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관심도서는 정치학과 교양과학서쪽이다. 두 개의 페이퍼로 갈무리할 작정인데, 일단 정치분야의 책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 고진 입문서로도 제 격일 듯싶은 책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그대, 왜 침묵하는가? “데모크라시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뿐”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9)이 국내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근대문학이 정치·사회·윤리적 역할을 떠맡았지만 이제 근대문학의 그런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0년대 한국 문학계에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여기저기 그를 인용한 글들이 자주 보이기에 그가 쓴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게 10년 전쯤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이었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붕괴한 7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에세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나의 지적수준으로선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잡고 끙끙대다가 던져버린 뒤로 나에게 가라타니는 요령부득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대담집을 번역한 <정치를 말하다>는 나처럼 ‘가라타니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처음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꼭 알맞은 책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대화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60년대 일본을 격렬하게 달궜던 ‘안보투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왜 경제학을 공부하다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어떻게 문학평론가가 됐다가 결국 문학을 포기했는지, 단체를 만들고 사회참여를 하다가 왜 단체를 해산해 버렸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썼던 책들에 대한 요약과 부연이 담겨 있어 해당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논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라는 분석, 국가를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 다루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등 그의 독특한 시각들 말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 가라타니가 이번 책에서 던진 주요 메시지는 정치와 민주주의, 평화다. 가라타니는 90년대에 만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내적으로는 전제주의로 귀결됐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파괴되고 대학이 민영화되면서 중간세력이 없어졌고 전제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곧 개인에게 가능한 것은 대표자를 뽑는 것뿐이다.
가라타니는 전제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이라면서 ‘데모’, 다른 말로 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비평지 ‘비평공간’을 창간했다가 닫아버리고 새로운 ‘혁명운동’으로 생각하며 ‘생산·소비협동조합운동(NAM)’을 조직했다가 일거에 해산해 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그만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랬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에 천착해 한국 기성문학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역자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의 자기우상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였던 셈”이라며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그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김재중기자)
10. 03. 19.
P.S.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과 견주어 볼 만한 책은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론이다. 두툼한 교재용 책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민주주의 모델>(인간사랑, 1989)이라고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 새번역이다). 간단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일보(10. 03. 20)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민주주의의 모델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정권의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부 교수가 쓴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그간 역사적으로 등장했고 실험되었던 다양한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구체적 실천의 내용들을 유형화·모델화함으로써, 각 모델들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도화되고 관성화된 민주주의의 의미에 파열을 내고, 우리가 잊고 있거나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선출, 여야 간의 정권 교체,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 조건 내지 절차는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치열한 다툼과 희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이상적 모델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의 작동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혼란을 겪고도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역사상 존재해 왔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춘 여러 모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열 가지 모델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그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사회들에서 전개되었던 깊은 사색의 결과물들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조정진기자)
P.S.2. 약간 학술적인 책으론 러셀 달튼의 <시민정치론>(아르케, 2010)도 신간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행태를 경험적 자료를 사용하여 분석해낸 비교연구서"로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사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행태를 비교ㆍ평가하고 성찰하기 위해 읽어야 할 시민정치 교과서이며, 아울러 정치학도와 선거전문가, 정당관계자에게는 필독서"리고 소개된다. 부제는 '선진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 작년에 나온 키이스 포크의 <시티즌십: 시민정치론 강의>(아르케, 2009)와 짝이 될 만하다. '시민정치'가 새로운 화두인가? 두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