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84)에 이어서 쓰는 글이다. 이번에도 역시 소설 속 문장들을 옮겨 적고 그것과 관련하여 나의 단상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글의 제목은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로 정했다.
제목 :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
필립과 크론쇼는 얘기를 나눈다. 논쟁에 가까웠다.
“제가 보기엔 그건 만사를 아주 이기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하고 필립이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넨 인간이 이기적이 아닌 동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필립은 소리쳤다.
크론쇼는 낄낄 웃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쪽. ----------
크론쇼는 말을 이어 나갔다.
“놀란 망아지같이 왜 그러나. 자네 기독교가 싫어하는 말을 내가 사용해서? (…) 내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자넨 놀라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은 덜 충격적이니까. 그리고 자네 마음은 에피큐로스의 돼지우리에서 그의 정원으로 이동하게 되니까. 하지만 난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네. 왜냐하면 바로 그게 사람의 목표거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지는 모르겠어.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그것이 남들에게도 이로우면 선한 일로 여겨지는 거야. 은혜를 베푸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지. 사회에 봉사하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공중정신을 가지게 되고. 하지만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괘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난 자네보다는 솔직한 편이라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네의 감탄을 요구하지 않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354쪽. ----------
필립이 질문했고 크론쇼가 대답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없네. 자네 질문 방식이 틀렸어. 자네가 말하려는 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겠지. 질문 방식도 그렇지만 문제 제기 자체도 어리석네. 사람들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그건 미래의 더 큰 쾌락을 위해서이지. 때로 쾌락은 환영과 같아. 하지만 계산착오가 있다고 해서 법칙을 부정할 수야 없지 않은가. 자넨 어리벙벙한 모양인데 그건 자네가 쾌락을 감각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 하지만 젊은 친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게 좋아 그렇게 한다네. 그건 양배추 절임을 먹는 사람이 그게 좋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창조의 법칙이야. 사람이 혹 쾌락보다 고통을 더 좋아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거야.”
---------- <인간의 굴레에서 1>, 354~355쪽. ----------
나는 이 글이 흥미로워 여러 번 읽었다. 크론쇼가 필립에게 해 주는 말을 작가가 독자에게 해 주는 말로 읽었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크론쇼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작가가 독자에게 인간에 대해 크론쇼와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크론쇼가 말한 것의 핵심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것과 ‘인간이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라는 것.
이 두 가지는 다른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어서 작가들의 생각이란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에 동의할 수 없는 독자도 있으리라.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선행을 베풀 때에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 예를 들어 본다.
(1) 예전에 내가 살던 곳의 이웃 사람한테서 들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미술 선생과 다투게 된 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는 그의 딸(초등학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해 주기 위해 집을 방문하는 미술 선생에게 점심을 몇 번 대접한 적이 있다고 한다. 수업 시간이 그 집의 점심시간 즈음이라서 그리 된 모양이다. 미술 선생은 매번 밥 생각이 없다며 몇 번 사양하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생이 미술 수업료를 만 원을 올려야겠다는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가 웃으면서 좋게, 아이가 미술을 배운 지가 오래된 단골손님인데 만 원 인상은 많다면서 오천 원만 인상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단다. 그러자 미술 선생은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란다. 결국 옥신각신하며 다투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그들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이웃 사람 :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은 적도 많은데 오천 원은 빼 줄 수 있잖아요. 오천 원만 인상해 드릴게요.
미술 선생 : 제가 밥 먹고 싶어서 먹은 줄 아세요? 어떤 날은 배부른데도 억지로 먹었다고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이웃 사람 : (어이없음.)
나는 이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호의를 베풀 때조차도 사실은 그 상대가 싫으면서도 참고 호의를 받아 주는 경우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2)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다. 어느 모임이 끝나고 나서 자동차가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임이 있을 적마다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 그 둘은 함께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다툼이 생겼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오갔다.
A : 오늘은 제 차를 타고 가지 않겠다고요?
B : 예,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요.
A : 저 혼자 가기 심심한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B : 왜 제가 늘 당신 때문에 같이 가야 하죠? 저에게도 맘대로 하고 싶은 자유라는 게 있어요.
A :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나요? 섭섭해지네요.
B : 저더러 차를 얻어 탈 때마다 황송해하란 말인가요?
A : 그런 말은 아니지만... 고맙지 않나요?
B : 뭐가 고맙다는 말인가요? 그동안 당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그만큼 타 줬으면 됐죠.
이건 내가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재구성하여 써 본 것이다. 실제로 B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식사비를 내고 싶은 그의 과시욕을 위해 밥을 먹어 줬어요. 얻어먹기 싫은 적도 있었다고요. 꼭 내가 고마워해야 되나요?”
이것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식사비까지 지불한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3) 이곳 서재에 적용시켜 또 하나 예를 들어 본다.
A : 저는 님의 서재에 댓글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왜 님은 저의 서재에 댓글을 한 번도 쓰지 않는 거죠?
B :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님이 제 서재에 댓글을 쓰는 게 싫었어요. 늘 호의적인 댓글이 아니었거든요. 어떤 날은 기분이 나쁜 댓글이었는데 참았다고요.
A : 뭐라고요?
B : 기분 나쁜 댓글일 때가 있었지만 님이 기분 상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고요. 만약 제가 님에게 “앞으로는 저의 서재에 댓글을 달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면 님이 기분 좋겠어요?
B의 생각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서재에 댓글을 단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 얘기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댓글을 달지 않으면 삐질지 모르는 사람이다. ㅋㅋ)
내가 어느 페이퍼에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독자인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나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글을 좋아한다.’라고.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 그리고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글.
바로 크론쇼의 말이 어떤 독자에겐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소개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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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말>
-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엔 상대의 답례를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태도가 서로에게 최선이란 생각이 든다.
- 크론쇼의 말에 대해선 옳은지 그른지를 여러분이 각자 판단해 보시길...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