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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로트만(1992-1993)은 러시아 최대의 문화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이며 문학연구가이다. 오래전 학원 시절에 작성한 글 하나를 그에 관한 '소개'의 글이 될 만하겠다 싶어서 여기에 옮겨온다. 혹 텍스트이론이나 문화기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소용이 닿았으면 싶다.

로트만의 저작으론 <예술텍스트의 구조>(고려원, 1991), <문화기호학의 이해>(민음사, 1993),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제적인 지명도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기본 개념들과 프로그램 등에 대한 소개는 송효섭의 <문화기호학>(아르케, 2000) 등을 참조할 수 있다(세번째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로트만 전집 중 마지막 권의 표지이고, 마지막 이미지는 강의중인 로트만. 그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에 오래 봉직했다. 아래 사진은 타르투대학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 텍스트에서 텍스트-기계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의 지적 여정을 통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기호텍스트/문화텍스트에 대한 방대한 양의 또다른 텍스트를 남겼다. 그의 텍스트들이 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호텍스트(예술텍스트)[초기]와 문화텍스트[후기]의 의미생산 방식이다. 그에게서 물질계와 생명계의 모든 현상은 기호작용을 통해 언어[기호]로 번역되어 기호계로 편입된다. 그리고 이 기호계는 무엇보다도 의미의 생산과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되는 세계이다. 이 기호계에 편입되면서, 현상은 비로소 현상의 이름에 값하는 의미를 획득하며, 현실의 사태는 사태로서의 규모와 의의를 부여받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미작용이다. 

의미작용이란 의미를 생산하는 작용이다. 여기에 어떤 텍스트가 주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하게 어떤 의미 잠재태, 의미 가능태를 지닌 존재의 현실태일 따름이다. 텍스트는 그저 사물로서 존재한다(로트만의 아들 미하일 로트만은 자신의 아버지를 칸트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기호학의 기본개념인 텍스트가 칸트 철학에서의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사진은 미하일 로트만). 즉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텅빈 기호로 자신의 존재를 변환시켜야 한다[=기호작용]. 그리고서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이름부르는 행위가 바로 ‘읽기’이며, 이 읽기를 통해 텍스트는 자신의 많은 가능태 중의 하나를 현실태로 만든다{=의미작용]. 이러한 일련의 과정, 그러니까 다수의 가능태가 하나의 현실태로 고정되는 가역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 바로 의미생산과정이며, 이것은 의미작용의 결과이다.

 

이때 이러한 과정 속에 놓이게 되는 대상이자 주체인 텍스트는 말의 정당한 의미에서 텍스트-기계가 된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생산되는 특수한 기계이다. 로트만의 기호학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기계이다로트만이 직접 ‘텍스트-기계’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텍스트-기계'는 그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참고로, 텍스트-기계(textual machine)는 에코에게서 빌어온 개념이다). 그래서 그가 텍스트 기호학자라는 말은 이 텍스트-기계의 기계공학자라는 말과 등가적이 된다.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의 지적 경력에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2. 기호와 기호-기능       


기호는 기호작용의 결과로 생성된다. 기호는 기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품이며 원소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다소의 모호함을 내포하게 되는데, 바로 텅비어 있음이 기호의 기본적인 자질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기호는 다만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가능성일 따름이고 준비상태일 따름이다. 그래서 기호는 기호-기능과 별다른 의미차이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U. 에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기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에코가 퍼스(C. S. Peirce) 기호학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고 있는 한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 실용주의적인 사고란 것은 이름껍데기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고를 말한다.

 

이에 대한 로트만의 입장은 조금 차이를 보인다. 그는 텍스트의 자리를 텍스트-기계 이전의 단계에 물자체와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마련해둔 것처럼 기호의 자리를 기호-기능 이전의 단계에 마련해둔다. 에코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호는 본 얼굴이 없고 단지 마스크들만 있는 것이고, 로트만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그런 마스크들의 가족유사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얼굴(혹은 얼굴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미묘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에 대한 로트만의 구분은 이 효과에 속한다. 그것은 기호와 기호-기능의 구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3. 텍스트와 텍스트-기능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표현성, 경계성, 구조성에 의해 규정된다(<예술텍스트의 구조> 참조). 여기서 표현성이란 공간적인 고정화를 말하고, 경계성이란 비텍스트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걸 말하며, 구조성이란 특수하게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이걸 뭉뚱그려서 표현성이라고 한다면, 언어학적 텍스트는 이 표현성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이 언어학적 텍스트만이 텍스트의 전부가 아니다. 로트만은 거기에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개념을 도입한다.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진리성이라는 사회적/문화적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가치론적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체계 속에서 텍스트는 종적 분화를 일으킨다 어떤 기호나 텍스트가 그것 자체로 가치담지적이라고 보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입장과 로트만의 입장 사이의 차이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이 로트만의 텍스트론의 바탕을 이루면서 문화텍스트에 대한 그의 기호학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다(참고로,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에는 로트만 기호학에 대한 해설과 함께 바흐친과의 흥미로운 비교가 제시돼 있다).  

 

텍스트 = 언어학적 텍스트(표현성) +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진리성) 

 

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를 로트만은 텍스트-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기능이 문제되는 지점은 텍스트가 문화적 가치체계의 변동 속에 놓이면서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단일성이 의심받게 되는 지점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의 표현성이 더 이상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될 때, 텍스트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비텍스트 그룹의 숨은 주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텍스트를 사칭하는 일이 발생한다. 텍스트와 비텍스트 간의 동력학은 이런 과정을 문화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견인해낸다. 그리고 이 동력학에 의해 로트만의 형식주의는 특이한 활력을 획득한다. 텍스트적인 하위약호들의 조직화(표현성)를 전제로 한다면(로트만은 '텍스트와 기능'이란 논문에서 마이너스 표현성까지 고려하여 원래는 텍스트를 8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은 네 가지 범주의 텍스트 유형을 만들어낸다.

          

 

     텍스트

    텍스트-기능

   텍스트Ⅰ

        +

         +

   텍스트Ⅱ

        +

         -

   텍스트Ⅲ

        -

         +

   텍스트Ⅳ

        -

         -

 

먼저 텍스트Ⅰ은 텍스트의 언어학적인 의미론적 통사론적 구조와 메타언어학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텍스트Ⅳ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로서 비텍스트, 즉 텍스트의 예비주자이다. 텍스트Ⅱ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더 이상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로트만이 들고 있는 것은 1830년대 러시아 시문학이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던 이 시기에 시(=텍스트)는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고 따라서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 시기의 산문은 텍스트Ⅲ에 속하게 되는데, 새로운 산문 장르가 가치담지적이라는 당대의 믿음 때문에 1830년대 산문문학은 텍스트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네 가지 텍스트 유형은 당연히 고정적이거나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언어학적 텍스트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기능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자리바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들이 양립하고 있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텍스트일지라도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이나 문화적 선입견에 따라 서로 다른 텍스트 유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4. 피에르 메나르의 경우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보르헤스 전집2: 픽션들>, 민음사, 1994, 67-89쪽)는 나보코프와 동갑내기로서 형이상학적 주제(혹은 문학이론)를 서사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는 호르헤 보르헤스(1899-1986)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메나르(허구적 인물)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일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썼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시 쓰기, 베껴쓰기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많이 이해되는 이 단편을 로트만의 텍스트/ 텍스트-기능 범주를 이용하여 다시 읽게 되면, 이 작품이 문학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문제 또한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언아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주장하는 서술자는 이어서 직접 한 대목을 비교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키호테> 제Ⅰ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메나르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 또한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아주 명명백백하다. 메나르의 고어체-무엇보다도 외국어 문체적인-는 작위적인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따.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선구자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메나르의 텍스트 간의 언어학적 텍스트, 즉 표현성은 동일하다. 하지만 메나르가 3세기 후에 다시 (베껴)쓴 텍스트는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이것을 텍스트 개념만 가지고 이해하려 하면 패러독스에 부딪치게 된다. A=A이면서 A≠A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률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기능 개념을 도입하여 읽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텍스트가 평범한데 비해서 메나르의 것은 놀랍다는 서술자의 주장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두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가치체계의 차이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두 텍스트는 가치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텍스트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사이의 불일치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베겨)쓰기’가 아니라 ‘읽기’이다. 이 읽기는 텍스트를 재현하는 모방론적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를 생산하는 생성론적 읽기이다.(이런 관점에서 [메나르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서술자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없고 텍스트-읽기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로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텍스트-읽기[현상]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텍스트[물자체]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의 칸트주의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호이론 체계에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요구는 중심적인 것이다. 그가 텍스트-기계의 의미생산에 관심을 두면서도, 동시에 기호활동의 목적이 일정한 내용[전언]의 전달에 있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그의 이러한 입장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강조하는 R. 바르트 기호학의 쾌락주의와 의미전달(communication)을 강조하는 U. 에코 기호학의 실용주의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것이다. 이걸 규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이 점은 “(로트만의) 예술텍스트 분석이 결국 예술어를 비예술어로 번역함으로써 예술텍스트의 어떤 일정한 의미, 명백한 의미를 알아내고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바흐친과 달리 예술텍스트 구조분석에 로트만이 전적으로 시텍스트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흐친 또한 산문텍스트만 연구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과연 이 두 이론체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약적인 준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칸트철학과 헤겔철학이라는 두 비공약적 전통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경우 (신)칸트주의 입장과 헤겔주의의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 을유문화사, 1993 참조). 어쨌거나 예술텍스트의 번역가능성은 로트만 기호학의 기본 전제이다.(아래 사진은 아내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민츠 여사와 함께 한 만년의 로트만.) 

5. 로트만-기계와 한국 현대시 

한 이론의 이론으로서의 생산성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이론의 번역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로트만-기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이론이 한국 문학, 특히 한국 현대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의 시텍스트 분석 개념과 방법이 우리 나라에 일부 소개된 바 있지만(유재천, '로트만의 시의 기호학', <현대시사상>(1991년 여름호) 등), 아직 실제적인 분석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어(교착어)와 러시아어(굴절어) 사이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시 장르 자체가 언어 기호의 가능성(특히 기표적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한 언어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정초된 시이론이나 분석방법이 다른 언어에 그대로 적용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트만의 텍스트/텍스트-기능 범주는 언어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메타언어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적용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한국 현대시, 1980년대와 90년대의 몇몇 시인의 경우를 가지고 로트만 텍스트론의 적용가능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대 초반은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시인들이 활동했고 다량의 시들이 생산됐던 시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의 시대’의 대표주자들이 자신의 시를 의식적으로 반시 혹은 비시로서 규정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것은 80년 광주 경험 이후, 모든 현실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확인하고자 했던 젊은 시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과 어법을 파괴와 해체와 두드러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시의 텍스트성(표현성)이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이상, 오히려 반텍스트성, 즉 텍스트에 대한 파괴와 해체가 시의 시다움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①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②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지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③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①은 이성복의 '그해 가을'(부분), ②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전문), ③은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부분)이다(보다 더 형태파괴적인 시들이 있지만(특히 황지우의 경우), 인용의 번거로움 때문에 여기서는 ‘모범적인’ 시들을 골랐다. 참고로 이들의 데뷔시집은 이성복, <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이다).

 

이 시들에서 표출되고 있는 환멸, 증오, 풍자, 연민 등의 정서는 이전 세대의 시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서정시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것도 시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좋은 시는 정서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지만 이런 공격성(=전투성)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징표였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시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우리는 텍스트-기능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바, 이들은 기성의 가치와 체제에의 저항이야말로 시의 존재의의이며 기능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시대의 문화적 컨텍스트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보다는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 즉 텍스트-기능을 보다 더 많이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후반(그리고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몇몇 시인들의 시에도 시/비시[텍스트/비텍스트]의 문제틀은 텍스트-기능과 관련하여 적용될 수 있다. 장정일, 유하, 기형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④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추가루 ¼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⑤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⑥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④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부분), ⑤는 유하의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부분), ⑥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전문)이다(참고로 이들의 데뷔작은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유하, <무림일기>(1989),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 유고시집)이다. <무림일기>의 이미지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대신 띄운다).

 

④, ⑤에서 특징적인 것은 규범문화 속에서 비텍스트에 속하는 요리책과 무협지의 언어들이 시어로 편입되면서 텍스트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화에는 사회적 인준의 절차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 ④를 표제시로 한 시집이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⑤의 연작시 또한 정통 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텍스트-됨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비시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시적인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 것인데, 비텍스트의 마이너스적 가치가 오히려 플러스적인 가치로 전화된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⑥은 시의 내용에서 그런 마이너스적인 가치가 시적인 질감을 얻게 된 경우이다. 비교적 전형적인 시텍스트의 형식과 어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비관적인 음조의 자기통찰은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때문에 평자에 따라서는 “시가 아니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의 새로운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인의 경우 90년대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시인들의 작업 배경에 바야흐로 소비 사회의 도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오래 음미하면서 읽어내는 시가 아니라 한번 읽고 재미보는 시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문학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앞에서 열거한 세 시인의 경우는 기존 문단의 순수시(이건 고정관념이지만)와 새로 등장한 소비성 시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특히 ④와 ⑥은 베스트셀러 시집이었다). 이 점은 8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지식인-시인, 투사-시인들과 비교될 만한 것이다. 이후 90년대 중․후반에도 여전히 많은 시들이 씌어지고는 있지만 앞에서 열거한 80년대 초반, 후반 시인들의 시적 인식틀과 문제틀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시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물론 이러한 진단은 '과거'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 새로운 시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므로. 소위 '다른 서정'의 '미래파'들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텍스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컨텍스트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어떤 시가 새로울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텍스트-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로트만 텍스트론의 관점을 한국 현대시에 적용하여 본 바, 시에 대한 거시적인 준거점의 확보에 그의 이론이 잘 원용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말끔하고 정치한 분석은 다른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6. 재약호화와 텍스트-기능


로트만의 기호이론은 약호화(coding)와 재약호화(recoding; transcoding)를 구분하는 바('재약호화'는 '코드변환'으로도 번역된다), 이 또한 그만의 특징이 된다. 약호화, 즉 일차적인 약호화는 기호의 기표 체계와 기의 체계 사이의 등가적인 관계 형성이다. 이것은 달리 기호화라 말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기호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는 이에 비해 광범위한 의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맺음이다. 이것은 약호화의 정태적인 이항 모델과대비되는 동태적인 컨텍스트 모델을 구축한다. 여기서 이항 모델이 안정된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된다면, 컨텍스트 모델은 다의미성의 모태가 된다.

 

이 컨텍스트 모델에서 기표(표현층위)와 기의(내용층위)는 교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묶음[다발]에서 만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 기표와 기의 주자들은 댄스장에서 만난다. 이들에겐 어떤 정해진 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댄스 레퍼토리에 맞는 짝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이 댄스 레퍼토리가 바로 다양한 의미 컨텍스트이고 문화적 컨텍스트이다. 따라서 이 레퍼토리에 대한 고려 없이는 기호의 의미생산 메카니즘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어째서 그런 짝이 맺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 즉 이차적인 약호화란 것은 텍스트 구조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 장 속에서, 마치 댄스 레퍼토리에 따라 새로운 짝들이 맺어지듯이, 구축되는 새로운 관계쌍을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예술텍스트가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도 다른 텍스트들보다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먼저 텍스트 내적으로는, 운율적 층위에서, 어휘적 층위에서, 그리고 통사적 층위에서 예술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의 다양성이 한정된 구성소를 가지고서도 다양한 의미조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또 텍스트 외적으로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중에 개입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텍스트를 주무르게 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는 그 손때만큼이나 확장되게 된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예를 들어보자.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김상미의 '아줌마'(<시와 시학>(1997년 봄호), 55-56쪽)란 시의 1연이다. 이 시에서 ‘아줌마’란 단어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항렬의 여자”라거나 “동년배 혹은 젊은 남의 부인을 높여 정답게 부르는 말”로서의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인 뜻만 가지고 시텍스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오지 않는다. 이 시텍스트 속에서의 ‘아줌마’는 그동안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가(그래서 아줌마들끼리는 “은어”로 소통한다) 비로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 이 시대 한국 주부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아줌마이다(이 시는 한국시사에서 ‘아줌마’란 제목을 가진 최초의 시이다). 말 그대로 아줌마들의 손때가 묻은 ‘아줌마’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 ‘아줌마’ 대신에 ‘아저씨’나 ‘아가씨’란 단어를 대입시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저씨/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은 아저씨/아가씨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이 결코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 만큼의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아줌마’의 경우 컨텍스트적 모델로서 재약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기호는 텍스트-기호가 된다.

 

기호는 의미작용 과정에서 텍스트가 되려는 성향을 갖는다. 예술텍스트에서의 기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기호는 회화적인 이미지, 어떤 공간적인 이미지가 그렇듯이 단의적인 의미에 저항한다. 그걸 로트만은 의미(론적) 면적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때의 면적이란 것은 여러 묶음 체계가 교차하는 공간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현실화되는 공간이다(라흐만에 의하면, 로트만의 '텍스트-기호'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대화성’이나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개념과 등가적이다). 

 

이 공간은 복수적 약호화에 의해 그 규모가 유지된다. 가령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라고 할 때, 13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13이란 숫자에 교차하고 있는 많은 문화텍스트적 의미가 다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 의미의 테두리만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그걸 언어로 테두리 지으려고 할 때와 비슷한 사정이다.

 

문제는 특히 예술텍스트의 경우, 텍스트-기호의 가능성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텍스트-기호 이전 단계에 기호의 자리를 인정해야 하는 필요성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로트만 기호이론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두 단계로 이분화된다(그의 견고한 이분법!). 이차모델화가 그렇고, 재약호화가 그렇고 텍스트-기능이 그렇고 텍스트-기호가 그렇다. 이러한 형식적 이분화가 로트만 기호학의 균형감각을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특이한 것이 이런 이분화가 동태적인 모델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그의 기호학은 이상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7. 이제 시작인 결말


앞에서 대략 로트만 기호학의 특징적인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오해)의 몇 단락을 늘어놓았다. 문학/문화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은 이미 20세기 후반의 한 지배적인 학적 패러다임이 되었고, 톰슨(E. M. Thompson)의 지적대로, 자연과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정보이론)과 인문(과)학에서의 기호학(=구조주의)은 통합적인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양대 지적 조류이다. 이 두 조류가 유행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과학-정향성(그리고 새로운 과학/통합과학)에의 요구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정초된 섀넌(C. E. Shannon)과 위너(N. Wiener)의 커뮤니케이션/정보 이론과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학제적 모델이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는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또한 이러한 방법론사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트만의 동료 퍄티고르스키는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모스크바-타르투학파는 인문학에 ‘정밀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은 ‘현대적인 (과)학자’를 자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자신들의 학적 태도에 특히 20세기 중반 비엔나 학단의 (논리)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스크바-타르투학파가 ‘2차 모델화 체계’를 기호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과학의 언어를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카르납(R. Carnap)을 따른 것이다(이때 철학은 언어분석이 된다). 이러한 대상 규정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카르납이 하이데거(M. Heideggar)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리)실증주의를 나치즘과 파시즘, 즉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이념(=논리)으로서 제시한 사실은 이 시기의 과학-정향성, 즉 합리주의에 대한 요구가 방법론적인 요청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요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로티(R. Rorty)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적이다. “영어권 철학에서 1930년대 이전에는 과학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1945년경에는 그것이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하이데거와 카르납 간의 논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르납은 반나치즘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적 자유주의 등을 자연과학의 위상과 연합시켰으며 라이헨바흐, 헴펠, 파이글 등과 더불어 과학의 본질 이해는 곧 나치즘의 비합리성 이해에 중요하다는 레토릭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즉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곧 나치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고 간주되었고, 확증의 논리 등을 탐구하는 과학철학은 철학의 중심 영역이자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실용주의와 과학과 기술', <과학사상>(1997년 봄호), 190쪽)

 

로트만 기호학의 과학-정향성 속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로트만이 자신의 문화유형론 속에 20세기 러시아 문화유형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이너스 정치참여로 볼 수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소비예트 권력에 의해 중단된 러시아 형식주의의 학문적 유산과 과학적 정신을 암묵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문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신)칸트주의(neo-Kantian Formalist position)와 헤겔주의(Hegelian Idealism) 사이의 갈등의 한 양태이다. 이러한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한다면, “과학=실증주의=합리주의=형식주의=형식논리=(진리 유보적) 칸트주의 대(對) 이데올로기=역사주의=비합리주의=내용주의(사회학주의)=변증법=(진리 담보적) 헤겔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가지고 로트만 기호학의 개념체계에서 텍스트/텍스트-기능 개념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구상이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말미암아 문장 대신에 몇 개의 단어만 나열되어 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나마 이런 형국에도 몇 가지 오해가 개입되어 있을 테지만, 다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점들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워밍업은 끝난 것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기호학을 공부해볼 만한 시간이다.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06. 01. 16.

 

 

P.S. 참고로, 왼쪽은 영어권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로트만 연구서인 앤드류스(E. Andrews)의 'Conversations with Lotman'(토론토대학 출판부, 2003)이며, 오른쪽은 로트만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영역선집 'Universe of the Mind'의 신간본(인디애나대학 출판부, 2000). 이 영역본의 서문을 움베르토 에코가 썼으며, 책은 국역본 <문화기호학>의 대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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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networking 2007-12-3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을 읽고 있는 중이어서 위의 글을 찾게 되어 잘 읽었습니다(다른 글들도 그렇구요.)

아, 그런데 "7. 이제 시작인 결말" 부분에 정보이론과 기호학을 통합적 방법론이라고 이른 "톰슨(E. M. Thompson)"에 대해 조금만 더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저의 관심의 하나는 정보이론과 기호학이 커뮤니케이션을 이론화하는 차원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느냐인데,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이 바로 그렇게!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고, 말씀하신 예의 "방법론사의 맥락"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톰슨씨가 그런 얘기를 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꼭 톰슨이 아니어도 방법론사의 맥락에 참고할 것이 있을지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7-12-30 16:52   좋아요 0 | URL
기억엔 대학원시절에 쓴 발표문이고 '톰슨'은 그때 읽은 한 논문의 필자입니다. 출처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별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에 관한 영어권 입문서/연구서를 한권 읽어보시고 참고문헌을 좀 훑어보시면 맥락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unnetworking 2007-12-3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움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저로서는) 계속 공부해볼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 듯 합니다. 정보이론 등의 자연과학의 방법론과 기호학 등의 인문과학을 충돌시켜보는...
 

다음학기 강의계획서를 올리기 위해 PC방에 왔다가(비가 온다는 핑계로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예전의 쓴 글들의 '편집' 작업만 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학의 학사정보 화면이 로그인 되지 않아 그냥 죽치고 않아 있는 신세가 돼버렸는데, 또 놀면 뭐하겠는가? 창고 정리라도 해야지. 역시나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인데,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과 레르몬토프의 시 '나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한 몇 마디 코멘트이다. '고독에 대하여'란 제목을 그냥 새로 붙여보았다. 아래의 글을 쓴 건 재작년 가을이고 러시아 TV에서 방영되던 <아비정전>을 보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가며 쓴 것이다.  

갑자기 ‘회고적’ 정서에 물든 건, 지금 STS채널에서 왕가위의 <아비정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열혈남아>가 나왔고, 그 전에는 <타락천사>가 나왔었는데, 당분간 왕가위의 영화들이 나올 예정인가보다, 하고 다음주 TV프로그램을 보니까, 아니다. 다음주에는 리안의 <와호장룡>이다.

<아비정전>은 내가 최초로 본 왕가위의 영화이며, 내가 단번에 매혹된 영화이다. 아주 옛날 대학가에서 하숙하던 시절에 동네 비디오점에서 주말이면 비디오와 함께 테이프 5편을 한꺼번에 빌려다가 밤새 보곤 했었는데, 어느 주말에 빌려온 테이프 중 하나가 바로 <아비정전>이었다. 나는 영화를 두 번 연거푸 봤는데, 이후엔 ‘왕가위의 모든 영화’이다. 그리고도 매년 생일쯤 되면 ‘청승맞게도’ 비디오방에 혼자 가서 이 영화를 봤다. 어떤 때는 동행이 있기도 했지만, 곧 다시 혼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이 테이프를 아예 집에 소장하고 있다(아이러니컬하게도 소장한 이후에는 한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열혈남아>는 <아비정전> 이후에 찾아 본 영화이다.

<중경삼림> 이후에 왕가위는 ‘대중화’되었기 때문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만의 왕가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비정전>뿐이라고 해야겠다. 이후에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을 많이 읽었고 거기에 대부분 수긍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러한 ‘상징적’ 읽기 이후에도 남아있는 어떤 잔여물이 있다. 지젝은 타이타닉호의 잔해를 ‘상징적인 중층결정’에 의해서, ‘은유적인 의미’에 의해서 다 설명될 수 없는 “라캉적 의미에서의 사물(Thing)”이라고 불렀지만,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잔여물이다.



영화에서 장국영이 '발 없는 새'의 우화를 얘기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런 ‘거대한 잔해’도 남기지 않고 그냥 바람처럼 너울거리며 지나가버린다. 즉, ‘사물’ 대신에 거기에 있는 건 나르시시즘적인 맘보춤이고 허물(虛物; Nothing)이다(‘허물’은 ‘없지만 있는 것’이란 의미에서 ‘증상’에 대응한다). 해서 모성, 혹은 어머니-타자(mOther)의 부재에 관한 영화(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혼자가 된다. 즉 그들은 어떠한 2자적 관계도 형성하지 못한 채 모두 울며 겨자 먹기의 나르시시스트들로 남는다) <아비정전>의 잔여물은 ‘물질적인 잔여물’이 아니라 허무/허물을 채우는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드디어, 양조위가 구두를 닦고 손수건을 양복에 꽂고 기름 바른 머리를 빗어 넘긴 다음에 외출했다(<아비정전>은 미완의 영화이다). 즉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타이틀이 올라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가버린다. 영화의 시작에서 장국영과 장만옥이 잠시 함께 했던 시간처럼(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 시간에 대한 기억 또한). 그 장국영도 “발 없는 새”처럼 어느 샌가 우리 곁을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아비정전>에는 “왕가위적 의미에서의 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으며, 그것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감정적인 잔여물’이다. 요컨대, 왕가위의 영화들은 우리의 고독과 불가피한 나르시시즘의 증상이다.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왕가위의 영화들은 모두 외로움에 대한 영화이고 고독에 대한 영화이다(이건 왕가위의 ‘전속’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화관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들은 ‘해피 투게더’의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가 당시에 유행하던 ‘홍콩영화’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면(유덕화와 장만옥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남자들/‘형제들’ 간의 ‘의리’였다), 두 번째 영화인 <아비정전>은 온전하게 왕가위만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고독의 기원, 이자적 관계(=투게더)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외상(=트라우마)이 놓여 있다. 그것은 모성의 부재, 혹은 모성과의 단절이다.

알다시피, 엄마와 아이간의 이자적 관계는 3자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상징적 정체성 이전에, 정서적 안정감 혹은 정서적인 정체성이 형성되는 기본관계이다. 따라서 엄마와 아이간의 안정적인 관계의 형성, 기본적인 애착관계의 형성은 이후의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인 안정감/신뢰감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자 바탕이 된다(즉 이자적 관계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 그런데, 엄마의 (너무 이른) 상실은 이러한 바탕을 미처 제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후에 아이는 상실한 이자적 관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반복적인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그것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하며 불안해 하게 되는 것. <아비정전>의 영어 제목은 인데, 이때 ‘사나운’이란 뜻의 ‘wild’는 다르게는 ‘길들여지지 않는’이란 뜻이다.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은 멀쩡하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모두들 ‘길들여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그건 정작 필요할 때 아무도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가 단지 유행/겉멋으로서의 ‘고독’을 넘어서는 대목이 있다면, 나는 그의 영화에 드리워진 이러한 외상적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나는 실제로 그가 모성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에 그럴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타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고독의 주제화는 문학에서 상당히 보편적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유리 레르몬토프(1814-1841)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이란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시인 또한 젊은 나이에 결투로 죽었는데, 그의 문학적 유언이라 할 만한 시는 생애의 마지막 해에 씌어진 '나 홀로 길을 나선다'(1841)이다(이 시에 가락을 붙인 곡이 우리 드라마에서 몇 차례 주제가로 사용됐었다. “브이하주- 아진- 야 나 다로-구”라고 느리게 시작하며 서정적인 음색의 여가수가 부른다. 이 노래만큼은 여가수들이 더 어울린다). 이 시를 러시아어와 함께 옮기면 이렇게 된다.

Выхожу один я на дорогу,
Сквозь туман кремнистый путь блестит,
Ночь тиха. Пустыня внемлет Богу,
И звезда с звездою говорит.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 속으로 자갈길이 빛나고,
밤은 고요하다. 황야는 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별들은 별들과 속삭인다.

В небесах торжественно и чудно!
Спит земля в сиянье голубом...
Что же мне так больно и так трудно?
Жду ль чего? Жалею ли о чём?
하늘은 장중하고 아름답구나!
대지는 푸른 빛 속에 잠들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Уж не жду от жизни ничего я,
И не жаль мне прошлого ничуть;
Я ищу свободы и покоя!
Я б хотел забыться и заснуть!
이미 나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와 평온을 찾고 있다!
나는 모든 걸 잊고서 잠들고 싶다!

Но не тем холодным сном могилы,
Я б желал навеки так заснуть,
Чтоб в груди дремали жизни силы,
Чтоб, дыша, вздымалась тихо грудь;
하지만, 무덤 속의 차가운 잠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잠들었으면,
생명의 힘이 가슴 속에서 조곤조곤 잠들어,
숨쉴 때마다 조용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게.

Чтоб всю ночь, весь день мой слух лелея,
Про любовь мне сладкий голос пел,
Надо мной чтоб, вечно зеленея,
Тёмный дуб склонялся и шумел.
밤새도록, 하루 종일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달콤한 목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내 위로는 영원히 푸르른,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수군거렸으면.



전체 5연의 이 시는 1841년 5월에서 6월초에 씌어졌다.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 7월 15일이므로 죽음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1연에서부터 눈에 띄는 것은 ‘혼자/홀로’라는 서정적 화자, 레르몬토프의 자의식이다(러시아어의 ‘고독’을 영어로 옮기면 ‘oneness’가 된다. 나는 왕가위 영화의 중핵이 이 ‘Oneness’라고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러한 자의식은 그를 둘러싼 자연이 서로 화합하고 호응하는 시간에도 혼자만의 무거운 상념으로 이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이러한 상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으며 자연과의 불화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2연의 4행, 그리고 3연에서 보듯이, 서정적 화자에게서 기다림의 대상으로서의 미래와 후회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라는 시간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시간은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전락이나 비약 또한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와 평온의 상태로서 그가 지향/소망하는 것은 ‘잠’이다. 이 잠의 내용을 꿈꾸는 것이 그에게서 상상력이 갖는 몫이다.

‘하지만’이라는 4연의 서두가 말해주듯, 그의 잠은 죽음을 상징하는 일반적인 잠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무덤 속 차가운 잠’(=죽음)으로서의 잠은 삶의 중단을 전제로 하는 죽음 이후의 다른 삶, 다른 시간의 체험이지만, 이 시의 4-5연에서 묘사되는 잠은 삶의 연속으로서 현재의 시적 자아가 더 확충되는 경험이다. 즉 여기서 ‘나’와 자연의 조화는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나’라는 자의식의 소멸을 통해서 자연과 합일/통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나’에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시에서의 상상력은 자연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자아의식의 확대/심화에 봉사한다(아래 사진은 모스크바에 있는 레르몬토프 박물관). 

Lermontov House-Museum, Moscow, Russia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자궁회귀로의 충동 혹은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4연에서 생명이 가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잠이란 (모체의 자궁 속에서의) 태아의 잠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5연에서, 밤낮으로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어머니이며(시인 레르몬토프가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목소리뿐이었다), 동그만 ‘나’의 무덤/자궁 위에 있는 ‘울창한 참나무’는 아버지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궁 속 ‘어린아이’이다. 다만, 이 ‘어린아이’는 실제의 태아와는 달리 ‘나’라는 자기의식을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즉 그는 자신이 즉자로서의 태아임을 의식하고자 하는, 행복의 극대치를 경험하고자 하는 대자(‘나’)이다.

물론 이러한 즉자-대자적 존재는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하며, 이 상상 속의 ‘나’와 대조되는 것이 1연에서 혼자 길을 나서는 불행한/무거운 현실의 ‘나’이다. 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일찍 여읨으로써 자신이 소망하는 행복의 결여와 일찌감치 마주하게 된 고아 레르몬토프의 형상이다(시인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생각건대, 엄마들은 아이를 놔두고 일찍 죽으면 안된다. 아이가 나중에 시인이 못 되더라도 말이다(아래 사진은 레르몬토프가 결투로 숨진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

06.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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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르몬토프의 고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02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twoshot 2006-01-15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가위, 좋은 의미와 나쁜의미에서 그는 똥폼의 대가인 거 같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그러니까 영화의 본질을 눈치 챈)이 있지만 허전합니다. 있는 "척"하는 거의 대가.
2046은 그의 정점인 거 같습니다. 어디로 가려나...왕가위..

로쟈 2006-01-1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세의 <형사>를 보다 보면, 왕가위 '똥폼'도 얼마나 드문 것인가를 되새기게 됩니다. 영화의 본질이 '있는 척하는 거'란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있는 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전제에서...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띄운 글 '로망스와 포르노를 구별하는 법'을 '베이스캠프'용으로 다시 정리한다(주로 프랑스 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것이다). 관련 참고문헌들도 몇 권 소개하면서(내가 무슨 전문가인가?).

최근 미국의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1972)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영화 '인사이드 딥 스로트'(2005)가 어제 개봉된 걸로 아는데, 이 참에 포르노그라피의 미학과 사회학/정치학을 두루 공부해본다면 좋겠지만 이목은 있고 시간은 없는 관계로 '복습' 정도 하는 걸로 참아두기로 한다. 다만, <목구멍 깊숙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애프터 딥스로트' 정도의 제목이 될 것이다.  


 

 

 

 

영화 얘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의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에 대해 한 마디(*'한마디' 치곤 너무 길어지지만).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은 매주말마다 채널 ‘엔떼베’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들을 방영했다(한국에서는 그의 영화제도 개최된바 있다). 나는 그의 영화라면 <스위밍> 밖에 본 게 없었는데, 그걸 포함해 서너 편의 영화를 더 보면서, 이 감독 역시 ‘아버지’가 없는 세계, 혹은 여자들만 많았던 가정 출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그의 최근작은 <8명의 여인들>이다!). 그의 장기는 중년여성의 심리묘사로 보이는데, 그런 걸로 포섭되지 않는 ‘튀는’ (코미디)영화들도 없지 않았다. 이때 ‘튄다’는 것은 ‘아버지의 결여’가 낳는 징후이다. 하지만, 오종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8명의 여인들>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다. 그건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로망스>로 잘 알려진 카트린 브레야(Catherine Breillat; 1948- )는 올해(2004년) 신작 <지옥의 해부(Anatomie de l’enfer)>(2004, 74분)를 내놓았는데, 러시아에서는 <포르노크라시>로 개봉되었고, 이미 비디오CD로도 나와 있다(*국내용 제목은 <지옥의 체험>인 듯하다). 영화는 브레야의 소설 <포르노크라시(Pornocratie)>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므로, ‘포르노크라시’란 제목이 억지는 아니며, 여기서도 그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Anatomy of Hell

원제의 ‘지옥’은 영화로 미루어보건대, 여성 성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남녀관계의 은유이다. 이 영화는 지난주에 이곳의 한 TV채널에서 브레야의 <로망스>를 다시 보고 브레야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음반/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CD가 눈에 띄길래 산 것이다. <로망스>(한국에서의 <로망스>는 노출장면이 다 지워진 말 그대로 <로망스X>였지만)보다도 더 ‘엽기적인’ 노출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영화가 소개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지만(모스크바에서도 이번 6월에 한 극장에서 밤 10시 이후에만 한 차례씩 이틀 상영하고 말았다). 혹 조만간 성인영화관에서의 상영이 허용되더라도 흥행할 영화는 전혀 아니다. 보기에 아주 불편하므로.

‘노출’에 덧붙여. 얼마 전, 한국의 인터넷 뉴스에는 요즘 드라마에서의 ‘노출’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식의 ‘선정적인’ 뉴스가 떠서 클릭해보았다(당신이 이 글을 클릭하는 것처럼). 김미숙, 장나라가 드라마에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고 (혼자서) ‘흥분하고’, 한고은이 드라마에서 한쪽 가슴에 문신을 새겼다고 (혼자서) ‘분개한’ 기사였다(물론 이런 기사들의 노림수는 순전히 ‘클릭’에 있지만). 한국은 인터넷에서 음란(포르노) 사이트의 비율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일 텐데(그게 인터넷 강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러한 ‘가장(假裝)’ 혹은 ‘연기’가 통용된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우스꽝스럽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다보는 ‘시선’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TV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덜 선정적’이지만, 즉 ‘건전’하지만(혹 아랍권이 우리보다 더 ‘건전’할는지?), 그걸 바라보는 국민적 ‘시선'과 '응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다(누드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고 뛰어드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대상과 시선이 서로 보충하는 식으로 어느 나라건 ‘선정성의 총량’은 보존되는 것인지?

다시 브레야. 이곳의 공연전문잡지 <아피샤>(‘공연 프로그램’이란 뜻)의 소개에 따르면, <포르노크라시>는 <섹스는 코미디다>(러시아에는 <친밀한 장면들>이란 제목으로 출시, 국내에도 출시돼 있다.맨왼쪽 이미지, 두번째 이미지가 러시아판), <로망스>에 이은 완결편이다. 이걸 3부작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상으론 (섹스에 대한) 코미디, 로망스, 포르노가 된다. 나는 그녀의 ‘코미디’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나중에 러시아 TV에서 봤다. 일종의 메이킹 필름 형식의 영화이다), ‘로망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단, ‘로망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안 벗고 나오고, 하나는 벗고 나온다는 것인가?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알베로니를 따른 것인데), ‘포르노그라피’가 남성의 장르이고,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하이틴 로맨스’가 여성의 장르이다(혹은 <도쿄 데카당스> 남성의 장르라면 <도쿄 타워>가 여성의 장르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거의 읽어본 게 없어서 여기선 장르의 시학을 구성할 수 없지만, 내 의견으로 <로망스>는 셋이 나오고, <포르노>는 둘이 나온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영화 <로망스>에 나오는 셋은 누구인가? 여주인공과 그의 남자친구, 그리고 중년의 교감선생?(정확하게 ‘교감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으론 그렇게 기억된다.) 아니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로맨스는 없다!’ 내지는 ‘로맨스, 엿먹어라!’란 뜻의 <로망스X>이다(그러니 이 또한 교육용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 <로망스>는 ‘로맨스’인데, 그것은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로망스’와 ‘포르노’를 가르는 기준이다. 거꾸로 말해서, 포르노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부재이다(물론 형식적인 필수조건은 남녀의 섹스가 나온다는 거지만).

해서, 아무리 영화에서 남녀의 섹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로망스’가 아니될 수가 없다(패밀리 로망스! 참고로, 그 경계에 있는 영화가 스페인 영화 <패션 투르카>(1994)이다). 따라서, 로맨스적 상상력이란 로맨틱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3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다(이 3자적 관계의 드라마 버전이 3각 관계인바, 3각 관계가 아니라면 드라마가 진행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거꾸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함축한다. 거기엔 ‘경건한 포르노’와 ‘적나라한 포르노’가 있을 따름이다(포르노중독자들은 ‘소프트코어’와 ‘하드코어’로 구분하겠지만). ‘경건한 포르노’? 그건 보여지지 않는 포르노를 말한다. 즉 마이너스 포르노, 상상 속의 포르노이다. 예수 가라사대, 마음에 음심(淫心)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姦淫)한 것과 다름 없다고 했으니, 상상 속의 ‘경건한 포르노’도 포르노이다.

그런데, 언제 이 포르노로부터, 포르노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가? ‘아이’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질 때이다. 그 ‘아이’가 ‘행복한 로망스’를 낳는지, ‘끔찍한 로망스’를 낳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하여간에 포르노 배우에게서 ‘질외 사정’이 절대 수칙인 것은, 2자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로 이 제3자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질내 사정’은 포르노적 판타지를 잠식하는 (실재적) ‘악몽’이기에...

브레야의 영화 때문에, ‘포르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지만, 내가 포르노 영화에 ‘입문’하게 된 건 ‘남들’ 보다 늦은 대학 1학년 때이다(포르노 사진(=빨간 책)이나 만화는,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접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한 건,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선 동료 고3 학생들이 단체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나는 주로 공부만 했다), 입시공부에 바쁜 와중에 대거 반성문을 쓰는 사태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같이 본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내라는 지도과 교사들의 닦달에 리스트가 108명에 이르렀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들렸는데, 이후에 이 사건은 (포르노란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108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사건의 핵심 33명이 견책을 받는 걸로 일단락되었는데, 하도 오래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하여간에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당시에는 대학주변이 여관마다, 그리고 일부 심야다방마다 포르노 ‘영업’을 했다. 포르노 비디오를 예사로 틀어주었던 것이다(낮에는 최루탄, 밤에는 포르노!). 그래서, 동문회 같은 모임을 갖게 되면, 먼저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운동권 노래를 ‘학습’하며 시국에 대해서 자못 비장한 각오들을 다지다가, 한두 차례 ‘오바이트’를 하고는 우리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핑계로 여관에 단체 숙박을 했다. 그리고는, 여럿이 함께 자못 충혈된 눈으로 취기와 피곤을 무릅쓰고, 포르노 영화를 새벽까지 보다가(가끔은 아침에 한편 더 틀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가, 여관집 청년이나 주인 아줌마한테 핀잔을 듣기도 하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다(당시 포르노는 룸살롱의 대학생 버전인데, 포르노와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얘기하겠다, 고 했지만, 나는 그냥 '전문가들'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여균동 같은 80년대 ‘운동권’ 출신 감독이 <포르노맨> 같은 ‘한심한’ 영화를 만든 데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외에도) 그런 대학가의 ‘일상’이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포르노’는 검열당해서 <맨?>(1995)이란 제목으로 개봉됐었다. 문제는 그가 포르노를 ‘리얼리즘’이 아닌 ‘판타지’로 접근하려 한 데 있다. 그러니까 <포르노맨>의 문제는 정작 거기에 ‘현실’에 대한, ‘일상’에 대한 아무런 ‘포르노’도, 혹은 ‘폭로’도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중반 대학가 여관이나 심야다방의 포르노 ‘영업’만 영화로 재현해도 ‘포르노’와 ‘정치적 리얼리즘’, 모두 성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때문에 그도 저도 아닌 <포르노맨>은 결국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커녕 <파리애마>(1988)나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1985)보다도 못한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관념적인’ 감독이 이후에 <죽이는 영화>로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미인> 같은 ‘더 한심한’ 영화를 찍은 걸 보면(플레이보이의 ‘판타지’ 시리즈가 차라리 더 정직하다), ‘가방끈’이 긴 것과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여감독은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같은 이론서들의 역자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는 ‘배우’로서 더 뛰어나다.

 

 

 

 

80년대 대학가의 ‘포르노적 일상’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가장 정치적이었던 년대가 가장 포르노적이기도 했다는 건 역설이 아니다. 포르노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또 가장 포르노적이기 때문이다. 불임(不妊)의 정치가 포르노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또 포르노를 ‘대학생들’보다도 더 좋아하는 건 ‘군인들’(속칭 ‘군바리들’) 아닌가? 그런데, 우리 주변의 이 포르노적 일상이 언제 사라졌는가? 소위 ‘민주화’ 이후이다(민주화는 포르노의 적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포르노는 파시즘적이다, 내지는 파시즘과 공모적이다! 가령, 파졸리니의 몇몇 영화들). 그리하여 대략 1990년대를 경계로 하여, ‘(비공식적)포르노’와 ‘(공식적)애마부인’은 성인비디오(AV)로 통합된다. 이쯤에서 동시대 시인 권혁웅의 시 '애마부인 약사(略史)'를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 참고로, ‘애마부인’에서의 ‘애마’의 ‘공식적인’ 표기는 ‘愛馬’가 아니라, ‘愛麻’(?)이다. ‘愛馬’가 너무 음란하다고 해서 검열에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음란한 정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연기(演技)한다.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90년대의 성인비디오는 <애마부인>류의 극장용 에로영화가 ‘하드’해진 것이면서, 포르노가 몇 배 ‘소프트’해진 것이다. ‘하드’해졌다는 건 가슴 노출이 전면화되었다는 걸 뜻하고, ‘소프트’해졌다는 건 그럼에도, 남녀의 성기 노출은 금지되었다는 의미이다(브레이야의 영화들에서 성기 노출은 소프트코어를 넘어선다). 이 ‘하반신’ 노출 금지에 대한 보상욕구가 극대화된 것이 90년대 성인비디오 최대 히트작이라는 <젖소부인> 시리즈이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젖소부인’의 시대였다(그럼 2000년 이후는?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에서 보듯이, 팬티-페티쉬와 원조교제의 시대이다. ‘부인’들에서 ‘미소녀’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은 각자 해보시길). 두 ‘시리즈’ 사이에 어떤 시대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수사학적 관점에서 ‘애마(愛馬)’는 ‘부인’의 환유(인접관계)이고, ‘젖소’는 ‘부인’의 은유(유사관계)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애마부인’이 시대의 은유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환유이다. 어째서 그런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 모두 주연은 여성이지만(안소영과 진도희라는 두 페르소나. 물론 주연배우들로 치자면, 한 명의 ‘젖소부인’과는 달리 열 명이 넘는 ‘애마부인들’이 있지만. 이후에도 이름이 좀 남은 배우로는 김부선(<말죽거리잔혹사>에 나온), 유혜리, 진주희 등이 있다), ‘애마부인’이 욕망의 주체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애마’는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젖소부인’의 이름은 ‘젖소’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는 말(馬)에 대한 욕망(愛)이란 뜻 그대로 ‘애마부인’의 욕망의 대상을 가리킨다. 반면에 ‘젖소’라는 것 자체가 남근적 명명이며, 남성적 욕망의 투사이다. 이 욕망의 주체가 항상 결핍의 주체라면, 욕망의 대상, 즉 사물은 항상 충만해 있으며, 그 차이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에 대응한다.

<애마부인>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티브는 자신의 ‘합법적인’ 남편에게서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적 욕망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남자’이며,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법적으론’ 금지된 욕망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애마부인>의 전형적인 씬은 그 금지된 욕망의 상상적 충족, 즉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의 정치적 버전은 무엇인가? 그 판타지의 주체는 ‘합법적’ 군부독재에 대한 욕구불만과 한편으론 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중이 아니겠는가? 그 대중의 ‘응시’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 정치적 동일시 또한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한 켠에 느끼며 극장문을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애마부인’과 동일시하건(=결핍의 주체), 동일시하지 않건(=여성적 욕망에 대한 공포) 결과는 언제나 ‘결핍감’이다.

물론 그 ‘결핍감’이 체제전복적인 의지로까지 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응시’가 결과적으론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되겠지만, 언제나 체제(system)에는 오작동(malfunction)이란 게 있는 법이고, 혹 그 오작동과 무관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87년 4월의 정권의 ‘호헌선언’이 초래한 6월의 시민항쟁은, 체제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예기치 않은’ 오작동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하겠느냐!). 때문에, 거기에선 은유의 성찰적 거리 혹은 (등장인물의 수준에서) 금지/위반의 긴장이 들어서는 대신에 환유적 욕망의 맹목성이 질주한다. 환유적 욕망? 라캉에 의하면 욕망 자체가 환유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이 환유적 욕망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다시 지젝을 인용하면 “(성불능의) 부성적 인물(=남편)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애마부인>은 모더니즘적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의 주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히치콕>, 18쪽)들의 응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과 죄의식의 공동체), <젖소부인>의 관객들은 상당수가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인 경우가 많았을 것인바(=나르시시스트들), 여기서, 영화관/비디오방의 공간적 대립 또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에 상응한다. 참고로, <젖소부인>의 제작자는 이 영화의 극장용 판까지 기획했었는데, 아마도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35밀리 ‘젖소부인’이라니!).

Romance

무슨 얘기가 이리로 흘러갔나? 브레야의 <로망스>가 왜 ‘로맨스’인가란 얘기를 하다가 ‘젖소부인’까지 들먹이게 됐군. <로망스>에는 하여간에 결말에서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며, 따라서 이 영화는 일부 성기노출 장면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가 아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요즘은 보통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 무관심 속에 자신의 육체의 ‘용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문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타자이기에(여성끼리의 동성애가 더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도 그녀가 아이를 낳는 과정, 즉 엄마로서 ‘태어나는’ 과정과 ‘남자친구(=아버지)’의 ‘상징적’ 죽음은 겹쳐진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타란티노의 <킬빌>을 떠올린 건 그런 연관성 때문이다.

Anatomy of Hell

반면에, 신작 <포르노크라시>는 말 그대로 ‘포르노’인데, 그건 이 영화가 ‘고립된 섬’ 혹은 ‘기계들(automaton)’로서의 남성과 여성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여자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하려는 걸 한 남자가 목격하고 구해주게 된다. 그 대가로 여자는 남자에게 나흘 밤 동안 자신의 나체를 온전하게 전시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나체, 혹은 음부(‘숨겨진 보물’로서의 ‘아갈마’)를 내주는 것인데, 그 이후에도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 여자의 물음이면서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물음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도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물론, 이런 물음 자체는 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혹은 절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의 결말은 그것을 입증한다. 남자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여자의 육체는 매혹이면서 동시에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르노에 대한 지젝의 정의와 맞물린다. 지젝은 포르노를 아킬레스와 거북과의 경주에 견주는데, 아킬레스는 언제나 거북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 결코 나란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보다 더 빨리 가거나 더 늦게 간다(때문에 성관계는 없다! 둘이 만나질 않으니까). 여성의 육체 앞에서 남성은 거북을 따라잡으려는 아킬레스처럼 조바심 친다. 하지만, 그가 막상 그 육체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 육체는 욕망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 그래서 언제나 매혹이고, 지옥인 것이지 그 중간은 없는 셈이다. 바로 포르노의 세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아갈마에의 매혹!), 곧 지겨워지며 자신이 진창에 처박힌 것 같은 오욕감을 맛보게 한다(바타이유의 포르노그라피들은 그 ‘한계체험’을 다룬다). 왜냐하면, ‘매혹’이 어느새 ‘지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디바’ 여배우들의 결혼이 자주 실패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2자적 세계, 혹은 포르노적 세계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은 대표적인 포르노 작가이다. <거짓말>의 원작인 <내가 거짓말을 해봐>뿐만 아니라(얼만전에 나온 그의 <전집>에는 빠져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포르노적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삼국지> 빼고). 물론 그의 작품들이 ‘포르노’라고 해서,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다(나는 판금된 그의 책을 여러 권 제본해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건, 아이(제3자)를 갖지 않는 부부들을 전부 ‘위법’으로 구속하겠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오버’이고 정신 나간 짓이다. 아이를 갖건 말건,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물론 국가는 필요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거나 제한하기도 한다. 그건 또 국가의 일이다).

작가 장정일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서라도 스스로는 아버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아이들’이 부재한 것은 그러한 ‘결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족소설’이라는 근대소설의 ‘적통’에서 벗어나 ‘일탈적’인 소설들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2자적 관계를 근간으로 한 글쓰기, 그건 곧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에 정치적 포르노 영화가 존재한다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장정일의 원작을 장선우가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거짓말> 같은 영화들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내가 보기엔 장선우가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그의 영화들은 ‘화엄경’이란 판타지를 들먹일 때마다 죽을 쑨다). 그러니까 ‘퇴폐적인’ 영화들이 그의 적성에는 맞아 보인다. ‘나쁜 영화’의 길로 끝까지 가지 않고, 자꾸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의 선(善)에의 의지 때문에, 관객들이 매번 낭패를 보는 건 물론이고, 한국영화는 얼마나 큰 손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다시, 브레이야. <포르노크라시>는 다른 ‘포르노’들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빈약한데(<거짓말>의 내러티브도 얼마나 단순한가!), 그건 제3자가 이야기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로맨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면서,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포르노와 내러티브(이걸 ‘로맨스’나 ‘멜로드라마’로 바꿔불러도 된다)는 상호배제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에서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섹스를 위한 ‘구실’에 불과하며,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포르노가 들어가선 안된다.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의 한 장에서('포르노그라피, 노스텔지어, 몽타주')에서 ‘노스텔지어적인 멜로드라마’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예를 드는데, 초반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감미로운 키스를 나눈 후에 그들이 벌이는 정사(情事)가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포르노로 보여진다면, 이 영화에서 더 이상의 ‘멜로드라마’는 없으며, 더 이상의 ‘내러티브’도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물론 선택할 수 있다면, 남성들은 ‘포르노’를 여성들은 ‘멜로드라마’를 더 선호할 것이다(나는 ‘남자’, ‘여자’란 말 대신에 일부러 ‘남성들’, ‘여성들’이라고 썼는데, 그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이다. 남자도 멜로드라마를 좋아할 수 있고, 여자도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포르노크라시>의 내러티브 또한,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한 초반 설정 외에는 나흘 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이 장면들에선 아무런 제3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포르노’이며 브레야의 상상력은 포르노가 ‘지배’(=포르노크라시)한다. 영화에는 좀 유치한 장면도 들어가 있는데, 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여준 다음에 이어서 여주인공의 생리 피를 보여주는 식의 장면이 그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생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 텐데, 두 남녀가 생리대에 묻은 피를 물에 타서 성수(聖水)처럼 같이 마시는 장면만큼이나 억지스럽다. 브레이야는 그런 ‘숭고한 희생’의 상징은 가져오면서 왜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놓았을까? 왜 그녀는 남녀관계에서 ‘지옥’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란 건 사르트르의 맥심이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닌데 말이다. 56세의 카트린 브레야는 아직 너무 젊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포르노크라시>는 <로망스>와 병렬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면, ‘퇴행적인’ 작품이다. 브레이야는 아마도 이 주제로는 더 찍을 영화도 없을 것이다(‘지옥’까지 갔으면 끝 아닌가?). 혹 <포르노크라시>가 ‘반면교사’적인 의도에서 찍은 영화라면 몰라도…

06. 01. 13.

 

 

 

 

P.S. 현재 출간된 포르노 관련서들 가운데 다섯 권 정도를 꼽아두도록 한다. 기본서는 단연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맨스>(새물결, 1999)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책세상, 1996)이다. 최근 문화연구가 붐을 타고 있으므로 조만간 국내에서도 그럴 듯한 연구서가 나올 듯하다.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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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앞으로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저도 그러고는 싶습니다!)...

로쟈 2006-01-1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일이 많을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헤르베르트 2006-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애프터 목구멍 깊숙히'가 기대되네여. 딥쓰롯은 OST 또한 매우 좋은 명반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OST에 대해 끄적여보고 싶네여. 그나저나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들뢰즈는 영화배우 같이 생겼어여ㅎㅎ

palefire 2006-01-17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 잘 보고 갑니다. 생각하신 대로 브레이야는 <로망스> 이후 발전이 없는 감독입니다. <지옥의 해부>(국내에는 여성영화제에서 공개)는 그녀의 시선과 연출이 동어반복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듯해요. 결론은 로자님께서 파악하신 바로 그것인데 그걸 보여주고자 1시간도 더 되는 필름을 지루한 감정적 갈등과 육체적 관찰/마찰에 쏟아붓죠. 결론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 이미지를 허비하는 건 참기 쉽지 않죠. 이게 지옥같고 권태롭다는 걸 그녀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여주다면 세드릭 칸의 <권태>가 차라리 낫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갈등과 선택의 모럴을 이미지와 서사의 전개와 짜임새 있게 연결시킨다면 에릭 로메르가 훨씬 나은 듯.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작년 베를린에서 미드나잇 상영으로 봤는데,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연대기적이어서 생각보다는 밋밋했던 다큐였습니다. 건질 거라곤 <목구멍 깊숙히>의 클립들(생각보다 많지는 않음), 그리고 지금 쓰신 주제에서 랜드마크급 연구서인 [Hard Core]의 저자 Linda Williams가 출연해서 반가웠다는 것 정도네요.

로쟈 2006-01-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palefire님의 글(혹은 책)을 기다리는 게 더 낫겠군요.^^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글에서 '공부와 학습'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이미지-버전으로 올린다. 이 또한 오프라인용 글쓰기를 위한 '베이스캠프'이다. 당시 글을 쓴 계기는 북매거진 <텍스트>에 실린 한 서평이었지만, 몇 호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호 <텍스트>에는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2004)에 대한 서평도 실려 있었는데(서평자도 쓰고 있지만, 이 책이 최초의 평전이라는 건 다소 믿기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가?), 백범의 '나의 소원' 중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언제 읽어도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옮겨본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반 세기도 더 전의 글이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불행한 것은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보다 근본적인 건 계급적 적대인가?). 그런데 그걸 키워줄 수 있는 건 자연과학이 아니라(예컨대, 인간복제가 아니라) 문화이고 문화의 힘이다(그렇다면, 백범의 이데올로기는 민족이 아니라 문화이다.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다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고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게 독서문화이고 출판문화이다(거꾸로 괴로움을 주는 건 문화가 아니다. 날림출판은 문화가 아니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야 우리는 인의와 자비와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다(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줄 수 있다. 즐거움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즐거움의 향유는 사실 유교적 전통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알다시피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즐거움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즉 배우고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히다란 말은 (1)(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위해) 암기/습득하다 (2)(생활 속에서) 실천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러시아어 번역은 이 대목을 배우고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옮기고 있다(세메넨코의 번역). 러시아어본에 따를 때, 군자(君子)자기완성의 인간이고, 유교는 자기완성을 위한 종교이다. 문제는 무엇이 완성인가라는 점. 무엇이 배움의 완성이고 자기완성인가 

 

열심히 사서삼경(혹은 육법전서)을 암기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시에 패스하는 것이 배움의 완성인가? 그건 어떤 단계(혹은 집안의 부흥)를 뜻할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으로는 좀 모자라 보인다(요즘은 특히나 그럴 것이다. 고시도 자격증화되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막연하다(사실 막연하기 때문에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익힌다는 말을 보다 적극적/구체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싶다. 비록 공자가 학이시교지(學而時敎之)라고 말하고 있진 않지만 말이다(()자는 너무 딱딱하긴 하다). 왜냐하면, 배움의 완성은 가르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군자의 모델로서의 공자야말로 (자신이 배운/터득한 걸)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더불어 실습(實習), 즉 실제로/진짜로 배운다는 건 무엇인가? 자신이 배운 걸 해보는 것인바, 교사들의 교생 실습이란 자신이 배운 걸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말한다 




 

 

 

직접 가르쳐보는 경험 속에서 자신이 배운 건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군자가 된다. , 자왈(子曰) 이전에는 공()선생도 군자도 없는 것이다(군자이기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에 군자이다). 이것이 배움의 변증법이다. ,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배움을 완성하는 것은 가르침으로써이다(가르칠 수 없는 앎은 완성된 앎이 아니다). 그러니까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동무란 말처럼 북한에서 너무 자주 쓰기 때문일까? 그래서 동무 대신에 친구를 갖게 됐듯이, 우리는 주로 학습하는 대신에 공부하는 것일까?).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비변증법적이다(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유물변증법 학습일 것이다).



 


 

 

변증법적인 학습배우다-가르치다란 의미쌍을 조금 확장하면(물론 '가르치다-배우다'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이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 나가진 않도록 하겠다), 얻다-베풀다가 될 것이다(배움은 얻음이고, 가르침은 베풂이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얻는 것은 무엇을 베풂으로써이다. 그리고, 그것은 덕()이란 말이 진정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베풂으로써 덕을 쌓는 것이니까 말이다(김용옥은 ()얻음으로 옮긴다).

 

그러한 사정은 읽다-쓰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혹은 책을) 씀으로써이다(지젝은 라캉에 대해 계속 씀으로써 비로소 라캉을 읽는다. , 읽기 위해서 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 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이어야 하며, 그리고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렇다 

 

<도덕경>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나오는데(대기만성인과응보와 함께 중학생때 교내 가훈전시회를 위해서 급조해낸 우리집 가훈이었다. 사자성어 사전에서 뜻이 좋다고 골라낸 것인데, 인과응보에 나는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대기만성이라나!), 그 뜻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큰 그릇은 이루어짐이 없다이다(만약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크지 않다!). , 큰 그릇이란 무한을 가리킨다. 아무리 큰 유한도 무한보다는 작기 마련이기에 가장 큰 유한이란 곧 무한인 것. 해서, 큰 그릇의 바깥은 없다! 공자가 말하는 성인, 곧 군자도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완성된 인간이지만, 그 자기완성이란 건 미래완료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니까 진정 완성된 인간(=가장 큰 유한)이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는 인간(=무한)이다. 그래서 자왈 한 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하며, 끊임없이 쓰고 또 써야 한다. 글쓰기가 자동사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룬다는 타동사는 자동사의 극한이며, 자동사의 미래완료형이다.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사르트르)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해서, 앙가주망은 그런 자동사적 글쓰기와 대립/모순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끊임없이 써댄 것은 그런 때문이다.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데리다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부른바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다소 상식적인) 컨텍스트의 바깥은 없다와 등가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텍스트-무한은 곧 컨텍스트 아닌가?)  




 

 


 

 

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즐거움 또한 끝이 없다. 그런 즐거움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다시 가르치고 베푸는 것이 나는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한다(해서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언제나 즐거운 지식이며, 새로운 계몽주의즐거운 계몽주의이다). 그것이 시민의식의 함양이고 시민교양의 양생(養生)이다. 시민의 학습이고 합창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떠들어대라! 그것이 한편으론 시인 이성복의 말을 빌자면(그는 한동안 경전 공부를 했었다), 세상과의 연애이다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 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 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이성복, '세상과의 연애')  

물론 매일같이 읽고 쓰는 우리의 공부, 혹은 학습이 당장에 좋은 세상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백범의 표현을 빌면, 인의와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데리다의 민주주의만큼이나, 혹은 메시아만큼이나 더디게 (하지만 언젠가는 예기치 않게) 올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울음 또한 당장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이성복, '아들에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작부들과 물수건과 속쓰림은 또 그 나름대로 자동사이다. 울음이 그러하듯이. “한 여인이 웬 서류 봉투를 손에 쥐고 흐느끼며, 흐느껴 울며 갔다 콸콸대는 물소리 같은 울음을 거푸 울며 여러 번 길을 건너갔다 아무한테도 그 울음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세상 끝까지 울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듯이 울며 갔다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 꽃핀 벚나무의 검은 가지처럼 검은 길을 그 울음으로 적시며”(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27')  

우리는 그렇듯 비교도, 비유도 허락되지 않는 울음에 대해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면서 다만 기다려볼 따름이다. 배우고 가르치고 베풀면서 고대해볼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날을. 하지만 그때의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장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경계와 구별이 없는 나라일 것이니, 세계 자체와 등가일 것이다(우리나라=세계). 우리 나라도 너네 나라도 없는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진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초월론적 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려야 한다. 매일같이 변기에 물을 갖다 부으면서, 세상을 밥 먹듯이 구원하면서, 읽고 쓰고 떠들면서, 속쓰림을 참아가면서, 사랑하면서 실연하면서, 가끔은 못살겠다고 도망치면서, 저항하면서 이를 갈면서, 이빨을 갈면서, 즐겁게 아주 즐겁게   

 

06.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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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2010-07-2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로쟈님 글을 보면서 공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권혁웅의 평론집 <미래파>(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에 대한 표제 평론 '미래파'를 훑어보다가 인용된 시들 중 장석원의 '金秋子에게 보내는 戀書'를 읽었다. 제목이 주는 인상 그대로 '활달한' 시인데, 최근 들어 그런 걸 드물 게 보는지라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구입했다. 작년 11월에 나온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가 그것이다. 시는 3단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의 '구성감각'으로는 뒤에 네번째 단락이 더 붙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그래서 2% 아쉬운 감을 갖게 되지만), 읽어볼 만한 시이다. '방법적 인용'의 새로운 차원을 건드리고 있는데, 권혁웅의 해설은 이를 '시와 다성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시를 전문 인용해본다(80년대를 말한다는 건 요즘 시로선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1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 그대의 눈동자에 고이는 슬픔 때문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갈대, 갈대의 순정 때문에 그날이 다시 온다 해도, 나는 빛좋은 개살구.

그대를 보면 입안에 침이 고여, 그대를 만지면 몸이 부풀어, 아흔 아홉 풍선이 되어 서쪽으로 날아가버려, 꽃잎이 피고 또 졌기 때문에, 꽃잎 속에 다시 꽃잎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날은 부처님이 오신 날이었어, 자비는 그들에게 구해야 돼, 살려줘, 날 구해줘, 날 묻지 마, 파헤쳐줘, 뒤에서 날 쑤셔줘

떨어지는 꽃잎, 삼천의 꽃잎들, 실려간 청춘, 푸른 청춘, 꽃다운 그대 얼굴 위에, 다시 꽃비 내리는 오월에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 왜 가버렸나,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내게 사랑을 실어보냈는가, 나는 토막난 몸통이고 끊어진 길인데

다만 후회하지 않는, 지워지지 않는, 길 위의 혈흔 더운 피 더러운 피, 나의 시신경에 와 닿는 오월의 햇빛, 희미한 전기 신호, 뭉개진 얼굴

그대는 물질적 증거이기 때문에, 짓이긴 꽃잎이기 때문에, 오월의 햇빛 속에서, 소리없이 지는 한 점 그림자, 물들자마자 한 겹 벗겨지는 껍질

그리고 나의 사랑스런 벌레들 이 풍진 세상을 만나 번성의 시대를 보냈으니, 변태해야 하리, 벌레들이여 또 다른 살덩어리여, 내 아파트로 와서 하룻밤 즐기시라

그대 또 다른 살덩어리여, 붉은 혀 붉은 젖가슴 붉은 엉덩이여, 어두운 거실 소파 위에 나의 게르니카, 그대 차가운 추상이여


2

이것이면 족하다. 단 하나의 이미지면 나는 완성된다. 환상이 나를 건강하게 하고 희망이 나를 발기시킨다. 나의 연인이여, 내 가슴에 볼 비비는 꽃잎이여, 머릿속의 총알이여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는, 그렇다. 그대에게만 해당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그대만이 독점한다.


3.

우리는 자욱한 歲月에 걸친 試鍊과 苦惱의 時代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成長과 成熟을 通해 自己 完成의 時代를 形成하여야 할 80年代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聖스러운 새 時代의 序場에서 大統領이란 莫重한 責務를 맡게 된 本人은 國家의 成長과 成熟이 本人에게 賦與된 歷史的 課題임을 痛感하고 있습니다.('제5공화국 대통령 취임연설문'에서)

 

 

06. 01. 11.

 

 

 

 

 

 

 

 

 

 

P.S.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의 <쇼쇼쇼: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생각의나무, 2004)에는 '마음의 요람이 되어버린 김추자'란 절이 포함돼 있다. 김훈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4)에도 '양희은, 김추자, 심수봉'이란 글꼭지가 있다(이 책은 산 것 같은데 그 글은 아직 못 읽었다). 그리고 이선영의 시집 <일찍 늙으며 꽃꿈>(창비, 2003)에는 '이미자와 김추자'란 시가 들어 있다(이 또한 아직 못 읽었다). 이영미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황금가지, 2002)는 우리 대중음악사인데, '신중현과 김추자에 대한 기억들'이란 꼭지에서 김추자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는 김추자(1951-)에 대해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어렸을 적에 접했던 대중가요는 주로 남진, 나훈아, 아니면 패티김과 이미자였다(아마도 어머니의 취향이셨던 듯하다). 물론 이 '전설적인 가수(혹은 '간첩')의 노래를 들어는 보았겠지만, 그다지 조숙하지 않았던 '나의 취향'은 조용필의 '단발머리'와 함께 비로소 시작됐기에.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점령했던 건 마이클 잭슨이었고 컬처클럽이나 듀란듀란 같은 '팝'그룹들이었다. 그 음악취향이라는 것도 '조지 마이클'과 '마돈나'를 거쳐 'R.E.M.' 정도에서 저문 듯하다. 이후로는 대중음반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영화음악이나 편곡된 국악 정도를 가끔 듣는다.

 

 

 

 

 

 

 

그런 가운데 없는 인연을 만들어낸 건 조관우의 리메이크 '님은 먼 곳에'이다. 한 연구소에서 간사로 근무할 때에는 벅스뮤직에서 온갖 버전의 '님은 먼곳에'를 나의 앨범으로 만들어서 종일 듣곤 했다('빗속의 여인'도 그런 식으로 듣곤 했다). '꽃잎'은 그 다음이었다. 몇달 전인가 우리의 대중문화사를 다룬 한 TV프로그램에서 김추자 특집이 다루어지는 걸 보았고 김추자에 대한 새삼스런 '흥미'를 느꼈지만 내가 터치할 수 있는 쪽은 아니어서 흥미로운 책들이 씌어지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눈에 띈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가 기대를 얼마간 충족시켜준 것. 

 

시인은 김추자의 '꽃잎'을 주조음으로 깔면서 마치 디스크 자키처럼 여러 장르의 여러 노래들을 뒤섞고 있는데, 좀 아쉽게 생각하는 건 '나와 김추자'의 구체적 세목이 빠진 것. 해서 시는 재미있지만 감동은 없다. 물론 3번째 단락에 전두환의 연설을 삽입해 넣음으로써 시인이 의도한 건 돌발적인 충돌의 몽타주와 그로 인한 충격효과인 듯하지만, 시적 화자의 포지션은 (황지우식의) 방법적 인용과 (유하식의) 개인사적 고백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돼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뒷심'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참고로 신중현 작사/작곡의 '꽃잎' 가사를 옮겨둔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잡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 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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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1-1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추자 이전에 가수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없다.
작고한 평론가 이성욱씨의 말입니다.
저요? 제게있어 여가수 NO.1은 단연코 김추자입니다.
님과 공유하는 연서가 있다니, 가슴이 마구 뛰어요^^
제 페이퍼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580089 보시삼..흐흐

로쟈 2006-01-12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귀가길에 올린 글이어서 마무리를 못 지었었는데, 마저 보충했습니다. 김추자를 좋아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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