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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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이 소설을 덮었을 때, 여름은 끝나 있었다.

어느 여름이 덥지 않았을까마는 이번 여름은 특히, 최고, 최악이라 할 만 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고통이 극심할 때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견디다가 조금 나아질 때야 아파하기 시작한다. 여름을 잘 견뎌놓고 이제 더위가 물러간다하니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왜 이렇게 아우성일까. 지긋지긋하면서도 그 치열했던 모든 것들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소설도 마찬가지. 책을 덮으면 좀 시원하고 후련할 줄 알았는데 여름 내내 그 북적거렸던 바닷가에 거짓말처럼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문득 독자도 이렇게 빠져나오기 힘든데 그 출렁거리던 바달 써댄 작가는 어떨까 싶어 새삼 뭉클하기도 했다.

희수의 예언대로 ‘뜨거운 여름이 끝나면 바다로 몰려온 그 많은 사람들은 떠날 것’이고 ‘1993년 봄과 여름, 구암의 날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잊혀질 것이고 희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겐 ‘어느새 춥고 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가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이 소설은 ‘봄’과 ‘여름’의 두 챕터로 작가의 말 포함 595페이지 인 채 끝이 난다. 분량의 압박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쉽게 멈출 수 없는 가독성이 하루키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이며 내용자체가 다음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맘 만 먹으면 빨리 덮을 수도 있는 경우였다. 그런데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는 못했다. 쉽게 어이없게 죽어나가는 건달이라고 그 인생은 쉬웠을까 싶어 후반부로 갈수록 괴롭고 슬프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 소설에서 건달의 죽음은 빈번하고도 일상적이다. 건달이 죽는 이유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모든 건달은 자기 이외의 건달을 죽임으로써 자기 삶을 유지한다. 즉 누구도 건달이라면 내 목숨 하나가 다른 건달의 죽음 하나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건 곧 나중에 죽는다는 뜻과도 같다.

사실 배경이 조폭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이 법칙은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 세상 어디에도 적용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된지 오래다. 내가 대학을 합격하는 건 다른 누군가의 불합격을 의미하고 승진이나 승패, 성과를 내는 모든 일이 그러하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경쟁자에게 호의를 베풀며 살기에 우리네 인생은 팍팍하고 벅찬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 하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과정 자체는 무척이나 구질구질하고 신파스럽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주인공 희수의 시선으로 독자에게 늘 사업도 인생도 구질구질한 것이며,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며, 깨끗하기만 한 놈도 더럽기만 한 년도 없다고 부르짖는다. 누군가에겐 잔인한 가해자였을지라도 오늘 내게 꼭 필요한 조력자가 될 수 있다. 저 사람이 내게 나쁜 지만이 중요하지 원래 나쁜 사람이었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우린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어도 예전처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구질구질해 보이기 싫어서다. 그러니까 삶은, 한 계단 올라가는 그 과정은 원래부터 구질구질한 것이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이 바다가 뭣이 좋습니까. 소매치기에, 사기꾼에, 포주에, 창녀에, 양아치들이며, 만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기껏 화해시키려고 자리마련하면 이야기 쪼매하다가 결국 욕하고, 술판 뒤집고, 소주병 날아다니고, 대가리 깨지고, 울고, 그래놓고도 또 술 처마시면 서로 껴안으면서 사랑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지랄이나 하고 자빠지고, 영감님 저는 마 요즘엔 신파가 딱 싫습니다.”   -414p

 

한때는 아버지나 엄마, 다른 누구처럼 절대 살지 않을 거라고, 절대 질척거리지 않고 깔끔하고 쿨 하게 살 거라고 다짐한 적이 있다. 살면서 아니 살수록 어쩌면 살아 있기에 막장따위, 눈물바람의 신파 따위 피할 방법은 없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을 건넬 방법’이나 나 또한 ‘상처를 받지 않고 사랑을 받을 방법’따위 하나도 없다는 걸 이토록 많은 상처를 주고 받은 후에야 깨달았다.

 

소설은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인생의 구질구질함을 펼쳐 보이는 구암과도 같은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때론 파도가 때론 태풍이, 그러다가 가끔 평화도 찾아드는 저 질척한 바다를 절대 떠날 수는 없을 것이라 예언한다. 쿨한 듯 보이는 저 바다 앞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이토록 뜨거운 피를 작동시키지 않을 방법 또한 알 수는 없다고 몰아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정답을 깨닫고 살아가는 당신 역시 좋은 사람으로만 살수는 없다는 걸 어쩌면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슬며시 알려준다. 누군가에게 적당히 좋다가도 가끔은 나쁘고, 욕심 없는 척해 봤지만 돌아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얼마나 좌절을 했었는지 저 바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끄덕인다. 당신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사라져야 할 무엇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실은 누구보다 눈물짓고 연연해하며 원망으로 보낸 세월이 많았는지 모두모두 이해한다고 토닥인다.

 

이 모든 적나라한 신파를 뒤로한 채 이제야 어른이 된 듯 수줍게 고개를 들고 나온 사람은 누구인가. 희수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쿨 하지 못할 작가의 분신이면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고 희수, 인숙, 아미 정도만 실명이 언급된다.(그의 소설에선 여간해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감이나 노인, 소녀 같은 연령대를 호칭하는 경운 양반이다. 주로 인물의 외모와 성격, 매력, 하는 일, 그로인한 종합적 평가를 통합하여 아주 심플한 한단어로 표기할 뿐이다.(꿈이  벤츠 옆자리에  가스나 태우고 멋지게 해변을 달리는 거라는 마나는 뭐든 하나마나해서 '마나'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많아도 이미 부여된 캐릭터를 따라 장수를 넘기는 일은 무척 신이 난다. 그러면서 독자인 나 역시 (이름없는)그들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존재감이 무겁고 상대적으로 친근감이 덜하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객관적인 거리가 생긴다.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인물로서만 공감을 하고 싶다는 바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책을 덮으면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희수는 ‘뜨거운 피’를 지혜롭게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아무리 차가운 어른으로 살아가려 발버둥쳐도 신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우리네 삶을 대표하는 존재로 각인된다.

 

삶은 절대 멋있거나 근사한 것이 아니고, 뜨거움을 모두 놓아버리고서 작동하는 삶은 없으며, 지금 여름의 바다를 건너 왔을지라도 다시 춥고 외로운 겨울 바다는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행히 누구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지금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은 완성도에 다다른다. 하얀등대와 빨간등대에 가보진 못했지만 둘다 가본 듯한 만족을 준다.

 

어쩌면 이토록 구질구질한 삶일지라도 이순간 함께 살아있다는 것이 喜壽, 우리들 기쁨의 목숨, 그 목숨들의 이야기는 아닐런지 작가에게 조용히 고개 들어 여쭙고 싶다. 삶이 구질구질할 지라도 이토록 구구절절 이야기를 펼쳐낸 당신의 '뜨거운 피' 만큼은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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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5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6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인문학 강연에서

왜 사는지를 묻는 것 보다는 왜 죽지 않는지를 물어 보는 게 빠르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거꾸로 방식이 답하기 간단치 않은 거의 모든 류의 질문에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왜 같이 사느냐 보다 왜 헤어지지 않느냐에 딩동~

왜 결혼을 하느냐 보다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에 딩동~

왜 애를 낳느냐보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

왜 다니느냐보다 왜 그만두지 않냐...

 

생각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사소하다.

아주 작은 부정은 아무리 큰 긍정도 품을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 어머니는 내가 죽으면 이 놈의 집구석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죽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시대 엄니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희생과 역할에 대한 필요성이 곧 그들의 삶이자 목숨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늘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감지하곤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는 왜 사셨을까... 아니 왜 죽지 않으셨을까... 어쩌면 죽네 안죽네 사네 못사네 따위 입 밖으로 낼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연휴동안 책 몇 권을 들척거렸다. 집중해서 각 잡고 정독한 것이 아니므로 그야말로 성의없이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가 정확할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리모컨보다 책장에 더 신경이 쓰여 꽤 무거운 시간들을 보내었다. 안 그래도 늘 이맘때면-연초부터 꽃피기 전까지-심리적 상중이라-내 아버지는 1월에 어머니는 3월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2월에 굳이 웃으며 룰루 거리기 귀찮아 어차피 오지 않은 봄, 춘삼월까지 꽃피기 기다렸다가 꽃잎이 떨어지려할 무렵부터 마음을 바꾼다.-경건하고 엄숙한 멘탈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근 십년 이상 아버지에 대해 깊고도 넓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 결론은 아버지 살아생전에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기억으로 마무리 되었다. 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는 아버지에 대해 한 줄도 정확히 쓸 수 있는 정보가 몇 개 없었다. 창피하게도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있는 열 몇 줄 객관적 사실만큼도 모르는 자식이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나 극적인 스토리도 들었는지 버렸는지 결코 문장으로 엮을 만큼이 되지 않았다.

 

201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읽으면서 급작스레 소환된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새삼스러웠고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으며 나도 살면서 한번은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꽤 낯설은 욕심을 보았을 뿐, 나는 아버지에 대해 단 한글자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왜 사는지, 즉 왜 죽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차이는 그 대상을 알고 싶어 하는지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상대를 알려고 하는 목적은 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그러니까 그의 행복에 기여하고 싶은 내 욕심을 의미할 것이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아버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미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여자가 대학생 때였고 현대시의 이해인지 감상인지 하는 제목의 교양수업시간이었다. 낮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던 젊은 강사가 여자에게 어떤 영시를 낭독하게 했다. 가스오븐에 머리를 들이밀어 자살했다는 한 여자 시인의 작품이었다. ......(중략)

 

“걱정 말아요, 아버님께는 비밀로 할 테니.” (중략)

 

여자가 끝내 내뱉지 못한 구절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중략)

 

그리고 문제의 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짜 마지막 행은 이랬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37p

 

 

돌아보면 아버지가 남은 생을 강렬히 열망했을 시절, 나는 그가 어서 생을 마감해주길 바랬다. 그의 삶이 끝나야 비로소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1910년에 태어나 울분과 절망의 세월 동안 소설가로 살다 가셨다는 김훈의 아버지. 1948년생으로서 내 아버지뻘 되는 김훈 작가의 아버지가 새삼 가여워져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는 예전에 읽었던 글들도 있었고, 어떤 내용일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아무생각없이 책장을 넘겼다 할 것이다.

 

 

 

아, 젊은 내 아버지는 망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에 흐느끼면서도 조국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칭칭 감기는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가엾은 내 아들과 같은 젊은 아버지를 안아주고 싶었다. -36p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회귀를 거듭하는 한국 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좌충우돌하면서 그 황무지를 건너갔다. 건너가지 못하고, 그 돌밭에 몸을 갈면서 세상을 떠났다. -37p

 

아버지의 관이 떠내려 갈 때 나는 내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작심했다. 내 아버지가 조국이라는 운명을 저주했듯이 나는 내 아버지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너무나 슬퍼서 조국을 버리고 싶었다던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의 글을 읽으면 지금도 나는 목맨다. -46p

 

 

김훈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시대를 긴 글로 써보려는 계획을 가지고’있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하였고 지금은 파지만 쌓여’ 있다고 했다. 그가 실패를 거듭하는 까닭은 ‘아버지의 삶의 파탄과 광기, 그의 꿈과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내 아버지가 어떤 시대 어느 정권 아래에서 정확히 어떤 일로 밥을 먹고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의 꿈이 무엇이었으며 무슨 일로 좌절과 절망을 겪었는지도 아는 바가 없다. 그의 국적과 나의 국적이 같고 심지어는 적어도 삼십년 정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 서류상으로도 확인되고 있건만, 사실이 그렇다.

 

우리라는 ‘보편적’ 국민과 ‘개별적’ 개인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아버지라는 '불가학적' 역사를 부정하고 망각해도 되는 일일까. 아니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보다 더 아니 최소한 아버지 만큼은 아니게 살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 걸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 아버지의 많고도 다양한 울분과 절망을 잊어버리고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을 감당하려 했던 건 아닐까.

 

연휴 내내 책장을 들추고 이책 저책 집었다 놓았다를 하면서 우리의 아버지들을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려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할지 모르고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내 무지와 무심함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버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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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1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2-11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김훈님의 아버지를 향한 저 표현 `온 몸을 갈았다`가 잊혀지지 않아요. 우리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될 어떤 미래가 이제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맨몸으로 갈았던 그 시대보다 나아질 지..

[그장소] 2016-02-11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 ㅡ잘 읽고 갑니다.
 

 

안녕... 들, 하시죠?

나의 책동무, 글친구 님들...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무더위와 장마가 오는군요.

빗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촤르르 자동차 한대가 지나가면서 물소리를 뿌리고 가네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에 대한 압박, 의미 있는 서평, 감동 주는 사연, 적절한 보상과 기쁨,

이런 것들과 아주 멀어진 채, 책과 글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진지 꽤 시간이 흐른 듯 합니다. 그래서 각 잡고 글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책이라는 집안에 박혀 나오고 싶지 않았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있다면 세상에는 내가 읽는 책을 읽었거나 읽는 중이거나 앞으로 읽겠다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땐 1년에 단 한권의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살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심하다 여긴 사람들 중 한사람이 되어 일 년에 거의 손 꼽을 정도의 책을 사서 그중 또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책만 읽으며

책 같은 건 개나줘라면서 스스로 책과의 이별을 지속시키곤 했습니다.

(다음의 책에 의하면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는게 아니라, 책을 읽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바쁘다 말하는거죠)

 

 

그러던 중 사람의 마음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갑자기 다시 서점을 기웃거리고 알라딘을 접속하다가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를 클릭하고

몇시간 만에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이 좋다며 지인에게 전달하는 제 모습을 보았어요.

누가 그랬던가. 어떤 여자 집에 갔는데 서재에 책 한권 없는 여자와는 섹스를 하지 말라고 유명한 작가가 그랬다죠.

집안에 책이 너무 많아 이사할 때 알라딘 중고 서점에 한 트럭 갖다주고 엿바꿔 먹듯 룰루랄라 한 게 다시 후회되네요.

 

 

그렇게 전달해준 책이 바로

<미움받을 용기>예요.

 

전에 같으면 밑줄 그은 구절들을 열심히 적어가며

그 문장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나만의 또 다른 결론을 내고 하겠지만

글쎄, 이젠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현재 제 수중엔 책이 없습니다.

이 책을 건네 받은 사람과 아까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도 읽을 만하다(일년에 책 한권 안보는 사람입니다)는 군요.

 

이 책에서 가장 와 닿았던 내용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에 부여한 자신만의 의미가 결국 지금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자연스레 불교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 내 인생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잖아요.

토끼나 고양이처럼,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에 불과한데 인간만이 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왜 사나, 어떻게 사나,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것. 일은 되도 하는 것이고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 꼭 잘되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고 앞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오늘을 망치는 일상. 그런 오늘의 반복으로 뭣 때문에 일을 하고 허겁지겁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일주일, 한 달, 한 계절, 일 년을 보내고 다음해에 나이 먹었다 한탄하는 습식.

 

 

늘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그때 거기나 다음 저기에 사는 우리들, 어쩌면 당신과 나를,

아주 아주 짜릿하게 돌아보게 하더군요.

저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스님의 책도 한권 주문했습니다.

그건 오늘 아침에 문자로 전달되어 온 법문 한 구절 때문이었어요.

 

평온한가요?

지금 마음이 평온한가요?

불편한 마음은 어디서 올까요?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온다면 내려놓으세요.

나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편하다면 미안하다 말하세요.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편안해집니다.

넓은 바다를 생각하세요.

나는 강물에 불과합니다.   <마음꽃을 줍다> 중에서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내 마음.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어떠한 감정도 통과시켜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교롭게도 두 책이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역으로 우리가 인간이고 나 아닌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로인한 불편함과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할테죠.

 

 

비오는 금요일, 주말을 앞두고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이네요.

 

 

어느 드라마에선 더 미안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던데

그건 잘못된 거 아닐까요. 미안하다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미안해서 보지 않는 것보다는

미안하니까 얼굴보며 그 미안함 전하는거,

 

 

그 쪽이 더 마음 편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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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7-2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에 책이 없어도 열심히 읽은 사람은 다 알죠.
그런데 뉘앙스가 묘해요. 그렇다면 서재에 책이 그득하면
그 방면에 탁월한 건가요?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ㅋㅋ
저도 더위만 가시면 한 박스 정도 추려서 중고샵에 팔아버리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책읽는나무 2015-07-2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랑님!!
잘지내셨어요?^^
한 번씩 어찌 지내시나?궁금했었어요
책을 읽진 않았으되 그만큼 님의 마음을 빼앗는 즐거운일?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님을 뵙게 되니 반갑네요
자주 뵈어요
무더위도 같이 이겨내자구요~~~♡
 
슬픈 짐승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언젠가 아는 분이 카톡 프로필에 이 책의 표지 사진을 올려 놓았더라구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첼로 뒤에 숨어버린 알 수 없는 여자의 두 다리가 묘하게도 안쓰러웠거든요. 제목을 떠올리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슬픈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막연하게 언제 한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작가와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고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책임하지 않은가요? 여자의 슬픈 각선미를 기억에 저장시켜 놓고 거기서 일 년이 더 흐른 후 엊그제 비로소 책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작년 여름엔 이 책을 스치기만 하고 잡아보지는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작가가 만약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 묻는다면 그땐 당신을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 한권 읽었다고 작가를 알 수 있다고 답할 순 없겠지만 알고 모름의 답이란 대체로 주관적 판단이니까요. 이 책은 이렇게 작년 여름의 나를 떠올리게 하며 슬그머니 그러나 끈질기게 다가왔습니다. 책과의 인연을 믿으며 읽는 시기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저로서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던) 작년 여름의 나와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던) 올 여름의 나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주인공은 자신을 지배하던 일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진 후 더 이상 삶은 한 발자욱도 진보하지 못한 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삶을 이어갑니다. 삶이 제자리 걸음을 반복한다 하여 생의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그랬죠. 인생에 너무 깊은 의미를 두지 말라고요. 토끼나 풀 한 포기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서 주어진 삶이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뿐이라 생각하라고요. 사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던 터였습니다. 정체도 익숙해지면 남부럽지 않은 안도감을 주긴 하니까요. 하지만 어쩐지 특정기간 삶의 정체는 전체 생의 퇴보와도 같은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죠. 말하고 글 쓰고 무언가 읽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책 안보고 글 안 쓰고 살면 의미 찾기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한 건 있습니다. 굳이 찾고 밝히려 들지 않아도 삶은 또 다른 의미를 향해 자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책은 당분간 무엇에도 의미를 찾지 말자고 그러기 싫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보자고 남모르게 다짐한 제게 다시 의미를 찾아보라고 자꾸 귀찮게 하는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각자 우리의 생에 있어 어제까지 같이 호흡한 누군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그 후의 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일생 일대에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잃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남은 생을 이야기 합니다. 아니, 결국 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가는 것 외엔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강조할 뿐이니까요. 그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느껴지도록 작가는 삶의 의미를 끈질기게도 고통스럽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남아 있기 전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되묻습니다. 작가는 그때가 사십년 전이었는지 오십년 전이었는지 확실치 않다고 늘 반복합니다. 중요한 건 그 후로 사십 년 아니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하며 다른 건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예요. 그 지점에 동의하기까지 소설을 다 읽어야 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요. 작가는 결국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래오래 설득하고 영원히 공감시키고 말아요. 대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시절에 말입니다.

 

작품 초반부에 주인공은 떠나간 남자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 전체를 걸어버립니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이죠. 사실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어법인가요. 그런데도 순간, 잠시 신선했다고 느꼈습니다. 살면서 그런 대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동경일까요. 그렇게 단정지을 수 있는 확신에 대한 존중일까요. 인생 전체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 그건 아마도 계속해서 기다리겠다는 결의로 들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혹시 그렇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최대의 평가는 아니었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평가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숨을 쉬며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즉, 의미부여는 실제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대상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때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자신 이외에 세상 그 누구가 의미를 부여해주겠어요. 한다한들 자신만큼은 아닐 겁니다. 어차피 사랑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래서 더 절대적이니까요. 그래야지만 기다림의 세월이 누구 앞에서든 강력한 떳떳함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한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누구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꼭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을 잃은 후 그 나머지인생이 의미 없을 수 있다는 데는 충분히 동의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의미부여야 말로 얼마나 개인적이며 창의적일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래서 인지 한 사람의 고백은 지극히 공감할 수 있거나 반대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작가는 주인공의 프란츠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원시시대의 공룡성으로 상징하더군요. 그런 원시성을 유전자로 지닌 주인공은 사랑이란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꿔 말하면 너를 차지할 때만 사는 것이라는 뜻도 되지요. 나의 삶은 그러니까 나로부터가 아닌 철저히 너로부터만 생과 사의 여부가 결정나는 것. 사람들은 너 때문에 살기도 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사랑을 전제할 때 더욱 분명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런 일은 누구와 얼굴 보며 말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실 남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얼마나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이 안되기 일쑤인가요. 그건 내가 남한테 남 이야기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죠. 그런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것 보다 더 이해시키는 작업이 소설은 아닐까 이 작품을 덮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소설의 재미와는 별개로 저는 사실 주인공을 이해하기는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이 작품은 읽을수록 작가를 감탄하게 만드는 소설인가 봐요. 첫 번째는 사랑을 매개로 한 기억과 사랑이 사라진 노년에 대한 사유가 깊고 달콤한 꿀맛 같아요. 결국 인간은 사랑을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슬픈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기억자체는 ‘진주의 내부에 들어있는 이물질’처럼 조개를 성가시게 한 침입자일 뿐인데 조개 안에서 광택을 얻기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조개처럼 이물질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의 영역이겠죠. 그것이 능력인지 노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한 단 하나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의미부여.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p90

 

 

두 번째는 공룡이 살았던 시대부터 주인공이 살아내는 시간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등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공간성의 놀라울만한 압축입니다. 시공간의 축약은 마치 이 소설의 배경이 한 장소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박물관 학예사인 주인공의 성찰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공룡 브라키오 사우루스를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뼈대를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인간도 다를 것 없는 뼈대를 이루고 한걸음 한걸음 지금까지 발자국을 새기며 인생이라는 시공간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합니다. 어느 누가 살면서 사랑하게 될 사람을 거대 공룡의 모형 아래에서 운명적으로 만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구체적이고도 창조적인 환경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그저 그런 불륜과 통속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공룡의 뼈대와 발자국 아래에서 늘 생과 사를 고민하니까요.

 

마지막으로 과정으로서의 인간의 늙음과 결과로서의 죽음에 대한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번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자는 프란츠가 떠나간 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시간을 초월한, 어떤 숫자 도구에 의해서도 정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 ‘바람이 통하는 어떤 공의 내부에서 살듯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그러나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의 끝은 비극적이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 중 하나라 결론짓습니다. 비극적이면서도 진부하게 끝나버린 사랑의 주인공은 결국 예정대로 노년을 맞이합니다. 노년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쓸모밖에 없다며 작가는 주인공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부여하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떤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바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산다는 것. 미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만이 내일을 예견해주는 어제와 같은 오늘. 그곳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당사자가 별로 벗어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싶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삶은 끝나는 것일 테니까요.

 

이 책을 덮으면서 저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일, 혹은 그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가 늘 느끼고 숨 쉬던 시간의 흐름과는 아주 터무니없이 다르게 각인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일 년은 그렇지 않았던 일 년과는 완전히 시계침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난 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거나 짧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삶의 일정한 어느 시기에 사로잡혀 꼼짝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나는 지나간 과거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은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으면서 발자국을 떼는 시늉만 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오늘을 되돌아 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늘 나중에 안 좋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을 택하고 순간을 늦춥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라는 현재는 더더욱 나쁜 결과를 상상치 못하도록 힘이 세어지기 때문에 결과를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아마 사랑을 잃게 되는 두려움이 눈앞의 많은 것을 놓치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주인공은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자 방안에서 혼자 그를 오랫동안 사랑합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합니다. 어쩌면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인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도 그 결과를 바꾸기보다 미리 알게 된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합니다. 제가 슬픈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는데도 왜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않았는지요. 어쩌면 우리 모둔 행복할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알면서도 눈감아버리는 존재들은 아닐까요.

 

불행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지만 더 불행해지기 싫어 이별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 다는 거. 어쩌면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이별하기도 한다는 거. 원래 사랑은 행복과 불행과 상관없이 왔다가 가는 것인데 인간만이 지난한 의미놀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거. 왜냐하면 사랑이란 그렇지 않고서는 시작하거나 끝내야 할 필요성이 없는 것 일테니까. 역설적으로도 이 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모두 사랑을 버리지 않나요.

 

어떨 땐, 지나온 모든 사랑을 추억하지 않고 더 이상 기억할 수도 없어 새롭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이로써 잊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질기게도 만나게 되는 악몽이 있는데 아마도 연기처럼 사라지길 소원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통일이 되기 전 파괴된 도시를 보고 그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것인지 모릅니다. 집 전체가 불에 탈 경우 ‘가구와 그림 책, 그리고 우리 삶이 구체화 되었던 다른 모든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재가 되는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라짐 전체, 결과로서 사라졌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했던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비로소 삶은 재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름이 내 불타고 있는 가슴보다 미지근하다 생각된다면 슬픈 이 소설을 읽어보세요. 다 잊고 더 이상 잊어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또 잊고 마음이 공허하다 못해 마음자체도 사라진듯하여 깃털보다 가볍다 느껴지는 순간, 아니 내 존재 자체의 무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때 아마도 고개 들어 새로운 누군가를 향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예견해봅니다. 인간은 슬프지만 그런 인간만이 슬픔을 겪을 수도 견딜 수도 지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요. 최소한 브라키오 사우루스보다는 괜찮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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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자 웃고 혼자 울기

 

 

스마트폰의 아침은 좋은 글귀의 향연이다.

 

언제부턴가 누군가 보내주는 명언과 책에서 인용된 글귀, 유명인사 및 멘토들의 충고, 부처님 말씀과 성경구절들이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고 멈출 수 없이 전달되고 있다. 사십대 이상 카톡 사용자들이 부지런히 퍼다 나르기 때문인지 어떤 날은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내용의 좋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동영상이 될 때도 있고 찌라시가 될 때도 있고 대자보가 되는 날도 있다. 광고 메일로 날라든 문구나 컨텐츠가 다음 카페나 네이버 블로그로 옮겨진 후 유투브나 밴드게시판에 확산되고 한명의 링크가 그의 지인들로 확산되면서 대충 이삼일이면 우리 모두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지난 연말에 똑같은 크리스마스용 동영상과 좋은 말을 몇 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서로 전혀 모르는 두 사람한테서 같은 내용을 받는 기분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씁쓸했달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얼추 같은 하늘 아래서 거의 동시간대에 같은 내용을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는 것 같다. 문제는 같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그 공감의 양과 질이 같지는 않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불특정 다수가 대상인 글과 그림들에 의지하게 된 과정이 새삼 쓸쓸하게 느껴진다. 나를 아는 누군가의 지적질과 충고는 불쾌하고 나를 모르는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는 공허하다. 대신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은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는 혼자서 웃고 울을 수 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안 좋아지려 할 무렵 날아든 이름 모를 시인의 넋두리는 조용한 명상이 된다. 나이 들면서 무조건 내 사연을 다 털어놓는다고 상대가 이해해주고 또 무언가 답해준다고 마냥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기 때문일까.

 

어느덧 혼자 웃고 떠들고 우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해지는 것 같다. 안보는 것 같아도 다 돌려보고 안 읽는 것 같아도 다 챙겨 읽는, 혹시 좋은 말 중독자…… 는 아닐까. 아는 사람의 말과 목소리보다는 세상 누구에든 다 해당되는 더 큰 소리와 더 넓은 마음에 끄덕이고 눈감아주는 요즘을 살고 있다.

 

 

#2.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혼자서 웃고 울기 좋은 소설이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이번 소설집엔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단편 11개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설집치고 많은 분량이다. 이중에는 2009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비롯해 전에 읽었던 작품도 더러 있었다. 그들 중 표제작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가장 감성적인 제목으로 읽혀서인지 행간에 흐르는 낭만성에 한참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제목을 참 잘 짓는 작가이다. (이 칭찬이 소설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그럴싸하다 쯤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해 또 얼마나 제목에 고민을 할 것인가, 작가는.)

 

작가의 단편엔 유난히도 한 사람의 인생을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자연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 - 친척, 부모님, 오랜 친구, 스승 - 그 주인공으로 선택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고 들려주면서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그 시절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나같이 동시대를 살았던 독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때의 시간과 공간에서 얼마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읽은 김연수는 갖가지 아픈 사연들이 많았던 어르신들을 가까이서 듣고 보고 살아온 시간과 공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소설가로 살게 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작가의 동심은 순수와 순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당시 알수 없었던 곡절, 회한, 순정들에 대한 첫인상은 아니었을까.

 

 

맞아, 사랑의 줄행랑이었던 거지. 요즘 같으면 어디 파타고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곳으로 도망쳤을 텐데, 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81p,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에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화자의 이모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품안에서 들었던 빗소리이다. 이모는 병들어 남은 생을 자신과 함께해준 감독과 같이 들었던 빗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 작가는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이모의 사연을 끌어들여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과 이별에의 보편적 낭만을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얼마나 들었는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잊지 못하는지 작가는 누구에게나 그런 소리 하나쯤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듯보였다.

 

어찌 보면 청승맞아 보이는 엄마의 사연을 우리가 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고속도로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나누는 누나와의 대화로 통과시켜버린 이야기,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쓸쓸한 샹송을 듣고 싶어지는 작품이었다.

 

그날, 차량이 거의 없던 일요일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큰누나가 끝내 내게 들려주지 못한 엄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인생을 한 번만 더 살 수 있다면, 자기도 그 언니처럼,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람처럼, 불어 노래도 부르고, 대학교 공부도 하고, 여러 번 연애도 하고, 멀리 외국도 마음껏 여행하고 싶다는 말, 그 말.        

-151p,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 중에서

 

 

'주쌩뚜디피니'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나는 안다’라는 노래 가사이다. 사랑은 떠나갔지만 한 번 더 사랑할 수 없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의 독백인 것이다. 인생도 두 번은 살수가 없어 살고나면 그걸로 끝이다. 작가가 두 번 살지 못한 엄마를 노래할 때 우리 역시도 두 번 살지 못할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한 세상 모든 엄마의 한번 뿐이었던 인생에 깊은 애도와 연민을 드리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게 끝난 것 같아도, 실은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설령 끝났다해도 이렇게 끝났음을 나누고 퍼뜨리는 한 우리네 인생은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예상한 만큼 우울하고 예외없이 속절없다. 주인공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걸 보고 들은 나는 변함없이 이 자리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야기를 따라갔다 돌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 시절과 그 사람과 그 장소는 이제 지나긴 한 시대의 슬픔, 혹은 그리움으로만 간직된다. 어쩌면 공허하고 텅 빈 심장을 채워주는 것들이 결국은 더 슬프고 아련한 기억 속 그리움들은 아닐까. 실제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든 자신은 아름다운 소설을 써야겠다는 작가의 말이 다시금 울려 퍼지는 시간이었다.

 

 

#3.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을 때

 

 

김연수의 감성에 이어 근래 대단히 인상 깊었던 소설을 하나 더 소개하려한다. <제 13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권여선의 <봄밤>이다. 수상작은 하성란의 <카레 온 더 보더>인데 나는 최종후보작인 권여선의 작품이 잊혀지질 않는다.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여름비처럼 청량했다면 권여선의 <봄밤>은 봄비처럼 처연하고 따스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라 하면 신파나 통속의 범주에서 벗어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각자 불치병에 걸린 남녀의 목숨보다 더 절절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밖에. 그런데 상투적인 신파와 진부한 통속을 뛰어넘은 세련된 문장과 예리한 시선, 삶의 이치를 통찰하는 작가의 넓은 포용력이(다른 근사한 말을 하고 싶지만 떠오르지 않음이 안타깝다) 그것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같은 병원에 있었던 사람들을 빌어 불치병 연인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며 이야기를 끝맺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되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140p, 권여선의 <봄밤> 중에서

 

두 권의 소설집을 덮으며 소설가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증발된 어떤 것들을 끈질기게 찾고 발견해 낸 후 그 씨앗을 악착같이 품고 꽃과 열매를 가꾸어 어떻게든 다시 되돌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무언가 채우려 욕망할수록 채워지긴 커녕 비워지기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끊임없이 무언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야기는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어엿한 기쁨이 될 수 있는 듯하다. 인간의 영혼에도 질량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소설은 삶에서 빠져버린 무언가가 똑같은 무게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물질, 혹은 그 이상은 아닐까.

 

비워진 만큼 다시 채우고 싶어질 때, 본능에 가까운 아깝기만 한 이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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