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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을 핑계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외면해 왔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울 리는 없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빨리 해치우는 게 제일 속편한 일일 듯싶다. 연재를 조금 늦추는 바람에 다루어야 책들이 좀 많다. 성큼성큼 보폭을 좀 늘려잡아야겠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책이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이다. 소위 '고전해제'류에 해당하는 책인데, 기획과 편집에 꽤 손이 많이 간 것으로 입시 논술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생, 일반인들에게도 '서양 고전'에 대한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는 동양편으로 이미 2권을 출간한 바 있는데, 아마도 4권까지 나온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의 '성공'에 힙입어(내가 이 출판사의 책을 처음 접한 것도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시리즈를 통해서였지 않나 싶다) '고전'에까지 손길을 뻗은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교양'과 '고전'은 거의 '한 식구'라고도 할 수 있으니(고전에 대한 식견이 바로 교양 아닌가?) 이 '손길'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잠시 소개를 옮겨보면, "총 네 권에 걸친 방대한 분량으로 각 분야/각 권마다 '시간과 문명의 파노라마', '정의와 권력, 정치 변증법' ,'영혼과 성장' 등의 주제에 따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20세기 현대 지성들의 저서까지 고전들을 선정, 소개한다. '교과서적인 고전 편식'을 지양하고 우리 사회에 가장 깊고 넓게 영향을 끼치는 책, 21세기 한국의 문화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을 선정했다."

 

 

 

 

그렇게 선정된 목록을 죽 훑어보았는데, 인문/자연과 정치/사회 분야에서 특별히 억지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책은 보이지 않는다. 대개가 고전으로서의 평판을 얻고 있는 책들이란 얘기이다. '문학'쪽에는 다소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포함돼 있는데, 먼저 시집들. 릴케의 <릴케 시집>과 하이네의 <노래의 책>(이상 독일어권), 푸슈킨의 <서정시집>(러시아), 엘리어트의 <황무지>(영미권), 네루다의 <모두의 노래>(스페인어권) 등이 언어권별로 선정된 듯한데, 프랑스 시인들이 빠진 것이 좀 특이하다(요컨대, 보들레르가 빠져 있는 것). <모두의 노래>를 제외하면(음반에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모두가 번역본이 나와 있는 작품들이다(푸슈킨의 경우엔 단도직입적으로 운문소설 <예브네기 오네긴>을 꼽는 게 어땠을까 싶다).

 

 

 

 

소설의 경우에도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이나 발자크의 <잃어버린환상>, 만초니의 <약혼자들> 등이 포함된 것은 안심할 수 있는 번역본들이 출간된 사실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특이사항이라 할 만한 것은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등이 포함된 것인데, 파농의 책이야 번역서라도 있지만, 생소한 피어시그(1928- )의 책은 어떤 연줄로 포함된 것인지?(굳이 지적하자면, 플로베르와 조이스도 빠졌는데 말이다. 프루스트는 분량 때문에 뺐다손 치더라도.)

물론 그의 작품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 멜빌의 <모비딕>에 비견되기도 할 만큼 중요한 작품이라지만, 문제는 독자가 우리말로 읽을 수 없다면 말 그대로 '그림의 떡' 아닌가? '21세기 한국이 문화적 상황에서 다시 읽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읽을 수라도 있으면 좋은 작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 여기서 '고전'에 대한 한 가지 원칙에 합의할 수 있는데, 그건 일차적으로 '번역'돼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손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본이 나와 있다고만 해서 문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같은 경우는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 따르면 다수의 번역본들에도 불구하고 추천할 만한 번역이 한 종도 없는 걸로 돼 있는데(제목은 '막대한 유산'으로 하고), 이 해제를 읽은 (청소년을 포함한) 독자들은 어떻게 '고전'과 만나야 하는 걸까? 궁극적으로 '고전해제'라는 것은 고전 읽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읽기를 제안하고 유혹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할 때 말이다. 해서,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또다른 원칙은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어야 한다는 것.

 

 

 

 

거기에 마지막 원칙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가벼운 해제'와 함께 '부피 있는 독해'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필요에 따라 우리는 고전을 (다이제스트로) 줄여 읽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요약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고전의 '본때'를 맛보게 해줄 만한 책들도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원칙이 고전 읽기와 이해의 3박자라고 생각한다(우리네 인생살이는 네박자라지만, 교양은 세박자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한 고전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적어도 3종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해서,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서양 고전을 어떤 의미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그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만한 조건을 우리가 충족시키고 있는가를 따져물어야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교양지수를 묻는 것과 같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 최근에 나온 <파우스트> 번역과 주해서, 연구서 3권이다. 이 책들은 교양 3박자에 대한 요구조건을 상당 부분 충족시키고 있기에 그러하다.

먼저, 이인웅 교수의 새번역 <파우스트>(문학동네, 2006). "괴테가 1773년 집필을 시작해 1831년 완성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걸작 <파우스트>를 들라크루아의 석판화 연작, 막스 베크만의 펜 소묘 삽화와 함께 수록했다. 국내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번역 및 연구 성과를 집적한 완결판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 의의로 제시돼 있는데, 의당 기대해볼 만하지 않는가? 거기에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담은 <파우스트 주해>(한국외대출판부, 2006)과 공동 연구서 <파우스트 그는 누구인가?>(문학동네, 2006)은 <파우스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시켜줄 것이다. 작년에 나온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서울대출판부, 2005)까지 챙겨두게 되면, 가히 전문가 수준의 교양이라 할 만하다.  

 

 

 

 

해서,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에 한정하더라도 선정된 68종에 대한 이러한 검토작업이 필요하다. 번역되었는가, 신뢰할 만한 번역인가, 주해서가 나와 있는가, 새로운 독해/연구가 소개돼 있는가, 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살펴볼 형편은 아니지만, 3박자가 고루 갖춰진 경우도 있고 2박자 정도의 빠른 템포에 엇박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가령,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처럼 예전에 두어 종이 번역돼 나왔지만 모두 절판되어 현재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역설적인 건 2차 참고문헌들은 다수 나와 있다는 것), 다윈의 <종의 기원>처럼 여러 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전공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적지 않다(일반인들은 '대에충' 읽으면 된다는 뜻인가?). 때문에 우리사회는 분류하자면, '아직도 교양이 고픈 사회'이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의 취지는 이렇다: "단순한 고전 해제를 넘어서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동시대인들과 청소년들에게 걸맞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고전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 대표독자들이 제시하는 고전에 대한 시각과 문제의식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고전해제'를 읽고서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간다는 건 물론 오버이고 과장이다. '새로운 고전과 사유의 세계'로 나가기 전에 '있는 고전들'만이라도 꼼꼼히 자신의 힘으로 읽어내는 것이 우선적이며, 그게 '진짜 교양'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만 하더라도 수 종의 번역서 중 하나 정도는 읽어주고,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선언>(그린비, 2005)로 역사적 배경을 확인해둔 다음,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선언>(뿌리와이파리, 2006) 같은 책을 통해 한 장이라도 자세히 따라 읽어보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 강유원에 따르면 그게 '근대인'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서양 근대인들은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구축하자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왕의 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고 하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고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혁명을 통해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이들은 긴간의 힘에 의해 파악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른바 근대의 교양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부르주아로 불리는 근대의 시민인데 고전적 의미에서의 우파, 즉 오늘날의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다. 즉, 근대의 지식인이라 하면 일단 누구나 다 우파 수준의 교양을 갖춘 셈이다... 그러니까 일단 '근대인'이라 하면 우파적인 교양을 갖추는 게 기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 우파건 좌파건 근대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들 모두 교양인이다."(50-1쪽, 강조는 나의 것)

 

 

 

 

흥미로운 대목인데, 일단 '근대인=교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의 '교양인'이란 '우파 부르주아지(시민)'라는 것. '좌파'는 그 '우파 부르주아지'에서 나온다는 것(일단 기본 교양을 갖춘 우파가 평등의 문제를 고민하면 좌파라는 것이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교양 대가리' 없는 놈들이 좌파 행세하면 안된다). 예전에 나는 강유원이 '배고픈 우파'가 아닐까란 지적을 했었는데, 크게 잘못 짚은 것 같지는 않다. 좌파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교양있는 우파가 될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니까('이사야 벌린' 정도 된 이후에 '칼 마르크스'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니까. 마르크스 또한 일차적으론 '근대적 교양인'이었다).

조금 확대해석하면, 그는 고전적인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좌파 혁명)'보다 '부르주아 혁명(=우파 혁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그런 관점에 설 경우, (조급했던) 러시아 혁명이 정통에서 일탈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 교양이 아닌 '품성론'에 기초한 현실 사회주의가 '전근대적' 체제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없는 것들'이 순서도 모르고 나서면 곤란한 것이다.  

아무려나 우파이건 좌파이건 간에 '근대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근대인이 알아야 할 모든 것'으로서의 '교양'이란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는 그 문턱에서 요긴한 가이드북 노릇을 해줄 것이다(하긴 68종의 고전에 대한 3종 세트를 구입하여 읽을 만한 여가를 프롤레타리아가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터이니 교양은 우파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아닐 도리가 없다. 이건 혹 딜레마가 아닐까?).

 

 

 

 

교양 있는 분들을 위한 책으로 또한 꼽을 만한 것이 <브레히트 희곡선집1, 2>(서울대출판부, 2006)이다. 예전에 '한마당'에서 브레히트 선집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정격 번역이 두 권 분량으로 묶여서 출간된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역자는 브레히트와 독일 희곡의 전문가이며 유려한 문장을 자랑한다). 사실, 폴 존슨의 보고에 따르면, 브레히트야 말로 '배부른 좌파'의 표본적인 작가였다(고가의 노동자복을 맞춰 입고 다녔던 브레히트는 자기PR의 귀재이기도 했다). '배고픈 좌파'라는 게 편견일 수도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들은 고전으로서의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 한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인 재능(=문학적 재능) 못지 않게 후천적인 재능(=정치적 감각)도 갖추어야 함을 웅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동양문학편>(휴머니스트)에 '해제'가 포함돼 있는 시선(詩仙) 이백의 시선집 <이백 오칠언절구>(문학과지성사, 2006)를 꼽아두기로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백 시세계의 백미를 담아낸 책. 현전하는 이백의 절구시(絶句詩) 전체인 187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이백 시의 전문 연구자 황선재 씨의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소개했다.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짧은 형식인 '오.칠언절구시'만을 묶어 펴낸 것은 중국을 포함하더라도 이 책이 세계 최초이다." 이 어이 아니 주목할 수 있겠는가?

"오칠언절구(李白 五七言絶句)는 이백의 작품 1천여 편 가운데 가장 짧은 형식의 시로서, 작품 한 편이 오언절구는 20자, 칠언절구는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시 한편은 비록 짧지만, 그 가운데는 오묘한 진리와 풍부한 음악성이 스며들어 읽으면 읽을수록 운치 있는, 즉 말은 다했지만 뜻이 무궁하게 남는 경지(言有盡而意無窮) 속으로 몰고 간다. 이백 시를 내용에 따라 15장으로 분류하고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백 시로 추정되는 17편을 추가해 이백 오칠언절구 전편을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한시 원문을 읊고 적확한 우리말로 음미한 뒤, 이백의 생애와 역사 등 시가 씌어진 배경 해설을 함께 읽을 수 있다."

 
 
 
 
 
 

러시아 문학에서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당시(唐詩)에서 '이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알다시피 시성(詩聖) '두보'이다. 이 기회에 두 시인에 관한 책들과 두보 시선도 몇 권 눈여겨 봐두도록 한다(두시에 대해서는 고전적인 '언해'와 현대적인 '언해'가 제법 출간돼 있다). 자, 이런 것들이 '고전'들이다. 이걸 읽고 음미할 만한 여유만 각자 마련하면 되겠다...

06. 05. 24-28.

 

 

 

 

P.S. 그럴 만한 여유/형편이 안되는 이들이 왜 없겠는가? 그런 이들은 '세계의 고전'이니 '서양의 고전'이니 다 (개)무시하고, 백석의 시집 한 권과 최근에 나온 고형진 교수의 <백석 시 바로 읽기>(현대문학, 2006) 같은 책 한 권 정도 사놓고 틈틈히 읽어보면서 노트에다 시와 자기만의 감상을 적어보는 걸로 '교양'을 대신하면 되겠다. 백석의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1941)에 나오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시인 안도현이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도 갖다쓴 시구이지만, 그가 멋있는 제목에서 빼먹은 것은 '가난하고'란 단어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오늘도 '흰 바람벽'을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과 함께 오래 응시해볼 일이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절은 다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 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격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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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 2006-08-09 09:17   좋아요 0 | URL
언급하신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은 이미 우리말 번역본이 있습니다. 절판되었지만,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지요. <선을 찾는 늑대> 로버트 M. 퍼시그 저 ; 一指 옮김 고려원미디어, 1991.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 <라일라>(로버트 퍼시그 지음 ; 정영목 옮김 김영사, 1994)도 나왔지만 역시 절판되었군요.

로쟈 2006-08-09 11:43   좋아요 0 | URL
그랬었군요.^^ 동명의 책이 검색되지 않아서 나온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참에 새 번역본이 나왔으면 싶네요...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는 얼마전 출간된 손호철 교수의 신간이다(생각만큼 팔리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마침 프레시안(06. 05. 22)에 자세한 서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한데, 기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에 주로 할애돼 있다). 필자는 강이연 기자이고, 타이틀은 '노무현 정부, YS와 똑같은 비극 반복'으로 돼 있다. 그 '비극'의 내용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현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걸 보면, 뭔가 '반복'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해서 내년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비판적 개방과 공세적인 세계화 전략이 한건주의와 결합해 나라를 거덜 낸 비극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도 노무현 정부는 YS와 너무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집권 4기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모하고 무비판적인 공세적 세계화 전략의 전형으로서 YS의 OECD 가입을 빼닮았다"는 것(*한국일보의 칼럼에서 그가 종종 내비치던 의견이다).
  
-손 교수는 "정말 안타까운 것은 YS는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YS의 경험을 생생하게 목격한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스승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미련한 것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고 쏘아붙였다.
  
-한발 나아가 손 교수는 "'내가 세계경제를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한 결정에 국민들은 무조건 따라오면 된다'는 계몽군주식 정책 결정은 박정희 시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사람은 농민이건, 영화감독이건, 교사건 '변화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으로 모는 오만은 오히려 군사독재보다 더 심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손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해방 50년의 한국정치>(새길, 2005) 이후 10년 만에 새롭게 펴낸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은 단순히 최악의 사회적 양극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의 발전모형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조직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의 두 가지 과제로 내세운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 추진은 모순된 처방이라는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미 FTA일 뿐이어서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건설은 선거용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은 과연 한미 FTA를 체결하라고 표를 던져준 것일까?" 손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이런 모순과 한국 사회의 갈등양상을 두 가지 전선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하나는 냉전적 보수(수구) 세력과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및 진보세력 사이에 있는 '민주 전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대립이 보여주듯 민주개혁을 둘러싼 이 전선은 자유주의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연합이 냉전적 보수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FTA 문제에서 이를 지지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와 냉전적 보수세력이 연대해 이것에 반대하는 진보세력과 대립하는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두 개의 전선을 분리하면 노무현 정부가 외쳤던 '개혁'의 성격이 명확해진다고 했다.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은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정부들과 차이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민주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혼재된 개념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개혁적'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 교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97년 체제의 연속이라고 해석했다. 97년 체제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사회를 구분 짓는 개념이다. 극우반공 체제였던 48년 체제,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61년 체제, 그 61년 체제의 정치적 독재 부분을 6월 항쟁으로 해체한 87년 체제를 거쳐 세계화 전략과 IMF 사태로 국가주도형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한 것이 97년 체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서 핵심으로 남은 건 신자유주의 정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97년 체제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을 4개의 구간으로 시기구분해 이를 설명했다. 손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제1기(출범~2004년 총선 전까지)는 탄핵 등으로 민주개혁도, 노동운동 등의 반대로 신자유주의 개악도 제대로 못한 시기다. 제2기(총선~2005년 초까지)는 총선 승리에 기초해 민주개혁을 추진한 시기로 봤다. 그 후 제3기(2005년 초~2006년 전까지)는 전략 부재로 국보법 폐지에 실패한 뒤 사실상 민주개혁을 포기하고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개악을 주로 추진했으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 상징되는 시기라고 구분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노 대통령이 사회적 양극화를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로 거론하며 해소를 위한 조치를 할 가능성을 시사한 시점을 계기로 4기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개악이 기본 골격이라는 점에서 손 교수는 오히려 "3기의 연속일 뿐 4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 전선에서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한노연(한나라당+노무현정부 연합)을 깨고 '노노연(민주노동당+노무현 정부 연합)'을 복원해 민주전선을 유효화하라"는 주문 속에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동안 수행해야 할 바에 대한 손 교수의 고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감하게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이런 궤도전환을 모색할 수 있을까? 손 교수 역시 이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다(*그럼 뭐, 정권교체는 필연적인 대세이겠다. 그런데, 현 진보정당은 내년까지 집권을 위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 혹은 맨날 죽만 쑤는 것일까?).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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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24 11:05   좋아요 0 | URL
손호철의 처음 질문 왜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정부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무현 정부에게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진보세력은 설득력있는 답을 주지 못하고 그나마 설득당한게 한미FTA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상가집에서 애기하다 공통된 의견은 한나라당이 한 10년 정권잡을 생각가지고 가야겠다였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개혁만으로 해결이 될런지.

pax 2006-05-24 11:25   좋아요 0 | URL
윗분에게//음... 그러니까, 님의 말씀은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새로운 발전 모델은 우리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집약된다? 혹시 한미 FTA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의 연장으로 간주 될 수 있을까요?

로쟈 2006-05-24 11:32   좋아요 0 | URL
어제오늘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진보세력'은 소위 이 '반동적인' 50%에 대해서(대개는 '먹고사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죠) 어떤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건지 저도 궁금합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라고 생각하니까 거의 70% 되겠네요. '당신들의 진보'로 만족하는 건지, 70%에 대한 '인간개조' 계획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를 내세우지만(소위 '강철 같은' 품성을 갖춘 인간), 도덕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미담사례'에 속할 만큼 예외적이며, 사회적 진보는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들(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대충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간주하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pax 2006-05-24 11:31   좋아요 0 | URL
혹시 그 개혁으로는 해결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논리와 무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누군가 잘먹고 잘사는 목표 실현을 위해 누군가가 못먹고 못살아야만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도 그 "먹고사는 문제"에 포함이 되는 것이며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인가 뭔가 하는 것이 고려하는 문제인지? 현실의 이미 요란하게 선전되고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이 그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당위적 차원에서 포함해야하는 것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인지? 결국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은 '개혁'(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과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지? 에구... 복잡하다 복잡해...

pax 2006-05-24 11:38   좋아요 0 | URL
로쟈님에게//로쟈님이 품고 계신 의문은 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것에는 유보적이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먹고사니즘 비판"은 아니며 더더욱 '영웅적인' 도덕성을 타인에 대한 우월함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가령 저 역시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70%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천하다고 말할 이유는 저에게도 그리고 다수의 '진보'에게도..... "원칙적으로"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혹 진보진영 내부에 님이 그동안 줄기차게 비판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yoonta 2006-05-24 12:52   좋아요 0 | URL
진보진영에 있으면 모두 강철인간인가요? 진보를 하려면 모두 강철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전 로쟈님의 풍부한 식견과 지식에는 늘 탄복하는 편이지만 정치적 판단에는 문제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수 없네요. 지난번 김규항씨관련 님글을 보면서도 느낀겁니다. 저도 님이 말씀하시는 진보진영의 도덕적 우월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소위 진보가 그것만으로 추동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자본주의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고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어쩔수없는것 아니냐...라는 저의 말에...
그것은 "실천적 허무주의"일수도 있다..라는 코멘트...

이 말에 저는 매우 공감했습니다..그것은(그러한 저의 공감)은 저의 도덕적 우월감때문도 아니고..저의 품성이 강철같아서도 아닙니다.

로쟈 2006-05-24 16:43   좋아요 0 | URL
yoonta님/ '강철인간'으로서 품성 없이 진보를 자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로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물렁하고 게으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까요?). 님은 진보라는 걸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동일시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설 경우에 '진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나요, 혹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대한 '상상'에 있는 것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진보는('변화'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의 일상적 의식과 삶이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년의 자영업자이면서 한나라당 지지자인 '평균치'의 한국인에게서 현재 어떤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말씀하지만, 현체제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혹은 미-래의 어떤 체제에서든 그 구성원은 지금의 '우리들'입니다(이 중 70%는 보수라고 분류될 수 있는). 박근혜와 정동영과 노회찬도 다 공존하는.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 자체이며, 자업자득으로 언젠가 붕괴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얼굴을 마주볼 사람들은 지금 서로가 다 지겨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변화되는 것인가요? (소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혹은 열망을 갖고 있지 않은, 혹은 그럴 필요를 갖고 있지 않은) '현재의' 인간들은 소위 '인간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살 만한 자격이 있는 건가요?(그런데, 누가 해방되는 것인지요? 혹 죽음이란 인간 조건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사실, 이런 물음들이 얼마나 공소한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 몇몇의 의식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적당한 선량한 사람들의 삶과 행복입니다. 저는 많은 부분 우리 자신이기도 한 그들이 삶을 훨씬 더 복잡하고 진지하게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나이브한 관념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최근 정세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당 지지자가 50% 이상이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절반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진보야, 나는 아니야!'라는 건 면책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나야, 우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yoonta님과 관련한 건 아니지만) 최근의 정세에 대한 냉소와 조롱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특권처럼 남용하는 건, 더불어 모든 걸 '노무현 정권'과 '낙후된 사회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유치한 일입니다...

biosculp 2006-05-24 16:53   좋아요 0 | URL
물질적 이해관계라는게 이렇게 징그러운것일줄은 예전엔 정말 미쳐 몰랐었습니다.
지금 지방선거에서 민노당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을 보면 정말 물질적이해관계는 도외시하는것은 아닌지, 그 물질적 이해조건의 외부에서 사고하면서 물질적이해조건을 변경시킬려는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좀 허공에 떠있는 공약들.

저도 한미 FTA에 찬성하는 쪽은 아닌데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없으면 해야되지 않나 뭐 그런쪽입니다.

다시 화두랄까요. 왜 김영삼 정부의 비극을 노무현 정권이 반복할까요. 이 비극의 반복이 지금 민노당이 들어선다고 비극의 주인공이 안될까요.
이래야 된다라고 쓰면서 이래야 되려면 이렇게 하라도 할수있어야되지 않을까 뭐 그런생각입니다.
그리고 돈벌기가 생각을 지우면 그리어렵지는 않지만 생각을 가지고 돈벌려면 이거 쉽지 않은 일인데 진보진영에 보면 돈벌이는 전혀 생각하는것 같지 않고요.

pax 2006-05-25 02:33   좋아요 0 | URL
오히려, 딱히 진보가 아니어도 '강철인간'을 요구하는게 요즘 사회의 트렌드가 아닐련지... 극한의 자기계발과 헌신 인내 그리고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련지... 저로서는 로쟈님이 우려하고 있는 사태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이 것이 "젊은이의 나이브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특권처럼 이용하는 사람(예컨대, 진중권?)들이 모든 것을 사회의식과 노무현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님의 말씀대로 유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사 세상에 대해 삐딱한 태도로 냉소와 조롱을 던질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일상 지겹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직결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전체가 낯설고 기괴한 것으로 비추어질지라도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신뢰할 수는 있고 그들 속에서 충분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설사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이 딱히 그들이 강철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네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했지만 이건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너무 나이브한가요? 아니면.....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단한 원한감정을 가지고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강철인간들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설사 지금 진보가 30%이고(이마저도 안될지도 모르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50%라 할지라도 딱히 그들 모두에게 원한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오버일지도 모르죠. "당신네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던 노동자대중(혹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당신들의 눈에 원래는 당신들과 함께여야할 이들마저도 개혁대상인가?"라고 누군가 빈정거릴도 모르겠지만 그런 빈정거림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그들을 개혁대상, 계도의 대상으로 놓고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놓는 한가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미 진보로서의 자격 상실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아니, 진보운동이든 뭐든 한다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한가한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고, 그들 한나라당으로 돌아선 집단을(로쟈님이 보기에 그것이 일반 대중의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본성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확고부동한 실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한 것이고, 의식적 차원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다시금 진보진영과 연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쟈님은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설정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확실히 이는 매우 현실적인 날카로움을 갖춘 안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충분히 선량하지도 못한 동시에 충분히 이기적이지도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선량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히려 좌파나 진보진영의 세계관에 있을 수 있는 지나친 선량함이 수반하는 자기극기, 자기 채찍질과 같은 우스운(어쩌면 숭고한) 요소들은 이미 현 사회에서 충분히 넘쳐나지 않나요?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는 주체는 진정으로 이기적인가요? 어떻게 보면 로쟈님의 말씀이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되네요... 문제는 적당하게만 이기적인 것일지도...

에궁... 잡설이 길어졌네...

pax 2006-05-25 02:27   좋아요 0 | URL
아참, 이건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꼴인데,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올바른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맥락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참고로 로쟈님과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라는 매우 사려깊은 행동이 자칫하다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드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올바른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증오로 흐를 위험에 대한 로쟈님의 감수성만큼의 경각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습니다...

로쟈 2006-05-25 18:39   좋아요 0 | URL
정치 얘기만 나오면 말씀들이 길어지시는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든가 해야겠지만, 아무튼 제 관심은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더 맞춰져 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듯이 추상적인 이념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그런 것들이 저에겐 기만이거나 알리바이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경우, 제 관심은 '일관성'입니다. 자신의 모토와 이념에 맞게 일상적 삶을 모두 재구조화하는 것. '말'은, 정치인들의 말이 웅변적으로 보여주지만, 믿을 만한 게 아닙니다. 좌파건 우파건 상투적인 정치적 구호들에 제가 염증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눈팅 2006-05-26 02:11   좋아요 0 | URL
학자들의 현실 분석은 너무 조심스러워 핵심을 비켜가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문제를 아무리 제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수화 내지 반동적으로 변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병들면 논리적인 분석이나 학문은 무력할 뿐입니다. 대중이 노무현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좌향좌가 아니라 오히려 우향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바뀌려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개인들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개인들 각자가 유토피아적 동경을 꿈 꿀 수 있도록 예술이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은 별로 결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 설득보다는 도덕적 진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눈팅 2006-05-26 02:38   좋아요 0 | URL
강철같은 품성이나 도덕적 우월주의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란 개념이 불투명하듯이 도덕적이란 개념도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해관계가 사람들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도덕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도덕은 이해관계를 떠난 습관화된 가치 평가일겁니다. 도덕을 떠나면 이기적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단지, 좌파와 우파의 도덕 유형은 아주 판이한 것 같습니다. 우파는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고 좌파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비유는 지난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습니다만...또 다른 버전으로는, 우파는 공동체의 통합과 조화를 강조하고 좌파는 공동체 내의 적대를 드러낸다는 지젝의 언급이 있습니다.

biosculp 2006-05-26 17:12   좋아요 0 | URL
도덕적 진실을 구현하기위해 정치적 설득력이 있어야 된다. 뭐 이런 애기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덕적 진실은 있는데 정치적 설득력은 없고 건드릴수록 덧만 나게 하면 참 답답해지는것이죠.
집값버블 애기에 1주만에 제가 사는 동네쪽에 1억이 집값이 떨어진게 아니라 올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부동산들어가보면 이제 왠만큼 큰평수도 전세가 아니라 월세로 돌리고 있습니다.
바라는 사회는 적절한 집값이 되는 사회가 좋지만 건드릴수록 집값만 올려버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적진실은 애기조차 못꺼내고 저건 완전 무능아냐 이런애기밖에 안나옵니다. 좌파우파 뭐 가릴게 있나요. 제일 집값잘잡은 정권은 노태우정권같더군요. 그때는 토지 공개념이니 신도시 건설이니 해서 제일 안정적인 집값으로 되었었는데.
도덕적 진실은 기본이고 정치적 설득까지 갖추어야 세금받아먹을 자격이 있는것은 아닐런지요.

로쟈 2006-05-28 21:41   좋아요 0 | URL
모비딕님/ 사회주의적 인간형, 내지는 품성론은 제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핵심입니다. 주체사상은 그 품성론의 김일성 버전이라고 생각하구요. 중국의 '문화혁명'이 바로 그러한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인간 개조운동이었다고 봅니다(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러한 '개조'의 다른 편이 자유주의적 '개량'이 아닐까요? 저는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개조'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biosculp님/ 이전에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모스크바 통신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참조하시길. 개인적으론 도덕과 정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정치적 리더십을 사람들은 대개 도덕성에서 찾곤 하니까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
 

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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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ikr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한국일보사와 서울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위대한 세기: 피카소’전이 지난 20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이번에 전시되는 피카소 작품들은 세계 20여 곳의 미술관과 재단, 화랑,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빌려왔으며, 대부분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에는 피카소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출간한 바 있는 작가 김원일씨가 이 전시회를 둘러본 소감을 적어놓고 있어서 옮겨온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피카소를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시기별 대작과 걸작 등 140여 점으로 만나는 이번 전시는 사실상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피카소 회고전이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5만여 점의 작품과 92세로 붓을 거둔 생애 자체가 이제 20세기의 전설이 된 피카소의 대표작 140여 점을 모아 전시한 서울시립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그림을 동경해 해외에 나갈 때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을 둘러보고, 그의 화집을 사모아 오다 몇 해 전 그의 전기를 썼던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가 위대한 점은 그를 현대미술의 한 유형에 가둘 수 없는 자유분방했던 창작혼에 있다. 1900년 촌티를 못 벗은 스페인의 지방 화가로 파리에 입성한 후 청색시대, 분홍빛시대, 짧은 원시미술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두루 섭렵하고 고전의 자기식 해석법인 ‘변형’의 또 다른 시도와 도자기 작업 끝에, 누구도 도달한 적 없던 최상의 경지를 정복한 피카소는 그야말로 시각예술의 모든 장르를 깨부순 활화산이었다.



-19세에 예술의 메카 파리로 나와 곤궁했던 초기, 가난한 이웃들의 애환을 슬픈 빛 청색으로 표현했던 ‘모성’‘곡예사, 어린이와 개’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단연 시선을 끄는 대작 ‘솔레르씨의 가족’은 가난한 양복점 주인의 가족을 정감 있게 표현한 청색시대의 걸작이다. 현대미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후 브라크와 함께 경쟁적으로 분석적 입체주의를 실험했던 시기의 ‘비둘기’도 전시됐다. 사물을 각과 선으로 자르는 수법의 이 그림은 현대 추상미술의 시발점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절대적이다.



-그의 세 번째 연인이었던 러시아 무용수 올가를 로마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고전주의로 복귀한 시기의 ‘우물가의 세 여인’을 통해 피카소 미술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빨간 카페트 위의 기타’는 평생 서로 질투하며 사랑했던 경쟁자 마티스의 색의 대비를 재해석케 하는 40대 피카소의 대표적인 주제다. 피카소의 대표적 걸작으로 흔히들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등을 연상하지만 ‘무용’을 제외해선 안 된다.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통, 엘뤼아르 등과 사귀기 시작했던 1925년에 그린 ‘무용’은 야만적이고도 난폭한 기법으로 파리 화단을 경악케 했던 작품이다. 나는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그려진 그 대작 앞에 오래 서있었다. 혼란스러운 꿈의 세계를 생생한 현실과 결합시켜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분해한 이 광란의 춤 그림 앞에서 ‘평면회화가 이제 갈 데까지 가버렸다’며 놀랐을 당시 파리 화단 평자들의 탄성이 들리는 듯 했다.



-당대 최고의 부르주아였으면서도 평생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을 거쳐 군부 프랑코가 무력으로 조국을 장악하자 격분하여 탁구대보다 큰 대작 ‘게르니카’(1937)를 그렸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 수 없는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 전시된 ‘미노타우로스’와 ‘우는 여인’도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광폭성과 전쟁에 수난 당하는 여인의 비극적 모습이 스페인 내란의 참상을 상징하는 한편 전쟁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의 현실참여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게르니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본 다섯번째 연인 도르 마르를 모델로 한 초상화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는데, ‘게르니카’가 색을 배제했듯이 초상화도 어두운 톤이 주조를 이룬다. 스페인 내란과 2차 세계대전이 피카소로 하여금 밝은 색조를 거부케 했던 것이다.



 

 

 

-피카소가 40대에 만난 네 번째 연인으로 청초한 마리 테레즈와 60대에 들어 만난 여섯 번째 연인 프랑수와즈 질로, 일곱 번째로 마지막 연인이 된 자클린느 로크의 초상화도 보인다. 마리 테레즈는 관능적이고 부드럽게, 프랑수아즈 질로는 이지적으로, 로크는 현모양처로서 모성성에 입각하여 각각 달리 해석했다. 평생 일곱 여자와 산 그가 한 여성을 만날 때마다 그의 그림도 변모를 거듭했음을 보는 것도 피카소 그림감상의 포인트다. “소설가가 자서전을 쓰듯 나는 그림으로 자서전을 쓴다”고 말했듯,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올곧게 담겨 있다.



-피카소는 만년에 자신의 그림에 영감을 준 들라클루아, 벨라스케스, 마네의 그림을 재해석한 ‘변형’을 시도했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출품돼 있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십 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실험을 되풀이했는데, 밑그림 자체가 곧 완성품으로 평가된다. 90이 넘어서까지 담배를 즐긴 그는 “이제야말로 늙었다. 그러나 담배 맛은 20대 시절 그대로다”라고 말했듯.‘담배 피우는 남자’를 많이 그렸다. 관음증에 시달린 말년의 애교 넘치는 펜화 수채화와 함께 담배 문 남자상도 여러 점이 전시된 게 볼만 했다.


-그 동안 서너 차례 피카소 그림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세계 23곳의 기관 및 개인 소장처가 협조하에 그의 전 생애의 그림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미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자신의 교양 수준 점검을 위해 일차 관람해볼 만한 기획력이 돋보이는 전시다.

06. 05. 23.

 

 

 

 

P.S.  미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피카소 전 초대권을 얻은지라 한번쯤 시간을 내보려고 한다. 영어판 대형화집도 우연히 염가로 구한지라 나름대로의 '준비'도 된 듯하다. 더불어, 미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아트북스, 2003)와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디자인하우스, 1996)을 꼽아본다. 전자는 도서관에서 대출했고, 후자는 소장도서지만 아마도 박스에 있는 듯하여 이 또한 대출해야 할지 모르겠다. 8월에는 몇 마디 더 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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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5-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일님이 쓴 책 피카소에 대한 전기도 꽤 좋은 책입니다.

로쟈 2006-05-2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작가를 닮았다면 진중한 맛이 있겠습니다.

바람돌이 2006-05-2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전시도 보고 싶어요. ㅠ.ㅠ

로쟈 2006-05-23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장료가 좀 되는 듯하더군요...

해적오리 2006-05-24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께요. ^^
 

 

 

 

 

오늘자 한국일보(06. 05. 23)의 '이재현의 가상 인터뷰' 꼭지는 최근에 <모크샤>(싸이북스, 2006)가 출간됨으로써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 편을 다루고 있다. 매주 화요일 연재되는 이 '가상 인터뷰'들 가운데 내가 전문을 다 읽은 건 이번 헉슬리 편이 처음이다. 그건 그만큼 이 신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코너에서 번듯하게 소개하려고 했지만, 지난 주말 한겨레의 리뷰를 비롯해서 언론에서 비교적 크게 다루고 있기에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해서 몇 마디 하기가 어렵게 돼 버렸다. 해서, 일단은 그 '대안'으로 이 가상 인터뷰를 옮겨오고 몇 마디 군소리를 덧붙인다.

-영국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 그의 대표작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고전 소설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ㆍ1932)이다. 원래 이 소설은 그의 친구인 생물학자 홀데인(J. B. S. Haldane)이 에세이 <다이달로스 혹은 과학과 미래>(Daedalus, or, Science and the Futureㆍ1923)에서 미래 사회의 과학기술의 진보를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으로 묘사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 대응으로 쓰여졌다.

-헉슬리보다 먼저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도 에세이 <이카로스 혹은 과학의 미래>(Icarus, or The Future of Scienceㆍ1924)에서 홀데인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들로 밀랍으로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날려고 시도한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가상적 미래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세계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953년 헉슬리는 정신과 의사 입회 하에 환각제 메스칼린을 복용한 이래 10년에 걸쳐 메스칼린 네 번, LSD 네 번, 사일러사이빈 두 번 등 총 10번의 환각제 복용에 의한 환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메스칼린은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이 애용했던 페요테 선인장에서, LSD는 맥각균으로부터, 사일러사이빈은 멕시코 무당들이 신성시했던 버섯으로부터 합성 추출해낸 환각 물질이다. 헉슬리는 자신의 환각 체험에 기대서 사이키델릭 문화의 고전, 또는 히피의 경전이라고 이야기되는 에세이 <지각의 문>(1954), <천국과 지옥>(1956) 등을 집필했다(*<지각의 문>에서 그룹 '도어즈'이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헉슬리는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와 더불어 20세기 사이키델릭 문화의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최근 한국에서 선생님의 저서가 번역되었습니다. <모크샤>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약물 복용에 의한 환각 체험을 다룬 각종 에세이, 칼럼, 강연, 인터뷰, 서신, 르포 등을 엮은 책이지요. ‘환각의 사회문화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헉슬리: 모크샤(Moksha)란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해방 또는 해탈을 뜻한다네. 내가 말년에 쓴 다른 소설 <섬>(1962)에서 가상의 섬 주민들이 복용하는 환각제의 이름이기도 하지.



현: <멋진 신세계>의 등장 인물들은 ‘소마’(Soma)라는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데, 소마와 모크샤는 어떻게 다른가요?

헉슬리: 소마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통치 수단이고, 모크샤는 정신이 고양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 중독성이 있는 소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도피를 하게 만들지만 모크샤는 그렇지 않네.

현: 선생님의 관점이 바뀐 것이로군요. 그 사이에 선생님의 환각 체험들이 있었던 것이구요.

헉슬리: <지각의 문>에서 썼던 것처럼 우리 지각의 문은 평소에 흐려져 있네. 내 주장의 요점은 환각 체험에 의해서만 그 흐려진 지각의 문이 열린다는 거지.

 

 

 



현: <지각의 문>이라는 구절은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인용한 것이고, 록 그룹 도어즈의 이름은 바로 선생님의 글 <지각의 문>에서 따온 것이지요?

헉슬리: 판타지 소설 <나르니아 연대기>의 저자로 알려진 C. S. 루이스의 <위대한 이혼>도 바로 블레이크의 그 작품과 연관이 있네만, 블레이크의 원작에서의 해당 대목은 이러 하다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인다면/ 모든 것은 인간에게 있는 그대로 무한하게 나타나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그 스스로를 이미 닫아버렸기에/ 그의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현: 블레이크는 <신곡>의 단테나 <실락원>의 밀튼과는 달리, 지옥을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장소로 보았던 거로군요.

헉슬리: 그렇지. 블레이크의 관점에서는 천국이야말로 지각이 통제되어 있는 권위주의적인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지. 블레이크의 목적은 관습적인 윤리와 제도적 종교의 억압적 성격을 사람들에게 밝히려고 했던 거야. 그 당시로서는 매우 전복적이고 선구적인 주장이었지.

현: 그럼, 선생님은 환각제의 복용을 옹호하시는 겁니까?

헉슬리: 나는 환각제 복용이 부정적인 효과를 줄 수도 있고 중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고해 왔네. 다만 우리의 제한된 지각의 틀을 넘어서는 초월의 계기를 환각제 복용이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지.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환각제를 복용하면 좋다는 얘기야. 환각제를 달리 정신 활성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현: 그러니까, 선생님의 주장은 일부 환각제가 술이나 담배, 혹은 의사가 처방해주는 각종 수면제나 진정제보다도 훨씬 더 그 사회적, 문화적 효용이 뛰어나다는 것인가요?

 

 

 


헉슬리: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도 덜하고 부정적 효과도 없다네(*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옹호는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가끔씩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마초 파동'은 도덕적 알리바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 인류는 알콜 중독으로 인해서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써버리고 있어. 이러저러한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금지한다고 해서 환각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환각제를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게 내 주장이야. 내가 해 본 바로는 메스칼린, LSD, 그리고 사일러사이빈은 대마초보다도 부작용이나 중독성이 덜한 반면 그 효과는 훨씬 더 뛰어난 환각제일세.



현: 저는 해보지 않아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헉슬리: 환각 체험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초월은 인간 정신 속의 또 다른 가능 세계로 가는 것이네. 이 세계는 평소에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인데, 환각제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일세.

현: 그 초월적 환각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체험에 의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 건지요?

헉슬리: 크게 보면 한편으로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종교나 예술에서의 초월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 반면에 환각제는….

현: 그렇지만 환각제의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요?

헉슬리: 아까 얘기한 대로 그 부작용이나 중독성은 담배나 술보다 덜 하다니까 그러는군, 자네는. 문제는 그것들에 빠져서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길을 찾는 거야.

현: 하지만 환각제 복용은 한국에서 아예 토론의 여지가 없는 이슈예요. 무조건 나쁘다는 거지요.

헉슬리: 그것은 사회문화적 관습에 해당하는 것이네. 네덜란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과학적, 심리학적, 정치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한국에서는 애당초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일 뿐이네. 내 관점에서는 의사가 처방해주는 신경안정제야말로 아편과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라네. 어쨌든 간에 모든 마취제, 흥분제, 진정제, 환각제들은 원시인들에 의해 발견되었고 태고적부터 쓰인 것이지. 그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아편은 인민의 종교”라고 했던 것이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저작이 오오키 고오스케의 <마약-뇌-문명>(정신세계사, 1991)이다. 요점은 우리 뇌 안에 마약 수용체가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마약복용도 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마약에는 체내마약과 체외마약이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마약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한가지는 체내마약으로서의 도파민이 문명의 산파라는 것.  

현: 그 말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패러디한 것인데요. 선생님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헉슬리: 아닐세. 내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로운이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네. 버나드 쇼와 마르크스, 레닌에 대한 내 평가를 담고 있는 인물들일세.

현: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어서 사회주의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지요. 그런데 환각제의 복용은 사상적인 범죄보다 더 죄질이 나쁜 것으로 처리가 되어왔습니다.

헉슬리: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네. 내 관점에서는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 한다든가 배기량이 더 큰 차를 사려고 한다든가 아이들을 일류대학 보내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중독 현상이라네.

현: (허걱!) 선생님 말씀은 마치 그런 일들이 범죄일 수도 있다는 걸 함축하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헉슬리: 그렇게 타협적, 패배주의적으로 얘기해버린다면 자네는 ‘짝퉁’ 지식인에 불과한 거라네. 내 주장은 이 모든 것에 관해서 편견 없이 차근차근 제대로 따져보자는 것일세.

현: 글쎄요? 요즘 한국 정치판에서는 짝퉁이 명품보다 더 인기가 있어요.

헉슬리: 그럴수록 환각 체험이 더 필요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네. 내 책에서 말했듯이 “환각 체험은 아름다움과 참됨, 강렬한 미와 강렬한 진실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라네.

현: (헉) 더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로군요, 선생님 주장은. 아무튼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06. 05. 23.

 

 

 

 

P.S. 참고로, 한국대중문화의 키워더 가운데 하나인 '대마초 사건'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대중예술평론가인 이영미이며, '한겨레21'(546호, 2005. 02. 02)에 실렸던 내용이다. 제목은 '노래 군기, 확실히 잡다'.

-1975년 대마초 사건은 청년문화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기막힌 사건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포크나 록을 하던 가수 윤형주·김세환·신중현·김추자·이장희 등과 영화감독 이장호에 이르기까지 청년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중예술인들을, 대마초를 피웠다고 구속하고 공식 활동을 완전히 금지해버렸다.

-대마초 바람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이즘에서 우리나라 청년문화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것과 일치했으나 미국의 반전과 평화, 반청교도주의를 표방했던 ‘60년대 정신’과는 달리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의 새로운 대중문화·생활문화 세대교체 바람이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말하자면 미국 청년문화에서 대마초나 마약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월남전 징집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었던 것에 견줘,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회의식을 동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젊은이들이 대마초에 대해 마약으로서의 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삼베의 재료인 대마는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담배 피우듯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호품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의 청년문화가 그다지 높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을 동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전 사회를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어했던 유신정권으로서는 그 정도의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허용할 수 없었다. 파시즘은 취향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왔으며, 노래나 영화 같은 예술은 물론이고 패션이나 언어습관까지 통제하고 싶어했다. 이미 대마초 사건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경범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외래어로 된 가수 이름은 양파들(어니언스), 토끼소녀(바니걸즈), 김세나(김세레나) 등으로 바꿔야 했고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토요일밤에>)의 가사가 “긴 머리 분홍치마”로 바뀌는 해프닝이 속출했다.

-어떻게든 이 체제에서 살아남아 활동을 계속해보려던 이들의 노력은 확연했다. 조영남은 방송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태양은 묘지 위에”를 “대지 위에”로 바꿔 불렀고, 쉐그린은 아예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머리 긴 채로 명동 나갔죠.… 바로 그때 이것 참 큰일났군요. 아저씨가 오라고 해요./ 어머님의 말씀 안 듣고 짧은 치마 입고 명동 나갔죠.”(<어머님 말씀>) 같은 ‘건전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일찌감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건전가요를 지었던 신중현은 1975년에 나온 음반에서 <뭉치자> 같은 노골적인 건전가요를 지어 부르는 ‘성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그는 대마초 사건의 수괴로 지목돼 구속됐다.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대중예술사의 전·후반기를 나누는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이전까지는 일부 대학생·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었던 포크와 록이 1974년 드디어 어니언스의 <편지>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으로 남진과 나훈아를 제치고 최고 인기가요가 되고, 영화계에선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과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이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던 상황은, 대마초 사건으로 급전직하의 국면을 맞이했다. 상당수의 대중예술인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고, 포크와 록은 트로트 등 기성의 취향과 결합해 기성 가요계로 편입됐다. 이제 가수들은, 청바지가 아니라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대마초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군기를 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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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24 10:26   좋아요 0 | URL
**님/ 퍼가셔도 됩니다. 한데, 이미지 하나가 먹통이 됐네요...

비로그인 2008-09-03 08:57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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