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뭐해?

 

 

 

역시 답이 없네... 왜 가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카페에서 아침부터 혼자 중요한 일 있다는 듯이 커피 한잔 시켜놓고 앉아 있고 싶을 때 있잖아. 그러니까,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로 옷은 막 운동 끝나고 들어 온 느낌으로 모자도 쓰고 선글라스는 물론이요 나름 메이커 운동화도 신고 말야.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늘이 진짜 파래서 산책하다가 그러고 말았어. 막상 그러고 앉아 있으니 뭐 생각한 만큼 별다르진 않더라. 이 시간에 한가하게 카페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그런 사람이 따로 있는 건 아니더라구.


 

 

 

 

 

 

사실은 24시간 오픈하는 카페에 사람들이 노트북 가져와서 숙제나 자기 할 일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나도 슬쩍 답사 나왔어. 요즘 그 핑계로 여기저기 카페만 기웃거렸지. 은근 카페에서 정해진 시간에 와서 소설 쓰는 작가들이 많다고 하더라. 은희경은 새로 소설 쓸 때면 꼭 집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는대. 새 노트도 사고 손톱도 깎는다지. 어떤 작가는 꼭 아침에 운동을 하고 와서 글을 쓴대. 근데 나는 왜 집을 나가면 그대로 어디로 떠나고만 싶지 글 쓸 생각은 나지 않을까... 하하. 운동하고 나면 배만 고프고 말이지.

 

 

 

 

 

 

 

보고싶다. 언니야. 언니도 이 좋은 가을 하늘을 보고는 있는 걸까. 나 오늘부터 다시 글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어. 다시 이 마음이 생길지 나도 궁금했는데, - 사실 그래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말이야 - 세상에 언제 그런 맘이 들었는 줄 알아? 아까 카페에서 심심해서 직원에게 볼펜을 빌렸지 뭐야. 가방을 뒤지는데 하필 은희경 노트가 나오는거야. (사은품으로 받은 그들 노트 채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어쩌다 무심코 펼쳤는데 그만 옛날 일을 보게 될 때 있잖아. 거기 끙끙대는 내가 귀엽게도 앉아 있는 거야. 그런데 빌린 볼펜이 생각외로 너무 잘 써지는 가운데 다시는 돌려주기 싫은거야. 마치 돌려주지 않으면 그대로 뭐라도 마구 쓸 수 있을 것 같은 이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 웃기지? 그때 깨달았어. 바로 지금 이순간이구나. 지금부터 글을 쓰고 책을 들치면 되겠구나. 그 지금을 기다렸고 그 지금이 다시 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많이도 두려웠거든. 아니 그립고 아련했거든.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에 꼭 하는 일이 두가지 있어요. 집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는 일과 손톱깎기. 익숙한 공간에서는 뻔한 생각 밖에 안 떠올라서 떠나는 거구요. 그리고 손톱이 길면 갑갑해서 자판을 치지 못하거든요. 

 

 

 

 

 

 

 

 

덧)

 


근데 어쩌지. 난 반대로 손톱이 없으면 자판을 칠 때 너무 투박하게 느껴져서 싫던데. 손톱을 바짝 깎아 버리면 마치 쌩얼이 된 것처럼 부끄럽단 말이지. 볼펜 돌릴 때도 손톱이 있어야 감각이 예민하고 분명해지거든. 역시 작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야. - 작가 손톱이 좀 아트 적이면 안되나 -  그나저나 오늘 저녁 반찬은 뭐할거야? 난 집에 오면서 닭한마리 사 왔네. 오랜만에 닭볶음탕이나 해 먹으려구. 가을 하늘 본 김에 소주나 한잔 해야지. 글은 언제 쓸거냐구? 하하, 다이어트와 글의 법칙은 변함없이 매 한가지. 언제나 내일부터. 그럼 오늘은 이만. 소주 생각나면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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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언니는 오랫만에 알라딘 죽순이 하고 있어요.
덕분에 님의 따끈따끈한 글들도 바로 읽어주시고...괜찮은걸요~^^

우리 동갑내기끼리 무슨 언니냐구여?
그냥 꽃다방에서 언니 찾듯...그냥 무명씨의 호칭 '언니'하자구여~.

어느덧 가을이예요.
시간만큼 좋은 치료약은 없지 싶습니다.

참고로 제 손톱이요?
전 손톱이 생인손에서 벗어날 정도로 고만큼, 살짝 긴게 좋아요, ㅋ~.

숲노래 2012-09-1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마음 되시기를 빌어요.
좋은 삶은 스스로 빚으니까요.

2012-09-12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9-1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끙대며 앉아있는 한사람님 모습이 귀여웠다는 표현, 듣던 중 반가운데요?
제가 페이스북을 안 써서, 죄송해요,,, 대신 카톡은 이제 시작했다눈.. 캬.

한사람님도 참 뜸했지요?
그런 공간이네요... 그래도 이제 글 쓸 맘이 생기셨다니... ^^
아, 저녁 먹으로 가야겠습니다.
 

 

 

#1. 근황

 

 

 

글을 왜 안 올리냐는 질문에 해당하는 안부 인사를 받는다. 근 한 달 이상 아무 책도 안 읽으며 글도 쓰지 않았던 이유를 나 자신도 설명하긴 곤란해 그때마다 그냥요, 서재가 싫어져서요, 좀 노느라구요, 이런 식의 대답을 돌려가며 막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분간은 달라지지 않을 듯한 걸 어떻게 하나.

 

매일 서재에 들어와 이웃의 글을 확인하고 새로 나온 책을 검색하고 무슨 새로운 소식이 없나 기웃거리던 일상을 때려 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 넘었다. 대신 온라인이 아닌 오프의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책을 덮고 사람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시발점이 된 건 아무래도 내 스스로 글에 대한 진정성의 여부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인 듯. 내가 회의를 느끼니 꼭 나 같은 사람만 보였달까. 사람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를 보면서 통감한지 오래지만 대상이 타인이 될 경우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일치하지 않는 정도가 이해의 범위를 넘어설 때 그리고 그 현장을 똑바로 확인할 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나는 내공이 쌓여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리뷰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책과 관련한 어떤 글도 끄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책에 화가 난 것인지 글에 마음이 상한 것인지, 책 읽고 글 쓰는 사람들이 싫어진 것인지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모두 거짓말 쟁이라는 생각과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위선자, 글이라는 무기로 우아하게 타자를 짓밟는 무서운 사람들, 앞과 뒤, 속과 겉이 다른 서늘한 사람들, 온라인에서 중독과 집착으로 존재감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다를 건 하나 없는 비루한 나날들. 이런 시간과 작업들이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고 따라서 다른 재미난 사람과 그들의 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건 말건 당신의 글을 쓰세요, 이렇게 충고한다면 할 말은 없다. 모든 건 내 탓이다. 무언가 해온 것도 무언가를 느낀 것도 모두 나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력의 여부는 이성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다분 감성의 결과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곳에서 글로만 비슷한 생김새, 비슷한 생각, 비슷한 이야기에 공감을 하였다고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판단하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사람은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뿐이지 그 다음 그 사람에 대한 이성적, 합리적인 의견은 좋거나 싫기 때문에 불과한 파생적 나머지, 부연의 사족 일뿐이다. 우리의 이성은 절대 직관을 이기지 못한다.

 

 

#2. 글과 생각 

 

 

 

그나마 이곳을 떠나 최근엔 - 근 보름에 걸쳐 - 거북이 걸음으로 한권의 책을 겨우 읽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 떠밀리듯 자리를 떠난 이웃분이 글을 계속 써야할지 고민이라는 말에 한번 읽어보라 전해주신 책이다. 제목도 의미심장한 <칼 같은 글쓰기>.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상대에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랬다 하여도 상대가 모두 이해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어려웠고 보편적이지 않았고 저자의 다른 소설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아 그저 상상만 할 뿐이었다. 나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이유를 찾아보려 했는지 모르겠는데 비슷한 것 같다가도 그 철학적 깊이에 가끔 내 주제를 깨우치곤 했달까...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스스로에게 조차 설명, 설득할 수 없다면 타자에게 떠드는 이야긴 모두 그들이 원하고 익숙해 하는 잡담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의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기억나는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저는 말이나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결국 선택과 행동이라고 봅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 글을 적어 알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는 뜻은 무언가에게 화가 나 있다는 말과 같다. 마음을 닫으면 입을 답고 손을 접는다. 그래봤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말하고 싶지 않았고 쓰고 싶지 않았다고 또 떠들게 분명하면서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의 한계일까. 마치 화해하고 어차피 또 만나게 될 걸 알면서 싸운 연인에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것처럼. 지금은 방황 중, 지금은 고독 중, 지금은 반성 중, 지금은... 이별 중... 다음은 선택과 행동이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뜻 모를 이야기도 도움은 된 것 같아 책을 덮으며 가슴이 넓어진 느낌은 들었다. 그가 왜 하필 이 책을 읽어보라 했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일만 글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책으로 마음을 건넨 그는 정작 이곳을 사랑하고 이곳에 의지했기 때문에 다시는 글로써 돌아 올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옛친구 하나는 자존심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 현재 내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온라인 생활도 십 오년 정도 되었을까. 경험상 글로 받은 상처는 내 생각에 완전 회복은 불가다. 영원한 상흔에 가깝다. 만나서 얼굴보고 욕설을 들은 것보다 오래간다. 마음에 새겨지는 화인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면 아무렇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보면 구경꾼인 사람도 마술을 보고 죽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보고 들은 것, 말하고 뱉은 것은 없었던 일이 되지 못하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흘러 다른 좋은 일들이 그의 가슴에 우리들 머리에 채워지길 기원한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은 경제 이야기엔 주저하지 않다가도 정치 쪽으로 가면 선뜻 발언하길 주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말부터 신문엔 안철수의 책 출간소식과 의미해석이 이어지고 있다. 문자가 날아온 날 저녁에 주문을 했더니 - 책을 산 이유는 순전 등떠밀려서... 네가 빨리 읽고 전해달라는 압력에 의해서 - 몇 시간 후 새벽에 배송을 했다는 메일을 받았고 다음날 아침에 책을 받았다. 알라딘에서 주문하고 가장 빨리 받아본 듯하다. 더불어 일개 독자로서 안철수의 책이 어떤 국가적으로 전사적인 프로젝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예상하기 보다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태도와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았다. 예를 들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나름의 원칙이 있다하면 그건 어떤 기준일까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할 때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서 체득된 가르침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건 누구도 틀렸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인데, 우린 공감하지 못한다 해서 너무 쉽게들 비판하고 사는 건 아닐까... 단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의미 있고, 열정을 지속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가' 의 세 가지만 생각했고 성공가능성은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존경하던 한 분이 간단한 문제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려는 이유가 돈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일 때문인가를 냉정하게 돌아보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다른 회사를 선택할 때에도 중요한 문제이며 사람은 월급, 인간관계, 일의 재미중 하나만 만족해도 그런대로 버티며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는 결국 내가 어떤 사항을 가장 중요시 하는지 역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대부분 나는 일이 재미없어진 이유가 인간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이만큼 했기 때문에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생겼던 것인지 모른다.

 

'의미 있고, 열정을 지속할 수 있고, 잘할 수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의미부여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진부한 답을 떠올린다. 그러나 열정의 지속은 관심과 재미가 없다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열정 없이 잘하길 기대한다는 건 명백한 욕심이다. 원래부터 잘할 수 있었다 해도 언젠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잘하고는 결과의 우수성이 아니라 시작에의 자신감일 것이다. 시작이 반인데 그 시작의 발걸음이 매번 무겁다면 언젠가는 지치게 된다.

 

여름까지는 좀 더 더워볼 생각이다. 더 놀아볼 생각이다. 더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다. 혹시나 휴가를 앞둔 이 여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분들을 응원하고 싶다. 그분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그렇게 생각을 했으면 뭐라도 선택하고,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건 안철수도 김철수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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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2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7-23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즐겁게 누리셔요

2012-07-23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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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엄마를 보내드린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내게 복역 중이시다. 참으로 지독하고 잔인한 딸이다. 허나 엄마에게 잘 가시라 인사하는 일, 그것은 곧 내게 다른 삶을 살라는 말과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살라는 뜻과 같았다. 엄마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고 그렇기에 지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고 믿는다. 엄마와 헤어지는 날이 아마 내겐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이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는 기쁠까 슬플까. 엄마는 나를 반겨주실까 꾸짖으실까...

 

 

소설을 사다 놓고 여러 번 읽기를 주저하곤 했다. 책을 덮으면 어쩐지 나 역시 작가처럼 엄마에게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의 의미도 결론도 앞으로의 갈 길도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삶의 핑계를 대고 이유를 만들어 작별을 보류한지 벌써 5년째. 몇 주째 소설의 제목을 스치기만 해도 나는 아직 엄마의 부재를 메꾸어 볼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부끄럽고 옳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면 엄마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엄마의 한마디 대답과 격려, 혹은 잔소리, 아니면 말없는 미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가 없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이미 죽은 엄마를 그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보내드리지 못한 듯하다. 둘 중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으니 엄마와 나는 사실 그 날 이후 같은 자리에서 몇 년째 대치중인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이년반 동안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기꺼이 엄마를 팔고 죽음의 사연을 과시하며 슬픔을 전시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내 특별한 사연을 되도록 많이 떠들고 싶어 안절부절 이었다. 엄마의 죽음을 극복한다는 구실로 더욱 엄마의 죽음을 말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내 글이 지향하는 결론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사람을 잊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결국은 더욱 그리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뿐. 이 소설은 일흔 넷 작가가 아흔 넷의 어머니와 작별하는 심경을 기록한 고백록이다. 뼛속에 사무친 그리움이 증오와 원망과 분노로 대체된 세월을 보내고 어머니의 시신 앞에 돌아와 비로소 자신과 어머니, 가족과 화해하는 순간을 아프게 그려내었다. 열다섯 이후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와 객지를 떠돌던 아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혹시 ‘잘가요, 엄마’ 그 한마디는 너무 짧은 인사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다 하지 못한 말이 넘쳐흐르고 그렇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최후의 신음소리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하고 한 점 먼지로 날려버리도록 그리하여 더 이상 강 건너 불 보듯 구경꾼을 사임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들을 따라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은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다. 아내가 여행 간 사이 마치 자신도 여행을 떠나듯 고향을 향한 여정이 곧 내 원망과 분노를 돌이켜보고 내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한평생 드난살이와 품팔이로 살아온 어머니의 죽음이 절망만은 아니었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나를 강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일까. 소설 속 사람들은 끈질기게도 내게 그만 엄마를 놓아주라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다. 그들이야 말로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듯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작별 과정을 지켜보며 나만의 은밀한 이별식을 치룬 것이다. 소설 속 어머니의 죽은 표정에서 내 어머니의 보랏빛 시신을 겹쳐볼 수 있었고 그 곁에 선 작가의 결연한 얼굴 위로 내 붉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무허가 화장장에서 어머니가 연소될 때 소멸되어가는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꼭 내 가슴속 불타버린 새까만 그것만 같았다. 나를 안아주고 먹여주던 세상 유일한 살결과 체온의 어머니가 모두 타 버릴 때 작가는 무엇을 태웠을까. 오래 세월 피할 수 없었던 결핍과 수치심,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허세, 위선을 견디기 위해 자학해온 고통의 시간들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토록 생존하기 위해 질기게 부여잡아온 세상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는 한 줌 재로 남아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머니의 허물도 치욕스런 가정사도 개인의 누더기 같은 치부도 아니었다. 구십 평생 끝내 다 치르고 만 어머니의 죄값도 아니었다. 당신은 위대하진 않았지만 장한 어머니였고 삶이 눈부시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허물이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다 갚고 가기 위해 모진 삶을 살았다고 자식에게 모진 삶만을 남기는 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고도 자식을 등에 업는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토록 그 어머니의 안온한 등허리를 기억하며 세상과 당당히 마주해온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머니를 등져온 건 세상을 속여 온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눈을 감자 이제야 뒤돌아 있던 등을 다시 돌린 것이었다. 우릴 향해 열어젖힌 작가의 앞모습은 한없이 엄숙했고 목메인 광경이었다.

 

 

소설엔 어머니 사후 성이 다른 아우가 형을 고향으로 이끌며 지난 시절 추억의 장소를 돌아보는 과정을 담았다. 형제는 살아생전 어머니집과 가족 내 서글픈 추억이 어린 중국집, 어머니가 방아를 찧고 국수를 말던 권씨네 고택, 방학마다 떠나있던 외갓집을 차례로 돌아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잔해가 된 어머니를 흩뿌리며 형은 아우와 화해한다. 마을 산기슭 위로 사라지는 어머니를 향해 그들은 인사한다. 순간 엄마야 누나야를 외치며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힘겨울 때마다 뛰는 것이 유일한 용기였고 위안이었던 작가가 어린 시절 ‘꼬질꼬질하고 암울한 애옥살이가 불길하게 노출되는 비애가 서린 그 집’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태우고 온 그 날도 달려가 옹기전 항아리 속에서 새우잠을 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 역시 살아계신 동안 내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에 죄책감이 들면서도 세상과 부모에 속절없이 화풀이만 해댄 세월 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을 이제야 알 것도 같다. 엄마는 내게 진짜 나만의 삶,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엄마의 목숨값은 결코 나를 향한 죄값도 내게 지게 된 빚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나의 진실을 바로 보게 한 엄마는 죽음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잘가요, 엄마. 몇 십 번, 몇 백번을 더 말해야 정말로 엄마를 잘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엄마와 헤어지는 일만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보다 더 씩씩하게 인사를 잘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지금부터 한 살 두 살, 새롭게 나이 먹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진짜 엄마를 만나는 날이 가까워 질 것 같다. 잘가란 인사는 하지 못했다. 대신 후회 같은 인사를 지금 할 수는 있다. 그날까지 잘 있어요, 엄마.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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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7-0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씨앗은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내 씨앗은 내 아이들한테 어머니(또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새로 자리하면서, 곱게 이어가리라 느껴요. 떠나 보내거나 잊거나 할 수 있는 인연이나 운명이 아니라, 늘 보듬고 사랑하면서 내 삶을 보살피는 하루하루이리라 느껴요.

2012-07-05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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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 이 책은 문화혼종성이 작금의 전지구화 시대를 정의하는 핵심이라 말하는 책이다. 문화혼종은 더 이상 수용과 저항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관점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다보니 참고서적 분위기가 물씬이다. 저자는 건축, 음악, 종교, 문학 등 다양한 혼종화의 영역을 소개하며 모든 문화들은 서로 관련이 되어 있으며 어떤 것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이며 서로 자기 살을 내어주고 남의 살을 빌려온 역사이다. 우리는 살을 섞었을 때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기대한다. 저자의 최종적인 결론은 이러한 문화혼종화가 "새로운 질서의 탄생과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문화의 재배치, 세계의 크레올화를 예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짧게 핵심만 정리한 책이라 할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량이다. 개념정리에 딱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보이다.

 

사실 한국에서 다문화란 여러 나라의 문화양식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소수문화를 상징하는 느낌이 많다. 수는 적고 힘은 작은, 완전한 역설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똘레랑스를 의미한다기 보단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환기하는 힌트로 기능한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은 아무래도 농촌으로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들과 이주노동자들 덕택이 아닐까. 2007년도에 이미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수가 백 만 명이 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이 늘어날수록 한국인 남편의 학대나 폭력, 노동자의 인권 및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새로 출연한 언어의 개념은 자주 노출되는 사건과 기사로 재정립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는 지금보다 더 현명한 지혜가 요구되는 필수적인 미래지향적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보편적 결론보다는 글 말미의 이택광의 해제가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택광은 지젝의 논의를 빌어 다문화주의에 대한 옹호적인 시선이 외려 정치적인 억압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다문화주의라는 전략적 선택과 관리 방안이 마치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것처럼 운명화되는 것에 비판을 가한 것이다. 모든 문화는 모든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이택광의 시선은 문화혼종성이 가지는 지구적 보편성 위에 한국적 특수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은 사실 우리에게 다문화가 무슨 의미이냐가 아니고 우리가 다문화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어떤 마음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인 것이다. 오랜 세월 단일민족, 하나 된 국민이라는 가치를 선호해온 입장에서 한국인은 다문화 수용에 있어 그다지 개방적이지 못하다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면서 퍼뜩 지난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고가 떠올랐다. 관용과 평화의 나라인 노르웨이에서 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많은 인명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했다. 바로 인구의 95%가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에서 인종과 이민을 이유로 벌어진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테러범은 단일문화 국가이면서 살기 좋은 나라로 한국을 꼽았다. 다시 말해 테러범이 인식하기에 한국은 다문화를 수용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로 본 것이다. 왜 하필 우리나라였는지 왜 우리나라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오해라 할지라도 늘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외쳐온 과거를 돌아볼 때 테러범의 언급은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입으로는 다문화에 개방적이라 떠들면서 속으로는 폐쇄적인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문화를 포용한다는 의미가 추상이 아닌 정책적으로 실행되면 바로 일자리, 교육 및 의료, 복지 등의 혜택을 나누어야 할 경쟁 프레임으로 이동한다. 또 과거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겪었고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을 향한 문화박탈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서 다문화에 포함되는 대상을 계급의식 구조 하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농후하다 할 수 있다. 민족적,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은 마치 지난시절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 느꼈던 박탈감, 열등의식을 보상하는 차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냉정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문화혼종성의 그 인정 너머에 다가가야 할 메시지로서 어쩌면 역사와 시대의 필연으로 도래하고 있는 다문화국가를 맞이해 한국인이 가져야 할 용서와 관용, 배려의 정신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에 성과의 목표를 두었을 땐 아주 빠른 시간에 도달하는 민족이었지만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을 땐 상당히 변화가 느린 민족이다. 좋은 말로 주체적이고 반대로는 고집이 센 민족인 것이다. 노르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을 당하고도 여전히 다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며 테러범에 대해 관용적이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 한명이 살인사건을 일으키면 당장 그 나라를 쳐들어갈 것처럼 흥분하고 평소 숨겨왔던 적대심이나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그럴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살인자와 그의 국가를 매도하고 복수의 방법을 의논하기 까지 한다. 지난 9.11 테러 후 미국이 보여준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관용이 없으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보기에 좋아 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만 발췌, 선별해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경제무역에나 가능한 것이지 생활방식, 나아가 삶의 방식을 주고 받는 일엔 적절치 못한 듯하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한때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이 사실은 서양의 문화적 산물을 매우 수월하게 차용해 온, 전유의 전통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였다는 것이다. 일본은 중국에서 한자와 불교를, 영국에서 국회체계를, 독일에서 대학과 군사체계를, 미국에서 물질문화 대부분을 차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일본 고유의 문화는 어느 나라보다 차별화된다. 일본의 박물관과 전시관에 가보면 항시 유럽과 미국의 장점을 잘 믹스해 일본만의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좋은 것을 모방하고 가져오되 궁극에 자신들의 조건과 능력에 맞게끔 다시 재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반면에 우리는 독창성에 대한 아집과 잘못된 자존심, 괜한 자격지심으로 쓸데없이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거나 베껴도 꼭 재창조하지 않고 부분 이식하듯 물리적으로만 따라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행히 요즘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K-pop을 보면 이러한 국수적인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은 든다. 또한 첨단 IT기술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전략들을 보면 문화수용과 전파에 있어 상당한 개방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건 기술적 발전과 성장이 아닌 정신적 성숙과 그에 따른 실천인 듯 하다. 미혼모의 혼혈 아동문제, 이주노동자의 빈곤문제, 다문화 가정의 교육문제, 최근 탈북자의 문제까지 문화혼종성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사회문제는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 확실하다. 다문화주의 자체를 자유주의적 환상이자 기만이라 비판한 지젝을 존중한다. 그러나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들이 섬처럼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저자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눈과 뇌, 그리고 문화는 함께 작동한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재구축 하기 위한 초석으로 이 책은 미약하나마 기본지식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 이전에 마음을 여는 오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로 모아지는 동일한 가치를 더 선호해 왔다. 이는 조직과 학교에서도 왕따를 배출해내는 사고체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며 무리에서 배척하고 싶은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문화는 타자성에 대한 인정을 그 초석으로 한다.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혹 자신에 대한 집착은 아닐까. 이것은 꼭 한국인이 보는 외국인을 말하진 않는다. 불교에선 수십 수백 수천가지를 모아서 자기로 삼고 있을 뿐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기에는 나라고 할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니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타자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문화의 문제는 결국 다양한 문화, 즉 그 문화를 생성해낸 수많은 타자가 아닌 나의 우리 문화가 따로 있으며 그것을 만든 우리와 내가 문화의 주체자라는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문화에도 정답은 없다. 삶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며 문화는 그 다양한 삶이 모여들어 하나의 풍경과 내면을 창조해낸 결과물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삶은 마주치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문화는 섞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섞이지 않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문화혼종이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다음 세대의 새로운 문화를 위해 소화되는 생태적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애써 성공하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들은 삶의 위대한 생태계를 과소평가하는 일일수도 있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대에서 삶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인식하기 마련이니까. 문화가 섞이건 그렇지 않건 인간은 자기 삶의 방식을 긍정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다문화 국가를 맞이할 우리나라가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헤쳐 나갈지 무척 궁금하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고 마음이다, 마음. 마음을 먼저 열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아직 하나도 꿈쩍도 않았으면서 마음을 움직인 척 당연히 열은 척 한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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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8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나 언론이나 학문이나 사상에서 말하는 '다문화'는 모두 부질없다고 느껴요. '다문화'란, 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결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어요. 서로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다르게 살아온 나날'을 받아들여, 작은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곧 '다문화'라 할 테지요. 꼭 먼먼 나라에서 한국을 찾아와 섞일 때에만 다문화일 수 없으리라 생각해요.

차트랑 2012-06-2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이렇게 생각합니다요

'가래떡 트는 기계'
다수를 한 곳에 모아 틀어대면
똑같은 모양의 가래떡을 얻을 수 있는데요
물론 그 전에 푹~ 스팀으로 익혀내야 하지요
적당한 길이로 잘라만 주면 됩니다.
얼마나 보기 좋아요 먹음직~
참 쉽지요~^^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보니 교육만 그런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왠만하면 틀에다 넣고 마구 틀어대는거에요

기계를 쓰지 않으면 안되려나요??

기억의집 2012-06-2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올리셨네요,라고 말하려다 스크롤 해보니 24일에도~
반가워요. 한사람님~ 저도 현재 알라딘 간간히 잠깐 잠깐 들어오는지라 챙겨지 못했어요^^

책읽는나무 2012-06-2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말 읽을수록 공감되는군요.
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척 하는 사람들.
책도 읽고,님의 글도 읽어보아야지 않을까? 싶네요.^^
올리시는 글마다 집중하게 만드시고,또 생각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으십니다.
이젠 실천(?)만 남은셈이지요.^^

아이리시스 2012-06-3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할 말은..안하는 걸로?!
그러면 안돼요!! 저는 호기심이 많으니까.
아..오늘 드라마 하는 날이었구나..(주말 별로 안 기다리는 1인)ㅜ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었습니다. 글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기 싫었습니다. 글도 쓰기 싫었습니다.

신기한 건 단지 일상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하기 싫었을 뿐인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제겐 다른 일을 하고 말고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 꼭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매번 희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사실 이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처럼 습관이 되어버린 일이 어쩌면 하루를 좌우하고 나아가 계절을, 한 해를, 인생을 지배하는 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이미 책 읽고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세요, 물어 본다면 근사하게 답해줄 대답도 없습니다. 목적이 사라진 것이죠. 아무런 목적 없이 좋아서 하는 단계도 지나고 그냥 해오던 것이니까 관성에 의해 책을 펼칩니다. 그래도 자꾸 모자란 것만 같아 다른 책을 펼치게 되고 그것도 부족한 것만 같아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글은 같이 모자라거나 더 넘치기만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죠, 아마 이 비슷한 답이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세상엔 책을 펼칠수록 아직 펼치지 않은 책들이 넘쳐나고 글을 써 나갈수록 잊혀지는 문자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책과 글의 바다, 거기서 허우적 대는 나날들. 이 시간들이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최근에 이일이 허무해지기 시작한 건 책에서 구한 지혜는 그다지 현실 속에서의 실천과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과 한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지요. 읽었다고 떠드는 것도 마찬가지. 쓴다는 것과 산다는 것 역시 다른 문제입니다. 알지만 하지 않고 썼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아니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 느꼈지만 말하지 않고 말했지만 다시 잊어버리는 것. 물론 책은 책이고 글은 글이며 생각은 생각, 생활은 생활이니 매번 일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결국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인 것이지 내가 그리 살겠다는 의지와는 괴리감이 충분했던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이 대표적인 위선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위선을 견디기 위해 또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위선이 사라지지는 않더군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기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하는 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밖에 더 굴었을까요. 책을 읽었다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는 것. 심지어는 이해했다고 버젓이 쓰고 말하고 다른 이에게 아느냐 묻기까지 하는 것... 다른 이의 생각을 모두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무엇을 안다고 아느냐고 알아야 한다고 묻지도 답하지도 않더군요.

 

 

그래서 빛 좋은 위선만 배양하는 생활을 이만 멈추어야 겠다 생각했는데, 이 저자는 그래도 계속 읽어야 한다 말하네요. 달리 방법은 없다고 충고하네요. 책 읽기가 혁명이라 말하네요. 아...혁명하려고 책 읽어온 것은 아닌데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이 여름밤의 궤변도 아름답구나, 아니 참 서정적이며 인간적인 논리구나, 아니야, 내가 몰랐던 진실이구나...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이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 질 정도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말처럼 결코 쉽거나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죠.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책을 읽은 최후에 이르게 되는 ‘고독의 싸움’이란 아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두렵고도 쓸쓸한 결정의 순간은 아닐까요. 미쳐버리고 싶다는 것은 사실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 일 수 있겠어요. 자신의 무의식을 목격하는 일은 미쳐야 가능한 일이라는 뜻도 되겠어요. 생각해보십시오. 책에 미치면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먹어 버린 것인데 내 속에 책이 들어온 것인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하여튼 어느 지점에서 내 무의식과 만나면 그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어요. 결정해야 합니다. 들어와 버린 책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뚫고서 원래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허나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다른 책을 읽습니다. 보류하는 것이죠. 그러니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다음 책에서도 똑같고 그렇기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겁한 자가 왜 혁명을 이루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나요? 이런 - 저같은 - 사람들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방황일 수밖에 없습니다. 덜 미친 방황의 시간. 고독한 싸움의 맛보기 과정. 열정과 공포의 적당한 반복. 이런 힘겨운 일을 매일 한다는 것을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괴로움도 중독된다고 그래요, 이 전 책의 스님은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었다는 주장은 진부합니다.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내가, 책을 읽었다면 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미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제대로 읽었다면 미칠 수밖에 없다는 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책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책 처럼 산다는 건 책 읽기 전의 삶을 버리는 일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는 40년간 독일어로 나온 책의 3분의 1을 썼던 루터를 예로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고 설교하는 ‘문학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땐 그것이 가능했죠. 그래서 혁명의 본체는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문학이 혁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저자가 부르짖는 핵심입니다.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웃기지 않나요? 저자가 문학을 과대평가 한 것인지 제가 문학을 과소평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 거죠. 이해는 하지만 지금 세상에 읽고 쓰는 것을 목숨 걸고 해야 한다 설파하기엔 우린 다들 순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기엔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로 먹고 살만큼의 당면한 문제이거든요. 먹고 사는 방법은 문학 말고도 너무나 많은 오늘이거든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읽고 써야 한다면 그건 비참하고 슬픈 일이거든요. 예, 그래서 저는 보다 넓고 큰 바다처럼 존재하는 문학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에 감동적이라든지 신선하다라든지 놀랍다든지 하지는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혁명에 대한 오래된 불감이, 그리하여 문학에 대한 강렬한 불신이 더 팽배한 상태니까요. 읽고 쓰고 노래하는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지금 내 삶과 너무 멀어서요... 단지 문학과 책, 글의 의미를 더 절실하게 설득해준 저자의 논리가 고맙긴 합니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계속 읽고 써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저 같이 문학에 비관적인 사람에게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하루 빨리 문학을 하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른 바 사임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그런 줄 알고 하고 있다.”는 등의 변명을 듣는 건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겁니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읽을 수 없음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p226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저자는 계속하려 설득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쓸 수밖에 없다고요. 인류가 생겨난 건 20만 년 전이고 그중에 문학은 50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아주 젊은 예술에 불과하다고요. 어느 시대건 자기 사는 시대가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던가 봅니다. 니체는 살아 생전엔 니체만큼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예술가는 문학 말고도 발에 치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늘 밤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세상은 변혁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죠. 그러니 니체가, 그를 읽은 우리가 하는 일은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다는 것이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기만 한데 왜 굳이 종말을 걱정하고 절망을 택하는 것인지 저자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웃고 있어요.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저자만의 독특한 에너지가 있어요. 문체도 그렇고 근거 있는 자신감도 매력적입니다. 논리나 내용은 모두 동감하지 못했지만 그냥 심정적으로 마음에 드는 책이 있잖아요. 말하는 구석은 기분 나빠도 그냥 끌리는 사람이 있듯이요. 꼭 이 책이 그렇습니다. 저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어요. 기분도 나빠집니다. 맞기만 하면 다인 줄 알잖아요. 이 책을 옮긴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장하고 떠들어대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싫어서 ‘논리적이고 개방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역겨워서 스스로를 편파적이라 말해요. 자신은 편식과 편견에 빠진 사람이라 부르죠. 좋고 싫은 것이 먼저고 다음이 논리라 말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왠지 끌리는 책이 있다고 고백하죠. 문체나 행간의 분위기, 비유한 표현, 분노의 에너지 등 이런 점들이 책 전체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말합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감하진 않았지만 읽다보면 사람에 빠지듯이 점점 홀리는 느낌이 들어서요. 후반부 루터의 혁명부터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근대의 근원을 밝히면서 읽고 쓴다는 것의 혁명성을 체계화하는 통찰은 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의 확고함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충분합니다.

 

 

희망을 전달하는 방법이 새로운 책이었습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대한 회의감으로 시달린지 오랩니다. 그랬기에 책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글로 치유해 나가는 것도 익숙합니다. 허나 어줍짢게 이 책을 통해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공감을 널리 유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제넘은 추천이나 권유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그렇게는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 비록 일 퍼센트라도 그건 큰 확률이라고요. 저자는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는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이라죠. 모두 사라지고 그만큼만 남은 텍스트들의 위대함을 상상해 봅시다. 그러니 만약 적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것이니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책이 있다면 그건 승리이며 환희이며 혁명입니다.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로운 혁명을 유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혁명을 이어지게 하는 인류의 끈질긴 과업인 게죠. 이런 깨달음은 평범해 보여도 난해한 실천이 과제로 남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읍시다. 일단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글을 씁시다. 멈추는 건 대안이 아닌 듯 합니다.

 

 

글쎄, 달리 방법은 없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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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2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사는 걱정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먹으면서 어떤 이웃하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 삶인가를
생각할 수 있으면, 책도 다른 무엇도 모두 혁명이 되리라 느껴요

비로그인 2012-06-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을 믿지 않고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병든 사고가 만연한 결과라 충고합니다. 맞아요, 병든 사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에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요? 문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일상이 잘못된 것이라 교정 받아야 하나요?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미래를 걸기 보다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버려버리는 것이 꼭 절망이라 말할 순 없는 거 아닌가요"

이 구절을 읽는데 울컥합니다.. ㅠㅠ


2012-06-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2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6-2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서평단 도서인데, 읽고나서 꼭 다시 리뷰를 읽으러 오겠습니다.

2012-06-26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읽고 댓글은 이제 달아요.) 근래에 읽은 글 중 가장 재밌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분이 한사람님이시죠.^^ 한 가지 주제를 일관되이, 개성있게 밀고 나가는 글. 그리고 그 글은 재미있지만, 주제는 윤리적인 질문이라는 것. 저는 죽어도 이런 글은 못 써요~.

가연 2012-06-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괜찮죠??ㅎㅎ 평가단에서 추천하고 뿌듯했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