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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가을에 쓴 두 개의 짧은 글을 편집해서 옮겨온다.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요즘의 관심사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읽을 만했다. 새롭게 몇 마디 보탰지만, 보탠 말들에 따로 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2002년 가을의 글이면서 2005년 가을의 글이기도 하다.  

 

 

 

 

 

 

 

  

 

 

<비평>(2002년 가을호)에 주제서평으로 '피에르 부르디외'가 실렸다.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과 함께 산 책인데, 부르디외는 내게 언제나 안티-철학을 연상케 하는 사회학자라는 점에서 들뢰즈와 부르디외란 조합은 아이러니컬하다.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다룬 홍성호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부르디외의 고백(나는 그 책의 서반부밖에 읽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지식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고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전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의 사유에서 철학적 주지주의 같은 그런 위상에 연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추방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지식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철학(적 주지주의) 비판이 비록 바깥으로부터의 비판이긴 해도 철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비판(철학을 흡수/해소시키려는 전략) 못지 않게 문제적이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대담에서 부르디외는 마르크스를 철학화(philosophizing)하는, 그래서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으로 만드는 알튀세르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는데(아마도 고종석과의 대담이었던 듯하다. 기억에 대담은 <책읽기/ 책일기>(문학동네, 1997)에 실려 있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의 관념론적 인류학에 대한 마빈 해리스의 유물론적 비판과 짝지을 만하다(해리스는 <문화유물론>(민음사, 1996)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한길사, 2005)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무려나 부르디외의 고백은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단적으로 말해서 철학은 자신이 말해지는 장소(where)에 대해서 무지하며 둔감하다. 그래서 철학은 어디에서나(everwhere)나 적용가능할 걸로(이게 소위 보편성이다) 착각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나는 아무데서나(nowhere)의 다른 이름이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와 같은 착각과 패권의 남용이 철학에도 작동하고 있는데, 이름붙이자면 '팍스 필로소피카'쯤이 될까?


근대 철학적 인식론의 경우에도 '그것은 무엇인가?(What is it?)'란 물음의 무엇(what)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소위 형이상학의 '고질'이다). 그 인식의 주체는 보편적 주체이지 (고진이 말하는) 단독자가 아닌다. 즉 그 주체는 아무도 아닌(noman) 모든 사람(everyman)이다. 거기엔 그것이 누구에게 진리인지, 어디에서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에게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철학의 결함에 대한 추궁으로 읽힌다. 그의 장이론이 얘기하는 것이 바로 모든 상징적 재화가 거래되는 장소(where) 아닌가? 철학적 담론이 그 자신이 통용되고 정당화되는 장소의 상대성에 주목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상대화되고 사소화된다. 이에 대한 가장 신랄한 문학적 사례는 안톤 체홉의 단편들과 희곡들에서 찾을 수 있다(동완 선생의 체홉 번역을 나는 좋아한다. 재작년에 신원문화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철학이 그 장소의 문제에 그나마 관심을 기울여 얻어낸 것은 자신의 기원으로서의 '그리스'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철학자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리쾨르) 데리다 밝혀놓고 있는 것은 이 그리스적 기원으로부터 철학이 탈출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철학의 언어들이 갖고 있는 그리스적 기원 때문이다. 그 탈출가능성을 말하는 언어들이 이미 그리스적 기원의 언어들이라는 것. 따라서 탈출은 말이 아닌 제스처로써만 가능하다. 마임으로만. 따라서 그리스와는 다른 기원의 철학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철학은 언어로써 언어의 바깥을 지향하는 '마임의 철학'이다. '아무데서나(nowhere)' 대신에 들뢰즈가 내세우는 것은 '지금-여기(now-here)'이고 '에레혼(erehwon)'이다.


서동욱의 '경험론과 철학'이란 글은 철학의 다른 가능성으로서 유대적 기원(레비나스)과 노마드적 기원(들뢰즈)을 암시한다. 나는 그것이 또다른 철학으로 불려야 할지 아니면 철학을 넘어선(비철학) 다른 무엇가로 호명되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들뢰즈의 철학은 'non-philosophy'로 지칭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기원에 대한, 장소에 대한 물음 앞에까지 철학이 도달해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물음은 철학이 충분히 사회학화될 때 더 잘 규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톤 체홉의 사할린 섬 리포트도 그런 의미를 갖는 건 아닐까?

 

 

 

 

 

 

 

 

 

 

참고로, 철학에서 누구(who)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니체이다. 그에게 동일한 사태 혹은 진리는 주체의 존재양식에 따라 다르게 현상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1962)의 서두에서부터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니체가 원했던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의 철학이 비판이어야 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칸트가 가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참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니체가 저작에 착수하게 된 동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가치철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 다시 말하자면 철학을 '망치질'로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한 니체 자신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유일무이한 심리학자' 도스토예프스키이다. 문학사가인 치제프스키를 따르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은 칸트 비판에 있어서도 니체와 같은 전선에 선다. 아니 보다 더 철저하다. 치제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 분신의 주제'란 논문(르네 웰렉 편,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열린책들, 184-210쪽)에서 이렇게 말한다(이 글은 가장 훌륭한 도스토예프스키론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장하는 사랑은 보편적/추상적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가르친 성경이야기> 류에 상응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르침이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진정한 주제이다. "여러분 사랑해요!"라는 말보다 쉬운 고백은 없다. 그것은 제스처이다. "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고 일기에 적어놓는 일도 기분나면 매일같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자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어려운 사랑은 바로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그리스도는 말했다. 그는 그 외에 다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말하는 순간, 철학은 그 구체적인 사랑을 철학화한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이건 '크라잉게임'이다). 그러한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철학은 좀 변신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온갖-되기를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는 없을까? 들뢰즈의 다양체(multiplicity)를 '나'도 '인간'도 아닌 '이웃'으로 읽을 수는 없을까?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어떤 내재성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거기서 니체를 통과해온 도스토예프키는 들뢰즈와 대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지에 입을 맞추면서 자신을 놓아버린 익명적, 비인칭적 주체로서...

 

05. 11. 10. 

 

P.S. 이 글의 원 재료는 '철학이냐 사회학이냐"와 "칸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해서 "철학이냐 문학이냐"란 제목으로 통합하려고 했으나 '이웃'을 사랑해야겠기에 OR 대신에 AND를 넣어, "철학 또는 문학" 혹은 그냥 "들뢰즈와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해둔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세 가지 양상을 가진다. <누군가가(Someone) 어디에서(Somewhere) 어떻게든지(Somehow)>가 어떤 윤리적 행위에 필연적으로 연루된다. 처음의 두 요소는 완전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나 세 번째 것은 추상적으로, 즉 논리적인 용어로 채택될 수 있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우리는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윤리적 행위의 첫 번재 두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추상적 사유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도식화하든가 하는 경향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윤리적 행위의 <어떻게(how)>는 <누가(who)>와 <어디에서(where)>로부터 완전히 추상화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립하게 되는 형식적 윤리와 법사상에 대한 예리한 분석/해명은 서동욱의 <차이와 타자>(민음사, 2000)의 제6장 '들뢰즈의 법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이다). 이때 명시적으로 참조되는 작품은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이 될 수 있지만, 치체프스키-도스토예프스키는 니체마저도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영원회귀'라는 반복이 또다른 '보편화' '형식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원회귀'를 주제로 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이다. 문학작품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990), 그리고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도 읽을 만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다시 치체프스키: "우리가 의식적으로 윤리적 합리주의자들이 아닌 사상가들 속에서조차도 윤리적 주체에 대한 그런 강조의 결핍을 발견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칸트의 '정언명령'조차 윤리적 주체의 개인적 구체성을 무시하고 있다. 칸트에게는 <도덕적 법칙들은 자연의 일반법칙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명확하게 제시했던 것처럼 '영원회귀'에 대한 그(니체)의 가르침은 도덕적 세계의 획일성과 단조로움에 대한 칸트의 개념에 단지 또 하나의 형식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 피히테, 니체, 이들 세 사람의 사상가들 속에서 윤리적 주체는 개인적 구체성의 주요한 특징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복될 수도 복제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판의 요점은 칸트나 니체의 윤리학이 윤리적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윤리적 행위를 추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자유의 영역이란 건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의 영역이다. 보다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철학이 인간의 자유를 충분하게 다룰 수 있느냐는 것, 혹은 철학이냐 문학이냐(문학적인 니체가 언제나 철학적인 니체를 넘어선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장소', '자유의 영역'은 달리 해석되고 있다. 즉, 그는 '이웃'이라는 기독교적 개념, 다시 말해 다수의 윤리적 주체들의 구체적인 개인적 존재를 기본적인 윤리적 전제사항으로 받아들이고서 출발한다. 윤리적 합리주의는 일반적으로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을 이해할 뿐 '이웃'은 낯설고 멀리 있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이웃'이라는 구체적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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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1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알라딘에서는 '문화유물론'을 치시면 됩니다. 품절된 책이지만. 원제는 제 기억에 'Cultural Materialism'이고, <문화의 수수께끼>의 저자 마빈 해리스 주장하는 자신의 방법론입니다.

yoonta 2005-11-11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눈에 띄는 오자들...^^
모마드적 기원---->노마드적 기원
요수들을----->요소들을

도스토예프스키를 상당히 좋아하시나보군요..니체를 넘어선 윤리적 주체의 구체성을 그에게서 보실정도면 말이죠..님의 글을 보면서 질문이 생기는데..박노자의 <하얀 가면의 제국>을 읽어보면 도스토예프스키를 '골수보수주의자'로 평가하더군요..그의 작품을 "악을 가능하게하는 환경을 '단순한 표피'로 규정한 채 '영혼 속의 악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매달렸다"고 보더군요..즉 인간의 윤리의식을 사회환경속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속에 악의 본질이 내재돼 있다는 성악설"을 취해서 나온 방식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기독교적 국가와 교회가 인간을 훈육해야만 사회가 생지옥이 되는 것을 막을수 있다고 하는 홉스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더군요. 이런 요소들 때문에 그는 당시의 자유분방한 서방국가들보다는 슬라브중심의 민족주의에 집착하였고 타민족에 대한 침략(예컨데 터키)등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기도 하였다더군요..이런 관점은 분명 님이 평가하시는 도스토예프스키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요..님이 위에서 말씀하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윤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박노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결국은 국가나 기독교에 의해 훈육되어야만 하는 대상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것을 전제로한 '윤리'라고 한다면 제가 받아들일수 없는 '윤리적' 주체가 될것 같은데..로쟈님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로쟈 2005-11-1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쓴 것들에 오타가 많군요(타자를 잘 못쳤던 모양입니다.^^) 박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은 저도 읽었었고, 그에 대한 질문도 3년 전에 받았었습니다. 그때 제가 적었던 걸 겸사겸사 페이퍼로 옮겨놓겠습니다...
 

 

 

 

 

강의 준비로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론에 대한 책을 읽다가 잠시 '딴짓'을 한다('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 몇 마디 광고한다는 명분으로!). 문학이론입문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이론입문>(창비사, 1989)에서 저자인 테리 이글턴은 20세기 문학이론의 기점을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에세이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로 잡는다(이글턴의 책은 인간사랑에서도 번역서가 뒤에 나왔지만 창비사판을 권한다). 가까이에 번역서가 눈에 띄지 않아 원서(1983) 서문의 첫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If one wanted to put a date on the beginnings of the transformation which has overtaken literary theory in this century, one could do worse than settle on 1917, the year in which the young Russian Formalist Victor Shklovsky published his pioneering essay 'Art as Device'."

'젊은 러시아 형식주의자(the young Russian Formalist)'라고 한 건 그때 슈클로프스키(1893-1984)의 나이가 24살이었기 때문이다(그는 90세 이상 장수했는데, 그건 그의 '타협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형식주의자들 가운데에서 1920년대 맑스주의자들의 공세에 가장 먼저 백기를 들고 투항한 이가 소위 형식주의의 '마니페스토'를 쓴 슈클로프스키였다). 여하튼 이 혁명적인 에세이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발표되었다는 건 우연의 일치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러시아 형식주의'는 '러시아 혁명'과 운명을 같이 한다? 실상 형식주의의 궤멸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는 레닌주의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아니 순서적으로는 거꾸로가 맞겠다. 스탈린 체제의 성립과 함께 '이론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형식주의는 궤멸한다).

자신의 기념비적인 에세이에서 슈클로프스키가 '간판'처럼 내세운 명제는 예술이란 기법의 총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법들이 의도하는 효과가 '낯설게하기'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란 다름아닌 '낯설게하기'이다. 가령, 화장을 거의 '떡칠'을 해서 애인이 못알아봤다면(보다 정확하게는 '힘들게 알아봤다면': '누구시더라?') 그 화장이 '예술'이다. 혹은 평소에 '떡칠'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날 용감하게 노메이크업을 해서 다시금 애인이 못알아보게 만들었다면(보다 정확하게는 '힘들게 알아보도록 했다면': '당신이야?!') 그 맨얼굴이 또한 '예술'이다. 물론 전문적인 얘기로 하자면 끝이 없는 까닭에 대략 그렇다고만 해두자(나는 따로 책 한 권을 준비중이다).

'낯설게 하기'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예리한 분석, 그러니까 '낯설게 하기의 미학과 정치학'에 대해서는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을 참조할 수 있으며(바흐친과 로트만에 대한 글들도 시려 있다), 국내 필자들에 의한 연구서 <러시아 형식주의>(한국외대출판부, 2001)에도 요점이 정리돼 있다. 참고로 브레히트 서사극에서의 '생소화 효과' 혹은 '소격 효과'라는 것은 이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또 에코의 <낯설게하기의 즐거움>(열린책들,  2003)은 (비록 원제는 아닌 듯하지만) 기법으로서의 '낯설게하기'가 얼마나 널리 쓰이고 있는가를 가늠하도록 해준다(에코는 로트만의 <문화기호학(Universe of the mind)> 영역본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슈클로프스키의 이 유명한 에세이는 세 가지 우리말 번역본을 갖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온 건 토도로프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론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문학의 이론>(1965)에서 김치수 교수가 9편의 글을 발췌/번역한 <러시아 형식주의>(이화여대출판부, 1981/1988)이다. 츠베탕 토도로프(1939- )에 대해서 개괄적인 내용은 존 레흐트의 '인명사전'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6/2003)를 참조할 수 있다(생년이 '1941년'으로 오기돼 있다). 저자 레흐트는 크리스테바 전문가.

크리스테바(1941- )와 마찬가지로 불가리아 출신의 걸출한 '사무라이' 토도로프는 1963년에 파리로 건너가 롤랑 바르트의 제자가 된다. 그가 방대한 분량(315쪽)의 <문학의 이론>(로만 야콥슨이 서문을 썼다)을 불어로 옮겨 출간한 것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론의 소개라는 기본 취지 외에도 프랑스 지식사회에 대한 입문의식 성격을 갖고 있었으리라. 즉, 그 책의 화용론적 의미는 토도로프의 자기 존재증명이었던 것. 그의 나이 26살 때의 일이다. 

토도로프를 모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테바도 바흐친론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녀는 1967년, 26살에 '말, 대화, 그리고 소설'이라는 바흐친론을 당시 전위적인 잡지 <텔켈>에 게재함으로써 일약 주목받게 되며(그녀는 편집장이던 솔레르스와 결혼한다)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 불어판 역시 그녀의 주도로 1970년에 출간된다. 거기에 그녀가 쓴 저명한 서문이 '시학의 파괴'이다. 참고로, 크리스테바 선집이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됐으며, '말, 대화, 그리고 소설'의 우리말 번역은 <바흐친과 문학이론>(문학과지성사, 1995)에 수록돼 있다(물론 매우 어려운 논문이며, 국역본은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토도로프의 책들은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5)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이 출간돼 있고, (몇 권 나오다가 중단됐지만) 90년대 중반엔 한국문화사에서 토도로프 전집까지 기획했었다. <상징의 이론>(한국문화사, 1995), <덧없는 행복: 루소론/ 환상문학 서설>(한국문화사, 1996), <비평의 비평>(한국문화사, 1999) 등이 전집의 일환으로 나왔던 책들이다. 그 외에도 <산문의 시학> 번역서 2종(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담론의 장르>(예림기획, 2004) 등의 이론서와 <일상예찬>(뿌리와이파리, 2003)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다. 절판된 책이지만, 바흐친 연구서 <바흐찐: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까치, 1989)은 얇지만 매우 통찰력 있는 개론서이다. 토도로프의 책은 대부분 영역돼 있으며, 일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듯하다(러시아어본은 본 적이 없다).

 

 

 

 

스승인 바르트가 구조주의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변신해가는 데 반해서 토도로프는 제라르 주네트와 함께 가장 철저하게 문학에서의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이론가로 남게 되는데(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좀 유별나다), 그의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환상문학 서설>이다. 문학에서의 환상성 혹은 환상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필독해봐야 할 책이다(주로 영역본으로 읽은 탓에 국역본의 상태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지만). <환상문학 서설>은 한 문학적 장르에 구조주의적 방법론이 어떻게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선구적으로 타진하고 있는 책이며 1970년에 나왔다. 로즈메리 잭슨의 <환상성>(문학동네, 2001)은 그러한 토도로프의 성취를 사회/정치적 맥락과 정신분석학적 분석으로 보완하고 있는 책이다. 두 사람에게서 모두 중요한 전거로 쓰이고 있는 작품은 푸슈킨의 <스페이드 여왕>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환상예술의 최고봉'으로 격찬한 작품.  

토도로프 얘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하여간에 토도로프가 러시아 형식주의를 최초로 서구에 소개했다는 말씀이고, 그런 사정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어서 나온 것이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청하, 1986)인데, 이 책은 레몬과 레이스가 편집한 유명한 영어본 엔솔로지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Russian Formalist Criticism)>(1965)을 옮긴 것이다. 슈클로프스키의 글 2편과 토마세프스키, 에이헨바움의 글 각각 1편이 실려 있다. 검색하다 보니까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월인재, 1980/1995)도 눈에 띄는데(이런 건 '희귀본'이다!), 역자가 한기찬이라 돼 있는 걸로 보아 청하 번역본이 다시 출간됐던 듯하다(전문번역가인 한기찬씨는 청하의 번역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그의 손이 간 번역이다).  

참고로, 또다른 영어본 '형식주의'로는 <러시아 시학 선집(Readings in Russian)>(1971/2002)이 있는바, 더 많은 분야에 걸친 19편 대표적인 글들이 영역돼 있다(이 책은 마테이카와 포모르스카가 편집했는데, 포모르스카는 저명한 시학자이자 야콥슨의 아내이다). 현재는 절판됐지만 조주관 교수 편역의 <러시아 현대비평 이론>(민음사, 1993)은 러시아 원전을 번역한 것이되, 편제와 주석 등은 <러시아 시학 선집>을 참고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기법으로서의 예술'이 번역돼 있는바, 내가 말하는 세번째 번역이다.   

말이 너무 길어져서 형식주의 텍스트의 독어본, 러시아본 얘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형식주의 2차 문헌, 그러니까 형식주의 연구서나 참고문헌으로 가장 먼저 꼽아야 하는 책은 물론 빅토르 어얼리치의 <러시아 형식주의>(문학과지성사, 1983)이다. 형식주의의 역사(1부)와 이론(2부)를 다루고 있는데, 원저(1955 초판)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며, (러시아를 포함하여) 형식주의를 포괄적으로 다룬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에 견줄 만한 책으론 독일 학자 한젠 뢰베의 방대한 연구서 <러시아 형식주의>가 있으며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물론 분량상 이런 책이 국내에 번역/소개될 가능성은 당분간 제로다).

 

 

 

 

문예학자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을유문화사, 1993)에는 러시아 형식주의와 (야콥슨과 무카르좁스키가 주도한) 체코 구조주의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소개가 들어 있다(이미지가 없어서 <이데올로기와 이론>을 대신 띄워놓았다).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고전적인 것은 트로츠키의 <문학과 혁명>(한겨레, 1989; 과학과사상, 1990)인데, 제5장이 '형식주의 시학파와 마르크스주의'이다("그들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 믿는다."란 구절로 마무리된다). 트로츠키의 비판은 예리하지만 진행중이던 형식주의의 잠재적 역량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과소평가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형식주의/구조주의 비판서 <언어의 감옥>(까치, 1990)에서도 읽혀진다. 반면에 <형식주의와 마르크스주의>(현상과인식, 1983)의 저자 토니 베네트는 둘 사이에 생산적인 접점을 찾아보려고 한 경우이다.

슈클로프스키와 함께 형식주의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이론가로 에이헨바움과 티냐노프(트이냐노프)를 들 수 있으며, 흔히 형식주의 3기의 대표자로 불리는 티냐노프에 이르게 되면 형식주의는 자기 극복과 갱신의 생산적인 이론적 모태(매트릭스)를 발견하는 데까지 나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시도는 외압에 의해 좌절되며 형식주의의 유산은 제대로 관리/계승되지 못했다(아직 살아있는 이태리 사람 프랑코 모레티와 이미 죽은 러시아 사람 유리 로트만이 내가 보기엔 형식주의의 가장 걸출한 계승자이다).

이러한 사정은 영화론이라는 분야에 한정지어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주의 영화론 엔솔로지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1995/2001)에는 티냐노프와 에이헨바움, 야콥슨, 세 사람의 논문이 번역돼 있는데, 원본은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Russian Formalist Film Theory)>(1981)라는 영어본 엔솔로지이다(러시아에는 이런 류의 책이 아직 나와 있지도 않다). 내용은 들뢰즈의 영화론 이상으로 읽어나가기 어렵다. 반면에 같이 실린 로트만의 영화론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은 읽기 편하며 내용도 간명하다. 로트만과 치비얀 공저의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 있는집, 2005)는 로트만 사후에 출간된 그 후속편이라 할 만하겠다(그러니까 세트로 읽는 게 좋겠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은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와 같은 책이다. 

참고로, 러시아/형식주의 영화론의 계승자로 치비얀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는 미하일 얌폴스키이다(그의 영화론 한 권은 영역돼 있다). 티냐노프의 형식주의와 현상학, 그리고 들뢰즈를 이론적 지반으로 삼고 있는데, 작년에 그의 주저 <언어-신체-사건>이 출간됐다. 비록 로트만보다 더 멀리 가고 있지만 이 역시 조만간 국내에 번역/소개되지는 않을 듯하다...

05. 11. 10.    

P.S. 부랴부랴 끊는다. 젠장, '딴짓'은 아무때나 하면 안되겠다. 내일 강의는 누가 대신해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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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11-1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깊어만 가는군요. 요즘은 정신없이 바빠서 가을을 음미할 틈도 없네요. 러시아 형식주의는 저도 관심이 가는 주제입니다. 기대하겠사와요.
그나저나 로쟈님 요즘은 조금 여유가 있으신가봐요? 자주 올려주시는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자주자주 브리핑 해주세요~~~히히

2005-11-10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자주'라니요? 안될 말씀입니다.^^ **님/ 저까지 걱정해드리진 않겠습니다. 잘 하시겠지요.^^

코끼리 2006-12-2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월인재) 초판은 1980년입니다. 내용은 청하본과 같습니다. 로쟈님의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

로쟈 2006-12-30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월인재판은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신간 러시아 판타지 소설 <나이트 워치>를 소개하면서 러시아 입문서 두 권에 대해서도 덧붙인바 있는데, 그걸 조금 보완하고자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의 '강정의 나쁜취향'에서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다루어지기도 해서 대략 '분위기'도 좋은 걸로 간주하고 말이다.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만 형성돼 있는 건 아니다. 며칠전 뉴스에서는 극동러시아에서 가짜 술을 마시고 주민 19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타전됐으니까.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마가단 시에서 가짜 술을 마신 주민 23명이 복통증세로 입원해 이가운데 19명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독주(毒酒)를 제조하고 또 그걸 마신 것인데, 지역 내무국(우리의 경찰)은 '사마곤'이라는 가내 술을 제조해 판매한 지역 주민 4명을 검거했다고(대낮에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해서,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웬만해야 말이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는 사실 19세기 러시아의 표도르 이바노비치 츄체프(1803-1873)의 시구이다(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시도 제목이 없는 경우 대개 1행을 제목처럼 사용한다). 츄체프란 이름을 영어로 음역하면 'Tjutchev'가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튜체프', '츄체프', '쮸체프' 등 다양하다('쮸쳅'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귀족출신에다 외교관이었는데 시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좀 나이가 들어서이다. 해서 '철지난 낭만주의' 경향의 철학적인 시들을 주로 썼다. 

 

하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후한 편이어서 푸슈킨(1799-1837) 이후의 19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 이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츄체프와 도스토예프스키>란 연구서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사실, 둘의 친연성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시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도스토예프스키 왈, "유럽은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러시아는 유럽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아니겠어?). 

 

 

츄체프의 시들은 더러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지만 시집으론 <말로 표현한 사상을 거짓말이다>(새미, 2001)가 유일하다. 어차피 시란 (잘) 번역되지 않으므로 아쉽지만 유감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 번역시집은 내가 안 갖고 있는데, 지금 인용하고자 하는 번역은 예일 리치먼드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107쪽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

 

매우 유익한 러시아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까지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만큼은 부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음역한 원문과 영역, 그리고 나의 번역을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다: 

 

Umom Rossiju ne ponjat',

Arshinom obshchim ne izmerit';

U nej osobennaja stat' -

V Rossiju mozhno tol'ko verit'.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이란 번역(특히 2행)이 부분적으로 엉뚱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어제 날짜 한겨레의 칼럼 '유레카'는 '영혼의 모독'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작가는 <백치>에서 토로한다. '선고문이 낭독되면 이젠 죽음이 기정사실화합니다. 바로 여기에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다: "상상이 아니었다. 절절한 체험이다. 38살 때다.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논의하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체포됐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올랐다. 집행하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내렸다.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짧은 문장들로 아주 긴박했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문제는 '38살 때' 아니라 '28살 때'라는 것('38살'은 필자의 착오 혹은 상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생이고 그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것은 1849년의 일이다. 팩트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혹은 '러시아 백치'는 들뢰즈 읽기에서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들뢰즈의 철학극장, 혹은 철학의 경연장에서는 두 종류의 백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적 백치'('방법론적 백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와 '러시아 백치'이다. 라이크만이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 2005)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데카르트의 경연에서는 '백치'라는 새로운 개념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 백치는 프랑스어 같은 이성적 언어를 선호하는 인물로, 프랑스어는 학술어인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들뢰즈는 이 인물이 독창적인 형상임을(비록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 예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물과 그 빛은 동시에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를 철학의 최초의 출발점, 즉 전제조건 없는 출발점으로 만들려는 데카르트의 시도 안에 있는 암묵적인 가정을 드러낸다. 이 가정은 데카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통념'이라는 가정을 말한다."(77쪽)

비문인가 싶어 다시 읽어보니 굵은 글씨로 내가 표시한 대목은 오역이다(아무래도 역자의 '영어'에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an Idiot who prefers a rational language like French, which anyone can understand to learned Latin."(37쪽) 표시한 대로 'prefer A to B' 구문이고, 여기서는 A에 해당하는 것이 '프랑스어' 그리고 B에 해당하는 것이 '학문어로서의 라틴어'이다. 데카르트적 백치는 현학적인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 같이 합리적인 언어를 선택한다는 것.

반면에 '새로운 인물(new persona)'로서의 '러시아 백치'란 데카르트적 백치의 '암묵적인 가정' 마저도 벗어던진 백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통념이라는 사유학적인 기본전제 없이도 해나갈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며, 대신에 러시아문학에서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라 불리는 인물 형태의 조건에 근접하게 된다."(78쪽)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는 'Idiot or unlearned think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백치는 데카르트적 백치를 더 극단에까지 밀어붙인 형상이라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어 같은 자연어의 규칙마저 기꺼이/즐겁게 포기하는 것이다(참고로, 러시아문학에서 가장 철저한 '데카르트적 백치'의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참회록>(1882)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참회록>은 러시아적이기보다는 프랑스적이다. 톨스토이에게서 <참회록>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방법서설'격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백치보다는 러시아의 백치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In philosophy, we start to see a Russian rather than a Cartesian Idiot.) 그 백치는 "프랑스어와 같은 '자연어'에서조차도 개념적으로 낯선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들뢰즈가 예시하는 사례는 "폴란드어로 글을 쓰거나 철학적인 독일어를 '춤'으로 만들려는 니체의 꿈"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라이크만이 들고 있는 사례는 "늘 공적인 교수직과 새로운 분석철학의 '스콜라주의'의 도래에 대해 안절부절"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이다. 거기에 내가 들고 싶은 사례는 실제로 춤을 추었던 러시아의 무용수 니진스키이다(그의 일기 <영혼의 절규>를 보라. 러시아어 원제는 <감정>). 그리고 영화의 용도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타르코프스키. 하면, 니체도 비트겐슈타인도 니진스키도 타르코프스키도 모두가 백치였던 것. 러시아 백치.

다시 들뢰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실제로 철학에서 '전제들 없이 시작하는' 유일한 길은 일종의 러시아 백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념이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자신의 '해석 나침반'을 던져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의 '백치짓'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특이한' 스타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그런 백치가."(79쪽) 그런 러시아 백치는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백치가 보여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철학이 자유롭게 창조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나 규칙에 따라 놀이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규칙이 무엇이며 놀이자가 누구인지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대신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 개념과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과 함께 등장할 때다."(79-80쪽)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백치가 최소한의 규칙을 갖고서 출발한다면, 러시아 백치는 그마저도 빼먹고서 춤을 춘다. 이어지는 문장은 좀 길다.

"다시 말해 이런 백치들은,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많은 복합된 방식으로, 들뢰즈가 인용하기를 좋아한 라이프니츠의 격언, 즉 '우리는 항구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라는 격언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다른 개념들과 얽히게 되는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더이상 고정된 방법들이나 선행하는 형식들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조차 없으며 그 대신 자신의 특이한 문제들로 작업하는 데 만족하는 철학을 통해 '실천학적으로 가정'된 것을 극화하도록 돕는다."(80쪽)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줄거리는 굵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다소 부정확한 대목이 있다. 굵은 글씨로 표기한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Such Idiots help dramatize, in other words, what is 'pragmatically supposed' by a philosophy that no longer even purports to be derived from fixed methods or prior forms, that is instead content to work out its pecular problems..."(38쪽) 

역자는 'content to'를 '-에 만족하는'으로 옮겼는데, 'content to-inf'는 ('willing to-inf'처럼) '기꺼이 -하다'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백치들은 사전의 어떤 공식이나 방법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고유한(그리고 아주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기꺼이 달려드는 것. 해서 이 백치들은 난생 처음 수박을 먹어보고(물론 '수박'이란 개념도 갖기 이전에), 난생 처음 헤엄을 쳐본 이들이다(물론 '수영'의 방법도 배우기 이전에). 아무도 가르쳐주기 전에.

 

 

 

 

그렇다면 이 백치와 유사한 형상, 혹은 인물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손재주꾼(handyman)이겠다. 국역본 번역으론 "우리는 이것저것 긁어보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불어로는 'bricoleurs'. '개념 없는 자들', 하지만, 개념 대신에 재주를 갖고 있는 자들. 그래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기꺼이 자르고 오려붙이고 해서 무얼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자들. 아이들. 백치들. 이쯤이면 들뢰즈가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그토록 경탄해마지 않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에게, 혹은 진정한 경험론자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원더랜드'인 것!  

 

 

 

 

'앨리스'의 러시아식 이름은 '아냐'이다. 그리고, '아니시야', '안토니나' '안나'가 다 같은 이름들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 대목에서 얼마전 장정일 선집의 한권으로 다시 나온 소설 <보트 하우스>(김영사, 2005)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다). IMF가 배경인 소설에서 주인공 애라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05. 11. 08.

P.S. 들뢰즈의 '백치'는 영어로 Idiot(백치)로 옮겨지고 어떨 땐 fool(바보)로도 옮겨진다. (라이크만도 혼용하고 있는) 이 '백치'와 '바보'가 같은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 '바보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서 헷갈렸던 이유이다. 어쨌거나 들뢰즈에 관한 페이퍼들이 몇 주째 밀려 있다. 머리속에서 웅성대는 말들을 얼른 쫓아내고 싶은데, 그간에 그럴 만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오늘은 또 '백치들' 때문에 공치고. 하긴 이런 글에 공연히 시간을 축내며 '목숨 거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긴 '로쟈'는 러시아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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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1-0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너무나 잼있게 읽다가 (러시아 문학이라고는 근처에도 안가보고 들뢰즈와도 당근 안친하고-일때문에 들뢰즈 책을 억지로 몇구절 찾아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아무튼 무식이 깊은 제가 보기에도 재미있게 쓰셨네요...)

쿤데라의 소설에서도 바로 이런 이야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러시아인"에 대해 나오죠. 불멸에서...쿤데라가 호모 센티멘털리스(감정? 감성? 감상? 지상주의자들) 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합리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위대한 감성의 나라로 소개하지요.
러시아에서 누군가가 거절받은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면 감성이 메말라 비틀어진 이성의 나라 프랑스의 변호사들이 (잃어버린 감성에 대한 향수로!) 떼거지로 모스크바행 기차 한칸을 전세내 러시아로 달려가 치정범을 변호하고...치정범이 감사의 뜻으로 변호사에게 키스를 퍼부으면 변호사가 질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고.....상처받은 치정범이 또 살인을 저지르고...그래서 그 모든 것이 강아지와 순대의 셈노래(이게 무엇일까요?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또 알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번역문의 수수께끼처럼 신비스러운 매력^^)처럼 반복되었다......뭐 그런 내용의...

그나저나 데카르트적 백치와 러시아적 백치가 어떤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특히 데카르트적 백치라는게 과연 무엇일지....궁금...궁금....

이네파벨 2005-11-0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올리는 동안 나머지 부분을 올려주셨군요...
데카르트적 백치와 러시아 백치....흑흑 제겐 너무 어렵군요....
백치라는 말의 정의 조차 헷갈리고 있어욤...ㅠ.ㅠ

내가 바로 백치가 아닐까...나는 무슨 백치일까? (한국산 백치~)

로쟈 2005-11-0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어보시면 아마 이해되실 겁니다.^^

이네파벨 2005-11-0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어려워요.....

어딘가...좌뇌형 인간과 우뇌형 인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쪽이 저의 일차적 관심사이니만큼...)

아무튼 오후를 축내가며 써주신 글....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사드려요.

오후의 졸음을 쫓는 커피와 함께...정말 맛있게..향기롭게 음미했습니다.

yoonta 2005-11-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시..그리고 산문집까지 문학이라는 '원더랜드'에서 좌충우돌하시는 로쟈님의 모습도 '백치'라고 한다면 로쟈님에 대한 칭찬인까요?...
하루빨리 데카르트적 백치성을 회복하시어...흄의 경험론이후 진척이 없는 들뢰즈관련 페이퍼좀 올려주세염..눈 빠집니당.^^

그런데..들뢰즈커넥션번역은..쫌 심하네요..원서를 사볼라도 비싸서 못사고 있는뎅..어디 남아도는 복사본이라도 없으신지...ㅜ.ㅜ

이리스 2005-11-0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냥 읽고만 지나가던 독자 --; 인데 오늘은 그래도 댓글 한줄 올리고 갑니다. 좋은글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꾸벅~

로쟈 2005-11-09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눈 빠지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중에 강의 두 개 하고 논문 쓰고 애보면서, 게다가 집에서는 인터넷이 안되는 상황에서 몇 마디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들뢰즈 커넥션>은 저처럼 복사하시면 됩니다. 국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등에서 (대출은 안되더라도) 복사는 가능하니까요. 저도 한때 국립도서관에서 하루 3-4시간씩 복사하곤 했습니다. 돈이 안되면 몸을 팔아야죠.^^ 낡은구두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새구두 한 켤레 장만하시길!..
 

 

 

 

 

제목은 문학비평가 유종호 선생(1935- )의 최근 산문집에서 가져왔다. <내 마음의 망명지>(문학동네, 2004).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의 산문집을 한때 즐겨 읽었던 듯하다.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낀다. 일간지 지면에 실린 칼럼 등을 모은 이런 책들은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가장 적합한데(1부에 실린 글 여러 편을 나는 한 일간지에서 이미 읽었었다), 길지 않은 글들에 박혀 있는 적절한 사유들을 해바라기씨 파내먹듯이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맛은 좋지만 칼로리는 낮은 책, 그래서 군것질로는 아주 유익한. 

해서 현재로선 책을 2/3쯤 읽었는데, 이미 연이어 읽을 책들의 목록도 정해두었다. 역시나 '문체의 옹호'란 글에서 저자가 은근히 추천하고 있는 책들이다. 정명환 선생의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2003)와 곽광수 선생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작가, 2002)가 그것들이다. 나는 거기에 이 참에 읽어볼 요량으로 이미 갖고 있는 책 두 권,  유종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와 정명환,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03)를 더 얹었다. 이 가을이 뒤늦게 풍족해진다.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나는 유종호 선생의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더러 꼼꼼하게 공들여 읽지는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들이 낯설지 않은 것. 가령,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이번 산문집은 십오 년만에 내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 <함부로 쏜 화살>(문이당, 1989)에 이어지는 것이란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책을 (이제는 십육 년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지방도시의 한 서점에서 구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문에 정지용의 시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는 기억도.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가장 즐겨읽은 이들은 김현, 김윤식 선생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읽은 평론가도 따로 있었던 것.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그 이유도 대충 챙겨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됐지만 70-80년대 한국문학 평단을 주름잡던 이들로 주로 '문지'와 '창비' 계열의 평론가들을 꼽는다. 전자의 4인방이 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이고 그리고 후자의 양 거두가 백낙청, 염무웅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을 내던 이들이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역임한 김우창, 유종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각각 몸담고 있던 잡지/출판사(=물적 토대)를 근거로 하여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 그려냈었다. 물론 각 진영의 문학적 입장/태도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암시해주는 것은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책들이다.

 

 

 


 

가령 '창작과 비평'의 얼굴은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였으며, 내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문학과지성'의 책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혹은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이다(80년대에 나온 이론서 <소설과 사회>나 <구조시학>은 생각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론) 지향적이란 비판도 들었던 문지의 경우, 확실한 외국 이론가를 거명할 수 없는 건 일견 아이러니컬하다. 거기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곧 민음사 진영에서 내세운 건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내 글이 걸어온 길'에서 그 내막을 잠시 엿볼 수 있는데, 삼십대 후반에,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 2년간 미국유학("내 평생의 유일한 학생 생활")을 가게 된 저자가 이때 주로 접하고 읽은 이들이 벤야민, 곰브리치, 아우어르바흐, 피터 버거 등등이었다. 김우창 교수와의 공역으로 <미메시스>가 처음 나온 것이 1979년쯤인바 이 유학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미해볼 만한 것은 아우얼바하(아우어르바흐)의 저작이 2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망명지' 터키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 저자의 베스트셀러였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시란 무엇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하면서도 문학만의 독자적인 질서와 규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유종호의 태도는 '망명문학적 태도'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일조한 글이 '내 정신의 망명처'인바, 거기서 저자가 '망명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아트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경배하는데,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최근에 간행된 대화집에서 조금 별나게 피아노 협주곡 9번을 가리켜 '세계의 경이의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21세에 작곡한 이 작품이 모차르트 최초의 걸작이라며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자신과 그의 음악 모두가 '세계의 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116쪽) 

그러한 예찬을 배경으로 하여 정의하자면, 망명문학적 태도란 문학의 표준을 예컨대 음악에 두는 태도, 예술로서의 문학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믿는 태도이다(예술로서 음악이 갖는 특장은 아무런 적극적 지시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바, 김종삼의 시구를 빌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비평가로서 유종호가 가장 음악적인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대략 그러한 태도와 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우리시의 가장 '눈 밝은', 아니 가장 '귀 밝은' 독자에 속한다). 사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 작가/비평가의 사회적 책무가 유난히 강조되어온 우리 현대사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소설은 김동리를 좋아하고 평론을 김동석을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자기 분열증적인 버릇'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파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것이 정직한 것(태도)"이다. 해서, <비순수의 선언>(1962)으로 평론가로서 첫발을 떼었지만, <문학의 즐거움>(1995)에 탐닉하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애로는 없었을까? 우리말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식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넘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인데, 그러한 거부감은 이론이나 학문(과학)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진다(특히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문학/예술에 대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다): "고전연구는 별개지만 문학연구가 과연 학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체 없는 소설이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산문을 읽지 않는다." 그의 현재: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때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열받게 마련인 난세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젊은 학생들과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늙어가는 징조이다. 모차르트도 상전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고사를 상기하면서 삶이 안겨주는 강제를 견디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179쪽, 강조는 나의 것)  

때로 상전(=권력)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던 게 천재 모차르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은 곧바로 예술로서의 문학이 처한 운명이자 비평가 유종호의 운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낸 <사회역사적 상상력>(1987)의 머리말에 그가 쓴 대목: "그 어느 때보다도 글쓰기에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민족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은 계속적인 충격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는 있는가? 아무렴, 캄캄한 밤에는 어둠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번안한 시구로 겨우 노여운 무력감을 달래었다."(177쪽) 그가 간혹 굴욕 속에서도, '노여운 무력감' 속에서도 삶의 강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란 '망명정부'를 현실의 정치권력과는 다른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어둠의 노래'의 소속은 '어둠'이 아니라 '노래'이다). 내가 평론가 유종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서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잘난 선인(善人)들보다는 못나고 소심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을 더 신뢰하는 버릇이 있다...  

05. 11. 07.

P.S. 유종호 선생과는 30년이 넘는 연배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요즘 작가/비평가들보다 오히려 더 친숙함을 느끼는데, 그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비슷한 독서체험의 결과인 듯싶다. 그건 내가 선생만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그가 읽은 책들의 상당수가 러시아 문학작품이어서이다. 유명한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으로 영역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학 초년생 때 읽은 걸 계기로 해서,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고, 연이어 체호프와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역으로 읽었다(요즘에 누가 그렇게 읽는가?). 황동규 선생도 유사한 고백을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풍습'이었을 법한데(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나 서머셋 모옴에 대한 독서도 그렇다), 이 산문집은 애당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에 대한 이야기도 한 꼭지 포함하고 있다(영어명 'Herzen'을 '게르첸'이라고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 읽는 이는 많지 않다).  

게르첸과 관련한 대목은 사실 전공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의 자서전이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나도 작년에 즐겨 찾았었던) '참새고지'(흔하게 부르기론 '참새언덕')에서 저자가 떠올리는 이름이 E. H. 카아의 <낭만적 망명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게르첸. 벨린스키 등과 함께 '아버지 세대'(1840년대 인텔리겐챠)의 거두인 게르첸은 <누구의 죄인가>(열린책들, 1991) 외에도 <과거와 사상>(영역본은 'My past and thought')이라는 걸작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정치적 교리에 매이지 않은 그의 <나의 과거와 사색>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 읽히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다."(54쪽) 작년에서야 비로소 방대한 분량의 원서를 모스크바에서 구했지만(나는 영역본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선 번역의 적임자도 아니지만 좀 찔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한편, 게르첸은 73쪽에도 등장하는데, 그때 '지상 최고의 회고록'이라고 지칭되면서 홑따옴표가 아닌 (도서명을 나타내는) 겹낫쇠가 쓰이고 있다. 교정상의 실수일 것이다. 또다른 실수는 144쪽에서 '돈후안'의 원어를 'Don Huan'으로 잘못 병기한 것('Don Juan'이 맞다). 또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142쪽) 같이 수식어구가 너무 장황한 문장은 다른 저자들의 글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유종호답지 않은 문장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의 문장들은 튀거나 화려하지 않기에 독자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지만(물론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초판을 빌려다 읽은 <비순수의 선언>은 20대 신참 비평가의 문장으로선 너무 정연하여 나를 기죽인 바 있다) 제 몫의 쓰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주제넘는(오버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는 그에게서 특징적이지만, 저자는 문장에 있어서도 '오버'를 경계한다. 그것이 그의 온건한 균형감각을 이룬다. 그 균형감각은 따로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앞에 인용한 대목에서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저자는 토로하기도 했는데, 작년에 그가 낸 책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는 그러한 '정당화'의 시도로 여겨진다.  

      

 

      

 

'내 삶의 소롯길에서'란 글에서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건네주었던 소년시절의 한 친구를 회상하며 그가 내리는 결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참으로 진실 육박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 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적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요 왜곡이지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점 우리는 모두 살아온 과거를 될수록 정직하게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전후를 다룬 대부분의 소설이나 실록이 내게는 모두 황당한 '창작'으로 여겨진다."(166쪽) <나의 해방전후>가 나오게 된 소이연이겠다. 더불어, (육박적)'진실'은 유종호 비평의 또다른 축이다. 그의 비평은 시(=즐거움)와 진실 사이에 있다.    

책에는 난생 처음으로 저자가 경험한 '한가하고 자유로운 방학'(막내딸이 머물고 있던 미국의 엠즈라는 대학촌 체류기)의 부산물로 얻은 시 한편이 소개돼 있는데(127-8쪽), 제목이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이다. 알고 보니, 작년에 나온 시집의 표제시이다. 6연으로 된 시의 5연은 이렇다.

시끌시끌 막가는 아침의 나라에서/ 시새워 죽을 쑤는 동강난 산하(山河)에서 
터벅터벅 육십 년/ 무슨 반딧불을 보자고/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숨가뻐온 것인가

서산이는 서산나귀로서 청노새처럼 사람들의 짐이나 나르는 짐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서산이'와 '청노새'의 삶을 위로하고 ('알게 뭐냐며')초극하는 '반딧불이'에 다름 아니겠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내 마음의 망명지'일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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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나침반 2005-11-07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뒤늦은 가을을 풍성하게 해줄 책들을 얹어갑니다.

로쟈 2005-11-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 권 정도 쌓아두면 그걸로 풍족한 가을이지요. 그런데, 행복나침반님은 행복을 찾으시는 건가요, 찾아다주시는 건가요?..

행복나침반 2005-11-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누군가에게 찾아다 줬으면 좋겠건만, 고장났나봐요. 저도 그 놈의 행복이 어딨는지 당췌 모르겠네요. ^^
 

오늘은(11.03) 유치원이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아이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보내야 한다). 점심으로 피자를 시켜먹고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바래다준 후, 학원 윗층의 PC방에서 메일함과 서재 등을 확인한다. 별거 없는데,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시간 동안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뭐하고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만큼만 최근에 나온 책들 몇 권을 구경해보기로 한다.

 

 

 

 

첫번째 책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김영사). 788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지난주 중앙일보에 최재천 교수와 다이아몬드의 대담이 실려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바 있기 때문에 군소리를 달지 않겠다. 대신에 소개글을 좀 옮겨오면,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번에는 '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즉 이 책은 파괴된 문명의 역사에서 배우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는 붕괴(Collapse)의 개념을(어감상으론, 최재천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말의 '몰락' 정도가 더 적절한 듯싶다. 물론 붕괴는 너무 '갑작스런 몰락'을 지시하기도 한다. 우리에겐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인구 규모, 정치.사회.경제 현상의 급격한 감소"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가 택한 문명의 붕괴 지역은 단순히 지배계급이 전복되고 교체된 지역이 아니라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곳, 또는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곳이다." 해서,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몰락보다는 마야 문명,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 아시아의 앙코르와트 등처럼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완전히 몰락해버린 사회들을 주로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곳, 즉 르완다, 아이티,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상황도 점검하고 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붕괴의 이유들: (1)환경 파괴 (2)기후 변화 (3)이웃 나라와의 적대적 관계 (4)우방의 협력 감소 (5)사회 문제에 대한 그 구성원의 위기 대처 능력 저하.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에는 한 사회나 문명이 붕괴하거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데, 그 기준에서 자유로운 문명, 국가, 사회가 현재 몇이나 될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요는, 망할 땐 망하더라도 이유나 알고 망하자는 것이 될까? 

참고로, 그의 다음 책은 '국가'의 성립에 관한 것이라고 하며 5-6년 정도 걸릴 예정이라고. 다이아몬드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방대한 시야와 스케일이다(그는 역사를 대륙 단위로 훑어내린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무기는 생물지리학. 역사학 방법론으로서 인구학과 함께 더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비하면 국내 역사학자들의 관심사는 다소 협소해 보인다. 거의 유일한 예외인 듯싶은 이는 동서문명 교류사의 권위자인 정수일 선생이다. 그의 <한국 속의 세계>(창비사)가 2권 짜리로 이번에 출간됐다. 한겨레에 연재됐던 걸 몇 번 읽은 적이 있는데, 언제 그의 주저들까지 다 모아놓고 읽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면 싶다. 아이에게 (피아노 대신) 골프를 가르쳐야 할까?

 

 

 

 

두번째 책은 남미의 언론인 에드아르도 갈레아노의 3부작 <불의 기억>(따님). 중남미사로 분류되는 역사책인데, 저자가 "스페인에서 두번째 망명생활을 하던 80년대 전반에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아우른 3부작이다. <불의 기억>에 담긴 역사는 박물관에 갇히고, 헌화와 놓여진 동상이나 대리석 기념물 아래 매장된 역사가 아니다. 연표 속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 살이 있는 역사이다."라고 소개돼 있다. 여기서 '하위주체(subaltern)'란 말은 탈식민주의자들의 용어이다. 김택현 교수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박종철출판사, 2003)이 관련서. 우리로 치면 구술 민중사가 하위주체를 역사 속으로 적극 수용하는 방식이 될까? '민중의 함성'?

내가 갖고 있는 라틴아메리가 관련 서적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까치글방, 2001), <영화 속의 문학 읽기>(책이있는마을, 2001) 등이고 작가 카를로스 푸엔떼스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까치글방, 1997) 정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풍족한' 두께의 책이 나와서 반갑다. 이 또한 언제 읽을 수 있을는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지만.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갈레아노의 책은 그간에 많이 번역돼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중남미를 이해하는 한 '통로'이다. 갈레아노의 통역으로 우리는 중남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그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책은 교육서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르네상스, 2004)인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열 번째 작품. 재치있고 예리한 언어로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를 재해석하며 우리사 사는 세상의 모순들을 고발한다." 물론 그런 모순으로 치자면 우리도 남못지 않다. 한데, 왜 우리 책들은 수출되지 않는 걸까? 

 

 

 

 

세번째 책은 지역을 러시아로 옮겨보자. 작년에 영화화되어 초대형 히트를 기록한 러시아 영화 <나이트 워치>(영역본 제목이며 '야간 경비대' 정도의 뜻)의 원작 소설 <나이트 워치>(황금가지)가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출간됐다. 영화는 올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는데, 기대만큼(!) 국내에서 별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작가 루키야넨코는 이 작품이 3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고. 하긴 나도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이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다빈치 코드>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꿋꿋하게 사지 않았고 대신에 영화를 비디오CD로 사두었다(아직도 보지 않았다!).

물론 원작소설 자체가 대중성을 갖고 있기도 하겠지만, 작품이 유명해진 건 영화가 큰몫을 했다.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방송 (제1채널)에서 3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만 17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고(<반지의 제왕> 3편을 앞질렀다), 각국에 수출되었다. 헐리우드의 '20세기 폭스사'는 이후에 제작될 2, 3편의 세계배급권까지 선매한 상태이니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을 그닥 신통찮은데, 딱 우리의 <쉬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즉, 영화적 의미보다는 영화시장의 크기를 바꾸어놓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더 많이 갖는 작품. 이후에 러시아영화는 90년대 이후의 부진을 씻고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중흥기를 맞고 있다(올가을에 개봉된 또다른 블록버스터 <9중대>는 <나이트 워치> 2배 가량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고).

소설의 무대는 "현대 러시아의 대도시 모스크바"로서, "크고 오래 된 도시의 일각에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 위락 시설들이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지만 우중충한 옛 건축물들과 근대화의 흔적들 또한 곳곳에 남아 있"는 모습. "음습한 골목길, 지저분한 술집, 1층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초라한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 부대끼는 지하철 등이 소설 속 장면들의 주 배경"이며, 여기에 빛의 마법사와 어둠의 마법사들의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어림짐작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구도. 판타지 독자라면 '러시아 판타지'란 별미를 감상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물론 내가 조만간 이 책을 집어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경우에라도 동기는 '판타지'가 아니라 '러시아'이다. 왜 이런 작품이 읽히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비슷한 동기에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두어 권 더 소개한다. 하나는 KBS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조재익 기자의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 우리말로 씌어진 러시아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강점은 '지금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서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 '러시아 여성'에만 관심있는 독자들도 일독해 볼 만하다.(나는 이 책을 모스크바에서 연초에 떡국을 먹으러 간 선배기자의 집에서 처음 보았다. 감동적인 떡국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외교관 출신 예일 리치먼드가 쓴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원제는 'From Nyet to Da : Understanding the Russians'(2003 개정판)인데, 제목에서 'Nyet'는 'No', 'Da'는 'Yes'란 뜻이다. 이건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러시아에 대해서 몰랐던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러시아에 대해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개가 불친절한 러시아인들 자체가 서로간의 교제를 통해서 부정적 태도(Nyet)에서 긍정적 태도(Da)로 변모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초면에 'Yes'라고 말하는 친절한 러시아인은 짐작에 창녀들 빼고는 없다. 이 '서비스 문화'의 부재에 대해서는 모스크바통신에서 다룬 바 있다). 여하튼 비교적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러시아 입문서로선 (기대에 안 맞게) 최적이다. 값이 좀 비싼 게 흠.  

 


 

  

 

네번째 책은, 이제 이웃나라 일본으로 넘어와서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이란 부제의 책 <아니메>(루비박스). 원제는 'Anime from Akira to Princess Mononoke'(2001), 그러니까 '아키라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의 일본 아니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책. 저자인 수잔 네피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하는데, 한 일본인의 추천사는 이렇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해 이처럼 예리한 해석이 담긴 책이 태평양 저편에서 씌여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지은이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책에 대해선 오늘자(11.04) 한겨레의 리뷰가 자세므로 참조하시길. 더불어 문득 갖게 되는 의문. 우리는 한국문화에 관한 그런 책을 갖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일본 아니메를 즐겨보진 않지만 가끔은 보며, 러시아에 소개된 아니메를 두어 편 사서 보기도 했다. 때문에 <아니메> 같은 책도 나중에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생각은 있다. 비교적 최근에 국내에서 나온 일본만화 관련서로는 정현숙의 <일본만화의 사회학>(문학과지성사, 2004), 그리고 작가론인 <미야자키 하야오>(살림, 2005)가 있다. 그 이상의 참고문헌들은 그 책들을 참고하면 되겠지.

 

 

 

 

아는 체할 형편은 아니지만, 일본 아니메에서 자주 다뤄지는 테마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일본인들은 유난히 자주 던지는 모양인데, 그런 주제와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시냅스와 자아>(소소)가 눈길을 끈다. 부제는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이 어떻게 자아를 결정하는가'이고 당연히 (만화가 아니라) '과학책'이다. "뉴런들 사이의 공간인 시냅스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통로다. 즉, 시냅스는 우리 각자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체로 기능하도록 매순간 도와준다. 이 책에서 저명한 뇌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뇌가, 특히 시냅스가 어떻게 퍼스낼러티를 만들고 유지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소개는 간단하지만 분량은 630쪽이다. 이 신간이 막바로 떠올려주는 책은 호프스태터와 다니얼 데넷이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제는 'The mind's I :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2)이고 보르헤스의 '보르헤스와 나'부터 시작해서 유익한 읽을 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다소 '경망스런' 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이 읽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냅스와 자아>는 소소출판사에서 내는 'new humanist classic' 시리즈의 제5권으로 돼 있는데, 같은 시리즈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제프리 밀러의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이다. 부제는 '섹스는 어떻게 인간 본성을 만들었는가?' 이고, 원제는 'Mating Mind: How Sexsual Choice Shape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2000). 이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그닥 주목받지 못했다면 그건 '메이팅 마인드'라는 어정쩡한 제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제를 내세우는 것이 선정적이었다면, '성과 인간의 진화' 같은 제목을 어땠을까? 아니면, '짝짓기 본능'은? 저자는 "아무리 생존능력이 뛰어난 호미니드라 할지라도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여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라는 말로 진화에서 성선택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건 진화론의 ABC이다. 더불어 진화적으로 성공한 개체의 기준은 자녀의 수가 아니라 손자의 수이어야 한다(손자의 수가 자녀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므로). 이런 기본적인 감각/본능이 부실하거나 고장난 이들은 필독해야 할 책.

한데, 성선택설의 원조라고 해야 할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는 왜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일까? 그 책의 테마를 뒤집은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바다출판사, 2004)까지 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말이다. 게으름의 소치이되, 다윈에게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섯번째는 프랑스로 건너가 보자. 20세기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아카넷)이 재번역돼 나왔다. 연초에 <창조적 진화>가 재번역된 데 이어서 이번에 또 한권의 주저가 번역됨으로써 베르그송의 새단장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지난 봄에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서광사, 1998)을 번역했던 송영진 교수의 연구서 <직관과 사유>(서광사)가 출간되기도 했었다. 해서, 베르그송에 관해서라면 면피의 여지가 없다. 꼬박 읽는 수밖에. 개인적으론 들뢰즈의 영화론 때문에, 그리고 세기초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과의 연관성 때문에 읽어야 하고 읽고 있다.   

내게 베르그송이란 이름을 의미있는 이름으로 처음 알게 해준 이는 작년 가을에 세상을 뜬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고인의 명복을 빌어줍시다). 그녀가 18세인 1954년에 발표한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에서 여주인공을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하기 위해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베르그송 같은 '고리타분한' 책들을 읽느라 고생한다. 그 책을 나는 고등학교때 삼중당문고(1984)로 읽었었는데, 책에 실린 대담에서 작가가 카뮈보다 사르트르를 좋아한다고 하여 내가 읽게 된 책이(꼭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겠지만) 사르트르의 단편집 <벽> 등이다(역시 삼중당문고). 그 <벽>(문학과지성사, 2005)이 이번에 김희영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출간됐다. 알다시피 올해는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별다른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 좀 뒤늦게 구색을 맞추는 듯하다. 나는 해가 가기 전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나 예의상 다시 읽어둘 참이다. 예전에 내가 읽은 건 김붕구 선생 번역(문예출판사)이었는데, 정명환 선생의 번역은 '1947년의 작가적 상황'이란 장문의 글까지 마저 완역한 책이다. 이럴 땐 러시아어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사들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되는군...

04. 11. 03-04.

P.S.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진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은 시와 산문을 구별하고 시를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에 대한 반론으로 유력한 사례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의 시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책도 출간된바 오봉옥 시인의 <김수영을 읽는다>(랜덤하우스중앙)이다. 저자는 재작년에 <서정주 다시 읽기>(박이정, 2003)을 낸 적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시강의를 묶은 이 책은 그 연장선이기도 하다. 특징은 시 한편 한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며, 나는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읽기'를 '비평'보다 선호한다(요즘 '숲'을 보는 비평가들은 많으나 '나무'를 찬찬히 뜯어보는 독자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둘의 균형이 필요하다). 

 

 

 

 

 

김수영에 관한 책들은 언제부턴가 해마다 여러 권씩 쏟아지고 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동호 교수 등이 쓴 <다시 읽는 김수영 시>(작가, 2005), 김명인/임홍배 교수가 엮은 <살아있는 김수영>(창비사, 2005) 등이 출간됐었다. 이 정도면 김수영은 '풀'이나 '나무'라기보다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자세히 읽기' 시리즈로는 2003년에 열림원에서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를 비롯해 댓 권의 책이 나온바 있는데, '실패한' 기획인지 후속작이 없다. 독자로서 유감스럽다.

P.S.2. 또다른 유감은 독일 철학자 가다머에 관한 것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그의 강연 <고통>(철학과현실사)이 출간된 걸 봤는데, 103세 타계한 금세기 '최장수' 철학자가 평생 척추질환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은 새롭게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철학자 가다머의 크기를 가늠하기에는 역부족인 소품. 이상하게도 이 해석학의 거두는 주저인 <진리와 방법>이 완간되는 대신에 좀 한가한 소품들만이 번역/출간되고 있다.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동문선, 2004)나 <현대의학을 말하다>(몸과마음, 2002) 같은 책들이 그렇다. 국내엔 한국해석학회도 있고, 그 학회지에 실리는 논문의 상당수는 가마머의 해석(철)학에 관한 것인데도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단합해서 <진리와 방법> 정도는 번역해주는 것이 온당하며 가다머에게도 공정한 일이지 않을까?

 

 

 

 

<진리와 방법>은 저자가 나이 60세에 출간한 책이지만 그의 최초의 주저이다(뛰어난 철학교수였지만 그는 글쓰는 걸 힘들어 했다고). 하지만 이후에 40여년 이상을 더 장수했으니 '청년 가다머'의 저작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니겠다. 이미 영어로는 두 차례 번역된바 있으며 독일 철학이 강의되고 있는 나라에는 대부분 번역돼 있을 법하다. 물론 이런 책이 번역돼 있지 않다고 해서 한 문명이 붕괴될 리는 없겠지만 '문명의 수치' 정도는 된다. 참고로, 부분역인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은 5년전에 출간됐다. 물론 10년째 소식이 없는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의암, 1995)에 비하면 사정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이런 책들이 나오길 기다리려면 과연 가다머만큼의 장수가 필요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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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3 22:56   좋아요 0 | URL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 =b 진정한 폐인이십니다. ㅋㅋㅋ

gandhikr 2005-11-03 23:48   좋아요 0 | URL
종종 들러서 글 읽고 갑니다. 좀 전엔 스크랩도 하나 했습니다. 격려(?)의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로쟈 2005-11-04 19:56   좋아요 0 | URL
제가 '자주' 글을 올리는 건 아니므로 '가끔' 들르시면 됩니다. '격려금'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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