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정봉주 - 나는꼼수다 2라운드 쌩토크: 더 가벼운 정치로 공중부양
정봉주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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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뜨겁다

 

 

   보통, 읽고 싶은 책은 늘 읽어야 할 책을 앞지른다. 그런데 읽고 싶은 책은 대개 읽지 않아도 될 책 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읽어야 할 책은 읽고 싶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의해 의무로 새겨보아야 할 책이고 읽고 싶은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되었지만 욕망에 의해 넘길 수밖에 없는 책인 것이다. 전자가 머리로 이해하는 독서라면 후자는 가슴으로 느끼는 독서일 것이다. 독서의 아이러니는 이렇듯 언제나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을 때 불현듯 현실을 파고드는 우연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내겐 이 책 <달려라 정봉주>가 꼭 그랬다. 


   정봉주 전 의원의 대법원 판결을 하루 앞둔 일주일전, 내 트윗 타임라인엔 불효자식을 용서하라며 아버님 산소 앞에 바친 그의 책과 소주 사진이 올라왔다. 그날 글샘님은 그를 응원하기 위해 서재에서 ‘달려라, 정봉주’ 6행시 이벤트를 벌이셨고 나는 늘 그렇듯 지나가는 과객이었지만 그만 울컥한 심경에 급조한 몇 자를 남겨버렸다.(잘은 모르지만 분위기상으로 무죄같은 행운이 절대 따르지 않을 것 같았다. 괘씸죄로 형이 추가되면 되었지... 그리고 다음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주초에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을 넘기면서 자꾸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던 것이 끝내 미셀 투르니에는 내년으로 미루기로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정봉주 리뷰를 내년으로 넘기기는 어쩐지 싫었다. ‘나꼼수’ 콘서트나 집회를 좇아갈 체력은 안 되는 형편이고 그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책이, 이런 사람이 있다고 세상에 떠드는 일이므로 해가 가기 전에 운 좋게 가슴 뜨거워진 그 독서값만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여 김어준, 김용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글로써 인사를 대신하려한다. 


   정봉주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되던 날, 그러니까 엊그제(26일) 지나가다 KBS 뉴스를 보았는데 삼사십 분을 북한뉴스로 도배하고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기 전에 아주 짧은 단신 처리하듯 그것도 인터뷰 목소리까지 묵음처리하며 뉴스를 재빨리 얼버무리는 장면을 보았다. 사건을 보도 했다기보다는 무슨 불법 비디오를 두 배로 재생하듯 후다닥 화면처리 하는 것을 보고 그럴 줄은 알았지만 대단히, 허탈했다. 이 모 씨(이제 MB도 너무 일반존칭이고 이명박 다 쓰는 것도 귀찮고 가카 같은 직함도 아깝다. 그나마 씨자도 붙여 주기 싫었으나 이모 *이라고 하면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할 수 없이 붙여준다. 그래도 공개로 올리는 글이므로 뒷조사 당하고 싶지 않아 한 글자 더 큰 인심 쓰는 것)는 운도 좋지 때마침 죽어준 김정일 덕에 근 열흘째 생일인 기분이 아닐까. 아주 천만다행인 연말을 보내고 있을 그와 이 나라 집권세력, 그리고 덤으로 운 빨까지 가만히 앉아서 빨아 드시는 여권의 대권 공주님까지... 북한은 제대로 따스한 연하장을 날려 보냈다. 보수신문은 연일 안철수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고 호들갑이고 TV 정보란만 빼면 全 신문지면이 로농신문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싶은, 요즘이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선관위 디도스도 FTA 날치기 통과도 4대강 사업도 한나라당 분해설도 싸그리 덮어버리는 괴담이상의 괴력을 발휘하며 연말의 대미를 장식해주고 있지 않은가.



잘못은, 잘못만이 감싸 준다

 

   정봉주 전 의원의 구속을 보면서 대체 그는 얼마나 그들의 허물을 눈감아 주었을까를 생각했다. 왜, 그들은 집권자에 대한 충성심이 이리도 유별나게 절절한 것일까 싶었다. 무슨 일이 터지기만 하면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분은 절대 모르시는 일이고 자기 혼자 독단으로 그분 좋으라고 일을 저질렀다고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 나간 발언을 해댄다. 김어준, 김용민 책에 보면 하나같이 권력자가 가장 무서울 땐 잡아다가 죄 몫으로 감옥 넣는 것이 아니라 비리를 알고서도 음흉하게 감싸줄 때라고 말한다. 가장 질 나쁜 권력자는 지금 살려주고 나중에 옥죄기 위해 혹은 내 비리가 밝혀질 때 비장의 카드로 써먹기 위해 서로서로 보험들 듯이 조커 패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보수 집권세력이 허구한 날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고 대중에게 소리 높여 뻥치는 이유는 매일 술 퍼 마시는 작자가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말하는 이치와 똑같다. 그들이 가장 두려운 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고 가장 반가운건 진실이 덮여지는 것, 그리하여 혐의도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안 밝혀지기만 하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이 책을 보면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그건 사건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며 떼를 쓰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지만) 맹자(공자인가?)가 말하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당신이 알면 그건 비밀이 아니라 했거늘, 그들은 그 한명의 당신만 없으면(있더라도 사라지게 하면) 완전한 비밀이라 여기는 것이다. 


   내 생각에 누가 되었건 그의 혐의를 묵인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어주려는 작자들은 틀림없이 그래야만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하기가 힘들다. 정봉주는 이 책에서 계보가 없기 때문에 여의도에서 대표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왕따 국회의원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역으로 만약 계보가 있는 정치인이었다면 과연 구속까지 되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같은 주장을 한 것인데 박근혜가 한 말은 가치판단의 문제이고 정봉주가 내세운 것은 허위사실이 되는 정치현실은 박과 정의 주장이 (홍준표 전 대표가 말한 것처럼)다른 문제이어서가 아니라 박과 정이 본질적으로 다른 정치인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정치계에서만 발생하는 비극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학연, 지연 등의 인맥과 상관없이 혼자서 잘나가는 인사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지 않는‘같이 살고 같이 죽기’의 사회이다. 오히려 도대체 어디까지 잘나가는 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기회가 생기면 두고보자하는 식이 팽배하다고 할 수 있다. 조직사회에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기회도 많아 보이지만 그만큼 위험의 순간도 많이 찾아온다. 나는 회사 다닐 때 한국의 디자인 산업계가 S대와 H대파로 나뉘어 팽팽한 대결을 벌이다가도 신선한 유학파만 나타나면 갑자기 똘똘 뭉쳐 그들을 배타적으로 왕따 시키는 현장을 무수히 목격했다. 업계에서도 누군가 실수를 하거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같은 학교출신이기 때문에 정의의 편을 들지 않고 제 식구만 챙기고 감싸려 드는 행태를 지겹도록 보아왔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잘못을 덮어주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비리를 외면하고 우리가 꼭 유명한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살아오면서 내가 속한 계파에 없는 타자들을 알게 모르게 나 몰라라 한 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나이 사십 넘어서 아줌마들끼리 모여도 애들 피아노 가르치는데 선생이 어느 대학 나왔냐고 일단은 묻고 끄덕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꼴을 대단히 잘 학습해온 기성세대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그토록 일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희생은 의원이 하고 당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렇게 당을 위해서 고생한 의원들은 아미도 기억하지 않
   고 구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당의 모습이고 정치다.   
- p203


   그가 지적했듯이 저격수는 치밀하게 저격을 하는 임무도 있지만 저격에 실패하거나 노출이 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운명이다. 어떨 땐 조직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꼼수 33회에서 김어준은 아주 분통스런 어조로 자기들(민주당) 위해서 앞장서 싸운 당원을 이렇게 버릴 수 있느냐, 왜 하나도 보호해주는 이가 없는 것이냐면서 저격수된 정봉주 형 뒤에서 격조 높게 비난했다. 나이 들어 정봉주 같이 싸울 때 앞장섰다가 나중에 혼자서만 보복당하는 사람을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렵고 비겁하기 때문에 자기 살기 위해 결국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를 묵인하며 살아가는구나...그런 생각이 든다. 정봉주를 보면서 알면서도 침묵하고 눈감았을 이 시대의 많은 비겁자들 속에 내가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외로왔다. 어쩌면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결국 모두 한 사람을 향한 울분의 다른 말이었을 듯하다.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MB가 BBK와 확실한 관련이 있으며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는 이명박 대통령(일 것)이라는 것쯤은 김정일의 아들 이름이 김정은이라는 것만큼 이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추정소설의 결말이다. 나꼼수와 <닥치고, 정치>를 통해 우리는 대부분 BBK 기업형 첩보소설의 주인공과 시나리오를 잘 이해하고 있다. 김어준이 사회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정봉주는 보다 형사적으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며 사건을 보도하는 듯했다. 두세 번 이들의 주장을 읽으며 느낀 것은 이 나라 정부와 검찰은 지난 4년 동안 BBK가 이명박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억지 쓰고 잘 모르는 국민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존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우리가 이 모 씨를 대통령으로 뽑아 줄 당시로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가 그렇게 도덕적이고 인품이 높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우린 그의 도덕성 결핍을 얼추 예상들 하고 있었지만 그냥 묵인하고 다른 능력을 더 중요시 한 사람들이었다. 정봉주는 한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해 도덕성 검증이 왜 필요하고 왜 그토록 중요한지 절절히 깨우쳐 준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다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엔 배후 동업자 혹은 의사결정권자 식으로 앞으로 드러나지 않게 창업과 주주관련 사안에 관여를 하면서 회사가 성공하게 되면 슬슬 그 회사는 내가 창업했고 내 소유고 다 내가 기획했다 주장한다. 만에 하나 잘못되었다 치면 나는 그 회사와 일절 관련이 없는 사람이고 동업자는 썩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판단해 일찌감치 손을 뗐다 하는 것이 사기꾼 형 자본가들의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치고 빠지는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에 추호도 도덕적인 양심이 없다. 기업을 하다보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큰 돈을 모으고 굴리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대개 자신의 도덕성에 무감하다고 본다. 이는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죄책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통령을 한다하면 그 도덕성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정봉주가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BBK 전모를 다시 한번 학습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모 씨는 전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있다하여도 크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느낀다 하여도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라는 것. 나는 확신한다, 그의 뻔뻔함과 불감증을. 문제는 우리가 그의 성향을 몰랐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의 욕망에 따라 그를 택하였다는 것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보면 민주주의가 꼭 훌륭한 지도자를 뽑는 제도는 아니라는 투표의 오류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정봉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환상을 하기 쉽다고 꼬집는다. 유시민은 (다양한 국가론을 빌어)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가 아니라 무능하거나 최악의 인물이 지도자로 선출되더라도 그 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라 정리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법치주의 역시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
     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
     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
    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    -50 p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中

 

   이렇듯 지도자의 일방적이고 잘못된 권력행사를 막기 위한 법치주의, 민주주의가 현 정권 들어 급격히 후퇴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임종하기 한 달 전 마치 유언처럼 하소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지적하신 그대로 그때 이후로 무슨 정언명령처럼 더욱 우리나라의 법치주의, 민주주의는 완전 추락의 내리막길을 달려와 이제 진실을 덮고 거대한 흐름을 막아보고자 용기 있는 한 정치인을 황급히 감옥에 보내버린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절망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국민은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 씨가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 주었다면 정봉주는 민주주의의 유약하고도 위험적인 속성을 가르쳐 주었다.

 

 

 

다시, 일어나서 달려라

 

 

   드레스룸에서 감옥연습을 했다는 그는 얼마나 수감생활을 하게 될까. 3월 1일 사면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자신은 떳떳이 형기를 다 채우고 나오겠다 답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꼼수 녹음실에는 실물 정봉주 사진을 갖다 놓고 김용민은 편집할 때 정봉주 웃음소리를 적절히 삽입하겠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어제 김문수 경기도 도지사의 소방서 119 전화 건으로 정봉주의 웃음소리는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우연의 일치인지 정봉주는 이 책에서 김문수와 미국에 동행했을 때 김문수가 미국을 꼭 위대한 미국, ‘Great America’라 말할 필요가 있는지 비판했다) 지난번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했을 때 욕설로 되받아 쳤다고 한 그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하여 김문수 전화목소리와 이어 붙이니 도저히 듣고서 나자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 사실 욕설 수위가 높아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기가 막히게 쓰여 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역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정봉주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많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세상은 아직...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꼼수 에서나 대외적으로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두렵다. 일부라도 뒤집히지 않고 그대로 확정된다
    면 꼼짝없이 감옥행이다. 나를 지켜줄 사람도, 조직도 하나 없는 지금, 그야말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 졌다
.  -256p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인데 이 정권에서의 의혹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고 검찰수사나 발표 같은 것은 형식적인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보수 신문에선 모두가 근거 없는 괴담이고 괴담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병적인 요소라 지적들 하고 있지만 언제나 핵심정보를 증언할 만한 인물들은 늘 그렇듯 기획출국 아니면 기획입국된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땐 꼭 서태지-이지아 건과 유사한 대형 스캔들이 동시에 살포된다. 그리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요직 몇 사람이 잘리거나 구속되는 것으로 수사는 종결된다. 이에 정봉주의 결론은 이렇다. 검찰은 정치권이 깨끗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안밖으로 깨끗해지면 그 개혁의 칼날은 그대로 검찰개혁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에 ‘비리의 정보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정치권을 향해 적당히 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더 편한 방법이라는 주장이다. 나 역시 적극 동의한다.(자기들도 뒤로 구리기는 마찬가지니) 그런데 이 논리로 따지면 뒤를 봐주는 빽이 없고 정의롭게만 살아왔다면 그 사람은 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많아진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한 뒷생각을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깨끗한 정치인이 많아 봤자 검찰만 피곤해질 것이 자명하기에. 이렇게된 사회에선 그 누가 저격수 역할을 하고 선봉장이 되어 비리를 밝히려 들 것인가.

 

 

   또 하나, 이 책의 말미에는 부산, 삼화 저축은행 비리사건에 대한 의혹도 제시 되어 있다. 핵심은 쓰러져 가는 은행에 삼성이나 포스텍 같은 대기업이 막대한 돈을 투자하게 된 배경이다. 투자 유치와 중간 돈 빼돌리기 과정에 로비스트에 해당하는 인물이 포착되는데 늘 그렇듯 대통력 친인척과 여권 수뇌부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시작은 대규모 비리수사에 착수할 것처럼 창대하지만 신기하게도 대통령의 형, 조카사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의 실명이 거론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 검찰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정치권과 연관이 없다며 수사를 종결한다. 어차피 고령의 상인과 서민들만 피땀 흘려 벌어 놓은 돈을 다 날리고 난 이후이다. 시장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어 서민과 친한 줄 알았던 저축은행은 기실 금전적 이해관계로 얽혀진 검은 커넥션으로 운영되어온 그들만의 ‘욕망의 도가니’ 로 기능해 온것이다. 정봉주는 이 챞터의 소제목을 미리보는 청문회라 칭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원외교로 국민을 현혹하는 과정과 교육전공자답게 대학등록금의 문제도 거론하였다. 등록금 인상이 탐욕스런 사학비리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공공성을 담보해야 할 교육부가 학생이 아닌 대학의 편을 드는 행태 역시 전관예우와 먹이사슬 관계로 엮어진 오래된 어둠의 커넥션이라 말했다. 가만 보면 대통령부터 이어지는 뿌리 깊은 서로 눈감아 주고 챙겨주기 관행이 아닐 수 없다. 공직의 최고위직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전 공무원이 좇아가는 악습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거나 부패한 대학이라고 해도 교육부는 그 대학들 편이다. 교육부 고급 공무원들이 은퇴하면 그 대학의 고
   위 직원이나 교수로 가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퇴한 공무원은 그 대학을 위해 교육부에 감사 축소 로비
   를 하거나 혹은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한 로비 창구로 쓰인다.
  -303p

 

 

   아직 주진우 기자의 글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나꼼수 4인방 중 김어준, 김용민과 비교해보면(책만으로) 그는 말하는 대로 글을 쓰는 사람인 듯하다. 김어준의 글은 말하는 방식과는 상반되는 쪽이었고 김용민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듯 했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지만 말하는 방향은 한 곳인 것 같다. 정의와 도덕. 참여와 용기. 기죽지 말고 일어나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정치인생을 살아왔다 생각하지만 90프로는 인정받지 못한 과정 이었다 고백한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자신을 포레스트 검프와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과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달리라는 말이 어쩌면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달리는 순간 고통은 잊고 정면을 응시하는 순간 이미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나 역시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는 것에 눈물이 마를 만큼 아니 목에 침을 삼키기 어려울 만큼 말라버린 목소리로 그렇다 답하고 싶다. 정봉주, 그가 수감되기 직전에 녹음실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고맙다며, 그리고 사랑한다며 말해놓곤 울어 버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은 감옥에 가둘 수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는 젊은이들의 준엄한 외침도 잊지 않으련다. 세밑이 예전만큼 따스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순 없다. 그곳이 어디든 외롭게 달리고 있을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그에게 반대로 이곳에서 이렇게 손잡고 달리고 있을 우리를 기억하라 전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어쩌면 아무 힘도 못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말해드리고 적어 놓고 싶다. 2012년엔 그렇게 견딘 모든 시련이 부디 우리가 염원하는 정의, 그리고 진실과 도덕이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상식으로 열매 맺길 기대한다. 새삼 '역사를 신앙으로 섬기고 정의를 믿었으며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은 한 사람이 생각난다. 정봉주, 그 역시 이 추운 겨울동안에도 죽지 않는 인동(忍冬)의 세월을 이기고 당당히 세상에 나와 다시 정치의 꽃을 피우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때까지는 국민이고 싶다. 아니 세월을 같이 기다린 후 그때부터 라면 더욱 국민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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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3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이런 가슴으로 읽어주는 책 2,3권은 읽어줘야 하는데
올해 그런 책이 과연 있었나 싶기도 하네요.
저는 그 좋다던 <닥치고 정치>도 읽어주지 못하고 한해를 마무리하니 참...ㅜ
일껏 생각한 것이 올해 참 소설 안 읽었다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나라가 발전할게 무에 있었겠습니까?
알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란 간판 걸고 사는 것을 보면...그냥 웃지요.^^

꽃도둑 2011-12-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꼼수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는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너무 감성적으로 치우치게 했다고 우려하던데...
저는 솔직히 나꼼수 이전에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 수준이었는데...덕분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으니..
글쎄요,,이성과 감성 모두를 작동시키며 다가선 것 같은데..왜 그런 우려를 하시는지...뭔가 두려운게 있는 걸까요?
격을 너무 떨어뜨려서 우리모두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건가요?,,,ㅎㅎ

저는 이 격없음이 너무 좋은데요..시들시들한 정치라는 가지에 물 오르게 하고 새싹이 돋게 한 그들을 위해
나역시 체력이 딸리는 관계로다 그들이 낸 책을 싸그리 사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하긴 했는데 왠지 약에요(김어준투로 읽어주세요) 지금은 보수를 팝니다를 읽고 있는데 아ㅡ, 좋아요,

글샘 2011-12-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봉주 유죄의 근거가 그거잖아요.
이씨도 그렇고 딴날당도 그렇고, bbk가 지꺼 아니라는데 왜 자꾸 우기냐고,
그리고, 아마 정봉주는 아니라고 믿으면서 민주당땜에 우기는 거라고...

근데, 어떡하죠? 그 회사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이제 누구나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뜨거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12-30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에는 국민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망언과 공익에 위배되는 정치적 활동을 한 나쁜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정봉주 씨 같은 군력의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좋은 정치인들이 있어서 다행인거 같아요.
그리고 연말에 김근태 씨가 세상을 떠난 것도 아쉽고요. 또 나꼼수의 인기도 대단했고요.
여당 박근혜 비대위에서 디도스 사건 검증을 위해서 김어준 씨를 영입하려고 했으니까요.
물론 김어준 씨가 비대위의 제안을 거절했지만요.

2012-01-0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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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올해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성장했다. 순수한 시간의 속도감은 사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빠르게 체감 되었지만 글쓰기로 내가 이룬 것들은 성과 면에서 본다면 지지부진, 그야말로 형편없었다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성과를 지향하지 않으니 가시적인 성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어라도 하나 챙겨 받는 사람들이 더욱 남들의 성과를 부러워하고 자연스레 욕심도 낼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것. 이 증상이 꼭 좋다고 만은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괜한 열패감 때문에 서글퍼지거나 혹은 어줍잖은 위선이나 기만으로 서로 의무적인 축하의 당위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꼴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천천히 걸어 오래 사는 거북이를 택했기에 올해 나는 글쓰기만을 위한 글쓰는 자유를 눈에 보이는 보상과 과감히 빅딜할 수 있었다고 본다.

 

 

   새삼, 지난 일 년 간 내 글쓰기 행보를 돌이켜보면 중간에 색다른 유혹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상채기들도 예상보다 많이 치루어 낸 듯하다. 모두 그전과는 다르게 쓰고 다른 걸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러다보니 달라진 글 때문이라 생각한다. 허나 글쓰기라는 행위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다짐했다고 해서 쉽게 바뀌어지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역량을 평소 열정의 부피만큼 동일한 정도로 발전시키는데 퍽이나 힘겨운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래야 하는 나를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아니 그랬기 때문에 얼마간은 견뎌내었고 결과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로 삼고 싶다.

 

 

   냉정하게 말해 글쓰는 내 수준과 현재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지방 어느 중소도시 읍내 나이트 클럽의 무희 혹은 전속까지는 안 되고 이리저리 알바 뛰는 미사리 밤무대 가수 정도라 생각한다. 신인가수로 데뷔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오디션 같은 등용문을 통과하기엔 질곡한 세월의 때가 두껍게 쌓여 버린. 물론 나도 내 전공이 있고 내가 해온 일이 있으므로 그 바닥에선 전문가 소릴 들을 수 있(었)을 지언정, 노래로 치자면 그러니까 가수를 하겠다고 노래연습을 하고 있다고 보자면 앞날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춘문예에는 대부분 문창과 출신들의 공모용으로 잘 훈련된 글이 당선이 되고 출판사 문학상에는 다소 실험적인 작품들이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하며 운 좋게 그러한 바늘구멍을 시원하게 뚫어버린 낙타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생활이 달라지는 일은 없다는 것쯤은 말 안 해줘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까놓고 말해 무엇 하나 보장되지 않은 문학의 길에 당신의 남은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딱히 근사하게 답해줄 말은 없다. 언제까지 생업으로 미사리 가수를 지속할지도 모르겠고(미사리 가수는 그래도 돈이라도 받지 ㅠ)이마저도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신은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칼만 빼들은 상태인지라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긴 하다만 올해 같은 시간이 몇 년 만 더 지나간다면 나는 아마 지나온 시간을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지 몰랐듯이 그때 나 역시 그렇게 살게 될지 모를 것이 뻔하지 않은가.

 

 

   늘 그렇듯, 이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한 쓸쓸함보다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적지 않은 글쓰기 책과 작법을 알려주는 책, 소설가의 소설 쓰는 이야기 책을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수많은 위대한 소설가들 중에 굳이 닮고 싶은 작가는 없다. 누구를 모델로 삼은 적도 없고 어떤 작품을 흠모해 본 적도 없다. 작가의 인생과 그가 견뎌낸 세월과 그로인해 탄생한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들은 나와는 점점 멀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그러면서 반대로 그 작가의 단점을 찾아내 그 구멍으로 탈출구를 빚어 낼 줄은 알았다. 예를 들어 문체상으로는 이청준, 이문열, 김훈의 글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과 가장 비슷하다 여기지만 감성이 부족한 보수적 남성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하는 식이다. 중산층 비틀기로서의 박완서는 완벽하지만 과거로의 끝없는 회기와 동어 반복적 서사는 고루하기 짝이 없기에 결과적으로 소설적이지 않다, 뭐 이런 식으로 웃기지도 않게 나는 내 맘대로 내 잣대로 선을 그어 버린다.

 

 

   나는 내 글이 어느 정도 서사의 리듬감은 있지만 문장 속에서 유머나 위트가 현저히 부족해 무겁게만 느껴진 적이 많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칼날을 휘두르면 엄청난 냉소가 느껴지고 조금만 청승을 떨면 여지없이 땅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누구나 자신의 글에 대해 객관적일수가 없겠지만 나에 대해 그리고 내 글에 대해 말하는 여러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내 글은 지나치게 고집스럽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만의 논리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고, 나쁘게 꼬집으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독단의 도가니. 나는 이 성향이 좋고 싫고를 떠나 형제 없이 혼자자라 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해온 삶의 이력에서 상당부분 비롯된 방식이라 진단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내가 쓰는 방식을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문제는 내 고집이 과연 어떠한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것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제공할 수 있는 가인데 그 부분의 긍극적 질문에 이르면 내가 과연 왜 소설을 쓰려고 했던 가로 그만 다시 회기하고 만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소설은 쓰여 지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소설은 택하여 지는가. 나는. 왜. 하필. 소설. 인 것인가.

 

 

   소설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쓰고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고 하루마다 답을 한다. 며칠 전엔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해보고자...하는 궁색한 답을 내놓고는 서둘러 질문을 폐기해버렸는데 고맙게도 그날, 이웃 한분이 당신은 미셀 투르니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미셀 투르니에의 작품을 하나 안 읽어 보았지만 바로 한권도 읽어보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 갑자기 가슴이 홧홧해져 오는 것이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눈발은 흩날리자마자 길바닥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날은 그렇게 쌓이지 않는 눈들이 빗물보다 눈물보다 더 부질 없어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님이 말해주기 전까지 전혀 내게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책이었지만 그 사이 혹시 누군가 그의 책들을 다 빌려라도 갔을까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생이라는 게 참 눈이 그렇게 쏟아져도 아무것도 쌓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두어 개 빌려왔고 대여를 하면서 누군가가 반납한 책이 눈에 들어와 그 책도 덤으로 가져왔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두어 달 전 같은 책을 서점에서 들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미셀 투르니에 책은 신간 에세이도 한권 주문을 했고 빌려온 두 권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안 빌려도 되었을, 아니 자칫하면 안 빌릴 수 있었던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자꾸 눈에 밟혀 결국 그 책을 먼저 읽고 말았다.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한 개 정도의 페이퍼를 더 쓸지 모르겠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미셀 트루니에로 하자,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면서(안해도 되는 다짐을 왜 했는지 ㅠ) 나는 지금도 본 책이 아닌 별책부록을 먼저 대접한 것에 겸연쩍어 하고 있다. 어쩌면 부록이 간절해 본 책을 구입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때로는 부록이 본전이상을 뽑으며 톡톡히 효자노릇을 할 때도 있으니까.

 

 

 

 

비법을 말해 준다면

 

 

 

   제목은 우선 그럴싸한 페이크임이 분명하다. 그럴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에는 열일곱 명의 소설가가 자신만의 창작론을 저마다의 문체로 자아내고 있다. 모두들 될 수 있으면 편하게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때가 되니 그것들을 모아놓고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라 근사하게 이름 붙였을 뿐. 사실 적절한 주제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나는 늘 출판사의 제목마케팅에 불만이 많은 독자라...) 허나 누가 봐도 ‘쓴다’는 것보단 ‘산다’는 것이 더 철학적, 문학적이며 더 깊이 있고 더 팔릴만한 뉘앙스이렷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므로 넘어가주기로 하고 내가 이 책을 덮으며 느꼈던 몇 가지 감상은 기록해두고 싶다.

 

 

   먼저 개인적으로 열일곱 명중에 소설가로 사는 모습이 정말로 궁금했던 작가는 전경린이었고 창작론이 궁금했던 작가는 김인숙, 하성란 정도였다. 나머지(라 칭하여 죄송하지만) 분들은 큰 기대가 없었다.(별로 비밀을 알려 줄 것 같지 않아서 ㅋ) 김경욱의 작자와 화자, 주인공에 대한 식견은 쉽게 해도 될 말을 현학적으로 치장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김애란의 경우도 마치 단편 소설을 쓰듯 접근한 방식이, 문청시절을 아스라이 회상하는 언어들이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음악을 모티브로 작업을 한다는 김연수의 글도 흡사 논문숙제를 하는 느낌이 들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북경, 세기 전 신채호가 살았던 집을 거닌다.’로 시작되는 김인숙의 글은 소설의 소재를 좇아 마치 마지막 퍼즐을 찾듯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글 자체로 보여준 것 같아 그 울림이 색다르고 깊게 다가왔다. 직업 소설가 십 삼년 차라는 김종광의 글은 평소 생각을 꾸미지 않고 솔직한 심정을 전달한 것 같아 애틋하게 느껴졌달까. 김훈의 글은 언젠가 책을 뒤적이면서 가장 먼저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내용인지라 익숙했다. 하지만 그가 쓴 창작론을 읽고도 실제 창작에 도움되는 힌트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김훈은 언제나 내게 문장의 완벽함은 선사하지만 그 완벽함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박민규도 자기만의 비법 같은 건 절대 공개하지 않을 작가로 인식되는데(외려 비법이 없음에 대한 논리를 만들겠지만) 이번 글 역시 주제를 가지고 노는 것 같아 독자로서 심히 불쾌하기 까지 했다. 글이야 수록된 작품 중에 가장 실험적, 창의적이었고 심심하니까 자동기술법을 연마한다는 박민규식 오토매틱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읽고 나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는 면에서 김훈과 매일반이었다고 할까. 차라리 부부 동반 자리에 초대를 받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차분히 회상하며 소설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나하나 톺아가는 서하진의 글이 훨씬 감동적이었다. 결혼하여 이십 오 년을 살았다는 지인을 보면서 대단하지 않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소설가가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깨달음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는 심윤경의 글에선 자신의 낙선작에 대한 논평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심경이 제일 공감갔다.(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던 말에 무조건 끄덕끄덕) 윤성희는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스티븐 킹이 답했다는 “한 번에 한 단어씩 쓰죠.” 라는 대답의 의미를 좇아 글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순간의 고민을 풀어 놓았다. 일개 독자지만 작가의 글에서 한결같은 성실함의 태도가 엿보였다고 한다면 건방지다 하실런가. 윤영수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선배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도 계속하여 글을 고민하고 있는 작가의 내면을 그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작가의 삶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나이는 고작 오십 줄이지만 의식이 통과했던 시간은 조선중엽까지의 시간을 포함하기에 추억의 깊이가 남다르게 느껴진 이순원은 어디선가 받아놓고 꽂아만 두었던 <은비령>을 쓴 작가였다. 어린 시절 별에 대해 꿈꾸어 온 것들이 다시 소설로 그려진 것이라는 그는 작가에게 공백의 시간은 없다고 위로했다.

 

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 p187    이순원 - 삼백 년 전 소년이 그려낸 ‘은비령’


  

 

    그런가 하면 이혜경의 글처럼 분명 읽었는데 인상적인 구절하나 기억나지 않는 글도 있었다. 보편적이고 무난하고 재미날 것 없어 보이는 개인의 경험들은 확실히 책속에서도 묻히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굳이 뒤져보고 나서 발견한 대목은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구절이었는데 평소 글 잘 쓰는 사람이 꼭 인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라는 것에 곧 잘 상처를 받는 편이라 밑줄을 그어대고 싶은 걸 그냥 참고 넘어갔구나 하는 정도만 겨우 기억해 냈다.

 

다행히, 전기나 평전들은 나에게 일러주었다. 글쓴이의 인품과 글이 주는 감동이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쓴 작가가 고매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인품은 뛰어나나 글로만 보면 얕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니, 아예 글 같은 걸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 p198    이혜경 - 가만히, 말을 걸어보다

 

 

   하성란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져오신 <세계 어린이 명화>라는 책에서 본적 있는 유명화가들의 그림에서 시작해 작품이 거울 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배치한 다음 거울에 비친 풍경을 기다리고 말하는 일이 소설가인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증언한다.(한편의 잘 짜여진 소설과도 같은 글이라 역시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한창훈은 서울에서 섬에 왔다가 다시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야기를 하며 사나운 바람과 거친 파도가 그리워지는 이유에 대해 자기만의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듯 보였다. 함정임은 광화문 시절의 문학사상사, 적선동 현대빌딩 팔층의 책상을 회상하며 소설이 시작된 곳을 추억하는 여정의 기록을 작성했다. 기억나는 건 소설이 미리 플롯을 정해놓지 않고 ‘누구도 끝을 알 수 없는, 한편의 미지의 소설을 향해 길을 떠나는, 떠나는 중에 하나의 흐름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는 고백이었다.

 

 

 

 

계속 써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현재 내 위치에서 가장 구체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전경린이었다. 내가 만약 원고를 청탁한 쪽이었다면 전경린의 글이 가장 취지에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저마다 개성적인 자기만의 문체로 자신만의 창작론을 언급했지만 대부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았던 반면 전경린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이야기 하면서도 큰 크림을 자신만의 언어로 축조하는데 능숙했다. 그녀는 지금 소설을 써보겠다고 결심한 내게 고맙게도 소설이 쓰이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소설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은유라 말했다. 말하자면 ‘내가 쓰는 전체를 한 단어로 은유할 수 있는가, 한 문장으로 표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소설쓰기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고, 용기를 내야만 하는 과정이다. 대부분 내 소설은 내가 잘 아는 것으로부터 모르는 것을 향해간다. ...머뭇거림이란 불길한 징조다... 흥미는 사라지고 채워야 할 당위만 남아 뻣뻣하게 굳은 과제로 변해버린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을 끌고 가는 의문과 유혹과 몰입이다.   - p207 

 

 

소설이 삼분의 일 지점을 살짝 넘어설 때에야 대체로 전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와 함께 쓰기의 원인도 잡히고 결말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그러니 자기가 쓰는 것에 대해 잘 모를 때도 열망이 있다면 쓰기 시작해야 하고 계속 써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쓰기의 현재성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소설 역시 발밑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 자체의 아름다운 인 것이다. 실패할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고 완성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쓰는 것이다. 두려워하면서도 내 의도를 지나가, 잠재되어 있었던 가능성의 끝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겨우 초고가 생겨난다.   - p209

 

- 전경린 - 울려와 은유 中

 

 

   책을 낸 작가보다 초고를 품고 있는 작가가 부럽다는 전경린은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내가 무어라고 감히 문단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론을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책을 읽었다는 독자된 특권으로 작가와 방법론을 비교하며 즐거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울러 진부하지만 그들로부터 또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가려한다. 현재 능력은 안 되지만 끙끙대며 두 번째 소설(비슷한 작품)을 써대고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떠한 성과가 없다 하더라도 절대 중단하지 않고 끝을 낼 작정이다. (나는 현재 서바이벌 형식의 연재소설 공모에 참여중이다) 연말에 내린 결심이라곤 이거 하나지만 나는 어디서 상 하나 타는 실적보다 우스운 결말이라도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막연히 깨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비 작가들이 다음 단계로 진출이 확정되지 못하면 스스로 연재를 중단한다는 다소 처연한 분위기의 고지를 올린다. 어떤 분은 2단계 심사가 통과되지 못하여 아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쓰셨다. 그의 아내도 아니면서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따로 소설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거절당한 아픔을 뒤로하고 다시 완성을 하게 될 지 그냥 그것으로써 작품의 운명은 끝나게 되는 것인지도. 다른 작가들이 속속들이 다음 단계를 통과하며 고지를 향하고 있을 때 탈락한 작품을 붙들고 완결한답시고 연재를 지속하기가 얼마나 쪽팔리고 또 서글픈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나도 끝까지 갈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어느 단계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이유로(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평가로) 탈락이 될지 모른다. 나 역시도 그때가 되더라도 그래도 끝은 내야겠다며 고집스럽게 글을 계속 쓸 수 있을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이 틀렸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집요하게 듣고 알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그 어렵다는 객관의 평을 손에 붙들고 읽고 또 읽어보기 위해, 그분처럼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번쯤 울어는 보기 위해 끝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끝내는 두려움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기에 ㅋ)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이미 쓰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계속 써야 한다면 지금, 멈추지 말아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는다는 김병만의 얼굴이 생각난다. 거북이의 매력은 어딘지 모르게 슬픈 구석이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꿈을 이루는 일은 어쩌면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이기에 누구에게나 슬픈 추억이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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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2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종의 `고시 합격생 수기`같은 것이로군요. 아무래도 그것이 결국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앞으로 그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므로 뭔가 회상적이고 비틀어진 글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직접적인 것이 더 나을 수 있겠죠.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는데 `소설가는 삶의 공백을 보는 사람`이라고..그렇다면 문제는 그 공백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겠지요. (저는 여기에 없지만 배수아 작가의 창작기, 창작론이 궁금하네요. 여기에 낄 급(?)은 아닌지 모르지만, 김중혁 작가라면 뭔가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줄 것 같기도 한데..)
 
거장처럼 써라 - 헤밍웨이, 포크너, 샐린저 외 18인의 작법 분석
윌리엄 케인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해가 가기 전에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 틈만 나면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지난번에 다 읽었으나 미처 리뷰를 작성하지 못한 책들을 정리하면서 무언가 빚진 마음을 털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변명의 리스트에도 끼지 못한 채 읽다가 흐지부지 되었거나 분명 읽기는 했는데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 중 놀랍게도 어떤 책은 친절하게 밑줄까지 그어져 있었건만 나는 그 중요하다 판단된 구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잊는’ 사람들은 아닐까 싶었다. 좋다고 남들한테 추천까지 한 책 중에도 그러한 비운의 책이 있었다. 책을 읽었다고 덮었다고 다 내 것이 되지는 않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섣불리 읽었다고 말해버린 책 중에 다시 두 번째로 정독한 책을 말하고 싶다. 소설 좋아하고 글쓰기 좋아하고 나같이 문학에 꿈을 둔 적이 있는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안테나가 발동하여 사들이는 책.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쓰기 책은 사실 주관적인 경향이 짙은데 비평가나 일선 교수가 정리한 책은 체계적이면서 온도가 일정한 장점이 있다. 바로, 위대한 작가들의 장단점을 분석한 글씨기 비법에 관한 책이다. 

 

 

   사실, 글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은 열심히 밑줄 칠 땐 절실하나 막상 덮고 나면 수많은 밑줄만큼 효과가 큰 책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에서 끝나고 연습이나 실천으로 이행되지는 않는 틀에 박힌 내용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론적 차원의 충고들이 현재 소설 좀 써보겠다고 바둥거리는 내게는 새삼 뼈가되고 살이 되는 느낌이다. 책이 어떤 사람에게 찾아와 실용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는 다 때가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보다는 지금 당장 글을 쓰고 있는 와중의 펜을 든 사람들에게 더 유효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작가는 모두 21명이며 그들의 장점이라고 소개된 구체적인 테크닉은 이미 문학적으로 성공이 입증된 장치들이다. 안다고 해서 모든 걸 따라할 수도 없고 따라한다 해서 결코 그들만큼 훌륭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런데 저자는 모방하고 모방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을 뛰어 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주장한다. 줄기차게 모방하다보면 어느덧 모범이 된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방’이라는 테크닉에 관한 설명서이다. 독창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려면 모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비롯된 책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들도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카프카도 남녀 간의 사랑묘사는 빈약했고 등장인물의 배경설명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샐린저같은 대작가도 어떤 부분 자신보다 뛰어난 카프카를 모방하고 연구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지닌 천재적인 작가 앞에서 숱한 좌절을 느끼며 패배감을 맛보았다. 저자는 내 글이 독자의 귀에 음악처럼 들릴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말하는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끝까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잊어먹지 않기 위해 현재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분들과 요약노트를 나누는 심정으로, 기록차원에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책에선 작가별로 분류했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다시 소설의 구성요소로 나누어 보았다. 겹치는 내용이 많았고 내게는 누가 말했느냐 보다는 무엇을 말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누구라도 카프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단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모방은 이런 것이다. 진정한 모방은 본보기로 삼은 작가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방은 당신과 당신이 모범으로 삼은 작가 사이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모범으로 삼은 작가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 183p

 

 

 

 

1. 문장

 

 

 

   맨 처음, 문장으로 치자면 발자크도 거지같은 문체였기에(그의 더듬거리는 문체를 견디지 못한 독자가 많았다고 한다) 매끄러운 문장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문장력이 유려하지 않아도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바꿔 말하면 문장력 좋다고 소설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퍼뜩 생각나길 언어학을 공부하고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고종석과 오랜 기자출신의 김훈이 떠올랐다. 고종석은 ‘흠 잡을 데 없는 문장력을 지닌 스타일리스트’ 혹은 ‘가장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이며 김훈은 서사보다는 문체 장악력이 뛰어난 우리시대 대표적 문장가이다. 이들이 아름다운 문장 통제력을 가진 작가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그들의 소설이 가장 재미나고 완벽한 소설이라는 데에는 주저하는 독자도 있을 터이다. 문장력이야 작가들의 필수적인 요건이지만 만약 문장에 자신이 없다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적확한 수식어구와 세밀한 감정묘사에 치중하라는 말. 그러다 보면 차츰 문장도 발전하리라는 뜻.

 

 


- 정확한 표현을 위해 주저하지 말고 길고 복잡한 문장을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라.

  (내 글은 길고도 긴 기차와 같다. 문장 끊기가 정말 어렵다.)

- 헤밍웨이는 쉼표와의 전쟁을 벌였다. 종속절이 지나치면 학문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빈번한 종속절을 사용하여 내 논리를 정당화하고자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 페이지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짧은 대화로 속도감을 유도하고 긴 문단 사이에 한 문단 씩 짧은 문단을 삽입하
  라.

  (헤밍웨이는 페이지가 꽉 막힌 듯 답답함을 싫어했다는)

- 많은 시를 읽고 직접 써보는 것이 훌륭한 문장가를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소설이 막힐 때 시집을 읽는다고 하지...)

 

 

 

 

2. 소재

 

 

 

   톨스토이, 플로베르, 헤밍웨이, 조지오웰 등 수많은 거장들은 하나같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등장인물을 만들어 왔다는 주장이다.『모비딕』의 허먼 멜빌은 정말로 수년간 바다위에서 항해하면서 사색을 했고 선원생활을 했기 때문에 고래라는 상징적 자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첩보기관에서 일한 이언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저자는 주저 말고 자신의 추억을 최대한 이용하고 경험한 감정을 변형시켜 줄거리를 만들어 인물을 창조하라 말한다. 현실에서 겪었던 인간관계가 소설의 소재로 채택되고 자신의 경험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고서 상상만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대부분의 소설가가 인터뷰 할 때 특정 인물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다 소재가 된 해당 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이라고까지 증언한다. 소설가가 갑자기 친한 친구와 절교했다면 그건 그 친구의 이야기를 소설에 써먹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 어느 순간 ‘과거가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그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려 다시 구성하고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허긴 사연이 없다면 아무도 작가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 현실의 두 인물을 하나로 합친 복합적 캐릭터는 소설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이건 한명만 들이 파면 미안하니까 즐겨 쓰는 방법이란다)

- 여성독자를 겨냥한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처럼)

- 독자를 파악하고 그들이 경험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공하라. 마가렛 미첼은 여성독자의 심리를 이용했다.
 
(드라마 작가들이 자주 이용하는 심리가 아닐까)

 


 

 

3. 주제

 

 

 

   주제는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더라도 본격적으로 써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소설이 있고 반대로 너무 주입식으로 강조하는 소설을 만날 때도 있다. (고구려 같은 소설은 너무 가르치려 드니까 어떤 부분 웃기는 것 같기도..) 또 세간에 알려진 주제와 내가 느끼는 주제가 틀릴 때도 있었다. 내 짧은 소견으로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결론이 다른 소설이 더 의미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큰 주제 안에서의 다양성이 아니라 아예 큰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희망적으로 받아들인 사실은 줄거리가 단순해도 충분히 더 주제적(?)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바로 조지 오웰의 경우 서사의 복잡함보다는 단순한 스토리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 철학적 개념을 더 자세히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 주제는 구조의 결함을 고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구현하는 사건이 있다면 최대한 활용하라.

- 주요 모티프와 주제, 상징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한다.

 

 

 

 

4. 서사 및 구성(내러티브)

 

 

 

   18, 19세기 소설가들의 소설 구성 방식이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 때와는 다른 책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해도 결국 말하고 듣고 쓰고 읽어야 하는 문제인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하다. 이 책에서는 누구는 발음이 좋았고 누구는 독해가 좋았고 누구는 작문이 좋았다고 구분했다. 작가로 보자면 간결한 문체를 가진 최초의 거장 서머싯 몸 같은 작가도 있고 단어를 아끼고 압축된 글을 쓴 헤밍웨이도 있고 반대로 복잡하고 장황한 글의 포크너도 있다. 이들 중 누가 정답이고 그것이 정답이라고 한들 어느 한가지의 답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들의 재능이나 매력은 곧 결함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치명적 단점이 그 작가의 개성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장들은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무슨 공식처럼 그들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똑같이 나도 중요하리라는 법은 없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달린 로렌스도 똑같은 소재로 다섯 번 이상 다른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발전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정보를 꼭꼭 숨겨두는 미스터리 기법을 활용하라.

-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기대하는 데에서 나아가 근심하고 걱정하도록 만들어라. 위험에 처한 인물의 사건 
  해결이 고의적으로 지연되게 하라.

- 복수하는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도록 독자에게 위험을 환기시키고 반복을 통해 불안을 지속시켜라.

- 연애와 사랑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첫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 중요한 정보는 반복한다.

- 배경이 되는 장소에서 인물의 심리상태를 설명하는 통합적 기교는 서사를 풍부하게 한다.

- 전조를 소설 곳곳에 12개 정도 흘려 놓는다.
 
(12개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생각보다 많다고 느낀다. 독자가 기억하는 건 모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일까...)

- 고요함과 격렬함의 교차, 빠른 행동과 느린 설명의 교차, 보폭의 변화로 완급을 조절하라.

- 미래에 벌어질 사건을 광고하고 약속하라

- 뜻밖의 사건에는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개연성을 확보하라.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는 불친절한 소설이 많아졌다.)

- 만약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면 주인공의 로맨스로 보편성을 확보하라.

- 소설과 독자 간의 심리적 거리를 단계적으로 좁혀라. 명예롭던 캐릭터가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하락할 때 중간
  과정을 충분히 겪도록 하라.

 

 

 

 

5. 결말

 

 

 

   의심 없이 결말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한다. 어떤 소설을 기억할 때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 소설은 나중에도 결국 희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분명하게 기억되는 결말이 많지 않았다...) 흥미로왔던 건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의 절정과 결말을 정해놓지 않고 소설을 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등장인물의 망령’이라고도 하는데 흔히들 인물이 소설 속에서 발이 달린 말처럼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고 줄거리를 구성해 나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비록 처음이었지만 나 역시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결말이 결정지어졌기 때문에 이 역시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물론 확실한 결말을 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이 더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단편의 경우 더욱 결말을 결말짓는 작업이 힘들다는 생각이다. 결말을 구상할 때 고려해야 할 사실 중에 독자는 결말에서 놀라움과 발견을 즐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야기 마지막 순간에는 대체로 관대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겉멋을 부린다든지 갑자기 시를 차용한다든지 해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 무엇보다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다듬기 위해 작가가 사용해야 할 무기의 하나라는 것이다.

 

 


- 울림이 있는 결말은 주제를 반복하거나 다시 환기시킨다.

- 기분 좋은 울림을 주기 원한다면 ‘그러나’보다 ‘그리고’로 마무리 하는 게 낫다.

   (바꿔 생각하면 ‘그러나’는 비극이나 불쾌한 결말이 아닐까...)

- 결말에서 서로 다른 가치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

- 앞선 이야기에서 미묘한 암시를 흘려 결말을 예고하라.

 

 

 

 

6. 인물

 

 

 

   책에선 어떤 작가건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든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인물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인물은 소설의 핵심이고 작법에 있어 메인이다. 가장 예문과 구체적인 팁들이 많아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 등장인물에는 약점과 결함을 부여하여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도록 하라.

- 등장인물끼리 서로 궁금하도록 만들어라

- 지나치게 인물을 완벽하게 묘사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척점 상에 놓인 상대적 인물을 그려라

- 등장인물이 자신의 세계에 눈을 뜨는 시점, ‘깨달음의 순간’이 일어나는 지점, 즉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에 정성을 들여라

- 등장인물의 정서적 상태를 드러낼 때에는 감정이 실린 언어를 사용하라.

- 특정인물에 대한 명쾌한 단정보다는 모호한 암시로 관심을 이끌어라.

- 반그림자 접근법이 제공하는 불확실성이 역설적으로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든다. 오해가 충격적 이해로 바뀌
  기 때문이다. 특히 악당은 불확실한 묘사로 더욱 악의가 강렬해진다.
- 단짝 캐릭터를 사용하면 중심인물이 한명 일 때보다 더 심리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 주제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으로 인물을 밀어 넣고 그 결정이 인물의 인생을 바꿔놓도록 하라.

- 슈퍼 히어로, 괴물(악당), 남성 속에 자리잡은 여성성(amima), 조력자(helper)등 전형을 잘 사용하라.

 

 

 

 

7. 세부사항(묘사, 배경, 화법)

 

 

 

   작법에 있어 디테일한 원칙들은 작가의 취향과 작품의 성격과 관계한다.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며 제시했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쉬웠으나 그 작품이 아닌 경우엔 예외적 상황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세부사항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 묘사 > 

 

- 장면전환의 대가는 도스토예프스끼이다. 한 인물의 마음에서 다른 인물의 마음으로 이동하면 장면전환을 입체
  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

- 장소의 빠른 전환과 더불어 정서적 요소를 추가하라.

- 강렬한 감정에 휘둘리는 인물의 외모와 심리상태를 극적으로 묘사하라.

- 등장인물에 매력적인 이름을 짓는다.

- 인물의 지배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하라

- 오감을 자극하고 쾌락을 상상하도록 하여 대리만족 하게 하라.

- 고급음식, 고급차, 고급술, 고급 옷을 자세하게 묘사하라.

- 사치스러움, 상류사회의 삶, 신체의 안락함과 관련된 세부묘사에 공을 들여라

- 인물의 외모를 묘사할 때 풍자를 섞어서 핵심만 짧게 묘사하라.

 

 

< 상징 및 배경 >

 

- 공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 문학적 색깔이 강화된다.

-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먹는 음식으로 신분을 암시하라.

- 더 깊이 있는 소설을 구성하려면 이야기가 진행 중인 상황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포크너는 입체적인 배경의 대가였다.

- 설득력 있는 소설의 배경은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전쟁이나 사건 배경에 대한 느낌과 감상
  을 대화 속에 삽입하라.

-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시각적 생각을 발전시키라.

- 낯선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 화법(관점) >

 

 

- 정신적 혼란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먼 과거, 가까운 과거, 현재의 시점을 섞어서 다중시간대를 서술하면 생각
  이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 주인공을 억압하는 의식의 흐름은 꿈을 통해서도 보여주어라

- 1인칭 화자의 경우엔 자신의 병약함을 인정하는 서술을 하라.

- 주인공과 멀고 객관적인 곳에서 가깝고 개인적인 곳으로 접근하라.

- 아무 이유 없이 농담을 하지 말고 진지한 유머로 웃음을 유발하라

- 등장인물의 머리와 마음속에 떠오를 법한 단어나 구절을 찾고 빌려서 말하라. 등장인물이 하는 말과 생각을 비
  롯해 마음속의 느낌까지 전달하는 자유간접화법을 구사하라.

- 수치, 분노, 불안, 추락, 동요, 모욕과 같은 주인공의 감정을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밖으로 꺼내어 보여라

- 인물의 마음속 의식의 흐름과 감정을 폭로하라.

- 주인공을 부드럽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라. 그 옆에 바짝 붙어서 고통을 낱낱이 
  파헤쳐 전달하라.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대부분 은둔하며 글을 썼다.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썼다. 포크너 같은 작가는 독자를 잊어버리고 오직 작가 자신을 위해 글을 썼을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라 주장한다. 미리부터 독자의 반응이나 평가에 대한 걱정으로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주저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독자를 무시하는 작가도 있고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다. 나는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게 될까... 내일은 처음으로 내가 쓴 소설을 평가 받는 날이다. (완성은 아니고 도입부 100매지만 이렇게 떨릴 수가...) 가능성과 용기만으로 글이 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사실 어떠한 비판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자 이런 책을 다시 펼쳐들고 악착같이 정리까지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라고 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뒤돌아 말하고 싶어 이렇게 다독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다시 시작하게 될 때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읽고 나면 더 야무진 마음이 생길지... 부디 포기만 하지 말기를 남몰래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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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2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거 오래 전에 읽으신 줄 아는데 리뷰는 이제 썼군요.
이책 나름 유익하고 재밌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다 읽지를 못했어요.ㅠ
좋긴한데 리뷰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리를 아주 잘 하셨습니다.^^

굿바이 2011-12-2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하는데, 이 글 몇 번을 읽어도 신나서...늦었습니다 ㅜㅜ (저녁으로 약속을 옮겼어요)
소설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간 조금 읽어 본 한사람님의 글로 감히 짐작하면
미셀 트루니에,같은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그저 느낌입니다 :) 싫어하는 작가라면 죄송해요~
그나저나 꼼꼼하게 정리하신 내용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은 포기하기 잘했다 싶습니다. 잘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 어찌나 즐거운지요 orz

2011-12-24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1-12-26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이 모범이 되는 그 두려움이라니요. 울림이 꽤 크네요. ㅠ
포기만 말자는 다짐이 한단계의 심사통과로 돌아와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잘은 몰라서 도대체 몇단계를 거쳐야 최종통과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축하드려요. 흐흐.
 

 

 

 

 

 

 

#1. 익명의 해답


 

 

   이런 생각을 했다. 연애는 서른이 되면 시들해지고 그러다 마흔이 되면 추억이 곧 사랑일 것이고 어느덧 오십이 되면 연애도 사랑도 추억도 사라져 그리움만 남게 되는 것. 어렸을 때 나는 대충 나이 먹는다는 걸 열정의 소멸로 인식했던 것 같다. 스무 살 땐 도저히 마흔을 상상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나는 마흔을 넘겨버렸고 다시 내 나이 육십을 떠올리기 힘들어 한다. 육십이 되어도 똑같이 그보다 더 늙어진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질까. 생각해보니 나는 얼추 서른 살까지는 연도별로 일어난 일과 내가 겪은 일들을 아주 세세히 기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명석한 기억의 두뇌는 결혼과 출산, 육아, 기타 삶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급격히 퇴락의 길을 따랐고 이제 머리를 한번 감으면 방바닥에 머리가 한 움큼 쥐어지는 딱 그만큼씩 한해마다 세포가 죽어 감을 실감한다. 최근이라고 생각하는 시점은 대개 한 계절 전이고 얼마 전은 일이년, 좀 되었다 싶으면 삼년에서 오년, 손으로 햇수를 따져본다 싶으면 칠팔 년, 옛날이야기라 시작해보면 거뜬히 십년 전... 내가 어렸을 때 TV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를 보았을 땐 삼십 여년이라는 세월은 너무나 멀고 긴 시간이었는데... 이제 나는 삼십 년 전의 나를 삼년 전의 나보다 더 자세히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올해 느낀 깨달음을 정리하게 되는 건 이 깨달음이 언젠가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내 인생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올해 알라딘에서 무엇을 이루었을까. 대단한 것을 이루고자 서재를 운영해 오진 않았지만 반복되는 서재활동에서 분명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존재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떠올리니 결국 잃은 것도 얻은 것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곳이 좋아서 이곳에 일상을 의지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이 상해 다시는 안 본다 다짐하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서재를 기웃거리게 되는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곳의 익명성이 편하고 부담이 없어서였지만 내가 가장 괴로워했던 것 역시 익명의 이중성이었다. 익명이 변주하는 이중주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고 나 역시도 행사의 주체가 되어 본적 있는 이곳의 본성이자 거부할 수 없는 본연이었다. 다른 곳을 활발히 하지 않고 이곳에서 얻은 댓가란 바로 그 익명성을 대처하는 나름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연예인을 예로 들면 우리는 많은 사랑을 주고 대단하다 칭했던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구설수에 휘말릴 경우 여과 없이 솔직한 의견을 실시간으로 비판하는 창구가 마련된 세상에 살고 있다. 앞뒤 따져 보지 않고 전후 상황을 모두 들어보지 않고 드러난 현상과 몇 가지 공개된 사안만으로 호불호를 표명하고 신랄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떠들 수 있다. 그것을 의식한 누군가는 비난의 대상 편에 서서 유려한 논리를 펴기도 하고 당사자는 그걸 못 견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거나 성급히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외치곤 한다. 마지막에 가서 그들 모두를 다 이해한다는 누군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만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그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임무가 아니겠느냐 충고하고 그 모든 걸 다 지켜본 또 다른 누군가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조롱하거나 자신을 포함해 모두 다 웃기는 사람들이라며 시대의 우울증과 편집증에 대해 쓸쓸한 냉소를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앞서 벌어진 상황은 거짓말처럼 잊혀지고 새로운 상황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똑같은 패턴의 시나리오는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된다. 어떤 익명은 열렬한 공감을 또 어떤 익명은 마땅한 손가락질을, 또 다른 익명의 친구는 냉소를 그 친구의 모르는 이웃은 연민을...

 

 

 

 

#2. 익명의 대가

 

 

 

   알라딘 서재라고 다를 것이 없었던 지난, 일 년이었다. 이곳은 다른 온라인 서점과 달리 공개게시판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의도와는 다르게 얼마든지 집단축하의 분위기도 마녀사냥의 분위기도 만들 수도 있고 정치 관련 여론을 형성할 수도 있고 특정인에 대한 음해 및 명예훼손도 가능하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글을 쓰진 않았더라도 충분히 이해받기보다는 뜻밖의 오해를 받기가 더 쉬운 경향이 분명히 있다. 익명은...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 나를 포함한 이곳 여성 알라디너에게 무차별적으로 특정인을 비방하는 댓글이 달린 적이 있었다. 처음엔 황당하고 기가 막혀 그리고 가슴이 떨려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웃과 교류가 별로 없는 나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중에 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똑같은 메시지가 타전 된 것을 보고 그 사람의 계획을 대충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알라딘 서재를 이용하는 분일 것이며 그 특정인으로부터 직접, 간접적으로 어떠한 피해를 받았거나 혹은 목격했거나 그도 아니면 확실한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들었는데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자 댓글의 내용은 또 다른 알라디너와 출판사를 언급하며 자신이 쌩쑈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정중하게 방법이 의도를 넘지 못하고 있음을 답하며 이런 식의 방법은 결국 당신에게만 상처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말로 억울하거나 세상에 알려야 할 일이라 생각되면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게 어떻겠냐는 어줍 짢은 충고와 함께. 사람들은 사건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이슈 자체에만 관음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므로 당신의 방법은 생각만큼 효과가 없다는 말도 함께... 물론, 내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잠시 후 그는 자신의 댓글을 지우고 서재에서도 사라졌다. 그렇게 쉽게 사라지고 말 것을 잠시라도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까 싶어 나는, 갑자기 그 사라진 익명이 서글펐더랬다. 태연히 지우고 사라지고 나면 당신이 한 일이, 당신이 쓴 글이, 당신을 느껴버린 내 기억이 없어지는 일일까... 그것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 일일 터인데... 아마도 나는 잊어버려도 그래야만 했던 당신은 죽어도 잊지 못할 추한 실수가 될텐데...

 

 

   그랬다. 나는 올 한해 이곳에서, 혹은 알라딘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러 번 익명의 공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ㅠ) 이번 일처럼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나를 타겟으로 삼은 적은 물론이고 나를 지켜본 누군가가 때가 되면 여러 방법으로 교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동일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도무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한때는 그 익명을 추적해 모아진 단서들로 대충 내 나름대로 집히는 사람을 분석해보기도 했다. 그들 중에 어떤 익명은 소름끼치게도 나를 알고 내 글을 읽었고 심지어는 나를 대단하다고까지 칭찬한 사람이라는 것도 어슴푸레 알게 된 적도 있었다. 그 아는 익명아닌 익명이 왜 그러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돌아앉아 그 사람이 잘되기를 먼 훗날이라도 나보다 훨씬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각종 리뷰대회에 발길을 끊은 다음부터 나는 익명의 비난에서 자유로와 질 수가...있었다. 그 익명이 이쪽에서 상탄 글을 또 다른 저쪽에 접수하여 뭐라도 어떻게 떡밥을 챙겨먹는다는 식의 또 다른 익명의 빈번한 고자질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다. 내가 떡밥을 받아먹는 양과 횟수가 줄어들수록 익명의 공격도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것에 마음 둘 일을 자동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댓글에 대한 상처들은 쉽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내 이웃 분들의 서재에 가서도 댓글을 잘 남기지 않는 편인데 변명을 하자면... 가까워 지면 반드시 멀어지기 때문이라...말씀 드리고 싶다. 온라인에서 좋은 글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한 적이 많았다. 그런 글에는 뭐라도 살짝 한줌 남기고 오고 싶었지만 세 개 할 거 하나만 하고 오늘 할 거 내일로 미루는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다. 남겨진 내 댓글을 좇아가며 저장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것들도 공격으로 치환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떤 분은 온라인에서 소통하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혼자서 우아한 척 글을 올리는 것은 커뮤니티에서 왕따가 되는 길이라고 유머스럽게 충고도 해주셨는데 그래서... 자주 가는 분에게 글도 남기고 하다가 또 여지없이 익명을 불러 들인 꼴이 되길래 그것 마저도 접었다. 소싯적에 토론이나 논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승리감에 도취된 적이 왜 없었겠는가. 남을 아프게 하는 말은 부메랑처럼 반드시 내게 돌아온다. 갑자기 발길을 끊은 것처럼 보여서 오해할까봐 뭐라도 글을 남겨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도 내 경우에 절실한 것이지 보는 입장에선 웃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책을 보내주겠다는 고마운 분들의 성의에도 인사만하고 끝내 허락을 해드리지 못한 적도 있었다. (죄송했다) 모두가... 그러다가 다시 멀어질 것이 두려웠노라 그런 후에 감당해야 할 내 쓸쓸함이 사무치게 싫었노라 고백한다.

 

 

 

#3. 익명으로의 치유

 

 

 

 

   소설집을 공부하다가 바로 어제 천운영의 ‘알리의 줄넘기’라는 단편을 읽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소설을 읽었다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공교롭게도 각종 포털에선 ‘알리 나영이’가 검색어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영화적인 독서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빈번한 사람에 속하는데 그래서 아마도 그에 대한 내 상념을 글로 남길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나, 이런 거창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어제 보니 알리는 자신이 성폭행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직접 가사를 쓰면서 피해자가 느끼는 진심이 세상에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고 알려졌다. 기자회견을 보면서 느낀 건 알리가 무엇보다 자신의 신중치 못한 실수로 앞으로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를 극심하게 두려워 하는 것으로 보였다. 알리는 용서도 용서지만 제발 노래를 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알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댓글들로부터 무엇을 예감한 것일까... 그동안의 숱한 사례들을 보면서 자신이 유일하게 세상에 떠들 수 있는 노래라는 희망이 사라질 순간을 상상하진 않았을까. 노래하지 못하게 되는 공포심은 여자로서 밝히기 수치스러운 사실을 공개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을 종용한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유명인이 실수하면 그가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라는 식의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해주고 당신을 응원해 왔는데 이렇게 배신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과 같은 사랑은 추호도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서슴치 않고 한다는 것이다. 대중이라는 익명은 무언과 침묵으로 연예인의 유배를 도모하고 그를 기꺼이 은둔이라는 감옥으로 보내 버리는데 익숙하다. 만약 알리가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자신의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말했더라면... 백지영, 오현경, 이승연, 이경실, 이영자, 최진실, 정선희... 9시 뉴스에 등장한 숱한 여자 연예인,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명예를 회복 하는 데는 십년이상이 걸리거나 혹은 영원히 기회가 없어진 사실을 알리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다음 사건에 참고가 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영리한 방송과 그에 타협하는 연예인 다수는 미리부터 자신의 가족사나, 과거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 사업이 망한 이야기,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키워준 할머니, 투병중인 가족, 학창시절의 방황, 연습생시절 굴욕 같은 사연을 내보이며 눈물로 호소한다. 대중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상처를 구경하며 그들의 에피소드와 거래를 하는 것과 같다. 남의 상처를 구경하는 것만큼 내 상처에 위로가 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알리와 포먼은 여전히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혈전이라기보다는 포먼의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알리는 그 멋진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 날리지 못하고 로프에만 기댄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거대한 체구의 포먼은 해머펀치를 날렸다. 나는 어서 시간이 흘러 알리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알리의 위대한 승리를 세상에 알리기만을 바랐다. 나는 링밖에 서서 끊임없이 알리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알리는 로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리의 상체가 로프 밖으로 젖혀지며 고개가 꺾였다. 그 순간 알리의 몸을 버티고 있던 로프가 늘어지면서 알리의 몸뚱이를 감기 시작했다. 알리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 줄에 둘둘 말린 알리는 꼭 나방고치 같았다. 나는 링 밖에 서서 계속해서 알리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 일어나. 알리, 어서 나비처럼 춤을 춰야지, 알리

 

 

-90p, <알리의 줄넘기> 中에서 /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다시 소설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운영의 소설 <알리의 줄넘기>의 주인공 이름은, 김알리이다. (가수 알리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셨는지는 알수 없으나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리고 예명을 알리라 한것이라 들었다) 혼혈인 아버지가 평생 권투선수의 스파링 파트너였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알리라 이름짓기를 원했다. 혼혈 아버지에게서 다시 혼혈로 태어난 알리는 또래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받으며 치매 할머니와 살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열세 살 소녀이다. 사라진 아버지가 ‘유머 있는 알리가 될 순 없어도 슬퍼하는 알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 하셨기에 슬퍼하는 것을 패배로 알고 살아가는 기특한 친구이다. 그러니 알리가 연습하는 줄넘기는 세상이라는 링 안에서 인생이라는 싸움을 준비하는 자기만의 시간인 것이다. 누구나 타고난 콤플렉스와 살면서 자라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투자한다. 나는 알리를 알기 전에도 알리 노래를 잘 알지 못했고 그녀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낌 대중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 이번 사건으로 그녀를 위로하며 응원 한다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알리를 통해 알리의 모습에서 알리로 반응하는 익명의 본성을 엿보았다 말하고 싶다. 그 익명이 당신이고 나였다고 그래서 우리를 보았다고 자백하고 싶다. 소설에서 알리는 혼자서만 연습해온 아버지와 달리 줄넘기를 같이 할 누군가를 찾아서 줄넘기를 사러가는 것으로 마지막을 인사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철저히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독단적인 과정이지만 글을 올리고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같이 진심을 나누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그 어떠한 기가 막힌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알리를 보면서 조그만 실수나 배려치 못한 행동, 또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 글 등으로 이곳 서재에서도 얼마든지 알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이곳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익명의 부메랑은 내가 무심코 날렸던 만큼 나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익명이 나쁘다 비난하는 것도 사실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 속에 속한 적 있었던 나 역시 크게 다를 것 없는 대중이었고 다른 이의 익명에 불과했다는 자각.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보수신문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생각모자란 네티즌의 악행을 비난하고 무언가를 가르치려 든다. 내 생각에 익명을 치유하는 방법은 역시 같은 위치의 익명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익명의 손길로 내가 위로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상처받는 누군가에게 말없는 위로의 익명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익명이었던 나를 치유하고 나아가 내게 위로받은 익명을 치유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글쎄, 나는 당신과 나의 이 질기고도 서러운 모두의 익명을 견디는 것이 서재를 아프지 않게, 그리고 조금은 편하고 어떨땐 유쾌하게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알리가 하는 줄넘기를 내 나름의 글쓰기로 슬쩍 바꿔버리고 싶다. 참 추운 날이다. 나를 아는 익명의 이웃 누군가가 동네에서 혼자 줄넘기 하는 광경을 혹시 보시거든 내가 넘고 있는 줄넘기에 더블 더치할 누군가의 우리를 기다려 보고 있는 중이라 받아들이시라. 이 추운 날 거기 혼자서 뭐하는 짓이야 하지 않고 그렇게 뛰면 뭐가 좋으냐 따져 묻지 않고 나도 같이 뛰어 보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더라는 그래서 말없이 눈으로 만으로도 웃어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믿어주시라. 내게 그런 익명의 이웃은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오늘은 그분들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드리고 싶다고 고백한다. 부족하지만, 그것이 올 일 년 이곳에서 깨달은 마음이라고 살짜기 속삭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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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1-12-17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도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하소서..

한사람 2011-12-18 09:13   좋아요 0 | URL

하하, 된장님도 맘편한 일요일 되세요^^
같이 줄넘기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ㅋㅋ

stella.K 2011-12-18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생각에 동감은 해요.
저도 이상하게 예전에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멀어지더라구요.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결국 한계더라구요.
서로가 글로 통하는 사이니 그 사람이 어떤 패턴으로 글을 쓰고, 말하고, 사고하는지
어느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조금씩 댓글을 안 달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봤자 이전의 사람들처럼 될테니 관심이 없는 거죠.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는 사람과 교류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도 넓은 의미에서 순환이라고 보는 게 마음 편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 사귄 친구도 나이 먹어서까지 친구로 남는 경우 별로 없잖아요.
나만 그런가?ㅋ
익명을 견디시겠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저는 만나고 있는 동안은 뜨겁게 만나자는 쪽이예요.
그러다 안 만나게 되더라도 아쉬움은 갖지 않으려구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언제까지 한사람님과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날이 오게되더라도 섭섭해 마시길.
댓글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우.ㅋ

한사람 2011-12-19 08:57   좋아요 0 | URL

저는 어느 정도 친해지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는데..언제나 그 다음이 어려운 것 같아요 ㅠ
이걸 예로 들어서 될지 모르겠는데요.. 오프라인에서도 동네 이웃과 친해지는 과정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걸 느낄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같은 관심사로 시작된 친분이 점점 서로의 일상으로 파고 들어오다가 사소한 오해로(아무래도 가까우면 모두 이해보다는 뜻밖의 오해도 발생 ㅋ)맘이 상하게 되는 것. 그런데 오프는 얼굴보며 풀릴 기회가 있는 반면 온라인은 그냥 그 기회를 서로 방치하고 미루고 그러다가..
멀어지는 것...

말로 빚어지는 상처보다 글로 유발되는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가더라는 것..

저는 이것이 여러번 되다 보니 좋은 마음 생기는 이웃분들에겐 더 다가가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되더군요 ㅠ
넓은 의미에서 인간관계의 순환이라는 말씀 참 고맙고 와닿네요.
댓글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하
찔립니다 ㅋㅋㅋ


비로그인 2011-12-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낀 것은 요, 한사람님. 그 사람도 상처 받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처받고 여기와서 하소연 한거겠죠? 그게 2년전의 일이라더군요. 상처가 깊었겠죠. 그러니 이제와서 그러는거 아니겠어요? 혹시 우리가 같은 사람의 케이스를 말한다면 말이죠. 남한테 상처를 주는 일을 한사람은 어쨌든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익명이라 서로 편하게 만나서 쿨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허다해서요. 그런것에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것을 시크하게 대처하지 못한. 그러니 어느 한쪽만 머라 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그냥..생각입니다.

한사람 2011-12-19 09:02   좋아요 0 | URL

예..저도 첫날에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곰곰 생각해보고 이틀째부터는 넋두리, 하소연같은 느낌도 많이 들더군요. 없는 일을 시간 낭비하며 지어내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할 사연은 있었겠지...싶었어요.
상처라는게 받을땐 같은 방식이더라도 나중에 자기 속을 거쳐 표출되는 방식은 여러가지니까요.
비슷한 예가 될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악성 댓글로 남을 비난하는 쪽도 아마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요.

파랑새님이 오늘은 어부..신거여요? ㅋㅋ

2011-12-19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0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2-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킹피셔가 새이름입니다. ^^

한사람 2011-12-20 08:52   좋아요 0 | URL

예, 킹피셔를 찾아봤네요 ㅋㅋ

비로그인 2011-12-2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왜 이렇게 좋을까요? 처음 서재 브리핑에 이 글이 올라왔을 때, 너무 길어서 넘어갔는데(죄송 ㅎㅎ) 지금 천천히 읽으려니 마음에 팍 다가오네요. 그리고 저의 서재 활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사실 저는 익명성이나 알라딘 서재 활동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거든요. 아직 오래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진중하게 생각하시는 한사람님을 보니 저도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내년에도 좋은 글 부탁드려요, 한사람님 :)

한사람 2011-12-20 14:22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저 여기 있어요~
어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날이었어요. 글을 잘쓰고 어떻고를 떠나 그냥 좋은 글이라는 말씀이 어떤 건지 알아요. 그런 마음이 수다쟁이님에게도 조금은 통한 것 같아 졸다가 다시 번쩍 뜨이네요 ㅋㅋ

진중한 생각...히히..언제나 생각이 지나쳐서 탈이죠^^
알라딘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1-12-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놀러와요, 한사람님. 제 서재에ㅋㅋㅋㅋㅋ
아, 저는 정말 분위기 파악이.. 안되는 사람인가 봐요.orz
 

 

 

 

 

 

#1. 나, 울지 않아요.

 

 

 

   "제가, 요리를 좀 하거든요.."

   3년 전 초여름 어느 주말, 친척언니 집에 초대를 받았다. 나이는 오십이 조금 넘었으니 큰 언니벌에 해당하고 엄마와 같은 수영장에 다니셨고 수영이 끝나면 같은 사우나에서 한사코 싫다하는 엄마의 등을 밀어주었단다. 엄마는 나를 늦게 낳으시는 바람에 외가의 조카들을 많이 키우셨는데 그러니까 이 언니는 엄마의 외조카의 부인으로서 나에게는 외삼촌의 셋째 아들의 부인, 즉 내 외사촌 오빠의 아내, 새언니에 해당되는 다시 말해 그다지 가까운 친척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오빠와 함께 여의도에서 고깃집을 오래 운영해 왔다.

   “아가씨,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우리 언니라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우리 언니는 형부가 일찍 가셨는데요... 형부가
   시고 얼마 있다가 급성 백혈병으로 한 달 만에 갔어요... 그 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서, 사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
   요. 언니 가고 10년이 흘렀는데요... 정말로 하루하루를 이를 악물고 살았어요... 언니 몫까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저도 이거
   밖에는 안 되었어요.”

    울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새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서론도 없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셨다. 

   “누구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한들 나만큼도 아니고, 이사람에게 이야기 하면 저 사람이 걸리고 저 사람에게 말하자니
   이 사람에게 미안하고 결국은 나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거구나... 그렇더라구요.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잠도 안 오고 밥도 먹을 수 없고 이 순간 내가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겪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 때, 세상은 결국 더 많이 가진 자의 것이구나 싶을 때, 저는요 계속해서 내 이름 석 자만 소리
   내어 불렀어요.”

   그날은 엄마의 사십구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우는 것도 어지간히 지쳤을 법 한데 나는 언니의 입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계셔 보세요.”

   언니는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고 음식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나를 위해 갖가지 찬을 마련해 상을 차려 주셨지만 나는 목이 메어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효자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더니 지나간 청승은 잘도 짝이 맞아 때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바깥 풍경은 꼭 엄마를 잃은 나를 알아봐주는 것만 같아 서럽기까지 했다. 나는 ‘아가씨 전복죽 해드릴께요, 드시고 가세요’ 하는 손을 뿌리치며 ‘이제 가봐야죠, 쉬셔야죠’ 하며 나오려는데 아직 멀었다는 언니는 자꾸 ‘잠깐만요, 잠깐만요’하며 한 시간을 넘게 음식을 싸주셨다.

    “이건 그대로 이렇게 섞어서 밥에 넣으면 되요. 흑미랑 검은콩이랑, 제가 다 다듬어  놓은 밤이랑, 그리고 이건 말린 표고버섯, 이
   건 제가 만든 딸기잼, 이건 잠 안 올 때 한잔 씩 드시라고 복분자술.. 그리고 이건 우거지랑 다시마, 멸치가루를 섞어 놓은 건데 한
   개 씩 냉동시킨 거니까 그냥 물에 끓이면 되요.. 이건 고모님이 우리 손주는 냉동 곶감 좋아한다 하셔서 제가 진공포장 해놓았어
   요..그리고 이건 갓김치, 이건 며칠 전 담아놓은 열무김치여요...”
   “잠시만요, 아가씨, 이건 우리 친정아버님이 그린 그림인데..이것도 가져가세요..장미그림 인데... 아가씨와 잘 어울려요.. 담 주에
   도 꼭 오세요... 이제, 울지 마요..아가씨.."

   두 손 가득 그림과 음식을 싸가지고 가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게 차려준 진수성찬과도 같은 밥상이 선해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선물로 기억된다. 실감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날 엄마가 해주신 음식 말고도 맛있는 반찬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들을 내가 맛나게 먹고서 한참이나 배가 불렀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다.

 

 

#2. 우리, 밥 같이 먹어요.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보면 주인공인 윤과 명서, 미루 세 사람이 윤의 옥탑방에 모여 아욱국과 깻잎김치를 서로의 밥에 얹어주며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윤은 처음으로 그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알리고 미루는 그 말을 듣고 깻잎을 떼어 밥숟가락에 얹어준다. 깻잎은 바로 작가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면서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라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엄마가 없는 빈자리에서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반찬을 권하며 엄마의 죽음을 말하는 윤의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고 싶었고 엄마만큼은 아니겠지만 향이 진한 깻잎을 담아 그녀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그런 마음이 생기자 바로 책을 덮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울고 말았다. 바보같이 나 역시 딱 한번만 어머니가 해주시는 찌개와 깻잎, 나물들을 먹어 볼 수 있다면...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이마트 주차장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제 할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대성통곡을 한 날, 그때도 나는 아이를 달래느라 아이의 현실적인 절망에 아이만큼 공감하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는 엄마가 간절히 그리워서가 아니라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을 못 먹게 된 것이 그렇게 절망스럽고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그리운 심정을 뼛속깊이 알고 있기에 그들이 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을때 마치 내가 밥상을 받은 것처럼 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신경숙은 누군가에게 손수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고 소중히 대접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치유의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녀가 차려 놓은 각종 소설속의 밥상에 매번 울고 또 항상 위로를 받는 것 같다.

 

 

 

#3. 당신, 손을 잡아요.

 

 

 

 

   이 책 <모르는 여인들>을 덮고 나니 삼년 전 내게 밥상을 차려준 새언니와 작년에 나를 울린 윤과 미루, 그리고 살면서 나와 같이 식사를 한 모든 사람들이 벅차게 다가온다. 이 마음이 약간 뻐근하기까지 한 이유는 내가 좀 신경숙의 작품으로부터 청승을 그만 떨어야지, 하는 쓸데없는 다짐 같은 게 있어서 였나 싶다. 더 이상 애도하거나 위로받고 싶지 않은 독자로서의 이상한 자존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누구보다 우리들의 서럽고 누추한 마음 깊은 한 구석을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논리로 이해하고 옳다고 동의하고 속상하다 슬퍼했다손 치더라도 어딘가 남아있는 불신과 서운함, 쓸쓸함, 먹먹함, 이런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여진 분해되지 않는 쓰레기 창고 같은 마음 그곳을 정확하게 두드리기 때문은 아닐까.

 

 

 

7편이 모두 나의 맨발이고 나의 맨손, 나의 맨몸을 향하는 듯하다. 그 벌거벗은 내 초라한 몸뚱아리에 무언가 엄마의 손길 같은 삶의 보자기 하나를 덧씌워주는 듯하다. 신경숙의 소설은 우리들 각자가 드러내고 싶지 않는 서러운 누추함을 지나치지 않고 따스한 체온으로 감싸주는 고마운 담요와도 같다. 거리의 노숙자는 신문지 한 장으로도 겨울밤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마음이 춥고 가슴이 시려워 도저히 내일이라는 아침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내 살 같은 온기를 선사한다. 달리 거창하게 빗댈 것 없이 소설의 힘이고 신경숙의 힘인 것 같다. 하필 한 해를 정리하고 모두가 따스한 온기로 서로가 살아온 한 해를 격려해야 할 이때 분노와 상처로 눈물 흘리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부디 권한다. 살면서 먹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도 닥쳐온다. 그렇게 야속하게 눈 내리는 길바닥에 스스로 버림을 당하는 날이 내게만 오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지금 이 찬 겨울 어디에서, 왜, 얼마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소설을 믿고 그녀를 믿고 우리의 연결을 믿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내민 손을 잡아 보았기에, 감히 전해드린다. 당신도 곧 따스해 질 것이라고. 얼굴도 이름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르는 당신이지만 나처럼 다시 웃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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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12-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는 믿지 않으나 크리스트교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만 준다, 라는 말을 한다고 들었었습니다. 저야 가치판단을 하기가 힘들지만,(종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터라)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그토록 한 사람에게 가혹하다면 가혹하게 보일 것만 같은 시련을 안겨주는 이유는 주위 사람들과의 따뜻한 식사 한 끼들을 모두 포함시켜서 그런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이 페이퍼를 보면서 해봅니다.

오랜만입니다ㅎ 겨울이 깊어가는데 말이지요.. 요즘은 거의 알라딘을 (밀려든 숙제 하듯이ㅜㅜ) 리뷰쓸때나 들어오니깐... 아, 물론 신간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좀 힘이 빠진 건 사실이네요, 풋.

한사람 2011-12-15 09:1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가연님^^

공지영의 소설에 보면 왜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만 그러한 모진 시련이 닥치는지 하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가 착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써있더군요..

개인의 운명과 그 운명의 다양함에 대해 진지한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소설이라면,
신경숙의 소설은 늘 훼손된 운명이지만 그것도 운명이라 생각하는 시간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힘이 빠진건, 제 나름대로 생각해보아도 되겠죠?? ㅋㅋ


mira 2011-12-1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빠담빠담" 드라마에서 정우성이 간암에 걸려서 한대사중 " 왜나야 왜나냐구" 에서 옆에서 김범이 " 왜 형이면 안돼 , 그럼 평생 매맞고 산 엄마였으면 좋겠어 아님 이혼하고 힘들어 하면서 죄수를 위해 봉사하는 교도관, 아님 나였으면 돼냐고 " 라는 대사가 있었요. 모든 일에서 우리는 항상 왜냐고? 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나쁜든, 착하든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일중에 하나인데 말이죠 저또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에게 시런이 닥치면 왜냐고 물을것 같아요.
엄마의 음식,손길,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느끼면서 신경숙님의 소설속에서 나오는 운명들이 서럽고 힘들지만 그래도 자꾸 읽게 되는것은 우리의 운명또한 그런 이야기들과 멀지 않음에 그분의 글로 위안을 받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잘읽고 갑니다.

한사람 2011-12-15 15:46   좋아요 0 | URL

예..저도 지난주에 빠담빠담을 보긴 했는데..
오며가며 보아서 아직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현실로 여겨지고 반대로
늘 변함없던 현실이 자꾸 낯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인데
그러고 보면 아무일 없이 평생 평범하게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특별케이스나
기적같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경숙의 소설은 어디서 무엇하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들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