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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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소설인가


   이 책이 끌렸던 이유는 무엇보다 내게 지금 당면한 문제에서 기인했다. 예전부터 나는 내가 가진 능력과는 상관없이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최근엔 만족스럽진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쓸 수는 있겠다는 생각까지 진도가 나아가긴 했다. ‘하고 싶다’에서 ‘할 수 있다’로 바뀌기 까지 근 이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막상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글을 어영부영 끝마치고 난 후 나는 도저히 내가 쓴 소설 비슷한(?) 글을 다시 읽어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이제 그것을 ‘했다’고 말하기엔 얼굴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작정하고 내 글의 내러티브와 구성력, 문체, 인물 등을 면밀히 분석한다면 분명 당신 글은 형편없기 짝이 없군요, 이렇게 말하리라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또 (비겁하게도)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건 분명 있긴 하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잘못을 뒤로 하고는 또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혹은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정 오디션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된 듯 했다. 가끔 멘토나 심사위원들이 당신은 당신만의 습관이 너무 굳어진 것 같아 지금 내가 손대기엔 어려워 보인다거나 그동안 불러온 방법을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느냐는 싸늘한 평을 목격할 때가 있었는데 곧 잘 노래는 하지만 가수로 키우긴 석연찮아 보이는 참가자의 모습을, 그만 발견하고 만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려고 발걸음을 떼는 내 모습, 정확히는 그러기 전 거울에 비친 내 참담한 얼굴에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하지 않은 채로 열정과 의지만으로 도전을 해보겠다 생각하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내가 들추고 있던 책은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었고 나는 솔직히 신경숙의 소설이 궁금해서 그 책을 읽어 보던 중은 아니었다. 일정기간 작가의 단편이 알토란하게 모였고 출판사에선 자기네 계간지에 게재된 단편을 앞세워 마치 7년 만에 대단한 소설집을 낸 것처럼 홍보하였지만 나는 소설집에서 몇 편은 이미 다른 책자에서 읽어본 글들이었고 그때 하필 젊은 작가들 틈 사이에서 신경숙의 단편은 그다지 신선하지 못했던 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유명작가의 신작 소설집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또 관성대로 페이지를 넘겨가며 아무런 감동 없이 소설을 읽어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클릭하는 순간 저마다 예약된 감동에 계산대로 도착해야 한다는 계획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연말에 무언가에 쫓기듯 신경숙을 안 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이끌려 무엇을 느끼려 소설을 읽는 것인가. 어제도 그제도 읽었고 내일도 읽을 것이니까 오늘도 읽는다, 는 어처구니없는 변명 앞에서 나는 하루를 보냈다. 급기야 그렇다면 언젠가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오늘 읽고 있는 소설은 맞는 것일까, 왜 하필 많은 글 중에 그것이 소설이어야 하고 소설일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소설을 쓰시오란 말을 들은 적이 없고 그 누구도 내게 소설을 쓰면 좋겠다 말한 적이 없었고 나 또한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소설은 언제부터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언제부터 소설을 향하게 되었을까. 왜 소설만이 감동을 줄 것이라 믿게 되었을까. 아니 나는 왜 다른 무엇이 아닌 소설로 감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까. 이런 대책 없는 생각들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퍽이나 고마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글쎄, 오래전부터 나는 어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한권의 책은 그 시점의 몸과 정신에 당장 필요한 필수적 영양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근육에 단백질이 부족하면 고기가 끌리듯 나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이 대체 우리네 인생에 무엇이며 나는 왜 내 인생에 하필 소설을 끌어 들였는지를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영국의 문학 비평교수가 쓴 소설론인데 이 편안하고 간명한 가르침 덕분에 나는 지난 일주일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흡사 소설을 명상하듯 이 글을 따라가며 나를 가라앉히고 나를 다독이며 스스로 답하면서 소설의 본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누구보다 소설이 필요했던 것이고 소설 속에서 다시 내 인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결국 자기만족적인 서사에 빠져들 수 있었던 시간. 책보다는 사실 그 시간에 대한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 회상의 기록을 전하고자 한다.




2. 나는 누구로 말하는가

 

 

   먼저 이 책의 제목은『 How Fiction Works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며 (물음표가 없다) 'works'는 어떤 기계가 장치로서 작동하다는 뜻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책을 덮고 느낀 결론으로서의 'works'는 소설이 인간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까 여지껏 소설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떤 긍정적인 도움을 주었나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소설을 논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소설의 구성요소(인물, 사건, 배경, 시점)들을 저자의 방식대로 구분하여 서술하기(Narrating), 세부사항(Detail), 작중인물(Character), 언어(Language), 진실·관습·리얼리즘(Truth·Convention·Realism) 등으로 나누어 논지를 펼쳤다. 이론이나 예시가 장황하지 않고 서론 없이 바로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며 저자가 언급했듯이 시점을 말하다가 인물로 들어가고 인물을 말하다가 세부사항을 정리하는 식으로 각장의 경계는 독립적이지는 않다. 프랑스, 영국과 미국의 많은 작가들이 예시로 등장하고 거의 내가 읽어보지 못한 소설을 인용하고 있지만 작가와 작품을 몰라도 상관이 없는 참으로 편안한 문체와 공감을 유도하려는 설득의 자세가 인상 깊었다.

 

   저자는 이 책이 소설을 섬세하게 읽는 입문서가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지금 습작을 하고 있는 예비작가 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특히 내 경우 소설을 쓰려고 하니 제일먼저 화자와 주인공에 대한 시점처리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화법에 대한 불안감을 이 책을 통해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할까. 소설을 읽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이야기를 지어내는 입장에선 1인칭과 3인칭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넓고 넓은 시점의 바다에서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언젠가 소설가 김훈은 3인칭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최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도 ‘1인칭과 3인칭 사이에서 좌초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조바심 속에서’ 한 줄 한 줄 글을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면 우선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운반할 3인칭 주어가 있어야 하고, 그 3인칭 주어의 실
   존을 
감당해 줄 만한 술어가 있어야 할 터 인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과 글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에게서 너로, 너에게서 그로, 그에게서 그들로, 그들로부터 다시 우리로, 단수명사에
   서 
복수명사로 넘어갈 수 있을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진땀 난다.”

    -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 강물이나 바람, 노을의 어휘 몇 개  中

 

 

    이 책에서 바로 김훈이 고백한 ‘3인칭 주어의 실존을 감당해 줄 만한’ 대상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플로베르와 체호프의 작품을 언급하며 마을공동체 혹은 마을 코러스로부터 전해지는 ‘(미식별) 자유간접화법’을 상세히 알려준다.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시점은 일인칭이 아닌 3인칭 관찰자 혹은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을 말하고 있고 작가들이 자유간접화법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정도를 소설의 발전과정이었다 평하고 있다. 결국 작가 자신의 언어와 작중인물의 언어, 그리고 세상의 언어 모두를 압축하여 그 삼중고를 극복해내는 화법으로서의 시점을 고난이도의 소설적 요소로 보는 것 같았다. (우주속의 신이라는 위치가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우주 속의 신과 같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하고 1852년의 어느 한 편지에 썼다. ‘예술은 제 2의 자연이므로 그 자연의 창조자는 유사한 절차에 따라 작업해야 한다. 숨겨진 가없는 피동성이 모든 원자, 모든 현상에서 느껴지게 하라. 바라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는 경이로움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게 어떻게 일어났을까!’      -p53

 

 

   저자는 <마담 보바리>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의 자서전적 소설『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이 ‘플라뇌르’의 선구자라 칭하며 화자로서 소설을 어떻게 작동시켰는지 말한다. 플라뇌르(flâneur)는 흔히 산책하는 사람(만보객)을 의미하는데 ‘대개 젊은 남성으로 크게 다급한 일 없이 거리를 걸으면서 보고 응시하고 생각에 잠기는 한가한 인물’을 말한다. 도시의 모든 것을 꿈꾸고 사람과 현상을 유유히 관찰하고 모든 것에 초연하게 거리를 두는 도시 한량이 곧 본질적으로 작가의 대리자로 수행해왔다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대체 내가 아닌 누가 어디서 어떤 위치에서 사람들을 말하여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플라뇌르가 모든 창의적인 시점의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나로선 참 반가운 산책자였다.

 

 

 

3. 나는 무엇으로 진실한가

 

 

   저자는 소설의 발전과정은 자유간접 화법의 발전과정이며 그 역사는 세부사항의 부상과정이라 말한다. 세부사항, 즉 서사에서 무심코 제시되는 디테일에서는 무의미한 것들의 의미심장함, 허구적 실재의 효과가 나타내는 진실을 보다 강조하였다. 소설 속에서는 논리와 무관한 것 같아도 실재적 온도를 높이기 위해 제시되는 기법들이 ‘무관함 또는 설명될 수 없음이라는 범주’에 엄연히 속하는 것으로서 무관하지 않은 것들과 같이 ‘삶속에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인위적인 거짓외연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리얼리즘의 기호들이 ‘지시적 환상(referential illusion)’에 불과하다는 바르뜨의 주장을 반론하는 저자의 주장이었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교수형」(A Hanging)을 예로 들며 사형수가 교수대로 걸어가는 길에 웅덩이를 비껴가는 모습을 그 반대의 근거로 제시한다. (실제로 오웰은 금방 죽을 목숨인 사형수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충격을 받고 생명의 소중함, 삶의 일상성을 깨닫는다) 오웰의 에세이를 한편의 소설이라 가장 한 후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하는 행위를 (바르뜨의 주장처럼)무관한 세부사항이라 보았을 때 허구에서는 실재 자체의 무관성이 바로 리얼리즘의 효과이며 ‘리얼리즘적’ 문체의 효과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치 생의 어느 순간에 다른 사람은 알아챌 수 없는 ‘핵심적인 인간적 진실’을 불현듯 포착하는 것이 훌륭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하찮은 거짓은 삶을 이루는 모든 거대한 진실만큼이나 진실하다는 충고로까지 느껴졌다.

 

 

사형수가 웅덩이를 피해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것은 순전히 기억된 습관이다. 그렇다면 삶도 불가피한 잉여, 없어도 무방한 것으로 채워진 여백, 필요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하는 영역-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인상들, 더 많은 기억들, 더 많은 습관들, 더 많은 단어들, 더 많은 행복, 더 많은 불행을 포함하는 영역-을 항상 포함 할 것이다.  -p97

 

 

   저자는 문학은 우리가 삶을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며 우리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과 흡사하게 작동하는 소설은 우리가 보다 다양한 인간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운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책무는 ‘이것이 일어났을 법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늘 지어낸 것이고 모방인 것인데 그렇기에 삶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과 문학, 책은 모두 소설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소설은 개인의 운명에 관심 갖게 만드는 예술형태‘라는 결론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소중하게 건져내어 가슴 한 구석에 담아 놓고 싶은 구절이었다. 비록 내 운명이 순탄치 않아 소설을 내 인생에 끌어 왔지만 내 소설에 담아낸 사람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기대. 내가 그랬듯 소설이 나를 포함한 내가 관계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혹은 그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 소설은 아직 운명지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운명이 아닐까, 감히 기다려 보는 것.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점이다...(중략)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p77

 

 

   저자는 소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후반부에 성공한 소설과 진정한 작가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저자는 인물의 평면성, 입체성에 대한 논의는 소설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라 생각하지 않아 보였다. 인물이 깊이가 없다거나 반대로 너무 복잡해서 소설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곧 작가가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통제하고 운영하는지의 능력과 관계한다. 이는 곧 인물이 평면적이어서 소설이 생동감 없는 것이 아니고(사실 깊게 들어가 보면 그 작품에서 평면적인 인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평면성도 인물의 입체화의 다른 말에 불과하지만) 작가가 평면적인 인물이나 혹은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에 대한 집요한 설득을 끝내 하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그 부분에서 나는 극적인 캐릭터 없이도 감동적인 소설을 창조해내는 몇몇 작가들과 잔잔한 창법으로도 큰 울림을 선사하는 특정 가수를 떠올렸다.

 

 

소설이 실패하는 것은 작중 인물이 충분히 생생하거나 깊지 않을 때가 아니라, 문제의 소설이 자신의 관습에 어떻게 적응할지 독자에게 가르치는 데 실패했을 때, 작중인물들과 실재성의 수준에 대한 독자의 구체적 허기를 다루는데 실패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p130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꾼은 신이며, 신이 운명의 대본을 쓴다.’는 전언은 저자가 생각하는 작가의 위치를 잘 말해준다. 소설은 철학적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옳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는 충고도 고마웠고 설득력 있는 불가능성은 설득력 없는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낫다는 명언도 감사했다. 책을 덮으며 소설은 삶에 대해 얼마나 진실해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모든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얼마나 정확하고 세심하게 볼 수 있는가에 따라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작가는 비록 관습적인 생각일지라도 대중이 알고 있는 관습이 작동하기 이전에 그것을 관습적이지 않게 통제하는 특별한 능력을 반복하여 개발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리하여 누군가 이미 작동시킨 관습을 따라가지 않고 작가 스스로 최초 대중의 관습으로 자리해 누군가의 관습으로 작동되는 사람이 아닐까.

 

 

진정한 작가, 곧 삶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는 삶이 마치 소설이 지금껏 포착해 낸 그 어떤 것으로도 포괄되지 않는 범주인 것처럼, 마치 삶 그 자체가 항상 관습적인 것으로 화하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것처럼 항상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다.  -p251

 

 

   이번 독서를 통해 다시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더 진실하기 위해 택한 것이 소설이고 소설은 그동안 나를 더욱 진실하도록 만들었기에 나 또한 소설을 통해 내가 아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 하찮은 진실 하나라도 꼭 전달해야겠다는 의지였다.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내가 포착한 것들, 내가 떠올리는 인물, 그밖에 무수한 허구들은 하나씩 정리해 나가면 될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위대한 작가들도 어떤 대단한 결심이나 창대한 진리가 있어 작품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위대한 작가들도 위대해지기 전에는 지금보다 조금은 더 진실해지려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꼭 내가 지금 진실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는 것이 자신을 더 진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이 작동하는 곳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진실이 작동하는 그곳이 아닐까. 진심으로 진실을 작동시키는 소설가야 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진정한 진리로 남는 것이 아닐까.

 

   간절히 진실해지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불가능도 진실로 작동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득할 수 있는 불가능은 설득하지 못한 가능성보다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혹 나처럼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들과 이 책이 전하는 진실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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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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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3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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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2-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해 전 소설을 아주 조금 공부했었어요.
[여명의 눈동자]를 쓰신 추리소설가 김성종 선생님이 꾸려가시는 추리문학관에서 말이죠.
물론 다른 소설가 분이 수업을 맡으셨는데 소설은 이러이러한 형식을 갖추어야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지라..형식을 의식하다 진짜 소설이 뭔지 제대로 한편도 써보지 못한채 그냥 끼적거리던
습작 두 편을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하고 말았어요.
아ㅡ, 소설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생각하도록 저를 인도했다면 아마 소설을 써보겠다고
무작정 덤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네요,,ㅋㅋ
글을 읽다가 불현듯 그때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