉼없이, 이렇게 노력하는 한사람님이 저는, 항상 좋아보이고 멋져 보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가연 2012-05-1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네요. 요즘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로그인도 잘 안하는 편이라 그동한 뜸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숲노래 2012-05-19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바보짓을 해요. 사람들은 '느낀 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들어져요.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까닭은, 아이들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아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사랑이라면 이렇게 되야 하거나 믿음이라면 저렇게 되야 하는 듯 자꾸 한쪽으로 내모는 '교육을 제도권에서 주입'시키고 '책으로 읽히'며 '지식으로 가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배울수록 바보가 돼'요.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스스로 손에 호미를 쥐어 들판에서 몸을 놀리며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익혀'야, 비로소 '마음을 슬기롭게 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깨달아요.

차트랑 2012-05-2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성공률은 언제나 80%이상,
타인의 실패율은 언제나 80%이상,
같은 대상을 두고도 이렇게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S1과 S2가 자신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ㅠ.ㅠ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다보면 저는 눈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5분을 못 넘기고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나?? 싶습니다요 ㅠ.ㅠ

서점엘 자주 가시나봅니다.

저의 동네에 참 괜찮은 서점이 하나 들어온지가 오래지 않은데
매장이 얼마나 널찌근하고 좋던지...
교보나 종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여유로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듯...
서적들을 디스플레이한 방식도 이건 정말 독특하다...
책을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의 것이라며
완전 효율성이 떨어지는 책들의 배치...
대신 책을 보기에는 최고의 배치...
서점에서 감동먹기는 처음이었습죠.

그곳에 종종 놀러가곤 했었는데...
어이없게도 지난해 여름 홍수 피해로 그만...
널찌근한 빌딩의 건물 지하 전체를 서점으로 꾸몄는데
홍수때 물이 가득 들어 찬거에요.

결국 그 서점은 없어졌습니다.
홍수피해로 자동차들이 사거리에서 둥둥떠다니던 지난 해 여름의 일입니다.

여름에는 시원하 에어컨을 돌려주는
서점에가서 책을 꺼내들면 바로 피서였는데...

그렇게 저는 서점을 잃었답니다 ㅠ.ㅠ
제가 그 서점 주인은 아닙니다만
어찌나 서운하던지...ㅠ.ㅠ

저는 서점엘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이렇게
길어졌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