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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에 관한 최근의 '인심'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 몇몇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뜻밖에도 '로쟈'에 대한 평문을 발견했다. 필자는 noinsider님이고(아마도 북조선 소속이신 듯), 아래의 내용이 그의 '이 사람을 보라!'이다. '로쟈'의 허물을 잘 지적하고 있는 글이므로, 서재를 즐겨찾으시는 분들이 참조하시길 바란다. noinsider님은 '문학은 러시아문학, 철학은 독일철학'이란 신념을 갖고 계시는데, 나는 그 신념의 절반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사실 (절반쯤은) 동지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용문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것이다. 내용에 대한 판단은 '대중들'께서 해보시길(남조선의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인'은 입다물고 있어야 마땅할 것이므로). 

-우선 이야기 할것은 나와 로쟈씨는 전혀 모르는 관계다. 다만 내가 아는건 '로쟈'씨가 활동했던 온라인상의 '흔적'들 뿐이고 이상의 논의는 이 '흔적'들에 집중될 것이다. 내가 '이 사람'(-로쟈씨)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지식소유자'의 '미래상'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오역 찾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오역문제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현재 대중(교양을 갖춘 혹은 교양을 갖추길 바라는. 이상의 논의에 쓰이는 대중이란 용어는 이 범주에 한한다.)들이 원하는 번역서에 대해서 알아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특징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1) 그들은 중요 개념들에 대한 '원문병기 표기방식'을 원한다. 2) 그들은 의역보단 직역위주의 번역을 원한다. 3) 그들은 완역을 원한다.

-1)과 2), 그리고 3)을 종합하면 대중들이 원하는 번역서의 특징이 나온다. 그것은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번역자의 부재(지양)를 통한-이다. 1)과2)의 방식은 부수적인 결과물이 따른다. 한글문법의 파괴다. 번역서에 한해서 문법은 파괴될수 있다. 시가 문법을 파괴할수 있는 건 더 큰 예술적 감동이 정당화해주기 때문이다. 번역이 문법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 '정당화'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선 아직은 판단하지 않겠다.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인 소통은 과거에는 해당저작의 전공자들이나 갖춰야할 지향해야 할 자세였다. 대중들이 지향하는 바가 '그것'(원저자와 대중적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라면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 할 수 있다: (1) 대중적 독자의 수준이 전문적 독자(해당서적의 전공자)의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2) 대중적 독자는 전문적 독자의 수준을 흉내내는데 불과할 뿐이다.

-(1)의 경우가 진실이라면, 번역이 좀더 올바르게 되야 한다. 번역이 올바르게 된다는 건 무엇인가? 원저자와 독자의 직접적 소통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자들은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의 끝은 무엇일까? 그 끝은 '원전독해'이다. 즉 번역이란 결국은 무용한 것이고 그것은 원전독해를 향한 '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독자는 자신의 수준을 더욱 향상 시켜서 원서를 읽어야 한다. 번역의 질을 따지는 건 무용한 논의들일 뿐이다. 어떤 번역이든 왜곡은 행해지기 마련이다. 번역행위는 대중들의 지적인식이 행상되면서 그것에 따라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당장은 대중들의 지적인식이 원전독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원전독해를 교육시키는 지식소유자 유형이 각광받을 것이다. 바로 '로쟈씨'다. 로쟈씨와 같은 지식인 유형은 대중들이 원전을 독해하는 순간 그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다.

-요즘 나오는 번역에 대한 논의들의 전제가 1)이다. 이 논의는 그 논의자체에 내재한 전제들과 그 작동체계탓에 필연적으로 '번역의 파괴'-'번역은 반역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남조선의 당장의 '열악한 현실'을 근거로 그들은 그들의 논의를 끝까지 밀어 붙이지 않고 그들의 논의를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 짓지만.

-요약하면 (1)의 경우가 진실이라 믿고 그것을 전제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 '계몽주의'를 간직한다. 즉 인간의식은 계속 발전 될 것이고 그 발전의 과정에서 그 발전을 도와주는 모든것들은 조금씩 지양될 것이다. 즉 완벽한 독해를 향한 진보의 노정-원본을 향한 번역의 노력은 번역에 대한 지양을 내포한다. 그 번역가나 번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 또한 지양될 것이다. 

-(2)를 보자. (2)가 진실이라면, 대중적 독자는 전문적 독자를 흉내내는 것일까? 사실 대중들은 진심으로 원저자와의 직접적 소통을 바라고 있다. 이 직접적 소통이 가능할까? 이 흉내개기란 직접적 소통의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마비시키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아닐까? 우리는 좋은 번역을 판단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물어봐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번역가가 번역하려는 대상 즉 원작이 실재하는가다?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이 객관적 실체로서의 원작은 존재한다. 허나 객관적 실체를 번역하려면 객관적으로 읽어야 한다. 즉 완벽한 번역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는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원작'을 객관적으로 읽는 것이다. 모든 독해는 주관적이다. 따라서 무슨 근거로 좋은 번역과 나쁜번역을 판단하는가? 쉽게 얘기하는 데로 비중역, 직역, 완역등의 미덕이 이 근거를 확실하게 해주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좋은 번역의 절대적 조건은 부재한다고. 다만 비교에서 나온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그 정도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것-그것은 원본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이라고. 결국 좋은 번역이란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즉 좋은 번역은 기존의 해석을 반복하고 결국 기존의 사고를 반복해서 기존의 '사고틀'을 공고화한다. 오직 그것만이다.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의 내부의 욕망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반동'이다.

-이 '좋은 번역 논의'들은 대중들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즉 원작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단지 원작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재현하고 반복시키는데에 주력하게 한다. 즉 좋은 번역이 추구하는 '목적물'은 원서(원본)가 아니라 원서(원본)에 대한 기존의 '해석'뿐이다.

-여기다 (1)의 논의를 더해보자. 원작에 대한 객관적 독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원작(원본)을 인식할 수 없다. 외부의 실체로서 원작(원본)이 실재한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작이나 원저자와의 직접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주체적 구조(자신)와 대상적 구조(텍스트)의 충돌에서 나온 해석뿐이다. 

-(1)의 불가능성-직접적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좌절에서 나온 최면상태가 (2)의 상태다. 그 흉내냄을 통해 대중은 직접적 의사소통을 가상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대중들 자신들의 의식속에서. 전공자를 흉내냄으로써 대중은 가상적 대리만족 속에 빠진다. 즉 대다수 대중들은 중요 개념의 원어 표기, 직역, 완역등의 장치로 자신을 스스로 마비시킨다. 번역물이라는 원작에서 굴절된 물체를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원작의 복사물로 스스로 착각시킨다. 아우라는 원작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장치를 통해 굴절된 복사물에도 존재시킬 수 이다. 우리는 아우라를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로쟈'씨와같은 지식소유자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지식소유자들 또한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서 그 복사물의 아우라의 섬광을 진짜로 믿는다. 이런 인물들은 대중들의 착각의 행진을 앞에서 지휘한다. 스스로 계몽의 대표자라 믿으면서. 2) '완벽한 번역을 위한 노정'의 무의미를 아는 지식소유자들은 이것을 이용한다. 사회반동성을 강화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통해 권력을 추구한다. 이 둘은 대부분 동시에 이루어진다. 1)과 2)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니 좀더 엄밀히 말하면 2)를 위해 1)의 착각을 스스로 한다.

-로쟈씨의 경우를 보자. 그녀가 읽은 텍스트 목록을 보면 그녀가 '완벽한 번역을 위한 노정'의 무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녀는 이 완벽한 번역을 위한 행진을 지휘하며 지식소유자에서 지식인이 되었다.(그녀가 동의하든 안하든) 그녀는 창조력이 없다.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나온 편집자의 한탄은 그녀에게 고스란히 해당된다. 그녀의 모든 글들은 그녀가 읽은 수많은 텍스트들의 분해와 재조립일 뿐이다. 창조력이 고갈된 '지식소유자'는 '지식인'이 될수 없다. 로쟈씨는 창조력이 부재한 자신의 '한계'를 '완벽한 번역'을 위한 행진을 '이용'해서 깨뜨리고 자신의 '지위'를 '지식인'으로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대중들의 무의미'를 '자신만의 의미'로 가꾸고 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번역행진이 앞서 지적했듯이 18세기 계몽주의사상이라는 것에 있다. 로쟈씨가 많이 다루는 텍스트들은 20세기 텍스트들이다. 18세기 의식을 가지고 20세기를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방관적 관조다. 20세기의 텍스트들은 지적유희의 대상일 뿐이다.(그녀에 의하면) 그것의 힘들은 단지 지식애호가로서의 로쟈씨의 한계에 따라 단지 좀더 복잡한 '장난감'으로 격하된다. (사실 로쟈씨에게는 모든 이론과 텍스트들이 장난감일 뿐이다. 창조력 없는 지적 소유자의 전형적 특징이다.) 로쟈씨의 권력의지의 대상이 된 수많은 사람들이 로쟈씨의 그런 태도를 숭배하고 흉내낸다. 이런 사태들의 결과는 반동의 강화뿐이다.

-이런 류의 지식 소유자들은 앞으로 많아질 것이다. 즉 형식주의 철학의 대세로 인해 대중은 본질보단 겉모습의 섬광에 집착하게 된다. 즉 대중들에게는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텍스트들의 겉모습을 바라보는게 중요하게 됐기 때문이다. 번역담론들은 그 겉모습을 향한 관심의 첫번째 시작일 뿐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는 이 세상에서 '본질적 실체'의 '매커니즘'을 따져서 '필연적 변혁'을 위한 이론들은 무시당하게 된다.(내가 전에 대중들이 원하는 건 엄격한 체계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건 어느정도 옳지만 또한 틀리다. 왜냐면 대중들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농간으로 이미지에 현혹되어서 본질을 갖춘 체계보단 체계라는 겉모습을 띈 이미지에 열광한다. 즉 바디우에 현혹되는 것이 그 증거다.) 로쟈는 이 시대적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분자이다.

-글을 마무리 짓자. 번역의 문제는 실천적 차원에서만 파악된다. 즉 대상이 되는 저작을 이론적 노동을 통해 극복, 비판, 옹호, 발전시키려는 그 노동안에서만-그 실천안에서만 파악되고 정립될 수 있다. 지적유희를 위한 독서를 하는 지식소유자들이 번역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들의 그 유희적 차원의 독서법-실천이 부재한 독서법에 의해 그들에게 번역문제는 무의미하게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유희적 차원의 독서가 무의미한 것처럼. 오역의 문제-남조선의 그 열악한 번역환경에서 나온 이런식의 문제들은 실천적 독서를 통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실천적 독해의 전제는 상식적 수준에서의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사실 모든 해결책은 단순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농간으로 복잡해지는 것이다.)

-예컨데 카의 예를 들면 목수가 좋은 나무를 고르는건 이러쿵 저러쿵 논할 필요가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독해를 위해선 올바른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왈가왈부 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의 번역문제는 그 목수가 좋은나무를 골라야 된다는 걸 목수의 최고의 자질인양 떠드는게 문제다. 목수의 최고 자질은 좋은 건축물을 짓는 것이다. 역시 책에 대한 최고의 행위는 번역이 아니라 (재현적 독해가 아니라)실천적 독해이다. 한가지 부수적인 사실을 전부인양 과장하면 그때부터 문제점이 생긴다.

-역사가들이 (역사가가 가져야할 기초적이고 부수적인 태도인)사실적 태도를 과장한 나머지 실증주의라는 얼토당토한 이론으로 기운것처럼, 번역이라는 기초적 부수적 태도를 과장한 나머지 남조선은 반동의 물결이 휩쓸고 있다. 이미지를 통한 반동의 물결이-이 반동에 기생하는 지식소유자들-이 유형의 전형적 대표자 로쟈씨. 이 사람을 보라! 

06. 04. 01.

P.S. 인용문의 문단을 조정하고 오타임에 분명한 조사를 하나 고친 것 외에 나는 인용문에 손대지 않았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나는 '원전주의자'가 아니며(우리말답지 않은 '직역'도 옹호하지 않는다), 번역을 '원전독해'를 향한 다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물론 니체를 따라서 우리의 존재 자체는 몰락/이행의 다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직접적 소통'의 환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갖다붙이자면) '번역주의자'라고 해야 옳겠다. 우리의 모든 인식 자체가 번역이고 번역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나'/'우리'라는 정체성 자체가 번역과정의 산물이다). 이런 건 '창조성'이 없는 내 생각이 아니라 사카이 나오키 등의 생각이다. 따라서 번역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게 내가 번역과 번역 비판 등에 에너지를 투자/허비하는 이유이다.

어쨌거나 noinsider님의 생각은 "오역의 문제-남조선의 그 열악한 번역환경에서 나온 이런식의 문제들은 실천적 독서를 통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로 집약될 수 있겠다. 그리고 부수적인 예견: "(로쟈와 같은) 이런 류의 지식 소유자들은 앞으로 많아질 것이다." 동시에 "로쟈씨와 같은 지식인 유형은 대중들이 원전을 독해하는 순간 그 필요성이 없어질 것이다."('대중들'이 왜 '원전독해'에 목매달아야 할까? 혹은 '원전독해'가 가능할 때도 대중들은 여전히 대중들인가? 등의 의문이 막바로 떠오르지만, 여기서는 묻어두기로 하자.) 해서 나의 몫은 저절로 그 필요성이 없어질 때까지 (많아지거나?) 반동에 기생하며 남아있는 것이겠다. 그날이 지상의 모든 박테리아들이 소멸하는 날보다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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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4-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 ^^

로쟈 2006-04-0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바로 들켜버렸습니다. 나름대로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yoonta 2006-04-0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글이 북조선에서도 모니터링되고 있었던건가요? 북한에 네티즌이 그렇게 많은줄 몰랐습니다..-_- 아마도 북조선에 동조하는 친북논객이거나..아니면 로쟈님에게 까인 번역가일듯..
글의 내용을 읽어보니 헛소리를 이렇게 장황하게 할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_-

"결국 좋은 번역이란 해석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즉 좋은 번역은 기존의 해석을 반복하고 결국 기존의 사고를 반복해서 기존의 '사고틀'을 공고화한다. 오직 그것만이다. 좋은 번역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소유자들의 내부의 욕망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반동'이다."

이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게 만드는군요..-_-

로쟈님에 대한 기본적 사항조차 모르는데서 그치는 것 뿐만아니라..번역이라는것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있는 분같네요..

로쟈 2006-04-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북논객'이 한가하게 알라딘을 어슬렁거릴 거 같지는 않고, '까인 번역가'라면 더 심한 '욕'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실천적 독해의 전제는 상식적 수준에서의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저도 '상식주의자'로서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만) '상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인 거 같습니다. 가령 'pop artist'를 ('top artist'로 잘못 보고) '최고의 예술가'라고 옮겨놓을 때, 이걸 용인될 수 있는 '상식'으로 보느냐, 마느냐(제가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것의 80%는 그런 건데요. 그런 지적이 '반동적'이라!). '최고 지도자'는 보다 관대한가 봅니다...

비로그인 2006-04-0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지금 껏 로쟈 누님(40세 미만은 저에겐 다 형님과 누님.ㅋ)이 남자 분이라고 믿어 왔는데.. 제가 왜 오해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로쟈님이 속이신 건가요?ㅋㄷ

로쟈 2006-04-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이젠 저도 헷갈리네요. '로쟈'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6-04-0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서재에서 "아빠" 라는 단어로 검색해 봤슴다.ㅋㅋ 로자 님 왜 그러셨어요.ㅋㅋㅋ

로쟈 2006-04-0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뭘 어쨌길래 그러시온지요?^^

비로그인 2006-04-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한 딸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으시다면서요.ㄲㄲㄲㄲㄲ.=3=3=3=3=3=3=3

로쟈 2006-04-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비밀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동성부부란 게 있답니다.^^

비로그인 2006-04-0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지난번에 마저 다루지 못한 예술 관련서들을 호출하도록 한다. 신간이라고 나왔으면 무대인사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건 혼자 생각이고 미리 안면을 터두어야 머리속에 오래 담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호출한 책들은 (혼자 생각에) '내놓은' 책들이다.

 

 

 

 

 

 

 

 

 

첫번째로 내놓을 책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예술>(동문선, 2006)이다. 원제는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2003)이다. 들뢰즈 전문가의 한 사람인 보그는(알라딘에서는 '로널드보그'로 검색된다) 우리에게 <들뢰즈와 가타리>(새길, 1995)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저자인데, 이후에 이번에 나온 책을 포함하여 <들뢰즈와 문학(Deleuze on Literature)>(2003), <들뢰즈와 시네마(Deleuze on Cinema)>(2003) 등을 한꺼번에 출간했다(이름을 붙이자면 보그의 '들뢰즈와 예술 3부작'쯤 되겠다. 보그의 최신간은 'Deleuze's Wake'[2004]이다). 얼마전에 이 세 권 중에서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의 원서를 마지막으로 구했었는데, 이번에 번역본이 나와준 것(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이미 '들뢰즈의 미학'을 주제로 한 <사하라>(산해, 2006)도 얼마전 출간된 바 있고 해서 바야흐로 들뢰즈의 미학과 예술론에 대한 읽을 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든다(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철학'과 '실험철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예술가/실험가 철학'). '들뢰즈와 음악'에 대한 연구서들도 최근에 더 나오고 있지만(가령 뷰캐넌 등의 책)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쪽은 영화나 미술이고, 특히 미술 방면으론 콜브룩의 입문서 <질 들뢰즈>(태학사, 2004)를 먼저 참조하신 후에 <감각의 논리>(민음사, 1995)를 옆에 끼고서 보그의 신간을 읽으시면 되겠다(내가 그럴 계획이라는 얘기이지만).   

 

역자는 '사공일'씨인데 관료출신의 경제학자와는 무관한 동명이인이고 후기를 보니 <들뢰즈와 가타리>(세종출판사, 2004)의 저자 정형철 교수의 제자이며 번역 용어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이라 미심쩍긴 하지만, 초면의 반가움을 더 증폭시켜줄 수 있는 책이기를 기대한다(대충 훑어본 바로는 기대 이상의 번역이다).  

 

 

 

 

 

 

 

 

 

동문선 얘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 모른 체했던 책을 한 권 언급하자면, 프랑스 저명한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1898-1986)의 대담짐 <대담>(동문선, 2006)이 출간됐다. 대담자는 학술전문 저널리스트인 디디에 에리봉. 에리봉의 대담집으론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와 곰브리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이미 출간돼 있다(에리봉의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 푸코는 뒤메질의 제자이다). 내 기억에(푸코의 전기를 읽다보면 종종 언급된다) 뒤메질은 인도신화의 최고 권위자였는데(레비스트로스가 북미신화의 권위자였듯이), 자전적 <대담>이 그의 책으론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두번째로 짚어볼 책은 서성록 교수의 <한국 현대회화의 발자취>(문예출판사, 2006)이다. 한국 미술과 미술계에 문외한인지라 저자나 이번 저서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저명한 미술평론가 오광수 교수와 함께 <우리 미술 100년>(현암사, 2005)을 출간한 바 있는 중견이다. 현대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오광수 교수의 <한국 현대미술사>(열화당, 2004)와 같이 읽어봄 직하겠다. 그런 미술사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우리 젊은 화가들의 작업을 둘러보고 싶다면, <한국의 젊은 화가들>(다빈지기프트, 2006)에 눈길을 주어보시길.

 

두툼한 분량은 아니지만, '45명과의 인터뷰'란 부제대로 에누리 없이 "한국의 젊은 미술가 45명의 삶과 철학 그리고 예술 이야기를 대표작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소개를 더 옮겨오자면, 책은 "45인의 작가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여섯 개 항목의 질문을 통해,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큐레이팅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씌어진 책." 그러니까, 눈요기와 귀동냥을 위한 책이다.

 

  

 

 

 

 

 

 

세번째 찍어둘 책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열린책들, 2006) '보급판'. 실상 양장본 책은 작년에 나왔었지만, 도서관을 위한 '그림의 떡'이었고, 이번에 나온 보급판은 나름대로 '저렴한' 가격이기에 장서용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 굳이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전세계 80명 이상의 영화학자와 영화평론가들이 함께 만든 영화의 역사에 관한 백과사전. 1000쪽에 이르는 페이지와 1만 개의 색인 목록이 말해주듯 '세계 영화사'가 다루어야 할 항목들을 빠짐없이 수록했다"는 점에서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단, (나처럼) 데이비드 보드웰/크리스틴 톰슨의 <세계영화사>(시각과언어, 2000)를 이미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약간 망설여지기도 하겠다. 이런 경우엔 주머니 사정에 맡겨두면 되겠다. 국내 버전으론 김성태/임정택의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출판부, 2001)도 있다. 1000쪽이나 되는 영화사를 관람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옥스포드 세계영화사>는 "현대 영화이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책이면서도 전체적인 시각의 균형을 잘 유지해 특정 학파의 이론을 중심으로 씌어진 기존의 영화사 책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지역적으로도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라틴 아메리카 등까지 아우르며 고르게 안배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소개가 빠진 부분이 약간 아쉽다."(한국의 세계영화사의 바깥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책들이 자료집들을 포함해서 최근에 계속 나오고 있다(중요한 건 이런 영화사들이 해외에도 소개되는 일이겠다). 이런 분야를  '쌈박하게' 정리해줄 분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다.   

 

 

 

 

 

 

 

 

 

덧붙여 한국영화의 현재를 점검해주는 책들로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의 '영화와 시선' 시리즈의 신간들도 최근에 출간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삼인, 2002)로 시작된 이 시리즈의 10번째 책은 역시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새물결, 2006)이고, 같이 나온 9번째 책은 <살인의 추억>(새물결, 2006)이다. 이 시리즈의 강점은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깊이있는 읽기를 시도한다는 데 있는데, 한편으론 우리 '영화담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넓이'에 주목하고픈 독자라면 <200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06)에 눈길을 돌려 마땅하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내에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34편의 작품을 선정하고, 각 영화에 대한 평론을 덧붙였다. 영화인, 영화 이론가, 영화평론가, 각 분야의 문화 예술 전문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5명의 추천 위원을 위촉하여, 한국 영화 16편과 외국 영화 15편, 독립(단편) 영화 3편을 '2006 오늘의 영화'로 선정했다. 2006년 선정된 작품들 중 한국 영화 부문에서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17회)가, 외국영화 부문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15회)가, 독립(단편) 영화 부문에서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4회)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추천을 받은 감독과 영화를 목록으로 작성하여 부록으로 수록하고, 추천 위원들의 '선정 이유'도 함께 실었다"는 책.

 

 



 

 

 

 

 

네번째로 꼽아보는 책은 마틴 켐프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6)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 이렇듯 재빨리 번역/소개되는 것은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지만, 저자가 옥스포드대학의 미술사학과 교수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 등도 기획했다고 하니까 허술한 책은 절대로 아니겠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이 어떻게 예술과 과학을 탄생시켰으며,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들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또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이력을 추적함으로써, 그의 꿈과 힘 있는 패트론(후원자)과의 관계, 신과 인간, 자연에 대한 관점들을 풀어낸다."

 

한 외국저널의 서평이 간명하다: "레오나르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틴 켐프는 창조적이면서 지적인 삶을 살았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통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마틴 켐프는 르네상스 거장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받은 임무, 그를 유혹했던 돈, 그가 섬긴 궁전에서의 임무, 잘 알려진 간결한 그림들이 갖고 있는 여담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접근을 매혹적이고 계몽적이며 읽기도 쉽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로널드 보그의 책과의 수미상관을 고려하여 전방위 문필가 장석주의 비평서 <들뢰즈, 카프카, 김훈>(작가정신, 2006)을 고른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이 제시하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문학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저자의 사유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 이상,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이성복, 신경림, 황지우, 황동규 등과 이문과, 김훈 등 한국작가들의 시와 소설, 그리고 카프카를 종횡무진 아우른다. 지은이는 문학이 '나'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과 역사, 더불어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단면들―타자, 시선, 욕망, 개인, 가족, 국가, 질병, 순수, 유목주의, 술, 스타일―을 통해 그 전체적인 국면을 들여다본다."

 

 

 

 

 

 

 

 

 

과거  출판사 편집/경영까지도 했었던 저자를 '비평가'가 아닌 '문필가'로 칭한 것은 비평가는 물론 시인, 소설가에다 에세이스트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전 5권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시공사, 2000)이 그의 재기작이었다. 의외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소설창작론인 <소설>(들녘, 2002)로 돼 있다. 입소문이 난 책인가?). 아마도 그는 손으로 꼽을 만한 다산성을 자랑하는바, 이제까지 40여 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출간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은 저자의 집필력을 따라가지 못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그의 책은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와 산문집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프리미엄북스, 1997) 등이 아니었나 싶다. 여유가 생기면, 작년에 나온 <풍경의 탄생 - 한국시의 이미지 계보학을 위해>(인디북, 2005) 등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들뢰즈, 카프카, 김훈>을 손에 들겠지만...

 

06. 03. 30.

 

 

 

 

 

 

 

 

 

 

P.S. 덧붙이자면, 아주 오랜만에 장 필립 뚜생(1957- )의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그의 2002년 신작 <사랑하기>(현대문학, 2006)이 그것이다(<텔레비전>(문학사상사, 1997) 이후 거의 10년만이다). 역자는 이번에도 그의 소설 <욕조>(세계사, 1991)를 소개했던 이재룡 교수이고, 분량은 180쪽 정도니까 역시나 경쾌한 중편 정도이다. 소개에 따르면, 뚜생은 작년 2005년에 <도망치기>란 작품으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뚜생과 <사랑하기>의 불어본.

 

 

줄거리인즉,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어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마리와 나의 관계를 어긋낼 것이란 예감을 한다"는 식이며,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Faire l'amour)에서 알 수 있듯, '육체적 충동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허무를 낳고 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도쿄이다.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친 작가 장 필립 뚜생은 일본 문단으로부터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는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일본 체류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메디치상 수상작인 <도망치기>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래 사진은 일역본. 덧붙이자면, 사랑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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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30 22:42   좋아요 0 | URL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헌데 꾸준하긴 엄청나게 꾸준한 것 같습니다.-.-;;

푸하 2006-03-30 22:5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편력(여정)이 긴 행렬을 이루네요.... 로쟈님 책 내신 거 있으세요? 미묘한 질문인가요?

瑚璉 2006-03-30 23:44   좋아요 0 | URL
그래도 동문선의 완역상주 한전대계는 좋은 시리즈였는데 말이지요.

로쟈 2006-03-30 23:43   좋아요 0 | URL
marcus님/ '동문산'쯤 될 겁니다!
푸하님/ 제가 더 게으름을 부리지 않는다면 올해부터는 두어 권씩 나올 예정입니다.
壺裏乾坤님/ 저도 원래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출판사입니다(--;)

푸하 2006-03-31 15:0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여정이 기대되네요..... ^^; 이곳의 많은 자료들은 책출판하는 시점에서 안전할까요?

로쟈 2006-03-31 18:33   좋아요 0 | URL
'안전'이란 말씀은? '자료들'이 막바로 책이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내버려둘 계획입니다. 혹 다른 걸 물어보신 건가요?..
 

 

 

 

 

어제 '롤리타' 달력도 정리한 김에, 지젝의 <롤리타> 읽기를 간단히 정리해둔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의 분신 구조에 관한 해명인데, 관련내용은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154-5쪽에 있다. 역자들은 <롤리타>의 주인공 'Humbert Humbert'를 '훔버트 훔버트'라고 표기했는데, 국역본 <롤리타>에 따라서 여기서는 '험버트 험버트'로 표기한다. 에드리안 라인의 <롤리타>(1997)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은 역이 바로 험버트 험버트이다(큐브릭의 영화에서는 제임스 메이슨이 연기했다. 한편, 큐브릭의 <롤리타>에서는 '롤리타'가 님펫으로서는 너무 성숙하다. 아마도 시대적 제약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님펫은 9-14살까지이다).

지젝: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험버트 험버트를 생각해보라. 나보코프는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주인공의 세례명을 성과 일치시킨다. 다름 아닌 그의 이름 안에 분신의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례명'은 'Christian name'의 사전적 의미이지만, 일반적으론 (성과 대비하여) 그냥 '이름'을 뜻하므로 "이름과 성을 일치시킨다"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롤리타>의 남자 주인공은 이름이 '험버트'이고 성도 '험버트'이다(그의 환상세계는 '험버랜드'이다). 즉, 한 이름 안에 두 '험버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지젝이 지나가면서 덧붙이는 것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화이트>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카롤 카롤'이라는 것. 지젝은 그걸 '나보코프식 아이러니'의 빼어난 흉내라고 본다.  

지젝: "따라서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과 롤리타를 괴롭히는 외설스런 분신인 퀼티를 필요로 한다. 퀼티는 상징적인 것(=상징계)에서 배제된(=폐제된) 아버지의 이름이 실재(the Real) 속에(=실재로서) 편집증적으로 귀환하는 것이다(험버트 험버트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제대로 된 성이 없다). 이는 <롤리타>가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밀통관계는 편집증적 제3자(=퀼티)의 개입으로 방해받는 동시에 유지된다." 참고로, 'Quilty'란 이름은 'Guilty'(죄의식)을 막바로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아래는 퀼티 역의 프랭크 랑겔라.

지젝: "나보코프는 정신분석학을 열렬히 반대하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기능이 멈추는 것과, 자신의 분신과 맺는 살인적인 편집증적 관계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진 각주: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불가능성의 전치는 삼중적이다. 샬로트는 험버트를 사랑하고,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하며 롤리타는 퀼티를 사랑하고 퀼티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샬로트는 롤리타의 엄마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보코프는 문학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적 독해를 혐오했다.  

지젝: "따라서 <롤리타>를 통속적인 의사-프로이트적 방식으로, '억압된 동성애'의 사례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초점은 험버트 험버트가 자신의 분신 퀼티와의 직접적인 동성애적 연루를 피하기 위해 성적 매력이 있는 소녀를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퀼티는 험버트와 롤리타의 불가능한 관계를 보충하는 필수적인 제3자이다." 다르게 말하면, 퀼티는 그 불가능성의 알리바이가 되겠다.

지젝: "이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두 명의 베로니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에서 프랑스의 베로니크로 이동할 때 우리는 베로니카가 콘서트 무대 위에서 죽은 후에 무덤쪽에서 찍은(그녀의 시체의 불가능한 시점 쇼트) 드라이어식(Dreyeresque) 쇼트를 보게 되는데, 이 쇼트에 뒤이어, 사랑을 나누고는 마치 무언가 알 수 없는 상실을 감지한 듯 형언키 어려운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로의 직접적인 커트가 이어진다. 그녀의 분신의 흔적은 사랑의 훼방꾼으로서, 성행위의 조화를 깨는 침입자로서 간섭해 들어온다. 다시금 분신의 형상은 성관계의 불가능성과 정확히 상관관계를 갖는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의 '힌트'는 거기까지이다. 이어지는 건 보충적인 '음란패설'인바, "그렇다면 이러한 불가능성은 무엇인가?" 쿠바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쿠바에서는 한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저 여자를 가졌었지!'라고 뽐낼 때 그것은 단순한(straight) 질(vaginal) 성교만이 아니라 항문 삽입까지를 포함한다. '단순한' 성교는 여전히 페팅의 형태로 간주될 뿐이고 항문 삽입만이 더없이 완전한 성관계를 대표한다. 왜 그런가?"

"질은 항문의 창백하고도 왜곡된 복사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항문이 순수한 플라톤적 이데아(털도 없고 갈라진 틈도 없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동그런 구멍)와 같다면, 돌기와 곁가지로 가득 찬 질은 항문의 이상적인 단순성과는 거리가 먼, 항문의 왜곡된 물적 실현인 것이다. 이는 성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충할 또다른 방법이 아닌가?" 여기서 "'자연스런' 삽입(=질 삽입)은 '부자연스런' 이상적 모델(=항문 삽입)에 비해 이차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된다."

그리고 이러한 "항문/질의 대비는 남성에게서는 팔루스/페니스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페니스가 삽입되긴 했지만 내 구멍은 여전히 팔루스를 향해 열려 있어요'라고 말하듯이 항문으로 삽입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열린 질의 구멍을 과시하는 여자들을 담은 표준화된 포르노 쇼트에서 잘 나타나는 바이다." 물론, 이러한 쇼트는 인터넷 공간에 지천으로 널려 있기도 하다.

결론은, 다시 반복하건대, 성관계의 불가능성이다. 물론 이 '불가능성'은 병리적인/심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실재적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분신은 그 구조적 불가능성의 편집증적 귀환이라는 것.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험버트 험버트'의 진실이다.

06.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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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들이 얼추 열권은 넘어가기에 비우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식후에는 바로 일(혹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철칙' 때문에, 게다가 오늘은 바깥 산책을 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쌀쌀하기에, 단순작업으로 시간을 좀 때워보려는 의도도 있다. 지난 주간에 나온 책들은 다 막상막하이지만(그러니까 결정적으로 눈에 띄는 책은 없었다는 얘기), 가장 먼저 꼽을 책은 스티븐 존슨의 <굿바이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6)이다.

 

 

 

 

'인간 심리의 비밀을 탐사하는 뇌과학 이야기'란 우리말 부제를 단 이 책의 원제는 'Mind Wide Open'(2004). 스탠리 규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샷'을 패러디한 제목이란 걸 바로 알 수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책으론 "복잡계 과학을 새롭게 설명한 베스트셀러" <이머전스>(김영사, 2004)와 <무한상상 인터페이스>(현실문화연구, 2003) 등이 소개돼 있으니까 우리 서가와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이다. 이번에 그가 낸 책은 "흥미진진한 뇌과학의 세계"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뇌과학의 연구 성과를 통해 웃음의 전염성, 집중력과 공포심의 정체,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 마인드컨트롤의 원리, 자폐증의 원인 등을 살핀다. 질문이 일상적인만큼 그 질문을 푸는 방법도 대중적이고 쉽게 접근한다. 전문용어를 제한하고, 뇌의 영역·신경화학물질·신경 전달체계 등을 설명하는 데 있어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만 모아 독자들을 배려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만들어놓은 심리적 가설을 뒤흔들며 마음에 관한 이론을 새로 쓰게 만들었던 유명한 실험들을 폭넓게 다뤘다. 실험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흥미로우며, 실험 속엔 인간 행동과 감정의 비밀을 푸는 과정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책에 나온 선구적인 실험들은 최근에 와서 뇌과학 실험으로 다시 한 번 입증됨으로써 인간과 마음의 풍경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런 것이다: "프로이트는 뇌의 특정한 영역이 의식의 통제 바깥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옳았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한 뇌의 구조에 생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없다(우리 신체 기관들에게 일상적인 관리 업무를 중단할 때를 말해주는 생체 시계의 형태로, 우리의 유전 구조에 죽음 충동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공포 반응은 그것이 아무리 우리를 무력화시키든 간에 근본적으로 살아 있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미처 생각할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절반만 옳았기에, 그러니까 절반은 틀렸기에 국역본의 제목은 '굿바이 프로이트'가 된 모양이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이 책은 뇌과학의 최전선을 둘러보고 쓴 명쾌하고 재미있는 여행담"이라고 칭찬하고 있고, 동료 저널리스트인 존 호건도 "스티븐 존슨의 신나는 현대 뇌과학 여행담은 내 뇌를 자극하고, 흥분시키고,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한다"고 증언하고 있으니까 책의 품질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겠다. 게다가 부지런한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다. 분량도 312쪽으로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다(물론 프로이트와 작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비록 뇌과학보다는 정신분석학 책들에 더 자주 손이 가는 편이지만, '적들의 생각'은 언제나 유익한 자극을 주므로 한번쯤 읽어볼 생각이다.

 

 

 

 

두번째 책은 장 클로드 카리에르의 <부탁해요, 아인슈타인>(모티브북, 2006)이다. 불어본 원제가 'Einstein S'il Vous Plait'(2005)이니까 국역본의 제목은 지어낸 게 아니라 직역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철학'이라고 부제가 달려 있는데, 270쪽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을 뻔한 책이지만, 알고 보니 저자가 제법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다.

시나리오 작가, 감독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는데, 한편으론 프랑켄슈타인 전문가이며, 국내엔 <영화, 그 비밀의 언어>(지호,1997)와 <프랑켄슈타인>(이룸, 2004) 외에도 <현자들의 거짓말>(영림카디널, 2000)이나 <시간의 종말>(이끌리오, 1999) 등 그가 단독 혹은 공동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책들이 이미 소개돼 있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소설 형식으로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철학을 들여다본다. 어떤 여대생이 시간의 법칙을 이탈해 20세기 초중반에 살고 있던 아인슈타인 앞에 나타나고,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3차원 위에 시간의 차원을 덧붙여 인간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그 바탕이 된 사상, 그리고 그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겠다. 마치 이번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개정판 <시간의 역사>,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까치글방, 2006)처럼.  

 


 

 

세번째 책은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 2006)이다. 이 또한 '지피지기'하기 위한 텍스트인데, 후쿠자와는 알다시피 일본 메이지 시대 최대 계몽사상가이며, 1만엔권 지폐에 초상화가 실려 있을 만큼 일본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더불어, '문명(civilization)', '연설(speech)', '경쟁(competition)', '저작권(copyright)' 등의 번역어들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의 용어들로 숨쉬고 생각하고 있는 셈(그는 '문명'의 아버지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자서전(원제 '복옹자전')은 1897년 후쿠자와가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만년까지의 인생역정을 구술하여 속기사에게 필기시킨 것이다. 가난한 하급 무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양이론과 쇄국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일본의 서양문명화에 평생을 바친 일대기를 만날 수 있다. 일본 자전문학의 백미이자 일본근대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 기록이다. 성장기와 나가사키 유학 당시의 비화나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자녀교육관, 술을 끊기까지의 에피소드 등 후쿠자와의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 부분도 상당부분 포함되어있다. 또한 부국강병으로 시작하여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대표되는 일본 근대 지식인의 어두운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여, 일본 근대사에 대한 흥미로운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지난번 WBC 준결승에서 우리는 일본에 아쉽게도 분패했는데(먼저 두 번 이긴 걸로 위안을 삼지만), 사실 실력으로는 아직 우리가 '흑번'이다. 근대화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비록 삼성이 소니를 앞질러가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론 이 '이웃'에게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분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의 자서전을 읽는 건 그런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그의 주저 중 하나는 <학문을 권함>이니 읽어서 손해볼 일이 있겠는가?

 

 

 

 

네번째 책은 제리 멀러의 <자본주의의 매혹>(휴먼&북스, 2006). 원제는 'The Mind and The Market'(2002)이고, 부제는 '돈과 시장의 경제사상사'. 이른바 자본주의 경제사상사인데, 저자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상사를 다루면서, "자본주의는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자본주의가 낳은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현실을 관찰하고 이를 당대 현실에서 비판하거나 정당화하거나 혹은 그 대안을 찾고자 했던 모든 현실 운동과 이론화 작업의 역사"를 조명한다고.

소개를 더 보태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은 모두 당대의 자본주의 현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을 몰두했던 사람들이다. 볼테르를 선두로, 애덤 스미스, 유스투스 뫼저, 에드먼드 버크, 헤겔, 마르크스, 매튜 아널드, 막스 베버, 지멜, 좀바르트, 루카치, 프레이어, 슘페터, 케인스, 마르쿠제, 마지막으로 케인스를 부정하고 완전한 자유주의 정책을 주창함으로써 20세기 마지막 2, 30년간 서구에서 가장 각광받은 경제학자가 된 하예크 등, 총 16명의 사상가와 주요 사상이 소개된다."

 

그러니 이 또한 (당신이 자본가가 아니라면) '적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왜?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월가에서 가장 많이 읽는다고 하잖는가?). 이번에 론스타펀드가 수년전 헐값(?)에 인수한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4조원 이상의 이익을 챙길 거라고 하니까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는 가히 '매혹 덩어리' 아닌가?!  

북치고 장구치는 책소개: "‘자본주의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이 새로운 현상이 인간의 다른 사회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파급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좌파는 좌파대로 자신들의 사상적 기반의 원천을 살펴보는 것이며, 우파는 우파대로 논리를 가다듬는 기회가 된다." 고로, 양다리에 양수겹장인 책. 저자는 역사학과 교수이며, 이 책은 처음으로 번역/소개되는 그의 책이다.

유사한 성격의 책으론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2000)와  피에르 독케스 등이 쓴 <모호한 역사>(한울, 1995)가 있다. 전자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이며, 후자는 아는 사람도 아주 드문 '모호한' 책이다. 하여간에 둘다 소장도서이긴 하다. 이들과  같이 읽을 만한 책 몇 권을 더 꼽아보자면, 피에르 잘레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책벌레, 2000), 강만길 편,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역사비평사, 2000), 복거일의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삼성경제연구소, 2005) 등이 눈에 띈다. 자유주의 전도사 복거일이 자본주의의 수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의'에 호소하고 있는 건 뭔가 어색하다는 인상을 주지만(정의롭지 않을 경우 '현실 자본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란 뜻을 함축하는 거 아닌가?).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폴란드 작가 스와보미르 므로제크(1930- )의 <초보자의 삶>(하늘고래, 2006). 제목에서 얼마간 짐작할 수 있는데, 책은 "인간사회의 위선을 위트 있게 표현한 풍자적 단편집"이며,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39개의 주제를 다룬 짧은 이야기가 일러스트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저자는 <탱고>, <이민자>, <스트립티즈> 등의 희곡으로 유명하다는 폴란드 작가인데, 나로선 첫대면이다. 유머러스한 동구권 작가로는 카렐 차페크가 먼저 떠오르는데, 짐작엔 비슷한 색깔의 작가이지 않을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므로제크는 현대사회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포착하는 발군의 통찰력과 유머를 자랑한다. 단편소설로 데뷔하고 풍자만화가로도 활동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 작가 특유의 해학과 정교한 표현은 삶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쓴 이야기들은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쓴, 혹은 살아가기 위해 저절로 두터워진 각질을 콕콕 찌른다. 묵직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위트, 뛰어난 혜안이 일상의 몰상식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분량도 가뿐하므로 어느 화창한 봄날 단숨에 읽어봄 직하다. 아래는 므로제크의 연극작품 <탱고>(1964)의 한 장면.

06. 03. 28.

P.S. 미술과 영화 책 몇 권이 소개에서 빠지게 됐는데, 다음에 몰아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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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야놀러가자 2006-03-29 15:05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 나왔군요. 소개 고맙습니다.

로쟈 2006-03-29 15:47   좋아요 0 | URL
저보다 먼저 아실 거 같은데요.^^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의 달력을 옮겨놓는다. 출처는 윤효윤 교수의  비평적 주석본 Lolita'(신아사, 1997)이다. 복사하면 되는 내용을 왜 타이핑해놓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려나 <롤리타> 독자들에게는 도움이 될 듯해서, 다시 편집해 놓는다. <롤리타>는 스탠리 큐브릭과 애드리안 라인에 의해서 두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여기서는 제레미 아이언스와 도미니크 스웨인이 주연한 라인의 <롤리타>(1997)에서 이미지들을 따온다. 

 

 

 

 

1910 파리에서 험버트 험버트(Humbert Humbert) 출생.

1911 오우션 시티(Ocean City)에서 클레어 퀼티(Clare Quilty) 출생.

1919 6월: 험버트의 집으로 카나리아 새 한 마리가 찾아오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애너벨 레이(Annabel Leigh)의 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1923 6-8월: 리비에라(Riviera)에서 험버트와 애너벨이 여름을 함께 보낸다. 9월: 리용(Lyon)에 있는 중고등학교로 험버트 진학. 12월: 그리스의 코르푸(Corfu) 섬에서 애너벨 사망.

1934 4월: 해롤드 헤이즈(Harold Haze)와 샬롯 벡커 헤이즈(Charlotte Becker Haze) 신 혼여행으로 멕시코의 베라 크루즈(Vera Cruz)로 가게 되며 샬롯은 그곳에서 롤리타를 임신한다.

1935 1월 1일: 피스키(Pisky)에서 롤리타 돌로레스 헤이즈 출생. 4월: 헙버트 파리에서 모니크(Monique)를 만난다. 그후 험버트는 발레리아 즈보롭스키(Valeria Zborovsky)와 결혼한다.

1939 험버트와 발레리아는 이혼한다. 험버트는 미국에서 살던 삼촌의 유산을 받는다.

1939-40 겨울: 포루투갈에서 험버트 겨울을 지난다. 봄: 험버트 미국에 도착한다. 퀼티는 극 "어린 님프"(The Little Nymph)를 완 성한다.

1940-42 험버트 영미의 문학도를 위한 불문학사를 집필.

1943-44 험버트는 정신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는다.

1944 여름: 롤리타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미스 팔렌(Miss Phalen)의 집에 가게 된다.

1944-45 험버트 북극 탐험대에 참가. 캘리포니아에서 출산하던 중에 발레리아 사망.

1945 11월: 헤이즈 가족 피스키에서 램즈데일(Ramsdale)로 이사.

1945-56 험버트의 북극탐험 보고서가 '성인 정신물리학 연보'(Annals of Adult Psychophysics)에 게재된다.

1946-47 험버트 다시 정신 요양원으로 간다.

1947 5월 30일-6월 3일: 험버트는 램즈데일로 가서 샬롯과 롤리타를 만난다. 6월 4일(목): 험버트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6월 9일(화): 롤리타의 눈에 있는 티를 험버트 혀로 잡아낸다. 6월 20일(토): 일기가 끝난다. 6월 21일(일): 험버트 긴 의자에서 롤리타와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성적인 오르가즘을 경험 한다. 샬롯은 교회에 가서 험버트의 사랑과 주님의 인도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다.

6월 23일(화): 험버트와 샬롯은 물건을 사러 나간다. 6월 25일(목): 화가 난 샬롯은 롤리타를 하계 캠프장(Camp Q)로 보낸다. 험버트는 샬롯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6월말: 험버트와 샬롯 결혼한다.

7월 30일(화): 험버트는 아워글래스 호수(Hourglass Lake)에서 샬롯을 살인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8월 7일(화): 샬롯은 미스 팔렌의 편지를 받는다. 8월 8일(수) 험버트의 일기를 읽은 샬롯 격분하며 편지를 부치러 나가다가 집 앞에서 비일 (Beale)이 몰고 오던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8월 13일(월): 롤리타 하이킹을 떠난다. 8월 15일(수):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오기 위해 캠프 큐로 간다. 험버트와 롤리타는 그 날 밤을 파킹턴(Parkington)에 있는 '도취된 사냥꾼들'(The Enchanted Hunters) 호텔 에서 보낸다. 퀼티 역시 이 호텔에서 묵는다. 8월 24일(일): 파킹턴의 영화관에서 "야성의 힘"(Brute Force)과 "악령"(Posssessed)이 상연된다.

1947-48 8월-8월: 미국 전역을 자동차로 여행한 후 험버트와 롤리타는 비어즐리의 13 타이어 스 트리트(Thayer Street)에 거주지를 정한다.

1948 11월: 롤리타는 교실에서 자주 한숨을 쉰다. 12월: 교장 선생은 험버트에게 롤리타가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연극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를 요청한다. 크리스마스: 롤리타는 기관지염에 걸린다.

1949 1월 1일(토): 험버트는 롤리타의 14회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준다. 5월 20일(추정): 클레어 퀼티는 자신이 쓴 "도취된 사냥꾼들"의 공연 연습을 관람하며 이때 롤리타를 유혹한다. 5월 24일(화): 롤리타는 피아노 교습에 가지 않는다. 5월 27일(금): 롤리타가 다시 교습소에 나타나지 않자 미스 엠퍼러는 험버트에게 전화한다. 5월 29일(일): 험버트와 롤리타는 비어들리를 떠난다. 6월 7일(화): 험버트와 롤리타는 캐스빔(Kasbeam)에 있는 체스트넛 코트(Chestnut Court) 에 도착한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이발소에 가 있는 동안 그곳에서 퀼티는 몰래 만난다. 험버트는 붉은 색 자동차가 계속 뒤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6월 10일-14일: 롤리타와 험버트는 연극 "번개를 사랑한 여인"(The Lady who loved Lightning)을 관람하며 클레어 퀼티와 비비언 다크블룸(Vivian Darkbloom)을 보게 된다.

6월 14일-25일: 콜로라도주의 캠피온(Champion)에 도착하며 그곳 호텔에서 엉터리 전화를 받는다. 험버트가 없는 사이 퀼티는 롤리타와 정구 게임을 한다. 붉은 색 수영복을 입고 장난치는 롤리타의 모습을 보고 험버트는 구토를 느낀다. 6월 27일(월): 엘핀스톤(Elphinstone)에 있는 실버 스퍼 코트(Silver Sper Court)에 도착하 고서 롤리타는 몸이 아파 그곳 병원에 입원한다. 7월 20일(토): 험버트는 60마일을 운전한 다음 구입한 선물을 들고 롤리타를 만나러 병원 으로 간다. 그곳에서 폰더로사 로지(Ponderosa Lodge)라고 인쇄가 된 봉투를 본다. 7월 3일(일): 험버트는 몸이 아파 롤리타가 있는 병원을 찾지 못한다. 7월 4일(화): 오후 2시쯤 롤리타는 퀼티와 함께 병원을 나간다. 7월 5일-11월 18일: 험버트는 폰더로사 로지와 비어즐리 사이에 있는 342개의 여관을 수색한다. 겨울: 퀼티와 헤어진 다음 롤리타는 식당에서 일한다.

1950 1월 1일: 험버트는 롤리타의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자전거와 롤리타의 다른 물건들을 고아 원에 보낸다. 얼마후 험버트는 정신 요양소에 입원 5월까지 그곳에 머문다. 5월: 험버트는 리타(Rita)를 만난다.

1951 9월: 험버트는 방문교수로 칸트립 칼리지(Cantrip College)로 간다.

1952 6월: 험버트는 칸트립 칼리지 체재를 끝내고서 그곳 감옥에 갇혀 있던 리타를 데리고 나온다. 8월: 리타와 함께 험버트는 파킹턴을 방문하여 1947년 8월 기간의 신문을 찾아본다. 8월-9월: 한국전에 참전했던 찰스 홀름즈(Charles Holmes) 전사. 9월 18일(목): 롤리타는 험버트에게 돈을 부쳐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9월 23일(화): 험버트는 콜몬트(Coalmont)로 가서 롤리타와 그녀의 남편 딕 쉴러(Dick Schiller)를 만난다. 롤리타는 자신을 데리고 간 사람이 퀼티임을 알려주지만 험버트를 따라가기를 거절한다. 9월 24일(수): 험버트는 램즈데일로 가서 퀼티의 주소를 그의 삼촌 이보르(Ivor)로부터 알아낸다.

9월 25일(목): 험버트는 권총으로 클레어 퀼티를 살해한 다음 난폭운전으로 구금된다. 11월 16일(월): 험버트는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는다.(험버트는 요양소와 감옥에 있는 56일 동안 수기를 썼다고 말하는데 9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 날짜를 계산하면 56 일이 된다.) 12월 25일(목): 그레이 스타(Gray Star)에서 분만 중에 돌로레스 쉴러(Dolores Schiller) 도 죽는다.

06.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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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9-08-0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 속의 웃음소리> 문체가 좋다길래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중단편인 것 같은데 우리말 번역본은 시중에 나온 게 없나요? 롤리타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라길래 더 궁금하네요.

귀한 책 내신 것 축하드립니다. 서재질을 못해서(아니, 안 해서) 늦은 소식 접했네요. 대박나시길 기원하면서 저도 책 살게요. (샀어요,가 되지 못한 건 너무 늦게 알아 이제야 장바구니에 접수했어요.)

로쟈 2009-08-07 08:40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 박영문고에서 나온 번역본이 있습니다. 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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