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 자네 오늘 기분이 좋은 것 같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B 글쎄 저보고 삼십 대로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뭡니까. 오십이 다 돼 가는데 말이죠.

A 자네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B 무슨 말씀이십니까? 맘 놓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A 그런 말 들었다고 다 믿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네. 진실을 놓치지 말라는 말일세.

B 무슨 말씀입니까?

A 자네가 알고 싶다면 내 생각을 말해 줄 수 있네.

B 말씀해 주세요.

A 사람이란 상대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보다 기분 좋은 말을 더 많이 한다네.

B 그럼 제가 삼십 대로 보인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가요?

A 그건 모르지. 거짓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B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A 내 말은 이런 것이네. 사십 대 후반의 자네를 보고 자네 나이로 보는 사람이 다섯 명이고 삼십 대로 보는 사람이 다섯 명이 있다고 치세. 이럴 때 자네에게 나이와 관련해 말해 줄 사람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사람들이라는 거네. 전자의 사람들은 대체로 침묵하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가정을 해 보겠네. 자네를 본 열 명 중에서 자네를 나이에 비해 젊게 보는 사람이 세 명이고 자네를 나이에 비해 늙었다고 보는 사람이 일곱 명이 있네. 그럴 때 자네에게 나이와 관련한 말을 해 줄 사람은 그 세 명일세. 나머지 일곱 명은 자네가 젊어 보인다든지 늙어 보인다든지 하는 말을 일체 하지 않을 걸세.

B 그렇겠군요.

A 그렇다네. 그런데도 만약 자네가 늙어 보인다는 일곱 명의 생각을 무시하고 젊어 보인다는, 겨우 세 명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그런 경우에 오히려 진실은 자네가 늙어 보인다는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건데 말이야. 열 명 중 일곱 명의 생각이면 칠십 프로의 사람들의 생각이니 과반수가 넘지 않나.

B 그렇게 되겠네요.

A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자네가 젊어 보인다고 말한 사람들이 진짜 느낀 대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네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빈말로 한 것인지 모른다는 점이네.

B 그렇다면 진실은 칠십 프로에서 더 올라가겠네요.

A 그렇게 되겠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칭찬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2.

A 내 친구가 그러더군. 그 친구는 나와 동갑이어서 육십 대 중반인데 자기가 아저씨로 보이는지 할아버지로 보이는지 확실히 아는 방법이 있다는 거야.

B 그 방법이 무엇인가요?

A 지하철을 타는 거라고 하네. 그 친구가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면 안다는 거야. 빈자리가 생겨 젊은 사람들이 자기한테 자리를 양보할 때가 있대. 그럴 때 예전엔 사람들이 자기한테 “아저씨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는데 요즘은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더군.

B 그분 기분이 상하셨겠네요.

A 처음엔 놀랐다고 하더군. 진실이란 그렇게 불편한 구석이 있을 때가 많지. 누구나 자기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큼은 젊어 보일 거라는 착각을 하지. 그러나 언젠가는 나이를 속일 순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온다네.

 

 

 

 

............................................

우리가 놓치기 쉬운 진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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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4-18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은 재밌.. 으면서도 뭔가 마음이 곤두서게 만드네요. 칭찬이 유효할 만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실한 칭찬인지. 말이란 것은 참 들을 수록 할수록 겁이 나는 거 같습니다. 겁만 내서는 진짜 칭찬도 진짜 진실도 놓치겠지만 말이에요.

페크pek0501 2014-04-18 13: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이런 메시지엔 대화체가 효과적일 것 같아서 써 봤어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 쓴 셈이에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하지만 이런 글을 쓴 사람이 저말고 또 있는 건 아니겠지요? ^^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하나만 말하라면 ‘나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책’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내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 (또는) 인용할 문장이 많은 책. 다 같은 말이다.

 

 

내가 쓴 글 중에서 일곱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달과 6펜스>였고, 여덟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인간의 굴레에서>였으니 서머싯 몸은 내게 좋은 책을 쓴 작가임에 틀림없다. 나는 서머싯 몸의 광팬이라고 할 만하다.

 

 

이 페이퍼에서는 눈여겨볼 만하면서 내 글에 인용한 적이 없는 문장들을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뽑아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 생각이나 느낌을 곁들였다.

 

 

 

 

 

1.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 : 길을 걷다가 좋은 풍경을 보고 반해 버려서 마음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느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느낀다. 이럴 때 작가라면 표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주인공도 나처럼 이런 느낌을 가진 듯해서 반가웠다.

 

 

필립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대성당 건물을 바라볼 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창문 밖으로 손질이 잘된 오래된 잔디밭과 잎이 무성한 멋진 나무들이 보였다. 그걸 내다보고 있노라면,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적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3쪽. ----------

 

 

 

 

 

 

2. 십자가로 생각하라 : 교장이 필립에게 불구의 다리를 십자가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불구라는 것)을 반항심으로 받아들이면 수치로만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이 네게 짊어지게 한 십자가로 생각해 보아라. 네 어깨가 특별히 강하여 사랑의 표시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러면 그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7쪽. ----------

 

 

이 글을 보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

“종식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단다. 저 들판의 작은 들풀과 꽃, 하늘에 맴도는 하루살이 벌레도 다 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있단다. 종식이의 장애는 종식이의 십자가야.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거란다. 이왕 지는 십자가 기쁜 마음으로 지겠니, 슬픈 마음으로 지겠니?”

- 고정욱 저,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

 

 

(이 글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어느 책에서 봤더라, 하면서 여러 책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찾아냈다. 기뻤다.)

 

 

 

 

 

 

3. 잘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 <달과 6펜스>에 정작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만큼은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도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남에게 그리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프라이스이다.

 

 

프라이스 양은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사이좋게 헤어졌다 하더라도 다음에 언제 또 토라져서 함부로 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기는 정작 잘 그리지 못하면서도 뭘 가르쳐야 할지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조언 덕분에 필립의 솜씨는 상당히 향상되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37쪽. ----------

 

 

두 작품에서 똑같은 특성을 가진 인물이 중복되어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것과 (실제로) 잘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작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인물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나를 본 듯해서다. 내가 예전에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만큼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아마 그때 나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웃으리라.

 

 

 

 

 

 

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크론쇼가 묻고 필립이 대답한다.

 

 

“ (…)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필립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라, 는 것인가?”

“그런 셈이죠.”

---------- <인간의 굴레에서 1>, 348~349쪽. ----------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크론쇼의 물음에 필립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는데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이럴 땐 이렇게 써야 할 것 같다.

 

 

...................................

필립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집에 가면서 그 물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대답을 하는 게 더 좋았겠다 싶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고 필립은 아쉬워했다.

...................................

 

 

이래야 리얼리티가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어떤 물음을 던졌을 때 완벽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그리고 물음이 잘못된 것 같다. (번역의 문제인가?)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가 아니라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로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답이 나오기 위해서는.

 

 

 

 

 

 

5.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 : 크론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네. 나는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하지만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우주의 모든 힘들이 저 영겁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건 필연이니까. 선한 행위였다 해도 난 공적을 주장할 수 없고, 나쁜 행위였다 해도 난 비난받을 수 없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1쪽. ----------

 

 

이 글과 비슷한 글을 어디서 본 듯한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냈다. 에리히 프롬의 저작에서 봤다는 것을.

 

 

...................................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

 

 

두 개의 글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정할 땐 자신의 의지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일조차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 고립되기 싫다는 생각, 최신의 기술을 자랑하며 유혹하는 광고 등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1941년에, <인간의 굴레에서>가 1915년에 발표된 것이니 서머싯 몸이 먼저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사랑을 사랑하다 : 필립은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막 잠에서 깬 어린 짐승처럼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물,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포플러, 새파란 하늘, 이 모든 것을 그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78쪽.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7. 돈은 제6감과 같다 : 돈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슈 프와네가 필립에게 말한다.

 

 

돈은 제6감이라는 것.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쪽. ----------

 

 

가난은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는 것.

 

 

예술가에게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하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415쪽. ----------

 

 

이 글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 같아서 긴 글을 그대로 옮겼다.

 

 

가난해서 품위를 잃게 되고, 가난해서 방해받게 되고, 가난해서 속 좁아지고, 가난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가난해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다면 불행한 일이다. 돈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이런 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8. 화가 나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다 : 누구나 화가 나면 상대를 자신보다 더 화나게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상대의 약점을 언급하는 치사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백부는 필립에게 말한다.

 

 

“네 돈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다. 너도 이제 독립된 인간이고.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네게 한없이 쓸 만한 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불행한 일이지만 네 신체가 불편하여 돈 벌기가 남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 말이다.”

필립이 이제 알게 된 것은, 누구든 자기에게 화가 나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필립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425쪽. ----------

 

 

이런 글은 경험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만약 경험이 없다면 피상적 관찰이 아닌 세심한 관찰을 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9. 자신의 약점을 자신이 이용할 때도 있다 : 필립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이용한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본능적인 느낌으로, 무슨 말을 하면 그녀의 마음이 움직일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하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가혹해. 정말이지 못 견디겠어. 하기야 당신은 절름발이의 심정을 모르겠지. 그래, 내가 싫을 거야. 나도 기대 안해.”

“필립, 그건 아녜요.”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에 갑자기 연민이 어려 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이제 필립은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잖아요, 필립. 어떨 때 당신이 좀 피곤하게 굴긴 하지만. 이제 마음 풀어요.”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갖다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맞춘다.

“어때, 이젠 기분좋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 좋아 죽겠어.”

---------- <인간의 굴레에서 1>, 494쪽. ----------

 

 

약점은 때론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극과 극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

 

 

 

 

 

 

10.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고 생각하라 : 인생의 좌우명으로 이건 어떨까?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

---------- <인간의 굴레에서 1>, 429쪽. ----------

 

 

이런 생각으로 산다면 신문에서 보도하는 사고나 사건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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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3,7,8,9,10 표제에 공감합니다. 특히 7,8 번에요. 그리고 10번 마지막 문장은 「모퉁이 저편에 사신(死神)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로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페크님 하면 서머싯 몸이 떠올라요. 자동이예요. ㅎㅎ

페크pek0501 2014-04-15 21:23   좋아요 0 | URL
ㅋㅋ 자동입니까? 그럼 영광이지요.

공감 가는 글이 많고 여러 번 읽고 싶은 글이 많아 밑줄을 많이 그었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

2014-04-14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4-04-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 좋네요. 완독 축하드려요. 인용하신 대목 대목 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에리히 프롬의 책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4-15 21:32   좋아요 0 | URL
예, 서머싯 몸의 글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제가 쓴 글 중에도 누군가가 이렇게 옮겨 소개하고 싶을 만큼 좋은 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욕심인가요?ㅋ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정신적인 두 기둥으로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두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거겠죠.
제가 언급한 프롬의 책은 의외로 인용문이 많아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잘 지내시죠?
 
인간의 굴레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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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의 가치관이나 취향 등에 따라서 그 소설의 가치를 다르게 매길 것이다. 그 소설에서 얻는 것도 각자 다르리라. 어떤 대목에서 감동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교훈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유머가 있다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작가의 독창성을 느끼는지도 각자 다르리라. 이렇게 소설에 대한 독자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세 가지로 보았다. 그 세 가지란 주인공인 필립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깨달아 가는 것들로, 간단히 말하면 ‘어쩔 수 없는 마음’, ‘시행착오의 인생’, ‘무의미한 인생’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란 인간은 아무리 이성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지라도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시행착오의 인생’이란 인간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리석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는 것을 말함이다.

‘무의미한 인생’이란 인생에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건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1. 어쩔 수 없는 마음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마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이성’이란 건 무용지물이다.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의 역할이 있긴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따르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필립은 간파하게 된다.

 

 

예전에 필립은 ‘밀드레드’라는 여자와 헤어진 적이 있다. 그녀가 딴 남자가 결혼하겠다고 떠난 것이다. 이 일에 그는 자존심이 상했고 비참해졌다. 그녀도 경멸스러웠지만 자신도 경멸스러웠다.

 

 

그 다음에 필립은 ‘노라’라는 여자를 사귀게 된다. ‘노라’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에게 편안한 행복을 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런데 밀드레드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딴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고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필립은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준다. 그녀는 그의 보살핌에 고마운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노라를 신뢰하지만 밀드레드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노라보다 밀드레드에게 끌리고 만다. 그래서 노라와 헤어지기로 한다.

 

 

분별이 있는 남자라면 마땅히 노라를 택하리라. 밀드레드와 함께 있는 것보다 노라가 그를 훨씬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라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에 비해, 밀드레드에게는 그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밖에 없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 문제는 그가 지금 온 영혼을 바쳐 밀드레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라와 함께 한나절을 보내기보다 단 십 분이라도 밀드레드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며, 노라의 어떤 키스보다도 밀드레드의 그 차가운 키스 한번이 더 좋은 것이다.

'어쩔 수 없어.' 그는 생각했다. '밀드레드는 이제 내 골수에 사무쳐 있는 거야.'

---------- <인간의 굴레에서 2>, 53~54쪽. ----------

 

 

필립은 밀드레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가 설령 박정한다 한들, 그녀가 사악하고 저속하다 한들, 설령 미련하고 욕심이 많다 한들 어찌하랴. 이 사랑의 마음을 어찌하랴. 노라와 행복해지고 싶기보다 밀드레드와 불행해지고 싶은 것이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54쪽. ---------- 

 

 

밀드레드는 딸을 낳는다. 필립은 그 아이가 비록 다른 남자의 아이이지만 그 아이도 예뻐한다. 밀드레드와 그 딸을 보살펴 주며 행복해 한다. 

 

 

어느 날 필립은 밀드레드에게 그리피스를 소개해 주기로 한다. 그리피스는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필립이 아팠을 때 병간호를 정성껏 해 주던 사람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친구이다.

 

 

필립은 그녀가 하루종일 자기하고만 보내면 따분해할까봐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리피스는 재미있는 친구이니 저녁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필립은 두 사람이 다 좋았기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내면서 맘에 드는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87쪽. ---------- 

 

 

셋이 만난 자리에서 그리피스는 즐거운 얘기들을 쏟아낸다.

 

 

그는 즐거운 우스갯소리들을 하기 시작했다. 필립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재담이었다.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내용은 없었으나 발랄함이 넘쳤다. 그에게서는 생명력이 흘러넘쳤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 생명력에 감응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체온처럼 감지할 수 있었다. 밀드레드가 이처럼 생기를 띠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작은 자리가 성공을 거두자 필립은 퍽 기뻤다. 그녀는 재미있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던 얌전 떨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88~89쪽. ---------- 

 

 

그리피스의 재담에 밀드레드가 반해 버린다. 바람둥이인 그리피스 역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이튿날 그들 셋은 다시 모여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연예관에 간다. 필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밀드레드와 그리피스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말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고문하고 싶은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일어나서 뭘 좀 마시고 오겠다고 했다. 밀드레드와 그리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단둘이만 있어본 적이 없다. 이들을 단둘이만 있게 해보고 싶었다. (…) 그는 바로 가지 않고 발코니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그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자기를 보지 못한다. 이제 두 사람은 무대는 아예 보지도 않고 서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그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돌아가면 방해만 될 뿐이다. 그가 없으니 두 사람은 마냥 즐거운 것이다. 그는 괴롭고 괴로웠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93쪽. ---------- 

 

 

그는 그리피스와 밀드레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해 있는 그 자리에 별수 없이 돌아갔다. 밀드레드의 눈에 자기를 귀찮아하는 표정이 스치는 듯해서 가슴이 내려앉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고 그녀도 손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피스의 손을 잡고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94쪽. ----------

 

 

필립은 두 사람이 자기 몰래 만날 계획을 세웠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꾸 둘이서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적중했다. 결국 필립은 자기 친구인 그리피스에게 밀드레드를 빼앗기고 만다.

 

 

제일 속이 상했던 점은 그리피스의 배반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111쪽. ----------

 

 

필립은 고통스러워한다. 이렇게 그가 고통스럽게 된 이유는 신뢰하는 노라를 버리고 신뢰하지 않는 밀드레드를 택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행복을 버리고 불안전한 행복을 택했기 때문이다. “노라와 행복해지고 싶기보다 밀드레드와 불행해지고 싶은 것이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지 않았던가. 필립은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만드는 마음인 것이다.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힘은 강력한 것이다.

 

 

 

 

 

 

2. 시행착오의 인생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구인 필립은 어릴 때 부모를 잃어 백부의 집에서 자란다. 자식이 없는 백모는 필립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사랑한다. 하지만 사제였던 백부는 필립에게 정을 주지 않고 엄격하게 대하기만 한다.

 

 

필립은 학교를 우등으로 마친 다음 옥스퍼드에 진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학교를 그만두기로 한다. 학교를 다니는 게 싫었다. 필립은 런던에 가서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일을 배운다. 하지만 필립은 자기가 사무실에서 장부 계산이나 하는 이런 일보다는 더 훌륭한 일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부 계산과 같은 일을 자기가 썩 잘해 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창피스러워 한다.

 

 

그런 필립에게 헤이워드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 인생을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은 세상에 두 가지뿐일세. 예술과 사랑이지. 난 자네가 사무실에 앉아 장부 따위나 들여다보고 있는 걸 상상할 수 없네. (…) 왜 파리에 가서 미술공부를 하지 않나? 난 늘 자네가 그쪽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279~280쪽. ----------

 

 

이 편지를 받고 필립은 생각에 잠겼다.

 

 

이 권고는 묘하게도 필립이 한동안 마음속으로 막연히 타진해 보았던 가능성과 완전히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 다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80쪽. ----------

 

 

게다가 필립에겐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필립은 일을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화가가 되기로 한다.

 

 

케어리 씨 내외(백부 내외)는 화가가 되겠다는 필립의 생각에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신사 집안이셨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림 그리는 일이 어찌 버젓한 직업이겠느냐, 세상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나 택하는, 남 부끄럽고, 부도덕한 직업이다,고 그들은 말했다. 게다가 파리라니!

“내가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한, 널 파리에 보내지는 않겠다.” 사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86쪽. ----------

 

 

백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필립은 그림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로 한다.

 

 

그런 필립에게 백부가 말했다.

 

 

“이제 너는 어린애가 아냐. 자리를 잡고 안정할 생각을 해야지. 처음에는 공인회계사가 되겠다고 우겼다가 곧 싫증을 내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또 멋대로 생각을 바꾸다니. 그건 말이다, 네가 ……”

그는 필립의 성격적 결함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을 찾으려고 잠시 머뭇거렸다. 필립이 대신 말끝을 맺어주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며,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의지가 약하다는 거겠죠.”

---------- <인간의 굴레에서 1>, 424쪽. ----------

 

 

백부는 필립이 유산으로 상속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젠 필립이 쓸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어쨌든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네가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반대를 했는데 역시 내 말이 옳았다는 것 말이다.”

“그 점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남의 충고에 따라 옳은 일을 하여 얻는 것보다 스스로 애쓰다 잘못한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요. 저는 제 하고 싶은 것을 해본 거예요. 그리고 이제 생활을 정돈해도 나쁠 것 없구요.”

---------- <인간의 굴레에서 1>, 425쪽. ----------

 

 

필립은 남의 말에 따라 현명한 삶을 살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삶에서 교훈을 얻으면서 깨달아 가는 게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인생이란 시행착오의 인생인 것이다.

 

 

 

 

 

 

3. 무의미한 인생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364~365쪽. ----------

 

 

필립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365쪽. -------

 

 

필립은 크론쇼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어냐고 묻자 자신에게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게 답이었던 것. 즉 인생이란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함이었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 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 <인간의 굴레에서2>, 366쪽.--------

 

 

필립이 이해한 바로는 어떤 인생이든 무의미한 인생인 것이다.

 

 

 

 

 

 

***** 맺는말 ***** 

 

 

1.

서머싯 몸의 작품을 다 찾아 읽고 싶을 만큼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주인공 필립의 삶도 흥미로웠지만 작가의 사유를 담은 문장이 곳곳에 많아서 더 흥미로웠다. 만약 내가 앞으로 소설만 줄곧 읽는다면 이런 소설만 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글을 읽다가 보물을 발견한 듯한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읽게 되는 즐거움! 이 즐거움은 소설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 보면 쓰레기 더미가 있는 길을 만났다가 꽃밭이 있는 길을 만났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며 사는 게 우리의 ‘인생’ 같다. 쓰레기 더미의 악취로 괴로워하다가 꽃밭이 나타나면 꽃향기로 기뻐한다. 꽃향기로 기뻐하다가 쓰레기 더미가 나타나면 악취로 괴로워한다. 누구나 쓰레기 더미의 길에만 머물지 않으며 누구나 꽃밭의 길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길게 꽃밭의 길에 머무느냐가 아니라 쓰레기 더미의 길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곳을 지나느냐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악취가 더 날 수도 덜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의 길에서도 현재의 시간은 흐르고 있고 미래의 시간도 흐르게 된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쓰레기 더미의 길을 지나쳐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행운처럼 꽃밭의 길에 들어서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2.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문단을 하나 소개한다. ‘헤이워드’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다.

 

 

그러나 헤이워드는 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안목이 뛰어났고 감식력도 섬세했다. 그는 사상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말동무가 될 수 있었다. 사상 자체는 실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을 마치 경매장에 나온 도자기들처럼 다루었다. 손에 들고 형태와 빛깔을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값을 매겼다. 그런 다음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두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25쪽. ----------

 

 

이 글은 ‘인간’과 ‘사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다. 헤이워드에게 ‘사상’이란 도자기와 같다. ‘사상’을 즐겁게 감상하지만 상자 속에 넣어 둔 다음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상’이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상’ 대신에 ‘이성’이란 낱말을 넣어 읽었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도자기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성’이 도자기처럼 우리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는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성’은 현명한 판단을 해 줄 뿐 우리를 행동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성’은 그저 관찰자이며 방관자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 말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지배하는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술을 끊기로 하고 끊지 못하고,

다이어트를 하기로 하고 하지 못하고,

책을 사지 않기로 하고 사는 경우가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가. 

 

 

밀드레드가 책임감 있는 필립을 버리고 무책임한 남자를 따라가서 결국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이 두 번 반복되는 것도 그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이다. 필립도 연애를 할 때나 진로를 결정할 때 ‘이성’보다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지배를 받는다. 나는 그것이 ‘인간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며 이것에 무게를 두고 읽었다. 그래서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소설 제목에서 ‘인간의 굴레’를 ‘마음의 굴레’로 읽었다.

 

 

필립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아,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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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9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4-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게된다면 순전히 페크님 덕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09 12:43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적어도 다락방 님은 재밌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의 경우, 소설의 맛을 즐기는 건 줄거리에 있지 않고 사유의 문장에 있는데
님도 그 맛을 아시리라 생각? 아니 확신합니다. ^^


추신 : 지금, 맺는말에서 2번을 추가했어요. 제 답글을 확인하러 오실 때 읽어주시길... ^^

비로그인 2014-04-0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데 괜시리 번거롭게 해드리는게 아닐지.. ~~ㅠㅠ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좀 흐리지만 날이 그래도 포근하네요.. 페크님.. ^^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봄날들이 이렇게 흐르네요.. ~~^^

페크pek0501 2014-04-09 12:4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봄날에, 저는 자다가 깼어요.
글을 올리고 나니 잠이 쏟아져서요. 그리고 지금 글을 추가해 넣었답니다.
잠에서 깨면서 이 글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작성해 놓았던 글이 생각났어요. 따로 쓸까 하다가 그냥 여기에 넣었어요.

추신 : 지금, 맺는말에서 2번을 추가했어요. 제 답글을 확인하러 오실 때 읽어주시길... ^^

야클 2014-04-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근사한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

페크pek0501 2014-04-10 09: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렇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2014-04-09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04-0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었던 책인데
페크님 때문에 오늘 구매했어요. ^^::::

페크pek0501 2014-04-10 09:13   좋아요 0 | URL
아, 급부담되네요...
하지만 님이 이미 읽으셨다니 안심이에요.
이런 책은 소장하는 게 좋다는 게 제 생각이긴 해요.
좋은 봄날 되세요...

착한시경 2014-04-0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구나니,,, 당장 책을 읽어보고 싶어져요~다행히 책이 있어서 훓어볼수 있었네요~ 정말 책을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예요^^

페크pek0501 2014-04-10 09:15   좋아요 0 | URL
책이 있으시다니 좋겠습니다.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가 아니라
영양가 없이 길게만 쓴 리뷰 같습니다.
길어서 자르고 싶었는데 자를 데가 없더라고요. 제 능력 부족으로...ㅋ
좋은 봄날 되세요.

2014-04-10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4-1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더미의 악취로 괴로워하다가 꽃밭이 나타나면 꽃향기로 기뻐한다. 꽃향기로 기뻐하다가 쓰레기 더미가 나타나면 악취로 괴로워한다. 누구나 쓰레기 더미의 길에만 머물지 않으며 누구나 꽃밭의 길에만 머물지 않는다. - 언제나 밑줄긋기 할 게 많은 페크님 글^^*
서머싯 몸 글은 '서밍업'으로 먼저 만났었는데 그때도 참 좋았어요. 작가관 인생관에 관한 글이었던 걸로... 영어 원서 옆에 번역되어 있어서 영어 공부하기 좋으라고 편집되어 있었던 걸 기억해요. 인간의 굴레, 읽게 된다면 저도 페크님 덕~~

페크pek0501 2014-04-13 11:50   좋아요 0 | URL
저에겐 본능적으로 교육자의 특성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에요.
좋은 책을 만나면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샘솟는 거예요.

요즘 봄날이라고 매일 많이 걸었더니, 자고 일어나니 다리가 아프네요.
오늘은 다리를 쉬어 줘야겠어요.
좋은 휴일 보내시길...

2014-04-12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3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소설에는 남자에게 상처 주는 여자가 꼭 등장하죠.그래서 몸이 동성연애에서 위안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페크pek0501 2014-04-13 12:1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은 적이 있네요. 몸이 동성연애자가 아닐까 의심 받은 적이 있다고요.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요. 어쩌면 본인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옛 시대에서 예술가들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요.

좋은 봄날이에요. 만끽하시길...


노이에자이트 2014-04-13 17:2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책의 역자해설엔 몸의 동성연애 경력은 분명하다고 나와있네요.

몸이 살던 시대는 옛날이라고 하기엔 좀...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살았는 걸요.워낙 장수했죠.

페크pek0501 2014-04-13 18:09   좋아요 0 | URL
길쿤요(그렇군요).ㅋ

1874년생이어서 오래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향년 91세로 영면, 1965년까지 살았다네요. 놀랍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38   좋아요 0 | URL
몸은 마지막 생애 10년 동안 온갖 추한 모습은 다 보여줬죠.차라리 70세 좀 넘어서 타계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15 21:36   좋아요 0 | URL
아, 그랬나요? 10년 동안 온갖 추한 모습을 다 보였군요. 저는 그래도 광팬 하겠습니다.
설령 도박에 빠지거나 유부녀와 바람이 나거나 알콜 중독이거나... 어떤 일이든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미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에겐 관대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의 자서전이 있다면 읽어 보고 싶군요. ^^
 

 

단상(84)에 이어서 쓰는 글이다. 이번에도 역시 소설 속 문장들을 옮겨 적고 그것과 관련하여 나의 단상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글의 제목은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로 정했다.

 

 

 

 

제목 :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

 

 

필립과 크론쇼는 얘기를 나눈다. 논쟁에 가까웠다.

 

 

 

“제가 보기엔 그건 만사를 아주 이기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하고 필립이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넨 인간이 이기적이 아닌 동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필립은 소리쳤다.

크론쇼는 낄낄 웃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쪽. ----------

 

 

 

크론쇼는 말을 이어 나갔다.

 

 

 

“놀란 망아지같이 왜 그러나. 자네 기독교가 싫어하는 말을 내가 사용해서? (…) 내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자넨 놀라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은 덜 충격적이니까. 그리고 자네 마음은 에피큐로스의 돼지우리에서 그의 정원으로 이동하게 되니까. 하지만 난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네. 왜냐하면 바로 그게 사람의 목표거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지는 모르겠어.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그것이 남들에게도 이로우면 선한 일로 여겨지는 거야. 은혜를 베푸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지. 사회에 봉사하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공중정신을 가지게 되고. 하지만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괘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난 자네보다는 솔직한 편이라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네의 감탄을 요구하지 않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354쪽. ----------

 

 

 

필립이 질문했고 크론쇼가 대답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없네. 자네 질문 방식이 틀렸어. 자네가 말하려는 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겠지. 질문 방식도 그렇지만 문제 제기 자체도 어리석네. 사람들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그건 미래의 더 큰 쾌락을 위해서이지. 때로 쾌락은 환영과 같아. 하지만 계산착오가 있다고 해서 법칙을 부정할 수야 없지 않은가. 자넨 어리벙벙한 모양인데 그건 자네가 쾌락을 감각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 하지만 젊은 친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게 좋아 그렇게 한다네. 그건 양배추 절임을 먹는 사람이 그게 좋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창조의 법칙이야. 사람이 혹 쾌락보다 고통을 더 좋아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거야.”

---------- <인간의 굴레에서 1>, 354~355쪽. ----------

 

 

 

나는 이 글이 흥미로워 여러 번 읽었다. 크론쇼가 필립에게 해 주는 말을 작가가 독자에게 해 주는 말로 읽었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크론쇼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작가가 독자에게 인간에 대해 크론쇼와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크론쇼가 말한 것의 핵심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것과 ‘인간이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라는 것. 

 

 

이 두 가지는 다른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어서 작가들의 생각이란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에 동의할 수 없는 독자도 있으리라.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선행을 베풀 때에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 예를 들어 본다.

 

 

(1) 예전에 내가 살던 곳의 이웃 사람한테서 들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미술 선생과 다투게 된 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는 그의 딸(초등학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해 주기 위해 집을 방문하는 미술 선생에게 점심을 몇 번 대접한 적이 있다고 한다. 수업 시간이 그 집의 점심시간 즈음이라서 그리 된 모양이다. 미술 선생은 매번 밥 생각이 없다며 몇 번 사양하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생이 미술 수업료를 만 원을 올려야겠다는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가 웃으면서 좋게, 아이가 미술을 배운 지가 오래된 단골손님인데 만 원 인상은 많다면서 오천 원만 인상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단다. 그러자 미술 선생은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란다. 결국 옥신각신하며 다투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그들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이웃 사람 :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은 적도 많은데 오천 원은 빼 줄 수 있잖아요. 오천 원만 인상해 드릴게요.

미술 선생 : 제가 밥 먹고 싶어서 먹은 줄 아세요? 어떤 날은 배부른데도 억지로 먹었다고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이웃 사람 : (어이없음.)

 

 

나는 이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호의를 베풀 때조차도 사실은 그 상대가 싫으면서도 참고 호의를 받아 주는 경우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2)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다. 어느 모임이 끝나고 나서 자동차가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임이 있을 적마다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 그 둘은 함께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다툼이 생겼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오갔다.

 

 

A : 오늘은 제 차를 타고 가지 않겠다고요?

B : 예,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요.

A : 저 혼자 가기 심심한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B : 왜 제가 늘 당신 때문에 같이 가야 하죠? 저에게도 맘대로 하고 싶은 자유라는 게 있어요.

A :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나요? 섭섭해지네요.

B : 저더러 차를 얻어 탈 때마다 황송해하란 말인가요?

A : 그런 말은 아니지만... 고맙지 않나요?

B : 뭐가 고맙다는 말인가요? 그동안 당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그만큼 타 줬으면 됐죠.

 

 

이건 내가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재구성하여 써 본 것이다. 실제로 B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식사비를 내고 싶은 그의 과시욕을 위해 밥을 먹어 줬어요. 얻어먹기 싫은 적도 있었다고요. 꼭 내가 고마워해야 되나요?”

 

 

이것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식사비까지 지불한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3) 이곳 서재에 적용시켜 또 하나 예를 들어 본다.

 

 

A : 저는 님의 서재에 댓글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왜 님은 저의 서재에 댓글을 한 번도 쓰지 않는 거죠?

B :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님이 제 서재에 댓글을 쓰는 게 싫었어요. 늘 호의적인 댓글이 아니었거든요. 어떤 날은 기분이 나쁜 댓글이었는데 참았다고요.

A : 뭐라고요?

B : 기분 나쁜 댓글일 때가 있었지만 님이 기분 상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고요. 만약 제가 님에게 “앞으로는 저의 서재에 댓글을 달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면 님이 기분 좋겠어요?

 

 

B의 생각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서재에 댓글을 단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 얘기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댓글을 달지 않으면 삐질지 모르는 사람이다. ㅋㅋ)

 

 

 

내가 어느 페이퍼에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독자인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나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글을 좋아한다.’라고.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 그리고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글.

 

 

바로 크론쇼의 말이 어떤 독자에겐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소개해 봤다.

 

 

 

 

................................

<덧붙이는 말>

 

-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엔 상대의 답례를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태도가 서로에게 최선이란 생각이 든다.

 

- 크론쇼의 말에 대해선 옳은지 그른지를 여러분이 각자 판단해 보시길...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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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4-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봤는데 뭔가 착한 일이라는 것들을 하고나면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작은 선행으로 시작된 일들이 점점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랄까 도파민 중독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널 위해서 어쩌구 저쩌구...."
이따위 말들 저는 안 믿습니다.
다 자기 좋자고 하는거 맞다고 생각해요.

저는 뭐 크룐쇼의 의견에 동감입니만.

하여간...서머싯 몸. 멋져요. 참.

페크pek0501 2014-04-03 14:48   좋아요 0 | URL
도파민... 이런 걸 진작 알았더라면 제 페이퍼의 내용이 이것보다 좋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아는 만큼 쓰는 것이니까요...)
다 자기 좋자고 하는 것....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론쇼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이 페이퍼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님을 비롯, 여러 댓글을 보니 동의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반론의 분들은 댓글을 안 쓴다고 쳐도...)

서머싯 몸이 멋지다는 건 그의 책 네 권을 읽고 내린 저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

비로그인 2014-04-02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봐도...페크님은 점점 도를 깨치고 계신 것 같아요. 정말이지 막힘없이 술술 몰입하며 읽었어요..

(저의 이 댓글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저의 쾌락이 더 크답니다 ^^)

페크pek0501 2014-04-03 14:49   좋아요 0 | URL
도를요? 우후~ 별 말쌈을요...
저도 댓글을 달기 위해 여기저기 서재를 돌아다니는 게 저의 쾌락입니다. ㅋ

마립간 2014-04-0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것 ; 이것에 관해서 연구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증거나 증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의 이기'라고 해도.
단지 모든 것이 이기적이냐에 관해서 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근거로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죠. 그 상황에서의 의견 선택은 가치관일테고요.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라는 것 ; 이기적인 것 중의 중요한 요인이 쾌락이고요.

페크pek0501 2014-04-03 14:53   좋아요 0 | URL
선행을 베푸는 것도 당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보면 싸가지가 없는 말 같긴 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선물이란 것도 선물하고 싶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물건일 뿐이니까요... ^^

어쨌든 인간에 관해선 늘 흥미롭습니다. 진기한 물건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 탐구의 소설이 제일 재밌습니다. 인간에 대한 얘기는 다 재밌어요. ^^

세실 2014-04-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꾹!!

페크pek0501 2014-04-03 14:54   좋아요 0 | URL
오잉?

감솨합니다요. ^^

노이에자이트 2014-04-04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중단편까지 거의 다 읽어본 제가 내린 결론은...이 사람은 좀 극단적이다!

특히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조롱하며 바보취급하고 오히려 잔인하게 짓밟는 내용이 그의 작품엔 꽤 있습니다.몸의 작품이 재밌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분명히 불건전한 요소가 있음도 사실입니다.아마 페크 님도 언젠가는 <몸의 인간관에 내재하는 독소>라는 제목으로 멋진 평론을 쓰게 될 날이 곧 오겠지요.

페크pek0501 2014-04-05 13:45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진작 평론을 공부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건방지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했어요. 인간에겐 누구나 사악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서머싯 몸이 통찰했고 그래서 소설을 그렇게 쓴 것이라고요. 분별력이 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구석이 있는 것도 인간의 특성이 아닐까 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특성도 인간의 특성이 될 수 있지요. 그런 것들의 총합이 '인간'일 테니까요.

그래도 꼭, 그의 소설 속에는 선량한 사람이 등장한답니다. 필립도 그런 사람이에요. 서머싯 몸은 결국 선인과 악인을 모두 그려내고 있는 셈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십니까?

그런데 어제 왜 제 서재에 422명이 방문했는지 궁금해졌어요...
아, 이제 삶은 감자 먹으러 친정에 가려 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4-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이 가까운가요? 삶은 감자 먹으러 가실 정도면...

페크pek0501 2014-04-09 08:49   좋아요 0 | URL
아... 예...
친정이 가까워요. 걸어서 십 몇 분 정도로...
일부러 제가 이사왔지요.
 

 

 

 

예술적 재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음악을 만드는 재능과 음악을 연주하는 재능이 존재해서 나를 즐겁게 해 줄 때 그렇다. 요즘 조지 윈스턴의 <December>를 들으면서 음악가의 재능에 감사했다. 음악가의 예술적 재능이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가. 서머싯 몸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작가의 예술적 재능이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가. 그러니 내게 예술적 재능이 없음에 서운해 할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의 글을 다 읽었다. 어떤 날은 십 쪽 이하의 분량을 읽었고 어떤 날은 백 쪽 이상의 분량을 읽었다. 적게 읽은 날도, 많이 읽은 날도 좋았다. 이런 소설이라면 아무리 두꺼워도 지루해 하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재밌고 유익한 독서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불구의 다리를 가진 몸이어서 자신은 청년이 되어서도 어떤 여자와도 연애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한다. 그러다가 한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고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며 행복해 하다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또 다른 여자와의 만남에선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그림 그리기를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렜다. 그리하여 그림을 배우러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자 자신은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우울해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로를 바꾸기로 하고, 화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정 같았다. 하지만 의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 되기까지 어려운 시련을 겪으며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깊이 깨달아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줄거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그것은 작가의 사색을 감상할 수 있는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들은 내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그래서 그 문장들을 옮겨 적고 그것과 관련하여 나의 단상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글을 써 봤다. 글의 제목으로 무엇을 할까 하다가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로 정했다.

 

 

 

 

제목 :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정열적으로 키스를 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침에는 전혀 끌리지 않던 그녀가 오후에는 좀 괜찮게 느껴지고, 밤이 되니 이처럼 슬쩍 손이 닿기만 해도 짜릿짜릿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대낮이라면 도저히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못하였으리라. 필립은 자신이 쏟아내는 말들이 놀랍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사랑의 고백이 너무 근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그랬다.

“아니, 다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에요. 뜨겁게 타는 내 마음을 말이에요.” 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너무 근사했다. 사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놀이는 처음이었다. 놀라운 일은 자기가 속삭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감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말보다는 감정이 조금 과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43~244쪽. ----------

 

 

 

필립은 연상인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에 빠진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그녀를 만나는 게 싫어진다. 결국 필립은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그녀를 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서 그리된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가장 추한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의 그 모습, 캐미솔과 짧은 속치마 차림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잊혀지지 않았다. 거칠거칠한 피부, 목의 옆쪽에 길게 패인 주름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승리감은 곧 사라져버렸다. 나이를 다시 따져보니, 도저히 마흔 아래로 잡을 수가 없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렸다. 상대는 못생기고 늙은 여자. 필립의 머릿속에는 퍼뜩, 신분으로 봐서는 지나치게 야하고, 나이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젊은 사람의 옷차림을 한, 주름지고 초췌하고 화장을 짙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이 끼쳤다. 갑자기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를 했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없다. 제 자신이 끔찍스럽게만 느껴진다.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그녀를 대면하는 시간을 늦추려고 필립은 되도록 느릿느릿 옷을 입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48~249쪽. ----------

 

 

 

어느 날엔 슬쩍 손이 닿기만 해도 짜릿짜릿한 느낌을 주던 상대가 어느 날엔 소름이 끼칠 만큼 보기 싫은 것,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하고 필립은 의아해한다. 필립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랑이란 감정은 무가치하다. (만약 이것이 사랑의 본모습이라면 상대로부터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랑’을 믿고 인생을 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필립의 시각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될까? 나는 뒤집어 해석해 보았다. 필립이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못생기고 늙은 여자"임에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힘은 경이롭지 않은가. 

 

 

 

“사랑의 고백이 너무 근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그랬다.

“아니, 다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에요. 뜨겁게 타는 내 마음을 말이에요.” 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너무 근사했다. 사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놀이는 처음이었다. (243~244쪽)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에너지의 감정을 분출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위대하다.

 

 

결과적으로 ‘사랑이란 감정은 변한다.’라는 전제 하에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필립의 시각에서 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무가치한 것, 필립의 시각을 뒤집어 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위대한 것. 

 

 

여기서 문제 제기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자신보다 상대를 더 아끼는 사랑, 이런 ‘완전한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어쩌면 ‘완전한 사랑’이란 건 우리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 ‘진짜 사랑’을 흉내 내고 있는 ‘가짜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닐까.

 

 

문제 제기 또 하나.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투를 하는 게 ‘사랑’인가.

 

 

어째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상대가 친구를 만나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즐거워하면 질투를 하고, 상대가 등산이나 낚시에 즐거워하면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상대가 행복한 걸 싫어하는 게 사랑인가. 오히려 ‘당신이 즐거워하는 걸 보니 나도 즐겁다.’라고 해야 ’사랑’이 아닌가. 또 어째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둘이 다툰 뒤에 상대가 괴로워하면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상대가 불행한 걸 좋아하는 게 ‘사랑’인가. 오히려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니 나도 괴롭다.’라고 해야 ‘사랑’이 아닌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사랑’의 뜻을 알아보았다.

 

 

(1)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2)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3)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이 세 가지 중에서 우리는 사랑의 뜻을 무엇으로 알고 있어야 할까? 나는 사랑을 이 세 가지의 뜻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문제 제기를 했다. (참고로, 소설 속 필립의 사랑은 (1)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랑이란 말을 쓸 땐 (1)번의 뜻으로 ‘사랑’을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3)번의 뜻으로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자신은 (1)번의 뜻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상대는 (3)번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서로 오해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이 만우절이라고 하던가.

태어나고 보니 만우절이었다는...

웃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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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4-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십니까? 저의 옛 친구가 오늘이 생일이라고 해서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그런 의미에서 공감 한 방 쏘겠습니다.ㅋ

생각해 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정말 사랑해 본적이 있었나 싶어요.
늘 머뭇거리기만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게 짝사랑 겸 첫사랑에 실패해선가 봐요.ㅠ
누군가를 보고 가슴 설레었던 기억조차 이젠 가물가물해요.ㅠㅠ


페크pek0501 2014-04-02 16:39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학교에 다닐 때, 생일이라고 하면 친구들이 믿지 않았답니다.

첫사랑... 그 설렘이라는 것도 오래가지 않아 문제지요.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매일 설렌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요.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설렘이란 일종의 긴장감인데... 늘 긴장하며 살 순 없잖아요.
제 나이가 되고 보면 편안한 게 최고, 입니다. ㅋ

잘잘라 2014-04-0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페크님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이 노래를 진짜로 한 번 불렀습니다. 귓속말 하듯 아주 작게요~)

페크pek0501 2014-04-02 16:3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님을 보면 흥겨운~ 경쾌한 음악이 생각납니다.

마립간 2014-04-0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일 축하드립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단일 정체성을 갖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pek0501님의 글을 일고 제가 사랑을 다시 정의한다면 ; 네이버 사랑의 정의 1)~3)까지의 정의에 상충, 모순이 없는 상황으로 정의하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4-02 16:41   좋아요 0 | URL
예, 사랑이란 게 미묘 복잡하지요.
아직도 저는 사랑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어요.
더 알게 되면 좋은 페이퍼를 올릴 수 있을 듯요...^^

비로그인 2014-04-0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계절에 태어나셨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페크님..~~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 바람도 너무나 좋습니다.. ~~^^

페크pek0501 2014-04-02 16: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요즘 날씨가 얼마나 죽이는지, 어젠 두 시간을 걸었답니다.
봄 풍경을 만끽하세요. 비가 오면 벚꽃이 질 거예요.

비로그인 2014-04-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정말로 페크님 생일이라는데, 몰빵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페크님은 절대 이런 걸로 만우절 장난 안치실 분 같아서요..ㅎㅎ 그런 의미에서 저도 스텔라님처럼 공감 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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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뭔가, 뭐긴 뭐냐고 쉽게 살고 있고 이젠 생각하는 것 자체도 귀찮을만큼 게을러져버렸는데 정말 생각해보게 하시네요. 언제나 그러시지만..

페크pek0501 2014-04-02 16:43   좋아요 0 | URL
몰빵, 좋은 선택이십니다. 진짜 생일입니다.

동의해요. 제 나이가 되면 사랑을 받는 것도 귀찮다, 가 될지 모릅니다.

생일로 인해 공감이 홍수네요. ^^

다락방 2014-04-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인간의 굴레에서>를 사야겠다, 생각했는데 결국 생일 축하를 해야겠다는 결과가 나오네요. 페크님, 생일 축하합니다!! :)

페크pek0501 2014-04-02 16:4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다락방 님이 읽으신다면 재밌게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입니다. 강추!!!

blanca 2014-04-0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댓글 단 것 같은데 저는 이 작품을 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은 비극이 있답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 그래도 접한 페크님이 부럽습니다. 서머싯 몸! 정말 그렇죠. 저는 톨스토이도 그래요. 진짜 그런 작가들이 있어요.

생일이셨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페크pek0501 2014-04-02 16:46   좋아요 0 | URL
비극이라니요.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읽으신다면 어렸을 때 보는 책과 느낌은 다를 것이고요...그 차이를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맘에 드는 소설은 두 번 이상 읽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일 축하... 고맙습니다. 어제였지만...요.

세실 2014-04-03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카스에서 본 법륜스님의 글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욕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랑 통하는 글이네요. 사랑,사랑~~~~
지났지만, 페크님 생일 하늘 땅만큼 축하드려요^^

페크pek0501 2014-04-03 14:56   좋아요 0 | URL
법륜 스님의 글이 좋은 게 많은가 봐요.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욕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 어떻게 이렇게 사고할 수 있는 건가요... 감탄 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