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이가 강으로 추락할 때 사람들은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말했다. 마술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한 것일까. 마술사는 제이의 몸을 토막 낸 다음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뼈를 발라냈을 것이다. 피로 범벅된 뼛조각에 다시 살을 입혀 제이를 소생시키고 밧줄을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을 것이다. 관객들은 제이가 밧줄을 사용해 승천하는 묘기를 신기한 듯 지켜보았을 것이다. 티벳 신화에 의하면 밧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장치였다. 밧줄을 타고 왕래를 하는 사람은 초능력을 가진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밧줄이 끊어진 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오직 죽은 자의 영혼만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다고 믿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면 좋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비록 마술이라도 누군가 실종이 되거나 충격을 받아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 모른다. 마술은 실패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닌, 꼭 성공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제이였을까. 제이는 분명 선택받은 사람인 듯하다. 비록 어리지만 자신도 일찌감치 그걸 알고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영혼을 이탈시켜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갇혀있는 개의 붉은 눈을 보고 눈물이 맺히고 밧줄로 묶여진 의자에서도 사물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체감했다. 친구들에게 흉기를 휘둘렀지만 그 고통이 바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지만 그가 느끼는 분노를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를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저 하늘에서 누군가 제이에게 밧줄을 묶어 놓았다면 그건 고통의 탯줄, 그 속박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제이는 고통 하는 존재들과 소통하는 자유를 누렸지만 과거에 속박당한 채 자신이 저지른 모든 행동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밧줄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구속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제이가 쇠바늘의 바리케이드에 몸이 잘려 나갈 때 그만 내게도 달려있던 보이지 않는 밧줄 하나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우리는 신들이 밧줄을 매달아 만들어 놓은 꼭두각시는 아닐까 하늘에선 우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위해 인형극을 연출한 건 아닐까, 하는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내면을 지탱하는 무언가가 끊어지고 나니 비로소 그 장면은 먼 훗날 우리의 마지막은 아닐까 싶었다. 어차피 삶이라는 이 길의 끝에서 죽음과 마주칠지 알면서도 달려가는 나, 그리고 당신, 그리하여 멈추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제이를 닮았다고 느꼈다. 제이가 느낀 고통의 무게가 소름끼치듯 선명하고 둔중하게 다가왔다. 우리도 혹 제이와 보이지 않는 밧줄로 연결된 존재들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묘기를 연출한 마술사는 제이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죽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마술사로 분한 소설가는 제이의 죽음을 구경한 관조자 동규도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제이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끔찍한 마술 현장의 관객이었던 우리는 남겨진 동규의 절망과 충격을 헤아리지 못했다. 소설가는 동규의 고통을 배려하지 못한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제이가 죽은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동규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제이라는 배우의 이야기가 아닌 제이가 출연하는 공연을 관람한 동규의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소설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도 결코 마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마술의 고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듯 했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람답지 못하게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지 않냐고  반문하는 듯 했다.

 

 

 

제이(提耳)는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제이의 속삭임은 이제 폭주족의 굉음이 되어 최후의 비명으로 남았다. 환청이나 이명이 아니고 화인처럼 선명하게 각인되는 슬픔의 낙인으로. 오늘 우리가 슬픈 것은 우리 존재가 모두 고아(孤兒)와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고아(苦我)로 살아갈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제이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이어주는 밧줄이었듯이 소설가는 신음하는 고아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세상을 이어주는 단단한 밧줄이길 소망한다. 소설이 사라진 시대, 소설가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네 고아 같은 지독한 고통을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아인 우리를 이승의 부활로 이끌어줄 가장 튼튼한 밧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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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2-04-03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역시.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이 작품 읽어줬는데
처음 부분과 제이와 동규가 만나는 부분을 읽어줬어.
마지막을 못들었는데, 혹시 마법사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으이.

너의 한자 명명 솜씨는 최고야!
어릴때 서당을 다닌게야??
논어를 읽으면 잘 읽을 사람이야.^^

서평 잘 봤어. 등긁어 준 느낌이야~

보물선 2012-04-04 18:36   좋아요 0 | URL
난 요즘 나온 논어는 너무 방대해 보이고
신정근 교수의 <마흔, 논어...>를 봐볼까 해^^
(마음은 원이로되, 쉰은 되어야 읽을 수 있을라나...ㅋㅋ)

가연 2012-04-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서두를 마술사 이야기로 시작했었던가요. 저는 다 못읽고 프롤로그부분에 해당하는 마술사이야기만 읽고 내려놓았는데,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부활하기 위해서는 일단 죽어야 한다..ㅋㅋ 하지만 왕이 보고 즐거워서 마술사가 다시 살려줄거라고 하면서 칼로 베어버렸던 신하는 끝내 못살아났으니... 부활하려면 선택받은 사람이어야 하나봐요, 풋. 끝까지 못읽어서 어떻게 내용이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1. 소설은 무얼 할 수 있나

 

 

 

김영하의 소설을 반나절 만에 읽었다. 이런 걸 아마 읽어 치웠다 할 것이다. 대단한 흡입력이다. 이 소설은 마치 폭주족이 질주를 하듯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특성을 가졌다. 2천 년대 중반에 극심했던 폭주족은 이제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추억의 컨텐츠로 읽혔다. (현실반영이 되어야 하건만...)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이 좀 다른 작품보다 먼저 출간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욕심이었다. 최근의 장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연달아 십대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남들이 못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거나,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거나 이번 소설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할 수 있는 주인공이 그들이다. 이른바 보이들의 놀라운 초능력이 만개되는 계절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은 원래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녔어야 할 심성이었다. 기본이 실력이 된 세상. 그러나 그 실력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게 된 세상. 세상이 변하다 보니 초능력이 아니어야 할 것들이 초능력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언젠가부터 남의 고통을 집단으로 구경하고 간간이 뒤에서 결과를 훔쳐보며 시간이 흐르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싶게 잊어버리는 일이 만연화 된 세상에 살고 있다. 한 때 힘들었던 사람을 위로는 못 할망정 은근히 패배자로 취급하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이제는 상처 받았고 고통스럽다 하는 것도 일종의 심리적 루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느라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는 사람도 많은 듯 하다.(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직도 베스트셀러인 것이냐.....)

 

 

소설가들은 입을 모아 힘을 합쳐 남의 고통을 외면하면 사람으로서 사람처럼 세상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주장한다.(톨스토이도 이 비슷한 말을 했다. 남의 고통을 냉담하게 외면한다면 인간으로 살 가치가 없다고) 어느 소설가가 그런 말을 안했을까 싶은 아젠다이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아프고 슬프지만 끝내 현실의 잔혹한 거울이 되는 이런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왜 요즘은 소설이 인기가 없을까. 전자책 소비자들은 대부분 자기계발이나 위로형의 에세이를 택하고 아저씨들은 경제나 자본주의, 시장이 들어간 책을 집어 들고, 주부들은 아이들 교육과 관련한 책으로 신경이 몰려 있다. 소설이 찬밥인 시대. 마음 아픈 것은 소설(바깥이 아닌)속에서도 밝혔듯이 소설이 이 시대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절망스럽다는 작가 김영하의 넋두리가 냉혹한 현실로 들린다는 것이다. 어제 트윗에서 박범신 작가가 자신의 작품 <은교>의 영화소식이 뜨자 바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사람들이 축하 문자를 주는데 나는 그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말씀을 남겼다. 책이 먼저고 다음이 영화여야 하는데 영화 때문에 책을 사보는 거꾸로 현상이 반갑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제 영화가 뜨면 후속으로 원작인 책이 자동으로 뜨는 것은 하나의 현상처럼 공식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차라리 이 책도 영화로 판권이 넘어간다면 좋겠다. 오토바이 폭주 장면이 식상하긴 하지만 영화 은교의 기사들을 보라. 마케팅에 치중하는 건 죄다 칠순 노인과 십대소녀의 치명적인 섹스이다.(어떻게 문학적 관용을 붙여도 그렇게 들린다. 원작에 상상하는 장면 아니었나? 은교 정말 간만에 좋은 소설이었는데 영화를 먼저 접한 독자들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될까 노파심이 먼저 든다. 뭐, 아직 영화도 개봉 안했는데 영화를 본 것처럼 말하는 나도 실례이긴 하나 영상미에서 어떻게 노시인의 고뇌가 전부 전달되리... ) 그러니 아마 이 작품에서도 알아서 그림이 되는 이슈거리를 만들어 주실 터이다. 암튼,

 

 

소설은 이제 이 시대에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은 이렇듯 독자에게도 전이되고 마는 작품이었다, 이번 고아 이야기는. 내 생각에 소설가의 할 일이나 소설가의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독자와 세상이 변한 것 같다. 이야기의 영역과 역할이 너무나, 엄청나게 축소화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젠 고아 이야기가 참으로 을씨년스럽고 뜬금없어 보인 하루였다.

 

 

 

#2. 에세이는 무얼 할 수 있나

 

 

 

 

지금 내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 중에서 주말에 끝내겠다고 선택한 책은 가벼운 에세이 두권이다. 내용은 절대 가벼운 내용이 아닌데 이번 달에 자본주의와 경제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고민하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장하준의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잠시 제쳐두고 가방끈 긴 언니형(?)의 조언으로 턴했다. 에세이쪽도 트렌드가 확실 한 것이 남인숙 작가의 <어쨋거나 남자는 필요하다>가 빵 터진 후(처음에 읽었을 때 사실 내용이 알찬데 호응이 어떨까 싶었다.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 더욱 전문직 여성들의 여성의 노고 치하글, 여성의 우월적 감성 칭찬글은 봄을 맞아 날씨가 화창한 듯 하다.

 

 

<우리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김태경>은 광고판에서 잔뼈가 굵은 AE 출신 저자의 책이다. 구절구절 아주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일단 백 페이지까지의 느낌은 미혼직장여성들에게 안성맞춤인 듯하다. 지난 번 박에스더 기자도 그렇고 대부분 이런 책을 내는 여성들이 이제 조직에서 20년차(가 다 되었거나)를 넘긴 분들이다.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밥줄을 놓지 않고 투쟁하듯 여기까지 온 여성들이다. 얼마나 할말이 많겠는가. 웃긴 건 이제 조직도 때려쳤고 더 이상 상사눈치 볼일도 없고 애 낳을 일도 없는 내가 정작 이런 책이 필요해야 했을 때에는 거들떠도 안보다가 이제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책들에 열심인지, 참 사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끔 (같은 연배 작가의)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혹시 지나간 날을 추억하며 그땐 그랬지, 이러는 게 아닐까 싶어 순간 당황할 때가 있다. (지젝에 의하면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우린 그때 젊었지, 그땐 아름다웠어, 이러는 게 가장 패배적인 일상이라고 ㅠㅠㅠ). 암튼, 그렇더라도 젊은 여성들이 이 책의 주타겟인 건 변함없다.

 

 

 

 

 

다음은 ‘피해자의 덫’을 파헤치고 그 해결방안을 연구한 책이다. 완전 심리학 서적이라 보긴 어렵지만 집중적으로 한 가지만 파고들므로 나쁘지 않다. 가벼움 속의 무거움이라고 할까. 혹시나 스스로 피해의식이 많아 자꾸 상대에게 (결과적으로)상처를 준다거나 반대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면 꽤 유용한 책이다.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 중에 지독한 피해의식의 종결자가 있었다. 만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이별하게 된다면 그건 당신이 나를 떠나가서 그럴 거라고 노래를 했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제발 그만하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어떤 순간이 오면 무슨 생각이 나는 것인지 당신은 결국 나를 버릴 거라고 자주 예언하듯 말을 했다.(그래서 나는 그게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들려 이별해야 한다면 내가 떠나야지, 뭐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실제로 하게 되었다 ㅠ) 그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자주 받아 상처가 피해의식으로 발전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그 말 때문에 헤어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의 덫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두려움, 분노, 슬픔, 죄의식, 거짓힘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해결 방안으로 자기 내부에 (상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 여자들이 많이들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하게 되면 내가 충분히 상대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인데 살면서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고 나 역시도 그렇게 못했고 수많은 책에서, 안된다고 하더라.

 

 

가만 보면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의 고통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안 그럴려고 해도 자꾸만 과거의 고통을 되살리는 인간관계를 또다시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선택과정은 ‘과거에 끝나지 않은 관계를 완성’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왜 끝나지 않았을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만남을 단절했거나 그대로 세월만 흘렀기 때문이다. 아니 세월이 흘렀으니 해결됬다고 믿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피해의식의 원인도 공감갔지만 비슷한 방식의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가 반복되는 의식의 체계도 흥미로왔다.

 

 

사실 나는 그동안 온라인 서재에서 막연히 피해를 입은 쪽은 나라는 생각이 많았다. 칭찬과 비판을 적절히 섞어 적의감을 잘 포장한 댓글, 익명으로 내 글을 비난한 댓글, 나를 향한 비난에 동의를 한 또 다른 익명, 이간질과 음해성의 메시지, 이기심과 오만 가득한 육성의 목소리,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나의 불행을 바랄 것이라는 의심, 우연히 거짓과 위선을 목격하게 되는 난처함, 이런 것들은 조용히 앉아서 눈감고 귀 닫고, 책 읽고 글 쓴다고 해결되는 것들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해결이 안 되니까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버텼더니, 나도 모르는 ‘내적 힘’ 이 조금은 쌓여진 것 같기는 하다.(이곳에서 오래 버틴 분들은 ‘내적 힘’으로 부정적 요소들을 극복한 분들은 아닐까) 모두 털어버렸다고 하기엔 거짓말이고 적어도 바람이 불었다고 넘어지진 않을 힘은 기른 것 같다.(물론 이렇게 말하고 나는 또 쓰러질 것이다 ㅠㅠㅠㅠ)

 

 

 

 

덧붙임)  책말고 무얼 하는 것들 -

 

주말에 영화를 한편 볼 생각인데 아직 정하질 못했다. <건축학 개론>이 나는 첨부터 끌리질 않았는데 그냥 옛날 생각하며 추억에나 잠기다 와야 겠다. 아침 7시에 고릴라를 통해 ‘김소원의 SBS 전망대’를 듣는다. 시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인데 자주 김용민도 나오더니 이젠 안나온다. 전화가 안 터져서 - 우리집은 무슨 이유인지 SK가 잘 안 터진다 - 할 수 없이 통신사를 이동했다.(전화가 많이 와서가 아니라 오로지 택배 아저씨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느냐고 해서다) 그러면서 졸지에 스마트폰이 두 개 생겨버렸다. LTE폰의 위력은 광고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체감할 정도는 되더라. 그래도 나는 아직 인터넷은 되는 이전 폰으로 뭔가를 한다. 안타깝게도 기계적 삶의 노예가 된 듯하다. 이게 스마트한 삶은 아니잖아. 아이는 친구들과 별의 별 어플을 받아서 잘도 논다. 우리 다음 세대는 우리와는 완전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적 힘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건 디지털이 아니라 아나로그인데 달리 살아갈 방법을 모르겠다. 우울한 주말이 될 듯하다... 비도 내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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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3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를 두고 오래 전 아는 놈이 했던 말이 생각나요.
읽어보지도 않고 그런 변태 노인 탑골공원에 가면 많다나...?
그런 식이어요. 그게 아닌데.
박범신 작가의 회의를 알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전 <화차>를 두고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제 문학과 영화의 연대는 할 수만 있으면 안하는 것이 문학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봐요.
내가 소설가라면 판권 절대로 영화사에 안 팔 것 같아요.
근데 소설은 소설대로 문제가 많죠. 여전히 무슨 나르시즘인지 어쨌든 혼자 뭔가를 하고 있는 것도
같고. 며칠 전부터 <넝쿨째 굴러 온 당신>이란 드라마에 꽂혀 보고 있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작가가 꽤 똑독한 사람 같아요. 그는 시청자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도 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 고양이 표지 그림 책 저도 눈독 들이고 있어요.흐흐


한사람 2012-03-31 21:29   좋아요 0 | URL

넝굴째가 새로하는 주말 드라마죠?
요즘 드라마를 끊은지 꽤 됬어요 ㅠㅠ
해품달을 비롯해 암것도 못봤어요.
천일의 약속이 마지막있던거 같아요.
드라마 끊으니 의외로 시간이 참 많아요 ㅋㅋㅋ

대중문화라는 게 장르를 넘나들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 구조인것 같아요.
다만, 소설이 영화화 되더라도 기존 출판 시장에는 지금처럼 눈에 드러나는 변화로
자리잡지는 말았으면 해요.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도
지금 나와서 많이 팔려야 할 책들을 죽이는 구조는 안타까워요.
오늘 서점에 갔더니 매대엔 김정남과 화차가 쓸고 있더군요.
지난 달엔 해품달과 김정운이었어요.
방송에 회자되는 것과 출판시장이 분리될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네요 ㅠㅠㅠㅠㅠ

재는재로 2012-03-30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의 목소리사 들려 사놓고 읽지를 못했네요 안습 책은 읽기 위해 존재하는건데 시간내서 빨리 읽어봐야지
은교는 예쩐에 읽다 내려놓았는데 이번에 영화개봉한다니 다시 관심이 가네요 심리가 영화화 한다면 무조건 원작을
읽어보고 싶어서

한사람 2012-03-31 21:35   좋아요 0 | URL

재는재로님처럼 영화화한다면 원작부터가 궁금한 분이 많은 것이 정상이죠.
또 읽으려 했다가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관심가지게 된다면 그것도 긍정적인 현상이구요.
다만 그렇게 해서 책이 나중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공식화 된다면
작가로서 자존심은 상할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이라면 처음부터 관심을 받아야 마땅했을테니까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 는 속독을 부르는 작품이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2-03-3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범신 씨야 젊을 때부터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았고,그래서 평론가들에게서 상업성이 너무 짙은 작가라는 평도 받았죠. 또 작품 몇 편은 영화화도 되었으니 그도 영화판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은교'감독이 정지우 씨인데 박범신 씨가 '정지우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했더군요.

한사람 2012-03-31 21: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예전엔 대중소설가로 인식되던 작가로..저도 기억합니다
영화쪽도 제작자나, 감독이나 다 입장들이 있어서
홍보쪽에서는 일반대중들에게 먹히는 위주로 마케팅을 하는 듯해요.

오랜만이어요, 노이에자이트님^^

노이에자이트 2012-04-01 13:48   좋아요 0 | URL
서로 서로 아는 체도 하고 그럽시다잉~

2012-03-3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1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4-0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은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글을 읽다가 늘 영화를 먼저보고, 그 다음에 원작소설을 찾아서 보는 저같은 사람은 뜨끔합니다.ㅋ 글쎄요..저는 좀 다른 쪽으로(?) 이슈가 되어도 좋으니 일단은 많은 관객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이니 그것도 좀 뜨끔하구요.ㅋ 뭐 아무튼 정지우 감독이라면 뭐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습니다. (저는 도리어 그 섹슈얼한 마케팅에 이끌려 보러간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욕할것 같기도 하고, 원작소설을 좋게 읽으신 분들은 그런 마케팅에 짜증내며 안 볼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네요.)

<건축학개론>은 어째 저도 영 끌리지가 않아서..관객동원순위 높은 영화, 남들 다 좋다는 영화는 별로 보고 싶어지지가 않는 청개구리병이 중해서요.ㅋ

한사람 2012-04-01 21:15   좋아요 0 | URL

주말은 좀 피곤하게 보냈네요 ㅠ

그렇게라도 원작이 널리 퍼진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건축학개론>을 어제 보았는데 아침부터 아저씨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영화가 내용도 밍숭하고 배우들의 연기력이 특별난 것도 아니고..
(이제훈은 잘하더군요 ㅋ)
시나리오도 평범한 편인데 왜 흥행이 되고 있나, 그것이 궁금하던걸요.
써니가 아줌마들을 불러모았다면 이 영화는 30대 후반을 향하고 있는 90년대 중반 학번을
타겟으로 한 것 같아요. 지금 한창 내 손으로 집짓자 이런 이슈가 뜨고 있잖아요.
영화속에서 한가인이 그 청순한 입술로 쌍욕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오늘까지 그 장면만 생각나요..얼마나 충격적인지..
옆에서 다들 헉...헉... 입을 막더군요 ㅋㅋㅋㅋ


보물선 2012-04-0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의 목소리..에서 앞에 마술사 장면의 프롤로그가 뒷 이야기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소설쫌 읽어봤다는 내가, 이게 잘 안잡혀. 너의 느낌이 궁금하다.
난 이 소설 영화화, 반댈세. 영화로 하면 임팩트가 너무 없을지도 몰라 ㅋ (소설로는 꽤 강했던 여러가지 것들~)

아침부터 여기 들린 이유는 전자책 하나 보냈어.
대형마트처럼 1+1이더라구^^
전자책으로는 뚝뚝 끊기는 글을 가지고 있으면 심심할때 괜찮드라.
핸드폰이 2개라고 해서 그냥 서재 앞으로 보냈어.
다운로드 2개의 핸드폰에 성공해 보시길^^

4월은 봄일거야. 그지? 행복한 봄맞이 하렴~

한사람 2012-04-02 10:01   좋아요 0 | URL

물선은 참 내 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 같아서 가끔 놀란단 말야 ㅋㅋㅋ

소설 읽고 안그래도 밧줄에 대해서 끄적인 걸 아침에 마무리했거든
리뷰를 읽어보삼~
근데 하필 이 책이 리뷰대회에 걸려있더라 ㅠㅠㅠ

책 읽고 글을 남기고 싶었는데 일부러(?) 안남기는 것도 웃겨서
아주 짧게 몇 줄 썼어 ~~~

그리고 프로이트의 의자 말이야, 나도 주말에 한번 사볼까 했었어.
(주말에만 2600원 한다고 하더라구 ㅋㅋㅋ)
고맙게 잘 받아 읽어볼께!!!!!

좋은 아침, 좋은 한주
(오늘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인데 꼭 비오지 이런날 ㅋㅋㅋ)

가연 2012-04-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의 책, 정말 재미있나봐요ㅎ 저는 서점에서 읽을까, 말까 정말 고민하다가 그냥 내려놓았는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야만 직성이 풀릴 거 같아서ㅜㅜㅜ 위로형 에세이는 불티나게 팔리는데, 대부분 자신의 위로만 원하지남을 위로하지는 않는거 같아요.. 랄까, 저도 남말할 처지는 못되지만ㅎㅎ 너무 힘드니깐.. 누가 위로해줬으면 좋겠으니깐ㅋ

한사람 2012-04-04 11:41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술술 잘 넘어가더군요. 확실히 예전보다 어깨에 힘을 덜 준 것은 느껴졌어요.

웃긴건 위로형 에세이를 읽는 걸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아닌 듯해요.
몰래(?) 읽는 것 같다는 거죠 ㅋㅋㅋ

앞에선 안 힘든 척 하고 뒤 돌아서서요 ㅠㅠㅠ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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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의 이십대를 참혹하게 관통하고

나머지 세월도 그 흔적으로 자주 놀라게 하던

한 사람을.

 

 

 

 

 

나 그대를 몰랐었네

 

 

 

그는 꼭 유하감독과 같은 나이였다. 유하 감독과 같은 공부를 했다. 같은 시기 이소룡에 열광하고 존 덴버를 들었던 사람. 만화 가게에서 흑백 TV를 시청하고 해적판을 찾아 청계천과 세운상가를 돌아다녔을 사람. 동시상영관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나 한자리에서 보았을 사람. <미워도 다시 한번>의 여배우 문희의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 육영수 여사의 마지막 가는 날에 비가 왔다는 걸 아는 사람. 백마가 없어지기 전 해후의 풍경을 아는 사람. 생애 첫차가 프라이드나 엑셀이었을 사람. 나의 뜨거웠던 90년대가 자신의 가장 멋져 보인 삼십대였을 사람. 그래서, 이제는 그도 유하처럼 쉰 줄에 들어섰을 사람. 그러나, 다시는 만나기 힘들어 그리워만 해야 될 사람.

 

 

유하와 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추억은 이렇듯 삶의 경계를 허물며 거미줄처럼 인연의 손을 내민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유하의 추억을 매개로 나의 한 시절을, 나아가 그의 한 시절을 고스란히 겹쳐보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 정확히 말하자면 유하와 동시대인으로서 같은 추억을 가졌을 그를 회상하는 시간이었지만 - 어떻든 추억은 꼬리를 물고 연대를 이어 관계를 확장하는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유하는 나의 옛사랑을 불러 들였고 나의 그 사람은 유하를 더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감독의 첫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어느 저녁 (아마도)압구정동 근처에서 구경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둔 한 겨울이었다. 그땐 커다란 극장이 모두 강 건너 있을 시절이었는데 씨네하우스라는 어정쩡한 크기의 영화관이 강남에 있긴 했다. 당시엔 한국영화가 그리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라 연인들이 아니면 평일 객석은 썰렁하기만 했다. 물론 지금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기억나지 않고 성형하기 전의 발연기 수준의 엄정화만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유하 감독이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게 별다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그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의 감독이었다는 사실도 인상 깊게 기억하진 않았다. 유하라는 이름은 대중문화예술의 영역에 위치한 사람이긴 했으나 ‘압구정동’으로 대표되는 유행현상과 소비문화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아티스트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얼마 전 개봉한「하울링」과도 유하를 연결 짓지 못했다.

 

 

웃긴 건 그 당시 ‘바람 부는(이하 중략)’ 이후로(그것이 시집이든 영화이든 혹은 기사 제목이든) 정말로 바람이 불면 압구정동에 가고 싶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청춘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압구정동을 모르고 그곳에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관심이 없던 사람도 ‘바람 부는’이라는 제목의 범국민적 확산효과 덕에 압구정동의 홍보만 더 강화되기도 했다. 제목 특유의 시적 감성이 압구정동을 천박한 소비문화의 쓰레기통이 아닌 어쩐지 고급스런 문학적 아우라가 입혀진 장소로 격상시키는 꼴이었다. 계층 간 위화감은 만약 제공하는 쪽이 내 쪽이라면 충분히 무시될만한 분위기였다. 저자도 언급했지만 당시 우리에겐 속으로는 매혹을 느끼면서 겉으로는 거부감을 표시하는 이중적 심리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 속에서 압구정동을 향한 욕망을 인정하고 매혹의 원인에 의문을 제기했는지는 몰랐었다. 우리들 욕망의 다양한 모습을 반성하고 스피드 문화 대신 쉼의 문화를 제시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유하 감독의 시집이든 영화든 어떤 현상으로만 정보를 받아 들여왔지 그것의 원작자로서 작품세계 같은 건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관객이자 독자였다. 그러면서 세간에 많이 회자되고 소비되었으므로 내심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의외로 단 방향으로 해석되어진 언론의 정보로만 작품과 작가를 이해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듣고 보았으니 많이 안다고 믿는 것. 나는 이 책을 덮고 내가 저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이름 두 글자였다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우린 꿈이 있었다네

 

 

 

돌이켜보면 나의 이십대로 상징되는 90년대는 엄청난 대중문화의 양적 질적 팽창의 시기였다. 광고에선 연일 ‘나’를 솔직하게 표현하라 부추겼고 뮤직비디오는 핑크 프로이드의 그것처럼 감각적으로 발전했다. 영동대로와 도산대로에 나가보면 빠르게 전파되던 외국계 자본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즐비했고 주차장엔 굉음을 과시하던 스포츠카를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퍼머의 여성들은 삼삼오오 로바다야끼와 재즈카페로 모여 들었고 어쩌다 물주가 등장하면 럭셔리 가라오케로 이동했다. 동호대교 남단에서 성수대교 입구까지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유흥문화는 지금 생각해봐도 분명 활기차고 밝았던 것 같다. 적어도 IMF 전까진 희망의 프레임 안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시도 읽었다. 지금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같은 서바이벌,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 메인으로 등장하는 노래는 언제나 90년대 중반의 히트곡들이다. 핑계, 일과 이분의 일, 마법의 성, 그냥 걸었어, 넌 할 수 있어, 사랑할수록, 나는 문제없어, 달의 몰락, 날 떠나지마(이상 1994년), 날개 잃은 천사, 가질 수 없는 너, 잘못된 만남, 이별공식, 사랑을 할거야(이상 1995년) 같은 노래가 한국가요 발전의 정점에 있었던 노래들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한다. 노래 한곡마다 추억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하면 당신도 혹 나와 같은 세대는 아닐까.

 

 

그때 우리는 신입이었고 유하 세대는 회사의 실질적인 허리들이었다. 그들은 민주화 투쟁을 지나온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입시지옥을 통과한 경력에다가 본고사를 보았거나 본 사람을 형으로 두었기에 엘리트에 대한 야망도 남달랐다. 우리는 선경의 스마트 자전거를 준다는 장학퀴즈를 시청만 했지만 그들은 직접 참가하고 장학금을 받아본 세대였다. 우리는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고 주윤발과 장국영만 외쳤지만 그들은 성인이 된 후 영화의 ‘의리’, ‘신념’, '충성'의 가치를 내면 깊숙이 받아들여 주요 기업 창업자들의 비전을 뒷받침하는 실행의 고수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는 70년대 후반 콩나물처럼 지어진 아파트 아스팔트에서 서필로 땅따먹기를 했지만 그들은 지방 농촌 출신으로서 땅과 흙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하 역시 고향의 대나무 숲과 뛰어놀던 들판을 유년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햇빛, 꽃들의 아우성, 바람의 감촉을 에너지 삼아 길 위에서 희망을 품고 청춘의 한때를 배회했다. 그 떨림의 에너지가 곧 시적 영화적 상상력인 사람이었다. 우리는 뒤늦게 삐삐라는 통신수단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던 시절 투박한 아나로그 매체와 통기타의 낭만으로 첫사랑을 경험한 세대였다. 그들과 우리는 대체로 국가와 사회가 주입하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차이가 있었다면 억압의 정도와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 우린 그들의 눈에 띠는 투쟁 때문에 사실 그들에게 빚졌다고 해야 맞을지 모른다. 또 하나 우린 80년대 컬러TV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그들은 흑백이었다는 것도 다르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 까까머리로 극장을 드나들었지만 우린 교복자율화에 핀컬 퍼머를 하고 성인영화를 보았다는 것도 달랐다.(십년의 차이가 꼭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문화적으로 서구화된 그림의 차이일 것이다)

 

 

아무튼, 그때 우리가 그들과 함께 꾸었던 꿈이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진입에 대한 ‘장밋빛 로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건 유하 감독이 어린 시절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핑크빛 꿈’의 포로가 되었다는 느낌과 유사할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외제차도 탈수 있고 번듯한 아파트도 장만하고 크리스마스에 북유럽 해외 여행 같은 특별한 추억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막연히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옳지 않다거나 진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회 대다수의 행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 벌어서 잘 먹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 이상을 해보지 못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대학을 간다고 하듯 직장도 열심히 다니면 당연히 승진도 하고 집도 사게 되는 줄 - 물론 중간에 변수는 있겠지만 참고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 알았다. 아... 당시 우리가 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지극히 평범한 생각들이 오늘 나를 울게 한다. 나처럼 한때나마 가졌던 꿈이 슬프다면 당신도 혹 나와 같은 세대는 아닐까.

 

 

 

다시 미래를 나누겠네

 

 

 

그 후로 이십년이 지났고 이제는 그들이나 우리나 (누구 말마따나)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이 자꾸 슬퍼지던 이유는 이소룡 세대라 불리우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있다. 55년~63년생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베이비 부머들은 이제 코앞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청춘을 바쳤고 헐리우드 영화대로라면 이태리 어느 해변에 근사한 별장 하나쯤은 마련해두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녀들의 대학등록금과 결혼자금으로 걱정이 태산이다. 노후은퇴 자금은 어느 나라의 이야기인 것일까. 우리나라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이들 중에 나의 옛사랑이 있고 유하 감독이 속해 있다.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우리가 백 살까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 모두가 이소룡을 우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조용필이 제일이라 해도 꼭 전영록이나 이용을 들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었듯이. 모두 존 덴버만 듣진 않았을 것이다. 간혹 팝송보다 샹송이나 클래식에 뜻을 둔 매니아도 있었으리라.(이 책의 후반부에 소개되는 재즈평론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추억을 공유하는 것은 희망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추억은 이 순간의 생명성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현재가 절실한 사람만이 그 유한성을 견디기 위해 추억을 꺼내든다고. 추억은 한 시절의 절실했던 이미지들을 고이 보관하는 가슴의 영토라고. 우리가 오늘 추억이라는 영토를 함께 서성이는 이유는 과거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미래를 나누기 위해서라고.

 

 

어느 세대건 자신의 빛나는 시절을 더 빛나게 해준 영웅이 있다. 그들이 한때 자신들의 영웅이었던 이소룡을 잊지 못한다면 그건 아마도 그때 보았던 희망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소룡 세대에게 이소룡을 회상하는 일은 단지 청춘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아닌 것이다. 굵고 짧은 인생을 살다간 이소룡은 배우이기 이전에 미국 워싱턴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무도인으로 살다간 사람이었다.(나는 그가 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역시 무술에 인문학적 성찰이 배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그들에게 이소룡의 죽음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제임스 딘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겉멋없는 이소룡의 정직하고 단단한 진정성, 몸과 정신이 하나되는 진실성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소룡은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조작이 아닌 맨몸으로 단련한 자기만의 리얼리티로 영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의 죽음은 영화배우를 넘어 진정한 무도인의 길을 가던 동양인 지도자의 죽음을 의미하진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는 유하의 산문집은 같은 시기를 체험한 동시대인들에게 삶의 진정성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유하 세대와 인연을 맺은 우리 세대에게 강렬한 향수를 드리운다. 같은 유형의 추억 속에서의 진정성은 같은 사람을 향한 희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맹활약 하던 시기는 한국 정치사의 암흑기였다. 이소룡이 사망한지 사십년이 다 되가는 오늘날도 불황이긴 마찬가지다. 이소룡이라는 진정성에 열광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꿈꾼 세대라면 아직도 이소룡의 추억은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들에게 커다란 현재진행형의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추억은 과거만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미래를 공유하는 희망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한 시기를 같이 겪었던 사람들은 한 시절이 남긴 절실함을 알고 있다. 기억의 창고에서 그 절실함 들을 꺼내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들만은 알 것이다. 아니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미에 십분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추억의 풍경들은 우리 아픈 현실을 껴안는다. 그리운 시절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미래로 복원된다. 우리는 점점 진부해진 미래, 과거화된 미래, 박제화된 미래를 견디기 위해 그때를 더욱 추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공감에서 시작한다면 추억은 바로 그 시작인 것이다. 추억하고 나눈다면 함께하는 그곳에 희망의 미래가 있다고 믿어 본다. 그들이 그리운 봄이다. 더불어 봄 이었던 나의 그 시절도 사무치는 밤이다...(아마도 나는 살면서 혹시 이 글을 보게 될지도 모를 한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의 위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그저 추억이라는 불변의 믿음 하나만 가지고...)

 

 

 

 

 

사랑할 것이다. 앞으로 더 오랫동안.

나의 이십대를 추억으로 물들이고

나머지 세월도 그 기억으로 자주 그립게 하던

한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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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3-28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요하고 깊은 밤이 흘러
오늘 또 새 아침 맞이합니다.
쉰 줄을 살아가는 사람도
쉰을 바라보는 사람도
앞으로 쉰 해 이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도
모두 좋은 이야기 건사하기를 빌어요

stella.K 2012-03-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곧...ㅋ
이 사람은 글도 잘 쓰고 영화도 잘 만드는데
꼭 뭐 하나가 삐긋해요.
의욕이 너무 앞서는 건지, 대중의 입맛대로만은 하지 않겠다는 오만인지
그걸 모르겠어요. 언젠가 자라나는 자기 자식 생각해서 야한 영화 자제하고
어린 아이 눈높이에 맞는 영화 만들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은 하겠다면 하는 사람 같아 기대하고 있는데 아직 동화 같은 영화는
안 만들고 있나 봐요.ㅋ 책 읽어 보고 싶긴해요.^^

2012-03-2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3-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밤에 추천하며 보고는 이제 댓글 다네요ㅎㅎ 아휴, 어제는 진짜 정신없어서ㅠ
말죽거리 잔혹사랑 비열한 거리를 보면서 참.. 이런 저런 감정들을 많이 느꼈었는데, 이렇게 책을 내었네요. 저야 이소룡 세대는 아니지만..ㅋㅋ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1
김훈민.박정호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기존에 책 이야기를 하는 책과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목적이 분명하고 차별화 되었다. 저자는 경제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 그 수단으로써 책도 예술도 역사도 가져온 경우이다. 경제학자들의 서재엔 어떤 인문학 서적이 있을까, 하는 보편적인 소개를 예상 했지만 그건 짧은 생각이었다. 굉장히 효율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법을 적용했다. 지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고 뻔하지도 않다.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 중 가장 알차다. 며칠 전에 아이가 ‘기회비용’이 무슨 뜻이냐고 설명해 달라고 해서 대충 간단히 답을 해줬는데 왜 이 책처럼 설명해주지 못했을까 아쉬웠다. 책에는 분식회계, 포획이론, 한계효용 같은 경제용어 100여 가지가 재미난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정말 재미나게 넘기다 보니 어느새 경제학 입문서 한권을 독파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과학자가 주장하는 기획독서를 실천해 보려고 이번엔 경제학자가 말하는 인문학을 살펴본 것이었다. 한번 읽었다고 서재에 꽂아둘 것이 아니라 경제학 사전처럼 곁에 두고 자주 꺼내어 보고 싶은 책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경제학이 어려운 학문이 아니고 경제학 공부하는 사람에게만 중요한 분야가 아니라 주장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실생활의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경제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경제학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많아 인류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보면 경제학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인문학을 빌어 경제학의 여러 개념들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경제학에 흥미를 갖고 그 속에서 인간의 모습과 삶의 해법을 찾기를 바란다고 했다. 궁극에 경제학이 은행원이나 금감원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학문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해법이자 우리의 본 모습이 투영된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한 듯 하다.

 

 

 

저자가 맨 처음 제시한 경제는 우리 역사의 시초인 단군신화였다. 대체로 건국신화의 주인공은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정당성을 천명하는데 반드시 경제문제를 거론한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올 때 바람과 비, 구름을 주관하는 주술사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온다. 이들은 모두 농업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날씨를 관장하는 역할이었다. 따지고 보면 경제활동인 농사를 번성시키기 위해 온 사람인 것이다. 농사는 분업을 촉진시켰고 분업은 신분제 사회의 배경이 되었다. 지배계층은 오늘날에도 경제관련 공약으로 피지배계층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경제는 정치의 다른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밖에도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의 눈에서 ‘기회비용’의 개념이, 오르페우스의 지하세계여행에서 ‘매몰비용’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헤라클레스의 외양간 청소에서는 ‘절대우위’와 ‘비교우위’가 설명된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 등장하는 병사의 이야기는 ‘한계 원리’와 ‘한계비용’을 설명하는 사례로 훌륭하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저축은행 사태도 과거 역사 속에서 이미 일어났던 일이라는 점은 내가 경제에 문외한이어서 그런 것인지 놀랍기만 했다. 저자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18세기 영국의 무역위기와 같다고 보았다.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은 두 나라간 무역 불균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아편 무역을 통해 무역적자를 해소하고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영국이 아편을 생각해 낸 것은 무역상의 이익이 중국으로만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바로 2008년 금융위기도 중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와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글로벌 불균형이었다. 미국은 과거 80년대 일본이 지금의 중국과 같을 때 일본의 무역흑자를 줄이기 위해 선진국끼리 엔화를 절상하는 담합을 시도했다. 위안화 절상을 위해 미국이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을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금 중국은 세계 제 2의 강대국이 되어 지들끼리 하는 협상을 가만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2001년 미국 엔론의 분식회계 사건과 최근에 일어난 AIG 사태-2009년 회생의 목적으로 정부에서 받은 공적 자금을 임직원에게 거액의 보너스로 지급-는 그 깊숙한 배경에 프랑스 혁명이 거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경영진에 대한 부당한 보상금 지급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경영진은 인센티브를 얻기 위해 있지도 않은 계약을 했다고 이윤을 부풀린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촉발되기 전에 미국 은행의 경영진과 꼭 같은 네케르라는 은행가가 엔론 사태와 동일한 분식회계를 사용했다. 쉽게 말해 회계장부를 흑자로 사기쳐서 외려 귀족들로부터 거액의 기금을 조성한 방식이다. 프랑스 왕실이 몰락한 이유는 미국은행처럼 단기간에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근본적 원인이 있었다. 이는 꼭 미국과 프랑스에만 해당되는 시행착오는 아닌 듯 하다. 큰 돈을 만지는 1%에겐 양날의 검처럼 부여되는 운명의 기회가 아닐까.

 

 

 

책을 읽다보니 일제시대 일본이 우리에게 잘 한 일도 있었다. 일본은 주인 없는 산림으로 분류된 산림을 민간에게 소유권을 넘겨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했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소유권이 없는 공유지, 공유자원이 과다소비로 인해 고갈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조선의 산림자원에 소유권을 부여해 황폐화된 우리 산림을 복원하는데 기여한 일이 자기네 이익을 위한 발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겐 다행인 일이었다.(공유지의 비극은 꼭 다시 써먹고 싶은 용어이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문학 속에서 인물들이 경제적인 움직임을 보였을 때 더 신명나는 듯 했다. 문학이 경제학의 나래를 펼치는 상상마당이라고 했듯이 나 역시도 문학 속 경제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저자의 해석이 다른 경제학의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문학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아서왕과 양키>에서는 카멜롯의 아서왕이 다른 왕국의 대장장이와 물가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실질 GDP와 명목 GDP를 비교 이해하는 장치로 소개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베르테르가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시간비일관성’의 문제로 연결 짓는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약혼녀 아들과의 결투를 ‘게임이론’과 ‘내쉬균형’을 설명하는데 활용한다. <레미제라블>의 교훈은 ‘넛지’의 개념으로 정리한다. <좀머씨 이야기>와 라인강의 기적을 말하는 부분에선 독일 경제발전에 날개를 달아준 결정적인 사건이 한국전쟁이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군수물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결과 독일은 몇 배로 수출을 하게 되어 경제가 안정된 것이었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을 이성, 감성적으로 모두 이해시켜 준건 <지금, 만나러 갑니다>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모질게 만든 건 재산세, 다름 아닌 세금이었다고 분석한다. 세금을 내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이고 얼마나한 부담인지 사실 돈 없을 때 때려 맞아 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밖에 공연표가 항상 남아도는 이유와 미술관에서 그림을 모두 전시하지 않는 이유, 왜 푸치니의 오페라는 언제나 볼 수 있는지, 공연예술 포스터가 노리는 효과는 무엇인지 등의 문화예술적 측면을 경제논리로 설명한 부분도 유익했다.(상식적인 면에서) 마지막 장에 우리도 애덤스미스 못지않은 정약용 같은 경제학자가 있었으며 민주주의는 금권선거에서 발전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것은 맨 마지막 장이 ‘경제학자들에게도 윤리 강령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알다시피 경제학은 미국의 금융위기를 예방하는데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경영학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는 세계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역시 세계적인 기업의 이사직이나 자문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찔러준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숨기고 -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 해당기업이 속한 분야에 대해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어찌 보면 뒤로는 돈과 명예를 알뜰히 챙기면서 앞에서는 공익을 위해 세금을 내자고 하는 꼴이다. 경제학자들이 월스트리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금융위기를 부추겼다는 지적은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는데 동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오늘날 국제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금융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다. 저자는 이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게 된 배경을 돈을 빌려주는 이유에 대한 개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이 없어 실현을 할 수 없다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다. 유대인은 돈을 빌려주고 그 사업이 더 큰 돈을 번다면 채무자의 이익뿐 아니라 사회전체의 후생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금융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 사회구성원들의 후생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유대인의 사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오늘날에는 어떤 부패와 불공정에 연루 되었는지 믿을 수 없으나 분명 최초의 사고는 우리가 되새겨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하면 남는 돈, 아니 없는 돈이라도 빼돌려 한 푼이라도 내 수익으로 불리려는 파렴치한 사고를 가진 금융인들이 오늘날 돈 가지고 돈 굴리는 권력을 이용해 열심히 욕심 부리지 않는 대다수의 서민을 얼마나 궁핍하게 만들었던가. 사회전체의 후생과 복지, 경제 전체의 활성화를 위해 금융은 몸 안에 흐르는 피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금융일을 맡게 되는 사람은 자기 몸에만 피를 수혈하거나 피를 뭉치게 하거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위험인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는 경제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 아주 유용한 시간이 되었다. 역사와 문학, 예술과 철학속의 경제는 우리가 발견하고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미 경제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평소에 ‘경제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효율적이고 계산이 정확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딘가 씀씀이가 크지 않아 밥 한번 안사는 사람이라는 뜻도 없지 않다. 이번 기회에 경제적인 사람에 대한 의미를 재정립해보아도 좋을 듯하다. 인간은 원래 경제적 성향과 본성을 타고 났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인간의 본성을 더 많이 이해하고 깨우친 사람이므로 살아가는 지혜가 더 풍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사람은 결코 짠돌이나 짠순이가 아니다. 경제 아닌 모든 분야에서 번득이는 해법을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일 것이다. 시간대비 성과를 효율성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마도 인생 전체에 대한 지혜의 결과물이 다양한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남들보다 인생을 진하고 깊게 사는 것이므로 가끔 짠 맛이 느껴질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럴 땐 우리네 피도 눈물도 모두 진하고 짠 것이니 원래 그런 것이라 여기면 되겠다. 그러니까, 짠순이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닌지 모르겠다. 바보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것이 욕은 아니지만 우린 바보인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진 않는다. 그러므로 짠순이에게 짠순이는 욕이 아닐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짠순이인지 몰랐다는 것 만이 중요하다. 이제 알게 된 이상 나는 짠순이가 되길 주저하지 않겠다. 아니 누가 좀 나를 짠순이라 불러준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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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23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경제하면 과학과 함께 저에겐 꽝인 분얀데
한사람님 초두부터 저리 쓰시니 끌리는군요.
일단 보관함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cyrus 2012-03-2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는 특정 분야와 관련되어 읽어보면 좋을 책들을 모아서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네요.
경제학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많이 도움이 될 책일거 같아요.
저는 요즘에 <안철수의 서재>를 읽고 있어요. 특정 인물이 자신이 읽어 본 책들을 소개하는 글이
좋더군요. 그리고 추천한 책들도 읽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기에는 읽을 책이 너무 많네요 ^^;;

보물선 2012-03-2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의 중심에서 일을 하면서도
경제학 전공이 아닌 나는,
사실 굉장히 경제개념이 약한 사람이야.
당신 소개글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봄이 좀 왔으면 좋겠어. 아~ 봄.
 
점령하라 - 세계를 뒤흔드는 용기의 외침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유영훈(류영훈) 옮김, 우석훈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열심히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불편한 진실과 더 불편한 현장을 낱낱이 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책 붙들고 고민하는 시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엊그제도 지인들끼리 모여 이놈의 자본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해가며 도대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새삼 자본주의 비판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었지만 요즘 식사와 음주가 이어지는 어디에서든지 이런 풍경은 익숙하다. 내 세대들은 입을 모아 그동안 우리가 좇아온 가치들에 대해 눈물겨운 탄식을 멈추지 않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엔 모두가 투사가 된 기분이다. 지난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전에 우리의 주된 대화는 이번 명절엔 남들처럼 해외여행을 감행해볼까, 였다.

 

 

우린 386 선배들의 투쟁과 성공, 몰락을 바로 곁에서 뒤에서 지켜본 후배들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학번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지겹도록 데모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민주화 운동(그땐 싸잡아 빨갱이 운동이라 했다) 하다가 죽거나 폐인이 되는 사례 수백 가지를 성문 기본 영어의 1장 부정사의 사용법 다음으로 들어왔다. 전두환, 노태우가 주입하고 강요한 가치는 단연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헝그리 정신과 애국심이었다. 금메달을 따면 방송에선 일률적으로 ‘나가자 빛을 내자 대한의 건아들’이런 노래를 하루 종일 틀어줬다. 마트에 가면 과일도 모두 금메달 수박, 금메달 참외였다. 아직도 소름끼치게 기억나는 건 여고시절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분류된 학생들만 사박오일 동안 어디로 끌고 가(?)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명분은 신사임당 교육이었고 예절과 충효와 애국심을 가르친다고 했다. 실제로 그 교육을 받게 된 학생들은 마치 국가의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되는 과정처럼 보여 지기도 했다. 동선까지 기억나는 그 방에서 우리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약 십 분짜리 영상을 보고 모두 울었다. 아직도 왜 울었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소수 정예만 모아놓고 대한민국의 발전사와 비전을 상영해주니 예민한 감수성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놓고 바로 이어지는 다음 시간엔 마르크스가 죽일 놈이고 김일성은 친척이고 공산주의는 사회의 악이라는 강의를 들었고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대학생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이라고 했다. 당시 열일곱 살의 나는 영상물의 마지막 장면 휘날리는 태극기를 가슴에 간직하며 대학에 가서 죽어도 데모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대학에 들어가 나는 시험거부 같은 집단 시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얼굴 들고 시험을 치루는 학생이 되었다. 평소 친분 있던 한 선배가 강경대 학생이 맞아 죽은 후 단식투쟁에 돌입했지만 그냥 못 본 척 하고 도서관으로 향한 날을 기억한다.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한 회사에서 우연히 그때 보고 울었던 영상물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회산 정부에서 의뢰한 홍보영상을 제작하는 곳이었고 나는 영상물 시나리오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웃긴 건 그 영상물 바로 옆에 장산곶매의 <파업전야>와 <닫힌 교문을 열며>의 비디오테잎이 나란히 있었다는 것.(나는 그날 집에 테잎을 가져가 울면서 영화를 보았다. 일부 선배들이 같이 보자고 했을 때 일없다고 했던가. 회사에선 보기 드문 수작이니 꼭 참고하라고 흔한 외국 CF 자료영상처럼 말했다...) 나는 그때 정부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다음 날 다시 정부를 치장하고 홍보하는 시나리오를 썼고 그걸로 월급을 받아먹었다. 어찌 보면 우린 민주화 선배들에게 빚진 세대일지 모른다. 우린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것 같다. 우린 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변명을 하자면 우린 교복자율화 1세대였고 강남 8학군을 누비는 신흥중산층이었다. 옷과 머리, 아파트와 자가용이 신분을 가르는 기준임을 학교에서부터 배운 첫 세대였다. 우린 돈의 가치가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일찍 깨우친 영악한 세대였다. ‘벤지’를 보고 자라면서 동물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ET’를 보고 외계인을 상상했고 ‘람보’를 보며 미국식 영웅주의에 길들여졌고 ‘주윤발’을 보면서 폭력을 미화했고 ‘마돈나’를 보면서 여성평등을 내재화했다. ‘마이클 잭슨’을 보면서 돈 있으면 흑인도 백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끔 우울할 땐 조용필과 변진섭과 이문세, 이승환의 넋두리를 함께 들어주면서.


 

그런 우리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소련은 붕괴했다. 회사에서 미국비자는 어엿한 신분이었고 자가용 소유는 신세대직장인임을 증명하는 라이센스였다. 우린 IMF가 터지기 직전 너도나도 압구정동에서 연애를 한 세대였다. 부모님은 강남에서 이주하며 부동산 차액으로 자식들 결혼을 시키셨다. 민주화 선배와 IMF 후배와 부모님에게까지 빚을 진, 대단히 운 좋은 우리 세대는 신도시 아파트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이 대단한 속물들은 영어에 맺힌 한 때문에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조기영어교육에 매달렸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몰았다. 남들처럼 대출받아 집도 샀다.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때가 되면 차도 바꿨다. 가끔 주식으로 대박 난 후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주식 때문에 거리로 나앉은 동창 소식을 들으며 그건 남일 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두세 번 바뀌고 그나마 그 중에 존경하던 대통령은 약속이나 한 듯 세상을 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고 맘 편하게 사는 작자만 오래 행복하게 사는 건 맞았다. 그러는 사이 더 이상 승진의 기회는 사라졌고 아이는 커버렸고 우린 늙어 있었다. 하우스 푸어로 대변되는, 이젠 언론에서 조차 어쩌다 한번씩 2030 세대에 양념으로 뿌려주는 40대가 되었다. 가끔 <정의를 무엇인가>를 사본 주된 세대가 40대 남성이라며 이들이 움직이면 사회에 변화가 생긴다는 의미심장한 멘트가 덧붙여지는.

 

 

시즌이 시즌이어서 그런 것인지 언제부턴가 우리끼리 화두는 대한민국과 정치, 대기업과 실물경제, 부동산과 금융대출, 학교폭력과 배금주의 이런 것들이다. 결론은 모두 돈으로 귀결된다. 특히 가진 자들이 이미 가진 것들을 발판 삼아 못 가지거나 덜 가진 자들과 더욱 엄청난 격차를 벌이게 된 이 현실이 슬프고 분노스러워 죽을 지경인 것이다. 삼년 전 보다 나아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있다면 우리가 볼 수는 없다. 우리 사는 이곳에서 떠난 지 오래이니까. 비강남 지역에 33평 전세, 중형차 1대, 초중생 자녀를 둔 우리 세대 월급쟁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MBC 사장이 퇴진하는 것도 정봉주가 석방되는 것도 강호동이 컴백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궁금한 건 학교와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도 가고 졸업 후 취직도 했고 나이가 차서 결혼도 하고 정상적으로 아이도 낳고 이 사회에 반하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는데, 아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이다. 왜 우린 지금보다 도통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는가 이다. 우리의 결론은 앞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건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로또일 뿐이라는 것에 몰표를 던진다. 우리 같은 99%는 허구한 날 솟구치는 이자와 날아오는 고지서와 늘어나는 가격표에 둘러쌓여 주름살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 중간에 어떤 극적인 일확천금의 기적이 없다면 우린 어쩌면 아이들에게 빚을 물려주면서 이 세상을 하직 할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 세대가 특별히 더 나라를 걱정하고 특별히 성격이 더 불안하고 유달리 아이를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닌 듯 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런 생각을 우리 세대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아가 우리나라만 이 꼴인 것 같진 않다.

 

 

 

회의(會議)는 언제나 회의(懷疑)스럽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뉴요커에 대한 환상은 좀 필요이상이었다. 증권가, 패션잡지, 변호사, 검사 등의 전문직으로 상징되는 뉴욕의 능력자들은 정장을 입고 백팩을 매고 스니커즈를 신고 베이글을 먹는다고 들었다. 마천루의 회색빛 이미지와 블랙톤의 슈트, 금발 단발머리, 그리고 빌딩 사이로 언뜻 지나가는 뉴욕의 차가운 하늘. 걸어가는 사람들의 시크하고 무표정한 얼굴. 낮엔 실용성을 따지다가 밤엔 시스루룩으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미드열풍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뉴요커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꽤 근사한 인종의 표상임을 각인 시켰다. 혹시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보시라. 뉴욕의 브로드웨이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모여들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시라. 물론 우리가 떠올리는 DKNY 슈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델처럼 걸어가는 젊은 남자들은 거기 없다. 모두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어쩌다가 노숙자, 주정뱅이와 마주칠 확률도 있다. 2008년이 되기 전에 뉴욕에 갔을 때 엠파이어트 스테이츠 빌딩 맨 꼭대기 기념품 샵에는 모든 물건에 ‘I LOVE NY’ 라고 적혀있었다. 그땐 거기서 보는 뉴욕의 야경이 부럽긴 했다. 허나 이제 더 이상 우린 뉴욕과 뉴요커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월가에 모여든 사람들에 관심 갖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일까. 전후 60년 동안 우리는 미국이 하는 일은 거의 빼놓지 않고 충실하게 따라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따라한 것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따라하게 되는 것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따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내세운 가치를 누구보다 적극 수용하고 악착같이 실행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1년 가을 뉴욕 월가에서 일어난 시위를 기록한 점령보고서이다. 9월에 시작하여 두 달 간 치열한 점령의 시간을 가진 후 현재 혹한과 탄압을 맞아 중단 되었다. 새해가 된지 석 달이 되지 않았으니 시기적으로 따끈따끈한 최신의 뉴스에 해당한다. 책은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 목격이 주가 되는 체험담과 기자, 편집자, 작가, 교수들의 칼럼 릴레이로 교차 편집되어 엮여졌다. 칼럼을 쓴 지식인들도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거나 연설을 했거나 공개총회에 참석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시위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어느 날 같은 장소에 모여 그날부터 천막을 치고 공동체를 조직해 회의를 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행진을 하며 주장을 내세웠다는 이야기다. 뭐 그렇다고 월가의 은행들이 이참에 정신 들여 반성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모여서 떠들고 행진을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 것이다. 아니, 그동안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 일 것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시민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이 동네의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곳이 시위대의 점령 장소가 되어 하나둘 천막촌이 형성되더니 밤마다 각종 악기소리가 들려오고 주변 상가들은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으며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되 있어 불안해서 죽겠는 날들이 두 달 째 이어진다면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린 아마 ‘책에서 읽은 대로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막상 현실의 중요한 순간에 와서는 체질적으로 옳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로 변심하여 민원을 넣기 바쁘지 않을까.

 

 

세계는 지금 자본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반성에 여념이 없다. 미국발(發) 금융 위기에 이어 유럽 국가의 재정 위기로 세계경제가 다시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득 불평등의 심화로 1%가 독식하고 99%가 소외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會議)는 너무 오래된 회의(懷疑)가 되었다. 우리는 위기 때마다 자본주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얼마나 지겹게 들어왔던가. 그런 가운데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아온 한국은 여당과 야당이 한목소리로 '경제 민주화'를 제시하고 있다. 시장을 공정한 경쟁 체제로 만들고 결실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에 역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민주화의 주체인 ‘국민’이다. 바로 경제 민주화라는 한국적인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몫이며, 이는 국민의 몫이라는 주장이다. (중략... 조선일보. 2012. 3. 12) - 정말 지겹다. 국민의 힘이며 국민의 몫이라는 말. 왜 늘 책임 이야기 할 때만 국민을 그다지도 챙기는 것인지.

 

 

나는 어쩐지 ‘국민의 몫’이 국민이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국민이 지는 책임이라는 소리로 들렸다.(그러니 앞으로 선택이나 잘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보수 언론은 여전히 경제위기의 책임을 국가냐 시장이냐의 이분법 안에서 규정지으려 한다. 이는 세계경제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규정한 미국의 주장을 근거로 한 시각이다. 불공정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 낸 것은 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가 시장에 던진 질문에 시장이 국가에 반론하는 전형적인 대립구도이다. 그 사이에서 국민은 언제나 설득과 통제의 대상이 되고 기득권은 변함없이 유지된다. 결국 가진 자들이 달라지는 건 하나 없고 국민만 가르치려 드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점령시위를 해석하고 보도하는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점령시위를 자본주의에 맞서는 범세계적 운동으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저 특정 시기 미국 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거나 금융권의 비도덕성을 성토하는 규탄대회이거나 개인화를 주장하는 행위라며 그 집단성의 의미를 축소하고 퇴색시키는 것이다. 어딜 봐도 시위현장에서의 폭력 장면을 주로 노출하면서 시민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제공하고 현장에서 일어난 주장이나 평화적 의지 같은 건 묻히도록 의도한다. 미국도 장애인을 앞에 두고 최루탄을 쏘는 나라인지 미처 몰랐다. 단지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몸수색을 당하고 체포가 되는 나라인지 몰랐었다. 시위의 ‘시간’, ‘장소’, ‘방법’에 대한 규제가 우리나라처럼 꼼꼼한지 처음 알았다. 질서유지에 강박관념을 가진 뉴욕경찰은 사소한 위법행위에도 엄격한 단속을 시행하는 조직이었다. 낮은 수준의 무질서를 단속하여 공동체의 건강에 기여하겠다는 야무진 발상을 도시이념으로 삼아온 곳이었다. 이 돈 가진 윗 것들이 안 가진 아랫 사람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어찌 이리 똑같은 것일까. 예를 들어 통장해지를 위해 은행에서 줄을 선 것도 점령시위대 소속이다 싶으면 바로 무질서 현행범으로 잡혀 들어가는 나라, 그 나라의 가장 쏘 쿨한 도시. 그럴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미래의 한 단면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뉴욕의 경찰은 물대포가 아닌 어떤 방법으로 시위대를 탄압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먼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떠올려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데자뷰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파산 일보 직전의 월가 은행은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받고 시민은 그 덕에 파산했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의 진원지에 해당하는 AIG는 2009년 회생의 목적으로 받은 공적 자금을 임직원에게 거액의 보너스로 지급했다. 핵심인재관리를 위해 회사로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미국인의 공분을 사고도 남을만한 작태였다. 우리가 지금 미국을 걱정할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처럼 미국인 대다수는 한 평생 채무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서브프라임 쇼크 이후 일반가정은 주택담보 압류, 강제퇴거, 학자금대출, 실업의 수순을 밝으며 고통을 떠안게 되었다. 금융권의 불공정 행위와 지속적인 착취, 도둑질의 결과 노숙자는 늘어갔고 방만 경영의 대표주자 세계 최대 기업이었던 GM은 파산했다.

 

 

월가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20,30대의 고학력 이면서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버거킹에서 굴욕적으로 화장실 사용을 금지 당하고 맥도널드에서 줄을 서야 했다. 그래도 커피는 마셔야 하므로 그 앞 스타벅스에 앉아 관광객들이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 할 때 답해주는 친절을 행하면서 말이다. 어쩌다 편집자의 집에서 샤워를 하게 된 날 트위터에 그 한 줄 기쁨을 알려가면서 말이다. 이들은 60년대 히피나 괴짜도 아니고 부잣집 철없는 도련님도 아니고 대단한 사회운동가,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냥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저 1퍼센트가 아닌 그 나머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하면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형국이었다. 날 것으로 노출된 그들의 대화는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았고 대단한 결론은 아니지만 합의가 창조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협력의 문화임을 보여주었다. 공개총회나 대변인 모델의 시도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자가 없이도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점령시위대는 뜻있는 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모여 앉아 북치고 구호를 외치는 운동이 아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천막으로 이루어진 점령 공동체의 생활이 분명 자본주의를 넘어선 하나의 대안으로 또렷이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시위대는 분권화된 여러 작업 그룹으로 나뉘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된다. 음식, 의료, 법률과 같이 가장 필수적인 분야부터 예술, 교육은 물론 여성, 장애인, 이민자, 퇴역군인 등 소수자에 대한 평등과 배려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박세길의 『자본주의, 그 이후』(돌베게, 2012)에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상생의 인본주의 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창조력이 자본이 되고 구성원이 복지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경제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풀뿌리 지역경제의 이상향이 바로 점령 시위대속에 있었다. 시위대는 ‘대안 경제 작업 그룹’을 만들어 지역자치회와 연대하고자 노력했다.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비록 경찰에 의해 해산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야별로 다양하게 구성된 직능조합의 형태와 유사했다. 자율적이면서 독립적인 창조자들의 수평적 연합체는 승자독식의 원리에서 벗어나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상생의 생태계 구축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월가 점령은 시위라기보다는 ‘대안적 미래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사례’인 것이 맞았다. 칼럼니스트 들은 이를 ‘점령 생태계’라 칭했고 점령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무언가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으로 바꾸는 일이라 평가했다. 사랑과 행복과 희망을 부르는 것이니 ‘공동체 정원’의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있다고 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고민하는 가운데 수면위로 떠오르는 또 다른 ‘정의’에 대한 성찰이다. 이들은 분명 고용불안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느껴 경제정의를 실현하고자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분노와 같은 희망으로 모여들어 같이 가슴이 뛰는 시간을 경험했다. 사실 그곳에 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점령운동의 승리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거대 은행의 파렴치한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한 방법만 고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위대 주변 차이나타운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민자의 문제를 그들 다음으로 고민하기 시작 했다. 백인과 흑인의 발언권이 같다는 인종적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시위대에 걸림돌로 작용하던 노숙자 문제를 끌어안으려 고민하고 설득해야 했다. 사회운동에 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던 드럼서클과 연대하며 주민을 설득시키기도 했다. 시위대 안에서도 소수민족과 백인, 남성과 여성, ‘가치 있는 빈민’과 ‘가치 없는 빈민’으로 나뉘어 지는 이분법의 한계에 부딪혀야 했다. 소수 시위자의 폭력 때문에 다시 경찰의 폭력을 유발하는 전술을 반성하기도 했다. 갓 성인 된 혈기 왕성한 백인 청년들(무정부주의자)의 치기어린 난동을 이해해야 했다.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폭력, 강간 등의 범죄 및 안전 문제, 빨래와 용변 같은 위생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각종 ‘카더라 통신’으로 인한 내부분열을 막아야 했다. 이들은 공동체 속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문제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연대와 동맹의 새로운 형태와 모습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러면서 점령운동의 본질은 ‘누군가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표현의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처럼 ‘말소리를 들은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그 말을 반복하며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운율에 응답하는’ 펄스의 원리를 체험한다. 정신과 육체의 단절이 해제되는 순간이다. 연대는 단지 이익집단끼리의 단순한 악수가 아니라 ‘삶을 사는 방식과 세상에 대한 종합적 견해까지 서로 공감하는 것’임을 깨닫고 점령운동의 가치가 포용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점령은 특정 공간을 정복하여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여든 장소에서 서로와 손을 잡고 마음을 일치시킨 후 그것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 미래사회의 초기 모델을 보여준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정부는 점령을 테러리스트의 행위와 유사하게 재구성하여 무질서한 폭력집단으로 중계하는 것이다. 물대포는 경찰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대포를 쏠 만큼 과격한 시위대의 폭력성을 강조할 뿐인 것이다.

 

 

 

분노했다면 점령하는 것이 다음이다

 

 

 

세상은 변했고 세대도 달라졌고 방식도 진화했다. 그저 우리 생각만 변하면 된다. 아니 맞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행하면 된다. 우린 생각은 하지만 그저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아직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 가슴이 아팠다. 그가 월가의 점령시위를 보고 블로그에 10월 달에 올린 글이 안타깝게도 유언이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2012년을 점령하라’ 였다.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조문행렬, 2011년 희망버스... 그리고 다음은 무엇인가. 그는 미국이 비호감이더라도 우리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미국보다 사정이 낫다. 미국보다 금융이 정치에 비해 권력이 강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굳이 증권사가 많은 동 여의도를 점령할 필요는 없다. 국회가 있는 서여의도, 청와대가 있는 종로를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 2011년 10월  故 김근태

 

 

 

‘나꼼수’는 시종일관 쫄지마라고 했는데 ‘웃음을 잃지 않는 분위기’와 ‘비폭력적인 방법’은 월가 시위대에서도 일관된 기본방침이었다. 그런 가운데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연설한 슬라보예 지젝의 일침은 매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훗날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그땐 우리가 젊었고 뜨거웠다고 곱씹는 사람이 되지 말자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자기 합리화에 빠지며 현실에 안주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역사는 체제적 배제, 사회적 배제, 경제적 배제의 역사였다. 대한민국 1 퍼센트는 이제 그 옛날 쌍용 자동차 추억의 렉스턴 광고가 아니다. 우리는 이대로 가다간 살아있는 동안 1퍼센트를 위해 배제된 99퍼센트로 사는 길 말고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점령해야 할 것은 변화를 불신하는 아주 오래된 비겁함이다. 1퍼센트의 철벽같은 굳건함과 금빛 찬란한 위력을 믿고 의심 없이 현실을 체념하고 포기하며 온갖 종류의 절망을 푸념하고 사는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와 연대하기도 지레 겁을 내며 만연된 불신으로 체제에 순응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 책에 어느 편집자가 미국의 대형은행 경영진에 편지 보내기 운동을 독려하면서 느꼈던 심정을 적은 글이 더욱 고개를 숙이게 한다. 편지는 미국의 중산층이 주축이 된 부르조아의 시위였다. 직접 은행에 편지를 전달하러 간 편집자는 편지들이 청소부에 의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점령시위대와 함께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교수이고 수입은 좋았고 건강보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부친은 은행에 다니고 도서관과 박물관이 집처럼 편하다는 사람이었다. 주변에 금융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잘 안다고 했다. 한마디로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건전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한다.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은 그가 과연 그들만 비판하는 것이었을까.

 

 

당신 역시 은행가들과 늘 함께 있다 보면 잘못된 일도 괜찮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잘못인 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거품 안에서 살고 있다. 만약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가 그들의 거품을 깨뜨릴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는 당신이 믿고 있는 그런 게 아니라 국가적 재앙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사람들은 분명히 바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p181, 마크 그리프, <n+1>의 창간 편집자

 

 

혹시 왜 여러 방법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는 질책은 아닐까. 나같이 먹고 살기 편한 사람이 봐도 문제인건 빤한데 왜 당신들은 아무 말도 안하느냐로 들렸다. 사람은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관점과 마음이 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모으게 만들었고 그렇게 돈을 모은 사람이 왕이 되는 세상이었다. 1%만 가지는 것이었지만 그 1%가 나도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새삼 이제와 가진 자들의 도덕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우리가 가지지 못해봐서는 아닐까 싶다. 지젝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부패와 탐욕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부패를 만든다면 우린 시스템에 대항하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자본이 되고 스스로 경제와 복지에 주체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 다만 그 속도를 앞당기는 일은 우리에 달린 듯하다. 특히 우리 다음 세대의 지속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 절실하다. 누군가 세상을 바꾸어 주리라 기대만 하는 것은 만약 안 바뀌더라도 할 수 없이 살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분노했다면 다음엔 일어서서 점령하는 것이 순서다. 그리고 먼저 우리들 자신의 절망부터 점령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99%의 절망으로 가득 찬 가슴이라 할지라도. 나머지 1%의 희망을 믿어 보는 것이다. 나와 같을 것이라 믿는 당신들의 가슴도 같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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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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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1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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