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판 프루스트의 장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4편 '소돔과 고모라'가 출간되었다(지난해에 나올 줄 알았다). 

















몇년 전에 강의에서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와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를 읽고, 나머지 편은 추후를 기약했는데, '소돔과 고모라'에 이어서 나머지 편들이 차례로 출간된다면 따로 강의 계획을 세워볼 참이다(내년 가을에 프랑스문학기행을 진행할 예정이라 강의는 내년 상반기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한편 '소돔과 고모라'는 펭귄클래식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로는 이미 2015년에 출간되었다. 민음사판보다 늦게 나오기 시작했지만 앞서 가는 형국이었는데, 이제 어깨를 나란히하게 된 셈. 오히려 펭귄클래식판은 2015년 이후에 출간이 지체되고 있어서 완간될 수 있는건지도 의문스럽게 되었다. 후반부 출간 경쟁이 어떻게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데, 독자로선 제대로 된 번역본이 제때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7편 '되찾은 시간'까지 완간되면 좋겠다...


19.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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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불평등의 재생산이 제도화 institutionalized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경우, 우리는 불평등의 재생산이 정상화 normalized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화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행동 양식들은 비유하자면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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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인상을 겨울에 적는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렇게 적었지
여름 영화를 겨울에 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페테르부르크가
레닌그라드로 불리던 시절
여름은 그래도 여름이었고
발가벗은 젊음은 불길도 삼켜버릴 것 같았지
빅토르 최의 여름이 그와 같았지
알루미늄 오이도 먹어치우던 시절
무엇이 이념이고 무엇이 사회주의던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노래던가
너희들은 모두 쓰레기였지
게으름뱅이가 노래한다네
여름이 왔고 나는 걷는다
우리는 끌려가고 싶지 않다네
세상이 변해가고 있었고
우리는 총알받이가 되고 싶지 않았어
아스팔트도 빗길에 흐느끼던 날
너는 눈물을 훔치고 나는 걷는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네
그렇게 여름이 오고 있었지
우리는 맨몸으로도 여름이었지
여름이 오고 나는 걷는다
빅토르 최는 여름을 노래했지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겨울에도 열기를 뿜는 듯했어
우리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났다
여름이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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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문학의 기원, 그 글쓰기의 기원은 외부의, 낯선 세계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이었던 듯하다. 낯익은 내부, 강변의 정적, 그 결핍을 보상해줄 낯선 외부를 향한 동경이 그의 글쓰기의 기원이었을것이다. 이같은 판단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쓴 편지 형식의 글 「어떤 일본인 벗에게」(『낯선 신을찾아서』, 일지사, 1988)일 것이며, 마산상업학교 시절, 문학에 열중하던 그 시기의 초입에 ˝전시물자가 산적한 마산 부둣가에 나아가 친구들과 밀항을 꿈꾸고 있곤 했다˝는 술회는 그 간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부의, 낯선 세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1936년생으로, 세 누나 밑의 외아들인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국민학교에 다니던 둘째누나의 교과서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것은 강변의 버드나무집 소년이 매일 보고 듣는 농사 짓는 아버지와 불심이 깊은 어머니‘들‘의 세계와는 정녕 다른, 일문으로 씌어진 이방의 세계, ˝참으로 희한한 글자와 그림˝의 세계였다. 그와 같은 연장선에 놓인 이방의 노래가 유년의 그에게 달라붙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제말 천황제 파시즘의 논리를 운위하는 비약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영문으로 씌어진 소설 ‘나부랭이‘와 잡지들이 또한 그의 의식 성장의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 그 낯선 세계들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 ˝신국神國 일본을 위한 교육은, 저에게 논리가 아니라 생리적 감각의 수준이었지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3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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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자유시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운율을 상실해왔다. 자유시는 마치 운율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듯 운율에서 멀어져왔다. 그리하여 산문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절제되지 않은 사변적 진술들이 확산되고 있다. 현대시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운율의 체계나 규율이 약화되어 왔다. 그러나 성공적인 시들의 경우 대부분 운율에 대한 섬세한 고려와 적극적 활용을 보여준다. 시가 산문과 구분되는 언어예술의 한 절대적 지점인 한, 운율에 대한 인식 없이 제대로 창작하거나 항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율을 무시하는 것이 자유시의 지형에 상응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시는 운율을 새롭게 창조하는 방식이지 전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유시 운율의 진정한 묘미는 의미와 호응을 이루며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창조의 가능성에 있다. 의미와 호응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개성적인 운율이야말로 자유시 운율의 이상이라 할 만하다.(이혜원, ‘현대시의 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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