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꺼워진다는 것

 

 

 

 

   책을 읽고 나 이런 책 읽었다고 떠들기 시작한 것이 만으로 2년, 햇수로 3년 째 이다. 지난 2년은 사업 망하고 집에 꼭꼭 숨어들어 외부와 일체 연락을 단절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거의 책하고 컴퓨터 화면만 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떤 사람도 만나기 싫었다. 살면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보지 않았기에 사람에 대한 실망감은 더 뼈저리고 감당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완벽주의자였던 스스로가 인생의 크나큰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모양새가 그런대로 멀쩡했던 내 삶의 이력서에도 하나둘 빨간 줄이 쳐지기 시작했고 어디다 내놓기에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다를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전엔 책도 안 읽고 글도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 안 읽고 글 안 쓰는 사람은 대부분 나처럼 생각이 짧다고 여겼으니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사람은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알았다. 아마 드러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난 이년간 단지 책 읽고 글 쓴다는 이유로 같이 책 읽고 글 쓰는 사람들로부터 어이없는 일을 꽤 당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고 잊어버리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알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기는 덕에 분노보다는 측은지심이 더 많아졌다. 또 오해건 이해건 분명 내가 무언가를 쓰고 세상에 떠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므로 -그리고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은 더 상상력이 풍부하므로-그냥 내가 감당했어야 할 일들 이었다는 생각이 많다. 내가 더 잘나서가 아니라 세월이 주는 선물이기도 하고 상처 받는 것도 경력이 되다보니 점점 능숙해지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사실 나이 들면 이 착각 때문에 자신이 어느덧 너그러워졌고 이해심이 많아졌고 유 해졌구나 오해를 하곤 한다. 그러다가 비슷한 상처를 받으면 여지없이 서운하고 똑같이 상처받는 자신을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른다. 한번 아팠던 곳이라고 다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분명 그 굳(어 버렸다고 생각하는)은 살의 더께위로 내가 본 다른 사람의 상처와 눈물도 얽혀 들어가는 듯하다. 상처는 맞는데 아프기도 한데 내가 아프면서 그래 너도 그랬구나를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화된 상처. 교류된 상처. 나도 아프지만 너 아픈 것도 알게 되는 것, 나아가 그 아픔의 정도까지 공감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상대의 왼쪽 발뒤꿈치에 겨우내 붙어 있는 몇 조각 각질만도 못한 만큼이지만 그것도 여러 번 쌓이다 보니 암 것도 없었을 때와 차이는 나는 듯하다.

 

 

 

 

 

#2. 시리다는 것

 

 

 

 


디센던트 (The Descendants) - 감독 알렉산더 페인 / 조지 클루니, 주디 그리어 출연

 

 

 

 

 

   마음이 잡히질 않아 영화를 봤다. 그런데 영화보고 나서 더 붕뜨고 말았다. 옆집 아저씨로 변한 조지 클루니는 늙어도 멋있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혼자서 두어 번 훌쩍거렸다. 승승장구에서 너는 왜 우냐고 하는 이수근에게 김병만은 ‘니 마음을 알겠어서...’라고 했는데 내 마음이 꼭 그랬다. 나는 남자도 아닌데 그 마음 알 것 같았다. 연기라는 게 원래 그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훌륭한 거 아닐까. 약간 배도 나오고 이태리 정장이 아닌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에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 진짜 볼품없이 뛰는 모습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사랑스러웠다. 이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그 속에서 밀도 높은 파문이 결국 일고 만다. 슬픔을 견디는 건 사실 그 다음날 아침 먹고 점심 먹고 또 저녁 먹고 잠들면서 이루어지는 일에 불과했다. 사람은 그러다가 어느날 죽는 것이다. 그 변함없는 사실이 좀 시리긴 하지만. 영화 리뷰는 내 이웃님 맥거핀님에게 부탁하고 나는 그냥 한마디만 하련다. 오는 27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탈 것 같은 예감이 심하게 든다. (골든글러브 타면 이어지는 아카데미도 같이 타던데, 하하 브래드 피트도 좋지만 조지 클루니가 타길 바라는 사심에서)

 

 

 

   이번 주에 온 책, 담 주에 오기로 한 책만 해도 배가 불러 터질 것 같다. (나도 이런 책 자랑을 하다니 참 대견하군 ㅋ) 내가 산 책도 있지만 요즘 갑자기 여기저기서 좋은 책이 생긴다. 책을 쌓아두는 것도 부질없는 욕심인데 생각 같아서는 2월 내로 다 읽고 리뷰도 다 써내고 싶으나 두어 권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살 것인가>, <자본주의 그 이후>는 가뿐히 500p, <종말론>은 450p,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도 공부하겠다고 산 책이라 만만치가 않다. 김태용의 소설집 <포주 이야기>는 소설이 독특한 듯해서 유하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는 옛 정때문에...


 

 

 

 

 

 

 

 

 

 

 

  

 

 

 

 

 

 

 

 

 

 

 

 

 

 

 

 

 

 

 

 

 

 

 

 

 

   날이 영 풀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데 나는 내일 2박 3일 여행을 떠난다. 겨울은 늘 한두 번 씩 새로 오는 봄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지 않고 심술을 부릴 때가 있다. 지금쯤이면 큰 추위는 물러가겠지 싶었는데 산소 앞에서 덜덜 떨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뼈가 시리다. 그러고 보니 산소갈 때 늘 몇 가지 제사음식을 준비하시던 엄니 생각이 절실하다. 몇 가지 물어 볼 것도 있고 보고 할 것도 있고 일 년 만에 얼굴을 내미는 딸자식이 그새 늙었다고 뭐라 하시지 않으실까... 오늘은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은 날이다. 고로 마음이 복잡한 날이다. 마음의 때를 박박 밀고 와야겠다. 부디 개운해야 할 텐데 돌아오면 이빠진 사람처럼 시큰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뭐 하나 대책이 없을 때 '대'하라고 있는 것이 '책'이라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책을 가져갈까 말까 실은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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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2-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책읽기에 의미부여를 너무 많이 하다보면.. 자만심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고 그러죠, 풋. 뭔가 더 끄적거리고 싶지만... 더할 말이 없네요.. 아마 추천을 누른 수많은 방문자들도 비슷한 생각에 댓글을 못남기고 떠난게 아닌가 싶네요. 어쨌든,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가 맘에 드네요. 저도 책을 몇 권 구입했는데 아직 한 권이 배송에 문제가 생겨서.. 안와서 기분이 좀 울적하네요.

한사람 2012-02-18 22: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읽을땐 안그러면서 여기 페이퍼 쓸땐
꼭 책하고 글하고 맞춰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즐기곤 해요.
(이번엔 안그럴려고 쓴건데 그런 건 상관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ㅠ)
저는 여기 경주에 오고 있는데 택배전화가 왔어요.
경비실에 맞겨 달라고 했는데 그걸 못 받고 온게 너무 아쉽더라구요.
추천이고 뭐고 이 글을 혹시 삭제할지도 모르니 나중에
가연님 덧글이 없어졌더라도 서운해 마세요~


stella.K 2012-02-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읽다가 말아야지 하다가 다 읽어버렸습니다.
요즘엔 컴에서 글을 보는게 점점 쉽지 않아요.
그래서 10포인트로 키워서 글을 쓰고 있죠.

그분이 남자신가 봅니다.
저야 어떤 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약간 나쁜 남자꽈는 아닐까,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요?ㅋㅋㅋ
용서하시길.ㅠ

저 유하의 책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하도 브래드 피트 얘기를 많이 들어서 이 사람이 탈 건가 싶기도 한데
남의 나라 이야기라 누가 타든 별로여요.

지금 여행중에 계시겠군요. 부럽습니다. 잘 다녀오시길.^^

한사람 2012-02-18 22:5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폰트가 작아서 저도 힘들어요 ㅋㅋ
딴에는 글이 길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너무 거대해 보이지 않으려고
타이트하게 편집하는 거거든요. 대신 단락은 많이 띄우고요.

제가 너무 제 상황에만 몰입하다 보니
또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저만 좋다고 글을 쓰는게 아닌데..

유하의 책은 받아보고 약간 후회하고 있어요.
(영화 예매권 준다해서 혹해서 산 것도 있어요.)
늘 신간 마케팅에 걸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늘 걸리는 신세죠 뭐 ㅎㅎ

오늘 산소에서 영하 십도에도 불구하고 한시간이나 앉아 있었어요.
눈물에 콧물에 지금 죽겠습니다 ㅠㅠㅠ

cyrus 2012-02-1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생각날 때마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곤 해요. 동서문화사에서 나온건데 엄청 두꺼워요,
페이지만해도 1000페이지 넘는답니다. ^^;; 아마도 국내에 번역된 수상록 중에서 완역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고독의 위로>에서 작가들은 글을 쓰면서 고독을 위로했다던데 일리가 있는거 같아요.
내가 쓴 글이 자신이 생각했던 마음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마음 외부로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봐요. 혹시 한사람님도 마음이 뒤숭숭하더라도 글을 많이 쓰세요. 글 쓰기 싫으면
책 자랑을 하셔도 좋아요 ^^ 오늘도 날씨가 무척 춥네요. 오늘까지 반납해야 할 책 한 권 때문에
도서관에 나가봐야 해요. 나가기가 귀찮네요. 하필 반납해야 할 책이 <고독의 위로>네요 ^^;;

한사람 2012-02-18 22:57   좋아요 0 | URL

맞다..몽테뉴는 <수상록>을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이죠?
그걸 다 읽으셨단 말씀이죠?? ㅋㅋㅋ
오늘 여행오면서 책을 안가져왔어요.
컴퓨터도 여기도 잊어 버리자 했는데.. 여기와서 호텔방에서 결국 댓글을 남기는 군요, 하하

<고독의 위로>는 괜찮았나요?
그러고보니 시루스님과 가까이 있네요~
서울보다 안 추울줄 알았는데 모든 강이 얼었더라구요 ㅠ

2012-02-19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0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1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더러운 세상에 산다는 것

 

 

 

 

   요즘 들어 아이가 부쩍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제 초등 6학년이 되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더럽다는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 아이는 무엇을 보았길래 툭하면 무슨 유행어처럼 말끝마다 같은 말을 내뱉는 걸까 싶어 하루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한숨을 쉬고선 이렇게 답했다.

 

 

   “빽이 없으면 내가 처한 상황이 불리해지는 거.”

 

 

   간결하고 단호했다. 그리고 빽이 없어서 어떤 피해를 당한 적이 있는 건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아이는 ‘빽’이 흔히들 생각하는 부모님의 직업이나 재산, 아파트 평수 같은 것이 믹스된 배경이 아니라 한마디로 ‘일진’이라고 부연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반에서 일진과 연결고리가 없으면 소위말해서 찍히기가 쉽다는 뜻이었다. 날라리로 보이는 아이들은 반드시 중학교 일진을 빽으로 두고 반에서 짱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중학교 일진이 초등학교 후배를 선별해 기르면서 중간관리자를 만드는 형국이다. 초등학교 짱은 왕따나 찐따, 은따를 중학교 일진에 보고하고 중학교 일진은 타겟이 되는 아이들만 골라 (효율적으로)돈을 뜯거나 이유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초등 짱과 중학교 일진이 어떤 경로로 연결이 되는지는 아이들도 모른다고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아파트 단지를 사이에 두고 근처에 있으면 이 고리는 더욱 질기고 탄탄한 모양이다. 그래서 반에서 ‘빽’이 있는 친구들과 (싫어도)표면적으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며 혹시라도 그들에게 찍히면 학교생활이 곧 죽음이니 ‘더러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이번에 전교에서 가장 유명한 짱과 같은 반이 되었는데 다른 반에선 그 짱과 같은 반이라는 소식에 울었다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내가 직접 귀로 들으면서도 믿기가 어려웠고 부모된 입장에서도 딱히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 전에 미용실에 갔는데 거기서도 아줌마들끼리 일진이 단골화제였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소식만 사실인 것이 아니고 학교폭력은 이제 너무나 일상적인 공통의 문제가 된 듯하다. 한 아이가 일진에 맞고 돌아왔는데 피해자 아버지가 유명한 교수였다고 한다. 교수 아버지는 학부모를 종용해 가해자 아이를 처단하자고 의견을 개진했고 다른 학부모들은 적극찬성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적인 처벌이 아니라 아이의 신상을 알고 있기에 앞으로 평생 앞길을 막겠다는 일종의 보복성 관리형의 처벌에 동의, 협조를 한 것이었다. 속된 말로 내 자식 때린 그 자식이 어디 사람구실하게 내버려 두나 보자, 하는 식이다. 그럴만한 사회적 지위와 인맥과 돈이 있기 때문에 앞에선 선처를 바라네 합의를 해주네 하면서 뒤에선 모든 연줄을 동원해 끝까지 밟아주겠다는 것이다.(일진도 무서웠지만 교수 아버지가 더 서늘했다)


 

 

   아이 말로는 사후 보복 때문에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쉽게 이르지도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일진을 처벌하고 전학을 가게해도 우리가 아이 학교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세세한 부분에서 미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아이들 몫의 학교생활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빽이 있는 부모들도 피해자가 된 자기 아이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수 없는 이유이다. 아이와 집중적으로 이야길 해보니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재로선 가장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 너무 잘난 척을 해도 안 되고 너무 침묵해도 안 되고 혼자 얌체 짓을 해도 안 되고 안 좋은 일 있다고 징징대도 안 되고 어떤 특정 과목을(특히 예체능) 너무 못해도 안 되고 너무 더러워도 안 되고 너무 뚱뚱하거나 못생겨도 안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중간치인 평범한 아이가 되는 것이 찍히지 않는 비결인 것이다. 가슴 아픈 것은 혹시 학원을 안다니거나 학습지를 안 한다거나(전교 1등도 아니면서) 핸드폰이(혹은 MP3) 없다거나 집이 멀다거나(아파트 단지와)하는 사항도 찍힐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 깊은 획일성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다수의 입장에서 소수를 인정하지 않는 전형적인 집단이기심이다. 더 많은 쪽이 강한 것이고 다르고 적은 쪽이 약한 것이다. 아이들이 못 참는 건 자신과 달라서 아예 1등을 하거나 재능이 뛰어나 가수나 특기생이면 모를까 자신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으면서 달라 보이는 그 모든 것인 듯하다. 따라갈 수 없는 차이만 할 수 없이 인정하고 제끼는 것.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일진이라는 상징은 학교폭력 조직을 의미하지만 그 이면엔 재수 없(어 보이)는 또래에 대한 응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재수 없어 보인다는 건 아주 많이 다르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고 작고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된 불쾌감은 아닐까. 그 불쾌감은 혹시 살려면 같이 살고 죽을려면 다 같이 죽어야 한다(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같은)는 탈개인, 탈개성의 시대부터 이어져온 집단 트라우마의 잔재는 아닐까.

 

 

 

   아이들은 우리 때 보다 전반적으로 열등감, 패배감은 덜해졌지만 시기심은 많아졌다. 물질적으로 풍부해졌기 때문에 괜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시기심은 결국 그 부모들로부터 기인한다고 보기에 결국 아이들은 우리가 배우고 키워온 악의 습관들을 그대로 상속받아 시대적 환경과 함께 급진적으로 변형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제발 우리 아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교육을 받고 우리와는 다른 깨끗한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랐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가치관을 몸과 마음에 그대로 새긴 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더러운 세상이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씁쓸하고 속상한 날들이다.

 

 

 

#2. 깨끗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

 

 

 

   39.5㎢는 강남구의 면적이다.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만난 방주시의 면적은 꼭 39.5㎢이다. 그러니까 강남구만큼의 땅에 높이 1.2km 되는 뚜껑을 하나 덮어 서울특별시 중에서도 진짜 특별한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었다면 그 도시이름은 ‘방주시’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이 소설은 방주시에 탑승한 아이들과 방주시에서 하선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탑승과 하선이라 한 이유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기 때문이다. 탑승과 하선을 한 아이들이 같은 아이들이므로 방주시에 탑승했다가 추방된 아이들로 바꾸겠다. 이 소설이 꼭 강남구에 이사 갔다가 적응 못하고 다시 살던 변두리로 돌아온 어느 꿈많은 서민의 이야기로 읽히는 건 무슨 까닭일까.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 뚜껑만 덮지 않았지 방주시라는 가상의 도시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삼성 밑 지하 백 미터 위치쯤에 존재할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닥쳐도 안전하며 이상기후와 질병 바이러스에 노출이 안 되는 무균실 같은 이상향이 있다하면 그건 누가 왜 만들었는지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다. 아니 차분히 따져묻고 있다.

 

 

 

    요즘 아이와 함께 동네를 나가면 하도 ‘엄마, 재 일진이야’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기에 깨끗한 세상을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터였다. 마침 봄방학을 맞아 새학기를 앞두고 엄마들 몇 명이 모여서 정보를 교환해 봐도 끝에 가선 서로 조심하자뿐인지라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고민거리가 생기면 꼭 희한하게도 꼭 그와 연관된 책을 읽게 되는데 이 소설은 앞서 언급한 교수 아버지급 이상의 부모님들이 모여서 장기 프로젝트로 실현한 이상향의 시나리오 같았달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지름이 15㎡나 되는 운석이 떨어졌는데 그 자리에 넓이 39.5㎢, 높이 1.2㎞ 되는 '방주시'가 만들어졌단다. 모양새는 SF 영화에서 익숙한 공간으로 돔 형태의 초호화 도시인 이곳은 저 밑의 지상인과는 차원이 다른 양식 있고 세련된 부자들만의 세상이다. 주로 국회의원, 판검사, 변호사, 의사같은 상위레벨의 부모님의 자제들이 방주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방주시가 탄생했고 그곳엔 최상위층의 인간들만 살게 되었을까. 정부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난후 그 자리를 복원할 생각으로 소수정예의 공간으로 계획 개발해 버린 것이다. 영화 2012(2009)에서 보면 저명한 과학자들이 예언한 멸망의 2012년을 대비해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일들이 꼭 이 소설과 흡사하다. 전 세계 곳곳에서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의 각종 재해들이 발생하고 있을 때 G8 회원국은 ‘노아의 방주’같은 거대한 배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 방주에 탑승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어마어마한 금액(약 10억 유로, 1조 5천 억 원)을 낸 지구상의 몇 십 만 명에게만 해당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돈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앉아서 쓰나미에 실려 가거나 화산과 동반폭발하면 된다.

 

 

 

 

 

 

< 2012 /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출연 - 존쿠삭, 아만다 피트, 2009 개봉>


 

 

   실제로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휴스턴에서는 허리케인을 막기 위해 도시전체를 돔시티로 계획한 적도 있다. 사실 도시를 덮고 보호하는 거대 인공 돔은 오랫동안 SF의 소재였으며 실현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대중적인 편의장치로 사용하는 네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같은 문명의 이기들도 불과 십 년 전에는 미래프로젝트였다. 도시계획은 막대한 예산과 시간, 기술이 걸리는 사안인데 문제는 샘플형의 이 도시에 과연 누가 혜택을 받을 것인가 인 것이다.

 

 

 

 

 

 

< 휴스턴 돔 프로젝트 'Eden' - 2009. 6. 디스커버리 채널>

 

 

 

   네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도 돈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듯이 미래도시도 혹시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계획이 되지는 않을까. 대학에도 정원이 있듯이 방주시에도 정원이 있다면 선택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사람 솎아내기 과정에서 서바이벌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까. 소수의 특권층도 학교는 다니고 병원도 가야 하고 식당도 가야하는데 혹시 방주시에는 그 특권층을 위한 봉사자들(이를테면 ‘도시의 시스템을 유지시켜줄 따까리’같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기후가 변동하고 질병이 창궐하고 물자가 부족한 비방주시민들은 과연 이 불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말도 안되는 불평등을 타파하기 보다는 혹시 악착같이 방주시에 탑승하려 사력을 다하진 않을까. 내가 안 된다면 내 자식이라도 올려 보내고 싶지 않을까...

 

 

 

#3. 그것 만이 우리 세상

 

 

 

 

   이 소설은 비록 소재와 구성은 SF 영화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갈등과 해결방식은 지금 우리 현실과 똑같다. 그래서 서사는 전혀 미래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시사문제로 읽힌다.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모두 지금 당면한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불평등하고 불공정한지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더 살기 좋은 공간을 원하고 더 수준 높은 학교를 원하고 질병과 재해 없이 오래 살길 원하고 더불어 내 주변 사람들도 같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방주시내의 방주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빌어 작금의 문제들을 인큐베이팅하는데 성공했다.

 

 

 

   방주고는 성경을 일독해야 하는 일종의 종교학교이면서 대기업 계열사 모 정보통신 회사의 회장이 이사장인 사립학교이다. 이사장의 손자가 학생회장이니 삼대 권력세습의 북한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이 학교에서 선심 쓰듯 정원의 10%를 할당해 입학을 허용한 '지상의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마와 이루는 1%의 특권층 밑에서 잘 배운 인재들로 상징되는 하수대리인, 즉 그들만의 노예를 상징한다. 학생회장 나일락은 삼성가의 후계자쯤으로 보면 되겠다. 방주시에 불만을 가진 독서모임 프로네시스의 회장이면서 기숙사장 시온施昷은 가정형편은 형편없지만 성적은 최상위인 소위 노조위원장이나 운동권 학생회장쯤으로 보면 되겠다. 윤시온은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테러계획의 음모를 주도하고 실행하는 요원이며 학교방침을 거스르는 불가촉천민을 잡아내겠다는 일락은 권력자의 대리인으로 보인다. 아이들 이름이 마노와 루비를 비롯해 유시온, 나일락, 유다나, 남달리, 배두인, 노안지, 박하상인 것이 굉장히 종교스러우면서도 중성적이고 뜻깊어 보였다.

 

 

 

   이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하여 현실성을 확보한 인물은 주인공 마노이다. 마노는 ‘너무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중간인물’이었기에 눈에 띄지 않는 평범성을 주목받아 학생회 전용 프락치로 선택된다. 마노는 쌍둥이 누나 루비를 지키기 위해 프락치를 수락하지만 방주고에 다니는 광장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시온 조직의 계획을 막으려 한다. 가족의 안전 때문에 직업을 택하고 사랑 때문에 조직을 배반하는 전형적인 드라마 캐릭터이다. 모든 비극이 끝나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찾는 설정이다.(물론 그때 가족과 사랑 모두 살아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작가는 마노의 고민과 질문, 대답을 통해 마노의 선택에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 의견을 여러 번 묻는다. ‘자기가 믿는 것,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 마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지 절간을 부수는 게 아니’라고 결론내릴 때 당신도 그렇지 않냐고 깊게 응시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이 사회의 학벌체계와 교육시스템을 늘 비판하지만 노력해서 얻은 학벌을 자랑스러워하며 운 좋게 들어간 대기업에 만족해한다. 혹시 부모를 억세게 잘 만난 것은 물론이요 학벌도 좋고 연봉도 좋고 결혼까지 재력의 집안과 맺어져 강남의 어느 최첨단 아파트의 최상층에 살고 있다면 저 밑에 사는 인간들은 땅바닥인간이거나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선택받은 이들과 그들이 또다시 선택한 하위자들은 방주인지 바벨탑인지 모를 곳에서 신과 가까운 높이에 안도하며 살아갈 것이고, 지상에 남아 있는 자들은 개미지옥에 빠진 벌레들처럼 꼬물거리며 살아가리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위에 있는 이들의 먹이나 거름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p110

 

 

 

   방주고의 선생들은 철저한 보신주의자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학생사이 갈등 같은 건 하등 자신의 업무와 상관이 없다.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하고 난 폐기물들은 당연히 지상으로 배출되고 간혹 지상에 다녀온 친구가 있다면 그들이 혹시라도 전염병균을 묻혀 왔을까봐 깨끗이 소독이 된다. 학생들은 ‘미디어의 의무와 표현의 한계’같은 주제를 영어로 프리토킹하면서 수업을 받고 매끼 7성급 호텔 같은 식사를 하고 트레이닝 복도 프랑스 의상학과 출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는다. 그래서 지상에 가족을 두고 온 의식 있는 학생들은 내 가족이 기후나 돌연변이, 물자부족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상대적 불평등’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것이구나를 실감한다. 그 중에 기특하게도 이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빨리 깨달은 시온은 이렇게 말한다.

 

 

 

못 따라 가는 거 맞지. 머리가 아니라 이, 마음이.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사람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도저히 접지 못하는 마음이.   -p158

 

 

 

   이것이 책 좀 읽고 글 좀 쓰고 연설 좀 하는 열일곱의 엘리트 학생의 입에서 아니 가슴에서 나온 말이다. 어른들처럼 자기가 구축한 세상에 이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권력과 돈을 이용해 치밀한 각본을 짜고 그 시나리오에 연루된 무고한 조연들이 시니컬하게 같은 친구에게 충고를 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너는 외려 다수의 하나가 되고 너한테 아무리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그땐 당연히 소수를 배제했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여기 어렵게 다수가 된 우리들이 소수인 너희들을 봐주기는 힘들다고. 우리가 사는 깨끗한 세상엔 더러운 소수는 필요 없다고. 어쩌면 이리도 일진의 논리와 같은 것인가.

 

 

 

   소설은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끝까지 쉴 틈을 주지 않으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리고 미래의 또 다른 반전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장편이긴 하나 짧고 굵은 이야기로 느껴졌고 작가의 개성과 성찰이 잘 어우러졌다. 청소년용으로도 무리 없고 우리 같은 학부모 혹은 교사들에게도 적극 추천이다. 결론이 없기 때문에 토론용으로도 좋을 듯하다. 작가의 전작들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을 읽고 <아가미>나 <고의는 아니지만>이 궁금해졌다. (이 작품을 읽기전에는 구병모라는 작가가 남자인줄 알았다는 ㅠ)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도 쓰고 영화도 만들고 음악도 그림도 그리는 건 아닐까 싶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작품을 느끼다 보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싶기 때문에. 아이가 내뱉는 ‘더러운 세상’도 방주시라는 ‘깨끗한 세상’도 결국은 우리 사는 세상의 양면인 것이지 하나의 세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더럽기 때문에 깨끗한 세상을 원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워질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살아가는 동안 그 더러움과 깨끗함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지금 더럽다면 하루속히 깨끗해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조금 깨끗해졌다면 다시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그 손을 놓지 않는 일. 그것만이 우리 같이 사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머리로 판단하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사람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도저히 접지 못하는 마음’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음만 있다면 방주 같은 배나 미래 잠수함, 돔시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필요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배요 강이요 하늘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마음의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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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1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아픕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하지만 빽이라는 것이 정말 있으니까 그것도 두려워요.
또 사소한 일로 따돌림을 당하고 친구들로 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다는 것도 두렵습니다...
저는 체육을 무지하게, 엄청나게 못해요. 웬만한 여자들보다 최하위수준이건만 시골에서는 예체능을 못하는 걸로는 따돌림을 안합니다. (아, 저희학교만 그런가요) 남자들은 그림 엄청 못그리는게 당연하고 여자는 체육못하는게 당연하고. 하지만 시골아이들이라 그런지 심성들이 착하다보니 노는 아이들도 엄청 심한 한 사람빼고는 다 착해요.
아이고,

한사람 2012-02-17 11:0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왕따도 하위분류를 하더라구요. 급도 있구요..참..
예를들어 피구를 너무 못해서 자기네 반이 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든가
자기는 영어를 학원다녀서 날고 기는데 발음이 안좋다든가
(그렇더라도 절대 잘난척을 하면 안되고 ㅠ)
팀숙제를 하는데 기여도 없이 묻어가기만 한다든가..
참 여러가지로 아이들이 싫어하는 종류도 많아서, 들으면서도 갑갑하고 그래요.
학원스트레스가 심해서 그걸 학교에다 푸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왕따를 당하는 쪽은 아예 포기하고 더 심화되는 길을 선택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아이들 표정이 대체로 어둡다는 것이 가장 우울하고 그걸 보면서도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ㅠ
(소이진님은 좋은 학교 다닌거예요 ㅋ)

울보 2012-02-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3학년딸이 아빠 우리반에 일빵있다, 그게 무슨소리냐고 했더니 우리반 남자친구가 3학년 짱이라고 그말에 아빠가 체격이 좋아, 라고 물으니 아니 작아. 그런데 그에게 일짱이래, 그말에 아빠 그친구랑 친하니. 라고 묻더군요, 응 딸의 대답, 그래 그런 친구랑은 친하게 지내, 그렇다고 네가 그속에 들어가란말은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참,나부터도 이런말을 하니. 옆지기도 고등학교때 학교에 일진에게 한번도 괴롭힘을 안당햇데요, 왜 라고 물었더니 옆지기 말수도 없고 체격도 작고 , 돈도 빼긴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자기랑 친한 친구가 일진이었는데 이친구 나랑 친해 한마디에 아이들이 건들지를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소리를 듣는데 왜 마음이 아픈지, 내아이에게 뭐라 가르쳐야 할지 정말 모를때가 많아요, 그런 친구들이랑은 어울리지마, 라고 하지만 그래도 안어울리다가 또 아주 많은 고민을 하지만 답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아직 중학교 까지 연결되고 그런 일진의 무리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한것 같은데 ,그래서 노상 거리에서나 어디에서건 아이 친구들을 만나면 말걸고 놀이터에서도 몰려소 놀고 잇으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어요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면 지적을 너무 많이 하는 엄마라 딸이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는 ㅎ ㅏ지만, 그래도 내아이친구들이잖아요, 어른들이 겁난다고 무섭다고 내아이에게 보복이 두렵다고 모른척 한다면 안될것 같아요,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학교에 다닐까요,

한사람 2012-02-17 11:10   좋아요 0 | URL

울보님 말씀처럼 일짱과 친하게 지내야(친한 것으로 보여야) 별 탈없이 학교생활할수 있다는거 실감해요.
친구의 친구든, 친구의 언니든, 어떻게든 일짱과 연결고리가 있으면 안건드리는 것도
완전 어른들 학연, 지연, 인맥으로 연결된 서로봐주기 풍토 그대로구요.
중학교 일진들은 세명씩 몰려다니며
딱보기에도 약간 화장도 하고 옷차림도 어른 스럽고
표정도 무표정이거나 냉소적이고
그렇더군요. 학원다니느라 바쁜 아이들보다 현저하게 걸음도 느리구요, 하하

아침 신문에 보니 피해자와 가해자 아버지끼리 서로 고소공방전이 붙었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아이가 저학년일때는 남일이거니 했는데 고학년이 되니까
사춘기와 물려서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ㅠㅠㅠ

맥거핀 2012-02-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산인가 분당인가 어느 아파트에서 아파트 구역 전체에 일종의 스크린도어를 설치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데요. 말 그대로 외부인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이 되는 세상인가 봅니다. 이글을 보니 앞으로가 더욱 우려가 되는군요. 이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한사람 2012-02-17 11:19   좋아요 0 | URL

예전에 분당살때 무지개마을에서 죽전과 연결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죽전에서 넘어오는 차량들이 주로 이용하다보니
아침마다 지체되는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은 말 못하겠어요 ㅠ
그뿐 아니라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 끝무렵에 수지로 이어지는 토끼굴도 막았어요.
제가 사는 아파트 앞에는 몇배되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그쪽 경비아저씨와 우리쪽 경비아저씨끼리
서로 자기네 아파트 차가 먼저 큰길로 가도록 차량정리를 하셨죠..

저는 아이가 분당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학간 다음부터 여러 스트레스가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분당주민 분들에겐 모욕적이겠지만-뭐 저도 분당살았으니까 ㅠ-학교에서의 경쟁심이 너무 심해서 돈없고 빽없으면 못견딥니다)
이 모든게 학부모들의 뿌리깊은 이기심과 경쟁심, 시기심, 열등감의 잔재라고 봐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게 아니고
아이들이 보란듯이 잘살아서 결국 내 마음 만족하고자, 사는 사람들에 불과하니까요..

cyrus 2012-02-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돔 사진 보니깐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이 생각났어요. 그 소설도 어떻게 보면 막장이라고 할 정도로
사리사욕에 눈이 멀거나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등장하거든요.
그것도 마음이 돔에 둘러싼 이후부터요. 그런 장소도 결국에는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만거죠.

그런데 구병모라는 작가분이 남자가 아니였군요, 저도 그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이름이 남자 이름 같아서요 ^^;;


한사람 2012-02-17 11:24   좋아요 0 | URL

아..<언더 더 돔>이 돔에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군요.
돔이라는 게 안전 보호 장치이지만 결국은 아무리 원인이 합당해도 인공적인 것이니까
분명 물리적인 문제는 발생하게 되있을거예요.
이 소설은 그 돔안에 누가 들어가고, 누가 못들어가나를 따지면서
그렇다면 그 누구는 왜 다른 누구를 못들어오게 하나
말씀하신대로 외부인(이민족)을 거부하는 모습에 질문을 던집니다.

저같이 남자분이라 생각하는 분이 있네요, 하하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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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 돌고래와 아부지

 

 

 

아부지, 기억나? 우리도 사진기 샀으니까 이참에 서울대공원에 가서 돌고래쇼나 보러가자고 그래서 아버지랑 나랑 둘이서 -그때 엄마는 왜 안 가셨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나요. 혹시 두 분이 냉전 중이셨을까요? -버스타고 가서 아주 어색하게 분수대 앞에서 사진 찍고 돌아온 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아부지랑 단둘이서 어디 가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거 같아서 앨범을 뒤져봤어. 그런데 그 분수대 사진에 우리 부녀의 역사적인 날이 85년 9월 8일이라고 찍혀 있더라구. 나 그래서 85년도 달력을 찾아봤지. 일요일이더군. 중3인 나는 가슴에 BANG BANG 이라고 쓰여진 빨간 티셔츠에 죠다쉬쯤으로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 사진기가 좋았는지 내 실력이 좋았는지 돌고래도 흔들리지 않고 잘 찍었더라구. 돌고래 한번 뛰어 오르는 게 뭐라고 비슷한 사진이 몇 장이나 있더라. 다른 동물 사진은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린 돌고래 쇼를 보러 간 게 맞긴 했나봐. 그날 아부지랑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 아부지랑 무슨 이야길 나누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돌고래 쇼만은 또렷이 기억나니 말이야. 그래서 말이예요... 바보같이 툭툭, 눈물이 났지 뭐야. 살다, 돌고래보고 우는 여자 첨 봤다구? 몰라,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 주인공이 부모님과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 쇼를 보는 게 소원 이었다잖아...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내일이라고... 나도 다른 누구에겐 간절한 소원이었던 추억이 하나 있다는 게 왜 이리 기쁘면서 슬픈 건지 그만 무지 무지 아부지가 보고 싶었어. 맨날 엄마만 그리워했는데 그것도 미안하고 오랜만에 아부지가 사무치게 그리웠어. 그래서 마흔 넘은 아줌마가 열 살 딸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어. 괘씸하고도 얄미운 작가 같으니. 글쎄 나랑 갑장인 작가가 말이야(딸자식이 이제 6학년인거 까지 같더라구), 마지막에 ‘이제 모두 어른이 됐을, 그날 서울대공원을 찾았던 십 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고 아주 뻥뚫린 가슴에 작정하고 에어컨 바람을 광속으로 틀어주더란 말이지. 어디 꼭 나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기껏해야 그 십 만 명 중의 한사람 밖에 못 되었으면서 - 얼마나 찔리던지.

 

 

 

그날 우리랑 같이 돌고래 쇼 봤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처럼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그래 그들도 나처럼 그때 나만했던 딸자식을 두었을지도 모르지. 혹시 아부지처럼 성미가 급해서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사람도 있을 거야.

 

아... 도대체 어쩌다가 내가 이만한 어른이 되었는지 또 어쩌다가 아부지랑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는지 믿기지가 않아서 반나절은 가슴이 먹먹했어. 이 소설 모르긴 해도 나처럼 아부지랑 돌고래쇼 본 적 있는 아줌마 아저씨라면 작가의 안부인사가 어떤 의미인지 눈물 나게 반가웠을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날 돌고래쇼는 보길 참 잘했어!

 

 

 

 

 

 

To : 84년도 단짝 친구

 

 

 

도연아, 기억나니? 84년도에 말야. 너 조용필 신곡이 나왔다고 우리 집에 전화해서 노래 들려준다고 숨죽이면서 오 분 동안 아무 말 안하고 있었던 거. 그때 네가 들려준 노래가 <친구여>란 노래였지.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아... 정말로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은 모두 어디 간 것이냐... 오늘 아부지와 단둘이 찍은 사진을 네가 생일선물로 준 앨범에서 발견했다. 무려 28년 전의 네 필체를 보고선 마치 네 얼굴(네 별명이 도곡동 김성희였다는 걸 밝히면 문제되나?) 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 같았어. 그때 딴에는 멋진 싯구절 베껴 써가며 하루에 한통씩 주고 받았던 편지들 피식 생각이 난다. 예쁜 편지지에 목을 매던 시절이, 우리도 있었구나.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있는 거냐. 너도 가끔은 하늘을 보고 사는 거냐. 내가 보는 꼭 그 하늘에서 달도 보고 별도 세고 어떤 날은 그때 친구도 떠올려 보는 거냐. 웃기지? 사회비판적이고 쉬크하기로 짝이 없던 내가 달과 별을 보았냐고 물어 볼 줄 몰랐다구? 이게 다 소설 때문이다 친구야. 우리와 동갑인 작가가 글쎄 자기랑 동갑인 주인공을 만들어서 우리처럼 열 다섯 살 때 보았던 하늘을 생생히 기억하더란 말이다.

 

 

 

그때 우리의 하늘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지. 84년은 바로 우리의 우상이었던 조용필이 결혼을 해버린 해였으니까, 하하하. 조용필이 광고하던 ‘두리스바’라고 기억나니? 그 광고 배경음악이 ‘나는 너 좋아’였잖아. 니가 나 좋다고 그렇게 편지에 고백하더니 지금은 어떤 남자만나서 어떤 사모님이 되어 있을까. 들리는 소문에 네가 아주 돈 많은 사업가를 만나서 학교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 그게 사실이라면 네 자식은 지금 걸그룹 누구와 나이가 똑같겠구나. 놀랍지 않니? 우리 애들이 그때 우리와 같은 나이가 되버렸다는 거.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났는데 우리 고등학교 독서실 다닐 때 줄기차게 들었던 휘트니 휴스턴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뜨더라... 그때 노래 좀 한다하는 애들이 쉬는 시간에 부르던 ‘Greatest Love Of All’... 그 노래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라. 실감도 안 나고 그냥 그랬는데 노래를 들으니까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저려오더군. 추억이란 그런 걸까. 우리 좋아하던 가수가 죽었다고 우리의 추억이 사라진 건 아닌데 더욱 우리의 이별이 실감나고 그래서 더욱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시절이 그립더라. 독서실 옥상에서 대학을 꼭 가야하는가, 얼마나 고민하고 떠들었니... 그때 보았던 우리 하늘엔 현정화, 양영자 선수가 탁구 복식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환호성이 일제히 울려 퍼졌었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땐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을지도 그땐 몰랐다... 1984년 그때 우린 고작 열 다섯 살이었다, 친구여...

 

 

 

 

To : 놀라지 않는 당신

 

 

 

   이 소설을 읽고 나니 편지를 부치고 싶은 사람이 두 사람 있었어요. 아부지와 중 2때 단짝. 소설 속 주인공 김정훈이 1984년에 아빠를 잃었거든요. 84년보다 약 삼 십년 후에 돌아가신 아부지와 84년에 둘도 없었던 친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불행히도 지금은 두 사람 다 제 곁엔 없군요. 하지만 소설이 가르쳐 주었어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 없기 때문에 지구라는 별에서 외로운 여행자가 되는 거래요. 사람은 없어져도 모든 건 그대로 남는다고 해요. 그 사람과 연결된 에너지와 그 사람이 남겨준 메시지,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언젠가 죽게 되지만 누구나 가진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구요. 아부지와 친구는 나를 살아가게 한 에너지였고 내가 깨달아온 메시지였나봐요.

 

 

 

   소설은 참 우리에게 아름다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네요. 제목을 보세요. 마린보이, 태권브이, 6백 만 불의 사나이, 소머즈, 헐크, 그리고 원더우먼 이런 주인공들 생각나지 않아요? 나 어릴 땐 모두 그렇게 초능력자인 사람들만 TV에 나왔어요.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그들은 모두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가지 못하게 근사했죠. 간첩잡은 애국열사 아버지의 아들 김정훈. 교통사고 후 혼수상태에서 모두의 바람으로 기적같이 소생한 자유대한의 원더보이. 그래요, 꼭 죽었다가 깨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치 새로운 세상을 인도할 영웅의 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놀라왔어요.

 

 

 

   그런데 정훈이의 초능력은 멀리 뛰고 날아가고 무언가를 부숴버리는 육체의 능력이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어요. 기쁨이나 슬픔, 외로움이나 고통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 나아가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해주는 능력이었어요. 정훈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갔다가 돌아 온 후-그러니까 아버지의 상실을 겪은 후- 감각에 변화가 찾아온 거래요. 그러니까 작가는 타자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초능력으로 본 것이죠. 이건 제 생각인데 작가가 그동안 아픈 일이 많았던 가봐요. 사실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똑같이 느끼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잖아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그저 바라보는 입장에서 예상하고 예상한 그 수준만큼만 공감해 줄 수가 있지요. 그 정도면 이정도 힘들겠구나 예견할 수 있을 뿐 고통의 당사자를 아무리 사랑하고 친하다 한들 절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에 이 냉정한 현실은 내가 고통 속에 빠져 있을 때 (나처럼)상대가 내 고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끝없는 외로움에 가닿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처절한 고통일수록 더욱 뼈저리게 실감되는 상호 불통의 시간들. 이것은 내가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 없듯 상대도 마찬가지인 당연한 현실인데 사는 동안 이 자체가 얼마나 고독한 형벌인지 모릅니다. 작가는 필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모앙이예요.

 

 

 

   그래서인지 이해란 그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마음을 내 것처럼 느끼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단지 전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전해주고 소통했기 때문에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말하는 초능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읽어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줌으로써 함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산다면 우리 모두는 어떤 상처가 있어도 다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오래된 우주의 순리처럼 당연해 보이는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공감과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능력은 초능력인 것입니다. 작가는 우리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시대에 유행하던 <묘기대행진>을 빌어 암기, 암산, 속독, 차력, 혹은 염력 같은 초능력의 우화들을 소개합니다. 유리겔라 덕분에 집안에 숟가락이 남아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죠. 생각해보니 그땐 레슬링에서도 김일 선수가 박치기라는 초능력으로 일본선수를 보기 좋게 쓰러뜨리던 시절이었어요. 자원과 자본, 기술이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 우리에겐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무대포 정신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정주영식 추진력(?)과 강압적인 군사문화가 어우러져 초능력이야 말로 저 앞서가는 선진국들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기특한 비법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중요한 초능력이 빠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초능력으로 쳐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묘기 대행진>의 변대웅 아나운서는 참가자 정훈이 말을 하면 도대체 ‘얘가 말만 하면 왜 이렇게 내일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의아해 했죠. 시청자들은 정훈이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립니다. 정훈이 말하는 슬픔이 곧 내 슬픔과 겹쳐지고 내 슬픔이 누군가에게 전해져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건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연대적 위로이고 대국민적 기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놀라운 초능력으로 이만큼 국력이 신장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화가 되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잘 할 수 있었던 공감과 위로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국가 정보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한 권대령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다간 힘을 잃고 권력을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훈과 같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왔지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강토는 말합니다. 이 나라에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고 이적행위’라고 말입니다. 지금과 다른 국가를 원한다면 제발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여겨야 한다구요. 공감하는 능력은 이 세상에 꼭 필요한 능력,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구요.

 

 

 

   권대령이 80년대 군사정권의 탄압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 권대령은 정훈을 계속하여 ‘군’이라고 부릅니다 - 정훈이 열일곱의 봄에 만난 강토와 무공, 재진아저씨는 각기 그 시절의 피해(성정체성 상실), 타협(순리대로 살아감), 개척(사회서적 발간)의 표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때의 내 청소년 시절을 관통하던 키워드 중엔 올림픽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84년 LA 올림픽, 86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 헝그리 정신과 애국심으로 대변되던 스포츠문화는 더욱 내셔널리즘을 강조하는 획일적 분위기를 형성했어요. 초딩 시절엔 지겹도록 무찌르자 공산당을 불렀고 중고등학교에선 죽어라 아, 대한민국을 외쳤어요. 고백을 하자면 그땐 점심시간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강 건너에서 교정으로 날아오던 매운 공기가 최루탄 잔향인지도 몰랐어요. 우리에겐 사람들의 고통을 이야기 해주는 원더보이는 잡혀가는 사람이었어요. 강토의 약혼자 이수형은 <장학퀴즈> 연말장원을 차지한 기억력의 천재였지만 존 레논이 암살당한 1980년 12월 서해 바닷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약혼자의 아버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다 신문사에서 강제해직당한 후 나중에 자살을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이처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 망각하지 않고 기록하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왔습니다. 작가는 묻습니다. 우린 어쩌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쉽게 망각하면서 엉뚱한 능력들을 초능력으로 믿으면서 살아온 건 아닐까요.

 

 

 

   정훈의 아버지는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적어두는 비망록’이 있었죠. 아버지는 마치 은하수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우주비행사처럼 트럭을 운전했어요. 비망록은 삶의 기록이며 우주비행사는 삶의 여정일 거예요. 그런 아버지의 에너지는 아들에게 복제되었을까요? 정훈은 물었죠. 사람들이 비망록에 ‘이뤄질 가능성이 없는 몽상들, 두 눈을 뜨고 바라보는 꿈들,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도 없는 소망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한’ 그런 몽상과 꿈과 소망을 적는 이유가 무엇이냐구요. 강토의 약혼자도 두 사람만의 장소를 영구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았어요. 강토는 약혼자와의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억하죠. 이 소설은 정훈의 아버지와 강토의 약혼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고통에의 공감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죽은 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훈은 고문당하는 사람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저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삶의 순간들,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죽음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떠올리는 것이 곧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훈의 아버지도 강토의 약혼자도 그랬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야 나도 죽는 순간 덜 외로울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 같이 나누었던 소원이요? 그 또한 터무니 없어 보이는 소원일지라도 실은 단 일 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말해요.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내가 상자를 열어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산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이예요.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관찰이다.”, 그러니까 어떤 불행이라도 일어나기 전까진 아직 불행하지 않은 거예요. 우주가 무한에 가깝다고 치면 그건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는 뜻이죠. 그런데 언젠가는 모든 경우의 수가 다 일어난다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겠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른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어떻게 해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이나 불가능한 일이 이 우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우주에서라도 언젠가는 일어난다. 작가는 그것이 기적이라 말합니다. 기적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일어 날 일이 지금 일어나는 것 뿐이라고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라 가장 똑똑한 일인 것이라구요.

 

 

 

   예를 들어 ‘불가능한 일요일에 우린 다시 만날’거라는 정훈의 바람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일이라구요. 모르겠어요. 인생이란 강물이 흘러가듯 언젠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들게 될지요. 우주의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은 단 한번 뿐이라는데 내게 그 순간은 기쁠지 슬플지 모르겠어요. 권대령이 여러 번 충고했죠. 군이 ‘웃으면 이제 세상이 군과 함께 웃겠지만, 울면 군 혼자 울 것이’라구요. 재차 혼자 우는 것의 두려움을 강조하고 있어요. 우리 모두 혼자 우는 것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혼자 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어요. 우리 모두는 결국 정훈이 처럼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눈물의 상속자가 될 것이니까요.

 

 

 

   누구나 마음속에는 말하지 못하는 일이 하나쯤 있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좀처럼 이해받기 힘들다고 해요. 인간은 이해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이해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으니까요. 문득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란 노랫말이 생각나요. 냉소를 미덕으로 아는 어른들이 된 우리에게 ‘원더보이’는 그런 당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해요.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는 사람들에게 부디 오늘처럼 놀라운 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부탁하는 듯해요. 이 책이 당신에게도 켜켜이 두터워진 냉소를 안고 사는 가슴 한 켠에 천천히 심장을 데울 수 있는 나지막한 질문이자 아름다운 대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삶과 죽음과 그 너머의 고통까지 느낄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건 정말이지 놀랍기 짝이 없는 행운일테니까요.

 

 

 

 

 

 

 

 

태어나서 단 한번.
우리가 죽을 때.
그렇게.
우리는 아이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죠.
영원히 빛으로 죽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빠?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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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4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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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7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2-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멋진리뷰인걸요.
엊그제 책을 한무더기로 주문할 때 (그것도 한국소설로만) 이 책은 저리가라, 하고
제껴놓았는데 이런, 조금만 더 늦게 책을 주문할걸 그랬습니다.
이 리뷰를 보니 무척이나 책을 읽고싶은걸요.
인용문구를 보니 막, 더 읽고싶고... ㅠㅠ
 

 

 

 

 

 

#1. 나의 오늘

 

 

 

   졸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학년이 올라가는 것도 내 일은 아니다. 2월이 지난다고 해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이별해야 할 것도 시작해야 할 것도 보완해야 할 것도, 내겐 없다. 처음으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나는 무엇을 졸업해야 할까..., 하고 멘션을 올렸더니 어떤 분이 ‘겨울’이라고 답해주었다. 그 한 단어가 갑자기 눈물 나게 반가웠다. 삼재도 지난 지 오래고 삼년상도 지났고 지난 이년간 사업으로 진 빚도 대충 갚았다. 올해는 내게도 뭔가 터져주었음 좋겠다. 대박이나 뜻하지 않은 일회성의 행운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투자한 시간이 묵묵히 그러나 정직하게 운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은 욕심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의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었건만.(봉주 5회를 듣고 쬐금 불쾌했던 마음은 풀어졌지...사람 참, 하하) 신기하게도 내가 원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과 똑같다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글을 쓰는 거요. 그러다가 나는 고독한 존재로 변했지요. 나한테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 7시예요. 침대에서 간밤에 썼던 것을 다시 읽거나, 머리가 맑고 개운한 상태에서 내 마음에 드는 소설을 생각해요. 마치 어린 애들처럼.

 

-p99, <16인의 반란자들>

 

 

   그나저나 이렇게 말한 작가는 누구일까요?

  (힌트 : 성은 오씨요, 한국의 음식이 두개나 들어간 이름 ㅋㅋ)

 

 

 

 

 

#2. 그들의 오늘

 

 

 

 

 

   이 책을 읽는 것은 어찌 보면 욕심이다. 만약 이 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하면 그건 ‘읽고 싶다’가 아닌 ‘가지고 싶다’일지 모른다.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 비록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수상을 한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말이다. 서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잇 북, 워너비 아이템에 속한다. 이 책이 가지는 인터뷰 집으로서의 가치는 문학적 이라기보다는 여가적 이고 심층적 이라기보다는 다층적이다. 커피 한잔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겨 본 후 근사하게 거실 서가에 꽂아두면 금상첨화인 책이다. 폼도 나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어쩐지 나의 문학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는 느낌이 든다. 덮고 나서 여운도 길어 묵직하고도 알싸한 무언가가 가슴에 남아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반나절이면 세계 일주에 나선 저자들의 기록을 충분하게 살펴볼 수 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만나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것인데 그들은 모두 2000년대 이후의 수상자였다. 존 맥스웰 쿠치(2003), 르 클레지오(2008), 헤르타 뮐러(2009), 마리오 바르가사 요사(2010)정도만 읽어본 나로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어떤 작가는 아예 이름도 성도 나라도 작품도 심지어는 성별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꼭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문학적 소양이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딴에는 책 좀 읽고 글 좀 쓴다는 자의식으로 늘 괴로워하던 나였기에 그런 고민이 순간 터무니없이 우스워 졌다고 할까. 과학도 아니고 역사나 정치, 음악, 미술, 모든 내가 잘 모르는 분야가 아닌 문학인데... 문학상인데... 나는 내 무관심에 절로 발이 저렸다.

 

 

    더군다나 저자들이 만난 수상자들은 이제 모두 7,80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이다. 그들은 대부분 거짓말처럼 늙어버린 슬픔을 안고서 스스로 ‘사진을 찍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젊음을 모르고 그저 이 책속의 얼굴과 표정을 작가의 이름과 일치시키며 내가 아는 사람으로 영구 저장할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여기까지 힘들게 살아온 결과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그들의 인생과 작품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성공한 얼굴만 구경하게 된 것이다. 저자가 수상자들을 만나고 돌아와 책이 출간, 번역되는 세월동안 이미 운명을 달리한 작가들도 있다. 주제 사라마구와의 인터뷰는 그가 사망하기 불과 일이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나기브 마푸즈는 인터뷰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바로 지난주에 타계했다. 기사를 찾다가 타계소식을 보고 소름이 끼치면서 목이 메이기도 했다.(그렇다면 만약 내가 이 책을 가을이나 내년쯤에 읽는다면... 그땐 또 누가...) 누가 봐도 시인이면서 “나는 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고 말한 작가의 목소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가슴에 머리에 쿵쿵 울리는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대체 죽어서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서 이렇게 오늘도 변함없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해놓고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혹시 자신의 부고를 알게 된 독자에겐 운 좋게도 독자가 가지고 있는 당신들의 작품 속으로 슬며시 박제되어 영원히 새겨진 것은 아닐까.

 

 

    먼저 이 책은 16명의 수상자들을 ‘반란’이라는 테마로 묶었다는 것이 조용한 반란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에 의하면 수상자들을 만나보니 하나같이 문학이 아닌 다른 이유로 사회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에 그들을 반란자라 부르고 싶었다 한다. 반란자들은 전쟁이나 독재에 항거하고 환경이나 생태계 보존을 주장하고 인종차별과 여성인권에 목소리를 드높인다. 문맹퇴치, 에이즈 퇴치에 앞장선다. 대부분 종교를 믿지 않으며 특정한 이즘을 갖고 있지 않다. 이외수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기파이며 여성이나 남성이 아닌 인간성이다. 파리로 망명한 중국의 가오싱 젠은 ‘어떤 이즘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라 말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스로 어느 편에 서명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음모자나 중개자라 말했다. 혼혈이었던 데릭 월콧은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V.S 네이폴은 자신은 종교인이 아니며 다만 ‘내 삶은 글을 쓸 뿐’ 쓰는 게 자신의 종교이며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라 칭했다. 눈과 귀가 멀어 인터뷰가 어려웠던 나기브 마푸즈에겐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지인들과의 문학모임이야 말로 종교라 여겨졌다. 그들에겐 규칙적인 글쓰기가 일상이고 종교도 사랑도 우정도 행복도 정치도 모두 글쓰기에 귀속되는 사람들이었다. 특이했던 건 남자들은 대부분 아름답고 젊고 활기차고 지적인 아내를 두고 있었지만 여자들은 독신이었다는 것. 노벨상은 남자에겐 성공이겠지만 여자에겐 보상이었을까.

 

 

   그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거나 혹은 아주 나이가 들어서도 작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에 본 것은 대부분 전쟁과 상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것을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다. 각기 어느 나라 어디에서였는지가 달랐을 뿐 말하는 방법은 같았다. 오에 겐자부로는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숨죽여 고통을 견디는 모습을 보고선 그 고통을 반영하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에겐 장애인 아들이 있었고 세상과의 소통은 아들의 눈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상을 받고나서도 달라진 건 없다고 말한다. 토니 모리슨은 노벨상이 아니라 다른 어떤 상도 자신을 좋은 작가 좋은 사람으로 바꾸지 못할 거라 했다. 이탈리아의 극작가 다리오 포는 자신에게 주어진 노벨상이 권력의 부당함을 풍자한 모든 광대들을 위한 보상이라 말했다. 키가 크고 미소가 큰 오르한 파묵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식당에 가고 싶지 않고 사람들을 보는 것도 싫’다고 말하는 듯 했다. 도리스 레싱은 손님이 온다는 데 (아무리 작가라지만)어떻게 그렇게까지 집안이 지저분할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 나딘 고디머의 강단 있는 표정도 인상 깊었고 월레 소잉카의 백발과 흰수염은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나이지리아 민주주의 투쟁의 아이콘답게 크게 클로즈업 한 손가락엔 흡사 자신이 걸어온 길과도 같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인터뷰엔 사진작가가 동반했기에 필히 그들의 시선과 표정이 담긴 프로필 사진과 배경사진이 담겨있다. 단정한 뒷모습도 좋았다. 나는 작가들의 사진을 보면서 자주 뭉클하던 순간을 떠올린다. 바로 작가들의 손이다. 작가들의 손을 찍는 사진작가들이 많은 것인지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손이 반년 전에 부러졌다면서 정말로 손 찍는 게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 손으로 그들은 무엇을 해왔는가. 지금의 손은 무엇을 말하는가. 글을 쓴다는 건 손을 쓴다는 것이다. 그가 손으로 한 것은 곧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의외였던 건 조정래 작가처럼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육필 원고를 고집할 줄 알았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컴퓨터로 글을 쓴다는 놀라운 정보였다. 컴퓨터로 작업방식을 바꾸었더니 7년에 한권에서 3년에 한 권이 되었다고.

 

 

 

 

- Wislawa Szymborska (photo by Kim Manresa) -

 

쉼보르스카 의 두 손은 수분이 모두 제거된 어떤 생명체의 외피와 마주하는 것 같아 한참이나 시큰했다.
유리잔을 쥐고 있는 자태에서도 단호한 근육의 힘이 느껴질 정도로 이 사진은 뇌리에 남았다.
흑백사진임에도 그 와중에 손톱은 무미건조가 아닌 분명한 컬러와 빛이 살아 있지 않은가. 
그는 여성이었고 손이 예쁘게 나오길 바랐던 것이다.

 

 

첫째, 나는 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둘째, 나는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즉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셋째, 나는 정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 한테 남는게 뭐겠어요? 나는 당신들과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 조금은 얘기할 수 있어요.   - p284

 

 

     하지만 그녀는 시에 대해 자신에 대해 그리고 정치에 대해 결국 다 말하고 말았다.

 

 

 

 

 - Gabriel García Márquez (photo by  Kim Manresa) -

 

마르케스 의 손은 무엇보다 작으면서 바짝 깎은 손톱과 손등에 무성한 털이 인상적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라고 하기엔 다른 작가들 보다 훨씬 굵기가 작았다.
막일이나 바깥일을 전혀 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고 손이 젊고 건강한 편이었다.
저 아담하고 사실적인 손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그려진 것이다.

 

 

 

 

   가오싱 젠은 망명한 파리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귄터 그라스는 책을 하나 끝내면 그 손으로 조각을 했다. 자신처럼 작가이면서 미술가인 인물들의 작품을 전시하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이 세상을 구원하진 못해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있고 좋은 시가 삶의 고통을 제거해주지는 못하지만 공포를 아름다움으로 바꿀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살아 남았기에 수치스러웠고 유대인이고 흑인이며 여성이며 혼혈이고 반정부주의자 였기에 박해 받았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유대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혼혈도 아니고 데모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는 작가가 아니다. 그러나.

 

 

 

 

#3. 나의 내일

 

 

 

 

 

 이것은 나의 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손에 대해 치명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다섯 번째 새끼손가락을 보시라. 나의 새끼 손가락은 남들보다 딱 반 마디가 짧다. 가운데 마디의 생장점이 돌연변이를 일으켰는지 그만 눌러 앉아 버렸다. 안 그래도 손가락이 짧은 편이라 거의 초등 1학년 아이 수준이다.(다행히 아이는 내 손가락보다 길다. 유전이 아니었다) 살면서 새끼 손가락을 사용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 놈의 새끼 손가락만 보면 괜한 자격지심이 드는 것이다. 무언가 신체 일부분이 제대로 다 자라지 못하고 기가 꺾였다는 둥 이 손가락으로 약속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둥 내가 혹시 나중에 작가가 되어 저들처럼 사진기자가 내 손을 찍겠다고 하면 나는 보란 듯이 주먹을 쥐리라...등등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이어가게 된다. 한술 더 떠 무언가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괜히 손가락이 짧아서 그랬다고 말도 안 되는 탓을 돌리곤 한다.

 

 

   작가들의 손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손을 겹쳐보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어른의 위대한 작품 같은 손이고 내 손은 아직 걸음마 아기 손이었다. 내 손은 아직 이렇다 할 삶의 무늬가 새겨지지 않았고 내가 걸어온 지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깨끗해 되려 미안 할 지경이었다. 어이없게도 이 짧은 손가락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일이 오지 않았다. 모든 걸 졸업하고 이제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많은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저들처럼 슬며시 깍지를 끼어본다. 아직은 부드러운 마디가 한참이나 멀었지만 그래도 좋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니까. 이 손은 더 진하고 더 주름질 날이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덧붙임)

 

이 책에 나딘 고디머의 <내 인생, 단 하나 뿐인 이야기 / 2007>가 잠시 소개 되었다.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자선기금을 마련하고자 작가가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부탁해 엮은 소설집이다.
<16인의 반란자들> 중에서도 몇 명이 이야기를 제공했다.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주제 사라마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러니까 나딘 고디머 까지 다섯명이 일치한다. 이 책의 주인공과)

같이 읽어보려고 도서관에 찾아 보았더니 마침 대출중 ㅠ

생각보다 어렵다는 평이 많아 살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다.

(누구 아시는 분 평가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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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2-1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소개한 서재 이웃분들 많이 있던데, 인터뷰집이면서도 작가들의 손을 찍은 사진들도 있군요.
실물을 가늠해보자면 책이 클거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한 소설집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소설집인데 인문학 책처럼 내용이 어렵지 않을거 같아요. 한사람님이라면 충분히 읽으실 수
있을거라고 봐요 ^^

그런데 님의 손이,,, 남자 손인줄 알았어요ㅎㅎㅎㅎㅎ 농담이에요 =3=3

한사람 2012-02-11 12:25   좋아요 0 | URL

예, 책이 일반 단행본보다는 조금 커요. 무겁기도 하구요.
종이질도 다르구요, 하하.
이런 기획을 했다는게 부럽고 작가들 좇아다니느라
고생한 경험도 부럽고 ㅋㅋ
글보다는 사진이 더 기억나요.

나딘 고디머의 책은 좀 지루할거 같은데
이 책에서 언급된 작가들이 나오니까 궁금해서리 ㅋ

제가 손이 좀 작아요. 손가락도 짧구요, 그런데 사진을 찍으니
더 퉁퉁하고 과장되보이네요 ㅠㅠㅠㅠ

stella.K 2012-02-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게 한사람님 손이라굽쇼?
의외로 후덕하게 생긴 손인데요?ㅎㅎ
제 손은 길고도 굵은 편인데 그런 손이 또 게으르다더군요.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꿈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요.ㅠ
마침 이 책이 송경동의 책과 함께 이번 평가단 책으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도착이 안 되고 있는데 발송을 했다니 곧 도착이 되겠죠.
이번 달 평가단 정말 끝장이었습니다. 책 선정은 최곤데 배송은 최악이라고나 할까요?ㅋ
저도, 두책이 도착되면 송경동 책부터 읽게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말씀하신대로 읽기 보단 가지고 싶다쪽?ㅋㅋ

맨 밑의 책 몇년 전에 샀는데 넘 재미없어서 친구 줘 버렸던 기억이 나요.
저는 좀 취향이 아니던데. 가지고 있었다면 한사람님 보내드렸을 거예요.
여러 사람이 쓴 단편 모음이라 괜찮을 법도 할 텐데 저는 익숙하지 않은 작가들이
많이 나와선지 이상하게 질리더라구요.>.<;;

한사람 2012-02-11 12:32   좋아요 0 | URL

흑.. 실물로 보면 얇고 작아요 ㅠ
손재주 있다고 하는 손 ㅋ

공교롭게도 매번 에세이 평가단 책을 꼭 제가 먼저 읽게 되네요.
아무래도 담번 평가단때 그 쪽을 신청할까?? 봐요 ~~~ ㅋㅋ
에세이와 인문쪽이 겹치는 접점지대에 우리가 있군요 ㅋㅋㅋㅋ

그런데 지금이 몇일인데 아직 책이 안왔다니 음..
자꾸 일정이 밀리나보군요.
평가단이 얼리 어댑터의 성격도 있는 건데 출간된지 한달 지나서 읽고 글쓰면
좀 늦지 않나 싶어요.

그리고, 나딘 고디머의 책은 어쩐지 스텔라님이 읽었을거 같더라구요.
전에 미셸 투르니에 단편 이야기 하셨잖아요.
그 소설이 이 책에 있는 거 같아서 ..
그런데 역시 재미없다고 하셔서 ㅋ 담 기회로 미룰까봐용(역시 책은 운명이야 ㅋ)


잘잘라 2012-02-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쉼보르스카의 손 사진은 정말 뭉클하네요. 느낌은 완전 나무, 그것도 한오백년 살아온 고목같아요. 이 책, 처음엔 막 갖고싶었다가 시간 지나면서 시큰둥해졌더랬는데 님 페이퍼 읽고 다시 갖고 싶어졌어요. 결국 장바구니로..^^;; 참참참!『16인의 반란자들』리뷰대회 하던데요, 네24,에서요^^;;

한사람 2012-02-11 12:4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여인의 손, 할머니의 손, 작가의 손 이전에 한오백년 살아온 고목!! 맞다, 그 말이 하고 싶었어요. 저도 처음에 혹해서 시큰둥 하다가 서점가서 들쳐보고 사진때문에 ㅋㅋ
안되겠다. 갖고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많은 사진들 중에 좋은 것들만 책에 실었을 거잖아요.
그 나머지 안 뽑힌 사진들이 마구 궁금해요..

리뷰대회 소식은 저도 봤어요.
저는 요즘 리뷰대회가 재미없어 졌어요, 하하하
작정하고 각잡고 기획적인 구성해대는 것보다
그냥 이렇게 편하게 글쓰고 내 꼴린대로 떠드는게
좋아졌어요.
특히, 이미 사놓은 책도 대회한다고 하면 책이 별로로 보이고
소식을 들은 책은 안사고 싶어져요.(그래서 대회같은 거 일정전에 후다닥 써버리고 싶어요 ㅋㅋㅋ)

또 무엇보다 수상의 의미가 글쓰기의 발전과 비례하지 않는 것 같아
많이 회의적이 되었어요~

히히, 그래도 가끔은 적립금등의 유혹과 책선물에 혹할 때가 있긴해요.
근데 이 책은 그냥 잡문수준으로 마쳐야 할듯 ㅠ

메리포핀스님, 오랜만에 반가워요!

가연 2012-02-1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뜸했습니다ㅎㅎ 글 내용보다는 한사람님의 손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사실 저는 엄밀히 말하면 손금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풋.

한사람 2012-02-13 10:46   좋아요 0 | URL

손금볼 줄 알아요??
음 ~ 이건 제 생각인데
손금도 성장(?)하는 것 같더라구요.
손금대로 살아가는게 아니라 살아가는대로 손금이 만들어 지더군요 ㅋㅋ

바쁘신 듯한데,
사람은 바빠야 해요, 하하

보물선 2012-02-1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아봤던 너의 손이구나! 바로!

한사람 2012-02-15 10:38   좋아요 0 | URL

그 손이야 !!! 내 손 작고 아담했지?? ㅋㅋ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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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많다고 하지 않고 깊다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아주 은밀한 속살 너머 저 깊고 깊은 그곳에 숨겨둔, 내 오래된 두려움에 가닿았기 때문이다. 책을 잡은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쓰는 이유도 그 깊은 여운을 조금 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덮고 나자마자 글을 쓰면 내 속에 들어왔다가 시원하게 통과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통과한 후 책꽂이에 꽂혀지면 나는 뒤돌아 후련한 마음이 든다. 다음 적어도 마음에 새겨진 무늬정도는 기록을 한 사람이 되어 그 책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싶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 책은 기대만큼은 아닙니다. 이 책은 의외로 유익하네요. 이 책은 명불허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지 않고 나 혼자 비밀을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십 년 전에 출간된 이 고전 한 권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나는 내 속내를 감추고픈 속속내와 마주한다. 아무래도 나는 고독이 꽤 좋았던 사람인 모양이다. 이 책은 은둔과 고독을 자처한 나를 위해 나타난 구원자처럼 기품 있고 당당하다. 그런데 다른 구원자처럼 자신의 손을 잡으라 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도 좋은 것이라 말했다. 다르게 살라고 충고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늦게 본 자식에다가 그 시절 흔치 않은 외동이였다. 친구들은 혼자서 방을 쓰는 것을 굉장히 부러워했고 학교 다닐 땐 우리 집에(정확히는 내 방에) 머물다 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살면서 많이 받아본 질문 중에 혼자여서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외로운 것이 무어냐고 자주 되받아 물었다. 정확하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고 형제가 없었던 나로선 혼자 있는 것의 장단점을 비교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혼자여서 심심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육아의 고단함이 아니고 도무지 혼자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혼자서 영화도 잘 보고 밥도 잘 먹고 여행도 잘 간다. 아파트 뒷산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돌아오는 벤치도 있다. 뒷산-도서관-벤치와 영화관-서점-카페는 아이 데리고 마트가는 만큼이나 빈번한 코스이다. 살면서 외로움이라는 건 이런 것이구나를 뼈저리게 느낀 적은 딱 한번, 엄마의 장례식 날이었다. 아버지 돌아 가신 후 엄마마저 떠나는 날은 그동안 혼자 누리고 받았던 모든 사랑만큼이나 무지막지한 슬픔도 온전한 내 몫이었다. 나는 아마 죽는 날까지 그때 느꼈던 외로움을 떠들다가 갈지도 모른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그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는 날은 내가 죽는 날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마치 인생외로움의 필수 코스를 그런대로 이수한 사람처럼 마음이 편하고 혼자할 수 없는 숙제를 마친 사람처럼 그 어떤 외로움에도 두려움이 없다. 물론 ‘혼자서도 잘해요’가 꼭 고독을 즐기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혼자인 시간을 무척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 어찌 ‘혼자 있는 능력’ 을 말하는 이 책이 눈물겹지 않겠는가.

 

 

 

    ‘혼자 있는 능력’ 이란 사무치게 외로와 죽겠는데 이 악물고 고독을 잘 견디는 능력이 아니다. 혼자 있는 동안 각자의 뇌에서 최고의 잠재력이 발휘되는 기특한 순간의 능력이다. 즉,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정서변화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혼자 있는 건 능력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예를 들어 고독이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발전시켜 창작활동에 기여한다면 그때의 고독은 능력이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작가, 음악가, 철학자의 삶을 예로 들고 정신분석 및 통계자료를 통해 창조과정, 개인화 과정이 고독 속에서 더 잘 내면화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극단적인 예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 뉴턴 같은 천재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가까운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았고 금욕적인 생활에 몰두했다. 이들은 모두 철저하게 일과 연구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그들의 인생이 꼭 불행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타인과의 친밀한 애착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삶이 꼭 불완전하거나 열등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인간관계에서 찾을 것인가 내면화된 고독 속에서 찾을 것인가는 개인의 성향과 선택일 뿐 어느 한쪽이 정답이거나 다른 쪽이 비정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다.

 

 

 

    우리 모두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들의 고독와 우리의 고독은 질적으로 다르다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행복을 가르치는 많은 서적과 사회학 통계치로부터 대부분 노년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라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내가 아는 행복론에서 건강한 노년은 적어도 고립된 삶이 아니라 이웃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정원을 가꾸는 인자한 모습이다.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물로서 조직에선 거의 치명적인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인간관계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버리라고 말한다. 혹시나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필요이상으로 불행해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꼭 친하지 않고 형식적, 피상적인 관계도 일상에선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이 나이 되도록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는 친구하나 없는지 왜 회사에선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 할 동료가 없으며 왜 그 흔한 학교 선배하나 남지 않았는지 자학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현실세계라는 외부 대신 상상이라는 내면세계를 잊지 말고 그 속에서 불운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기르라고. 고독은 현실로부터 외면당한 절망의 공간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라고.

 

 

 

    그러니까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고독과 창의성을 연계시킨 지점이다. 창의성이라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취약하다는 결과와 만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어린 시절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것이다. 부모의 상실, 결핍 등으로 어린 시절 혼자 있었던 아이들이 상상하기를 즐기는 과정에서 창의성이 싹트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 중 다수는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껴 고립된 시간에 놓이게 된다. 유전, 환경적 우울적인 기질은 강박증이나 신경쇠약, 분열증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병적 요소는 다시 자극제가 되어 내면 깊은 곳을 탐험하고 갈등과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상실과 고독은 창작의 가장 확실한 배경이 되고 다시 창의력을 가진 사람은 상실을 치유하며 고독을 내면화하는데 성공한다. 고독한 사람은 상상하고 상상하는 사람은 창조하고 창조된 세계는 자신은 물론 친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위로를 선사한다. 이른바 고독의 선순환 과정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인 것이다.

 

 

 

    저자는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면서도 친밀한 관계 맺기를 두려워했던 카프카의 삶에서 글쓰기를 언급했다. 분열적인 카프카를 치명적인 고독과 창의성을, 창의적 재능과 우울증의 본보기로 제시했다. 카프카는 누군가 곁에 있으면 자신의 나약한 정신구조가 무너질까봐 -글을 못 쓰게 될까봐 -연인을 거부하고 두려워했다. 카프카에겐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장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카프카를 보면서 간혹 가족이 없어야 글을 쓰는 사람과 가족이 있어도 글을 쓰는 사람과의 차이를 생각해보았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도 정도가 있듯이 예술가도 고독에의 완성도에 집착하는 정도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절대 고독에서만이 절대 작품이 탄생한다고 믿는 예술가는 아마도 더 간절히 사랑을 원하고 그래서 혹 자신의 재능이 그 사랑으로부터 파괴(패배)당할까봐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친밀한 관계는 자기 창조의 동력을 앗아간다는 것을 천재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오랜 고독과 그 속에서의 집중이 내면의 재능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려는 개인의 보상기제일수도 있겠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인간관계보다는 내면의 관심사에 더 몰두하게 된다는데-이는 죽음이 가까워지므로 이별을 준비하는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닐지-우리는 나이들어 이웃과 교류하나 없는 어르신들을 고집불통의 노인네라 속으로 흉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면 정서적으로 성숙한 것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면 병적인 것이라 구분해 오진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창조적 삶을 위해 고독하게 살라는 뜻은 절대 아니라 부연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찾아온 고독을 지속적으로 즐기는 방법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말하고 싶다. 누구든 지금 고독하다면 고독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그것에서 생성된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투사할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가능성이 글이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자기 고독을 치유하는지도 모르고 상상력은 고독을 입체화해 줄 것을 믿어 보라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은 새로운 통찰을 얻는 순간, 다시 말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혼자 있는 순간 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 해도 대개는 그렇다
- p20

 

 

 

 

    우리는 베토벤이나 칸트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독하다. 가끔은 고독하고 어쩌다 고독하고 불현듯 고독하고 그리고 자주, 쓰리게 고독하다. 상대가 나와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독하고 알아도 어쩔 수 없어서 고독하고 어떻게 해준다 해도 고독하다. 아마 죽는 순간 가장 절정의 고독이 완성되겠지만 어차피 고독으로 완결될 거 기왕이면 긍정의 고독, 생산의 고독이 더 그립고 절실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외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그 외로움을 비교적 잘 내면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외로우면 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고독을 이기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었다. 나는 이제 어느 비오는 밤 당신이 고독해보여도 혹은 당신이 그 빗소리에 고독하다 외친다 해도 당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독은 슬픔이나 절망이 아니다. 고독은 고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할 수 없는 희망이요 기쁨이다. 당신의 고독을 늘 질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고독하다면 이 책을 권한다. 제대로 고독할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내가 맞는다고 하는데 슬며시 미소 짓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디 당신의 고독위에 나와 같은 반가운 미소가 사뿐히 내려앉기를. 우리는 고독한 이 밤이 가장 좋은 사람들이니까...

 

 

 

 

 

덧붙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도 처음이고

줄이는 것도 힘들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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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2-0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깊은 위로 말고요,
때로, 때때로 한번씩 어깨를 툭~하고 쳐주는 그런 보일듯 말듯한 제스츄어요~^^

원제가 'solitude'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우리말 제목이 의외네요~^^

gimssim 2012-02-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독은 기쁨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아마 혼자 놀기의 명수여서 그런가 봅니다.
어릴 적에는 우리집 마당에 스무명의 아이들이 해질녘까지 놀다가곤 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혼자가 되어있었어요.
지금은 '조직'내에서도 늘 '혼자'인 것이 약간 문제가 되곤 합니다만...

gimssim 2012-02-11 21:22   좋아요 0 | URL
스무 명의 아이들이란 게, 제가 그때는 무척 활동적이었을 때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 저희 집이었어요.
아무튼 방도 여러 개였고 장독대, 우물, 감나무, 분꽃이 많이 폈던 꽃밭도 있었드랬는데.... 결혼해서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가 이십 여 년만에 주인이 바뀐 집에 가보았더니 에게, 마당이 이렇게 좁았나 싶었어요.

꽃도둑 2012-02-09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독한 시간에 갇히는 거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요...
번잡하고 북적대고 복잡한 곳에 있는 것도,그런 일과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거 그야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아, 나를(?) 알아주는 글인 것 같아 내심 위안이 되네요..^^
창의적인 일로 이어진다면 금상첨화일텐데...조금 더 기다려보죠 뭐..ㅋㅋ

보물선 2012-02-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미투한번 와봐봐.
어제 알라딘에서 10만원정도의 적립금이 들어왔다가
그거 실수한거래서 완전 김샜어.
그거 다 써버릴껄! ㅠㅠ

보물선 2012-02-10 15:34   좋아요 0 | URL
내말이~~
좋다가 말았잖아....ㅠㅠ

cyrus 2012-02-10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에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으로 고독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는군요. 마침 이 책이랑 <고독의 위로>를 같이 읽어보려고 하는데
저 역시 이 책으로 고독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

[그장소] 2015-04-16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할 나위 없네요.^^
누구나 다 안다면 굳이 이 상태를 이해시킬 필요도 없을텐데.
일상생활을 나눔으로 좋음은 이미 했었으니
이제 온전한 혼자로 삶도..그런 형태가 되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