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하나만 말하라면 ‘나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책’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내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 (또는) 인용할 문장이 많은 책. 다 같은 말이다.

 

 

내가 쓴 글 중에서 일곱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달과 6펜스>였고, 여덟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인간의 굴레에서>였으니 서머싯 몸은 내게 좋은 책을 쓴 작가임에 틀림없다. 나는 서머싯 몸의 광팬이라고 할 만하다.

 

 

이 페이퍼에서는 눈여겨볼 만하면서 내 글에 인용한 적이 없는 문장들을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뽑아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 생각이나 느낌을 곁들였다.

 

 

 

 

 

1.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 : 길을 걷다가 좋은 풍경을 보고 반해 버려서 마음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느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느낀다. 이럴 때 작가라면 표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주인공도 나처럼 이런 느낌을 가진 듯해서 반가웠다.

 

 

필립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대성당 건물을 바라볼 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창문 밖으로 손질이 잘된 오래된 잔디밭과 잎이 무성한 멋진 나무들이 보였다. 그걸 내다보고 있노라면,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적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3쪽. ----------

 

 

 

 

 

 

2. 십자가로 생각하라 : 교장이 필립에게 불구의 다리를 십자가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불구라는 것)을 반항심으로 받아들이면 수치로만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이 네게 짊어지게 한 십자가로 생각해 보아라. 네 어깨가 특별히 강하여 사랑의 표시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러면 그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7쪽. ----------

 

 

이 글을 보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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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식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단다. 저 들판의 작은 들풀과 꽃, 하늘에 맴도는 하루살이 벌레도 다 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있단다. 종식이의 장애는 종식이의 십자가야.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거란다. 이왕 지는 십자가 기쁜 마음으로 지겠니, 슬픈 마음으로 지겠니?”

- 고정욱 저,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

 

 

(이 글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어느 책에서 봤더라, 하면서 여러 책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찾아냈다. 기뻤다.)

 

 

 

 

 

 

3. 잘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 <달과 6펜스>에 정작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만큼은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도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남에게 그리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프라이스이다.

 

 

프라이스 양은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사이좋게 헤어졌다 하더라도 다음에 언제 또 토라져서 함부로 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기는 정작 잘 그리지 못하면서도 뭘 가르쳐야 할지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조언 덕분에 필립의 솜씨는 상당히 향상되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37쪽. ----------

 

 

두 작품에서 똑같은 특성을 가진 인물이 중복되어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것과 (실제로) 잘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작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인물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나를 본 듯해서다. 내가 예전에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만큼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아마 그때 나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웃으리라.

 

 

 

 

 

 

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크론쇼가 묻고 필립이 대답한다.

 

 

“ (…)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필립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라, 는 것인가?”

“그런 셈이죠.”

---------- <인간의 굴레에서 1>, 348~349쪽. ----------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크론쇼의 물음에 필립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는데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이럴 땐 이렇게 써야 할 것 같다.

 

 

...................................

필립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집에 가면서 그 물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대답을 하는 게 더 좋았겠다 싶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고 필립은 아쉬워했다.

...................................

 

 

이래야 리얼리티가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어떤 물음을 던졌을 때 완벽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그리고 물음이 잘못된 것 같다. (번역의 문제인가?)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가 아니라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로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답이 나오기 위해서는.

 

 

 

 

 

 

5.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 : 크론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네. 나는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하지만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우주의 모든 힘들이 저 영겁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건 필연이니까. 선한 행위였다 해도 난 공적을 주장할 수 없고, 나쁜 행위였다 해도 난 비난받을 수 없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1쪽. ----------

 

 

이 글과 비슷한 글을 어디서 본 듯한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냈다. 에리히 프롬의 저작에서 봤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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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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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글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정할 땐 자신의 의지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일조차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 고립되기 싫다는 생각, 최신의 기술을 자랑하며 유혹하는 광고 등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1941년에, <인간의 굴레에서>가 1915년에 발표된 것이니 서머싯 몸이 먼저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사랑을 사랑하다 : 필립은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막 잠에서 깬 어린 짐승처럼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물,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포플러, 새파란 하늘, 이 모든 것을 그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78쪽.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7. 돈은 제6감과 같다 : 돈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슈 프와네가 필립에게 말한다.

 

 

돈은 제6감이라는 것.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쪽. ----------

 

 

가난은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는 것.

 

 

예술가에게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하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415쪽. ----------

 

 

이 글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 같아서 긴 글을 그대로 옮겼다.

 

 

가난해서 품위를 잃게 되고, 가난해서 방해받게 되고, 가난해서 속 좁아지고, 가난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가난해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다면 불행한 일이다. 돈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이런 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8. 화가 나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다 : 누구나 화가 나면 상대를 자신보다 더 화나게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상대의 약점을 언급하는 치사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백부는 필립에게 말한다.

 

 

“네 돈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다. 너도 이제 독립된 인간이고.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네게 한없이 쓸 만한 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불행한 일이지만 네 신체가 불편하여 돈 벌기가 남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 말이다.”

필립이 이제 알게 된 것은, 누구든 자기에게 화가 나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필립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425쪽. ----------

 

 

이런 글은 경험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만약 경험이 없다면 피상적 관찰이 아닌 세심한 관찰을 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9. 자신의 약점을 자신이 이용할 때도 있다 : 필립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이용한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본능적인 느낌으로, 무슨 말을 하면 그녀의 마음이 움직일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하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가혹해. 정말이지 못 견디겠어. 하기야 당신은 절름발이의 심정을 모르겠지. 그래, 내가 싫을 거야. 나도 기대 안해.”

“필립, 그건 아녜요.”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에 갑자기 연민이 어려 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이제 필립은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잖아요, 필립. 어떨 때 당신이 좀 피곤하게 굴긴 하지만. 이제 마음 풀어요.”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갖다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맞춘다.

“어때, 이젠 기분좋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 좋아 죽겠어.”

---------- <인간의 굴레에서 1>, 494쪽. ----------

 

 

약점은 때론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극과 극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

 

 

 

 

 

 

10.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고 생각하라 : 인생의 좌우명으로 이건 어떨까?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

---------- <인간의 굴레에서 1>, 429쪽. ----------

 

 

이런 생각으로 산다면 신문에서 보도하는 사고나 사건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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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3,7,8,9,10 표제에 공감합니다. 특히 7,8 번에요. 그리고 10번 마지막 문장은 「모퉁이 저편에 사신(死神)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로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페크님 하면 서머싯 몸이 떠올라요. 자동이예요. ㅎㅎ

페크(pek0501) 2014-04-15 21:23   좋아요 0 | URL
ㅋㅋ 자동입니까? 그럼 영광이지요.

공감 가는 글이 많고 여러 번 읽고 싶은 글이 많아 밑줄을 많이 그었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

2014-04-14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4-04-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 좋네요. 완독 축하드려요. 인용하신 대목 대목 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에리히 프롬의 책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4-15 21:32   좋아요 0 | URL
예, 서머싯 몸의 글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제가 쓴 글 중에도 누군가가 이렇게 옮겨 소개하고 싶을 만큼 좋은 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욕심인가요?ㅋ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정신적인 두 기둥으로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두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거겠죠.
제가 언급한 프롬의 책은 의외로 인용문이 많아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