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없는 곤충 학교 재미있는 곤충 학교 3
우샹민 지음, 샤지안 외 그림, 임국화 옮김, 최재천 외 감수 / 명진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첫번째 추억을 떠올리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주 듣게 된 소리는 바로 ‘왕따’와 ‘일진’이었다. 어느 날인가 반에서 ‘찐따’(찌질한 왕따)로 불리는 아이와 짝이 되어 불쾌하다고 했다. 마트에선 매장에 같은 학년의 일진이 떴다고 빨리 가자며 손을 이끈 적도 있다. 일진에 찍히면 왕따가 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날을 잡아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우리 땐 소위 말해 노는 친구를 뜻했던 ‘날나리’는 그냥 노는 애들일 뿐이었다. 그것도 거의 학교 밖에서 날나리들끼리 어울렸고 교실에선 선생님도 아이들도 제외시켰다. 날나리들도 반에선 될수록 눈에 뛰지 않으려고 조용히 지냈던 것 같다. 교실 밖에선 누구와 나쁜 짓을 하는지 어떤 폭력이 오가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반에서 유난히 친구가 없고 지금처럼 왕따에 가까운 아이가 있긴 했지만 날나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때와는 달리 공부도 잘하고 덩치도 좋고 집안도 좋은 아이들이 일진이 되어 반에서 권력을 장악한다. 날나리가 ‘탈선’의 상징이었다면 일진은 ‘위선’의 아이콘이 된 것 같다. 적어도 겉으로 보아선 모범생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진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인정을 바탕으로 교실 내에서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아이를 왕따시킬 수 있는 어엿한 신분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운동회 때엔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학부모가 반 전체에 음료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알고 봤더니 그 아이는 반장이었다. 아이 말로는 일진이 입는 유명 브랜드의 점퍼와 신발은 다른 아이들이 착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스마트폰도 계급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서열이 낮은 아이는 교실 내에서 신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벌써부터 권력의 맛을 알고 계급을 나누어 같은 친구들을 지배하는 심리에 익숙해져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서글펐다. 조직 및 계급 서열화와 성과지향주의에 물들어 버린 우리 사회가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물려주었는지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일진의 눈에 벗어나면 ‘왕따’가 되는 것이다. 뉴스에서도 보았듯이 왕따가 된 친구는 일진으로부터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시달려 급기야 자살까지 하게 된 경우도 있다. 왕따와 일진은 분리될 수 없는 학교문제가 되었기에 이제 왕따가 없다면 일진도 없는 것이고 학교폭력이 없다면 왕따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요즘 초등학교 일진은 중학교 일진을 빽으로 두고 반에서 짱노릇을 하는 친구가 많다. 아이 말로는 어떻게라도 일진과 연결고리가 있으면 중학교 언니, 오빠들이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중학교 일진이 초등학교 후배를 선별해 기르면서 중간관리자를 만드는 꼴이었다. 초등 일진은 왕따를 중학교 일진에 보고하고 중학교 일진은 타겟이 되는 아이들만 골라 돈을 뜯거나 이유 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인접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경우 그 연결고리가 탄탄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진이 싫어도 표면적으로 친한 척 해야 하며 혹시라도 찍힐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들이 일진에 찍히는 것일까. 이웃 학부모들과 이야기 해보면 엄마들이 교실까지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 아니면 공부나 예체능을 아주 잘해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실력자가 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너무 잘난 척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침묵해도 안 되고 혼자 얌체 짓을 해도 안 되고 혼이 났다고 징징대도 안 되고 어떤 특정 과목을(특히 예체능)너무 못해도 안 되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고 너무 뚱뚱하거나 못생겨도 안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중간치인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이 찍히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혹시 학원을 안다니고 학습지도 안하고 핸드폰이(혹은 MP3) 없거나 집이 멀다는 이유도 찍힐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은 획일성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집단이기심이기도 하다. 아이들 입장에선 더 많은 쪽이 강한 것이고 다르고 적은 쪽이 약한 것이다. 일진이라는 의미는 학교폭력 조직을 상징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아이들(기득권)이 휘두르는 소수자에 대한 과시와 배제 심리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생각할수록 왕따와 일진의 문제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아주 밀접한 학교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라는 조직에서 위선을 먼저 배우고 성장한 후에도 궁극에 권력을 얻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어른이 될까봐 걱정스럽다.


덕분에 나는 언젠가부터 왕따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서점에서도 꼭 훑어보는 학부모가 되었다. 아마 많은 학부모들이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다. 아이는 이 책을 보고 자신이 4학년 때 과학관에서 얻어온 장수풍뎅이와의 추억에 흠뻑 빠졌다. 알 상태로 집에 가져온 장수풍뎅이는 애벌레와 번데기를 지나 어엿한 살아있는 곤충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곤충의 몸이 커지자 마트에서 집도 사고 나무와 먹이도 사다가 그럴싸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아이는 당시 전학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갔다 오자마자 ‘짱수’(애칭)에게 인사하고 정을 붙였었다. 짱수는 4월에 우리 집에 들어와 겨울이 시작될 무렵까지 살았다. 친구들의 곤충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지만 평균수명을 고려해 볼 때 퍽이나 오래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는 어느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짱수가 뒤집어 진채로 죽어 있었다고 자신이 새벽에 뒤집어 줬어야 했다며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짱수를 어쩌지 못했던 아이는 첫눈이 흩날리던 날 집 앞 화단에 묻었다. 그 후로 화단을 지날 때 마다 짱수야 안녕, 하며 인사를 잊지 않던 아이였다. 우리는 애완견을 키운 적이 없었고 아이는 개나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편인데 곤충에 쏟는 애정은 남달랐다. 이 책에는 장수풍뎅이 같은 딱정벌레 곤충들이 인격을 가진 친구들로 등장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모범생 장수풍뎅이가 정확한 답안을 쪽지에 적어 사슴벌레에게 전달한다. 폭탄먼지벌레의 독가스 살포로 교실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 다른 학생들이 답안을 베껴 쓴 덕에 딱정벌레반은 전체 학생이 시험에 통과한다는 해피엔딩이었다. 정의를 위해 단결한 건 아니지만 아이는 역시 장수가 자기처럼 똑똑하다고 우쭐해 했다.

 

 

 

새로운 추억을 만들다

 

 

나는 아이와 책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에 나오는 곤충들을 예로 들어 보았다. 혹시 반에서 큰 턱으로 친구들을 괴롭히는 사슴벌레 같은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사슴벌레의 행동을 지혜롭게 변화시키던 남생이잎벌레처럼 힘이 아닌 머리로 친구들을 움직이는 친구는 있는지 물었다. 느리고 답답해 보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누구보다 최고인 달팽이 같은 친구가 있는지도. 독가스를 뿜어대는 폭탄먼지 벌레 같이 결정적 한방이 있는 친구. 초음파로 사냥감을 찾는 박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밤나방 같이 촉이 예민한 친구. 날개는 없지만 독니를 가진 늑대거미 001처럼 자신만의 유별난 무기가 있는 친구. 죽은 동물의 사체를 묻어주는 송장벌레처럼 반에서 더럽고 궂은 일을 하는 친구. 쉰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꿀벌처럼 부지런한 친구. 개미같이 몸은 작아도 반을 위해 자기 역할에 충실한 친구...... 누가 폭력적인지 물었다면 대답하기 더 쉬웠을까. 아니었다. 곤충의 생김새와 특성을 확인하면서 친구를 떠올리니 한결 더 쉬웠다. 희한하게도 곤충학교 학생들은 아이네 반 친구들에서도 볼 수 있는 캐릭터와 일치했다. 친구를 곤충에 비유하고 곤충을 친구이름으로 부르니 마치 소꿉놀이 하듯 재미가 났다. 우린 기세를 몰아 책 뒤에 있는 스티커로 교실 분포도를 만들었다. 스티커 위에 곤충이름과 그 옆에 친구설명을 적고 새롭게 합성된 별명을 만들어 우리끼리 키득키득 거리고 나니 새로운 방법의 독서 감상 대화(?)를 마치고난 느낌이었다.(이름을 적으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사실 책은 고학년이 읽기엔 조금 쉬웠으나 어른들도 가끔은 만화나 쉬운 그림책이 재미나듯 아이들도 자신의 수준보다 한 단계 낮은 책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듯 했다. 덕분에 나는 친구관계를 조사하고 감시하는 엄마가 아닌 아이와 친구별명을 만들고 그것을 우리끼리 비밀에 부치는 같이 흉보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 아이와 함께 만들어본 ‘우리 반 곤충분포도’ 이다. 가운데 늑대거미는 노래와 춤도 잘추는 반장이면서 일진인 아이를 상징한다. 일진을 중심으로 2인자 딱정벌레들과 행동대원 사슴벌레, 심부름꾼 바구미들을 근처에 붙였다. 아이는 참았다가 폭발하는 ‘폭탄먼지벌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것저것 고자질을 잘하는 친구, 소문을 내고 말을 옮기는 스피커 같은 친구, 조용히 책 읽고 숨은 지도자 같은 친구, 멋만 부리고 반 일에 관심이 없어 겉도는 친구를 비슷한 곤충과 짝짓기 했다. 맨 오른 쪽과 왼쪽 아래에 못생긴 ‘찐따’ 배자바구미와 더러운 ‘왕따’ 쇠똥구리가 보이고 힘이 세 보이지만 아직 이름은 알수 없는 전학 온 친구도 보인다. 현실은 아쉽게도 왕따 없는 곤충학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곤충을 붙이는 위치를 보고 아이가 친구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다 만들어 놓고 나는 이 분포도가 어른들 조직에서도 비슷할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이 지나 아이는 학교숙제로 독서 감상문을 내야 하는데 다른 읽은 책이 없어 이 책에 대해 써야겠다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제가 너무 쉽다고 무슨 주제로 써야 할지 내게 물었다. 왕따에 대해 쓰자니 마음이 불편해서 솔직하기 싫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나는 기억나는 한마디가 없느냐 물었고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지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다 싶은 나는 페이지를 펼치며 ‘중요한 건 무엇이 없느냐가 아닌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늑대거미 001의 한마디를 펼쳐보였다. 늑대거미는 뿔이나 턱이 없었지만 독니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아이가 어떤 내용을 써내었는지 보진 않았다. 꼭 내가 가르쳐 준 힌트를 작성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아 부러 잊은 척 했다. 학부모로서 이 책이 가지는 장점은 많은 것 같다. 벌써 나만해도 곤충을 빗대어 아이 반 친구들을 파악했으니 대화소재로도 유용했다. 교사라면 곤충을 의인화한 캐릭터로 역할극을 만들어도 될 만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도움이 된 메시지는 딱정벌레반 반장인 늑대거미의 한마디였다.

 

 

한창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라 요즘 들어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누구는 다리가 짧은데 반바지를 입고 왔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자신은 신체에 비해 발이 커서 창피하다고도 한다. 어떤 아이는 얼굴에 비해 코가 크고 친구 누구는 눈은 큰데 너무 튀어 나왔다고 대신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한창 다른 친구들의 장점이 유독 부러워 보이고 내가 가진 장점은 크게 여기지 않을 시기인 것이다. 더불어 내 단점만 상대적으로 심각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고 그 사람의 장점은 반드시 단점과 연결이 되는 것. 곤충의 경우에도 더욱 크고 힘이 센 뿔은 일을 하는 데는 효율적이겠지만 운동성과 순발력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꼭 신체 외모 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환경도 장점은 언제든 단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단점이 어느새 장점으로 기능하게 될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을 긍정하면 상대의 단점도 받아들이게 되고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나아가 왕따를 사라지게 하는 근본은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쉽고 웃기지만 그 효과만은 우리 모녀에게 어떤 책보다도 확실했던 것 같다. 우리는 흔히들 인간의 아주 비참한 상황을 ‘벌레만도 못한 삶’이라 비유하곤 한다. 기어다니고 새의 먹이나 되기 쉽상인 곤충들은 우리가 사는 우주와 생태계에서 아주 하찮은 존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왜 저렇게 생겼을까 싶은 신체 부위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고 부족한 능력은 다른 것으로 보상하며 살아가는, 인간보다 지혜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행복하기 위해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처음엔 옥신각신하다가도 결국 아무도 왕따없는 교실환경을 구축해나가는 곤충들이야 말로 어쩌면 사람보다 공존과 공생의 개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바로 이 책의 가치는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가는 곤충들이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친구들과 무엇이라도 조금만 다르면 왕따가 되는 현실에서 이러한 곤충들의 모습은 어른이나 아이에게 새삼 되새겨야 할 교훈인 듯 하다.

 

 

작년 말부터 터져 나온 학교 폭력의 실상과 그로인한 청소년들의 자살이 이제 곧 청소년이 되는 아이를 둔 학부모로서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서처럼 귀뚜라미 선생님이 실종되자 다들 모여 단체로 개미네 집을 방문하는 학생들이 그립다. 문득 아이가 정성을 다해 돌봐주던 짱수도 그립다. 이제 짱수는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유익한 거름이 되었거나 다른 유충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잊혀진 유기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가슴에 새겨진 맨 처음 곤충의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더불어 오늘 아이와 나눈 우발적인 대화도 짱수 뒤에 새로운 곤충의 추억으로 덧붙여지길 기대한다. 자연속에서 우리 인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와 쉬운 교훈으로 아이와 의미있고 재미난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기꺼이 이 책을 추천한다.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 모두에게 이 책은 살아있는 곤충의 추억을 만들고 서로 나누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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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14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한사람님 서재에 들러서 글을 읽다가 남깁니다. 대단한 글이네요. 한사람님 뿐만 아니라 한사람님 자녀와 함께 쓴.. 한편으로는 참.. 뭐랄까 씁쓸한 기분도 남네요. 찐따와 일진은 진짜 사라져야되는데.. 잘안되지요.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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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가운 소식

 

 

나는 종교를 기회의 문제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친구들은 뱃속에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녔다. 일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교회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종교를 수용할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쪽에 속했다. 친구들을 보면서 나 역시 부모님이 무신론자가 아니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고등학교는 불교학교를 대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나서 부터 종교는 내게 학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교일지라도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선 긍정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신이란 일단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부재한다고 믿는 쪽보다 손해를 덜 본다는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듯하다. 물론 가끔 신에 의지해 남몰래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 있어 종교는 일상으로 체화될만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단지 신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학문과 철학, 그리고 문화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신, 그리고 죽음, 삶의 의미 등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하나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종교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전공이 무엇이냐는 질문만큼 많이 받아 온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종교가 없다고 당당히 답해왔지만 우리 사회는 어쩐지 확실한 종교가 있는 사람을 더 신뢰 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신론자라는 어감도 불신이나 부정적 인 의미로 전달되는 듯 했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비종교인을 대할 때 교화나 전도의 대상으로 보곤 한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생의 어느 시기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종교의 필요성을 운운하며 위로나 의지의 방편으로 대안을 제시하곤 한다. 또 보편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말년에 더 행복하게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편안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죽음이 두려워 질 때, 상실감에서 헤어나고자 할 때 종교는 일반적인 해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없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가 없으면 개인은 타락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며 국가는 재앙이 닥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을 똑바로 지칭한다. 종교는 인생을 충분하게 할 순 있지만 인생을 충분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들을 반박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이 책은 저자만의 소중한 증거물이다. 저자는 그런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 이 책이 지루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은 저자의 체취와 발자취가 묻어나는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나라 미국은 종교가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툭하면 애국심을 앞세우며 태연하게 전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때 단결 전략으로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종교적 메시지이다. 지난 시절 미국은 전쟁에 참여할 때 마다 자신들은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 말해왔다. 그런 자신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신의 계시라며 정당성과 초월성을 부여해온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세계에서 가장 신을 믿지도 않고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나라가 가장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향한 짜릿한 일침. 하느님을 믿는 것과 세계평화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교회를 다니는 것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역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미국사회의 주류가치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 생활 정서에 간만에 날아든 고마운 소식이었다.

 

 

 

놀라운 만남

 

 

많은 영역에서 미국사회를 복제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저자도 언급했듯이 아직 미국만큼 종교적인 나라는 아니다. 종교적 다원성이 지켜지는 나라이고 비종교인,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배타하는 분위기는 미약하다. 하지만 상하, 수직적 체계에 익숙한 조직과 학교, 가정에서 원하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일은 의외로 빈번하다. 대학 친구의 부모님은 배우자도 당연히 같은 종교인이길 바라셨다. 친구는 처음부터 같은 종교를 가진 남자와 만나야 했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에 있어 아픔이 많았다. 종교가 없었던 또 다른 친구는 결혼 후 시어머니와의 종교적 갈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친구의 남편은 공부중이고 마침 친구가 아이를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다. 나 역시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간 어느 지방의 절에서 백배의 절을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초창기엔 영문도 모르고 그렇게 계절마다 절기마다 절에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절에 가는 날이 일주일에 한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며느리에게 종교의 권유 차원을 넘어서 강요를 하는 시집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집 사람이니 같은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발상이지만 우리네 시집문화라는 것이 생각만큼 현대화되지 않아 종교 갈등은 고부갈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어쩌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이상향의 나라가 아닐까 싶다. 여성평등지수가 가장 높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혼전성교, 낙태, 동성애 결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빈곤과 질병, 범죄와 전쟁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투표율이 가장 높으며 최빈국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이다. 친구나 애인, 가족, 동료들 사이에서 종교 때문에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할아버지와 섹스에 대해선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 여기며 서로 물어보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나라이다. 저자는 일 년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에 살면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꺼려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질문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부분 종교가 무엇이냐 묻는 것은 그들에게 살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 남들은 왜 교회를 가는지 혹은 가지 않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을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것은 조직이나 사회에서 소외당할 조건으로 기능한다. 미국과 정반대이다. 예수의 부활이나 동정녀의 출산, 내세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기에 그것은 허위사실이고 아이들에게 믿으라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행동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도 원하면 목사가 될 수 있고 목사라는 직업에 특별한 권위의식은 서로가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건 내 추측인데 그래서 종교인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주 옛날부터 교회세를 내왔고 늘 그래왔듯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 별 고민 없이 자기 자식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믿음을 행하는 종교는 철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생활 속에서 전통이나 풍습처럼 편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놀라고 신기했던 건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아도 오로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낭만적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우리 문화에서 결혼식 장소로 교회를 택하는 사람들은 특정 종교인에만 해당하는 관행이 아닌가. 특정 종교에 해당하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특정 종교가 행하는 배타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을 보면서 오랜 세월 제사를 지내온 우리 풍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명절을 맞아 가족들이 모여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부모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장례문화로 보아야 하듯 그들의 교회결혼식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종교가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개인의 상실감을 치유하며 사회의 봉사를 유도한다. 그런데 왜 가장 종교적인 나라 미국은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 덴마크와 스웨덴보다 부유하지도 평등하지도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것일까. 종교가 부재하는 세속적인 사회에선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범죄와 타락, 혼란에 빠져들기 쉽다고 하는데 가장 세속적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왜 그 반대인 것일까. 덴마크나 스웨덴은 자신들이 비 종교적이라서 나라가 행복하다 말한 적이 없는데 왜 미국은 종교 없는 나라는 불행 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의 부재가 사회의 혼란이 아니라 외려 사회적 건강과 안녕, 도덕과 질서, 행복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비교적 비종교적이라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일부 보수파 종교단체는 조폭과 연대하여 이권을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스님들도 도박과 룸살롱 출입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MB가 다닌 소망교회는 이 정권에서 주요 핵심인력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해 왔다.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덴마크, 스웨덴 같은 비종교적 국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기록이다. 종교적 가르침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들이니 이제 우리는 종교와 도덕을 원인관계로 연결 짓지는 말아도 되지 않을까?


무심한 대답

 

 

종교에 대한 질문이 재미가 없듯 이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도 시큰둥했다. 나는 그들이 답한 재미없는 답변들을 떠올리며 삶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이 책을 덮고 비로소 삶을 의미 있다고 여기고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꼭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터뷰 대상자들 중 거의 충격에 가까웠던 대답은 삶의 의미가 꼭 있어야 하느냐는 무심한 답이었다. 그들에게 삶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살아가면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런 질문 자체는 크게 의미 없다는 것이었다.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생명은 자연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끝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지금의 삶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그 이후를 생각하는 시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 누구도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 중에는 외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자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떤다는 호스피스의 인터뷰는 종교에 대한 반전에 가까웠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혹시 지옥에 갈까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믿지 못한다니 소름이 끼쳤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마지막 까지 욕심이 될 수 있다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종교상식과 정반대되는 실례라 이도 충격이 적지 않았다.

 

 

통계상으로 보면 전 세계 무신론자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다음으로 많은 수치라 한다. 믿는 사람만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으며 종교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것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자는 새삼 종교의 필요성을 폄하하거나 근본적으로 반론하려 이 책을 쓴 것 같진 않다. 단지 종교가 없어도 신을 믿지 않아도 인간은 타락하지 않고 사회는 안전할 수 있으며 국가 또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지 않고 죽음에의 두려움을 신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고 주변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곧 삶의 의미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생이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미국사회가 많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덴마크나 스웨덴 같이 종교 없이도 최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을 덮기 전 나는 공교롭게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을 읽은 바 있다. 도킨스는 늘 종교를 반대하는데 앞장서온 과학자였다. 그는 진짜 마법이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 강조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며 그 현실을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켜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영국 철학자 러셀은 ‘신념’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러셀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으니 믿게 된다는 논리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은 일침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혹시 신이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기에 초자연적인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발견

 

과학자들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의 주장을 접하고 나면 나는 늘 차동엽 신부같은 종교인의 주장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종교인들은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잊혀진 질문>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차동엽 신부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신을 믿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필요 할 때 내가 일상에서 기도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친근한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또 국가의 사회적 유산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가치관들은 소중히 받아들이면서 내 삶에서 종교를 최우선시 하지는 않는 주체적이고도 이성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온 듯하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이상향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와 종교인의 상반되는 시각, 그리고 철학자의 논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바로 종교를 가족적, 전통적 문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절대가치로서의 신념이 아닌 상대가치로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이니 만큼 때론 초자연적인 존재에 삶의 한 순간을 기댈 지라도 그 무엇도 내 삶은 초월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관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진다. 어떤 교리든 이웃을 도우고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적 가치는 얼마든지 실천하고 현재의 내 삶에선 이성과 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평생가도 겪어 보지 못할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지하지 않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는 삶. 그러한 삶이라면 비록 신이 없더라도 얼마나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가. 내 삶은 초월적인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로만 이루어진다. 내가 사는 곳 너머, 내 인생 너머의 초자연적인 현상과 존재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서 나를 나답게 말해주지도 않는다. 지금 여기, 이곳에서 가장 진짜인 내 삶이 존재한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가 살고 있는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두근두근 가슴 뛰는 내 삶 속에 살고 있다. 신(神)없는 나라가 신(興)나는 나라가 아닐까. 신을 버리니 새삼 내 삶이 더 커 보인다. 당연히 그 삶의 주인공도 근사해 보인다. 내 안에 삶이라는 새로운(新) 신(神)이 있다. 이제 나는 가장 오래 그리고 분명하게 믿을 수 있는 내 삶만을 믿어(信)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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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상대적 가치에 의한 인식은
어쩌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일한 '보편자' 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열자(列子)께서는 우주의 탄생을 태역-태초-태시-태소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太易: 만물의 분화 이전의 준비과정
太初: 우주의 모습이 구체화되어가는 찰나의 장면(서양의 빅뱅)
太始: 빅뱅 0.001초 후의 현상을 총칭함
太素: 變을 거친 化의 단계로 제모습을 갖춘 우주의 형태

등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열자는 기원전 4세기 인물이라던데요...

글을 읽고 언뜻 떠오른 생각이랍니다 한사람님..

2012-06-15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6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6-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말씀을 들어보니 이해가 갑니다..
이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참 궁금했었거든요.
평소 한사람님의 좋은 글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좋은 글에 대한 반응이 제 예상과는 달라서 말이지요.

저는 리뷰대회에 글을 쓴 적이 없고
리뷰대회의 성격도 모릅니다.
겨우 알라딘에서 혼자 놀다가 가는 형편인지라^^

최근 일련의 상황들이 저로하여금 알라딘에 뜸하게 하더군요.
참새 방앗간 같던 알라딘이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해
무척 당황스러웠구요.

책을 가까이 하는 분들의 완고함이
제게는 매우 이율배반적으로 보여졌다고나 할까요...

독서는 사람을 훌륭하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기대을
완전히 깨버리는....

역사는 이를 잘 증명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때론 제 자신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ㅠ.ㅠ
기대감에 대한 적나나한 배신을 자주 목도하면서도
도대체 바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의 딜레마랍니다 한사람님...ㅠ.ㅠ

친절하신 답 고맙습니다...
 


 

#1. 공감의 형벌

 

굳이 이웃의 글을 읽을 때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먼저 인식하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언제 읽어도 얼굴이나 목소리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처음 글을 접할 땐 그저 글투나 자주 사용된 단어, 문장의 형식, 소재의 종류, 결론의 방향등으로 막연히 성별을 느낄 뿐이다. 가끔은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성별과 반대였던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많은 분도 있었다. 온라인에선 일단 보이는 조건들을 떠나서 오로지 글로만 만나기 때문에 오해는 내가 보고 느낀 만큼의 이해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면 아, 이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어떤 페이퍼를 올려도 어떤 책을 읽어도 결론이 지향하는 지점은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웃 서재의 글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떤 글에 반응을 보이는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주로 자신이 쓴 글에 한계를 느끼면서 문학적 재능이나 노력에 좌절하는 글, 인간이 가지는 한계점을 자신으로부터 발견하고는 아파하는 글, 자신의 실패나 실수,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글... 그러니까 일상에서 섬세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관찰하려는 노력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듯 하다. 나는 어쩌면 남들의 아픔에서 내 아픔을 발견하려고 이웃의 글을 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떤 글은 바로 이 분이 결혼을 했고 아이가 몇이고 현재 일상에서 어떤 힘겨움이 있는지 드러나는 글이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진 않았지만 나는 연속극을 보듯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아픔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 지금 어떤 심경일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럴 땐 조용히 힘내시라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 아는 척이 실례가 될까봐 그냥 애꿎은 추천만 누른다. 그러곤 그가 나의 안 보이는 응원으로 미미하나마 힘을 낼 수 있겠지, 외려 내가 희망을 가지면서 뒤돌아선다. 돌아보면 내게 있어 추천은 응원이고 위로, 자신에 대한 격려였다.

 

글에도 그 사람만이 가진 숨소리와 억양, 체취, 온도가 있어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이 글을 쓸 때 슬펐구나... 애써 화나는 마음을 억눌렀구나... 들뜬 마음이구나... 허탈하구나...하는 여러 마음의 정보가 읽혀진다. 그리고 왜 이 사람이 이런 페이퍼를 이 시간에 썼는지 이 글을 쓰기 전에 그리고 쓴 다음엔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글이라는 게 말과는 달라 일단 적혀진 것은 기록의 의미를 부여하고 확정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이 달라져 지우고 수정해도 일단 한번 적혀진 (적 있었던)글은 인상이라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일까. 알고 지낸 누군가 아픔을 호소한 글에 나는 필요이상으로 예민하다. 그 사람이 그 글을 쓰고 현실에선 괜찮아 졌다 해도 아니 글을 썼기 때문에 마음이 치유되었다 해도, 내가 받은 인상은 조금이라도 상채기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상처를 내 기억의 방에 저장하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이라도 좋은 일은 나 말고도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나쁜 일에 더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 사람은 자기가 상대에게 받고 싶은 것을 행하게 된다는데 이 심리는 역으로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은폐된 욕망의 투사는 아닐까.

 

가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결혼을 한 적이 있고 아이를 낳거나 기른 적이 있었다. 부모이거나 부모님을 여읜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다 느껴지는 이웃들이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광경을 목격할 때 나는 그들이 어떨 때 무엇으로 우울해지는지 더 잘 공감하게 된다.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몇 마디 문장에서 전달되는 삶의 한숨, 아쉬움, 그리움 등이 나를 울리고 웃긴다. 아마 여성으로서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공감지수가 높아지는 시기는 남편과 시댁이라는 타자의 세상을 견디거나 자신의 몸 안에서 자신과 다른 이물질로서의 생명체를 견딘 후가 아닐까... 특별히 잘나서, 인격이 높아서 혹은 더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조건을 타고 났기 때문에 고통에의 공감이 수월한 듯하다. 요즘처럼 이러한 내가 원하지 않은 능력이 싫어진 적이 없다. 이것은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2. 보통의 결혼

 

 

알랭 드 보통은 외국인이고 남성이다. 결혼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건 정이현이었어야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진부한 편견을 가졌다. 놀라웠다. 환경과 문화가 틀리며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남자였지만 결혼에 대한 통찰은 만고진리처럼 보편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특별함을 잃지 않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보통은 늘 보통이상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이름이 한국어로 특별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하다는 뜻임을 알고 있을까. 희한하게도 그의 문체는 특별해보이지 않는 익숙함, 친근함을 가졌는데 그렇다고 평범해보이지는 않는다. 특별하면서도 편하게 느껴지는 이중성이 그의 매력이라면 매력일지 모르겠다. 정이현은 반대로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는데 은근히 보통 수준의 이해를 제공했다고 할까. 본의 아니게 자꾸 두 작가를 내 기준으로 비교하게 되는데 정이현이 결혼한 한 여자에 대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번 보통의 <사랑의 기초 - 한 남자>가 과연 소설인지 의아스럽다. 등장인물인 한 남자 벤의 시선으로 고민이 나열되며 끝에는 늘 작가로 느껴지는 시선이 강하게 결론처럼 배치되어 있다. 심리분야 에세이에서 많이 접하는 형식인데 앞에 환자의 사례를 설명하고 뒤에 저자인 의사가 원인과 해법을 통찰하면서 각장이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는 글. 앞의 환자에 해당하는 벤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뒤의 의사 역할이 3인칭 화자 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보통의 분신으로 느껴졌고 결국 자기 이야기를 서술한 다음 다시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듯이 보여 이 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자전적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책 끝머리에 정이현과 나눈 대담에서도 보통은 자전적인 의미가 많았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과 결혼관에 대해 아주 자세한 인터뷰를 읽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십대 남녀 사이에선 낭만적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가장 큰 이슈겠지만, 결혼하고 커리어를 쌓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사십대가 되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지요. 현대사회는 낭만적 사랑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아이디어를 조장하지만, 원래 결혼은 그 기원에서부터 계급과 제도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안다고 주장되는 것’일 뿐입니다.

 

 

결혼의 곤란한 점은,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기쁘거나 행복한 순간도 가끔은 있지만, 많은 시간 그것은 짐작보다 훨씬 더 씁쓸하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짐스럽습니다. 결혼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저는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부부들을 위한 책, 동지적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189p, 정이현 & 알랭 드 보통의 대담 중에서,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보통의 주장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평범한 삶이 사실은 엄청나게 특별하며 대단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사는 것 자체가 용기이고 영웅답다 말한다. 이 결론을 부연하기 위해 보통은 보통 남자가 겪게 되는 결혼의 실상을 낱낱이 그러나 매우 담담하게 전해준다. 그 보통의 남자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보통의 시선이 놀랄 만큼 정확하고 깊다. 누구도 태어나 어디에서든 결혼해서 잘 사는 방법 같은 건 공들여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너무나 쉽게 사랑만 믿고 결혼한다는 지적은 참 뼈아프다.

 

결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대개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이나 배우자 집안의 문제점, 혹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여러 갈등들을 하나도 모르면서 결혼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랑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만용을 부리는 것이다. 김어준은 연애를 해봐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결혼을 해 본 사람은 공통으로 느끼겠지만 결혼 후에라야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는지 비로소 절절히 깨닫게 된다. 배우자에게 실망하는 허탈감 보다는 그 실망을 너무나 자주 느끼는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보았더니 나는 내가 생각한 만큼 그리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사람을 미워할 줄 알게 되는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는 일이란 언제나 고통스럽다. 자연 이렇게 내 바닥을 보게 만드는 사람으로 모든 화가 돌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괜찮고 싶은 사람이며, 멋지고 능력 있는 아내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닌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3. 서재의 활용

 

결혼을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내 바닥을 처절하게 알려준 상대에 대해 상당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바닥을 견뎌준 인내심에 고마움도 가지고 있다. 물론 헤어졌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성에 있어 -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그 전보다 더 많이 자기 이외의 것을 견뎌야 하는 자기 버리기의 연속적 과정이다. 특히 여성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자기를 버려야 자기가 포함된 가정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와 가정에서 결혼하기 전에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학습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교에선 공부만 잘하면 일등을 할 수 있고 사회에 나와선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능력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 가정에선 귀한 딸과 아들로 자라 희생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다. 결혼은 기능과 역할의 장이지 결코 사랑과 낭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아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도’와 ‘그러나’를 가격표처럼 달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며 얼마든지 사랑을 유지하며 살수 있다며 자신도 잘 아는 거짓말을 서로들 주고받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어떤 분야나 아주 이상적으로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존재하듯 결혼에서도 두 마리,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백년해로하며 부부가 숨을 거둘 때에도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세상을 마쳤다는 기사도 있듯 초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복권당첨자는 있듯이... 그렇다. 당첨이 되는 사람이 있는 한 복권을 사듯, 사람들은 이상향임을 알아도 결혼을 한다.

 

또 하나 이 책에서의 놀라운 통찰 중 하나는 예술가의 결혼이다. 그동안 나는 예술 하는 사람들은 굳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과 맞지 않다고 괜히 예술가가 아닌 상대 배우자에게 피해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아는 지인들은 대부분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은 반대로 예술에 열정과 낭만을 쏟기 때문에 다른 관심이 없으므로 결혼생활을 더 잘하게 된다고 보았다. 결혼생활에다가 낭만을 쏟으려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점이 대개 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결혼생활이 사실은 이상향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온 것은 아닐까. 결혼생활은 원래 갈등과 파탄이 정상적인 것이고 아무 문제없는 것이 비정상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결혼생활을 잘(?)하고 있는 친구들, 이웃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분명 결혼이라는 분야에 있어 능력자들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모두 현명치 못한 삶,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 결과 재능과 가능성을 다른 삶으로 이동시킨 용기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내 자신을 합리화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혼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치 않기 때문에 헤어짐을 실행한 것인데 밖에서 보기엔 마치 자신의 대단함을 믿기에 이혼을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아쉽다. 얼마나 잘나서, 라는 편견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지 못해서가 아닐까.

 

서재 정리를 하면서 약 150권의 책을 처분했다. 덕지덕지 군데군데 내 욕심만 쌓여지는 느낌이었다. 책이 별 쓸모가 없다는 생각, 글이 참 허망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기한 건 책이 빠져나왔는데도 그다지 공간상의 여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분 한 책들은 대부분 신간이면서 오래 곁에 두고 보려고 했던 책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오래되어 스스로 바래버린 책 -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기 전의 -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그냥 꽂힌 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 이것도 궁극엔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는 욕심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전화 한통 안했지만 그냥 전화번호부에서 삭제하지 않는다. 삭제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인연이 소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일까. 나이 들어가는 건 어쩌면 오래된 것을 삭제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잊혀질 것들은 알아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무리 소중한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기 마련인 것. 그래서 그 잊혀짐이 두려워 거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인지 모른다.

 

가끔은 내 결혼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하다. 달리 처분할 순 없어 서재 한 구석에 꽂아둔 실없이 두껍기만 한 고서와 다를 게 없다. 그 방치된 책을 보면서 다시는 비슷한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책을 잊기 위해서 그냥 둔다. 사람은 혹 자신이 가장 잊고 싶은 것을 가장 기억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지. 내게 있어 결혼이 딱 그렇다.

 

 

 

덧붙임)

혹시 이웃분 중에 어디 회원가입할 때

기혼에 체크하시고

자녀수에 체크 하시고

직업란에 주부라고 체크하시는 분...

살짜기 알려주시면

제가 읽은 <사랑의 기초: 연인들>과 <사랑의 기초: 한남자>

보내 드릴께요.

이번엔 줄도 안치고 깨끗하게 읽었거든요.

부담은 하나도 안가지셔도 되요.

처분 차원이니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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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그렇게 해요 ㅋㅋㅋ
그래서 사람들이 늘 묻지요.
"아줌마시네요?" 하고.
그러면 저는 늘 대꾸해요.
"아저씨인데요?" 하고.

^^;;;;;

아저씨이지만 어찌 보면 아줌마처럼 살아가느라...-_-;;;;
저는 아저씨가 쓰는 글은 참 재미없다고 느끼고
아줌마가 쓰는 글만 재미있다고 느끼는...
그런 아저씨입니다 @.@

..

보통, 이라 하는 그분은 마음이 열렸기 때문에
그처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느껴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혼인도 삶도 예술도
옳게 바라보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리시스 2012-06-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혼도 아니고 자녀도 없고 주부는 아니지만 방금 김치김밥 말았는데 책 못주십니까, 한사람님?(이거 농담)
있죠, 아..이건 비밀로!

2012-06-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2-06-1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글이 좋아 두 세 번 반복해서 읽었네요.

읽다보니 문득 책 욕심이 생겨서요.
혹시 신청자가 없다면 제가 받아도 될까요?
전 기혼자이고,애도 셋(다른 신청자가 있다면 아이들 수로 우열을 나눠 주세요.ㅋ)이고,주부에요.
모두 다 해당되기에 손을 들어봅니다.^^

2012-06-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4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허공

소설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내 가슴에 무슨 장애라도 생긴 것일까. 재미난 소설이 없어진 것인지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소설과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대략 일 년 정도 된 듯하다. 소설을 읽을 만큼 읽었다거나 소설보다 재미난 책을 발견해서 일어난 현상은 아닌데 어쩐지 다시 소설이 좋아지질 않는다.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의 소설들 보다는 더 중량감 있는 예를 들면 텍스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무게감일지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최근에 집어든 한국 소설(장편)들은 하나같이 읽고 나면 허공에 증발해버리는 느낌이다.

 

 

#2. 이동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는 마치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면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기억이 덜 나곤 했다. 집중과 몰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고 내가 움직이면서 - 무언가에 의해 이동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 글이나 영상을 보고 있기에 아무래도 정보 수용에 있어 정지해 있는 상태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정해 본다. 이 책은 가만히 앉아서 보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디 들어는 보았지만 다시 갈 일은 없었던 의외의 장소, 그곳으로 이동 중인 상태에서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펼쳐든 책. 책의 내용은 딱 내가 예상하는 그만큼이었고 내가 기대했던 건 감동이나 놀라움 같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나는 굳이 기대한 만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기대를 하는 마음도 하지 않는 마음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인데 책을 덮고 나선 기대를 안했다고도 기대를 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고 할까. 그저 다른 사람들은 기대한 만큼은 아니다, 하는 말을 더 이해하지 않을까 하여 그 말을 적는 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3. 거리

한 권의 책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엿보고 그에 비친 내 자신을 발견하기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새삼 내 상황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 책을 쓸 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예감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 남의 이야기를 하는지 독자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확실히 남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으로, 정말로 남들의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소설가가 서사의 텍스트와 일부러 거리감을 유지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는 유지된 채로 시작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자신은 다 지나온 생의 터널일수도 있고 원래 소설가가 말하는 방식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날카롭거나 좀 더 구체적일 순 없었을까.

 

 

#4. 두려움

또 내가 느낀 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쓰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것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능력이 독자에겐 부족하다. 그야말로 작가와 같은 성별을 가진 동년배인 독자로서의 직관은 이 책에 대한 무감의 요인을 여러 상황으로 확산하도록 유도한다. 수요에 부응하는 공급방식으로서의 사랑 이야기. 얼마간 짜 맞추어진 인위적 설정으로서의 연애 이야기. 물론, (검증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서의)방식 때문에 이 책이 흥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독자인 내가 사랑과 연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부분 위치를 이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아직도, 이제 더 이상 연애과정을 소재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나를 울리거나 웃기지 못함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게 두려워 더욱 이런 소설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5. 택시

가끔, 나의 사랑은 이제 끝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 연애 비슷한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억지로 자문해보면 대답은 언제나 원치 않는다 쪽이었다. 언젠가 리뷰에도 썼지만 현재로선 이성이 별로 필요치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아마 살면서 생각이 바뀌는 시기가 올 수는 있겠지만 나는 사실 남자가 없는 삶이 너무나 편하고 안온하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는 애초부터 한 남자와 가정을 꾸려 그 안에서 무언가 희생하며 행복을 만들어가는 현명한 주부의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성격이었던 듯 하다. 연애만 신나게 하고 절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상적인 삶, 평범한 삶이라는 속세의 주류 가치에 당연히 나도 편입되어야 하는 줄, 그래야 남들처럼 행복해지는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다. 대략 이십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때 양단간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꼭 온다. 이 사람이 운명적 사랑이라는 착각은 제도권에 편입하려는 꽤 정당한 방식으로서 무리없이 행해진다. 마침 택시를 잡으려 했고 그때 지나가던 택시를 타게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무책임한 이벤트임을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지만.

 

 

#6. 포물선 방정식

이 책은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 까지 가지 못하고 내리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순간을 허공에서 포물선이 겹쳐지는 기적 같은 일이라 말했다. 수학을 잘하셨을까. 포물선이 겹쳐지는 그림이 어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현상학적 그래프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주가 동향 실시간 그래프라면 와 닿았을까... 그러고 보니 고2때인가 포물선의 방정식으로 수학 경시대회 때 상을 탔던 기억은 난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209p

 

 

#7. 불신

불행히도 이제 나는 사랑했던 사람을 한때나마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기적이라 생각지 않는다. 나는 대부분 사랑지상주의와 사랑을 한 편인데 그들은 모두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드물다 생각한다. 사랑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듯 사랑도 믿을 수 있는 사랑과 믿을 수 없는 사랑이 생겨날 뿐인 것이다. 선과 악 앞에서 그것을 택할 자유의지가 주어진 것이지 악인은 따로 있지 않다. 절대적 사랑이 따로 있지 않은 이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무조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이 다양할 뿐인 것이다. 나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사랑을 선호해야지만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하거나 옳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돌아보면 화끈 거리는 것. 그건 바로 사랑은 어떠 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사랑한다면 이래야 한다는 통속과 억압이 실은 사랑을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일상들은 아니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다.

 

 

#8. 추억

그 와중에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내가 잊고 있었던 감각은 운 좋게도 회상의 절차를 통해 어렵게 복원되었다.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 기억나는 사람. 손을 처음으로 잡게 되었을 때 미세하게 그러나 점점 압도적으로 떨려오던 그 느낌. 그 순간이 추억으로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명은 가장 오래 사랑했던 남자, 다음은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남자. 나머진 언제 어떻게 손을 잡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이 나를 데려간 지점은 아마 남자와의 사랑이 시작되던 장소, 그 주변 쯤 되는 것 같다. 손을 잡은 곳은 모두 차 안이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의 기초는 차안에서 쌓여진 것이다. 나는 왼손이었고 그들은 모두 오른 손이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 위치가 모두 조수석이었기에...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별은 높이 반짝이고 봄꽃들이 뿜어내는 향내는 아스라했다. 귓가에 종소리가 잘랑거리는 밤,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밤, 봄밤이었다.   -111p

 

 

#9. 온도

그런데 이 책이 가지는 한계는 손을 잡았던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긴 더 이상 바라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른 것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손을 잡을 때 불행히도 언제 손을 놓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더 불행한건 아니 그나마 다행인건 도대체 언제부터 손을 잡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전화가 언제였는지 점점 희미해져간다. 사람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자동 정리해 가는 훌륭한 구석이 있다. 핸드폰 정리를 하면서 전화번호부를 정리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의 전화기는 뜨거워질 일이 없다. 전화기의 온도와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의 온도는 비례하지 않을까... 서늘하기만 한 내 전화기의 온도를 측정해준 책. 이 책은 사랑의 기초체온을 측정해 준다.

 

 

#10. 소설 같은 사랑

뒤늦게 영화 <은교>를 보았다. 한마디로 소설의 반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느꼈다. 소설에선 노시인 이적요가 열일곱의 소녀에게 새삼스런 동요를 느끼게 되는 과정과 설명이 더 복잡했다.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싱그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시인의 상대적 패배감이 그냥 작가 박범신 자체로 느껴질 정도였다. 캐릭터만 비교하자면 소설에선 이적요가 더 입체적이었고 영화에선 은교가 가장 빛나보였다. 영화에선 서지우도 악하고 나약한 구석만 보여준 것 같아 공감가지 않았다. 소설에서 나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지 않은 작가로서의 좌절감에 상당부분 공감했었고 그 열등감을 건드리는 이적요의 시선이 가끔은 과하다고 그래서 서지우가 반감을 가질 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이적요의 사후에 은교가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시인이 혼자 죽을 때 더없이 쓸쓸해지던 슬픔, 외로움, 무상함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영화는 은교의 안녕이라는 인사가 마지막이다. 은교는 어디론가 가겠지만 시인은 누워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의미였을까. 젊음은 살아야 하기에 도망가는 듯 했고 늙음은 죽어야 하기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왜 화가 나는 것인지 그건 헤어짐도 시작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사랑은 이럴 것이다에 꽤 잘 어울려 보였다.

 

 

 < 은교 - 2012 /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11. 진실

사랑을 한다고 다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사랑을 실행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훗날에 사랑했었다고들 말한다. 아니 자신의 사랑은 대부분 확신에 찬 상태로 어떠한 사랑이었다 곧잘 단정하곤 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은 먼 훗날에 얼마든지 의도대로 상황에 따라 자기 요구에 맞추어 각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색은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때 일어나며 얼마든지 교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교정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질지 교정이 있기 전까진 자신조차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내 ‘경험자아’는 최고의 사랑이었지만 내 ‘기억자아’는 최악의 이별로 분류할 수 있다. 사랑을 한 사람도 한 시기도 한 기간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내 사랑은 내 기억에 의해 다른 모습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경험자아가 이끄는 진실의 얼굴은 아닐까...

 

#12. 보통

아마 생의 시기상으로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 하는 사랑에 더 가깝기 때문일까. 사실 정이현의 소설보다는 보통의 글이 더 와 닿기는 했다. 주제를 바꾸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정이현은 연애를 왜 보통은 결혼 후를 사랑과 연결 지으려 했을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독자로서 어쩔 수 없이 두 소설을 비교하게 된다. 미안하지만 텍스트의 밀착도면에서 보통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헤어지게 되는 글, 헤어지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약간의 낭만과 적당한 청승이 숨어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실연의 달콤함’이라는 수사가 있듯이 그것은 혼자서만 들쳐보고 몰래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서 족할 것이다. 얼마 전 가수 김범수는 슬픈 발라드를 불러야 하는데 지금 애인과 행복한 상태라 도무지 슬픈 감정이 나오지 않아 가짜로 이별선언을 하고 강제로 이별의 상황을 유발한 시기에 녹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백지영도 한창 새로운 애인이 생겨 설레이던 중에 슬픈 발라드를 불렀더니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도 그럴 수 있다면 작가는 아마 지나간 이별에의 고통 같은 건 충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 행복한 건 아닐까...

 

 

#13. 욕망

아니면 세대가 바뀌어서, 다시 말해 내가 한 세대를 지나와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에 민아-준호 커플의 심드렁한 연애를 더욱 심드렁하게 보는 것일까. 예를 들어 90년대 학번들의 평범한 이십대의 사랑을 구체화하여 보여준 김경욱의 소설 <동화처럼>이 떠오른다. 김경욱의 경우는 이야기 자체는 큰 재미가 없어도 공감하지 못할 거리감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대의 많은 아줌마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에선 만족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김선아나 김하늘이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에 한 가닥 대리만족의 감흥을 기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민아-준호가 너무 평범해서 지극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다른 것으로 채울까 싶었는데 다행히 TV에선 아직도 송승헌이나 소지섭, 심지어는 장동건까지 여전한 척 폼을 잡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건 어쩌면 그들이 제시하는 사랑의 방식을 철저히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그 우스움을 발견하고 같이 웃어보려는 여인의 기초적인 욕망은 아닐지. 가령 '저 우주 만물사이에 작동하는 오묘한 섭리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바치고 싶어지는' 어느 봄밤, 흐드러진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들이 손을 잡은 다음에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  

 

 

 

 < 신사의 품격 - 5회 예고편 中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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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노래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사랑'이나 '좋은 삶'을 부르지 않기 일쑤예요. 다들 '슬프다는 헤어짐'만 노래로 부르곤 해요. 가수 스스로 그런 마음에 젖으려 하고, 또 이런 노래를 듣는 사람도 이런 느낌에 젖겠지요.

책도 영화도 대중노래도 모두... 오늘날 우리들을 어디로 이끌려 하나 궁금하곤 해요.

사랑이란 늘 내 마음속에서 좋은 씨앗으로 내가 깨우기를 기다릴 텐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 씨앗을 깨우려 하지 않고, 겉치레 입발림으로 '사랑'이란 낱말만 읊는데, 하나같이 '소유'나 '성관계'나 '자기위안'에 그치지 않느냐 싶어요.

마녀고양이 2012-06-1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나처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저는 이 구절이 참 좋아요, 네, 그런거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타인이 우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요. 저도 좀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게, 실은,
자신이 감정 표현이 서툴러서, 자신의 감정 표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네요.

저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누군가를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남자가 되든, 여자가 되든, 아이든, 노인이든, 더이상 대상은 문제시되지 않더군요.
 

 

 

 

슬프다.

지난 한주 동안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잘하기도 했고 잘못하기도 했다.

때론 옳았지만 때때로 그르기도 했다.

가끔 논리적이었지만 자주 편파적이기도 했다.

문득 문을 열고 싶다가도 일어나면 닫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웃에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도우지 못했다.

 

 

나는 삼성 근로자의 사망에 분노하지 않은 무심한 시민이며,

임수경의 막말에도 흥분하지 않는 냉소적 유권자이며,

어느 유명한 작가의 타계 소식일랑 궁금하지도 않은 독자이다.

지난 한주 동안 내겐

그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웃을 동시에 연달아 잃어버린 슬픔만 중요했다.

 

그들이 오늘밤 혹시 나와 같이 슬프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울어 드리고 싶다.

 

그냥 아무 말 않고 마주앉아 슬며시 미소 지어드릴테다.

괜찮다고, 정말이지 괜찮다고 말해주겠지.

나는 괜찮지 않다고

당신들이 없으니

어쩐지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다고

휘리리 그리로 무엇이 지나갔는지 당신들은 알고 계신지

눈껌뻑이며  고집스레 물어 볼테다.

 

 

 

뚝.

하고 떨어지는 우리들 이야기.

 

툭.

하고 끊어지는 작은 인연들.

 

슬픔까지 속이며 이깟 글을 쓰고 싶진 않았다.

 

 

 

 

 

 

덧붙임)

 

저를 이웃으로 삼아 주신 분에게만 넋두리 하는 글입니다.

이웃분들 중 십오프로 정도만 공개되있죠...

하지만 오늘은 85프로 이웃분들에게도 응석을 부리고 싶네요.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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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09 0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성 회사 일꾼 죽음'에는 딱히 눈길을 두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꾸 '삼성 대기업' 얘기만 들먹이는데,
죽는 사람은 삼성뿐 아니라 엘지도 에스케이도 똑같아요.
작은 공장 사람도 죽고, 시골 흙일꾼 할매 할배도 죽어요.
그런데 언론이든 책이든, 늘 '서울 이야기'만 다루는데다
'대기업 이야기'만 다뤄요.

삼성 일꾼이 안타깝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분들 삶 또한 슬프며 안타까운데,
이분들 죽음을 다룬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하나만 바라보고 하나를 뺀 모든 삶'은 아예 눈을 감으니
더없이 안타깝구나 싶어요.

'임수경' 님 이야기에 눈길을 두기보다는
임길택 님 동화책 <수경이>를 읽어야
우리 삶을 사랑스레 가다듬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하루는 지나가고
하루는 다시 열립니다.

카스피 2012-06-0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기운내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용^^

가연 2012-06-0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ㅠ 지금은 좀 괜찮으시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