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빌레뜨 1~2 세트 - 전2권 창비세계문학
샬롯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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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표지가 너무 예뻐서 별 세 개는 먹고 들어간다. ★★★

조애리 교수님의 자연스러운 번역에 별 한 개 추가 + ★

남은 별 한 개는 줄까 말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샬럿 브론테의 이름 앞에 공손히 별 한 개 추가 + ★

= ★★★★★


농담이다. 사실은 샬럿 브론테와 루시 스노우에게 별 네 개. 번역과 예쁨은 별 한 개다. 

아니다. 그냥 내가 이 책을 갖고 있고 싶기 때문에 별 다섯 개다. <제인에어>를 재독해봐야 어느 작품이 더 좋은지 따져볼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제인에어>가 <빌레뜨>보다 조금 음울하게 느껴진다. 제인에어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루시 스노우의 조용한 듯 하면서 빈정대고 아무렇지 않게 사실이 아닌 대답을 하기도 하며 타인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일단은 빌레뜨 승. 

<폭풍의 언덕> 재독을 시작했기에 <빌레뜨>의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빨리 리뷰를 남겨야한다. 



*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리뷰를 쓰기 위해 빌레뜨 1권 앞부분을 훑다가 발견한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폴리나, 우리 사랑스러운 꼬마 폴리나.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후 루시의 대모 브레턴 부인의 집에 맡겨진다. 그런데 이 어머니란 사람은 "아주 예쁘지만 경박하고 조신하지 못한 여자여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래서 별거하게 되었는데 "별거한 지 얼마 안되어 이 부인은 무도회에서 지나치게 춤을 추다가 감기에 걸렸고, 열이 나더니 얼마 안돼 사망했다."(1권 9,10쪽) 무도회에서 지나치게 춤을 추다가 사망하다니? 이거야말로 '빨간 구두'를 위시해 많은 작품이 응징하는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는 여성' 아닌가? 그렇게 어머니를 잃고 오로지 다정한 아버지 홈씨에게 의존하게 된 어린 폴리나. 어린 나이에도 폴리나는 아버지에게 차를 따라드리며 시중을 들고, 바늘에 찔려 피가 나면서도 손수건에 감침질을 하는 등 '여성적'인 행동을 해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 애쓴다. 그녀는 맡겨진 브레턴가에서도 이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서 장래 가문의 주인이 될 대모의 아들, '그레이엄 브레턴'에게 애정을 쏟는다.브레턴가를 떠나 성숙한 열여덟로 성장한 폴리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신붓감'이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남편 존에게 이양되면서도 그들 둘을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묶어둠으로써 평화롭고 보기좋은 가부장적 가족을 완성한다. 


반면, 루시는 어떤가? 그녀의 가족이 몇이나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작가는 어떤 자세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친척집에 머물던 루시를 대모 브레턴 부인이 데려가 돌보게 되었고, 반년 정도 머물다가 고향에 돌아갔으나 철저히 혼자가 되었으며, 우연히 마치몬트 여사의 집에 말동무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가 죽자 영국을 떠나 우연히 '빌레뜨'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베끄 부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업하게 된다. 어디 보자! 브레턴 부인은 일찍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마치몬트 여사는 오래전 연인을 잃은 후 홀로 은둔하며 살았다. 베끄 부인 역시 독신 여성으로 혼자 학교를 이끈다. 폴리나와 반대로, 루시의 운명의 별은 그녀를 남성의 보호(구속) 아래 두지 않는다. 결말에서 루시는 마침내 꿈을 이루어 새로운 학교의 교장이 되는데, 비록 거기에 남성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 남성은 부재한 상태다.   


그런데 폴리나를 이토록 순종적인 여성으로 만든 데는 루시 스노우도 한몫 했다. 그녀는 그레이엄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불안해하는 여섯살의 폴리나에게, "조바심치지 말고 그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그러지 않으면 널 귀찮아할 거고 그때는 모든 게 끝난단다."라고 조언하고, 폴리나는 "그럼 착한 아이가 될게요. 착해지도록 할게요, 루시 스노우." 라며 다짐하는 것이다..(1권 50쪽) 이렇게 '착한 아이'로 자라난 폴리나는, 재회한 그레이엄, 아니 이제는 존 박사가 쓴 러브레터를 받았을 때도 조바심치지 않고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정석대로 조심스럽게 구애를 받아들인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12장에서, 저자들은 "폴리이자 루시이고 지네브라이자 마담 베크인 루시"(719쪽)라며 폴리(나) 역시 루시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폴리가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의 종속에 순응하고 싶어하는,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요건에 들어맞는 완벽한 여성이 되어 그 안에 편안하게 안주하며 남들의 부러움을 얻고 싶은 루시의 욕망 한줄기를 형상화한 존재가 아닐까. 폴리나가 떠나기 전, 루시는 아이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 아이가 어떻게 이 세상을 헤치고 싸워나갈까? 책이나 내 이성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겪게 마련인 충격과 거절, 굴욕과 외로움을 이 아이가 어떻게 견딘다지?"라며 걱정한다.(1권 53쪽) 그러나 폴리나는 이 걱정을 보기좋게 배반하고, "축복받은 한쌍"으로서 "야곱이 사랑했던 아들의 삶처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을 받"은 삶을 산다.(2권 302쪽) 이 축복받은 한쌍의 연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도와주면서, 때로는 존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험난한 세상을 가로질러 난 어두운 길을 가"(2권 304쪽)듯 하는 삶을 꿋꿋이 살아가는 루시는 그들에게 부여된 운명을 인정한다.


루시의 또하나의 자아, 지네브라 팬쇼. 그녀는 마치 폴리나의 죽은 어머니처럼, 경박하고 눈에 띄기 좋아하는 화려한 소녀다. 그녀가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순종과 억압을 뚫고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루시의 또다른 욕망 한줄기를 형상화한 존재일 테다. 끊임없이 몰래 또는 대놓고 교사와 학생들을 감시하는 베끄 부인 또한 루시의 일부라면, 그녀는 루시의 욕망을 억압하고 제약하는 자기검열의 형상화겠다. "마담 베크는 억압의 상징이고, 루시가 행하는 자기 억제의 투사이자 전형"(<다락방의 미친 여자> 713쪽)인 것이다. 

이처럼 "자아라는 집 내부의 갈등 속에서 루시 안의 서로 대립하는 존재들은 루시의 내면이 파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파편화는 루시를 완전한 신경쇠약으로 내몰고 말 것"(다락방, 719쪽)이라면, 루시의 목표이자 작가의 목표는 파편화된 자아를 통합하는 데 있어야 한다. "(...)제인 에어처럼 루시는 사랑의 필요와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함으로써 통합되고 성숙하고 독립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모든 여성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제인처럼 루시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잉여 인구'라고 일컬었던 독신 여성들에게 맡겨진 쇠약해지는 역할을 돌파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할 것이다."(다락방, 709~710쪽)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루시는 폴리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담담히 인정함으로써 미련을 버린다. 지네브라 팬쇼는 그녀답게 연인과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여 루시로부터 떠나간다. 루시는 따로 학교를 세워 마담 베크로부터 독립한다. 루시를 괴롭혔던 수녀 유령의 정체 역시 밝혀져 더이상 두렵지 않다. 


이쯤에서 뽈 에마뉘엘 선생 얘기도 해야겠다. 나는 다락방님이 중간에 "대체 루시가 누구랑 연결되는거냐?"고 궁금해하실 때 "2권 중반 읽고 있는데도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는데, 그때 이미 존은 아닌 게 밝혀졌지만 모르겠다고 한 것은, 과연 이 뽈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인지 사랑받을 만한 인간인지 모르겠어서였다. 처음에는 존인가? 했다. 낯선 도시 빌레뜨에 처음 도착했을 때 도와준 사람, 의사로서 학교에 왕진을 오는 그 사람이 오래전 만났던 브레턴가의 아들 그레이엄이라니, 게다가 기절한 루시를 구해 집으로 데려가다니! 이건 운명이 아닌가... 아니었다. 뽈이 누이동생 운운 했을 때는 "지금부터 오빠동생 할까?"가 생각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샬럿은 이 소설에서 로맨스는 뺸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흠흠. 


그래도 잘생기고 바람직한 존 박사보다 뽈 선생 쪽을 선호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뽈은 처음부터 루시 안에서 그녀의 숨겨진(억압된) 면모를 발견하고 계속 그걸 끌어내는 인물이다. 루시의 그런 면을 비난하고 타박하기도 하지만 굳이 끌어내 보이게 하여 루시 스스로도 모르던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게 하는 사람이다.(뽈의 대사: "당신은 억눌러줘야 하는 사람이니까." -1권 243쪽) 루시가 자발적으로는 절대 맡지 않았을 연극에서의 바람둥이 역할도, 뽈이 강제로 맡겨 결국 훌륭하게 해냈다. 뽈은 미술관에서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관능적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던 루시를 발견하고 타박하면서 얌전한 그림을 보게 강요하기도 하고, 루시가 수수하지 않은 옷을 입으면 잔소리하는 짜증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루시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책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늘 그림자속에 숨어있는 듯한 그녀로 하여금 감정을 드러내고 화내고 반박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루시의 자아 통합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니까. 


그밖에 이 소설의 매력을 꼽아보자면, 대화문에서 오는 것 같다. 루시와 지네브라 사이의 대화와 존과 어머니의 대화를 특히 재미나게 읽었다. 번역가 실력인지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고, 특히 <다락방의 미친 여자> 12장을 읽으니 그냥 넘겼던 소설 속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지만, 전부 파헤쳐보기에는 능력부족, 택도 없으니 여기서 마쳐야겠다. 

불운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는 원래 상황을 이상화하기엔 너무 무미건조한 성격이라 불운을 과장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1권 55쪽 - P55

"왜? 그중 한 아가씨가 망원경으로 날 보며 비웃어서 그러냐? 예쁘지만 그렇게 멍청한 애가 지껄인 걸 가지고 늙은 귀부인이 화낼 것 같으니?" "존경스럽고 지혜로운 노부인이시군요! 아직은 아내를 열명 준다 해도 어머니와 바꾸지 않겠어요." "너무 내놓고 그러지마라, 존. 그러다 내가 기절하면 넌 날 업고 가야 하니까. 그렇게 짐을 지고 가다보면 생각이 바뀌어 ‘어머니, 어머니보다는 아내 열명이 훨씬 낫겠어요!‘라고 소리칠걸." -1권 343,344쪽 - P343

가끔씩은 삶이라는 계좌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셈을 해보는 것이 좋다. 항목들을 계산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불행 항목에 행복이라고 써넣는다면 그는 불쌍한 사기꾼이다. 고뇌를 고뇌라고 부르고, 절망을 절망이라고 부르라. 단호하게 힘주어 굵은 필치로 둘 다 써넣으라. 그러면 ‘운명‘에게 진 빚을 갚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2권 179쪽 - P179

나는 잠자리에 죄값을 가져가 밤새도록 얼마나 되는지 헤아렸다. - 2권 217쪽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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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2-21 2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추가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ㅎㅎ 저도 얼릉 읽어야 하는데 *^^* 전 스포 신경 안쓰는 편이라 오히려 괭님 글 읽고나니 더 읽고싶어집니다. ㅎㅎ편한 밤 보내세요 ~

독서괭 2022-12-22 11:31   좋아요 1 | URL
미니님 스포 신경 안 쓰는 대인배!!! 저도 고전은 스포 알고 읽어도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모르고 읽는 편이 궁금증 유발해서 더 빨리 읽게 되는 듯요 ㅋㅋ 감사합니다^^

미미 2022-12-21 2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괭님 <폭풍의 언덕>재독하시는군요?!! 저도 재독하고 싶어져 아주 괴롭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기존에 읽은 책도 죄다 재독하고 싶게 만드네요. <빌레뜨>는 예뻐서 쓰다듬었습니다ㅋㅋㅋㅋ

독서괭 2022-12-22 11:32   좋아요 2 | URL
미미님 <폭풍의 언덕>은 다시 펴도 참 시작부터 재미납니다. 역시 확 끌어당기는 매력은 에밀리가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빌레뜨 진짜 너무 예뻐서 어디 장식해두고 싶습니다 ㅋㅋ <제인에어>도 재독해야 하는데 바쁘다 바빠..

햇살과함께 2022-12-21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빌레뜨 읽고 싶지만 12월은 다미여 완독과 제인 에어 다시 읽기로 만족하고 내년에 읽기 도전해야겠어요~

독서괭 2022-12-22 11:33   좋아요 2 | URL
햇살님, 다미여 완독에 제인에어 재독만 해도 꽉 차네요^^ 전 다미여 완독은 어려울 것 같고 천천히 가기로 했습니다;; 내년에 빌레뜨로 꼭 읽어보시길요^^

scott 2022-12-23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리뷰 읽은 저 ! 🖐
별 하나 ☝추가 해서
★★★★★★

빌레트는 브론테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합니다 ^^

독서괭 2022-12-23 10:27   좋아요 1 | URL
오우 제 리뷰로 별 하나 추가라니 영광입니다 ㅋㅋㅋ
스콧님 브론테 중 <빌레뜨>를 제일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마음에 듭니다. 계속 간직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