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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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의 가치관이나 취향 등에 따라서 그 소설의 가치를 다르게 매길 것이다. 그 소설에서 얻는 것도 각자 다르리라. 어떤 대목에서 감동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교훈적이라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유머가 있다고 느끼고, 어떤 대목에서 작가의 독창성을 느끼는지도 각자 다르리라. 이렇게 소설에 대한 독자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세 가지로 보았다. 그 세 가지란 주인공인 필립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깨달아 가는 것들로, 간단히 말하면 ‘어쩔 수 없는 마음’, ‘시행착오의 인생’, ‘무의미한 인생’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이란 인간은 아무리 이성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지라도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는 것을 말함이다.

‘시행착오의 인생’이란 인간이 현명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리석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는 것을 말함이다.

‘무의미한 인생’이란 인생에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건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들을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1. 어쩔 수 없는 마음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마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이성’이란 건 무용지물이다.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의 역할이 있긴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따르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필립은 간파하게 된다.

 

 

예전에 필립은 ‘밀드레드’라는 여자와 헤어진 적이 있다. 그녀가 딴 남자가 결혼하겠다고 떠난 것이다. 이 일에 그는 자존심이 상했고 비참해졌다. 그녀도 경멸스러웠지만 자신도 경멸스러웠다.

 

 

그 다음에 필립은 ‘노라’라는 여자를 사귀게 된다. ‘노라’는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에게 편안한 행복을 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그런데 밀드레드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딴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고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필립은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 준다. 그녀는 그의 보살핌에 고마운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노라를 신뢰하지만 밀드레드를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노라보다 밀드레드에게 끌리고 만다. 그래서 노라와 헤어지기로 한다.

 

 

분별이 있는 남자라면 마땅히 노라를 택하리라. 밀드레드와 함께 있는 것보다 노라가 그를 훨씬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라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에 비해, 밀드레드에게는 그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밖에 없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 문제는 그가 지금 온 영혼을 바쳐 밀드레드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라와 함께 한나절을 보내기보다 단 십 분이라도 밀드레드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이며, 노라의 어떤 키스보다도 밀드레드의 그 차가운 키스 한번이 더 좋은 것이다.

'어쩔 수 없어.' 그는 생각했다. '밀드레드는 이제 내 골수에 사무쳐 있는 거야.'

---------- <인간의 굴레에서 2>, 53~54쪽. ----------

 

 

필립은 밀드레드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가 설령 박정한다 한들, 그녀가 사악하고 저속하다 한들, 설령 미련하고 욕심이 많다 한들 어찌하랴. 이 사랑의 마음을 어찌하랴. 노라와 행복해지고 싶기보다 밀드레드와 불행해지고 싶은 것이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54쪽. ---------- 

 

 

밀드레드는 딸을 낳는다. 필립은 그 아이가 비록 다른 남자의 아이이지만 그 아이도 예뻐한다. 밀드레드와 그 딸을 보살펴 주며 행복해 한다. 

 

 

어느 날 필립은 밀드레드에게 그리피스를 소개해 주기로 한다. 그리피스는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필립이 아팠을 때 병간호를 정성껏 해 주던 사람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친구이다.

 

 

필립은 그녀가 하루종일 자기하고만 보내면 따분해할까봐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그리피스는 재미있는 친구이니 저녁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필립은 두 사람이 다 좋았기 때문에 서로 알고 지내면서 맘에 드는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87쪽. ---------- 

 

 

셋이 만난 자리에서 그리피스는 즐거운 얘기들을 쏟아낸다.

 

 

그는 즐거운 우스갯소리들을 하기 시작했다. 필립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재담이었다.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내용은 없었으나 발랄함이 넘쳤다. 그에게서는 생명력이 흘러넘쳤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 생명력에 감응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체온처럼 감지할 수 있었다. 밀드레드가 이처럼 생기를 띠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작은 자리가 성공을 거두자 필립은 퍽 기뻤다. 그녀는 재미있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던 얌전 떨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88~89쪽. ---------- 

 

 

그리피스의 재담에 밀드레드가 반해 버린다. 바람둥이인 그리피스 역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이튿날 그들 셋은 다시 모여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연예관에 간다. 필립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밀드레드와 그리피스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말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고문하고 싶은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일어나서 뭘 좀 마시고 오겠다고 했다. 밀드레드와 그리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단둘이만 있어본 적이 없다. 이들을 단둘이만 있게 해보고 싶었다. (…) 그는 바로 가지 않고 발코니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그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자기를 보지 못한다. 이제 두 사람은 무대는 아예 보지도 않고 서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그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돌아가면 방해만 될 뿐이다. 그가 없으니 두 사람은 마냥 즐거운 것이다. 그는 괴롭고 괴로웠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93쪽. ---------- 

 

 

그는 그리피스와 밀드레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해 있는 그 자리에 별수 없이 돌아갔다. 밀드레드의 눈에 자기를 귀찮아하는 표정이 스치는 듯해서 가슴이 내려앉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고 그녀도 손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피스의 손을 잡고 있음을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94쪽. ----------

 

 

필립은 두 사람이 자기 몰래 만날 계획을 세웠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꾸 둘이서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적중했다. 결국 필립은 자기 친구인 그리피스에게 밀드레드를 빼앗기고 만다.

 

 

제일 속이 상했던 점은 그리피스의 배반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111쪽. ----------

 

 

필립은 고통스러워한다. 이렇게 그가 고통스럽게 된 이유는 신뢰하는 노라를 버리고 신뢰하지 않는 밀드레드를 택했기 때문이다. 안전한 행복을 버리고 불안전한 행복을 택했기 때문이다. “노라와 행복해지고 싶기보다 밀드레드와 불행해지고 싶은 것이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지 않았던가. 필립은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이 아니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만드는 마음인 것이다. 그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힘은 강력한 것이다.

 

 

 

 

 

 

2. 시행착오의 인생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구인 필립은 어릴 때 부모를 잃어 백부의 집에서 자란다. 자식이 없는 백모는 필립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사랑한다. 하지만 사제였던 백부는 필립에게 정을 주지 않고 엄격하게 대하기만 한다.

 

 

필립은 학교를 우등으로 마친 다음 옥스퍼드에 진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학교를 그만두기로 한다. 학교를 다니는 게 싫었다. 필립은 런던에 가서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일을 배운다. 하지만 필립은 자기가 사무실에서 장부 계산이나 하는 이런 일보다는 더 훌륭한 일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부 계산과 같은 일을 자기가 썩 잘해 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창피스러워 한다.

 

 

그런 필립에게 헤이워드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 인생을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은 세상에 두 가지뿐일세. 예술과 사랑이지. 난 자네가 사무실에 앉아 장부 따위나 들여다보고 있는 걸 상상할 수 없네. (…) 왜 파리에 가서 미술공부를 하지 않나? 난 늘 자네가 그쪽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279~280쪽. ----------

 

 

이 편지를 받고 필립은 생각에 잠겼다.

 

 

이 권고는 묘하게도 필립이 한동안 마음속으로 막연히 타진해 보았던 가능성과 완전히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 다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다고 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80쪽. ----------

 

 

게다가 필립에겐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필립은 일을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화가가 되기로 한다.

 

 

케어리 씨 내외(백부 내외)는 화가가 되겠다는 필립의 생각에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신사 집안이셨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림 그리는 일이 어찌 버젓한 직업이겠느냐, 세상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나 택하는, 남 부끄럽고, 부도덕한 직업이다,고 그들은 말했다. 게다가 파리라니!

“내가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한, 널 파리에 보내지는 않겠다.” 사제는 단호하게 말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86쪽. ----------

 

 

백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필립은 그림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2년 동안 그림을 공부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로 한다.

 

 

그런 필립에게 백부가 말했다.

 

 

“이제 너는 어린애가 아냐. 자리를 잡고 안정할 생각을 해야지. 처음에는 공인회계사가 되겠다고 우겼다가 곧 싫증을 내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또 멋대로 생각을 바꾸다니. 그건 말이다, 네가 ……”

그는 필립의 성격적 결함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을 찾으려고 잠시 머뭇거렸다. 필립이 대신 말끝을 맺어주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며,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의지가 약하다는 거겠죠.”

---------- <인간의 굴레에서 1>, 424쪽. ----------

 

 

백부는 필립이 유산으로 상속받은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젠 필립이 쓸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했다.

 

 

“어쨌든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네가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반대를 했는데 역시 내 말이 옳았다는 것 말이다.”

“그 점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남의 충고에 따라 옳은 일을 하여 얻는 것보다 스스로 애쓰다 잘못한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요. 저는 제 하고 싶은 것을 해본 거예요. 그리고 이제 생활을 정돈해도 나쁠 것 없구요.

---------- <인간의 굴레에서 1>, 425쪽. ----------

 

 

필립은 남의 말에 따라 현명한 삶을 살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삶에서 교훈을 얻으면서 깨달아 가는 게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인생이란 시행착오의 인생인 것이다.

 

 

 

 

 

 

3. 무의미한 인생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364~365쪽. ----------

 

 

필립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까지 자기를 박해한다고만 생각했던 잔혹한 운명과 갑자기 대등해진 느낌이 들었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세상도 잔혹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성공 역시 의미가 없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365쪽. -------

 

 

필립은 크론쇼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어냐고 묻자 자신에게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게 답이었던 것. 즉 인생이란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함이었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뿐이다. (…)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훌륭한 다른 무늬들도 있다. 행복이 없는 무늬,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무늬가 그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 <인간의 굴레에서2>, 366쪽.--------

 

 

필립이 이해한 바로는 어떤 인생이든 무의미한 인생인 것이다.

 

 

 

 

 

 

***** 맺는말 ***** 

 

 

1.

서머싯 몸의 작품을 다 찾아 읽고 싶을 만큼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 주인공 필립의 삶도 흥미로웠지만 작가의 사유를 담은 문장이 곳곳에 많아서 더 흥미로웠다. 만약 내가 앞으로 소설만 줄곧 읽는다면 이런 소설만 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다. 글을 읽다가 보물을 발견한 듯한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읽게 되는 즐거움! 이 즐거움은 소설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 보면 쓰레기 더미가 있는 길을 만났다가 꽃밭이 있는 길을 만났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며 사는 게 우리의 ‘인생’ 같다. 쓰레기 더미의 악취로 괴로워하다가 꽃밭이 나타나면 꽃향기로 기뻐한다. 꽃향기로 기뻐하다가 쓰레기 더미가 나타나면 악취로 괴로워한다. 누구나 쓰레기 더미의 길에만 머물지 않으며 누구나 꽃밭의 길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얼마나 길게 꽃밭의 길에 머무느냐가 아니라 쓰레기 더미의 길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곳을 지나느냐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악취가 더 날 수도 덜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더미의 길에서도 현재의 시간은 흐르고 있고 미래의 시간도 흐르게 된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쓰레기 더미의 길을 지나쳐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행운처럼 꽃밭의 길에 들어서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2.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문단을 하나 소개한다. ‘헤이워드’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다.

 

 

그러나 헤이워드는 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즐겁게 이야기할 줄 알았다. 안목이 뛰어났고 감식력도 섬세했다. 그는 사상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말동무가 될 수 있었다. 사상 자체는 실상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을 마치 경매장에 나온 도자기들처럼 다루었다. 손에 들고 형태와 빛깔을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값을 매겼다. 그런 다음 다시 상자 속에 넣어두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 <인간의 굴레에서 2>, 25쪽. ----------

 

 

이 글은 ‘인간’과 ‘사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다. 헤이워드에게 ‘사상’이란 도자기와 같다. ‘사상’을 즐겁게 감상하지만 상자 속에 넣어 둔 다음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상’이 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이 글에서 ‘사상’ 대신에 ‘이성’이란 낱말을 넣어 읽었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도자기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성’이 도자기처럼 우리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는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성’은 현명한 판단을 해 줄 뿐 우리를 행동으로 몰고 가지는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성’은 그저 관찰자이며 방관자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 말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지배하는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술을 끊기로 하고 끊지 못하고,

다이어트를 하기로 하고 하지 못하고,

책을 사지 않기로 하고 사는 경우가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가. 

 

 

밀드레드가 책임감 있는 필립을 버리고 무책임한 남자를 따라가서 결국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이 두 번 반복되는 것도 그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이다. 필립도 연애를 할 때나 진로를 결정할 때 ‘이성’보다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지배를 받는다. 나는 그것이 ‘인간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며 이것에 무게를 두고 읽었다. 그래서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소설 제목에서 ‘인간의 굴레’를 ‘마음의 굴레’로 읽었다.

 

 

필립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아, 어쩔 수 없는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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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9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4-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게된다면 순전히 페크님 덕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09 12:43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적어도 다락방 님은 재밌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의 경우, 소설의 맛을 즐기는 건 줄거리에 있지 않고 사유의 문장에 있는데
님도 그 맛을 아시리라 생각? 아니 확신합니다. ^^


추신 : 지금, 맺는말에서 2번을 추가했어요. 제 답글을 확인하러 오실 때 읽어주시길... ^^

비로그인 2014-04-0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데 괜시리 번거롭게 해드리는게 아닐지.. ~~ㅠㅠ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좀 흐리지만 날이 그래도 포근하네요.. 페크님.. ^^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봄날들이 이렇게 흐르네요.. ~~^^

페크(pek0501) 2014-04-09 12:4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봄날에, 저는 자다가 깼어요.
글을 올리고 나니 잠이 쏟아져서요. 그리고 지금 글을 추가해 넣었답니다.
잠에서 깨면서 이 글이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작성해 놓았던 글이 생각났어요. 따로 쓸까 하다가 그냥 여기에 넣었어요.

추신 : 지금, 맺는말에서 2번을 추가했어요. 제 답글을 확인하러 오실 때 읽어주시길... ^^

야클 2014-04-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근사한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

페크(pek0501) 2014-04-10 09: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렇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2014-04-09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04-0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었던 책인데
페크님 때문에 오늘 구매했어요. ^^::::

페크(pek0501) 2014-04-10 09:13   좋아요 0 | URL
아, 급부담되네요...
하지만 님이 이미 읽으셨다니 안심이에요.
이런 책은 소장하는 게 좋다는 게 제 생각이긴 해요.
좋은 봄날 되세요...

착한시경 2014-04-0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구나니,,, 당장 책을 읽어보고 싶어져요~다행히 책이 있어서 훓어볼수 있었네요~ 정말 책을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예요^^

페크(pek0501) 2014-04-10 09:15   좋아요 0 | URL
책이 있으시다니 좋겠습니다.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가 아니라
영양가 없이 길게만 쓴 리뷰 같습니다.
길어서 자르고 싶었는데 자를 데가 없더라고요. 제 능력 부족으로...ㅋ
좋은 봄날 되세요.

2014-04-10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4-1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더미의 악취로 괴로워하다가 꽃밭이 나타나면 꽃향기로 기뻐한다. 꽃향기로 기뻐하다가 쓰레기 더미가 나타나면 악취로 괴로워한다. 누구나 쓰레기 더미의 길에만 머물지 않으며 누구나 꽃밭의 길에만 머물지 않는다. - 언제나 밑줄긋기 할 게 많은 페크님 글^^*
서머싯 몸 글은 '서밍업'으로 먼저 만났었는데 그때도 참 좋았어요. 작가관 인생관에 관한 글이었던 걸로... 영어 원서 옆에 번역되어 있어서 영어 공부하기 좋으라고 편집되어 있었던 걸 기억해요. 인간의 굴레, 읽게 된다면 저도 페크님 덕~~

페크(pek0501) 2014-04-13 11:50   좋아요 0 | URL
저에겐 본능적으로 교육자의 특성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에요.
좋은 책을 만나면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샘솟는 거예요.

요즘 봄날이라고 매일 많이 걸었더니, 자고 일어나니 다리가 아프네요.
오늘은 다리를 쉬어 줘야겠어요.
좋은 휴일 보내시길...

2014-04-12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3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4-1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소설에는 남자에게 상처 주는 여자가 꼭 등장하죠.그래서 몸이 동성연애에서 위안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페크(pek0501) 2014-04-13 12:1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은 적이 있네요. 몸이 동성연애자가 아닐까 의심 받은 적이 있다고요.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요. 어쩌면 본인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옛 시대에서 예술가들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요.

좋은 봄날이에요. 만끽하시길...


노이에자이트 2014-04-13 17:26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책의 역자해설엔 몸의 동성연애 경력은 분명하다고 나와있네요.

몸이 살던 시대는 옛날이라고 하기엔 좀...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살았는 걸요.워낙 장수했죠.

페크(pek0501) 2014-04-13 18:09   좋아요 0 | URL
길쿤요(그렇군요).ㅋ

1874년생이어서 오래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향년 91세로 영면, 1965년까지 살았다네요. 놀랍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4-04-14 17:38   좋아요 0 | URL
몸은 마지막 생애 10년 동안 온갖 추한 모습은 다 보여줬죠.차라리 70세 좀 넘어서 타계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15 21:36   좋아요 0 | URL
아, 그랬나요? 10년 동안 온갖 추한 모습을 다 보였군요. 저는 그래도 광팬 하겠습니다.
설령 도박에 빠지거나 유부녀와 바람이 나거나 알콜 중독이거나... 어떤 일이든 이해할 것 같습니다. 이미 좋아하고 있으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에겐 관대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의 자서전이 있다면 읽어 보고 싶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