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 -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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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아니 그동안 나는 몇 번이나 응급실을 갔었던가. 떠올려 보니 내가 환자였던 경우와 가족이나 친지가 환자였던 경우로 나뉘어진다. 두 경우의 경험은 관점과 목적이 완전히 달라 같은 곳을 방문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분명한건 둘 다 정신이 없었다는 것과 의사는 단 한명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문제가 해결되었건 더 심각해졌건 절대 의사는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진료 받은 모든 병원의 의사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심각할수록 담당하는 의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고는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응급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고 최대한 그 상황을,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는 해결사에 가까웠다. 설령 그 해결방법이 환자의 죽음일지라도 그것은 응급의사의 몫이었다.

 

사람이 병원에 갔을 때 가장 응급한 상황은 목숨이 끊어질 것이냐 붙어 있을 수 있느냐의 생사의 갈림길, 만약은 다시 없는 그 순간일 것이다. 작가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생사의 순간들을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최대한 밀착하여 조심스레 전달하고 있다. 그곳에 신기하게도 지난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의사가 서 있었다. 그는 사람을 살렸다고 웃을 수도, 못 살렸다고 울을 수도 없는 기계인형처럼 몸과 마음을 다바치고 있었다. 내가 의사가 된 것처럼 이토록 생생한 시점과 표현이라니.

 

우연히 페이스 북에서 한 챕터를 읽고는 바로 주문했다. SNS상에서 끝까지 읽기엔 꽤 긴 내용이었는데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못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와, 미련 없이 못을 안고 걸어오던 그의 고독과,

최후의 시선으로 못을 받아들이던 그의 안구 따위가 생각날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나 믿기 어려울 때, 어떤 광경을 보고 있으나 그 존재가 가늠되지 않을 때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 생각할 때,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할 때,

그리고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느낄 때, 이 일련의 광경을 한번 씩 떠올려 옆자리에 앉혀본다.”

 

숨을 멈추고 연속적으로 이끌려 들어간 몇 개의 문장들은 무엇을 얼마나 더 잃어야 불행해질 것인지에서 고독은 어떤 것일까’,를 지나 내 삶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절망의 3단계를 참 정확하게도 정리했다는 느낌. 그러나 사람은 결국 타인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도 가늠해본다. 고로, 이 세문장이 내게 준 결과는 나도 불행 했었지에서 시작해 그러나 지금은 불행하지 않다는 자각이었고 그러므로 고독하지 않다는 깨달음 이었달까. 세상에, 저 문장의 대상은 눈에 못이 찔려 그 후로 평생 한 쪽 안구를 잃어버렸을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일은 살면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군가, 혹은 내게도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꼭 못에 눈이 찔리지 않더라도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눈 정도는 잃어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확실하게 드러나는 감정은 아니었을까.

 

죽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정된 택배물처럼 도착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사들고 집에 와서 부터는 생각만큼 진도가 척척 나진 않았다. 누군가의 고통과 죽어가는 장면을 시시각각 확인하는 일은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멈출수는 없었다. 작가는 의사로서의 사실적인 표현은 물론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미부여로 마무리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대부분 환자에겐 단 한번뿐인 죽음을 연속적으로 목격, 처리하고 돌아와 새삼 떠오르는 삶과 죽음의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되어야하는 일상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 책은 왜 쓰여졌을까.

이 글은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의사된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자살자가 쏟아지는 밤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수많은 죽음을 단정 짓던 자신의 혓바닥을 증오하던 그였다. 용기 있게 찢어진 열상을 모두 맡기고 견디어준 환자에겐 수고하셨다는 말을 잊지 않던 그였다. 지하철 투신 환자를 처리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엔 무사히 덜컹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을 기적이라 부르던 그였다. 유가족들의 압도적인 오열이 귀를 관통한 다음엔 돌아와 숨죽이며 혼자 울 수밖에 없던 그였다. 성탄절에도 아픔을 멈출 순 없어 뜬눈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던 그였다.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괴물이거나 천벌을 받아야 할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이 살았기에 똑같이 하얀 눈을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을 눈이 내렸다고 소복히 덮을 수는 없는 그였다.

 

책을 덮었을 때 비로소 잊을 수는 없었기에 차라리 기억하는 방식을 택한 그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죽음에 무감해진다는 건 곧 삶에 무감해진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문득 살고자 하는 일과 죽고자 하는 일의 무게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를 생각한다. 살고자 하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므로 더 힘든 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정도와 노력의 차이로 인해 우린 그렇게 힘겨운 날들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날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일에는 더 쉽고 덜 어려운 노력은 없다. 죽고자 하는 일은 성공과 동시에 종료되며 그 성공마저도 내가 누릴 수는 없다. 죽고자 하는 일도 결국엔 살아내야만, 사는 동안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일은 죽고자 하는 일과 모양만 다를 뿐 기실 속 내용은 같다는 점에서 우린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하는, 아니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얄궂은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이 기록은 죽음을 잊지 않아야 삶도 더 생생하다는 역설을 묵직하게 제시한다. 어쩌면 우리는 응급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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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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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덮었을 때, 여름은 끝나 있었다.

어느 여름이 덥지 않았을까마는 이번 여름은 특히, 최고, 최악이라 할 만 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고통이 극심할 때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견디다가 조금 나아질 때야 아파하기 시작한다. 여름을 잘 견뎌놓고 이제 더위가 물러간다하니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왜 이렇게 아우성일까.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치열했던 모든 것들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도 마찬가지. 책을 덮으면 좀 시원하고 후련할 줄 알았는데 여름 내내 그 북적거렸던 바닷가에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문득 독자도 이렇게 빠져나오기 힘든데 그 출렁거리던 바달 써댄 작가는 어떨까 싶어 새삼 뭉클하기도 했다.

희수의 예언대로 ‘뜨거운 여름이 끝나면 바다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1993년 봄과 여름, 구암의 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잊혀질 것이고 희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겐 ‘어느새 춥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가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이 소설은 ‘봄’과 ‘여름’의 두 챕터로 작가의 말 포함 595페이지 인 채 끝이 난다. 분량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쉽게 멈출 수 없는 가독성이 하루키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이며 내용자체가 다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맘 만 먹으면 빨리 덮을 수도 있는 경우였다. 그런데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다. 쉽게 어이없게 죽어나가는 건달이라고 그 인생은 쉬웠을까 싶어 후반부로 갈수록 괴롭고 슬프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 소설에서 건달의 죽음은 빈번하고도 일상적이다. 건달이 죽는 이유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모든 건달은 자기 이외의 건달을 죽임으로써 자기 삶을 유지한다. 즉 누구도 건달이라면 내 목숨 하나가 다른 건달의 죽음 하나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건 곧 나중에 죽는다는 뜻과도 같다.

사실 배경이 조폭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이 법칙은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세상 어디에도 적용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된지 오래다. 내가 대학을 합격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불합격을 의미하고 승진이나 승패, 성과를 내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경쟁자에게 호의를 베풀며 살기에 우리네 인생은 팍팍하고 벅찬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 하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무척이나 구질구질하고 신파스럽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주인공 희수의 시선으로 독자에게 늘 사업도 인생도 구질구질한 것이며,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며, 깨끗하기만 한 놈도 더럽기만 한 년도 없다고 부르짖는다. 누군가에겐 잔인한 가해자였을지라도 오늘 내게 꼭 필요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저 사람이 내게 나쁜 지만이 중요하지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린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도 예전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구질구질해 보이기 싫어서다. 그러니까 삶은, 한 계단 올라가는 그 과정은 원래부터 구질구질한 것이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이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마련하면 이야기 쪼매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414p

 

한때는 아버지나 엄마, 다른 누구처럼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절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고 쿨 하게 살 거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아니 살수록 어쩌면 살아 있기에 막장따위, 눈물바람의 신파 따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이나 나 또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따위 하나도 없다는 걸 이토록 많은 상처를 주고 받은 후에야 깨달았다.

 

소설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구질구질함을 펼쳐 보이는 구암과도 같은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때론 파도가 때론 태풍이, 그러다가 가끔 평화도 찾아드는 저 질척한 바다를 절대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 예언한다. 쿨한 듯 보이는 저 바다 앞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이토록 뜨거운 피를 작동시키지 않을 방법 또한 알 수는 없다고 몰아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깨닫고 살아가는 당신 역시 좋은 사람으로만 살수는 없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슬며시 알려준다. 누군가에게 적당히 좋다가도 가끔은 나쁘고, 욕심 없는 척해 봤지만 돌아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얼마나 좌절을 했었는지 저 바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끄덕인다. 당신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사라져야 할 무엇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실은 누구보다 눈물짓고 연연해하며 원망으로 보낸 세월이 많았는지 모두모두 이해한다고 토닥인다.

 

이 모든 적나라한 신파를 뒤로한 채 이제야 어른이 된 듯 수줍게 고개를 들고 나온 사람은 누구인가. 희수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쿨 하지 못할 작가의 분신이면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희수, 인숙, 아미 정도만 실명이 언급된다.(그의 소설에선 여간해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감이나 노인, 소녀 같은 연령대를 호칭하는 경운 양반이다. 주로 인물의 외모와 성격, 매력, 하는 일, 그로인한 종합적 평가를 통합하여 아주 심플한 한단어로 표기할 뿐이다.(꿈이  벤츠 옆자리에  가스나 태우고 멋지게 해변을 달리는 거라는 마나는 뭐든 하나마나해서 '마나'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많아도 이미 부여된 캐릭터를 따라 장수를 넘기는 일은 무척 신이 난다. 그러면서 독자인 나 역시 (이름없는)그들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존재감이 무겁고 상대적으로 친근감이 덜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객관적인 거리가 생긴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인물로서만 공감을 하고 싶다는 바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책을 덮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희수는 ‘뜨거운 피’를 지혜롭게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아무리 차가운 어른으로 살아가려 발버둥쳐도 신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우리네 삶을 대표하는 존재로 각인된다.

 

삶은 절대 멋있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고, 뜨거움을 모두 놓아버리고서 작동하는 삶은 없으며, 지금 여름의 바다를 건너 왔을지라도 다시 춥고 외로운 겨울 바다는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행히 누구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지금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완성도에 다다른다. 하얀등대와 빨간등대에 가보진 못했지만 둘다 가본 듯한 만족을 준다.

 

어쩌면 이토록 구질구질한 삶일지라도 이순간 함께 살아있다는 것이 喜壽, 우리들 기쁨의 목숨, 그 목숨들의 이야기는 아닐런지 작가에게 조용히 고개 들어 여쭙고 싶다. 삶이 구질구질할 지라도 이토록 구구절절 이야기를 펼쳐낸 당신의 '뜨거운 피' 만큼은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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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5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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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6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인문학 강연에서

왜 사는지를 묻는 것 보다는 왜 죽지 않는지를 물어 보는 게 빠르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거꾸로 방식이 답하기 간단치 않은 거의 모든 류의 질문에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왜 같이 사느냐 보다 왜 헤어지지 않느냐에 딩동~

왜 결혼을 하느냐 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에 딩동~

왜 애를 낳느냐보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

왜 다니느냐보다 왜 그만두지 않냐...

 

생각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사소하다.

아주 작은 부정은 아무리 큰 긍정도 품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이 놈의 집구석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죽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시대 엄니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희생과 역할에 대한 필요성이 곧 그들의 삶이자 목숨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감지하곤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왜 사셨을까... 아니 왜 죽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죽네 안죽네 사네 못사네 따위 입 밖으로 낼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연휴동안 책 몇 권을 들척거렸다. 집중해서 각 잡고 정독한 것이 아니므로 그야말로 성의없이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가 정확할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모컨보다 책장에 더 신경이 쓰여 꽤 무거운 시간들을 보내었다. 안 그래도 늘 이맘때면-연초부터 꽃피기 전까지-심리적 상중이라-내 아버지는 1월에 어머니는 3월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2월에 굳이 웃으며 룰루 거리기 귀찮아 어차피 오지 않은 봄, 춘삼월까지 꽃피기 기다렸다가 꽃잎이 떨어지려할 무렵부터 마음을 바꾼다.-경건하고 엄숙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근 십년 이상 아버지에 대해 깊고도 넓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결론은 아버지 살아생전에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다. 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는 아버지에 대해 한 줄도 정확히 쓸 수 있는 정보가 몇 개 없었다. 창피하게도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있는 열 몇 줄 객관적 사실만큼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나 극적인 스토리도 들었는지 버렸는지 결코 문장으로 엮을 만큼이 되지 않았다.

 

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읽으면서 급작스레 소환된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새삼스러웠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나도 살면서 한번은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꽤 낯설은 욕심을 보았을 뿐,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단 한글자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왜 사는지, 즉 왜 죽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차이는 그 대상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상대를 알려고 하는 목적은 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그러니까 그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은 내 욕심을 의미할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미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여자가 대학생 때였고 현대시의 이해인지 감상인지 하는 제목의 교양수업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젊은 강사가 여자에게 어떤 영시를 낭독하게 했다. 가스오븐에 머리를 들이밀어 자살했다는 한 여자 시인의 작품이었다. ......(중략)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는 비밀로 할 테니.” (중략)

 

여자가 끝내 내뱉지 못한 구절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중략)

 

그리고 문제의 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37p

 

 

돌아보면 아버지가 남은 생을 강렬히 열망했을 시절, 나는 그가 어서 생을 마감해주길 바랬다. 그의 삶이 끝나야 비로소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1910년에 태어나 울분과 절망의 세월 동안 소설가로 살다 가셨다는 김훈의 아버지. 1948년생으로서 내 아버지뻘 되는 김훈 작가의 아버지가 새삼 가여워져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는 예전에 읽었던 글들도 있었고, 어떤 내용일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아무생각없이 책장을 넘겼다 할 것이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36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37p

 

아버지의 관이 떠내려 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너무나 슬퍼서 조국을 버리고 싶었다던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의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나는 목맨다. -46p

 

 

김훈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있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다고 했다. 그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어떤 시대 어느 정권 아래에서 정확히 어떤 일로 밥을 먹고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으며 무슨 일로 좌절과 절망을 겪었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그의 국적과 나의 국적이 같고 심지어는 적어도 삼십년 정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 서류상으로도 확인되고 있건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라는 ‘보편적’ 국민과 ‘개별적’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아버지라는 '불가학적' 역사를 부정하고 망각해도 되는 일일까. 아니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보다 더 아니 최소한 아버지 만큼은 아니게 살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많고도 다양한 울분과 절망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을 감당하려 했던 건 아닐까.

 

연휴 내내 책장을 들추고 이책 저책 집었다 놓았다를 하면서 우리의 아버지들을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지 모르고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내 무지와 무심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버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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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1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2-1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김훈님의 아버지를 향한 저 표현 `온 몸을 갈았다`가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될 어떤 미래가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맨몸으로 갈았던 그 시대보다 나아질 지..

[그장소] 2016-02-1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ㅡ잘 읽고 갑니다.
 

 

안녕... 들, 하시죠?

나의 책동무, 글친구 님들...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무더위와 장마가 오는군요.

빗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촤르르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면서 물소리를 뿌리고 가네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에 대한 압박, 의미 있는 서평, 감동 주는 사연, 적절한 보상과 기쁨,

이런 것들과 아주 멀어진 채, 책과 글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진지 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그래서 각 잡고 글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책이라는 집안에 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읽는 책을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앞으로 읽겠다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땐 1년에 단 한권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살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심하다 여긴 사람들 중 한사람이 되어 일 년에 거의 손 꼽을 정도의 책을 사서 그중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책만 읽으며

책 같은 건 개나줘라면서 스스로 책과의 이별을 지속시키곤 했습니다.

(다음의 책에 의하면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는게 아니라, 책을 읽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바쁘다 말하는거죠)

 

 

그러던 중 사람의 마음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갑자기 다시 서점을 기웃거리고 알라딘을 접속하다가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를 클릭하고

몇시간 만에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좋다며 지인에게 전달하는 제 모습을 보았어요.

누가 그랬던가. 어떤 여자 집에 갔는데 서재에 책 한권 없는 여자와는 섹스를 하지 말라고 유명한 작가가 그랬다죠.

집안에 책이 너무 많아 이사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한 트럭 갖다주고 엿바꿔 먹듯 룰루랄라 한 게 다시 후회되네요.

 

 

그렇게 전달해준 책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예요.

 

전에 같으면 밑줄 그은 구절들을 열심히 적어가며

그 문장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나만의 또 다른 결론을 내고 하겠지만

글쎄,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현재 제 수중엔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을 건네 받은 사람과 아까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도 읽을 만하다(일년에 책 한권 안보는 사람입니다)는 군요.

 

이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에 부여한 자신만의 의미가 결국 지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자연스레 불교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잖아요.

토끼나 고양이처럼,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에 불과한데 인간만이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왜 사나, 어떻게 사나,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것. 일은 되도 하는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 꼭 잘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앞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을 망치는 일상. 그런 오늘의 반복으로 뭣 때문에 일을 하고 허겁지겁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일주일, 한 달, 한 계절, 일 년을 보내고 다음해에 나이 먹었다 한탄하는 습식.

 

 

늘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그때 거기나 다음 저기에 사는 우리들, 어쩌면 당신과 나를,

아주 아주 짜릿하게 돌아보게 하더군요.

저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스님의 책도 한권 주문했습니다.

그건 오늘 아침에 문자로 전달되어 온 법문 한 구절 때문이었어요.

 

평온한가요?

지금 마음이 평온한가요?

불편한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온다면 내려놓으세요.

나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편하다면 미안하다 말하세요.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편안해집니다.

넓은 바다를 생각하세요.

나는 강물에 불과합니다.   <마음꽃을 줍다> 중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내 마음.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어떠한 감정도 통과시켜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교롭게도 두 책이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역으로 우리가 인간이고 나 아닌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로인한 불편함과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테죠.

 

 

비오는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이네요.

 

 

어느 드라마에선 더 미안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던데

그건 잘못된 거 아닐까요.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미안해서 보지 않는 것보다는

미안하니까 얼굴보며 그 미안함 전하는거,

 

 

그 쪽이 더 마음 편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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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7-2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책이 없어도 열심히 읽은 사람은 다 알죠.
그런데 뉘앙스가 묘해요. 그렇다면 서재에 책이 그득하면
그 방면에 탁월한 건가요?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ㅋㅋ
저도 더위만 가시면 한 박스 정도 추려서 중고샵에 팔아버리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책읽는나무 2015-07-2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랑님!!
잘지내셨어요?^^
한 번씩 어찌 지내시나?궁금했었어요
책을 읽진 않았으되 그만큼 님의 마음을 빼앗는 즐거운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님을 뵙게 되니 반갑네요
자주 뵈어요
무더위도 같이 이겨내자구요~~~♡
 
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는 분이 카톡 프로필에 이 책의 표지 사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첼로 뒤에 숨어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두 다리가 묘하게도 안쓰러웠거든요.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슬픈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막연하게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작가와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여자의 슬픈 각선미를 기억에 저장시켜 놓고 거기서 일 년이 더 흐른 후 엊그제 비로소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년 여름엔 이 책을 스치기만 하고 잡아보지는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그땐 당신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 한권 읽었다고 작가를 알 수 있다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알고 모름의 답이란 대체로 주관적 판단이니까요. 이 책은 이렇게 작년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슬그머니 그러나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책과의 인연을 믿으며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저로서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던) 작년 여름의 나와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올 여름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하던 일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후 더 이상 삶은 한 발자욱도 진보하지 못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을 이어갑니다. 삶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한다 하여 생의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그랬죠. 인생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토끼나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서 주어진 삶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이라 생각하라고요. 사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정체도 익숙해지면 남부럽지 않은 안도감을 주긴 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특정기간 삶의 정체는 전체 생의 퇴보와도 같은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죠. 말하고 글 쓰고 무언가 읽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 안보고 글 안 쓰고 살면 의미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건 있습니다. 굳이 찾고 밝히려 들지 않아도 삶은 또 다른 의미를 향해 자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당분간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말자고 그러기 싫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보자고 남모르게 다짐한 제게 다시 의미를 찾아보라고 자꾸 귀찮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각자 우리의 생에 있어 어제까지 같이 호흡한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후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일생 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잃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남은 생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결국 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할 뿐이니까요. 그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느껴지도록 작가는 삶의 의미를 끈질기게도 고통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남아 있기 전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묻습니다. 작가는 그때가 사십년 전이었는지 오십년 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늘 반복합니다. 중요한 건 그 후로 사십 년 아니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하며 다른 건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 지점에 동의하기까지 소설을 다 읽어야 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작가는 결국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래오래 설득하고 영원히 공감시키고 말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말입니다.

 

작품 초반부에 주인공은 떠나간 남자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립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이죠. 사실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법인가요. 그런데도 순간, 잠시 신선했다고 느꼈습니다. 살면서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신에 대한 존중일까요. 인생 전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기다리겠다는 결의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시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평가는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숨을 쉬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즉, 의미부여는 실제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상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때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자신 이외에 세상 그 누구가 의미를 부여해주겠어요. 한다한들 자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래서 더 절대적이니까요. 그래야지만 기다림의 세월이 누구 앞에서든 강력한 떳떳함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누구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꼭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을 잃은 후 그 나머지인생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야 말로 얼마나 개인적이며 창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래서 인지 한 사람의 고백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거나 반대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작가는 주인공의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원시시대의 공룡성으로 상징하더군요. 그런 원시성을 유전자로 지닌 주인공은 사랑이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너를 차지할 때만 사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요. 나의 삶은 그러니까 나로부터가 아닌 철저히 너로부터만 생과 사의 여부가 결정나는 것. 사람들은 너 때문에 살기도 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사랑을 전제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런 일은 누구와 얼굴 보며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남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이 안되기 일쑤인가요. 그건 내가 남한테 남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것 보다 더 이해시키는 작업이 소설은 아닐까 이 작품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소설의 재미와는 별개로 저는 사실 주인공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이 작품은 읽을수록 작가를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인가 봐요. 첫 번째는 사랑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이 사라진 노년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달콤한 꿀맛 같아요.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기억자체는 ‘진주의 내부에 들어있는 이물질’처럼 조개를 성가시게 한 침입자일 뿐인데 조개 안에서 광택을 얻기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조개처럼 이물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의 영역이겠죠. 그것이 능력인지 노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부여.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p90

 

 

두 번째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부터 주인공이 살아내는 시간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등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공간성의 놀라울만한 압축입니다. 시공간의 축약은 마치 이 소설의 배경이 한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박물관 학예사인 주인공의 성찰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공룡 브라키오 사우루스를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뼈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인간도 다를 것 없는 뼈대를 이루고 한걸음 한걸음 지금까지 발자국을 새기며 인생이라는 시공간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누가 살면서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대 공룡의 모형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구체적이고도 창조적인 환경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그저 그런 불륜과 통속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공룡의 뼈대와 발자국 아래에서 늘 생과 사를 고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늙음과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한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번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는 프란츠가 떠나간 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라 결론짓습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진부하게 끝나버린 사랑의 주인공은 결국 예정대로 노년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쓸모밖에 없다며 작가는 주인공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부여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떤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는 것.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만이 내일을 예견해주는 어제와 같은 오늘.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당사자가 별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싶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삶은 끝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책을 덮으면서 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가 늘 느끼고 숨 쉬던 시간의 흐름과는 아주 터무니없이 다르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일 년은 그렇지 않았던 일 년과는 완전히 시계침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난 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거나 짧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삶의 일정한 어느 시기에 사로잡혀 꼼짝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나는 지나간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은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으면서 발자국을 떼는 시늉만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늘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을 택하고 순간을 늦춥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재는 더더욱 나쁜 결과를 상상치 못하도록 힘이 세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아마 사랑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눈앞의 많은 것을 놓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자 방안에서 혼자 그를 오랫동안 사랑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결과를 바꾸기보다 미리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제가 슬픈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모둔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불행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불행해지기 싫어 이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 다는 거. 어쩌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이별하기도 한다는 거. 원래 사랑은 행복과 불행과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인간만이 지난한 의미놀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거.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일테니까. 역설적으로도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모두 사랑을 버리지 않나요.

 

어떨 땐, 지나온 모든 사랑을 추억하지 않고 더 이상 기억할 수도 없어 새롭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이로써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질기게도 만나게 되는 악몽이 있는데 아마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통일이 되기 전 파괴된 도시를 보고 그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집 전체가 불에 탈 경우 ‘가구와 그림 책, 그리고 우리 삶이 구체화 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재가 되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라짐 전체, 결과로서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비로소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름이 내 불타고 있는 가슴보다 미지근하다 생각된다면 슬픈 이 소설을 읽어보세요. 다 잊고 더 이상 잊어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또 잊고 마음이 공허하다 못해 마음자체도 사라진듯하여 깃털보다 가볍다 느껴지는 순간, 아니 내 존재 자체의 무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때 아마도 고개 들어 새로운 누군가를 향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예견해봅니다. 인간은 슬프지만 그런 인간만이 슬픔을 겪을 수도 견딜 수도 지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요. 최소한 브라키오 사우루스보다는 괜찮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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