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도서출판b)이 새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초판이 나온 게 21세기 벽두였으니 햇수로는 17년 전이다. 17년만에 다시 읽으려니 감회가 없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을 지속적으로 읽어온 것도 20년은 되는 듯싶다.

서문에서 저자가 적고 있는 대로 <윤리21>은 칸트를, 칸트의 윤리학을 다시 읽으려는 시도이고 그런 점에서 <트랜스크리틱>의 짝이 되는 책이다.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강의를 기획했다가 보류하긴 했는데 칸트전집도 나오고 있는 김에 장기적으로 다시 기획해봐도 좋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해하는 칸트는 상당 부분 가라타니 고진이 읽은 칸트다.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자세한 소개글을 참고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읽혔다고도 하니까 가라타니 고진 입문서로 읽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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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사이에
유령의 책
이름만 알고 있는 책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책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히틀러의 유령이라고 적는다
히틀러는 죽어서도 죽지 않는군

그토록 유명한 독재자를
그토록 자주 만나는 콧수염을
그러나 저자로는 만나지 않겠다
불길한 투쟁

히틀러의 모델, 미국을 앞에 두고
다시 블랙어스, 암흑의 대지를 떠올리고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
참호 속으로 들어가려니

다시금 그의 유령이 나타난다
망루가 아닌 식탁에서
글자들 사이에서
금지된 투쟁을 선동한다

읽으면서 부정하고
읽으면서 잊어야 하는 책
나의 투쟁
나는 나의 투쟁을 어디에 두었나

나의 서가에는 크나우스고르만 있지
나의 투쟁
여기서 붙들리다니
얼른 꿈 밖으로 나가야겠다

여기가 역사의 바깥인가
식탁에서 일어나 코드를 뺀다
존재하지 않기에
유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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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2018-06-17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가 말한 마르크스 유령이 떠오르네요 칼 맑스가 공당산 선언에서 언급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문장도 생각나고 히틀러는 살아있을 때도 신화가 된 인물이지만 죽어서도 더 강하게 신화가 된 인물 그것도 매우 불편하고 어두운 신화로 잊으려고 해도 지우려고 해도 유럽현대사의 히틀러라는 인물은 하나의 형체 없는 유령 처럼 지금도 곳곳에서 출몰하는 느낌 한국에서도 그 유령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보일떄도 있고요 자유한국당과 그 추종세력들을 보면은 그 뿌리 깊은 어두운 유령의 그림자가 보이네요 좋은것이든 나쁜것이든 인류사에 뿌리깊게 내재한 그 파변화 되고 완전히 제거 할수 없는 잔여물이 남아서 떠돌아 다니는 느낌 그게 공산주의가 되었든 민족주의가 되었든 독재가 되었든 유토피아가 되었든~~~

로쟈 2018-06-17 20:52   좋아요 0 | URL
네, 존재론과 유령론은 분리불가능합니다.~

two0sun 2018-06-17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사이의
유령의 책들이야 워낙 많으니
그려려니~
문제는 읽은책마져도 유령의 책 코스프레를~
거기에 속는 멍충이가 되지 말아야는데.
유령 말씀하시니 헨리 제임스의 강의가 기대되네요.
유령에도 여러 유형과 급이 있지 않을까해서.

로쟈 2018-06-17 20:52   좋아요 0 | URL
모든 책은 일단 유령이죠.^^
 

근간 소식을 보고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원저는 미리 구입했다).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열린책들). ‘현재의 역사‘는 그 부제다. 저자는 인도 출신으로 현재는 영국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중인 공적 지식인이다. 아룬다티 로이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인물. 그간에 몇 권 소개되었기에 구면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공적 지식인 중 한 명인 판카지 미슈라가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의 숨은 역사를 파헤치는 책. 촘촘하게 얽힌 오늘날의 세계에서 편집증적 증오의 거대한 물결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 총잡이들과 ISIS에서 트럼프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에서 인종주의와 여성 혐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증오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 나가고 있다. 판카지 미슈라는 이러한 현실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한다.˝

나로선 러시아 무정부주의의 유산까지 짚고 있는 장부터 펼쳤다. 미리 구해놓은 원저를 어디에 두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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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한우리 광명지부에서는 다음 달 7월에 4회에 걸쳐서 독일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부터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까지다. 강의는 매주 목요일 오전(10시 10분-12시 10분)에 진행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수강문의는 02-897-1235/010-8926-5607).


로쟈와 함께 읽는 독일문학


1강 7월 05일_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강 7월 12일_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3강 7월 19일_ 헤세, <페터 카멘친트>



4강 7월 26일_ 릴케, <말테의 수기>



18.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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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부터 도스토예프스키(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문학동네)에 대한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라 석영중 교수의 <인간 만세!>(세창출판사)를 손에 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읽기‘가 부제이기에 작품을 읽으려는 독자들이 유용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관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적 탐구의 결정판으로 <카라마조프>를 읽으면서 그 현재적 의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첫 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관을 간단히 개관하고 있는데(이 주제 자체가 또 다른 한권의 책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논지에 공감한다. 다만 ‘선택하는 존재‘로 보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지속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들은 시간 선상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법이 없다. 다른 작가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인물들이 ‘성장‘하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선택‘을 한다˝고 주장하는데, 두 작가의 이러한 대비는 검토를 필요로 한다.

가령 톨스토이의 인물들의 ‘성장‘하는 모습은 주로 <전쟁과 평화>까지의 초기작들에 나타날 따름이다. 저자의 톨스토이론에서 강조된 대로 후기 톨스토이는 좋은 삶과 나쁜 삶이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때 좋은 삶의 선택이란 이전까지의 나쁜 삶(기만적인 삶)의 전면적인 부정이란 제스처를 취한다. 성장이냐 선택이냐라는 이분법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가르는 유효한 준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과연 성장하지 않고 선택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급변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비커밍‘ 범주에서 벗어난다. 또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은 변증법적인 발전의 궤적을 따르지도 않는다. 정과 반이 합의 차원에서 통합되는 변증법적 상황은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의 단언은 미국 연구자의 연구서(<도스토예프스키의 변증법과 죄의 문제>)에서 근거를 가져오고 있는데 나로선 동의하지 않는다. 원 저자가 변증법에 대해서 너무 나이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과 반의 합이라는 건 달리 지양이라고 부르는데 그 지양은 단순한 통합이나 극복을 뜻하는 게 아니라 부정과 보존의 운동으로 이해된다.

나는 이러한 의미의 지양적 구조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다고 본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양자택일적 선택의 문제라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윤리적 물음에 대한 해답은 너무도 단순명료해진다. 선과 악, 구원과 파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축소되기 때문이다. 과연 이 양자택일적 선택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을 읽어야 하는 것인지.

더구나 이러한 양자택일을 선택하는 존재라는 관점은 저자가 앞서 인간을 ˝이중적이고 완결되지 않고 불합리한 존재˝라고 규정한 것과 충돌한다. 인간이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반드시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존재라면 그 선택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본질적 이중성과 비종결성, 불합리성이 다 해소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더 이상 인간이기를 멈추게 되는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선택하는 인간‘은 후기 톨스토이의 인간학에 더 잘 부합한다(그래서 후기 톨스토이는 예술로서의 문학창작을 부정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문학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를 여러 권 펴낸 노고와는 별개로 저자의 견해가 표준적인 게 아니며 이견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노파심에서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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