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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삶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그것을 잊으려는 찰나에 나를 만나러 온다. 그러니 무엇 하러 인생을 걱정하겠는가? - 162쪽
새벽에 깬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안을 걸어다닌다,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게와 기척 어느 하나 고양이와 비슷하지 않다. 인간은 왜이리 소란스러운가. 인간과 함께 사는 고양이라면 그 점을 신기하고도 가련하게 생각할 법하다. 게다가 육신의 무게를 더 육중하게 만드는 마음이 있다. 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등반객이라도 되는 것마냥 어깨에 등에 꽉꽉 채운 걱정과 불안, 다짐과 후회, 책임감과 죄책감들. 그 배낭을 메고 사뿐사뿐 걸으려 해봐야 헛수고다. 인간은 왜,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를 뛰어넘는 고양이의 도약처럼 분침과 분침 사이를 퐁퐁퐁 뛰어 다니지 못하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뤼시는 현대의 인간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다. 가정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학교에 가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일도 가벼운 도약 한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다.
나는 뤼시가 극강의 ENFP가 아닐까 한다 ㅋㅋ 이 성향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데, 완전히 반대인 ISTJ로 보이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로 인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아버지 쪽에 더 가까운 인간으로서 이런 사람들을 가족으로 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상상이 된다. 그러나 또한 극과 극은 끌리기도 하는 법. 자유로운 영혼을 동경하는 마음이 내 안에도 있다. 자유로운 영혼, 자연과의 교감, 하면 떠오르는 사람(작품)- <그리스인 조르바>를 참 좋아했지만, 여성혐오의 시선이 짙어서 거리낌없이 좋아하기가 꺼림칙했다. 이제 뤼시로 조르바를 대체한다. 뤼시를 동경하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다. 늑대를 사랑하고, 단풍나무를 사랑하는 뤼시.
심각한 상황에서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어머니. 뤼시 또한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115쪽)면서, 가벼운 마음의 계보를 이어간다. 결혼하겠다는 뜻을 알려온 뤼시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는 놀랍다.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라며,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97쪽)라고 하는 어머니.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다.
그래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기쁘다. 나는 그게 좋아. 아주 좋은 신호야. 우리가 너를 잘 키웠고, 오로지 자기 마음에만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쳤다는 얘기니까. 내가 틀리면 좋겠지만,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여간 자식에게 좋은 길은 결코 부모를 위한 길이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 98쪽
아니 이런 대인배가... 내가 과연 내 자식들에게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내가 느낀 이 '대인배다'라는 감상을, 뤼시는 이렇게 적는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기뻐했을 것이다. (...)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 혼자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가 됐건, 제아무리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특권이며, 그 특권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배포다. - 151쪽
뤼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며 자란다. 서커스단에서 크면서 남들이 겪을 수 없는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스스로도 틈만 나면 가출을 행해서 낯선 사람들과 사귄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대단하다. 아기 때부터 모든 걸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가져가 맛보려 하고, 커가면서 궁금한 게 수없이 많이 생긴다. 사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어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일까지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이들만의 특권이 아닌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다. 위험하다거나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거나 하는 이유, 보다 솔직히는 '내가 귀찮아서' 못하게 한 수많은 일들. 어떤 아이들은 방치된 상태로 자유를 누리지만 아이들에게 너그럽지 못한 사회로부터 크게 혼이 난다. '노 키즈 존'까지 만드는 사회에서 뭘 바랄까.
뤼시는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는, 어찌 보면 게으른 마인드에 입각해 결혼까지 한다. 뤼시는 로망을 사랑하지 않고, 로망은 뤼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다.그걸 알기 때문에 후에 이별을 고할 때도 뤼시는 가볍게 그 과정을 통통 지나간다. 사랑에 빠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와 헤어질 때도.
그렇다.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떄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 생각 자체는 그리 어리석지 않지만, 그런 생각 뒤에 슬픔이 따라온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 115, 116쪽
이 소설은 뤼시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유년에 만난 늑대의 눈에서부터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뤼시의 기질은 스스로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존재로 의인화되는데,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하품이며, 뤼시에게 "강력한 수면 욕구를 주어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나를 떼어 놓는 것"(175쪽)이다. 잠시 기질과 어긋나는 길- 성공을 향해 사다리를 올라타는 일에 매진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수호천사의 부름에 따라 그녀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혼자 호텔에서 글을 쓴다. 그렇게 그녀는 성장하는데, 바로 어머니가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뤼시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고 나서야 성장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 177쪽
뤼시의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 순간을 즐겨라"와 비슷하려나.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154쪽)는 태도.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인간의 모든 한계들을 인식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삶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닐듯 지나갈 수 있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 속에서 뛰노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인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지켜야 할 '거리두기'를 생각한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 성장한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누구도 아닌 나의 신이여, 나에게 매일 일상의 노래를 주소서. 어릿광대이신 나의 신이여,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당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그걸로 이미 충분합니다. 아멘. - 146쪽
* 역시 믿고 읽는 자냥오별이었다 ㅋㅋㅋ
나는 어머니의 말 이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만일 내가 더는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 사라질 필요가 더는 없다는 뜻이다. 결혼은 여전히 여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120
생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져버린 이 생애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현실 속의 모든 배움처럼 비용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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