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은 꼬리를 물고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다. 저자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 나는 한창 생태박물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나라 이 분야 최고 전문가를 소개해주며 자문을 받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당시 나는 이과분야의 교수들을 만나는 것을 거의 시간낭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과학관 프로젝트를 하다보면 해당분야(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등) 교수들을 한번은 꼭 만나게 되는데 -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나 - 그들은 거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적인 감각도 떨어지고 아이디어 면에서도 원리와 법칙만 설명하며 천재라 불리우는 어느 교수는 말투까지 어눌한 경우도 있었다. 많이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 표현하고 생각을 입체화하는 것은 각기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과학분야 교수들에겐 가장 중요한 핵심 컨텐츠만 과외 받듯이 찍어달라는 수준에서 자문을 마무리하곤 했다. 당연히 최재천 교수도 그럴 분(?)으로 생각하고 나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가지고 연구실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을 열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방안은 거대한 헌책방처럼 곳곳이 책더미에 쌓여 있었고 교수님은 방 한가운데 무슨 열반에 이른 수행자처럼 정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계셨다.(책상도 어깨높이 까지 쌓아 놓은 책으로 여분의 공간이 전혀 없었다) 머리와 수염과 의복의 상태는 며칠 밤을 새우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흔쾌히 웃는 얼굴로 먼저 악수를 청하셨다. 더 말이 필요 없는 연구자의 진중한 아우라에 나는 흠칫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대화하면서 그가 전혀 과학자라는 (내 편견의)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유창한 인문학적, 문학적 언어구사 능력이었다. 그때 나는 미래 지속가능한 에콜로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왜 인간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되는지를 강의 받듯 전해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태박물관 전체의 주제나 공간 연출까지도 아이디어를 얻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든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세한 항목마다의 전시연출에도 모두 설명 드리고 자문을 받고 싶었다. 같이 동행한 영업부장이 나오면서 혀를 내두르며 저분은 과학계의 이어령(이어령은 업계에서 이빨로 통함)이라고 농담했던 것도 기억난다. 단순히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래 묵혀온 생각을 풀어 놓는 듯한 느낌. 그때 나는 저자가 가진 학문에 대한 열정과 동물과 환경을 향한 사명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미팅 순간의 집중력 등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공부해서 가지 않은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고 돌아가는 내내 ‘최재천’이라는 이름 석자를 되뇌었다.(그땐 지금만큼 유명하시지 않을 때 였다. 유명하긴 해도 스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도에 국립대구과학관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을 때, 전체 컨셉을 통섭으로 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뒤지다가 바로 <통섭, 에드워드 윌슨 저, 사이언스 북스, 2005>의 역자가 최재천인 것을 확인했다. 그분은 과거 전시하는 회사에서 자문 받으러 온 일개 기획자를 기억할리 없겠지만 나는 당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마치 ‘통섭’이라는 책이 나를 위한 구세주로 느껴지던 시기였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인연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그 책을 밤새워 읽고 과학관 컨셉을 도출한 후 (당시 막 뜨기 시작하던)통섭에 관한 브리핑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그러니까 나도 최재천 교수의 통섭을 얼마간 널리 알린 사람에 속한다 ㅋ) 그 책과 하워드 가드너의 <체인징 마인드, 이현우 역, 재인, 2005> 미셀 루드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 박종성 역, 에코의 서재, 2007> 훗날 이어령의 <젊음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등은 우리가 과학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항상 참고서처럼 지니고 다니던 책이었다. 그 후 내가 조직생활을 때려 치고 사업에 손대었을 때 저자는 서울대에서 이대로 스카우트 되셨고 내가 보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했다.(내가 조선일보를 끊지 않는 이유 중에 최재천 교수의 칼럼도 속한다 ㅠ) 지금은 내가 처음 뵈었을 때보다 엄청나게 유명한 사회인사가 되셨고 그동안 많은 책들이 소개되어 일반인에게도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자의 책을 서점에서 만날 때마다 웃기지만 나는 마치 나 혼자만 알았던 어떤 과학자의 비밀을 다 같이 공유하게 되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내가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음을 매번 환기하곤 한다. 그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과학이니 인문학이니 하는 경계가 필요치 않은 통섭학자임을 인식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내가 말로만 통섭학자의 아우라를 느꼈다면 이번에 <통섭의 식탁>은 글로 된 증명서 같았다. 이 책을 덮은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배가 부르다. 모두 영양가 높은 지식만찬의 덕택이다.

 

 

엄지를 치켜 세우며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신간 중에 어엿한 인기 장르가 된 것이 바로 ‘책 이야기’이다. 예전엔 문학 비평가들이 자기 이름을 걸고 시나, 소설, 고전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모음집을 출간했는데 요즘은 평론가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읽어온 책들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리뷰어로서 이런 책은 늘 관심의 대상이며 그들은 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해석하고 소개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책을 이야기하는 책속에서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듯 강렬한 호감을 느끼며 책을 찾아 읽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읽지 않았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허세부리기도 그만이다. 단점이라면 같은 이유로 책 이야기만 읽고 정작 해당 책은 패스하게 될 경우도 있다는 것.(고전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재천 교수의 책 이야기는 설사 이 책에 나온 그 어떤 책도 들쳐보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막강한(치명적인) 장점이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은 문턱이 높아 나같은 문과출신은 미리 포기하게 되는데 그나마 이런 책때문에 눈과 귀가 트이는 시간이기 때문에. 또 하나 읽다보면 어느새 과학과 인문의 구분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은 들어가는 입구는 분명 과학이었지만 나오는 출구는 인문으로 변해있다. 과학분야의 책을 소개하는 책 자체도 많지 않지만 저자처럼 인문학적 통찰이 문학적으로 제시된 글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저자가 주장하듯 배우는지 모르면서 깨우치는 방식이 가장 훌륭한 공부라고 저자는 스스로 우리에게 그 효과를 입증하는 과학자로 남을 듯하다.

 

 

 

   우선 이 책의 구성은 식탁이라는 컨셉 하에 이루어지는 각종 요리의 향연으로 볼 수 있다. 총 56권의 책이 한 권마다 어엿한 하나의 꼭지를 이루며 메뉴판에 소개되어 있다.(359p나 되니 만만한 분량은 아니다. 비율을 보면 56권 중 세프 추천 3, 애피타이져 7, 메인요리 31, 디저트 5, 일품요리 6, 퓨전요리 4) 동물과 생명, 진화, 우주, 과학자에 관련된 자연과학 책이 삼분의 이 정도 차지한다. 나머지는 인문사회분야 혹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들인데 주제도 가족, 여성, 경제, 역사,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와 범위를 말 그대로 경계 지을 수가 없다. 저자는 맨 처음 셰프가 추천하는 책으로 제인구달의 <인간의 위대한 스승들>과 조너던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 그리고 리처드 랭엄의 <요리의 본능>을 콕 집어 소개하고 있는데 각각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삶, 요리의 진화적 중요성을 언급하며 마지막에 음식을 준비하는 요리사를 찬양하고 있다.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그래서 가장 인간답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구절이 마치 자신이 이 책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는 것 같아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랫동안 음식을 준비해온 요리사였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는 저자가 왜 비빔밥을 예로 들며 책 이야기를 식탁으로 꾸렸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요리가 인간을 동물이 아닌 인간적인 존재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든 것이기에 요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인 것이다. 단순히 책을 나열하고 요리의 순서에 따라 형식적인 의미로 책을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저자는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인간에게 영양을 섭취하게 하듯 (그러한 인간적인 마음으로) 책으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내가 존경하는 부분은 이런 식의 지식이 체화된 혜안이다. 이것은 편집자가 책의 리스트를 받아 테마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단순 분류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확실히 감명 받은 (전공분야) 책에서 얻은 주제의식이 반영된 통섭의 결과이다. 그는 음식이 맛있다면 요리사를 향하여 엄지를 치켜세우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덮고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엄지로 수백 번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

 

 

개미만큼만 알아도

 

 

 

   책을 덮고 나니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가르침은 역시 ‘알면 사랑한다’ 였다. 저자는 끊임없이 서로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된다고 설득한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모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책의 전반에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쓰며들어 있는데 저자는 그들을 하나라도 더 알면 지금보다 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다 같이 잘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것이 우리 못지 않게 ‘이곳에서 삶을 누릴 자격과 권리를 지닌’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의 시작이라 주장한다. 그는 침팬지, 고릴라, 야생 원숭이, 개, 개미 등을 평생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저서를 소개하며 그들이 외치는 주장을 전해주고 있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통나무집을 짓고 숲속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고, 삶의 절반을 나무위에서 보낸 여성생물학자도 있었다. 꿀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꿀벌이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춤을 해독하여 꿀이 있는 곳까지 날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지켜 달라 말한 적 없는 아프리카의 동물을 지키다가 밀렵꾼의 손에 살해된 비극의 과학자도 있었다. 저자인 그 역시 물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며 갈매기의 깃털에서 채집한 진드기의 아름다움에 전율이 돋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금도 열대생물학자로서 타잔 네 동네를 드나들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사는 동안 평생 열대 한번 못 가 본 사람이 가장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개하는 책을 하나 읽지 않고도 전해 받은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하고 경건하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으로서 생명체중 가장 스마트하다는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겸허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 지나친 인본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그리고 같은 생명체로서의 상대적 존중과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인간은 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하는 인간은 산업경제에서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당당하게 파괴하는 주범이었기 때문에. 주의와 편의를 앞세워 야생동물을 박멸했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이념으로 서식처를 파괴해 왔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저자들의 목소리를 빌어 개인 소비 수준으로 측정하면 세계의 부는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미래세대에도 사용해야하는 생물권의 건강상태로 측정해보면 부는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며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모독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멸망하리라 예언한다.

 

 

 

   그는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담론 외에도 의생학이 어떻게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단한 아이디어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개미의 위대함은 이런 식으로 연구가 된다. 두발로 걷는 우리보다 험한 지형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넘나드는 다지류의 특성을 이용해 재난구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로봇이 개발된다면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대형참사 현장에서 더 많은 인명을 구조하지 않을까? 그는 공룡같이 무시무시한 동물의 필요성도 알게 쉽게 정리한다. 알파포식자들이 사라지면 남은 동물 중에서 가장 야비하고 경쟁력이 강한 소수가 생태계를 지배하여 지구를 황폐하게 한다는 경고는 이런 식이다. 그들은 시장을 독점하려는 몇몇 대기업들의 횡포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부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기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에게는 그 무엇도 아닌 우리 인간이 가장 잔인한 짐승인 걸 알고는 있느냐고. 인간만이 다른 동물의 행동과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닌데 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듯이 구느냐고.

 

 

 

   그는 생명과 진화를 말할 때엔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의 의미 즉, DNA의 영속가능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금 슬프기는 하지만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면 내 생명은 물론 생명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골고루 소중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느냐 반문한다. 많은 세계적 과학자들은 현대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사회 및 환경 문제로 생물다양성의 고갈을 꼽았다고 한다. 숲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동물이 멸종하고 생태계의 질서가 혼란스러워 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행이 천천히 진행된다고 혹은 나 사는 동안엔 별일 없을 것이라고 눈을 감는다. 그는 바로 우리 다음 세대의 운명을 걱정한다. 자연 환경이 지속되지 못함은 물론 사람의 가족환경도 붕괴될수 있다는 섬칫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아 시작된 일이다‘라며 출산율 저하의 문제를 반 이상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같아 그 부분은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그 부분에서는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저자가 몰라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다행히도 인간은 생명과 생명 다양성을 사랑하게끔 태어났다는 것이다. 퍼뜩 집에서 열심히 장수하늘소를 키우던 아이 생각이 났다. 과학관에서 가져온 장수하늘소였다. 마트에서 집도 사고 먹이도 사고 육 개월을 키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밀폐된 공간에서 돌보다 보니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이는 장수하늘소 때문에 삼일을 울었다. 어른들의 영혼보다 순수한 아이들의 눈에는 장수하늘소도 자신과 같이 숨을 쉬고 일상을 교감하는 어엿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저자는 생물학자들이 매일같이 바라보고 관찰하던 동물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업무상 스트레스 이상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 말했다. 조금만 넓게 생각해보면 이는 꼭 자신이 기르던 동물에만 해당되는 감성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인 것이다. 과학과 기술도 그 폐해를 비난만 하지 말고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다시 과학과 기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고 설득한다.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양보, 관점의 전환. 미래사회를 공상하는 인간이 아니고 현재사회에 공생하는 자연. 이 말을 하고 싶어 그는 수많은 반찬을 대접했던가 보다. 특정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주입하거나 강요 혹은 위협한다면 더 멀어질 수 있으니 이렇게 음식에 골고루 버무려 천천히 섭취하게 만들었나 보다. 

 

 

 

   저자는 자신처럼 통섭형 인물이 많아져 문학과 과학의 만남이 하나의 ‘문화적 담론’으로 거듭나길 학수고대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가 파도에 씻기듯 모래처럼’ 스러지는 풍경을 자세히 목격한 독자로서 다시금 알아야 사랑한다는 말씀을 되새겨 본다. 알고 사랑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과연 모르고 사는 것보다 편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라지만 분명 사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기도 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건 살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목숨 같은 일이 아닐까. 아는 건 사는 것이다. 아니, 알아야 살 수 있는 것이다. 몰라도 살수는 있지만 그건 사실 죽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같이 살아가는 존재가 지켜야 할 가장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 지구를 양분하고 있는 두 지배자는 인간과 개미라 했다. 개미가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꺼이 인간도 개미를 존중해야 한다. 딱 개미만큼만 알아도 우린 우리 아닌 것들과 영원히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존재인지 모른다. 몇 년 째 까치를 연구한다는 그만큼은 못되어도 우리가 몇 년 동안 개미만큼은 알려고 눈을 떠야하는 이유이다. 개미를 안다는 건 인간외 나머지를 다 안다는 것이니까. 그건 참 기특하고도 아름다운 그래서 진정으로 스마트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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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06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지 않아도 미안하지 않다'고 느끼도록 하는 책이야기는 부질없다고 느껴요. '읽지 않으니 미안하다'고 느끼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내 이웃 이야기는 내가 이웃하고 부대끼며 느껴야 '참답게 알'지, 누군가한테서 말만 듣고서는 하나도 알 수 없거든요...

저는 요즈음 쏟아지는 '책을 말하는 책'이 하나같이 너무 재미없어요.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어 죽도'록 이끌어 내지 못하거든요...

cyrus 2012-03-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책'들에 대한 책이 나와서 좋긴 한데 너무 소개하는 데만 그치지 않을까 한편으로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특히 과학 관련 도서 같은 경우는요 ^^;;
자신들이 추천한 책들도 직접 읽어보게 만드게끔하는 어필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연 2012-03-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슨은 그런 생명체와 생물 다양성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랑을 'Biophila'라고 불렀었지요. 최재천도 윌슨의 사상에 많이 빚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책 전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이르기 위한 앎이 군데군데 숨어있는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한사람님만큼 이렇게 즐겁게 읽지는 못한 것 같네요ㅠ 통섭형 인물이 어떤 것인지 사실 잘 감이 안오기도 하고.. ㅋㅋ
 

 

 

 

 

#1. 우리가 정말 인사를 나누었던가요

 

 

 

 

   동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입주가 완료되자마자 앞 다투어 중소형 마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어 달 사이 백 미터 이내에 세 개의 마트가 들어서자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에 상징처럼 버티고 있던 구멍가게가 문을 닫았다. 가끔 두부나 참치캔 하나씩 사러 들르곤 했는데 아이는 가게 아저씨가 친절했다고 유난히 아쉬워 했다. 우리 아파트 말고 길 건너 아파트내 가게를 포함해 구멍가게가 두 개나 망하고 그 자리에 편의점이 들어섰다. 편의점 자리가 버스 정류장 바로 앞이라 아이들이 학원버스를 기다리면서 음료수도 사먹고 시간이 나면 컵라면도 사먹고 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전에 있던 구멍가게 아저씨는 돈이 오가면서 내가 사람에게 돈을 건네며 사람이 계산을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편의점 알바 학생은 마치 마네킹이나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긁고는 무표정하게 영수증을 건넨다는 것.(알바 학생은 아무 잘못이 없다) 아저씨는 ‘날이 춥다’ 혹은 ‘축구에서 이겼다’, 아니면 ‘저런 빌어먹을 놈이 있나’ 같은 한마디를 덧붙이며 요즘 살기 힘들죠? 하는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늘 검은 모자를 쓰고 무릎에 담요를 덮고 계시던 모습이 주름진 얼굴과 함께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나 편의점 알바는 전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큰 일 날것처럼 서둘러 가게를 나오는 게 일상화되었다. 그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실까... 이럴 줄 알았으면 거스름돈 받으며 따스한 한마디라도 해드릴 껄... 사는 게 이렇다. 늘 지나고 나서야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는 왜 이리 달라지지 않는 건지.

 

 

 

 

   지난 겨울 학교앞 네거리에 붕어빵 장사가 시작되었다. 세 개 천원이었는데 정말 맛있고 크기도 커서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 이었다. 늘 학교 끝나고 북적거리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느 저녁 아홉시가 다되어서 그 앞을 아이와 함께 지나가는데 -그때가 영하 십오도 였는데 차 엔진 수리를 맡기고 마트까지 걸어가던 중이었다 - 붕어빵 아저씨가 막 마무리를 하던 참이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뛰쳐나와 붕어빵이 남았다며 그냥 가져가시라고 봉지에 한 무더기 싸 주셨다. 먹을 거 주는데 왜 이리 뭉클한지 감사하다 인사를 하고 아저씨 눈을 보았더니 참 선하게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러다가 방학이라서 문을 열지 않는 것인지 자주 문을 열지 않는 모습이 몇 번 포착되었다. 근 한 달 간 한파와 함께 붕어빵 아저씨를 볼 수가 없었다. 또 그러다가 우연히 아이 핸드폰 바꿔준다고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이동통신 대리점 앞이 붕어빵 가게) 간만에 문을 연 게 반가워 그동안 문을 왜 안여셨냐고 허긴 너무 추웠죠, 하며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는데.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와이프가 저 세상 갔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 주책맞게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나왔다. 그 말 듣고 붕어빵을 사면 동정한다고 여기실까봐 그냥 입만 막고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힘내세요? 비슷한 - 나와 버렸다. 아저씨가 웃는 모습이 마치 슬픔같은 건 초월한 사람같아서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났다.

 

 

 

   새로 생긴 마트 중 맛있는 과일과 야채를 싸게 파는 곳이 있어서 지난 겨울 자주 이용했다. 그 마트는 조금 더 큰 마트와 조금 더 작은 마트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주차가 좀 불편해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아 보였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었다. 우리 모녀는 그 마트만 줄기차게 이용했다. 갈 때마다 매장에 사람이 없어 휑뎅그레 한 것이 우리가 미안해 질 정도 였는데 최근에 입소문이 나서 사람이 늘었다. 마트에 과일 담당 총각이 있는데 외모가 꼭 연예인같이 생긴 것이 어쩐지 거기 있기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농담도 잘하고 목소리도 크고 우리가 이거 살까 저거 살까 고민하고 있으면 얼른 다가와서 귤도 넣어주고 갑자기 할인도 해주고 그렇게 아는 척을 했다. 며칠 전에 그 총각이 과일과 한참 떨어진 구석 위치에 있던 우리에게 다가와 그동안 사람 없을 때 늘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방울토마토를-1Kg 정도 되는-카트에 넣고 갔다. 다른 직원들도 우리가 가면 어쩌다 장바구니 없이 들러도 비닐 값을 받지 않거나 말이라도 한마디 정겹게 해주는 터였다. 우리는 횡재한 기분으로 마트를 나왔다.

 

 

 

   동네 빵집에 언젠가부터 커피를 팔길 게 한번 마셔봤는데 그 옆에 카페베네와 파스구찌보다 맛이 훨씬 나으면서도 값은 반값이었다. 커피향이 정말 진해 한 번 씩 생각이 날 정도였다. 커피를 자주 사다 마신지 몇 개월이 지나자 또 입소문이 났는지 아줌마들이 다 거기 커피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옆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아니라 그 빵집에서 다들 차 마시며 수다를 떨지를 않나. 무언가 내가 구심점(?) 역할을 한 것 같아 뿌듯하던 차에 어느날 빵집 주인아주머니가 빵을 사는데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것이다. 쿠키랑 초콜릿, 날짜가 지나가려고 하는 빵들이었다. 다른 카페도 많은데 매번 찾아 주셔서 고맙다고 한마디를 붙이셨다. 우린 또 올레~ 하며 가게를 나왔다.

 

 

 

   아줌마로 산다는 건 사실 동네 가게 아저씨, 아줌마와 빈번하게 인사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제 어엿한 봄이 되었으므로 동네 장사하시는 분들과 더 따스한 눈빛을 나누며 살아도 좋을 것 같다.

 

 

 

 

#2. 우리는 봄이 왔다고 인사하는 사이입니다

 

 

 

   이번 주에 하루가 멀다 하고 새가 날아들듯 책이 날아 들었다. 3월부터 조금 바빠졌다. 책만 보고 글만 썼더니 그 날들이 소용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일과 관련해 수익창출의 길로 들어서다 - 그래서 부지런히 읽었는데도 책은 여전히 쌓여있으시다. 가끔 이틀만 글을 안올려도 무슨 일 있냐고 물어 오셔서 아무 일 없다고 하기 참 난감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눈물나게 고맙다 ㅋ) 다른게 아니라 이런 책을 싸들고 씨름을 하고 있다. 앞으로 책 읽는 속도를 빨리 할 생각이다. 여지껏 내가 책을 느리게 읽는다는 생각은 안하고 살았는데 책이 쌓여 있으니 그것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헐.

 

 

 

 

 

 

 

 

 

 

 

 

 

 

 

 

 

 

 

   그 중 박에스더 기자가 쓴 에세이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는 나와 같은 세대라 말투며 논리며 결론까지 미칠듯이 비슷하다. 김영하의 장편은 미니북 때문에 예판 주문하였으나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는다.(잡으면 지난번 원더보이처럼 그냥 앉은자리에서 눕는 자리까지 보다가 그 다음날 다 제쳐두고 리뷰쓸까봐 ㅋㅋ) <통섭의 식탁>은 리뷰를 반 쓰다가 다른 일이 생겨 중단 상태.(개학한다고 아이 머리 잘라주러 미용실 갈 때 들고 갔다가 거기 아줌마들이 요리책이냐고 해서 씩 웃었다 ㅠㅠ)  <자본주의, 그 이후>는 예상외로 어렵지 않아 한 챕터 읽고 잠시 호흡 가다듬는 중이다. (어떻게든 이 책의 리뷰를 써 보고 싶다) 이웃님이 뒤늦게 바람들었냐고(소설 안 읽고 자꾸 인문 기웃거리니까, 하하)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나 살아온 이 체제-하니까 왜 나꼼수 생각이 나는 것이냐-를 여지껏 크게 고민안하고 살아온 세월이 한심해 죽을 지경이라서 그렇다.

 

 

 

   다음 주 내로 폭풍 리뷰가 이어질 듯하다. 만약 이어지지 않으면 그래도 여전히 책 읽고 (낑낑대며)글쓰고 있는 줄 아시길.

 

 

 

   이상 울 동네는 봄이 왔다고 한사람이 알려드림. 우리는 적어도 계절이 바뀌면 그렇다고 그러냐고 좋겠다고 좋다고, 서로 인사는 하는 사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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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3-0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내음과 더불어 사람향기를 맡으셨군요~ 디지털 시대의 아놀로그 감성이 사라져서 안타갑지만 복귀는 힘든일이니 그 안에서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해야 겠지요?

아~ 이제는 김영하 소설은 읽고 싶지 않던데요~ 너무 재미없어요 이제는 ㅎㅎ

한사람 2012-03-04 15:2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저는 특별히 읽고 싶은 작가도 읽기 싫은 작가도 없어요 ~
다만 김영하는 단편이 너무 허망해서 장편이 더 낫더라구요.
또 김영하급(?) 작가들의 소설은 어차피 읽을거 빨리 읽는게 속편하더라구요.

어젠 아이가 친구하고 영화본다고 <휴고>를 예매해줬는데 완전 재미있었다고 해서
같이 그거나 볼껄, ㅋㅋ 후회중이어요^^


아이리시스 2012-03-0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봄이 왔어요, 한사람님.
김영하 먼저 읽어주세요 ^_________^

제가 <검은 꽃>을 좀 많이 좋아해요.
음, 그러니까 '버려진 자' '잊혀진 자'에 대한 코드가 좋아서요.

어제 주문하려니까 월욜에 온다고 해서(하루에 안오고) 그냥 미뤄뒀어요. 읽고 싶어요. 히히히.

한사람 2012-03-04 15:25   좋아요 0 | URL

저 위의 4권의 책중에 김영하가 4위였는데, 하하
아이님때문에 슬쩍 바꿔치기 해야겠군요 ㅋㅋㅋ
저는 가장 중요한 ㅋ <검은 꽃>은 안 읽어보았어요.
단편들 하고 <빛의 제국>, <퀴즈쇼>정도만~
제가 그런 식으로 예판을 안사고 어영부영하다가 어정쩡하게 산 책이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었거든요. 어차피 읽게 될거면 다음부턴 그냥 예판으로 편하게 주문해 놓자~~ 그때부터 그렇게 마음 바꿨지요, 히히
솔직히 따라오는 클리어 파일이나 미니북 시리즈들이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나중에 막상 그런거 없이 덜렁 사려고 하니 배만 아프더라는 ㅋㅋㅋㅋ



이진 2012-03-0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웃과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는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라요.
저희 집이 시골바닥의 메카라 불리우는 곳이라서 꽤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보시는데
그때마다 너무나 정겹고 행복하답니다 ㅎㅎ
저도 폭풍 리뷰써야할텐데... 저는 이제 리뷰에 자신이 없어졌어요. 흑흑

한사람 2012-03-04 15:31   좋아요 0 | URL

늘 놀라고 있어요, 이진님의 필력이
이제 고1 학생의 것이라는게 믿기지 않아요, 하하
나는 그때 무얼했던가, 뭐 이런 생각 했어요 ㅋ
사진 바꾼거 조금 적응이 안되긴 하는데요...

음..리뷰는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첫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1. 잘써야 한다.
2. 남들이 잘 쓴다고 한다.
3. 나도 내가 잘 쓴다고 생각한다.
4. 그래서 더 잘쓰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적어도 두개 이상 있기) 때문에 그런것 같아요. 그래서요.
1. 내가 왜 잘써야 하는가.
2. 남들은 다 남들에게 잘 쓴다고 한다.
3. 나는 내가 못 쓸수도 있다는 걸 안다.
4. 그러므로 나는 잘 쓰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을 한번 바꾸어 봐요 !!!!!
화이팅~~~~~~~
(잘 써야지 잘 쓰고 싶다, 생각하면 더 안되는거 알죠??)

이진 2012-03-04 23:21   좋아요 0 | URL
후후... 사진바꾼게 전부 적응안되신다고
하지만 저는 이 남자가 좋기에 *^*

맞아요. 신간평가단원이기도 하고 주위에서 어린나이에 대단하다고들 말해주니
제 스스로 강박감(?) 같은것이 생긴것 같아요.
"나는 글 못쓰는데...? 아직 내 수준은 그 정도에 다다르지 않은것같은데"
하면서 더 좋은 글을 써내야겠어, 더 좋은 단어를 사용해야겠어 하는 압박?
생각을 바꾸는 것이 신선한걸요! 남들은 남들에게 다 잘쓴다고 한다!! 후후후

한사람님의 응원을 따라 이제는 마음을 담아서 글을써야겠습니다..
머리로 말고 마음으로요...히히

한사람 2012-03-05 21:14   좋아요 0 | URL

강박감이 심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글이 자꾸 무거워져요.
가장 좋은건 내가 글 올리는 세상엔 나보다 글도 잘쓰고
책 많이 읽은 사람도 많다~ 이런 생각, 하하
또 스스로 자기 기대치를 조금 낮추어 보는 것도 좋아요.
리뷰를 한권 쓰고 말것은 아니니까
이번에 좀 아니다 싶어도 다음번에 제대로 쓰지 뭐,
이런 식으로요.
저도 실은 이렇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어요 ㅋ
잘썼다고 못썼다고 아무도 뭐라 안하는데 나 혼자 의심하고
걱정하는게 문제죠 !!!!

맘을 좀 편하게~~~~ 먹어봐요~

cyrus 2012-03-0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라서 그런 걸까요? 어제부터 개강하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지금과 같은 이런 좋은 기분이 좀 길게라도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

한사람 2012-03-04 15:33   좋아요 0 | URL

앗, 캠퍼스의 개강 !!!
부러워요, 부러워. 아직도 학생인 시루스님이요.
저도 꼭 같은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과 같은 이런 좋은 기분 좀 더 오래 ~~~~하하

(무도 한달 이상 안하고 있는거 어케 생각해요? 씩씩씩~~~)

카스피 2012-03-0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는 모습이 넘 정겨워 보입니다.그런데 우린 어는새 그런 정겨움보다는 편리함에 빠져들어 인간다운 정을 느끼는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네요ㅜ.ㅜ

한사람 2012-03-04 15:36   좋아요 0 | URL

어머, 카스피님. 가끔 이렇게 좋은 말 남겨주셔서
간지럽지만 고마워요 ㅋㅋㅋ
(저는 제가 하는 짓을 잘 알기 때문에요 ㅠ)

제가 사는 동네는 초등, 중등, 고등학교가 아파트 단지와 믹스되있어요.
학부모인 아줌마들과 장사하는 분들을 자주 스쳐지나가요.
저도 성격상 마구 인사하는 체질이 아닌데,
한번 꽂히면 의리있게 거기만 가요 ㅋㅋㅋ
그러다 보면 정도 나누고 가슴이 따뜻해지던걸요^^

2012-03-03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4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4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붕어빵아저씨 이야기에서 울컥 저도 눈물이 솟았어요. 동네이웃들과 겨울도 봄도 함께 하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헤아리고 반가워하고 안타까워하고 뿌듯해하는 한사람님 모습이 좋아요~.

한사람 2012-03-04 15:44   좋아요 0 | URL

예... 지나갈 때마다 짠하고 그래요 ㅠㅠㅠ
저는 한번 친해지긴 어려운데 한번 또 친해지면
되게 오래가는 스타일이어요 ㅋㅋ
가게도 한군데만 파구요.
눈빛이 선하지 못한 사장님이 하는 곳은 절대 안가요ㅋ
(그리고 주인이 착하면 동네방네 사명을 가지고 소문내요 ㅋㅋㅋ)

섬님은 울산에 사시죠? 저는 울산에 두번 가보았는데,
그때마다 죄다 거리에 현대차만 다녔던 기억이 있어요.
친구가 울산에서 아나운서를 했어요.
비록 먼 곳이지만 같은 마음 느껴주셔서 참 가깝게 느껴집니다^^

숲노래 2012-03-04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이웃들하고
좋은 이웃이 되어
하루하루 좋은 이야기 나누어 주셔요..

한사람 2012-03-04 15:50   좋아요 0 | URL

예..된장님 !

그런데, 된장님 방에 몇 번 갔다가 아직도 좀 부끄러워서
그냥 두어번 그냥 왔어요 ㅋ
(그걸 왜 말하게 되지?? ㅋㅋㅋㅋ)

참, 저는 오늘 날이 안좋아서 빨래 안돌렸어요 히히

순오기 2012-03-04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인사에 참 인색했다는 반성을 부르는 페이퍼네요.
드뎌 봄이 왔네요~ 엊그제 봄비도 내렸으니 곧 화분도 내 놓아야겠네요.^^

한사람 2012-03-04 15:50   좋아요 0 | URL

에잉, 뭐 반성까지 안하셔도 되요.
저도 살갑게 인사는 못하고 그냥 꾸준히 다니다 보니까
주인들이 고마와 했던거 같아요.
매출 없을 땐 그런 손님들이 고맙잖아요.
(거기다가 제가 좀 소문을 냈거든요, 하하)

순오기님 사시는 동네는 오늘 구름 없나요?
여긴 흐려서 좀 꾸리한 날이어요.
내일부터 아이들 본격적인 학교 생활이 시작되는군요.
초등생은 주 5일 수업이 실시되어서 엄마들이 투정하고 있어요.

오늘 식구들 잘 챙기시구, 내일부턴 또 활기차게
기분좋은 봄날 맞으시길(이 무슨 거창한 ㅋㅋㅋㅋ) 바라요^^

마녀고양이 2012-03-0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파트에도 6년간 하던 가게가 사라지고, 편의점이 들어섰어요.
학생들이 항상 컵라면이나 인스턴스 뭔가를 먹고 있죠. 음.... 글쎄요.... ㅠㅠ

동네의 개인 음식점도 하나둘 사라지고, 체인점만 계속 들어오네요. 던킨 도너츠, 베스킨 라빈스, 롯데리아
올해 이렇게 세개나 들어왔다죠... ㅠㅠ. 저는 일대일을 좋아하는, 동네 아줌마인데... 머랄까 좀 그래요. ^^

그래도, 봄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여유를 갖을까 해요. 히힛.

한사람 2012-03-05 21:17   좋아요 0 | URL

마고님!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봄비가 살짝 왔어요.
난 이런 날 좋거든요.
커피도 유난히 진하게 다가오고 ㅋㅋ
구멍가게 없어져서 여간 아쉬운게 아니어요.

오늘은 반찬가게가 하나 없어지고 그 자리에 부동산이 들어 왔어요.
씁쓸 ㅠㅠㅠ
신간 쌓여 있는데 저는 김형경 에세이를 장바구니에 넣고 살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ㅋㅋ

보물선 2012-03-0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글은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대기업이 뛰어드는 걸 비판하는 글처럼 읽힌다 ㅎㅎ

사람냄새 풍기며 사는게 이런거구나~ 하는 느낌으로 읽어야 하는데, 내 참^^

한사람 2012-03-09 09:00   좋아요 0 | URL

대표적인 게 떡볶이집이지 ㅋㅋ
이젠 그 옛날 오뎅국물 맛도 안나더라 ㅠㅠㅠ
깔끔하게 포장되어 와서 위생적이긴 하지만
그러는 사이 덤으로 오가는 정은 사라졌어.
예전엔 아파트지만 세탁~ 이런 소리도 들리고 했는데
세탁소도 무슨 크리닝으로 다 바뀜.
사람냄새가 아니라 돈냄새만 남 ㅠㅠㅠㅠㅠ
 
고전혁명 -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이지성.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피켓도 혁명이고 책도 혁명이다

 

 

 

   고전을 읽어야 두뇌가 천재성을 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고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쓴다면 아마도 그건 이 책을 뛰어넘진 못할 듯하다. 이 책의 반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떠올리게 하고 나머지 반은 황광우의 <철학하라>와 연결짓게 된다. 두 사람 모두 고전을 읽어야 천재도 되고 리더도 되고 삶의 고민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영리하고 효율적이며 적절한 조합이다. 기회가 닿지 않아 미처 <리딩으로 리딩하라>를 읽어보지 못했거나 <철학하라>가 부담스럽다면 이 책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을 듯하다. 두 책을 절묘하게 믹스했는데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모델이 탄생했다. 바로 ‘혁명’의 테마이다. 두 사람 각자의 책이 ‘자아혁명’이었다면 두 사람이 함께하니 ‘관계혁명’이 되고 나아가 사회 및 국가혁명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먼저 이 책의 핵심 타겟은 작년 한해 백 만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해당 주인공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난도 교수는 이 책이 ‘이 시대 모든 청춘을 위한 지침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턱없이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혁명의 방법이 필수적이라 말하고 있다. 청춘이 지난 지 한참이라 생각하는 나도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꽤 달달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김난도 교수의 책이 좋고 나쁘고 혹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온 국민이 무슨 열풍처럼 불안한 심정을 추상적인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에 기대었다는 사실이다. 그 책이 감성코드를 자극했다면 이 책은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성코드를 두드리고 있다고 할까. 위로의 공감대와 연대 후에 이차적 방안으로서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지성과 황광우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전을 읽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와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기 위해 변화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스펙 쌓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아르바이트로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끈질기게 고전을 시작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것이 청춘의 사명이자 임무이고 결국 혁명하는 길이라고 선동한다.

 

 

   사실 어찌 보면 피켓 들고 거리에 나가 시위하는 것이 (질 확률이 많은)몸의 혁명이요 책 읽고 앉아서 생각 바꾸는 것이 (이길 확률도 있는)정신혁명이라는 다소 보수적인 뉘앙스로 읽힐 우려도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면 생각은 바뀌고 마음은 움직인다. 또 하나 이 책도 결국 고전읽기를 독려하는 설명서이자 중요 고전의 해설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것 보다는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맹자와 플라톤을 집어 드는 것이 더 효율적인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각종 자격증을 위한 참고서와 실용서, 그리고 신간 자기 계발서를 외면하고 플라톤의 <향연>이나 한비의 <한비자>를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이 필독서라는 것도 알고 읽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됨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여간해선 큰맘을 먹지 않고서야 인문고전을 펼쳐들기 힘이 드는 것이 우리네 익숙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두렵고 아득한 마음을 제발 바꾸라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시작을 하라고 이런 책을 쓴 것 같다. (제목을 혁명으로 한 것도 환기를 위한 자극이 아닐까) 이런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고전에 대한 필요성은 늘 잠재적인 채로만 숨어 있어 습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공자와 이이, 플라톤, 애덤 스미스와 토마스 모어로 가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그냥가도 되지만 징검다리는 무엇보다 건너는 재미가 있고 덤으로 추억도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한번쯤 건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니까.

 

 

 

생존은 성공이 아니라 혁명이다

 

 

 

   요즘 트위터를 하다보면 여기가 무엇을 하기 위해 모여든 곳인지 새삼 의아할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소통하는 것인지 너무나 혼란스럽다. 아니 정말로 소통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발설하는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럽다. 어떠한 사안을 보고 순간적으로 흥분에 휩싸여 감정을 드러낸 글, 즉각적인 피드백이 되어 무차별, 무한정으로 확산되는 글, 부정의 말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다소 경솔해 보이는 글, 이런 글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다가 누구를 향해 떠들고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고속도로 휴게소에 위치한 화장실처럼 그때그때 감정의 배설물을 마음대로 적어 놓을 수 있고 마음에 맞으면 다른 사람 것도 마구 가져올 수 있고 시큰둥하면 모른 척해도 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그것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거대한 공동의 장소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음향만 없을 뿐이지 어느 시장통에 불난 호떡집처럼 귀가 어지럽고 흡사 학창시절 쉬는 시간 십분 동안 떠들어대는 친구들의 소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소음이 그냥 일반 소음으로 지나가면 될 터인데 어떤 날은 그 소음으로 어이없는 상해를 당한 사람이 등장한다. 엊그제만 해도 어느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다툼이 일어난 임산부가 업체 이름을 밝히며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글을 올리자 사람들은 갑자기 벌떼처럼 모여들어 그 업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업체는 상당한 매출피해를 보았고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조사 결과 종업원은 임산부가 주장한 것처럼 배를 발로 걷어차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임산부가 괘씸한 마음에 좀 과장해서 업체와 사람을 비난한 것일 뿐이었다. 조사 발표 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임산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엊그제 실컷 욕했던 종업원을 두둔하는 것이었다. 하루 만에 전세는 역전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다면 내일이면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 것인가. 비단 이번뿐이 아니고 어떠한 사안이 수면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바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누군가를 옹호하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고 단 몇 줄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단지 의혹만 제기되었을 뿐인데 하루가 지나면 기정사실화 되어 있고 소문은 진실이 되어 있다. 누군가를 붙잡고 나면 모두 다 이렇게 일이 커질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그냥 내 생각을 몇 자 적어 올렸을 뿐인데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이 적어 올린 수많은 사람들의 같은 생각은 무시무시한 파급력을 가진 여론이 되고 무기가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꼴을 얼마나 보아 왔던가. 이 모든 건 단지 현상과 사건에 실시간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만의 문제일까. 원인을 제공한 사건 당사자들의 문제일까. 우리는 단지 정의를 원했고 부조리를 비판했고 범죄자를 비난하고자 했을 뿐인데 왜 그러는 사이 우리가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서 우리는 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을 보는 것이며 왜 길게 보지 못하고 짧게만 보는 것이며 왜 드러난 외양만 보고 숨은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왜 상대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면서 나를 향한 기준은 넓고도 얕은 것이며 왜 기다렸다는 듯 무슨 일만 터지면 눈을 부릅뜨고 그 기준을 가지고 여론재판에 힘을 싣기 위해 스탠 바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혹은 계획적으로 공격을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아 놓고 보니 우리는 기득권층에 대한 피해의식을 잘 숨겨 놓고 언제든 보이지 않는 입과 귀가 되어 때가 되면 여지없이 비겁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가해하고 있는 꼴이 되었다. 다수의 네티즌, 불안한 청춘, 추락한 중산층, 이른바 2040 세대의 많은 이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의 몸부림을 보아줄 여력이 없는 듯하다. 냉소와 무관심의 만연. 그러면서도 놀랄만한 집중력과 발빠른 순발력. 광기가 휘몰아치는 순간의 소리없는 아우성. 침묵의 아비규환. 누군가의 절망 혹은 실패, 아니면 항복.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표면적인 평온...... 이것이 과연 첨단의 오늘을 살아가기에 스마트한 생존방식인 것일까. 혹시 우리는 생존의 의미를 혼자 살아남는 서바이벌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학교나 회사, 국가의 시스템에서 살아남는 것이 생존하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하는 삶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때다 하고 결격사유가 되는 사람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생존을 경쟁과 성공의 프레임으로만 인식하면 반드시 나 아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거나 패배해야한다. 저자는 말한다. 이 시대의 ‘생존’이란 학교, 회사, 국가에 기대어 그 속에서 남을 밀어내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다운 나, 삶다운 삶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학교나 회사에서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나다운 나로 살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그들이 제공하는 생각으로 생존하는 시스템은 백날 해봤자 그들의 노예로만 사는 길일 뿐이라고. 변화된 생각으로 자신을 바꾸는 ‘자아혁명’, 그러한 자아가 모여 사회를 바꾸고 시대를 바꾸는 ‘관계혁명’이 완성될 때 비로소 내가 생존하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루어진 혁명을 통해 최종적으로 진짜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그것은 곧 나만의 고전을 쓰는 고전혁명이 아니겠냐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칫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급진성에 짓눌려 깃발을 든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선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성찰하여 고민한 사람들과 그들이 이룩한 결과물의 총체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것들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면면히 살아남은 아주 질긴 생명체인 듯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책이 대단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 너가 고전을 읽고 그것을 나눔으로 해서 사회, 국가를 바꿀 수 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한 혁명의 논리를 펼친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고 제시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더럽고 비열하고 냉소적인 세상을, 가진 자만 배부르고 못가진 자만 쪼들리는 이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출발점을 고전으로 보고 연결고리를 논리화 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전은 곧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이기 때문에. 혁명이란 세상을 뒤엎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뒤집는 일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판을 짜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자는 혁명하는 방법으로 고전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를 ‘생각’하고 다시 ‘질문’하고 그러면서 ‘변화’하라고 충고한다. 나아가 내가 읽은 것을 나누고 함께하라 지시한다. 아프고 좌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찰하고 누구의 잘못인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과 거짓 하는 정치인에게 속지 않고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라 가르친다. 고전을 읽는다고 이러한 깨달음이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 효과를 가져 오지는 않지만 분명 그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주장한다. 수레바퀴는 매번 반복해서 제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아도 수레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 책의 후반부엔 나와 사회, 국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위해 엄선된 동서양 인문고전 10선이 소개되고 있다. 자아혁명에서 시작해 관계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잘 상징하는 느낌이다. 장자의 <장자>는 세상이 절대가 아니라 상대라는 것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의 역사가 패러다임의 교체에 관한 문제이지 객관성과 고정불변의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므로 우리에게 관점과 상대주의를 시사한다. 내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고 내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는 뜻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혜능의 <육조단경>은 행복의 이상향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결국 마음에 달려있다고 우리에게 낙원과 행복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공자의 <논어>와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각각 대동사회와 이상국가를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는 동서양의 비슷한 결론으로 보고 지금의 우리 시대를 반추해보는 거울로 삼으라 충고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이이의 <성학집요>를 통해 리더의 조건을 정리해 볼 수 있으며 신분계급의 타파를 주장한 박제가의 <북학의>와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통해 부와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을 밝혀보자고 제안한다. 이 모든 고전은 시대적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진보적인 의견을 제시한 샘플들로서 결국 내가 원하는 행복, 내가 역할기능을 수행할 사회, 내가 살아가야 할 국가, 내가 바라는 지도자를 고민하는 방법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똑똑한 대중, 현명한 국민이 되는 길을 인도하고 있다.

 

 

   고전을 통한 삶의 길 찾기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해야할 시급한 임무였다. 이 책을 징검다리 삼아 다시금 고전 읽기의 중요성과 가치를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한권의 고전을 읽었다고 서재에 책을 꽂으며 내면의 시간을 가졌다고 우쭐해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했던 대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변화하려 애를 써야겠다. 비록 이념의 혁명가는 못되었지만 고전을 통한 혁명가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상사의 눈에 찍히지 않는 지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좋지만 왜 똑똑한 신하는 군주를 죽이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한비자>를 집어 들자. 지금 우리 처한 시대가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의 시대와 <목민심서>의 정약용의 시대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고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본능, 혁명으로 생존하려는 본능을 일깨우도록 하자.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고 모든 가능성 역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고전에서 각자 롤모델을 찾고 나름의 인생의 가치를 찾고 그 가치에 꿈을 더해보자. 그렇게 반복하여 고전을 인내한 시간의 축적을 통해 한층 더 성숙된 시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과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 글에 책임을 지자. 다시 옛날의 책상과 제쳐둔 서재로 돌아가자. 아주 먼 훗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집어 들려고 했던 고전을 당당히 빼어내자. 함께 간다는 건 같은 생각, 같은 꿈을 꾸는 것이라 했다. 함께 읽는 것은 변화의 에너지에 가장 확실한 근원이 될 것이다. 지금, 고전을 펼치시라. 그것이 함께 살 길이고 우리의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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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2-2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못읽어봐서 댓글 남기는게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목차를 살펴보고 이 글을 읽어봤는데 뭐랄까, 자기계발서와 인문서를 섞은 느낌이 드네요. 사실 저는 계발서 계통은 절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절대 안보는 편이라ㅠ '철학하라' 라는 책이 더 끌리기도 하고, '철학하라'에서 다룬 고전과 여기서 다루는 고전이 겹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이 책만의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도 좀 궁금하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이야기들보다ㅋㅋㅋ 잘 지내고 계시나요? 매번 들르면 이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시간이 흘러있네요.

2012-03-0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
사라 베이크웰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같은 말

 

 

 

   처음 이 책을 서점에서 보았을 때 끌렸던 이유는 단연 목차였다. 제목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떠올리며 책을 넘겨보는데 스무 개의 목차 소제목은 바로 정답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차 중에는 ‘인간성을 지켜라’같은 보편적인 메시지도 있었지만 ‘책을 많이 읽되, 읽은 것을 잊고 둔하게 살아라’ 같은 특별한 조언도 있었다. 목차와 서문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아우라는 중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일 먼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1장이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이다) 일단 죽음부터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이 어쩐지 나 가려운 데를 콕 집어 긁어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죽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 한 달 전에도 일 년 전 삼 년 전에도 변함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특별히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오 년 전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이다. 물론 엄마가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지만 아버진 십 오년 투병생활 끝에 가신 것이기에 어느 정도 준비기간이 있었다. 아버진 늘 바로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십 오년을 버티면서 내게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연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투병환자 치고는 그만하면 꽤 오래 사셨다고 까지 생각했다. 어떤 날은 내 젊은 날의 불행이 모두 누워있는 아버지 탓만 같아 하루라도 빨리 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충격이라기보다는 어떤 습관처럼 지켜보던 드라마의 아쉬운 종영소식만 같았달까.

 

 

   나는 아버지 병수발에 지친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랐고 엄마 역시 자기관리가 철저한 분이라 당연히 이변이 없는 한 그러실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삶의 여유를 찾고 돈 걱정 없이 즐기실만하니까 어이없게도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변은 여전했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이었다. 엄마가 죽었음을 깨달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바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더 정확히는 엄마 없이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나, 였을 것이다.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 내 평화롭고 안온한 삶도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엄마 사후 일 년 간은 거의 정신병원과 수면제, 심리치료를 달고 살았고 때론 무당굿도 하고 점도 보고 술도 먹고 말 그대로 내 몸 내 맘이 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살았다. 수면제를 끊기 까지 한 육 개월이 걸렸고 사회로 복귀하면서 차츰 일상을 찾기까지 또 일 년이 걸렸다. 삼년 째 되니 조금 제정신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걸 알았다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외려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방황할 때가 더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에서 책 읽고 글 쓰면서 틈만 나면 지겹도록 엄마가 죽었고 아빠를 미워했다고 떠들었다. 책을 선택하고 글을 써대는 어떠한 기준도 없고 오로지 책과 관련해 어떻게든 이런 내 자신, 지금 내 상황과 화해를 하려 애를 썼다. 돌아보면 서평내용도 순전 모두 용서하는 밤, 그리하여 내일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자는 결론을 내는 식이었다. 책과 상관없이 나는 어쩌면 그 말을 하고 반복해서 되뇌이려고 서평을 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읽고 쓰고 또 읽고 써도 잠들 때 드는 마지막 생각은 단 하나, 이대로 죽어서 만약 내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쩌지, 만에 하나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날(사고) 이후 열에 일곱은 그런 밤이었다.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을 때 나는 갑자기 일어나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냉장고를 열어보고 서랍을 열어보고 아이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속옷을 갈아입은 다음 지인들에게 뜬금없이 그 새벽에 인사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꺼버리고 다시 눕고는 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부모님과 찍은 사진, 졸업사진, 결혼사진, 아이 백일사진, 돌사진을 확인하고 불을 켜고선 거울을 들여다봤다. 도저히 내일 죽을 사람같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도 오늘 하루 살아내었다가 아닌 오늘 하루 죽어갔다고 달력에서 날짜 하나를 쓱쓱 지우며 눈을 감았다.(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엄마도 내일 자신이 죽을지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여행을 가시는 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엄마가 훌훌 깃털처럼 가볍게 떠나시던 뒷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침에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들떠있던 목소리도 기억한다. 엄마의 집은 변함없이 청소가 되어 있어 깨끗했고 이불도 빨래도 냉장고도 쓰레기도 모두 완벽했다. 생각해보니 한 평생 엄마는 항상 청소를 하고 집안을 완벽하게 치운 다음 외출을 나가셨다. 엄마가 죽는 날은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니었고 늘 자신이 하던 대로 했을 뿐인 날이었다. 나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임을 깨우쳤다. 단지 그 일상은 일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예측불허의 순서였을 뿐이었다. 누구도 그 일상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가족이나 친구가 그 일상의 주인공이 되었을 경우 비로소 자기일상의 마지막을 남몰래 그려본다. 엄마는 어느 바람 좋은 봄날 꽃구경을 갔다가 오후 세시 이십분에 죽었다. 사망진단서에 쓰는 말로 두개골 골절이고 내가 하는 말로 머리가 깨져서 죽었다. 머리가 깨지기 직전까지 꽃노래를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불렀던 노래는 어떤 노래였을 지가 궁금해지기 까지 오년이 걸렸다. 정신과 의사는 내게 사람의 시체가 끔찍한지 알지만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무뎌지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온다고 위로했다. 나는 아직까지 엄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엄마의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 죽음과 엄마를 매일 생각했더니 그렇게 되었다. 충격은 점점 무뎌지고 엄마의 마지막 일상은 내 일상 속으로 완전히 용해되어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는 현실은 그 일상이 바로 오늘 혹은 내일일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그 일상에 대한 불신과 확신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며 언제나 불안한 것이다. 나는 공교롭게도 바로 어제까지 같이 일을 한 사람이 오늘 아침 죽은 경우가 꽤 된다. 이 지독한 일상의 트라우마가 나에겐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변형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나에게 산다는 문제는 곧 죽는 날까지 산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와 같은 뜻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결국 모두 어떻게든 죽기 때문이 아닐까 해서이다.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문제가 왜 중요하냐하면,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죽는 것을 믿지 않고 믿는다 해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겪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죽는 날까지 죽음에서 얼마나 자유로와 질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불안하지 않게 살기 위한 일련의 방침처럼 읽혔다. 물론, 해답은 얻었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살다보면 어느덧 그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날이 온다 해도 그 역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 싱겁긴 해도 이것이 오백 페이지되는 이 책을 덮고 난후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 사는 길

 

 

 

   먼저 이 책은 몽테뉴의 저서가 아니다. 몽테뉴는 우리 나이로 환갑의 나이까지 살았는데 마흔부터 이십년간 우리가 아는 수상록[隨想錄, Essais, 1586]을 집필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오로지 수상록 한 작품만 남긴 사람이 몽테뉴이다.(바꿔 말하면 수상록을 완성하는데 이십년이 걸렸다. 수상록이 중단된 것은 몽테뉴가 죽었기 때문이므로 더 살았다면 수상록의 집필기간은 더 늘었을 것이며 당연히 페이지도 추가 되었을 것이다) 천 페이지 넘어가는 수상록을 읽어보지 못하고 목차만 훑어보았다. 슬픔, 나태, 선악 등의 제목 외에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같은 일로 울기도 웃기도 한다’,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정석대로 하자면 먼저 수상록을 읽어보고 몽테뉴만 한 이십년 공부한 저자의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하겠지만 이 책을 먼저 접한다고 해서 원서 없이 해설서만 집어든 것 같은 일종의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여지껏 위대한 사상가의 평전이나 작품 해설을 이처럼 깊이 있고 재미나면서도 쉽게 서술한 책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몽테뉴에 대한 (교과서적인)부담감 때문에 이 책은 쉬운 쪽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술술 넘어가는 터에 그냥 끝까지 내달렸다. 한 이틀 이 책에 올인하면서 간만에 책 읽는 재미를 보았달까. 몇몇 부분 감동적이고 문학적인 결론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저자는 놀랍게도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 여성이었다. 흡사 몽테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마냥 -그것도 개인비서나 친구 혹은 제자, 딸이나 되는 것처럼 -저자는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으로 보였다. 얼마나 읽고 생각하고 연구했으면 몽테뉴보다 더 몽테뉴를 잘 말할 수 있단 말인가.(한나 아렌트의 제자인 엘리자베스 영 브루엘이 쓴 <아렌트 읽기>의 느낌도 든다. 그러나 아렌트의 제자는 학문적인 책임을 가지고 아렌트를 연구한 반면 이 저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저 몽테뉴를 읽고 독자로서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내가 환갑 줄에 들어서게 되는 이십년 후면 몽테뉴가 태어난 지 오백년이 된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몽테뉴와의 오백년의 시간차를 뛰어넘어 마치 유즘 유행하는 인생의 멘토같은 느낌을 받았다. 몽테뉴가 죽은 해는 1592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다. 몽테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순신을 떠올리면 그는 저 까마득한 세계사속의 한 페이지에 등장할까 말까한 교과서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아마도 어떤 작가와 작품을 말하는 내용의 책으로 자기 주장을 세상에 떠들려면 이 정도가 그 정점의 완성치일 것이다. ‘아마존 닷컴 올해의 책’같은 문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가끔 예외도 있는 것, 그래서 (아무의 권유도 없이 내 돈 내고 책을 산 입장에서) 주저없이 살길을 이 책에서 찾는 방안을 추천하고 싶다.

 

 

   몽테뉴는 약 십년간 둘도 없는 친구가 죽고 아버지와 남동생이 죽고 자식들이 연이어 죽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 사람이다. 거의 이년에 한명 꼴로 집안에 초상을 지른 것이다. 잔인한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매일 밤 죽음을 생각하고 먼저 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터이다. 그는 우연히 말을 타고 가다가 하인과 부딪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극적으로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 연대기에 의하면 빈사상태의 낙마사고가 있고 3년 후부터 몽테뉴는 에세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시기를 제일 먼저 우리에게 통보하며 몽테뉴가 그랬듯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선수를 친 것이다. 왜냐하면 몽테뉴가 자신의 빈사체험을 통해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려면 일단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타일러 주는 것이다.

 

 

   몽테뉴는 가까운 이의 연이은 죽음과 낙마사고 이후 관직을 은퇴하고 영지에서 내면의 시간을 시작한다. 이때가 바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인 듯 하다. 즉, 그동안 몽테뉴를 가장 괴롭히던 죽음에 대한 개념정리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썼다고 해서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매일 밤이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몽테뉴는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집필을 하게 되며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게 되며 - 자신의 유일한 작품인 에세와 함께 성장하고 에세를 통해 자신을 완성해 나갔다. 저자는 바로 몽테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에세를 썼다고 분석한다. 이 책도 몽테뉴가 죽으면서 끝이 난다. 내가 만약 앞으로 이십년을 더 살수 있다면 몽테뉴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끄적이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시기를 온전히 사용한다 해도 그로써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과한 후 몽테뉴가 죽기까지 한 일을 이 책을 통해 밝혀주었다. 아마 어떤 이는 나처럼 이 책의 마지막에서 몽테뉴가 숨을 거둘 때 마치 내 임종의 순간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죽는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잠드는 것처럼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이다...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p33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잘 사는 길

 

 

 

   몽테뉴는 죽는 법을 배워야 사는 법도 떠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 건 배우자마자 다시 써먹을 기회가 없다. 그저 다른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단 한 번의 실전을 준비할 뿐인 것이다. 몽테뉴는 실전을 준비하는 장소로 뒷방을 선택했다. 가게 뒷방이라 불린 그곳은 완벽한 도피처이자 상실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장소로 기능했다. 그는 ‘자기탑’에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신뢰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매일 매 순간 변화하는 의식과 경험의 흐름을 묘사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법, 사물을 바라보는 법, 관찰한 것을 즐겁게 글로 옮기는 법을 터득했고 그게 살아가는 법이라 깨달았다. 그렇게 살다가 꽁꽁 얼었던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듯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나 자신을 죽음에게 내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 믿었다. 생활은 작품과 일치했고 작품은 인생과 일치했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자기만의 뒷방을 마련해두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 은둔처, 고독을 확보해야 한다. 이곳은 자신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외부와의 관계나 소통이 단절된 은밀한 장소라야 한다. 이곳에서는 아내가 없는 것처럼, 재산이 없는 것처럼, 시종과 하인이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 대회를 나누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나 재산을 잃게 되더라도 이들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p243

 

 

   그러나 그가 오랜 기간 뒷방을 집필실 삼아 내면의 세계를 성장시키는데 주력했다 하더라도 은둔의 정도를 스스로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느리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일면이 있었고 건망증이 심하고 키가 작았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근엄해 보이는 16세기 법관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스스로의 이중성을 "수줍음을 잘 타면서도 버릇없이 굴기도 하고, 순결하면서도 음탕하기도 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말수가 적고, 억세면서도 예민하고, 영리하면서도 어리석고, 무례하면서도 사근사근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진실하고, 박식하면서도 무식하고, 자유분방하고, 인색하면서도 낭비벽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계획적으로 철학을 연구하려고 한 적이 없는 우발적 철학자’라 평했다. 그는 공개토론도 좋아했고 붙임성도 있는 편이어서 공직에선 사교적인 역할도 주도했다. 한창 종교분쟁이 심해 나라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내란에 휩싸여 있을 땐 구교와 신교를 중개하는 역할도 지혜롭게 수행했다.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처럼 그는 성을 개방하고 살아서 외려 안전해진 케이스였다.

 

 

   그가 제시한 관점의 상대성은 때론 싸워서 이길 수 없으면 피한다는 식의 주의전환 같은 요령도 알려주고 동물의 지능과 감정이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법관을 하면서 깨달은 인간의 결점과 오류의 발견은 인간의 이성이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의 배경이 된 듯하다. 이성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허세를 경계하고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점 역시 늘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모든 일을 현실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궁극의 관점과 연결된다.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는 이 책에서 언급된 인간적인 번영을 의미하는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나 평정을 뜻하는 ‘아타락시아 (ataraxia)’, 그리고 운명애를 의미하는 ‘아모르파티’ 와 맥을 같이 한다. 모두 운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상징하는 개념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기적이 일어나거나 기이한 행동을 하지 않고 순리대로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p295

 

 

   몽테뉴는 질병, 전쟁, 기근, 죽음을 흡사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모두 관조하며 광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발 물러나 탑에서 글을 썼다. 자만심과 우월감, 습관, 야망과 탐욕, 가족과 주위환경, 광신, 운명과 죽음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집필하는 것을 종교로 삼았다. 자기모순을 똑바로 관찰하고 결점을 발견하고 이중성과 위선을 인식하며 그것들을 지닌 채로도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깨우치기 위해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불완전한 인간(자신)을 수용하며 완성된 인간으로 발전하는 길이었다. 몽테뉴에겐 관찰이 습관이고 자유가 규칙이고 솔직이 태도이고 여담이 방식이었는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강해’진 것이다.

 

 

 

완전히 빠지는 것은 더 잘 사는 길  

 

 

 

   이 책에는 몽테뉴에 대한 후세의 평가 및 후속작업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책을 가지고도 그가 17세기에는 협잡꾼이나 파괴분자로 비난받았던 사실과 오랫동안 편집의 전쟁이 이어져 왔음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전해 받은 몽테뉴는 상당히 정치적이었던 인물로 느껴지는데 저자는 그가 정치에 소질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신흥귀족 출신에 어려서부터 다양한 교양과 언어를 교육받아온 몽테뉴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몽테뉴에게선 어떤 열등감이나 패배감, 시대적 사명감이나 영웅심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양심과 죄의식에 관한 화두나 지도자로서의(몽테뉴는 보르도 시장을 5년 역임했다) 의무와 책임의식, 혹은 권력에의 야망같은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 제조나 영지관리에도 무관심했고 가정적인 남편, 다정한 아버지상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철저히 평생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집중적 관찰 및 연구에 몰두한 지독한 에고이스트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 매순간 생각해온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몽테뉴와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몽테뉴 말년에 인연을 맺은 사후 편집자 구르네에 관해 저자가 평한 부분에서도 비롯된다. 논란이 많았던 구르네라는 다소 불확실한 여성에 대해 저자는 매우 세심한듯 하면서도 어쩐지 애틋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같은 여성인 저자는 ‘그녀가 완전히 황홀경에 빠졌던 것처럼 누구나 완전히 매료되어야 한다’고 그녀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매료된 것은 저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십년전 부다페스트 헌 책방에서 몽테뉴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그것은 저자가 구르네에게 느낀 동질감이었고 그것은 저자가 몽테뉴에게 감지한 공감과 꼭 일치했다. 또 그것은 몽테뉴가 문학적 동반자 라 보에시에게 느낀 교류의 감성과 일치했다고 생각한다. 몽테뉴도 라 보에시도 구르네도 저자도 분명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고민했고 그들은 모두 거울을 보듯 상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것은 이 책을 읽게 되는 나같은 독자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저자는 이 세대를 초월해 이어지는 상호작용 때문에 고전이 각자의 마음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시에 수많은 독자를 한마음으로 모은다고 부연했다.

 

 

   이 책에는 몽테뉴의 전후 세대를 포함해 그가 살았던 당시 16세기 프랑스의 역사적 상황과 주변국과의 관계, 그리고 당시 철학적 가치관이 몽테뉴의 인생과 잘 믹스되어 있다. 저자는 현대 비평가들이 자신과 닮은 꼴인 몽테뉴를 리메이크 할 때 반드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텍스트로만 저자의 의도를 분석하고 동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재구성 작업도 결국 몽테뉴를 알아가는 다양한 방식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는 몽테뉴에게서 배운 대로 판단을 보류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오는 오류의 상황도 지혜롭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자신 말고 몽테뉴를 말해온 다른 사람도 정답일수 있다고 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중요한 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영감을 얻은 누군가가 이어받아 자신처럼 완전히 빠져든 채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마치 우리 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살아가는 다양한 시도(불어로 에세예essayer는 '시도하다'라는 뜻)로 인식되기도 한다. 얼마나 대견하고 근사한 광경인가.

 

 

   문득 몽테뉴가 그의 절친 라 보에시를 사랑한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이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뇌리에 떠오른다. 그는 말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가야 하지만 죽음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고.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라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불행히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은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지 정답을 말해줄 수가 없고 누군가 내게 그럴싸한 답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주체는 결국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썼기 때문이고, 내가 읽었기 때문‘에 어제와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일찌감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자 아름다운 해답일랑은 알고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말고도 얼마든지 내게 적합한 답은 한두가지 쯤 얻어 놓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계속하여 질문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지 나와는 같은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답을 교환하고 다른 답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것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지는 하나로 답할 수 없고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과정만이 정의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인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답하며 그렇게 죽는 날까지 그 ’어떻게‘를 어떻게든 실천하려 노력하는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머리 터지토록 고민해도 어떻게는 살고 하나도 고민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산다. 그냥 살고 잘 살고 조금 더 잘 살고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지만 고민하면 조금 더 지금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희망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다행히도 고민의 주체인 우리 자신에게만은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토록 고민해야 할 이유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덧붙임)

 

오늘이 엄마의 다섯번째 기일이다.

나는 잘 있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오늘도 잘 떠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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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영우 박사가 지난 23일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준비를 잘 하셨나 봅니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더군요.
죽음을 생각하며 잘 살면 좋겠는데
대부분은 죽음도 생각하지 못하며 잘 살지도 못하죠.
저는 죽을 때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고, 가족들에게 최대한 피해주지 않고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는 동안 잘 살아야 하는데 그게 좀 자신이 없다라구요.
이책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오랜만이어요. 오랜만이지만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ㅋ

stella.K 2012-02-27 11: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3월은 저도 좀 기운이 나요. 더 이상 춥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도.ㅋ
 

 

 

 

 #1. 컴백홈

 

 

 

집에 돌아왔다. 제일먼저 경비실에 들러 택배 상자를 수거하고 어디 멀리 갔다 오느냐는 경비 아저씨의 질문에 날이 추웠다고 동문서답을 했다. 나 추웠다는 거 누가 좀 알아줄까 싶어서. 아저씨는 이제 날이 풀렸다고 봄만 오면 된다고 하신다. '제 말이요'.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이 아파트 재활용 수거 날인데 작업하시기가 한층 수월하신 듯 했다.

 

 

그런데 난방을 끄고 갔더니 집안이 온통 냉기였다. 짐을 풀고 있는데 서재 방에서 약간 타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아뿔사. 의자에 전기 방석을 안 끄고 간 것이다. 다행히 의자가 타진 않았기에 큰 일은 없었지만 이래서 불이 나는 구나 싶었다. 분명 끄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이제 늙은 것이 틀림없다. 어떨땐 문을 잠그고 왔나 싶어 주차장에서 다시 올라간 적도 있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나.

 

 

그나저나 이번엔 완전한 로그아웃 상태를 유지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됬다. 컴퓨터도 안 켜고 메일확인이니 서재방문 같은 건 돌아와 하리라 마음 먹고 떠났는데 저녁에 딱히 할 일도 없고 혹시 해서 가져간 노트북의 용도는 역시 달리 용도가 없었다. 대단한 작업을 하러 간 것도 아니면서 일상과 여행을 분리하려는 태도 자체가 우스워지길래 그냥 보고 싶으면 보고 귀찮으면 잊기로 했다. 더 웃긴건 책도 안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노트북 가방에 떡하니 미리 넣어둔 책이 있더라. 이제 우리가 사는 현실 안에는 컴퓨터 바깥과 컴퓨터 안이라는 두 가지 세상이 거의 대등한 비율로 이중나선구조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어느 한쪽이 싫다고 나머지 한쪽만 볼 수도 없고 실상 그러기도 더 힘이 드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려는 작업도 찍어온 사진 몇 개와 다녀온 소회를 적어 올리려는 것이므로 결국 컴퓨터 밖에서 한 일을 컴퓨터 내부로 가져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고선 나는 여행을 마무리 지을 것이므로 두 세상은 상호 인과관계를 형성하며 우리네 현실을 완성해주고 있다. 스마트 폰이 생기면서 이 현상은 더 강화되기만 한다. 이게 무슨 목숨 줄이나 되는 것 마냥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어디를 가서도 세상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로그 아웃을 하지 못한다. 나 여기 어디라고 트위터에 한줄 떠들었다가 지금 누구 들으라고 누구에게 내 행선지를 말하는 것인지 뻘쭘 해지는 것이었다. 습관이란 정말 시간이 갈수록 철학이상의 종교가 되는 습관이 있지 않은가.


 

 

 

#2. 묘지에서

 

 

정말로 추웠다. 오랜만에 손이 몹시도 시렵다는 느낌, 에베레스트에 등반하는 산악인들의 동상은 어떤 고통일까를 처음으로 떠올리며 추위를 실감했다. 그래서 (산소만)사진을 못 담았다. 사실 찍어도 나는 자꾸 예전 엄마 살아 계실때의 사진과 비교하게 되는 지라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가 더 맞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아버지와 같이 묻히고 난 다음부턴 묘지 사진을 안 찍고 있다. 그러곤 돌아와 이 사진을 본다. 저 끝에 뒷정리 중이신 엄마를 보면서 잘 다녀왔다고 보고를 한다. 내가 마련하지 않은 이상한 종류의 꽃이 꽂혀있었다. 나 몰래 누군가가 다녀간 게 분명하다. 엄마의 형제아니면 아버지의 형제들이겠지... 언제 왔을까. 최근일 거라는 예감이 드는 건 왜 일까...


 

 


< 영천 국립 호국원 - 6년 전 >

 

 

묘지는 벌판이기 때문에 무슨 사막이나 남극같은 기분이 든다. 이 추운 날 죽어 묻히는 사람과 홑저고리 상복하나만 입은 상주도 있는데 나는 장갑이 없어서 얼어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신기한건 돗자리 깔고 앉아 있다보면 내 머리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참 따스하다는 것. 콧물을 훌쩍이며 앉아 있는데 봄소풍 온 것같이 순간 그 공간만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골의 추위인데 아무리 영하십도의 날씨지만 햇빛만 있으면 또 그 추위에 적응이 되면서 그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 나는 잠시나마 그곳은 어떠시냐 여쭈어보면서 나는 잘 있다고 대신 답을 한다.

 

 

 

#3. 경주에서

 

 

 

 

 

 

 

 

 

 

 

 

 

 

 

 

 

 

 

 

 

 


< 경주 호반 1교 >

 

강물이 얼어 있었다. 그 시선으로 보자면 산도 건물도 나무도 모두 얼어 있었다. 딱딱하고 건조해 보여 사진찍기도 재미가 없는 날씨다. 경주 보문호의 호반교라는 다리가 거울에 비친 것 마냥 수면에 대칭을 이루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날 얼음이 녹는 소리를 들었다. 얼음은 '스르르' 녹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얼음 밑에서 부터 심하게 싸움을 벌이는 듯 하나둘 부숴지고 빠개지고 으깨지고 때론 예리하게 돌아서면 둔탁하게 그야말로 요란을 떨면서 형태의 변형을 견뎌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어디서 공사를 하는 것인지 둘러 보던 중에 그 소리가 물 밑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얼음이 깨지는 곳에 퐁퐁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내친김에 돌을 던져 균열을 극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와 함께 여러번 돌을 던져 보았다. 나쁜 짓이었을까. 어떤 곳은 꿈쩍도 하지 않아 애꿎은 돌만 저 멀리 미끄러져 갔고 어떤 곳은 돌의 충격이 컸는지 물의 파장이 꽤 멀리 나아가는 듯 했다. 무엇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김훈 작가는 이런 걸 저절로 이루어지는 의식이라 하겠지...- 그들은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사이 제 살을 깨뜨리며 자신을 녹이고 있었다. 그건, 모르긴 해도 우리처럼 전쟁같은 삶 아닐까.

 

 

그럴 것이다.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것도 그와 비슷 할 것이다. 마음이 녹는 걸 기온이 올라가는 걸 풀린다고 하지 않는가. 단단한 덩어리가 녹아야 비로소 풀리는 것이다. 우리는 대단한 발견을 한 과학자나 되는 듯 한참을 다리위에서 얼음이 녹아 다시 물이 흐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아프더라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 석굴암 가는 길 >

 

 

석굴암 가는 토함산 길엔 죄다 앙상한 나무들만 즐비했다. 분명 어렸을 적 가본 곳인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불상도 그렇게 작았을리가 없는데 세월은 무슨 조화인지 모든 것이 축소된 크기로만 나를 맞이했다.

 

 

 

 

 

 

 

 

 

 

 

 

 

 

 

 

 

 

 

 

 

 

 

 

 

 

 

 

 

 

 


< 석굴암 계단 >                                                         < 불국사 대웅전 >

 

 

 

 

 

 

 

 

 

 

 

 

 

 

 

 

 

 

 

 

< 석굴암 입구에서 경주시를 내려다 본 전경 >

 

 

 

 

 

 

 

 

 

 

 

 

 

 

 

 

 

 

 

 

 < 속리산 휴게소 >

 

 

 

불국사를 고등학교때 가보고 처음 갔는데 그때 친구들과 사진찍었던 장소는 생생히 기억나서 참 반가웠다. 그런데 역시 규모가 어찌 그리 작을 수 있는지... 나는 생각만큼 그리 큰 사람이 되지도 못했는데 상대적으로 내가 보았던 그것들만 작게 느껴지다니. 작년에 경주에 갔을때 첨성대 역시 똑같은 느낌이었다.

 

 

신문에서 실상은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로 되뇌이며 반복하는 사람은 실제로 뇌에서 행복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호르몬이 발견된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때마침 찾아온 늦은 한파 덕에 사람 구경이 쉽지가 않았다. 한적한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이것이 행복인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행복일 것이다, 로 결정하기로 한다. 아니 이것은 행복이다. 늘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 이 맘때 여행을 자주 갔던 것 같다. 돌아와 이제 봄만 기다리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봄에 뭐 특별히 좋은 소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꽃이 피길 기다렸던 것 같다.

 

 

날씨가 풀렸다는 소식에 씨익 웃었다. 일부러 나 추우라고 날씨가 심술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아직은 아니다 긴장감을 주려고 했나 싶기도 한데 여튼 겨울을 끝내고 돌아온 느낌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내 두 눈으로 얼음이 녹고 있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아픈 겨울은 반드시 떠나간다. 어쩌면 아프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쇠같던 저 얼음을 녹이고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저들을 보면. 강물이 흘러가듯 봄이 오듯 다시 천천히 귀를 기울인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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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1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2-2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경주.. 좋은 도시죠. 사실 경주는 밤에 거닐면 더 멋진 도시기도 하지요. 문화재 전시지역의 소등시간쯤에 맞춰서 저런 곳에 가면 정말 색달라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옛날에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는데 잊을 수 없네요. 그러고보면 정말 수학여행의 도시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저에게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은가? 라고 묻는다면 춘천을 택하겠지만ㅎ 경주를 택하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한사람 2012-02-21 09:54   좋아요 0 | URL

ㅋㅋ 옛날에 그런 경험이라~
저는 밤에 같이 거닐 사람이 없어서요, 밤에는 못다닙니다.
운전도 야간엔 색맹환자나 다름 없어요, 하하

춘천은 대학생때 가본 후로
여행한다고 가본적은 없었어요.
경주는 영천호국원 갈 때마다 들르는데-영천에서 가까움-
순전 다시 운전하고 올라오기 싫어서 경주에서 하룻밤 자고 온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아예 묘지는 뒷전이고 경주에서 이틀밤 룰루랄라 하고 온답니다..

매번 느끼는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있더라구요.

gimssim 2012-02-2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국원에 부모님 뵙고 가셨군요.
이맘 때가 석굴암 가는 길이 제일 고즈넉할 것 같아요.
춘삼월 호시절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걸음을 옮기게 되지요.
좋은 여행 되셨는지요?

한사람 2012-02-21 09:57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중전님의 사진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보문호수에서요,하하

석굴암 가는 길이 이상한 매력이 있더군요.
나무들이 듬성듬성해 아래로 절벽이 훤하고 아차
발을 잘못디디면 저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내려가는 길인데 도착해보면 올라와 있고..

미치도록 추울줄 알았는데 또 걷다보니 견딜만하고
심지어는 나무들 사이로 햇볕이 포근하기까지 하고, 히히

그동안 경주에 가면서 석굴암, 불국사를 안가다가
이번에 아이때문에 가보았는데 완전 좋았습니다!!!!

순오기 2012-02-21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겨울에 떠난 여행이라니, 부럽습니다!
경주는 중3때 수학여행 이후 못 갔으니 벌써 30년도 훌쩍 넘어 4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ㅜㅜ
사진에 홀려서 석굴암 계단을 오르고 싶네요~ ^^

한사람 2012-02-21 10:04   좋아요 0 | URL

수학여행때 다녀간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는 어쩜 그리 크게 보였을까요.
불상은 아주 자그만하고
불국사에 왜 청운교 앞 단체사진 찍는데 있잖아요.
거긴 정말 동네 사찰같았어요 ㅠ
그 뒤로도 친구들과 엄청 걸었던 것 같은데 두어개 사당만 있고 끝...

규모면에선 실망이지만
그때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심정을 몇개 느끼고 돌아왔어요.
석굴암 계단을 내려오는데 마음이 이상했어요.
뭔가 일이 잘 될 것 같고, 히히
희망 같은게 가슴에 담겨진 것 같고..

저는 이쯤 되면 날이 풀리겠지 싶어 예약한건데
한겨울 날씨라 떠나기전 두려웠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것도 운치있고 나름 매력이 있더라구요.
순오기님도 언제 한번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세요 !!!!
경주갔다 왔다고 자랑한 적은 없었는데
그냥 말로는 할수 없을 무언가가 전해져 왔습니다~

굿바이 2012-02-2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이 녹고 있었단 말이지요. 이 말이 이렇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군요.
몇 해 전에 석굴암에 갔었는데 저도 그 계단이 참 작게 느껴졌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무거운 마음이 이곳을 지나갔기에 이렇게 닳았나 싶었어요.
여튼 잘 돌아오셨다니 제가 다 좋네요 :)

한사람 2012-02-21 13:45   좋아요 0 | URL

예, 얼음이 지금쯤 다 녹았을까..모르겠네요 !
그 얼음 녹는 소리가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마치 물속 깊은 곳의 그들만의 전쟁같았달까? 하하

잘 돌아왔구요.
날씨가 풀려서 좋아요.
언제그랬냐는 듯 벌써부터 봄옷 생각이 간절해요 ㅋㅋㅋ
(제가 다 좋다는 말씀이 ㅠㅠ 왜 이리 위로가 ...)

cyrus 2012-02-2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보기 좋았고요. 경주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여행 가셨을 때 날씨가 많이 춥던가요? ^^

한사람 2012-02-21 23:42   좋아요 0 | URL

많이 많이 추웠어요 ㅋㅋ

산소에서 가장 추웠구요.
돌아올땐 그래도 풀려서 나았지만
뭐 일도 다 보고 구경도 다 한 참이라 ㅠㅠㅠ

시루스님 하고 경주는 멀지 않군요^^
좋은 휴식이 될거예요~~~
(여친하고면 더 좋구요, 하하)

네오 2012-02-22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글씨가 왜이리 편해졌어요 ㅋㅋ 다 좋은데 사진밑에 <석굴암에 계단> 뭐 이런거 잘 정렬해서 올립시다 ㅋㅋ 삐딱하게 보이잖아요 ㅋㅋ

한사람 2012-02-23 16:26   좋아요 0 | URL

하하, 폰트를 크게 해봤어요.
시원하게~

그런데 <석굴암 계단>이 정렬이 안되었어요?
제 컴에선 멀쩡한데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