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그네스 그레이 ㅣ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2
앤 브론테 지음, 문희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0월
평점 :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생인 앤 브론테는 생소했는데, 기억나지 않는 계기로 이 책을 사둔지 한참 되었으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기 시작한 후 비로소 펴들게 되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도 앤 브론테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비중은 적은데,
집에 있는 많지 않은 19세기 여성작가 소설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의 작품이 극적인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데 비해
(제인에어는 차분한 분위기지만 감금된 전부인의 존재가 오싹하고 로체스터와의 사랑이나 마지막 화재 등이 강렬하며, 폭풍의 언덕은 폭풍우 치는 밤에 창을 열고 미친 듯이 캐서린을 부르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그린 시작 부분부터 마지막까지 눈을 떼기 힘든 폭풍같은 매력이 있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대단히 수수하고 평범하며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고 소소하고 솔직한 맛이 있다. 특별날 것이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주인공 아그네스에게 이입하기는 쉬울 듯.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이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아그네스와 웨스턴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고 '온당해' 보인다.
아그네스는 서로를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에게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가난한 그레이에게 반해 모든 걸 버리고 그와 결혼한다. 아버지는 때때로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만 어머니는 전혀 불행해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이미 작가가 '부'라는 세속적 가치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그네스는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가족들에게서 떠나 스스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 그녀는 상당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고 나름의 교육 원칙이 있기에 부푼 마음으로 일터에 간다.
그러나 그녀를 가정교사로 고용한 첫 집은 글러먹었다... 부모의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아래서 방종하게 자란 아직 어린 아이들(7살 남자아이, 6살 여자아이 등)은 거짓말을 하고, 가정교사를 골탕먹이기 일쑤, 공부에는 뜻이 없으며, 타인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라든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그네스는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바른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동동거리지만 소용이 없고, 아이들의 문제는 전부 가정교사 탓으로 취급된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 아그네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 두번째 집은 언뜻 첫번째보다는 나아 보인다. 일단 아이들 나이가 좀더 많다. 하지만 역시 부모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하고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이들은 가정교사를 무시한다. 첫째 딸 로잘리는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 났는데 그 용모를 가꾸고 거기 유혹당한 뭇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는 데만 관심이 있다. 둘째 딸 마틸다는 말을 타고 쏘다니는 걸 좋아하고 거친 언행을 하며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어쨌든 이 여자아이들과는 나름의 애정과 신뢰를 형성해가며 버티던 아그네스 앞에, 목사관에 새로 부임한 부목사, 웨스턴이 나타난다.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드나들던 아그네스는 웨스턴과 우연히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고, 그의 진지하고 올바른 성품에 큰 감명을 받는다. 실은 그는 군계일학인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그네스와 그녀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진실하게 하느님을 믿고(성경구절이 자주 인용됨) 올바른 일을 행하며, 타인에게 따뜻한 애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로잘리는 여러 남자들을 농락하며 즐기다가 웨스턴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아그네스는 크게 상심하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남주인공답게 웨스턴은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로잘리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아그네스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집에 돌아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가정교사 일을 그만둔다.
웨스턴과 어떤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학교 일에 전념하던 그레이스는 어느날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거기에 짠! 웨스턴이 나타난다. 이후 그는 자주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고 결국 청혼하기에 이른다.
대단히 교훈적인 내용이다.
부를 쫓는다든가, 겉치레에 현혹된다든가, 생명을 함부로 여긴다든가, 자기 신분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든가 하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행태에 대해 소설 전반에 걸쳐 비판하며, 반전 같은 건 없다.
그러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읽어가고 있는 영향인지 1847년도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만 상당히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병들어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어려워진 가정형편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여성. 부유한 귀족계급의 오만과 위선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버텨가는 여성. 남편이 앓다가 사망한 후에도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강인한 여성(아그네스의 어머니). 돈이나 외모, 지위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의 진실함을 알아보아 배우자를 선택하는 여성.
"여성도 생각할 수 있다. 고귀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얌전해보이는 여성의 눈빛에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
언니들 소설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지만(너무 '온당한' 탓이 아닐지) 당시에 실존했던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느껴지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브론테 자매들, 다들 일찍 죽어 안타깝다..
사람 마음은 인도산 고무 같아서 조금만 더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만 아무리 더해도 터지지는 않아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생겨도 상심하지만 ‘있는 문제에서 조금만 덜어져도‘ 살 만하지요. 우리 몸 바깥에는 그 자체로 필요한 힘이 생겨서 외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우리를 흔드는 모든 힘은 우리를 더 강인하게 만들어줘서 나중에 입을 타격에 맞서게 해주지요. - P167
사람이라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예쁜 얼굴이 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 아름답고 상냥한 여자는 두 가지 자질 모두에 대해 찬사를 듣지만 특히 아름다운 외모는 뭇 남성들의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외모와 성격이 모두 별로인 여자는 대단한 죄라도 지은 양 욕을 들어먹는데, 그 까닭은 평범한 외모가 보는 이에게 불쾌하게 비치기 때문이다. - P212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에겐 가족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가 없고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안고도 묵묵히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슬픔을 이겨내고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확실한 처방이 아닐까? 제대로 된 위안거리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누리지 못할 휴식을 탐하기보다 열심히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 P2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