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 - 남자와 함께하기로 결정한 당신에게
남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를 다시 생각해봐

 

 

 

   누군가 결혼은 택시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마침 잡아타려고 하는데 내 앞을 지나가다 운 좋게 걸리면 타게 되는 것이 택시이듯 결혼도 내가 지금 하려고 작정한 그 타이밍에 하필(?) 내 앞에 있던 남자와 하게 된다는 뜻. 즉 결혼은 서로 죽고 못 살아야만 이루어지는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고 죽고 못 살게 될 수도 있는 운명적 인연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다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할 줄 몰랐던 사람이라고 꼭 결혼을 안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만 해도 뜻하지 않은 사람과 전혀 뜻하지 않은 시기에 결혼을 했고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그러다 또 뜻밖의 남자를 만나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만들고 지금은 뜻과는 달리 헤어진 상태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여튼 나는 결혼도 이혼도 재혼도 모두 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인생에서 남자는 늘 뜻밖 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어쨌거나 남자는 나와 맞지 않는다, 정도가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고 이 책을 마주한 내 심경이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결혼하고 일 년 간을 가장 많이 싸우고 분노하며 상대를 이해해보려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그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나는 좀 더 남자에 대해 빨리 편해질 수 있었을까, 싶은 책이다. 아마도 그때라면 나 잘난 맛에 이런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2,30대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라, 는 식의 충고 혹은 위로형 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남자는 이렇게 길들여야 하고 사랑과 이별은 잘 해야 하고...하는 책들은 웃기다는 쪽이었다. 그건 독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땐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마디로 일과 성공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남녀간에 발생하는 성격차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제시하는 방법론적 서적들은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선 남자에 대한 분석이나 방안에 대한 신뢰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책과 같은 일반론 속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은 낭만이나 치기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책을 덮고 나니 내용의 주 타겟은 한창 그 남자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 때문에 정말 죽을 것 같은 여자이어야 할 듯하다. 도저히 내가 택한 이 남자와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시점의 여자이어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실상 그 시기엔 이런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프면 요리책 따윈 너무 멀거나 귀찮은 것이다. 나만해도 이제 남자에 대해서 알만큼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남자 분석 같은 건 필요치 않을 줄 알았는데 바로 이런 시점에 아무런 기대가 없기 때문에 외려 내 열린 마음에 이런 책이 무리 없이 안착하는 이상한 경우가 발생했다. 그냥 이 책이 끌렸다. 이젠 모두 이해하고 긍정하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인 내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난날 내 남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높았던 여자였을 뿐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그다지 새롭진 않다는 것인데 -사실 여자에게 남자처럼 진부한 소재가 어디있단 말인가 - 성실하고 논리적이고 치밀한 자세로 그 점을 편안하게(치밀하면서 편안하기 힘들다)보완했다. 느낌은 생각보다 괜찮다.

 

 

   지금 남자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내게 있어, 이 책의 느낌은 이렇다.

 

 

   평소에 여기저기서 잘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한번 원 없이(?) 다양하게(?) 써본 제품이라 그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데-그래서 다시는 구매의사가 없었던 차인데-그래도 한번 마음을 바꾸어 보라고 작정하고 설득을 하는 느낌. 제품의 피상적, 구체적, 추상적, 심리적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있는 전문가 한분이 콕콕 집어 올바른 사용법을 쉽게 가르쳐주는 느낌. 그동안 제품 사용에 있어 내가 이해할 수 없었거나 그냥 묻었거나 넘어가 버린 문제점들을 소상히 밝혀주는 느낌.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이 어필하듯 남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내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당신 생각이 원래 맞지만 더 현명하고 우월한(?) 당신이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는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는 남자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면 같이 가는 방법을 달리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와 잘 살고 있거나 이미 헤어졌다면 이 책은 필요치 않을까? 내 생각에 남자와 사는데 잘 살고 있는 여자는 없다고 보기에 어느 시기든 유용할 것이며 남자와 헤어졌더라도 그 시기를 돌이켜보며 조용한 회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듯 하다. 비록 지나갔지만 앞으로의 시행착오를 막는 의미에서도 이 책은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한 가지 남자에 해당하는 혹자들은 이 책이 여성이라는 우월적 위치에서 남자를 관찰하는 시각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시종일관 이 책에 의하면 남자들은 오로지 여자를 통해서야만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여자를 통해서만 성숙한 인간, 철든 남성이 된다. 여자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불안감을 관리할 수 있으며 ‘언제고 여자에게 길들여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남자라 말하기 때문이다. 아니라 반박하고 싶은 남자만 이 책을 들쳐 보면 된다.

 

 

남자는 진짜 남자가 목표라구

 

 

 

   우선 작가가 진단하는 병인은 남성성에 집착하는 남자病이다.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이유, 서열을 중요시 하는 이유, 게임이나 술 중독,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 폭력적이 되는 이유, 일찍 죽는 이유 등등 결국은 진짜 남자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라 말한다. 여자는 결코 ‘여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닌데, 남자는 진짜 남자가 되는 게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내가 가장 짜증나고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들의 태도중 하나는 누가 봐도 잘못한 일에 절대로 사과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대체로 아내가 조목조목 하나부터 열까지 지나온 경위를 밟아가며 잘못된 부분을 하나씩 짚으면서 결과적으로 당신이 잘못했다고 따져드는 순간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못견뎌한다. 아내 입장에선 미안하다 한마디면 될 것을 그 한마디를 하지 않는 서운함이 괘씸함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남자의 잘못을 역순으로 톺아보는 시뮬레이션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남자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 끝에 가선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미안하다는 답을 해줄 리가 없다. 아내는 억울하다. 애초에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잘못한 사람은 잘못을 추궁하는 것만 서운해 하고 자기 자존심만 중요하게 생각하니 어떻게든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다보면 끝까지 그 소리를 안 하고 넘어가려는 꼴을 죽어도 못 봐주는 아내 때문에 또 진정성 없이 일단 순간을 모면하려고 대충 미안하다 얼버무리는 태도로 사태는 전환된다.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는 아내는 점점 입을 닫게 되고 남편은 항상 화나 있는 아내를 보게 된다. 남자들은 말한다. 왜 화가 나 있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하하하. 아내들은 말한다. 내가 백번을 이야기해도 달라지 않고 똑같다고.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늘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이유로 스파크가 일어난다. 나처럼 남자를 과감하게 버린 내 지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남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남자는 결코 철들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남자들이 아니라 그걸 못 견디는 여자인 자신일 뿐이다. 고로 결혼 생활을 그런대로 평화롭게 유지하는 여성들은 남자들이 특별히 우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를 잘 견디는 방법을 터득했거나 아니면 특별히 남자를 잘 견디는 성향으로 타고 났거나인 것이다.

 

 

   작가는 남자가 대화에 소질이 없는 이유는 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학습해온 남자공식에 위배되는 발언이기 때문이라 정리한다. 그리고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해 변화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한 절대 ‘단 1센티미터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옮겨 앉으려 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남자는 죽자고 남자를 이기려 드는 여자를 가장 싫어하며 ‘스스로 멋진 남자라고 느끼게 만드는 여자’, ‘자신을 남자로 느끼게 해주는 여자’에게 끌린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자에겐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면서도 종국에는 여자가 그것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마침내 찾아낸 여자에겐 충심으로 투항한다. 한마디로 남성성을 모독하는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하면서도 또 그 자기만의 약점을 알고 보살펴 주고 챙겨주길 원하는 것이다. 이에, 남자는 자신이 진짜 남자라고 느낄 때에만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이 작가의 심오한 결론이었다.

 

 

   작가는 이 진짜 남자 컴플렉스에 해당하는 질병을 ‘유리커브’에 비유하며 유리커브의 열쇠를 여는 것이 유리커브를 발견한 여성의 역할이자 임무라 하였다. 아니 여성이야 말로 유리커브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고 들렸다. 오랫동안 사회에 여성의 승진을 막는 유리 천장이 있다면 남자들에겐 오랜 세월 환경과 교육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의 감옥, ‘유리커브’가 있다는 것이다. 감정의 표현과 교류가 서툴고 자신의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두르고 있는 갑옷처럼 유리큐브는 사방이 좁아 터진 밀폐의 은신처이다. 여자들이 답답하다고 망치를 들고 유리큐브를 깨려 들지 말고 지혜롭고 유일한 산소통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그의 유리큐브를 인정하고 때로는 반들반들하게 닦아 주고 때로는 질식하지 않도록 열어 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남자도 힘들고 슬픈 거야

 

 

 

   또 하나 맞벌이 여성들의 불만에 해당하는 가사부담의 정도에 대해서도 명쾌한 분석이 이어졌다. 나 역시도 늘 집안일과 육아는 그저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보조로서 도와주는 일이라 여기는 구석이 못마땅했는데 남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감 때문에 여자들이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자신의 일과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었을 그때는 자신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하므로 일찌감치 가사를 자기 영역에서 제외시켰다는 분석이다. 이제 작가는 여자들이 가장으로서의 남자들의 책임감을 나누어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내심 남자들의 부양에 기댈 목적으로 결혼을 하는 여성들이 반드시 감당해야할 태도라 느껴진다. 여자들 스스로 나는 아이 낳고 뒷바라지하고 살림을 하니까 앞으로 경제적 활동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평생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남자들은 잠시 바깥일 하는 아내의 원래 담당인 집안일을 해주는 것이 선심 쓰듯 도와주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차라리 남자의 책임감을 덜어주고 그 책임감을 핑계로 회피하고 있는 많은 의무들을 나누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 충고한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것이다.

 

 

   직장 다닐 때는 같은 경력인데도 군가산점 등의 이유로 남자들이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재수안하고 휴학안하고 군대 못가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죄로 재수하고 휴학도 하고 군대까지 갔다 온 신입사원이 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시절을 보내었다. 나는 이미 밤새고 뺑이치고 삼년 경력자가 되어 있는데 그들은 갓 들어와 내 지시를 받으면서도 나와 월급이 같았고 슬그머니 일 년 지나면 나와 같은 직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결혼하고 대학원 졸업하고 그 와중에 애까지 낳고 돌아온 오년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물론 군대는 국가가 부른 것이고 출산은 내 개인의 선택이므로 보상을 해줄 이유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남자들에 대한 보상은 언제나 국가적으로 시스템화 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보상도 꼭 여자를 차별하는 결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업무적으로 차별을 받거나 직종 특성상 남녀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회사 생활하는 동안엔 남녀차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축에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여자들의 경력은 세월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여자들의 결혼과 출산은 사회에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외려 민폐일 뿐- 피해의식이 많았다. 그리고 결혼해서도 맨날 야근이다 회식이다 늦게 오는 남편이 아무리 힘들어 죽겠다 소리쳐도 속으로는 다 밖에서 누릴 것을 누리고 대접받을 건 받으니까 그 정도 힘들어도 견디는 것이겠지(아니 당연히 견뎌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누릴 거 누리고 받을 거 받아도 힘든 건 힘든 것이었구나, 당신들이 힘든 것도 내가 힘든 만큼 같은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우친다. 주로 약자이고 피해자인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슬픔이 있듯이 강자이고 보호자이고 책임자인 남자도 남자이기 때문에 슬픈 것이었구나, 힘은 누가 더 세고 눈물은 누가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힘겨운 슬픔 만큼은 누가 누구보다 더 인 것이 아니었구나... (작가가 대단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남자가 아니면서 남자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남자보다 더 남자를 잘 말하고 그로써 여자의 생각을 슬슬 바꾸어 놓는다는 것. 작가를 보면서 남자를 말하는 것도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다. 남자에 대한 오해를 여자가 풀어주는 것을 보면)

 

 

   유익한 책이다. 작가는 마지막에 칸느 여우 주연상 전도연은 못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 중 그를 대할 때 필요한 것만을 골라 잘 연기하라고 마무리 한다.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연기하라 충고한다. 알면서도 저주고 저주었기 때문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원하는 행복을 성취하라 말한다. 이 책은 각 챕터마다 초반엔 주제와 관련된 짧은 이야기가 제시 되고 그 원인과 해석이 뒤를 잇는다. 중국 고전 <금병매>의 캐릭터 반금련, 무대, 서문경, 춘매, 설화를 패러디 했다는 소설이 재미나다. 어쨌거나 남자가 필요한 주인공에 해당하는 금련이 연애에 몇 번 실패하고 무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남편의 실직등 위기를 맞이한 후 중년을 맞는 구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남자를 조종 및 통제하기에 불가능으로 접어든 시기는 마흔 이후로 보는 것 같다. 남자 역시 여자의 도움을 거치지 않고 중년을 맞이하는 인생은 불행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책을 (너무 많은 걸 깨우친 중년이 아닌) 아이 하나 낳고 집장만 하느라 뒤도 안 돌아보고 부지런히 뛰었더니 어느덧 낼 모레 마흔을 앞둔 마음 울적한 주부에게 권한다. 나 같이 남자한테는 학을 떼어서(?) 더 이상 남자는 필요 없다는 돌싱내지는 싱글맘에게도 권한다. 나쁜 남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 좋은 남자야 왜 필요 없겠는가(그러나 불행히도 남자는 잘난 남자와 못난 남자로 구분 지을 뿐이란다...) 가끔 내가 몇 살까지 살게 될까를 상상해 볼 때가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또 뜻밖의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당분간은 이 책의 가르침을 가슴에 고이 간직해두어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어쨌거나 내겐 남자가 되었건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건 그 문제와 대안을 말하는 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요즘 하루 한권 읽고 그 다음날 리뷰를 쓰는 폭풍의 독서가 이어지고 있다. 아...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이 놈의 남자 근육보다 더 끌리는 저 단단한 책들과 그리고 그를 질펀히 통과한 후 내가 즐기고 있는 이 육체적 사유의 시간을. 다만 좋은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필요한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이 현실에 써먹을 날이 부디 다시 돌아오기를 몰래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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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5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gimssim 2012-02-0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십 년 세월을 살면서 저희 부부만큼 많이 싸운 부부도 드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싸우다가 앞뒤 안맞는 남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더니 돌아오는 말, "그렇게 똑똑한 여자가 왜 나랑 결혼했어?"
참고로 우리 남편은 아직도 "한 집에 한 사람씩만 똑똑하자!"고 입에 거품을 뭅니다.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지러운 세상이라구요.
얼마 전,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나이 탓인지 싸우기도 힘에 부쳐서요. ㅎㅎ
싸우고 서재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끼니 때가 되었는데 밥을 줘? 말아? 잠시 갈등했어요.
저는 별로 왜곡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는데 남편은 중학교 때부터 하숙, 자취를 했지요.
오제은 교수 이론에 의하면 남편은 '내면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멈춘 상태라는 거지요.
제가 내린 결론은 '에미가 속상한다고 새끼 밥을 굶기면 되겠어!'
그때부터 '어진 에미'가 되기로 작정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당신 요즘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묻는 것이었어요.
(남편만 모르지만 저는 자타가 인정하는 천사표에요.)
속으로는 '넌 내 새끼니까!'
겉으로는 "나같은 마누라 데리고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폭풍 독서, 리뷰...부러워요. 멈추지 마세요!

2012-02-05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2-08 19:46   좋아요 0 | URL
난 집에 있는 맘들이 젤 부럽다!
굶고 사는 것도 아니고
골치 안아파도 되고~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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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
 

 

   좋은 소설입니다. 건강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기까지 하군요.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덮고 이 소설 참 마음에 든다,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겠구나, 생각들이 그 많은 마음을 한 곳으로 움직이겠구나, 아마도 움직여진 그곳은 작가가 손을 잡아 이끈 곳이겠구나..... 오랜만에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났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과 세상에 마음이 상하는 시간이 많았던 분이라면 아마 그 마음이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꿈쩍 않던 마음 하나 움직이기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일수도 있으니까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읽는데 어떤 반감이나 무리가 전혀 없습니다. 쉽고 빠르게 넘어가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작가의 문체와 단정한 문장이 편안한 느낌입니다. 능숙한 것과도 조금 다른데 어디서 한번 마주친 듯한 사람처럼 낯설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친근한 것과도 조금은 다른데 사람으로 치자면 독특한 호감이 있어 자꾸 친해지고 싶은 느낌이랄까. 무심코 라디오를 듣다 보면 그래, 바로 지금 이런 음악을 듣고 싶었는데... 할 때가 있잖아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음악을 듣다보면 지금 내 마음이 이러했구나, 깨달을 때가 있잖아요. 이 책이 그래요. 바로 지금, 내가 듣고 싶고 읽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번쯤 우리는 이런 소설을 기다려 온 것은 아닐까. 어딘가 불편하고 속상하고 아픈 구석이 있어도 꼭 이런 구성, 이런 결말이 필요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소설이란 마치 동네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기약 같아요. 그러나 내게 유독 잘 맞고 잘 듣는 약은 흔치가 않잖아요. 글쎄, 좋은 소설이란 지금 내가 걸린 무언가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싶네요. 이 소설을 읽고 새삼 그 ‘좋은’ 감정을 정리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가슴 속 무언가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아니 세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한물간 외주 제작사 PD 박상운과 경영대 출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 정기섭과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김일우라는 소년. 주인공은 자폐인데다가 지능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지만 청각에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김일우 소년이겠지만 저는 한 번 실패한 어른이라서 그런지 아주 못되지도 아주 착하지도 않은 두 아저씨들이 더 공감 갔던 것 같습니다. 아저씨들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 시절 잘나갈 때가 있었거든요. 장애 소년이 세상에 들리지 않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도 그들처럼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람들의 안 보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로 받아 들였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선한 구석은 있고 또 아무리 착한 사람도 욕심은 있기 마련이죠. 이 소설은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하기 때문에 누가 피해자가 되고 그래서 상대가 가해자가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리얼리티가 듬뿍 살아 있어요. 아무리 소설적인 상황이라지만 살다보면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일 부지기수잖아요. 그보다 더 사악한 사람들 쌔고 쌨잖아요. 일우 학생만 빼고 나면 나머지 어른들은 우리 현실세계와 꼭 같은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고 어쩌면 일우마저도 가끔 등장하는 우리네 일상 속 그저 그런 불행으로 보였어요. 

 

 

우리와 멀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무런 연고관계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들 세 사람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전반부에 배치하고 중반부에 그들을 만나게 한 후 각자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헤어지게 하고 다시 재기를 다짐하고 후반부에 재회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결론은 맞아요, 돈 때문에 모여서 돈 때문에 헤어졌다가 다시 돈 때문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 들을 운명처럼 엮어주고 그들 모두에게 희망과 상처를 번갈아 주면서 우리의 감성을 들었다 놓았다 마구 뒤흔드는 이유는 모두 돈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같은 목적이 없었다면 이들이 사는 동안 만나야 할 기회는 전무 했을지 모릅니다. 돈 좀 벌어 보려고 그래서 명예도 얻고 사람답게 좀 살아 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죠.

 

   그렇다고 우리 사는 곳과 아주 멀거나 가기 어려운 곳도 아니지요. 그들이 원하는 돈도 백만장자가 될 만큼의 일확천금은 아니었어요. 사실 이 부분이 아스라이 저릿해지는 부분입니다. 김일우의 부모인 오영미와 김민구는 말합니다. 주제넘게 분수에 넘치는 돈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 만한 동네에서 식구 살기에 좁지 않은 아파트 한 채 사고 중형차도 한 대 뽑고 기분 내면서 외식도 좀 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랍니다. 조금 더 바란다면 보너스와 연말 정산 모아 일 년에 한번 해외여행 정도 추가해 볼까요. 수천 만 원 짜리 명품백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A나 B로 시작되는 외제차를 굴리자는 것도 아니고 무슨 호텔이나 콘도, 골프회원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주식으로 갑자기 대박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욕심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부부의 소박하고도 평범한 바람이 슬퍼지는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도, 그 평범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실 평범이란 개념은 대중적일뿐 결코 많거나 쉽다는 뜻과는 전혀 별개지요.

 

   거리에 나가보면 곳곳에 짓는 것이 아파트이고 24시간 달리는 것이 자동차인데 내 집과 내 자동차는 늘 그들보다 작고 형편 없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그랬죠. 아이 키우는 집에선 월급 받고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쉬고 200살까지 살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다고요. 요즘처럼 물가가 오른 식당에서는 아이들 데리고 고기 한번 먹으러 나가기도 얼마나 무섭던가요. 지금은 멀쩡하지만 언제 회사가 주저앉아 거리로 나 안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사업하다 한 번 망하면 삼년은 빚 갚느라 아무것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로 이어질 확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김일우네 가족에 닥친 시련은 서민에서 최하층 신세로 추락하는 보기 좋은 촉매제가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작가는 인물의 이름이 캐릭터와 딱 들어맞게 잘도 작명하신 것 같아요. 김일우의 이름은 어쩐지 한번 바보(一愚)는 영원한 바보일 것 같고 엄마인 오영미와 아빠인 김민구는 말 그대로 쌀이 없고 구직이 어려운 사람들 같아요. 잘 풀렸으면 영리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국민을 구하는 부부가 되었을 텐데요... 설상가상으로 아빠 김민구는 십년 넘도록 일해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중국집 배달부로 전락합니다. 사립학교 비정규직이었다고 해요. 법에 호소해 복직을 하지만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똘똘 뭉쳐 이미 오래전 해결된 공금횡령을 이유로 사람을 짓밟기만 하네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가진 사람들은 그 잠깐의 미동도 보기 싫고 귀찮은 법이거든요. 내 발밑에서 죽어가는 지렁이 보다는 더러워질 내 구두 밑창이 더 걱정인 것이죠. 어떻게 마련한 구두인데요...

 

   하지만, 지능이 떨어지던 자식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도 못한 채 입에 풀칠을 면하기 위해 극한 생활전선에 내몰리는 가장의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보아온 그림 이라구요? 치매할머니를 모시고 학교를 다니는 소녀가장도 있고 건설현장에서 불구가 된 아버지를 수발하는 소년도 있다구요. 예, 맞아요. 이 소설은 우리와 많이 멀지는 않아요. 너무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더 흠칫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어쩔 줄 모르겠어요. 일우 아빠는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들을 학대하는 일만 남게 되었어요. 엄마는 늘 쪼들리는 생활에 성격은 급하여 아들을 바보같은 놈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어요. 평범한 서민에게 가족의 병은 빈곤과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희망은 삼대독자 일우인데 그 일우가 바보라는 건 희망을 안주느니만 못한 주었다 빼앗는 더 억울한 일은 아닐까요. 무능력해 보이는 가장 김민구는 말해요.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상 험한 꼴 많이 봤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라구요. 그 말이 왜 그리도 시큰한지 한참 입에 맴돌았어요. 힘든 건 힘든 거라구... 불행의 크기는 그것을 겪는 사람에겐 전부이고 더 할 수 없죠...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힘들어 질까봐 입술을 깨물었어요.

 

   서울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부친의 가게를 물려받아 세오 건어물의 사장이 된 정기섭의 사연은 웃기고도 서글펐어요. 딴에는 대학물을 먹었고 전공이 컨설팅이라고 장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위인이지만 상인회 일에는 물불을 안 가리는 기섭씨 같은 가장은 어쩌면 무능력한 일우 아빠보다 더 지독할지 몰라요. 작가는 기섭씨의 상인회 총무활동을 통해 대형마트의 무차별적 진출과정과 지역상권의 피해상황을 넌지시 고발하고 싶었나 봐요. 기섭씨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장의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꼭 요즘 개봉중인 영화 <댄싱퀸>에서 황정민이 우연치 않게 시민을 구하는 덕에 일약 서울시민의 영웅이 되는 과정과 비슷하더라구요. 유머가 잘 믹스된 에피소드였습니다. 살다보면 별 생각 없이 한 일도 마치 정의에 불타는 시민이 행한 개념적 사건이 될 때가 있는 것이죠. 어쩌면 사람들은 늘 시민을 구해주는 슈퍼맨 같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작가는 자신의 손 끝에 마치 고화질의 다양한 카메라 렌즈가 달린 것처럼 행동과 심리를 디테일하게 혹은 대범하게 포착하더군요. 아마 방송 구성작가 출신인 이점을 살린 덕인지 후반부로 지날수록 더욱 사실적 현장감이 빛을 발했던 듯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에서 가장 저를 웃고 울게 한 사람은 네오 프로덕션의 사장 박상운이었어요. 아내된 입장에서 기섭씨의 행보가 매우 ‘섭섭’하다면 박상운 PD의 사회생활은 참 팔자가 센 것이라고 할 밖에요. ‘운’이 필요이상으로 좋았다가 또 억세게 ‘운’이 나빠지는 경우. 늘 그 놈의 ‘운’ 때문에 성패가 좌우되는 사람. 어떤 면에서 작가는 박 PD를 통해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시사 프로그램 방송 현장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자면 김일우가 대박을 터뜨릴만한 게스트이고 정기섭이 어리버리한 협찬사라면 박 PD는 마음 급한 연출자인 것이죠.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시청률 지상주의 제작자 이구요. 박 PD가 자꾸 눈에 밟혔던 이유는 순전 한 때 잘 나가가는 PD였기 때문이어요. 그는 사이비 수련원에서 ‘종교의식으로 포장된 원장 교주의 성폭력과 집단 구타 현장을 몰래 촬영’하기도 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원장이 원생을 학대하는 장면을 고발하기도 하여 시사다큐분야에선 스타가 된 인물이었죠. 하지만 그 시절 꼴통이라 수없이 불렀던 후배 김상호가 방송국의 갑이 되어 박 PD에게 당한만큼 되돌려 주더군요... 공교롭게도 저 역시 큰 회사에 있다가 나와 그 회사 용역을 수행하는 개인회사를 운영했는데 직원들 월급 주려고 옛날 까마득한 후배 찾아가 굽실거린 적이 있었거든요. 영세한 개인 프로덕션 사정이야 뻔하죠. 드럽고 치사고 목구멍에 욕지기가 수없이 올라와도 그 놈의 돈 때문에 지긋이 참아야 하는 것이죠.

 

   작가는 박상운 PD가 궁지에 몰려 있을 때 무리한 기획을 하게 되는 배경으로 열악한 방송제작현실과 갑과 을 간의 관례화된 부당한 방송시스템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은 시청률 위주의 ‘의미고 나발이고 확 터뜨릴 수 있을 만큼 쌈박하고도 통 큰 협찬사가 붙을 만한 대단한 프로그램’을 원한다는 것이죠. 힘들다고 모두 도둑질하고 사기 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자를 조작하고 편집을 자극적이게 이어 붙이고 협찬사를 급조하는 등의 제작과정이 꼭 박 PD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소리로 들렸어요. <귀를 기울이면>이 방송국 입장에서 보자면 시사 프로가 사회 곳곳의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서 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잘못되기까지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잘못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뜻으로도 들렸어요. 지금은 거대한 ‘잘못’, 볼거리가 될 만 한 ‘잘못’을 미리부터 기획해 놓고 그에 맞는 ‘잘못’을 찾으러 다니는 것일지 모른다구요. 이렇듯 방송제작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이 작품 곳곳에 주도면밀하게 숨어 있어요.

 

방송사에서 그렇게 운영을 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이다. 세상에는 프로덕션도 넘쳐났고 피디와 작가, 촬영기사, 조명기사, 리포터와 그 지망생들은 더욱 많았다. 방송사는 그럼에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중에 구미에 맞게 골라 쓰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칙이고 시장경제의 원칙이었다. 절은 몰랐다. 그래서 중들이 점점 저질이 되어간다는 것을, 중들은 절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고, 책임감도 없어졌다. 먹여주고 사람대접해준다면 교회든 성당이든 갈 판이었다.      -p89


 

   요즘 MBC가 파업 중이잖아요. 물론 소설과는 다른 이유지만 시청자를 위하고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시청률 위주의 방송을 제작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 시청자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것이더군요. 이 책을 읽다보면 좋은 시청자 되기도 쉬운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저만해도 TV 프로 하나 보는 것을 단순한 오락시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환경 및 프로그램 발전을 위해 어떤 프로를 시청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전보다 똑똑해진 시청자도 많아졌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진 덕에 요즘은 시청자가 비판의 도가니가 되가는 건 아닐까 싶어요. 작년에 한예슬이 드라마 펑크 내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미국으로 날아간 적 있었잖아요. 그때 한예슬 덕에 같은 드라마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으로 맨날 밤새던 스탭들이 잠잘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소설에선 제작자 박 PD가 이렇게 말하네요.

 

 

씨발, 어지간한 건 약하다고 컨펌을 안 해줬잖아. 정신과 통해서, 상담실 통해서 정식으로 섭외하려면 돈이랑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몰라서 묻냐? 우리한테 그만큼 제작비랑 제작기간 줘봤냐? 컨펌은 늦게 주지. 걸핏하면 약하다고 엎어버리고 다시 찍으라고 하지.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어딨어? 그나마 우리가 밤새 뺑이치고 있으니까 사고 안 나고 방송 꼬박꼬박 나온 거야.      -p96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목구멍까지 차올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가 봅니다. 제가 다 속이 시원해 지더라구요. 작가는 이슈가 될 만한 기사거리를 두고 언론과 대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세밀하고 단계적으로 묘사하더군요. 제목만 보면 의혹도 사실로 추정되는 무차별적 기사와 네티즌의 광분에 가까운 집단 심리가 마치 ‘복음이 전파되고 전염병이 옮아가듯’ 퍼트려진다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대회 참가비로 시장 개보수를 하겠다는 정기섭 총무나 장애 아들을 앞세워 상금을 챙겨보겠다는 일우 부모님이나 일단 화제성을 창출해서 회사의 매출을 끌어 올려 보겠다는 박 PD의 발상을 아무도 욕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비 윤리적이고 선정적인 도박성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우리는 아무도 그들이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오 프로덕션 사장도 나름 피디의 저널리즘이 있고 세오시장 상인회 총무도 나름 책임감이 있고 김일우 부부도 간절한 사정이 있는 걸요. 그것이 야바위 대회면 어떻습니까. 전 재산을 걸었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사실 시청자인 우리들이야 말로 늘상 극적인 드라마를 기다리고 성공이라는 환타지를 꿈꾸지 않습니까. 제작진과 협의된 어느 정도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것도 알면서 눈물짓고 환호하고 감동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예, 멀쩡한 집안에 멀쩡하게 생긴 소년보단 찢어지게 가난한 중국집 배달부의 자식이면서 지적 장애를 가진 소년이 도전하여 우승한다면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이 참가비 열배의 상금을 가져가는 것이 더 공평하고 더 옳은 것이고 더 감동이라 믿지 않나요?

 

 

   우리는 무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일등의 기가 막힌 사연을 기다리고 그들의 드라마가 승리하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니까요. 감동적인 인생 역전 드라마야 말로 현실에선 절대 역전할 수 없는 지금 우리들을 위로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두뇌 스포츠가 되었든 춤이 되었던 연기나 노래가 되었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중요한 건 어느 서바이벌에서도 더 기구한 사연을 가진 참가자는 등장할 것이고 반드시 우승자는 일우만큼의 상처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

 

 

 

“삶이 벼랑 끝이라고 느껴지십니까? 더 이상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이제 당신이 인생의 챔피언이 됩니다.
더 챔피언, 그 마지막 게임이 시작됩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TV속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흔해졌습니다. 이제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쓰리컵 대회'만큼이나 발상이 자극적인 프로는 얼마든지 채널을 돌리면 쉽게 마주치는 것 같아요. 한 달 전 인가, ‘괴물녀’라는 별명으로 일상 생활이 힘든 이십대 여성이 미인을 만들어 주는 프로에 출연했더군요. 사연이 누가 봐도 충격적이고 기구하면 여러 닥터들의 검증을 거쳐 얼굴 및 구강은 물론 체중까지 거의 전신 성형을 무료로 해주는 형식이었어요. 너무 못 생겨서 저 정도면 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저도 모르게 생기더군요. 시청자들은 그 ‘괴물녀’가 시간에 걸쳐 점차 괴력의 ‘미녀’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 소설 말미에 박 PD는 일우의 부모에게 일우의 갱생프로젝트로서 재활과정을 담아 이른바 ‘서바이벌 휴먼다큐 리얼리티 쇼’라는 형식의 프로를 연출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른바 바보가 똑똑해지는 과정이나 추녀가 미녀가 되는 과정이나 핵심은 남의 불행을 자세히 구경하며 내 처지를 위로 받고 그들의 성공을 확인하며 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청자와 참가자간 사연거래의 맥락은 같다고 봅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핵심에 돈이라는 자본과 성공이라는 욕망이 은밀히 숨어 있어요. 돈이 있어야 똑똑해질 수 있고 예뻐질 수 있는 것. 그래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는 것. 그러니 인생을 바꾸는 건 돈이라는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죠.

 

 

   소설에서 가장 권력자로 등장하는 엔조이 채널의 정용준 국장은 박 PD에게 마지막으로 ‘판결이 어떻게 나든 결국 힘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충고합니다. 글쎄... 저는 이 소리를 끝까지 듣기 싫었던 주인공 일우가 그 옳지 않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듣는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일우가 들었던 소리는 ‘소리 없는 소리’ 였고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말하지 않고도 전해주는 소리였습니다. ‘소리 없는 소리’ 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어떻게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온 일우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기 싫었던 것일까...

 

 

   ‘소리 없는 소리’란 어쩌면 처음부터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요?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란 어쩌면 일우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닫은 것은 아닐까요? 아, 그렇담 우리가 들어주지 않고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서번트 증후군은 좌뇌가 발달이 되지 않은 것의 보상으로 우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하게 된 결과 청각 같은 특수한 재능이 천재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래요. 우리는 말로는 다 듣고 귀로는 모두 이해하는 듯이 말하지만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맘에 드는 것만 이해하면서 편하게 살아왔네요. 이 소설은 사회, 가정 곳곳에서 우리가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환기시킵니다. 이미 들었으나 오해하고 잊어 버렸던 이야기, 반쪽 짜리 진실만 알고 있는 이야기,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쩜 소설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는 혼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주장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 해요. 비록 버스 정류장은 아니지만 소설을 정류장 삼아 가만히 기다려 보고 싶어요.... 소설 속 이야기들이 한자 한자 말을 걸어 오네요. 지나가는 바람처럼 촉촉한 빗님처럼. 이제야 알겠어요. 소리란 바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것임을.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마음이 이렇게 들리고 진심이 알아진다는 것을. 어때요? 나는 안 보이는 당신을 듣습니다. 당신도 들리나요? 혹시 우리에게도 천재적 재능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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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을 구경하다

 

 

 

   슬슬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드디어 아이와 엄마간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점이다. 이번 방학은 지난 겨울 보다 덜 추워 한층 더 나들이 계획이 많았을 듯 하다. (돈도 더 들었을 것이다 ㅠ) 보통 설 연휴가 봄방학시즌인데 이번엔 1월달 이어서 그런지 설 지나고 나니 벌써 개학준비로 마음이 바빠졌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느끼는 것인데 웬만한 전시는 거의 초등학교 저학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는 체험이니 과학관이니 하는 관람을 유치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방학용 특별 전시로 이름 지어진 각종 전시체험 행사는 사람만 많고 수준은 형편없어 돈만 아까운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나름 주제를 세워 국립과천 과학관에서 하는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전(展)'과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을 보고 왔다. 날은 추웠지만 사람들은 여전했다.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정리를 하려는데 눈이 오고 있었다.

 

 

 

 

 

- < 신비오 파라오 투탕가멘 전 >, 국립 과천 과학관 (2012. 1.31)

 

 

 

   투탕카멘전에 전시된 유물은 대부분 대영박물관이나 이집트 박물관의 유물들을 복제한 모형들이다. 영국이나 이집트까지 가기는 어려우므로 대여했다고 치고(?) 구경하면 된다.  9시30분부터 입장하기 때문에 일찍 가는 것이 좋다. 한 겨울이지만 유치원생부터 어르신들까지 관광버스 대절팀이 많아 보였고 사람이 많아도 무덤에 관한 전시라 그런 것인지 여느 전시장보다 시끄럽진 않았다. (그래도 최근에 본 전시 중에서 볼꺼리는 많았다)

 

   나는 거기서 단체로 관람 오신 할아버지들을 볼 수 있었다. 어르신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해 방문하신 듯했고 무슨 여행상품의 한 코스처럼 그렇게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아이가 커 사람이 많아도 잃어버릴 걱정을 안 하게 되었고 머리가 커 내가 좋다고 이거 봐라 하며 손을 이끌지 않아도 되었다. 각자 자유롭게 관람을 하던 중 나는 단체 관람객 중 할아버지 한 분이 어느 패널 앞에서 꼼짝을 않고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한 쪽 벽면에 일렬로 전시된 액자는 장례절차에 관한 시리즈 벽화 그림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열 몇 개 그림 중 거의 마지막 단계인 지옥부분에서 그림을 응시하고 계셨다. 관람을 너머 사색이었고 명상이었다. 미이라의 부검과정이나 복원 모습 등에만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구석진 벽면의 전시물이었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는 혹시 이해한다고 하여도 다른 중요전시물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어 보인 그림들이었다. 뭐랄까, 할아버지는 마치 바짝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미리 시뮬레이션 해보는 시간을 가지신 듯했다. 그림과 할아버지 사이 분명 무언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신 것일까 앞으로의 생을 상상해 보신 것일까.


 

 

 

 

- < 스키타이 황금문명전 >, 예술의 전당 (2012. 1.27)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은 지난 주말에 다녀왔는데 이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유물들은 모두 우크라이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중인 것들로 이번엔 한국투어로 기획된 전시였다. 세계 최초의 유목민족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또 세계 5대 문명의 예술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면 되겠다. 귀금속 같은 경우는 민속 공예품으로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자인이 정교해 놀랍기도 하였다. 전시 동선 상에 신라 금관이 전시되어 있는데 스키타이의 황금숭배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에 등장하는 그리핀의 형상도 확인할 수 있다.

 

 

 

 

 

-  < 놀이의 순간 >, 예술의 전당 (2012. 1.27)

 

 

 

   한가람 미술관 1층에서 놀이의 순간이라는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지하주차장과 연결된 홀에 미리보기 같은 무료전시를 하고 있는데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명화전시와 착시를 이용한 감상이 주 포인트이다. 그외 아트센터 곳곳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데 어른까지 끼어들어 보고 오기가 참, 그랬다. 요즘 전시회 성인 관람료는 만 이천원이다. 입장료와 주차비에(각종 공공장소 주차비가 4천원이더군... 언제 오른 것이냐...) 점심에 간식거리 톨비, 혹은 주유비까지 합치면 역시 가장 싼 건 영화야,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뮤지엄샵에서 명화 다이어리 하나 사주고 돌아오는 길. 문화 혹은 예술적 심성은 철저히 돈으로 길러진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많으면 더 많이 예술을 생각할 기회에 노출된다.

 

 

 

#2. 영원을 견디다


 

 

   집에 돌아와 나는 이 책을 덮었다. 역사도 좋고 예술도 좋지만, 무언가 허전함을 채울 길은 이 방법 밖에 없었기로... 이 불후의 명작을 지금에서야 읽었노라 말하는 것이 새삼 창피하다. 어떤 유명한 명작은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익숙하고 선명해 거의 읽었다고 믿게 되는 책들이 있다. <노인과 바다>는 내가 헤밍웨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작품 중 하나였다.

 

   처음 몇 페이지는 같이 온 영문판과 대조해 보다가 얼마 안 되는 뒷장이 궁금해 그냥 달렸다. 마치 내가 망망대해에 청승맞게 떠있는 배에 홀로 앉아 노를 젓는 심정이었다. 역시 허전함은 허전함으로 막아야 한다. 노인은 최선을 다한 오늘 밤 사자 꿈을 꿀 것이고 허전한 나는 노인의 꿈을 꾸게 될까... 그렇다면 혹시 이렇게 말해주시진 않을까.

 

 

그러고 나서 돌아가 꿋꿋하게 도전하며 너답게 살아. 사람이든 새든 물고기든 모두 그렇듯이 말이다.    -p57

 

  

 

    그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 놈에게 보여주고 말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는 노인의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없고 아무도 그를 견뎌낼 수 없는 순간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노인처럼 되고 싶었다. 얄밉게도 나는 노인처럼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었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노인과 바다>를 읽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아직 노인은 아닐지 모른다. 어부 같은 일과는 상관없을지 모른다. 아마 전혀 낚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생각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일만 죽어라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누군가를 간절히 이기고 싶은 사람인지 모른다. 혹 누구도 경쟁자가 없다하면 그토록 지겨운 자신을 넘어야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막막한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 사람은 자신의 뜨거운 심장과 지나온 시간과 흘려온 눈물을 믿었지만 더 이상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그 다를 것 없는 오늘이 지나고 나면 어딘가에서 커다란 행운을 만날 것이라 믿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 사람은 많은 도전을 했을 것이고 그만큼에 비례하는 실패를 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속절없이 나이만 들었을지 모른다. 한 시절 젊음과 건강을 믿고 그것이 영원하리라 의심치 않았는지 모른다. 가끔 그 사람에게 찾아온 행운은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자신의 재능은 비교적 세상에 써 먹을 만한 것이며 누군가는 꼭 그 재능을 알아 봐주리라 믿었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아무도 이기지 못하고 무엇도 잡지 못한 오늘을 견디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노인과 대치하며 꿋꿋하게 바다를 나아갔던 그 물고기가 보고 싶었다. 물고기는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외롭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처럼 울고 있을지 모를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나처럼 똑같은 사투에 놓여있을 그가,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놈이 선택한 것은 그 어떤 덫과 함정과 속임수도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깜깜하고 깊은 물속에 머무르자는 것이었지.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것은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그놈을 찾아내는 것이었고.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그곳까지 가서 말이야. 이제 우린 서로 연결된 거야. 어제 정오부터, 게다가 우린 아무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p 52


 

    노인은 자신이 죽여야 할 상대도 형제라 여겼다. 다만 서로 목숨을 건 채로 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기 때문에 배에 묶여 '둘이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어부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죽인 것이지 결코 물고기로 다른 이득을 보자고 죽인 것이 아니라 말했다. 외려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녀석을 사랑했고' 그리고 '죽은 뒤에도 사랑했'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 나의 적이 되어 목숨을 건 그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적의 손에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경쟁은 내 전부를 걸 수 있는 일생 일대 최고의 사건이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노인도 보고 싶었다. 그가 살아온 바다가 그리웠다.


 

    오늘 내가 본 그림속의 사람은 영생을 꿈꾸기도 하고 초원을 누비기도 했다. 책에서의 사람은 바다에서 삶을 관조하기도 했다. 모두다 영원을 믿는 듯 했다. 정말 사람인 나는 이제 돌아와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찾고 싶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람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지만 나인 사람은 얼마나 많이 지고 얼마나 많이 실패를 하였던가. 나아닌 그들 모두는 역사도 예술도 문학도 불멸이라는 희망을 꺼트리지 않은 채 아름답게 버티고 있는 존재들만 같다. 그 아름다움이 나에겐 왜 이렇게 서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은 울어도 아픈 날은 아닐 듯 하다. 영원하다는 건, 아니 영원을 바란다는 건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기에 그 거짓말이 차라리 차갑게 나를 위로한다. 돌이켜 보면 아무도 나를 패배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저... 여기까지 이렇게 살아 왔고 살아 가고 있을 뿐이다. 사는 건 이기고 지고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줄을 정확하게 드리우지. 다만 더 이상 운이 없을 뿐이야.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인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난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 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으니까.    - p33

 

   운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괜찮을 것 같다. 다만 운이 왔을때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어제하던 걸 멈추진 않아야 겠다. 누가 알아? 내일이라도 운이 트일지, 하하. 매일매일 새로운 날인걸. 당신도 나도 그건 똑같은 일인걸...

 

 

 

 

 

 

 

덧붙임)

 

한달에 열개의 포스트가 넘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폭풍독서를 한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갈증이 분명하다.

 

참, 투탕카멘전은 PDF 파일로(약 40M) 괜찮은 학습자료가 있는데

초등용으로 좋을 듯하다.

(혼자 갖고 있기 아까워 댓글 주시면 메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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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굿바이 2012-02-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33쪽의 문장이 유난히 새로워요. 분명 읽은 책인데 낯설고 새롭고.
정말 운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저 살아야하니까 사는 날들도 이제는 받아들인만 한 것 같아요. 애써 포유류의 숙명 따위를 언급하지 않고 말이죠.

한사람 2012-02-02 10:22   좋아요 0 | URL

예, 저는 유난히도 그 문장이 읽는 동안에도 계속 남더라구요.
노인이 계속해서 누구와 대화하듯이 바다에서 독백을 하잖아요.
흠칫흠칫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기도 하구요.
나중에 읽어도 또 색다른 느낌일것 같아요.
그래서 '불후의 명작'인가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02-01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건 뭡니까! 이 대영박물관 같은 분위기는..( '')
그러고보니까 한사람님도 그렇게 쓰셨군요..(제대로 안 읽고 댓글 단다ㅜㅜ)

좋겠어요, 서울사람들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부산에서 뭘 해도 잘 안갑니다ㅋㅋㅋ)

한사람 2012-02-02 10:25   좋아요 0 | URL

한때는 의무적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거의 아이숙제때문에 다닙니다.
좋아하는 전시는 성곡이나 가나아트에서 하는데
너무 멀어서... 괜히 혼자 청승 떨기 싫어서 안가게 되네요, 하하

그대신 부산은 언제든 휭하니 바다로 나갈수 있잖아요 !!!!
오늘 여긴 엄청 추워요, 부산은 아닐거잖아요 !!
ㅋㅋ

2012-02-02 0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7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2-0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과천 과학관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라... 날이 가을일때 갔었는데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또 한 번 더가보고 싶네요. 밖에 김밥사들고 자리펴놓아도 좋은 장소같았는데...ㅎㅎ

한사람 2012-02-07 08:59   좋아요 0 | URL

가연님은 과학전공이니 애정이 남다르시군요 ㅋㅋ
저는 과천가는 길이 좋아요.
근처에 현대미술관 올라가는 길(미술관보다 길이, 하하) 사계절 아주 좋아요.
과학관, 박물관은 한번도 즐기면서 관람한적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ㅠ
 
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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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아니어도 재차 옥수수와 닭의 의미를 해석하고 김영하의 작품세계로부터 감탄 혹은 비판을 할 것이다. 나 역시 지난 페이퍼에 이미 김영하만을 언급했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우수상작만 모으고 싶었다. (하나로 모으자니 너무 길고 이미 쓴 걸 줄이자니 번거로와서...) 그런데 나는 나가수나 오디션 프로의 영향 때문인지 이 책에 실린 우수상 수상작에 순위를 매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 심사위원들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마지막까지 김숨과 김영하를 놓고 고민을 했다고들 하는데 수록 순서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가나다 순도 아니고 서사의 흐름을 배려한 편집자의 순서도 아니고 무작위 제비뽑기 순서도 아닐 것이다. 읽을 땐 순서가 의미 없었는데 정작 우수상작만 따로 글을 써보려 하니 불현듯 순서의 의미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아마 등단연도 순인 듯한데 나는 내 맘대로 순위를 정해보았다. 순전 내 기준이고 내 기분 대로이므로 이야말로 의미는 없다.

 

 

 

 

1. 김숨 <국수>

 

 

 

   김숨은 작년에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소설엔 유난히도 국이나 탕을 끓이거나 생선을 튀기고 굽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풍성한 식탁이 아니고 가난과 질병, 죽음과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반복되는 일상의 편린 속에서.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다 보면 아무리 하찮은 생명도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삶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서늘하게 깨우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이 숨 막히는 현실과 숨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 생명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은 아닐까를 조용히 느끼게 된다. 이번엔 국수 밀가루 반죽을 하는 시간이 고통스럽게 전개되는 서사를 다루었다.

 

 

   마흔셋의 석녀가 재취로 들어와 자기 속으로 낳지 않은 의붓자식을 기르면서 수없이 치대던 밀가루 반죽의 의미는 이미 맏딸이었던 야박스런 화자가 계모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면서 비로소 원망의 국수가 아닌 화해의 국수로 변모한다. 화자는 밀가루를 양푼에 개고 간을 하고 반죽을 하고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국숫발을 뽑고 끓여 국수 한 그릇을 완성하는 동안 한 많은 한 여인과 자신의 일생을 연결 지으며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을 가진다. 뽑아놓은 국수 한 가닥이 꼭 ‘저기 당신과 여기 나 사이에 놓인 연줄’만 같아서 도로 뭉쳐버리고 싶지만 시간을 견뎌내고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어머니 앞에 국수를 내놓는다. 이야기의 속도감이 부족하고 서사의 긴장감이 없다는 것이 단점이라 하였지만 기껏해야 멀건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내놓는 일을 이렇게 끔찍하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서글프고 아프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어 가장 많은 공감이 갔던 작품이다. 아마 한번이라도 국수를 끓여 본적이 있는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러 할 것이다.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p244

 

 

   오래전 젊었을 때 생선을 갈아 어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 절대로 그 어떤 어묵도 안 드신다는 어르신이 생각난다. 어떤 한 가지 음식의 공정을 아주 긴 시간 반복해서 기술적으로 완성하는 세월을 가진 사람들은 달인처럼 아마도 그 음식의 자타공인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월이 그 음식만을 하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아니 그 음식만이 그 세월을 견디는 시간이었다면 그는 세월이 원망스러울까 음식이 원망스러울까...... 김숨은 세월도 음식도 소중한 자기 생의 일부분이었고 그렇기에 국수를 지겹게도 만들어준 그분의 일생도 소중했다고 회상한다. 늘 그렇듯 그 고마움을 느낄 때란 그를 잃고 나서이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그녀가 무에 그리 깨우친 삶의 이치가 많은 것인지 나는 그것이 소름끼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번엔 당당한 대상의 수상 소식을 기다린다.

 

 

 

2. 조현 <그 순간 너와 나는>

 

 

 

   이 작가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소설집에서 아주 난해한 단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라 팜파, 초록빛 유형지>라는 단편인데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2010, 현대문학)에 수록 되어 있다. 그때도 김숨, 박민규, 권여선, 김경욱 등과 같이 선정된 것이었는데 내 기억으로 그들 소설 중에서 전혀 서사자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소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어느 정도 작가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단연 이야기가 탄탄한 구성이 재미난 소설이구나를 느끼게 해주었다. 심사위원은 쓸데없는 에피소드가 많아 다소 구성이 산만하다 하였지만 분량도 그렇고 외려 장편으로 구성한다면 좋지 않았을까, 나름 상상을 해보았다. 나이 상으로도 같은 연배이고 나 역시 비슷한 시기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어린 시절에 처음 보았던 서울의 삼십년 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공감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시골에서 상경해 80년에 왕십리역 근처로 이사 온 화자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겠다는 각오로 끝맺는다.

 

 

살아 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고, 정말로 간절한 무언가를 찾아 낼 수 있다.  - p367

 

 

   왕십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화자는 다 가진 것으로 보여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 민혁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당시 미래를 엿볼 줄 알았던 무당집 딸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무당집 딸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불행의 사연을 간직하게 되는데 그중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는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어떻게든 운명을 바꿀 기회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무당집 딸의 예언대로 내일 죽는 운명일 지라도 오늘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네 서글픈 운명이라고 들려왔다. 우수상 수상 작가들 중에는 가장 늦게 등단한(2008) 작가로서 아직 장편이 없는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3. 김경욱 <스프레이>

 

 

 

   이 작품은 읽는 내내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켰다.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를 수집하며 소통 불가한 이웃들을 이해해보려는 한 남자의 집착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쓰레기 봉투가 이번엔 택배상자로 바뀌면서 단순한 실수가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와 연결되어 가는지 서사를 흥미롭게 구성하였다. 다만 그 구성이 흡사 기술자가 조립해 만든 레고 작품처럼 딱딱 들어맞도록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 주제가 약하다는 식의 심사평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이 백화점 구두잡화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는 것. 단골가게의 점원이 하도 손님의 발을 만지면서 늘 ‘죄송합니다’ 를 연발하다 보니 집에서도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기억났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구두점원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며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남의 택배상자를 택했다.

 

 

잘못 들고 온 택배상자를 뜯을 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p182

 

 

   이 작품의 매력은 도대체 끝이 어떻게 될지 결말을 향한 매순간마다의 긴장감인 듯하다. 김경욱은 다른 문학상 수상 후보에도 꾸준히 오르는 작가이다. 장편 <동화처럼>에서 실망한 기억이 있어 예리하다는 소설집을 아직 넘겨보지 않았던 터였다. 페이지의 가독력이야 김영하 못지 않았는데 결말이 좀 새롭지 않아서 였을까.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결말보다는 신선하지 않은 결말을 더 선호한다. 그런데 거장들은 대부분 차라리 새로울 수 없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결말을 맺으라고 했던 것 같다. 독자들은 결말에서 만큼은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난 결말을 택하고 결론짓는 것은 모두 작가의 한계치를 상징하는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새로움만을 지향할 수도 없고 또 새롭다 예상하여도 작가의 생각만큼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새로움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이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를 둔 듯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어쩌면 조금 덜 소설적이지 않았나, 감히 판단해본다. 그런데 또 난 이런 짜 맞추어진 소설이 늘 즐겁고 짜릿한 독자였다. 기대한 대로 끝나주는 것도 좋더란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나는 어디서 생겼을지도 모를 작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김경욱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4.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김경욱과는 반대로 이야기의 구성은 퍽이나 흥미로와 좋았는데 너무 소설적이어서 좀 그랬던 작품이다. 최제훈은 어쩐지 이야기를 경영한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결과적으로 높아 보이는 완성도가 소설의 신비감을 떨어트린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기인의 풍모를 하고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어느 화가의 고백과 그 초상화에게 여자 친구의 그림을 부탁한 대학생의 사연이 평행선을 그리며 이어지다가 마지막 초상화 그림에서 합쳐지는 구성이다. 화가의 궤변과도 같은 예술 사랑과 인간 사랑의 의미를 읽어가다 보면 예술과 사랑의 합일을 이루었다 생각하는 화가의 일생이 위대해보이기는 커녕 한없이 비루하고 이기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마지막 여자 친구의 초상화에서 화가가 발견한 생의 진리(?)를 똑같이 발견해 내는 주인공의 착각은 왜 화가 나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술 하는 것의 의미를 죽는 날까지 정립하고 그것을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든 못 벌 든 자기예술의 의미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삶는 일은 생존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생존의 이유일지 모른다. 최제훈은 자신이 글 쓰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어서 글을 쓴다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작가는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를 오래 생각해 온 것 같고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늦게 시작한)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는 다름 아닌 이 소설을 쓰는 이유와 이 소설의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미루의 초상화'는 예술과 사랑, 이상과 현실이 모두 담겨있는 자기중심적인 예술의 총체, 즉 예술가의 인생이 응집 축약된 유기적인 결과물인 듯하다. 예술은 어쩌면 무언가를 죽여서 녹여낸 신비하고 야릇한 생명체 일지 모른다. 비록 생과 사라는 폭력을 녹여낸 것이지만 또 다른 생명을 위무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할 뿐인 것이다. 소설가 역시 어떤 말 안 되는 죽음과 기가 막힌 고통을 빚어낼 지언정 이야기로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려선 안 될 것이다. 최제훈은 그것이 자신에게 소설 쓰는 소설가임을 이해시키는 방편은 아닐까.

 

 

 

5. 조해진 <유리>

 

 

 

   이 작품은 이름이 한유리인 한 대학강사의 유리같은 인생을 위태롭게 조망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유리로 상징되는 상처의 표상을 너무나 강렬하게 묘사한 덕분이지 서사가 묻히는 느낌을 받았다. 즉,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기는 곤란한 심경이다. 남는 것은 상처의 내용이 아니고 상처의 외면, 즉 상처의 형상이 제시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읽는 내내 사방 유리에 찔리고 유리를 밟는 것과 같은 ‘통증의 촉수’를 세심하게 감지할 수 있어서 독서 후 불쾌한 느낌만은 최고로 생생했던 것 같다.

 

 

   K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는 강사 한유리에게는 열 네 살 이전의 기억이 모두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린 시절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이 유리도시에서 깨달은 삶의 진리는 아마도 ‘자신이 깨지지 않으려면 상대를 깨트려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인 듯하다. 그러나 유리에 짓밟히면서 얻은 교훈도 그녀를 유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진 않은 듯했다. 그녀는 강의 전담 계약직 교수를 채용한다는 학교 공고에 불안을 느끼고 시답지도 않은 한참어린 제자와 도피의 여행을 떠나고 만다. 그녀에게 현실은 여전히 ‘입구도 출구도 없는 밀폐된 유리알 속’인 것이다.

 

 

짓밟히지도, 짓밟지도 않으면서 그 모든 곳들을 통과하려 했으나 돌이켜보니 세상은 늘 상처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유리일 뿐이었다. 상처가 남아 있는 한, 완벽한 망각은 불가능했다.    -p284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소설 전반을 은밀하게 흐르던 여성의 피해의식이 지나치게 과하게 심층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 한유리의 어린시절 상처가 너무 특수화(?)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유리의 아픔과 주인공의 아픔이 일체되지 않는 괴리감을 제공하기 충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다. 중간 중간 ‘통증의 촉수’를 자극하는 문장들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6. 하성란 <오후, 가로지르다>

 

 

 

   이 작품은 거의 대상을 수상할 뻔(?) 하고도 마지막 서사의 한 자락에 어떤 작가의 고집 때문에 급격하게 서사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 된 밥에 코 빠트린 격으로 화가 나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심사위원 중에 여자가 뺨을 맞은 이유가 무엇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분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 이유를 왜 언급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짜증이 났다. 무언가 대단한, 아니면 어이없는 이유는 있겠지 하고 끝나는 느낌이 배심의 클리세 처럼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독자와의 소통, 이해보다는 자기만의 주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무언지 모르게 이 작품이 그랬다. 작가의 이유야 너무나 분명하게 있겠지만(큐비클은 원인 따위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이유가 내게는 아픔이었네... 하듯 이번엔 그렇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80년대 상사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십대 중반의 미스 김, 이제는 갱년기를 앞두고 신입사원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말단 회사원이다. 작가는 신도시와 구도시의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이미지를 큐비클로 조형화하고 이를 삼면이 칸막이로 막힌 사무실내 구조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직원들이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자신을 알릴 유일한 방법으로 내세운다. 큐비클 속에서 싹트는 동지의식을 면밀히 투시한다. 그 비인간적이면서 별다를 것 없는 조직의 에피소드가 이 소설을 이루는 큐비클의 조각들이다.

 

 

맞습니다. 저는 길을 잃었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p220

 

 

   현실의 큐비클은 너무나 쉽고 너무나 분명하고 단순해서 삶의 길을 잃었다는 역설이다. 이는 바닷가에서 사람이 빠져서 찾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바닷속은 그 컴컴한 물길이 들여다보이지 않기라도 하는데 큐비클은 고개만 들면 훤히 속이 내다보이는데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초반, 중반의 기대감이 후반부에서 지속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밀착 취재한 듯한 느낌의 하성란식 치밀 묘사는 소설은 결국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꿋꿋하게 알려준다. 올해는 제발, 에이와는 다른 소설을 만나고 싶다. (A도 독자를 배려하는 소설은 아니지 않나......)

 

 

 

7. 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오래된 지인들을 초대해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난 후의 소회를 담담히 적어 내려가는 류의 소설은 주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교수나 의미 있는 직책에 오른 여성작가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식사를 준비하며 과거를 회상할 것이고 반드시 사연이 될 만한 누군가가 표면에 등장할 것이고 그와의 인연에 놓인 지인들이 하나둘 나타날 때 화자의 심경변화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불같은 청춘의 시기를 지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을만한 지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떠드는 자리는 누구를 위한 모임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이며, 어떤 이를 위한 시간일 것인가.

 

 

   내 기억으로 이들은 대부분 이제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인들의 위선과 가식에 실망을 하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났던 것 같다.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인 순남씨가 여행지에서의 사진이나 은촛대, 괘종시계, 색소폰 등의 소품과 관련된 자기 사연을 간간히 믹스하였다는 것인데 초반부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던 은촛대가 나중에 힘을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하게 사라진 것이 서운했다고 할까. 이야기는 갑자기 나만 몰랐던 이야기로 끝이 나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만 그렇다고 앞부분에서 페이크인척 하였던 자기 집중의 서사가 결말을 위한 설득을 가지진 못했다는 점에서 좀 뜬금없다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 이 소설은 순번 상 마치 나가수 1번 가수의 노래가 7번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나면 대단치 않을 경우 기억에 가물가물한 이치와도 같았다. 무언가 진부하다는 느낌도 서사가 갈피를 못 잡았다는 느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우수상 수상작 중 꼴찌를 주었다. (아...어쩐지 인순이가 꼴지한 느낌은 무엇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번까지 우수상 수상작도 (뒤편에)따로 평이 더해졌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김영하에 치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건 평가식으로 글을 모두 적고 나니 또 대상은 김영하가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등은 일등의 실력 때문이 아니고 일등을 할만한 이유가 있을 뿐...) 나가수 식(자문위원식)으로 말하자면 함정임과 하성란은 주제를 상징화하는 무대의 관록을 엿볼 수 있었고 김경욱과 최제훈은 치밀한 구성으로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고, 조해진은 섬세한 감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묘사의 절정을 보여주었고, 조현은 서사에 본인의 이야기가 녹아든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고, 김숨은 소름끼치는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감동을 선사했다. 모든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마치 심사위원이나 된듯이 우쭐하구나 ㅋ) 좋은 소설, 좋은 작가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내가 그들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고 그저 그런 오늘, 어제와 달라질 것 없는 오늘을 보내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당신들이 피할 수 없는 문학의 ‘큐비클’이고 안 먹을 수 없는 ‘옥수수’이고 매번 기다려지는 ‘국수’이고  입출구 없는 ‘유리’알 속이고 30년 전 ‘왕십리’이고 기다려지는 ‘택배’상자이고 살아있는 ‘초상화’이고 일 년에 한번 있는 ‘만찬’이다. 이상으로 다소 빚진 심정이었던 이상문학상의 리뷰를 마친다. 나의 이상은 언제쯤 날개를 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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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잘 읽었습니다.
전 언제부턴가 더이상 김영하는 읽지 않지만, 이 페이퍼를 보니 김경욱은 끌리는 걸요.
근데 말이죠, 근데 말이죠~
김경욱 얼굴이 윤상 버젼으로 나왔어요.
이 말 들으면 김경욱이 승질 낼까요, 아님 윤상이 승질 낼까요?
옥수수 먹고 싶어요.
목욕 가야 하는데,
목욕 가면서 옥수수 파는데 없나 찾아보려구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숨의 초창기 화제작 '투견'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왠지 묘한 분위기...개도살하는 장면을 정말 실감나게 묘사했어요.

작가 나이 삼십대 후반이면 인생에 대해 충분히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닐 나이라고 봅니다.작가가 인생을 보는 통찰력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듯해요.

2012-01-30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물선 2012-01-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난 딱 김영하만 읽었어.
재밌더만. 허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영하답다~는 느낌이었어.

니가 매긴 순위에 따라 다음 작품을 한번 읽어볼까?
나도 우수상의 순서가 무엇일까.. 의아해 하다가 말았음. (난 요렇게 포기 잘함)
맨날 의전을 하다보니 순서가 중요하게 생각되기까진 해.

함정임을 인순이에 비유했네. 좋아했던 작가인데^^

그나마 난 요즘 조금 정신이 나는 시기야. 바쁜것 좀 끝났고...
이제서야 2012년을 시작하는 느낌^^
직장녀는 인생의 촛점이 그저 회사라우~ ㅋ


아이리시스 2012-01-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도 공지영 만큼이나 어색하네요, 저 자리가ㅋㅋㅋ
저는 매번 욕심만 내고 문학상 수상집을 잘 못 읽어요.
사놓고 몇 년 된 것도 있고요. 이거 너무 재밌어요. 우수상 수상작들까지 분석해주시고^^
진짜 한 권 읽은 듯한 느낌이네요.
저는 문체가 좋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내용까지는 아직 잘 못 보는 것 같아요.

여기도 함정임쌤이 계시네요. 제가 4학년 때 저희 학교로 오셔서 소설이론과 창작을 강의하셨어요.
바로 그 다음해에 졸업을 해서, 제 지도교수님은 강은교 쌤이라 잘은 모르지만요.
그래서 매번 반갑네요. 그런데 몇 번째 우수작인 것 같아요.
 

 

 

 

 

#1. 이상문학상, 이상하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내가 읽어본 이상문학상 수상작중에서 가장 웃겼다.(우습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 내용이 웃기다) 읽는 동안 자주 킬킬거리다가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다 싶을 즈음 ‘나는 옥수수가 아니’라니... 물론, 문학상 수상작이 늘 심각하고 어려워야 한다는 건 아니다.(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려울 수도 있다) 이상문학상이 타 문학상보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고급스럽게 펼친 작품에 돌아간다는 사실도 모르진 않는다. 우수상 수상작이 <옥수수와 나>보다 덜 문학적이어서 수상치 못하였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문학에 감동받는 것 또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내 느낌이 일반적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읽어 본 문학상 수상작 중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김영하 식으로 말하자면, 문학상 수상작이 어렵든 쉽든 그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환상적 기법으로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환상적 기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한 페이지 분량이었고 그것도 ‘기법의 서사화’라 보기엔 너무 큰 확대가 아닐까 싶다. 마치 대단히 예술적인 고견을 가지신 분들이 일반인은 이해하지도 감동받지도 못하는 어느 예술작품을 앞에 놓고 뷰티풀, 원더풀, 환타스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유명한 화가가 선을 하나 그리면 예술이고 찌질한 연습생이 선을 그리면 낙서인 것과 같다고 까지 말하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늘 익숙하던 김영하식의 블랙유머에 가까운 옥수수 개념이 갑자기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로 발견된 것 같아 좀 웃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작품을 덮고 이상문학상은 1등을 선정하고 나서 확실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작품을 결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평론가 장두영의 <옥수수와 나>의 작품세계야 말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문학상이다. 문학상은 작품집필이 아니고 작품해석이다. 훌륭한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즉 문학적 성과가 높다기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이 수상작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정말이지 장두영의 해석을 보고서 미처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생각하지 못한 내 자신의 수준을 한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물론 한국문단을 이끌어 가는 대가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내가 무어라고)일개 독자에 불과한 나와는 퍽이나 의견이 다르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와 꼭같은 생각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라는데 감히, 오백원을 건다. 그동안 문학적 성과라 칭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박민규나 공지영도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나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서는 웃다가 허탈하진 않았던 것 같다. 평론가의 해석과 심사평을 읽고 어느 정도 내가 엿본 공감의 요소를 발견하고는 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라 하여 불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 올해는 문학사상이 창사 40주년을 맞아 표지와 판본 디자인을 바꾸었다. ‘권위와 전통,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었고 대상 수상 작가와 그의 작품이 한눈에 들어오게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는 느낌은 충분했고 전보다 더 젊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권위와 전통은 멀어졌다. 전에는 수상자의 자선대표작과 해설 등이 25프로 정도였는데 이번엔 <옥수수와 나> 자체 분량이 많은데다가 수상소감을 비롯해 중간에 자서전식의 소설과 염승숙 작가의 김영하 작가론까지 더해져 거뜬히 삼분의 일 분량을 넘어가는 구성이다. (만약 <옥수수와 나> 뒤에 수상소감이나 자선작, 자서전, 작가론, 평론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것이긴 하지만) 이른바 김영하 특집이다. 앞의 표지사진까지 역시 이긴 자가 다가지는 건 맞다. (다른 분이어도 그랬을까? 마케팅적 요소에 치중한 덕인지 내가 받은 책은 벌써 1판 8쇄였다. 이상문학상이 뜬 날 바로 문자 받고 주문했으나 그랬다... 더 불쾌했던 건 소개된 19일 날 주문하고도 연휴 전에 택배사정 때문에 받지 못하였다는 것) 전에는 우수상도 수상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엔 김영하만 수상자고 나머진 후보작의 느낌이다.

 

 

 

   나는 김영하의 작품을 비하하거나 그가 이룬 성과를 폄하하거나 절대 이상문학상의 권위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저 내 느낌을 말하다보니 할 수 없이 이런 글이 되었다. 바로 전에 읽은 책에서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자기과시의 일환이라는 충언을 따끔하게 받았으면서도 또 내 자신을 이기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그저 이 불편한 마음을 나름 해소할 수 있는 건 소설을 한 번 더 읽고 내가 느낀 김영하와 옥수수를 차분하게 자근자근 씹어 보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2. < 옥수수와 나 > 만 씹는다

 

 

 

   먼저 수지라는 출판사 편집자와 이혼한 ‘나’, 박만수는 쫑이라는 호승심 강한 딸아이가 이혼할 때 제 어미를 택한 것을 인생의 행운으로 생각하는 40대 작가이다. 계약금만 먹고 세월만 보내고 있던 나에게 월스트리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수지를 시켜 원고독촉을 한다. 참,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주와 삼겹살이 아닌 와인과 치즈를 즐겨, 마신다. 박만수의 딸 쫑이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놓았단다. 그러니까 글이 안되어서 뉴욕으로 날아가는 수준이다. 나는 솔직히 김영하의 작품에서 어떤 주인공이 절망을 한다해도 어떠한 인생의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찌질하고 돈없어도 수준만은 강남파이다. (나중에 언급할지 모르겠는데 이것이 김숨의 작품이 미끄러진 결과를 더 아프게 한다. 그냥 개인적으로 김숨이 꼭 다음번에 수상하기를...)

 

 

 

1. 킬킬거린 웃음지대

 

 

 

   “비밀이라는 것 보니까 뭔가 괜찮은 거 쓰고 있나봐.”
   “뭐 다 써봐야 알지. 열심히 쓰고 있기는 해.”
   모든 작가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뭔데 그래?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모든 편집자는 이렇게 작가의 말을 믿는 척한다. 나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일제시대의 유랑 곡마단 얘긴데, 이걸 라틴아메리카 풍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푸는 거야.”
   구상을 편집자에게 말할 때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를 슬쩍 언급해주는 게 좋다. 그러면 편집자는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
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
   “재밌을 것 같은데?”
  전처까지도 이렇게 넘어가는 것을 보라. 이게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이다.   -p19

 

   김영하의 단편은 술술 넘어가는 탓에 쉬운 생각이 들지만 이면에는 늘 아는 사람만 알고 이해하라는 식의 농담이나 대사가 포진되어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상상해본다. 모든 심사위원들은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김영하는 서사에 마술적 리얼리즘을 마술적으로 리얼하게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옥수수로 변하는)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이지 않느냐 반박했을 뿐인데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생각이다. 김영하 작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을 믿었고 심사위원은 그 힘을 느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건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김영하는 절대 일부러 그럴 작가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무엇보다 기획력이 탁월한 듯하다.


 

2. 갸우뚱거린 물음지대

 

이상하게 수지를 만나면 나는 그 옛날의 철없던 시절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응석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위로를 구걸한다. 나는 이제 옥수수가 아닌데, 정말 옥수수가 아닌데, 그런데 수지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이제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   -p21

 

   작품 도입부에 ‘나’라고 추정되는 환자는 닭이 아직도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다고 그것이 무서워 죽겠다고 의사에게 말한다. 의사는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이제 아시지 않느냐 반문한다. 그러나 나로 추정되는 환자는 답한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나는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닌 걸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데 저 닭들은 그걸 모르니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건 ‘나’가 아니라 ‘당신’과 ‘닭’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나’로 추정되는 작가를 알고 있는 당신과 나이다. 내 생각에 심사위원 입장에서 ‘닭’은 우리이고 우리 입장에서 ‘닭’은 우리만큼 김영하를 모르는 나머지이다. 이 작품은 옥수수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옥수수가 옥수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닭을 조롱하고 있다. 누가 되었건 ‘닭’을 상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짜릿한 쾌락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내가 무엇인지 말하여도 상대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무엇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아무리 이렇다 떠들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에겐 글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뜻 아닐까. 상대가 아느냐 모르느냐의 여부가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이 된다는 건 철저히 내 중심이 아니고 그걸 인지하는 상대에 맞추어져 있다. (작가가) 아무리 혼자 방구석에서 피터지게 떠들어 본들 세상에 글로 나오지 못한 생각은 (작가 독자 모두에게)의미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 화두는 결국 작품 맨 마지막에 의식의 안개를 뚫고 서서히 드러나는 하나의 문장,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란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게임으로 귀결된다.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너는 그걸 아느냐는 최종질문이다. 안다면 내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안다는 것이므로 퍽이나 다행이라는 말이고 설령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는 뜻이다. 정말 웃다가 기분 묘해지는 의미심장한 결말인 것이다. 내가 모를까봐? 풋. 이정도도 모를까봐? 아니라는 거 안다구. 근데 뭐, 아니면 당신이 뭐가 좋은데? 내가 당신 아닌 거 안다는 거 그게 그리 중요한가? ......, 작가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하구나. 암것도 모른다면 공감은 커녕 반감만 들기 마련이지. 즉 자기가 아는 걸 독자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구나. 옥수수가 아닌 걸 알아달라는 건 반대로 옥수수였을 때도 이해해달라는 것이구나. 옥수수 아닌 나도 옥수수였던 나도 알아주길 바란 것이구나. 그러니 당신들이 닭이기를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옥수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도 이 작품을 읽어가는 재미의 하나인데 만약 옥수수를 작가가 제시하는 작품의 총체라고 본다면 어떠할까. 알알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옥수수를 받아든 독자는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옥수수를 깨끗하게 먹어치울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거나 치아가 좋지 않거나 먹다가 맛이 없어진다면? 나는 작가가 의도한 바가 꼭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는 김영하의 고민을 슬쩍 엿보았다. 바로 월 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이 작가의 데뷔작에서 최근작까지 모두 초판에 사들여 책 갈피마다 빼곡이 메모를 적어 놓은 것이다. 그 초판 책에 사인을 해달라고 내밀었을 때 작가 박만수는 자신의 옥수수가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소화된 것으로 기대한다. 사장은 동시대에 박선생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게 삶의 위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쎄씨봉 윤형주의 팬이 그랬다지, 나와 동시대에 살아주셔서 죽도록 감사하다고...) 여기서 김영하는 옥수수를 알아보고 먹지 못하는 상대(독자)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아니 상대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사장은 자신이 읽은 내 책에 대해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작가라고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잊어버리거나 엉뚱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다소 뜨악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어긋나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사장과의 대화는 유독 많이 엇갈렸다. 내 책의 여백에 자기 나름의 대안적 스토리를 자꾸 적어 넣다 보니 마치 그것이 원래 스토리였던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8p

 

 

   내가 옥수수였던 것과 지금은 아닌 것을 알아주길 바라지만 몰라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부르짖는 것은 제발 이 작품을 읽는 사람만은 알아달라는 역설의 호소 인 것이다. 혼자서 대안적 스토리를 만들고 그것에 감동해 놓고 자기 작품에 칭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벌이엔 동물적 감각으로 일가견이 있는 월스트리트 출신 출판사 사장같이 굴지 말고.


 

 

3. 육체적 깨달음지대

 

 

   ‘나’에게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친구와 시를 쓰며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섹스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고 나처럼 문학을 하는 것이다. 철학과 카페사이에 교집합을 시로 정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철학은 관념을 카페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여 지며 ‘나’는 소설을 그들은 더 고결해 보이는 시를 쓴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 모두는 각자 자기 논리대로 불륜을 정당화하는 위선자로 느껴졌다. 철학은 카페의 아내를 만나고 카페는 여군장교를 만나고 ‘나’는 출판사 사장의 아내와 자게 된다. 아내였던 수지도 철학을 만난다. 어찌 보면 가장 부도덕할 줄 알았던 자본가, 출판사 사장만 깨끗하다. 왜? 단순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니까. 그에 반해 시쓰는 친구나 평론을 자처하는 수지나 모두 자기 해석을 덧붙이며 자신을 변호하는데 여념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그런 게 아냐. 매우 육체적인 거야. 심장이 움직이며 마음은 복종해. 우리는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른 몸을 갖고 있어.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야.”   -p23

 

   이 대답이 잠시나마 뭉클했던 건 소설가는 머리나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쓴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갸우뚱 했던 건 꽤나 도시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김영하도 같은 것일까 새삼 놀라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육체적, 물질적 욕망이 삶의 진정성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은 환상기법이든 무엇이든 소설이라는 육체적 과정을 거침으로써 더욱 숙연해 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환상과 마술을 앞세워도 결국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누구를 가르치거나 평가하는 것은 다른 몸이 한다는 것이다. (육체노동자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후반부에 육체를 엄청나게 운용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자본가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외려 곤경에 빠트리고자 ‘어지럽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있지도 않은 곡마단 마지막 생존자를 핑계로 뉴욕으로 떠난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뉴욕의 아파트를 선뜻 제공한 출판사 사장의 음모 또한 대단히 육체적이었다. 작가 박만수는 뉴욕에서 미모의 출판사사장의 아내와 조우하며 쾌락에 내몰리고 그 열정으로 예술작업에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된다. 사장이 불시에 침입해 소설이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쓰레기라고 비난하자 나는 반박한다.

 

 

“쓰레기라니요? 이해가 잘 안되네요. 물론 이 소설의 창작동기가 불순, 아니 불명확했던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원고는 작가 박만수가 아니라 저의 손을 빌려, 아기 예수가 성모마리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씀드려 기분이 나쁘실 수 있는데, 그렇죠, 선승들 같았다면, 한 소식을 했다, 뭐 그런 식으로 말들 했겠죠“    -p59

 

 

   작품이 작가를 배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초기 구상이 완벽하더라도 글을 이루는 과정상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대단한 구상보다는 일단 써야 한다는 현실을 강조하는 문법이다. 남의 아내와 밤새 뒹굴었건 밤새 잠을 잤건 어쨌든 처절하게 육화된 원고를 써 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누구도 쓰레기라 할 자격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들이 소설 쓰는 과정이나 안 써지는 과정을 말하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그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작가자신도 소설을 끝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하는 뉘앙스를 발견하게 된다. 육체의 사력을 다해 힘겹게 써내었으니 더 이상 나는 옥수수가 아닌 것이다. 당신도, 그런 줄 알으란 뜻이다. 아니, 제발 당신만은 좀 알아 달라는 것이다.

 

 

   김영하는 작품 전반에 자기 목소리를 싣는데 있어 조크와 냉소를 이용하는데 능숙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다고 문학적 자서전 <나쁜 버릇>에서도 주장하고 있다.(이 소설 골때린다) 실패자들이 골방에 모여 퇴폐적인 글을 전파하여 젊은 영혼들을 타락시킨 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작가를 평가하는 집단이 재판하는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작품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글을 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부연한다. 작품성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 다시 말하면 당연히 고맙긴 하지만 이 상도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으로 이 상이 글쓰는 작가에게는 누구에게나 당연하다는 뜻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 다만 ‘해야만 한다고 믿는 그 일로’ 돌아가는데 이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고 여기는 듯 하다. 작품 말미에 출판사 사장이 권해준 약은 아마도 그 앞으로의 더 지난한 고통과 세월을 이기라는 극약 처방은 아닐까 싶다. 약먹은 후 달라진 세상에서 쓴 첫 문장이 말해준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는 절규는 그것을 깨달은 작가 자신의 믿음은 아니었을지...

 

 

 

 

 

 

 

 

 

 

 

덧붙임)

김영하만으로도 충분히 길어서
나머지 우수상작은 더 줄여서 정리할 생각이다.
김숨이 아깝긴 한데, 뭔지 모르게 언제나 2프로 부족하다.

(독자마저 김영하만 떠드는구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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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1-2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소설이 '재미있어서' 김영하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
그런데 이번에도 김숨은 우수상인가요? 작년에도 우수상인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도
우수상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군요. 작년에는 공지영이라면, 올해에는 김영하가 이상문학상에서 단언
눈에 띄네요 ^^

한사람 2012-01-28 09: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작년에도 우수상이 김숨말고도 김경욱이 있어요.
그 중에 김숨의 단편 당연히 기억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우수상 타다보면 나중에 대상이 될 확률이 많은 것 같던데요.
이번에도 김영하와 김숨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던데..
<국수>는 새로움이 없어가지고 , 하하

평소에는 작가에 대한 호감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누가 상을 탔다고 하면, 아쉽거나 좋거나 하잖아요..
그럴때, 내가 이 작가를 좋아했었구나..(반대로 싫어했구나..)
그걸 느낍니다^^


비로그인 2012-01-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한사람님 글은 길어서 읽기 전에 후~ 숨을 고르고 시작하는데, 읽다보면 어느새 끝이에요. 신기하죠? ^^

김영하의 단편소설은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당당하게(몰래가 아니라 당당하게!) <오빠가 돌아왔다>를 통해 처음 읽었어요. 되게 쉽게 읽히더라구요. 단편집에 실린 소설 중에 '이사'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읽을 때는 막힘 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이야기에요. 지금에서야 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이 아닐까 싶네요.

아참, 문득 궁금해진 게 있는데요. 책은 주로 사서 읽으시나요?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를 고수해왔는데, 이런 신간/인기도서는 빌리기가 너무 힘들어요 ㅠ

한사람 2012-01-28 09:1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길어서..
마음의 다짐? 같은게 살짝 필요하지 싶어요.
요즘엔 너무 구구절절 풀지 말자고 쓸때마다 생각은 하는데...
잘 안되요.. 늘이는 건 자신있는데, 정말로 줄이는건, 하하하

저는 김영하의 <퀴즈쇼>를 처음 읽었구요.
읽은 책 중에는 <빛의 제국>이 제일 좋았어요.
단편들은 말씀대로 읽을때는 짜릿하고 신나는데..덮고 나면
불쾌? 비슷했던 것 같아요.그게 매력이지만요.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에 있구요.

저도 신간들은 거의 구매하는 쪽이어요.(기준은 그야말로 그때그때 변덕에 따라서)
책값이 능력에 비해 주제넘게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 같아서..우울합니다 ㅠ
서평 이벤트는 꼭 읽고 싶은 책만 신청하는데
제 기억상으로 이벤트 하는 책 치고 엄청 좋았던 경우는 없었던거 같아요 ㅠ
(중간 정도면 행운이죠, 하하)

마치 명품 브랜드는 세일안하는 거와 같다고 할까..
도서관은 꼭 내가 보고 싶은 책은 항상 대출중이라는^^

비로그인 2012-01-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글도 마술적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ㅁ'~)

한사람 2012-01-28 09:14   좋아요 0 | URL

길지만 가독력 우수-마술적?
리얼은 왜일까..음..극찬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하하하

가연 2012-02-04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저야 다른 작품들은 읽지는 않았고.. 김영하의 수상작만 읽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다만 옥수수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보이는데, 별로 그 키워드에 집중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뭐라고 부연하면 좋을까, 사실 스토리 자체는 좀.. 확 뭔가 사로잡는 그런 것은 없던데ㅎㅎ 그런 면에서 뭔가 훌륭한 해석을 남기는 작품이 수상된 것 아닌가, 하시는 한사람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한사람 2012-02-04 23:21   좋아요 0 | URL

히히, 그렇죠?
중요한 건 옥수수를 이루는 내용이 아니고 옥수수를 해석하게 한 김영하의 기획력이라니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