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바벨의 비극적 삶을 모티브로 한 픽션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그렇지만, 이번주에 나온 책에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다룬 책이 도드라진다. 중국 작가 리궈원의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에버리치홀딩스, 2009)도 그렇고, 문인/지식인의 죽음을 다룬 건 아니지만 여순사건을 다룬 김득중 박사의 <빨갱이의 탄생>(도서출판선인, 2009)도 그렇다. 관련기사를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9. 06. 20) 사마천은 궁형, 이백은 투신… 그들은 왜?

고래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농공상'의 맨 앞자리에 그 이름이 놓였다. 때로 사당에 위패로 모셔져 사람들의 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잘하면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공자처럼 명예로나마 왕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병에 걸린 문인은 약도 없다'는 말이 있다던가. 지식인들은 명예라는 상징권력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호시탐탐 정치권력을 탐했다. 지식인들에게 정치권력이란, 먹고 싶지만 입천장이 델까 두렵고, 안 먹자니 좀이 쑤셔 못견디게 만드는 달콤한 독약이었던 셈.  

중국의 원로작가 리궈원(79)은 이 달콤한 독약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며 속세와 탈속의 중간지대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지식인들의 행태를 주목한다. 그 회색지대에서 최고권력자로부터 혹은 동료 문인들로부터 목이 베이고, 팔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끊기고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지식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지은이는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궁형을 당한 사마천, 당 현종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다 말년에는 줄을 잘못 서 감옥에 갇히고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이백, 갑골문을 정리한 위업에도 불구하고 동료 문인과의 갈등으로 호수에 몸을 던진 청 말의 고증학자 왕궈웨이까지, 중국 지식인 36명의 죽음을 재조명한다.

문인들의 비극적 말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최고 권력자들에 의한 보복이다. 지은이는 중국사에 300명이 넘는 황제가 군림했지만 그 중에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고 진정으로 대접한 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비교적 교양있는 축은 지식인들을 질투했고, 교양이 없는 자들은 지식인을 증오했으며, 반편이 같은 이들은 지식인들을 괴롭혔다는 것. 조조가 금주령을 발표하자 "요 임금은 술을 즐겼기 때문에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며 공공연히 조조를 비꼬다 사형당한 공융, '명사(明史)'를 편찬해 이민족 정권의 약점을 건드린 죄목으로 청의 강희제에게 처형당한 장정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료들의 질투로 목숨을 잃은 문인도 부지기수다. 사부(詞賦)에 능한 문장가이자 뛰어난 역사학자, 서예가, 작곡가로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꼽히는 후한의 채옹이 그런 인물이다. 그의 죽음이 중국인들의 '참치통조림 법칙'과 연결돼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롭다. 오랫동안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 살아 경쟁에 대한 관념이 결여돼있는 중국인들은 "네가 나보다 나으면 얼마나 나으며, 내가 너보다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평균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 채옹은 너무나 특출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지식인들에 정치보복을 일삼은 황제들이나 그들의 재주를 질투한 동료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지식인들의 죽음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이율배반적 태도에 기인했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벼슬을 탐하다가 교수형을 당한 서진시대 육기의 죽음에 대해 그는 "글쓰기가 자신의 최대의 무기라면, 관직이 바로 자기자신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유혹이든, 그것이 금빛이든, 은빛이든, 핑크빛이든, 심지어는 오색찬란하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가능한 한 그것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명예위원인 리궈원은 1957년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을 내놓았다가 우파 작가로 낙인찍혀 문화혁명기에 철도 건설현장에 하방돼 20여년간 붓을 꺾어야 했던 인물. 그같은 경험이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성찰에 무게를 더해준다.(이왕구기자)  

  

한겨레(09. 06. 20) '빨갱이’는 국민-비국민 가르는 이분법에서 태어났다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학교 운동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주민 수천 명이 양쪽으로 패를 나눠 앉아 있다. 두 무리를 나눈 폭 3미터 남짓한 중간지대에는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담장 뒤편 시가지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주민들이 맞닥뜨릴 운명의 가혹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됐지만, 실은 여수 진압 직후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이다. 오른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부역 혐의자들로, 사진 촬영 직후 89명이 학교 뒤편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됐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중간지대는 양민과 혐의자의 편의적 구분선이 아닌, 삶과 죽음의 절대적 경계선이었다.

“진압군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빨갱이’를 골라내는 일이었습니다. 경찰 생존자와 우익 인사들이 대열을 훑고 다니다 ‘저놈’ 하고 지목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것을 ‘손가락 총질’이라고 불렀어요.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자비한 몽둥이질과 총살, 참수형이었습니다.”

<‘빨갱이’의 탄생>을 펴낸 김득중(44)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여순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에서 찾는다. 출범 두 달을 갓 넘긴 이승만 정부에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국민’으로 승인하는 것은 항상 ‘국민이 아닌 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동반하는데, 이승만 정부한테 ‘비국민’은 ‘빨갱이’였다.

“빨갱이란 말은 일제 때부터 있었고, 해방공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하게 사용됐어요. 그런데 여순사건을 거치며 그 의미가 변합니다.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악마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죠. 부역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 학교 운동장은 양민과 빨갱이,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준별하는 공간이었던 겁니다.”

물론 우익의 ‘빨갱이 사냥’은 봉기 기간 좌익이 벌인 학살행위가 빌미가 됐다. 실제 반군이 장악했던 여러 지역에서 반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대량으로 살해됐다. 하지만 글쓴이는 좌·우익의 살상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살의 규모나 대상, 지속 기간에서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전체 희생자 1만여명 가운데 95%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죽었습니다. 지방 좌익과 반군이 죽인 사람은 500명 정도예요.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좌익의 학살은 표적이 분명했습니다. 친일 경찰과 한민당 세력,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청년단원들이었지요. 그런데 우익은 달랐어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반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남로당원뿐 아니라 그들에게 밥 해준 사람,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 반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변변한 자기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살해당했습니다.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기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실제 희생자 중에는 평소 경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검사,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여중 교장 등 우익 명망가도 있었다. 이들은 반군에 협조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심증만으로 잡혀가 처형됐다. 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초토화 진압작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된 경우였다.

이런 ‘빨갱이 만들기’에는 언론과 문인들의 구실이 컸다는 게 글쓴이의 분석이다. 실제 신문들은 정보 획득의 통로가 제한된 상황에서 정부와 진압군의 발표 내용,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을 여과 없이 보도했고, 시찰단 자격으로 현지를 방문한 시인과 소설가들 역시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적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글을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통해 ‘빨갱이’란 기표에 담긴 ‘살인마’ ‘비인간’의 이미지는 국민의 의식회로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려면 반공의식을 내면화해야 했고, 이렇게 내면화한 반공논리는 대한민국 60년사를 통해 지배권력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빨갱이라는 유령을 어김없이 불러냈다.

“인터넷에서 ‘좌빨’(좌익빨갱이)이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누리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고 집회·시위와 사상의 자유, 노동자의 파업권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드는 이들의 사고 구조에는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입니다.”(이세영기자)  



» 1948년 10월26일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찍었다. 같은 장면을 당시 <동아일보>는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했다. 

여순사건은 ‘반공국가’ 건국공신
1948년 10월19일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전남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출병을 거부하며 일으킨 무장반란. 지방 좌익세력과 주민들이 봉기에 호응해 가세하면서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파급됐다. 당시 정부는 북한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계획적 반란으로 규정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 남로당 중앙조직이나 북한과는 무관하게, 숙군(肅軍)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확인되고 있다. 군인봉기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친일파 재등용과 토지개혁 지연,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사회·정치적 불만의 누적 등이 꼽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하다.  

09.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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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9-06-20 09:51   좋아요 0 | URL
서글픈 역사입니다.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네요.. 책 두 권 모두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로쟈 2009-06-21 10:26   좋아요 0 | URL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죠.--;

노이에자이트 2009-06-20 15:07   좋아요 0 | URL
남부군을 쓴 이태가 유작으로 남긴 실록이 <여순병란>이었습니다.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여순 병란이지요.

로쟈 2009-06-21 10:27   좋아요 0 | URL
역사로서 제대로 조명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