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책임진 자가 가장 위험하다”

점심과 저녁, 두 차례 소나기가 내렸어도 무더운 건 여전한 날씨다. 이러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겠다. '정'이 들어서 말이다. 날씨는 그렇고, 요즘 가장 흥미로운 외신 기사는 내부고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관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한바탕 법적 분쟁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7월26일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샌지가 위키리크스가 제공한 정보로 기사를 작성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시사IN(10. 08. 06) 아프간 폭로로 미국 넉다운 시킨 위키리크스 

‘21세기의 월터 크롱카이트’인가 아니면 ‘제2의 대니얼 엘스버그’인가. 3년 전 출범한 세계적인 폭로 전문 비영리 웹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창간인 줄리언 어샌지(39)를 두고 하는 말이다. 크롱카이트와 엘스버그 모두 베트남 전쟁에 관한 진실을 폭로해 유명해진 인사다.

어샌지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군사기밀이 담긴 9만여 쪽의 문건을 폭로하자 미국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주무 부처인 국방부는 기밀 유출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나섰다. 최악의 경우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인 어샌지와 위키리크스는 법적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 미국은 이번 문건 유출을 연방법 위반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샌지가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영국의 가디언, 독일 주간지 <슈피겔> 등 세 나라의 대표적인 권위지를 통해 7월25일 동시에 폭로한 이번 문건에는 지금까지 일반인에게 감춰져온 미군의 아프간 전황에 관한 충격적 내용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파키스탄의 정보기관이 적대 세력인 탈레반과 물밑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탈레반이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지대공 미사일을 확보했고, 미군과 연합군이 아프간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하고도 공식 보고하지 않은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샌지는 문건을 폭로한 7월26일 영국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문건을 통해 아프간 전쟁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미화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아프간 전쟁에 관한 ‘숨겨진 진실’을 알리고자 비밀 문건을 폭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어샌지를 두고 ‘21세기의 월터 크롱카이트’라는 말이 나도는 데는 이유가 있다. 크롱카이트는 CBS 방송 앵커이던 1968년 2월 베트남 현지 취재를 토대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고전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에서 이길 수도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해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미국인에게 각인돼 있다. 또 랜드연구소 연구원이던 대니얼 엘스버그 박사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 국방부의 비밀 문건인 7000쪽짜리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1971년 뉴욕타임스에 유출해 베트남 전쟁에 관한 당시 존슨 행정부의 조직적인 거짓과 위선을 폭로한 주인공이다. 올해 79세인 엘스버그 박사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건은 펜타곤 페이퍼 유출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허가받지 않은 폭로이지만 실제 규모는 훨씬 더 크고, 인터넷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됐다”라고 말했다. 

어샌지의 폭로로 가장 곤경에 처한 곳은 미국 정부다. 미국 정부는 이번 문건 내용이 “시기적으로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벌어진 것이다”라며 태연한 척하지만 실은 정반대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번 문건으로 아프간 주둔 미군이 위험에 빠질 수 있고, 군의 기밀 유지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라고 말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은 성명을 통해 이번 문건 폭로를 ‘무책임한 짓’이라며 어샌지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미국 정부, 위키리크스 폐쇄 검토
이런 가운데 미국 정부는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폐쇄하기 위한 법적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부 비밀에 관한 미국과학자연맹 프로젝트’의 스티븐 애프터굿 국장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민은 아프간 전쟁에 관해 행정부에 더 많은 투명성과 솔직함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위키리크스는 국방부가 남긴 공백을 메운 셈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국방부는 미군 정보분석가인 브래들리 매닝 일병을 이번 문건 유출의 용의자로 추정하지만 다른 용의자에 대한 수사도 확대하고 있다. 매닝은 2007년 7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벌어진 미군 헬기의 민간인 오폭 상황을 담은 동영상을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혐의로 지난 5월 체포됐다. 문제의 동영상은 지난 4월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돼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는데, 이 동영상 덕분에 위키리크스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어샌지는 이번 문건 폭로로 미군의 아프간 작전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별 근거가 없다는 판단이다”라고 일축했다. 이번 문건을 공개하기 앞서 ‘피해 최소화’ 절차를 거쳤고, 그 결과 1만5000건에 달하는 기밀 문건은 공개를 보류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건도 실명을 삭제한 뒤 적절한 시점에 공개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CNN의 대표 시사 프로그램 <래리킹 쇼>에 출연해 “이번 문건은 미군 자체의 자료를 통해 지난 6년간 아프간 전쟁의 사상자와 위협 현황을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게 한다”라고 강조했다.  

어샌지에 따르면 세계 각국 정부의 부정과 비밀주의를 폭로해 시정하도록 하자는 게 위키리크스의 목표다. 이처럼 목표는 거창하지만, 정작 위크리크스의 상근 요원은 겨우 5명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정보를 전해주는 자원봉사자가 세계적으로 800여 명이나 된다. 그 덕에 현재 인구 100만 이상의 전 세계 모든 나라에 관한 비밀 파일 700만 건을 확보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본부도 없는 무국적 기관으로, 서버 운영비로 매년 기부금 약 20만 유로를 사용한다. 또 자체 인터넷 사이트가 사이버 공격에 노출돼 무력화될 가능성에 대비해서 스웨덴·아이슬란드·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운영진의 신원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다. 어샌지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큰 걱정은 지금 하는 일이 너무나 빨리, 너무 엄청나게 성공해 자칫 자료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어샌지의 이런 걱정이 기우는 아닐 듯싶다. 실제로 위키리크스는 3년 전 출범 직후부터 세계 주요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되더니 이제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 정부의 ‘요주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 중앙정보국과 국방부는 이미 내부 문서에 위키리크스를 미국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적시한 상태다. 또 여러 정부와 관련 기관이 법원을 통해 위키리크스를 폐쇄하려고 했고, 사이버 공격을 통해 무력화를 기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정부에게 위키리크스는 무서운 존재인 셈이다.

어샌지는 문건 폭로 이후 위키리크스로 흘러드는 정보가 봇물을 이룰 것으로 내다본다. 그래서 ‘폭로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아마도 ‘펜타곤 페이퍼’를 누출한 대니얼 엘스버그가 되기로 내심 작정한 것 같다. 흥미롭게도 위키리크스 웹사이트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조직적 기만을 폭로한 엘스버그의 구실을 길게 거론하며 “원칙있는 폭로는 역사의 물줄기를 좋은 쪽으로 바꿨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워싱턴·권웅 편집위원)    

한겨레(10. 08. 07) “아프간전 기밀문서 반환하라” 미, 위키리크스에 고강도 압박

미국 정부와 내부고발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wikileaks.org)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다. 미 국방부는 5일 위키리크스에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모든 기밀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자료들의 폭로 중지를 촉구하고, 국방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제프 모렐 미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위키리크스가 대량의 문서들을 공개해 미군과 동맹국, 아프간 협력자들의 안전을 위험에 빠뜨렸다”며 “위키리크스는 모든 자료를 반환하고 웹사이트에 게시된 자료들을 삭제하고 컴퓨터에 보관된 모든 자료를 영구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추가 폭로는 피해를 더욱 악화할 뿐”이라며 “위키리크스는 ‘올바른 행동’을 하라”는 충고도 곁들였다.

최근 아프간전 관련 기밀정보 7만7000여건을 폭로한 위키리크스 쪽은 “모렐 대변인의 발언이 몹시 불쾌하다”고 응수한 뒤, 자신들에 대한 대중적 기부를 호소하고 나섰다.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국방부의 요구는 공식적인 위협”이란 입장도 밝혔다. 위키리크스는 나아가 암호해독 열쇠가 없이는 내용을 볼 수 없는 대용량 암호화 파일을 웹사이트에 올려, 추가적인 기밀공개 준비를 마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위키리크스는 1만5천여건의 미공개 자료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 국방부는 그 자료들의 웹사이트 공개를 막을 권한이 없다.

미 국방부는 전문가 80명을 동원해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건들을 일일이 분석하고 있다. 모렐 대변인은 “위키리크스에 대한 법적 대응은 연방수사국(FBI)과 법무부가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위키리크스가 정부 관리들의 불법을 교사한 책임이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미국 뉴스웹사이트 <데일리 비스트>는 지난 3일 “위키리크스 쪽이 미 국방부에 추가 자료공개가 아프간전 관련자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편집하기 위한 공동 검토를 제안했다”고 보도했으나, 미 국방부는 그런 제안을 받은 바 없다고 부인했다.(조일준 기자) 

10. 08. 06.   

P.S. 내부고발의 파괴력이라면 우리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고발' 사건을 통해서 경험한 바 있다. 위키리크스는 그것이 잘 조직화되면 몇 사람의 힘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될 듯싶다.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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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08-07 00:17   좋아요 0 | URL
여담이지만...어샌지 님...꽃중년이세요...므흣...

로쟈 2010-08-07 18:50   좋아요 0 | URL
머리만 하얗지 않으면 20대로 보겠어요...

미지 2010-08-07 01:11   좋아요 0 | URL
요즘 날씨에 정드는 것 절대 동감입니다. 열대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인지, 한편으로 난방비도 안들고 해서 욕심없고 가난한 삶들이 옹기종기 살기에 열대 기후가 딱인 것도 같구요. 아핏차풍의 열대병 보고서 며칠간 도저히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기뢰에 충돌한 듯한 강렬한 미적 체험이었습니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디지털미디어의 폭발력, 투쟁력을 확인하게 되려나요... 걔들이 꽤나 거세 공포를 느끼는 것도 같은데요... 내부자라는 물질적 지속성과 인터넷이라는 탈물질성이 만나는 자리에서 전면적 전선이 이루어질 때, '합법적'으로 개입할 권한도, 제지력도 현재 걔들에게 없다... 할리우드 시나리오도 여기까지는 못(안) 따라갈 것 같은데요... ^^ 지젝은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리고 벤야민은... 우디 알렌과 밥 딜런은....
그런데 일단 권력의 내부자가 되려면 공부 잘하고 성격 무던해야겠네요^^^!

로쟈 2010-08-07 18:49   좋아요 0 | URL
이번에 체포된 미군을 봐도 '공부 잘하고'의 범위는 상당히 넓은 것 같아요. 각자의 직분에서 접근가능한 기밀들이 있는 것이죠...

2010-08-07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7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라"

기획회의(27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격주로 쓰는 서평거리로 이번에 고른 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리뷰가 별로 없는 책을 고른다는 게 한 가지 원칙이었지만, 이번엔 충분하지 않은 책이란 원칙을 적용했다. 많이 주목받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건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 리뷰가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개인적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에서 이 책도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기획회의(10. 08. 05)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처음에는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였다. 이제는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이다. 가공할 만한 열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샌가 국내에서도 단기간에 가장 많이 번역된 철학자가 됐기에, 그의 책이 한권 더 소개되는 일이 더이상 ‘뉴스’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독자들에겐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다.  

 

21세기 첫 십년의 교훈을 되새겨보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제목에서 ‘비극’과 ‘희극’은 각각 그 첫 십년을 열고 마감하는 두 사건, 2001년 9월 11일의 공격과 2008년의 금융붕괴를 가리킨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 ‘개념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라면, 지젝이야말로 그러한 정의에 가장 충실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포착하여 보여준다. 

책은 두 가지 목표에 따라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건 중립적인 분석이 아닌 대단히 ‘편파적인’ 분석이다. 진리란 편파적이며, 진정한 보편성은 오직 편파성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오랜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해둠과 동시에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농담의 배경은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던 말이야!”  

현실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반체제인사들이 놓인 곤경을 잘 보여주는 이 농담이 지젝은 오늘날의 비판적 좌파에게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시 소환되는 것이 ‘공산주의적 가설’이다. 지젝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여전히 올바른 가설이며 나로서는 그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 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서 지젝이 올해 펴낸 두툼한 책 제목이 <Living in the End Times(종말의 시대 살아가기)>이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한 칼럼에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상태다.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라고 던진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이 ‘공산주의’라고 그가 말하는 이유다.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공동체주의나 포퓰리즘, 아시아적 자본주의 등). 경제적 자유주의의 보루 미국에서조차 자본주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다.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사월의책, 2010) 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그럴 경우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변하고,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한다.” 더불어 빌 게이츠는 빈곤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인도주의자’가 되며, 미디어 제국을 동원하는 루퍼트 머독은 ‘위대한 환경주의자’가 된다. 그때 사회주의는 이제 더이상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가 아니며, “공산주의의 진정한 경쟁자,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다.   

곧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양자택일은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이다. 혹은 보수적 헤겔과 아이티의 헤겔, 노년 헤겔주의와 청년 헤겔주의 사이의 선택이다. 물론 지젝이 어느 편을 들고 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라는 네그리의 책 제목을 그는 이렇게 완성한다. “잘 가시오, 사회주의 씨…… 어서 오시오, 공산주의 동지!”  

10.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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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갈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1-06 07:09 
    주말 북리뷰에서 새로운 관심도서가 눈에 띄지 않아서(리처드 슈스터만의 <몸의 의식>(북코리아, 2010) 같은 책을 나는 어제 손에 넣었다) 차라리 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다루고 있어서다. 나도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란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책속 이슈' 곧 책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다.&#
 
 
미지 2010-08-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관계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군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비판적 좌파의 한계와 자본주의 권력자들을 거세하는 문제에 대한 얘기 같습니다. 감전된 느낌인데요...
음--- 일단 읽어보며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일상 속의 자본권력과의 투쟁 상태에 있는데요...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도 좋은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로쟈 2010-08-06 23:07   좋아요 0 | URL
네,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마태우스 2010-08-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환, 거세 등이 나오는 농담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읽어봐도 잘 모르겠어요. 권력자에게 때를 묻히는 것에 만족한다라, 흐음.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 안해봤었는데,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처럼 공동노동을 안하는 건가요? 아무튼 제가 공부를 많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공, 내공을 쌓자...!

로쟈 2010-08-07 12:32   좋아요 0 | URL
책의 2부를 대충 읽어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지젝은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보태고 있습니다...

yamoo 2010-08-0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했다면 그냥 정치학교과서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내용인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지젝의 책은 번역도 번역이려니와 잘 안읽힙니다. <까다로운 주체>를 너무 힘들게 읽어서 인지 다음 책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ㅎㅎ <신체없는 기관>은 좀 나았지만 여전히 가독성은 떨어지고...여기저기 들뢰즈와 지젝에 대한 무성한 논의만 듣네요~ 에휴~

로쟈 2010-08-07 12:26   좋아요 0 | URL
그건 어려운 책들이고요, <처음에는>도 번역본만 읽기엔 까다로운 대목도 있지만, 비교적 잘 읽히는 편입니다. 일단 분량이 부담스럽진 않지요...

Jade 2010-08-0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처음으로 지젝을 읽어보려고 저 책 읽고 있는데, 앞부분을 읽으며 글이 참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ㅎㅎㅎ 물론 어려운 부분은 머리를 쥐어 뜯고 있지만 --;; 이럴때 로쟈님 서평을 보니 완전 좋은데요! ㅎㅎ

로쟈 2010-08-07 15:51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위키피디아

한겨레의 오피니언 란인 훅(hook)에 가끔 들러보는데, 인터넷 액티비즘에 관한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9879). 필자는 이진순 교수다. 다른 기사를 보니 "1985년 김민석(민주당 최고위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총여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현재 미 올드도미니언대에서 시민저널리즘과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치고 있다." 칼럼은 '위키피디아의 모든 것'을 압축해주고 있다.  

한겨레 훅(10. 08. 03) 위키시대의 지식인 

그 곳에 가면, 노무현과 이명박이 있고 김대중도 전두환도 있다. 원더걸스와 에픽하이, 슈퍼주니어도 있다. 김치와 보신탕은 물론, 찜질방(Jjimjilbang)과 막걸리(Makgeolli), 팥빙수(Patbingsu)도 있다. 여기서 “그 곳”이라 함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그다지 폭발력 있는 사이트가 아니지만, 위키피디아는 방문객 숫자 면에서 전 세계 5대 사이트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이다. 방대한 분야 1,600만 여개에 달하는 주제어에 대해 주석을 달아 놓은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으로,  매달 3억3천만 명이 찾는 인기 있는 사이트이다.  전 세계 272개 언어로 편찬이 되는데, 이 중 영어로 된  컨텐츠가 330여만 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독일어와 불어가 각 100만여 개, 폴란드어와 이탈리아어, 일본어,  스페인어가 각기 60-70만여 개로 그 뒤를 잇는다.  한국어로 된 항목은 14만여 개로 전체 언어 가운데 21위를 차지한다.  유투브나 페이스북,  마이 스페이스등과 같은 대부분의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소유인데 비해, 위키피디아는 비영리법인인 위키미디아재단에 의해 운영되며 배타적 지적재산권이 아닌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협약에 의해 누구나 그  내용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누피디아는 왜 망했을까
위키피디아의 성공적 신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000년 초, 미국의 웹 광고회사 대표인 지미 웨일스(Jimmy Wales)와 당시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철학과 박사과정 학생이던 래리 생거(Larry Sanger)는,  온라인 상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지식사전을 만들자는 취지로 누피디아(Nupedia)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수천 명의 전문가 메일링 리스트를 확보해서 그들 중 누군가가 내용을 작성하면 다른 전문가들에게 그  내용을 검토하고 감수 편집하게 하는, 일종의 피어리뷰 (peer-review) 시스템이었다.  취지는 참신하고 거창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2000년 3월부터 2003년 9월까지 누피디아에 게재된 주제어는 고작 24개, 74개의 주제어는 여전히 검토 중인 채로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지미 웨일스는 훗날, 누피디아가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이 전통적인 학계의 방식을 따르려 한 것이 실책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 스스로 전통적인 학술적 방식, 즉 위로부터의 편찬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출된 글들을 검토 비판하고 피드백을 준다는 면에서 기존 학계의 논문심사위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 자원 봉사하는 저자들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는 작업이었겠지요. 그것은 대학원에서 논문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지 않았고 결국 그들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누피디아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래리 생거는, 누구나 글을 작성해 올리고 아무나 감수 편집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위키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전문가 저자들에 국한되었던 내용 작성과 편집의 권한을 일반 대중에게 대폭 위임한 것이다. 2001년 1월, 사상 유례가 없는 오픈소스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그렇게 탄생했다. 위키피디아의 광범한 이용에도 불구하고 위키피디아의 신뢰성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다. “아무나 아무 때 아무 내용이나 게재하고 편집할 수  있다면 도대체 그 내용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생들이 학생들 리포트에 위키피디아를 인용하지 말도록 권한다. 저자의 책임성을 물을 수 없고 그 내용이 수시로 변하는데다가 전문가의 감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지식생산의 패러다임은 변화했는데, 그 지식의 신뢰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정말 그런가. 위키피디아에 실린 글들은 믿을만한 소스가 되지 못하는가.

위키피디아의 비밀 
2004년 버팔로대학의 알렉스 할라바이스 (Alex Halavais)교수는 위키피디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하기 위해 흥미로운 실험을 기획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류가 담긴 13개 항목의 내용을 삽입하고 그 오류가 바로잡히는지 관찰한 것이다. 13개 중 몇 개나, 얼마 만에 제대로 수정이 되었을까. 그의 연구는, 13개 오류 모두가 불과 두 세 시간 안에 모두 바로잡혔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7년, 미국 콜로라도의 지역신문인 덴버포스트도 위키피디아 정보의 질을 조사했다.  문화와 인물, 자연과학과 인문지리가 두루 포괄되도록, “이슬람”과 “빌 클린턴” “지구온난화”와 “중국” “진화”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분야 다섯 명의 대학 교수들을 위촉해서 위키피디아에 실린 정보의 정확성과 수준을 면밀하게 검토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다섯 명 중  네 명이 위키피디아에 대해서 “정확하고 정보적 가치가 있으며 포괄적이고 (accurate, informative, and comprehensive) 학생들과 독자들에게 훌륭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한  명은, 생략된 부분이 있어서 세부사항을 전달하기에 부정확하다면서 “썩 좋은 것은 아니다 (not very good)”라고 했으나 이  역시 위키피디아의 근원적 오류를 지적했다기보다는, 그 불완전성에 주목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1968년 환경학자인 개릿 하딘 (Garrett Hardin)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은, 인간들이 저마다 이기적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공의 자산은 약탈당하고 황폐해 진다고 경고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너무나 손쉽게 누구나 작정만 하면, 원고지 수백 매 분량의 기사를 삭제해 버릴 수도 있고 “갑돌이는 멍텅구리다” 하는 악의적 내용을 남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위키피디아에서는, 하딘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공유지가 확장되고 발전하며 진화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왜일까?  누구나 손쉽게 내용을 수정 편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보가 왜곡되고 훼손될 위험성도 높지만 다른 한편 그 위험으로부터 정보를 보전하고 신속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는 뜻이다. 밤 새워 쓴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저작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위키의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글을 올리고 고치고 업데이트한다. 위키피디아의 성공은, 인터넷의 공공재산을 악의적으로 망치려는 사람보다 고쳐서 발전시키려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반증한다. 너무 낙관적인 소리로 들리는가? 믿기 어렵지만, 그게 아니라면 위키피디아가 쑥대밭이 되지 않고 오늘날 이렇게 건재한 것을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식생산의 새로운 패러다임
위키피디아가 망가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장치가 몇 가지 있다. 모든 아티클은 아무나, 심지어 로그인을 하지 않고도 손을 댈 수  있지만 그 흔적은 모두 “히스토리” 섹션에 남는다. 아티클마다 붙어있는 히스토리 탭을 누르면,  맨 처음 작성된 두어 줄짜리 엉성한 내용부터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내용까지, 몇 월 몇 일 몇 시에 누가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첨삭했는지 시간대별로 한 눈에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순간의 객기로 모든 내용을 삭제하거나 훼손한다 해도, 이전 내용을 복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이전 단계 글을 찾아서 덮어쓰기 하면 끝이다. 망치는 사람보다는 바로 잡는 사람이 많고, 망치는 속도보다는 바로 잡는 속도가 빠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방대한 분량의 세계 최대 지식 데이터베이스를 이룬다. 그것이 집단지성의 힘이다.

혹자는 위키피디아가 편파적이며 비객관적이라고 말한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기술에서 그런 비판은 두드러진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 어느 백과사전이 “엄정하게” 객관적이며 ”칼로 자른 듯이” 중립적일 수 있을까. 학계에서도 권위를 인정받는 브리태니커는 그럴 수 있는가. 기실 지식이란, 특히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지식이란, 일정한 시각과 입장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브리태니커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편집진에게 편지를 보내고 정정을 요구하고  편집진과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현저하게 잘못된 내용일지라도 정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긴 과정 동안, 모르는 이들은 그 잘못된,  혹은 오래된 정보를 그냥 읽고 인용할 수도 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런 수고가 줄어든다.  직접 고치면 된다. 때로 상이한 의견을 가진 이가 내가 쓴 글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지만,  갑론을박이 거듭될 만한 사안인 경우 ” 디스커션” 탭을 눌러서 장외 논전을 벌일 수 있도록 위키피디아는 설계되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공공저널리즘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직접 자신들이 조사하고 취재한 내용을 위키피디아에 올리라는 과제를 준다. 그들이 올린 글이 뒷 사람에 의해서 삭제되거나 수정되어도 점수에는 상관없다고 여러 번 강조해도, 막상 자기 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고쳐지게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하고 불쾌해 한다. 몇몇은 나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몇몇은 자기 글을 수정한 이들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서 논쟁을 벌이고 그들이 작성한 아티클을 찾아내서 똑같이 검열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복”을 한다. 자기 글이 삭제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 의해 더 추가되고 발전된 경우, 그 학생들이 가지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재차 삼차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찾아 고치고 새로운 정보를 추가한다. 게재된 자기 글에 대해 일종의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학생들로 하여금 더 많은 자료조사와 공부를 하도록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학기 말에 위키피디아 과제물에 대한 소감을 쓰게 하면, 자기 글이 삭제당해 핏대 올리던 학생이나 자기 글이 줄줄이 새끼를 쳤다고 기세 등등하던 학생이나,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대목이 있다. “위키피디아에 글을 올리는 과정이 이렇게 간단한 줄 몰랐다”, “내가 쓴 글이 정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 그들은 완제품으로 포장된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되새김질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는 자가 된다. 적어도 노폭시내의 “하이랜드 파크“ 지역이나 ”오션뷰 초등학교“에 관한 한, 그들은 할 얘기가 아주 많다.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자가 권력을 가진다.  지식은 한 사회의 규범과 도덕과 가치관을 가름한다. 일부 지식생산전문가가 이제 그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서 애달파할  일은 아니다. 지금, 위키피디아의 아무 사이트나 들어가 보라. 찾고자 작정하면, 오류와 불완전함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면, “아 역시 아마추어 대중이 하는 짓이란…”하고 혀를 끌끌 차는 것으로 자칭 “전문가”의 자존심을 채울 것인가. 당신이 돌아서서 “내가 뒤져 봤는데, 위키피디아 그거 엉터리더라구…” 핏대 올리는 동안, 누군가는 그 아티클을 바로잡고 새 내용을 추가할 것이다. 참여 없이 평가만 하는 이들의 지적 권위란 그렇게 사정없이 뭉개지기 마련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될 것인가
벌떼처럼(swarm-like) 들끓고 천방지축인 이 시대의 시민들에게 “지성”이란 타이틀을 내주기 아쉬워 버티기는, 오늘날 한국의 좌우 양 극단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히 “대중은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비평한다.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누가 배후인가” 뒤쫓는 유령놀음에 빠져 있는 데 반해 다른 한 쪽은 “배후를 거부하는” 개념 없는 대중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산정 높이 올라가 고고하고 외로운 성채를 짓고 멀리 산 아래를 관망하며 품평하고 한탄하고 혀를 찬다. 그들 중 상당수는, 80년대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인생을 배우겠다며 공장이나 농촌으로 향했던 이들이다. 이제 역사는, 산 아래 저 떠들썩한 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산채에 머물며 조악한 구닥다리 망원경으로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는 이들은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 토론하고 논쟁한다. 이제는 하산해서 현장으로 갈 때다. 고민해서 만든 텍스트가 있으면 온라인에 전면 공개해서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 비판받는 것이 어떨까.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이라도 좀 친절하게 써 주면 좋겠다. 내가 조국, 김두식, 한홍구 교수와 같은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시각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글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읽기 편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 산정에서나 통하는 지식인의 은어를 버리고,  현장의 언어로 이야기하자. 광장의 언어를 쓰지 않으면서 누구와 어떻게 소통을 한단 말인가

10.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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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8-09 11:36 
    위키시대의 지식인 — “그들은 공히 “대중은 변덕스럽고 예측불가능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비평한다. 한 쪽은 “누가 배후인가” 뒤쫓는 유령놀음에 빠져 있는 데 반해 다른 한 쪽은 “배후를 거부하는” 개념 없는 대중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via 로쟈)
 
 
얼그레이효과 2010-08-05 14:03   좋아요 0 | URL
학생들에게 위키피디아에 내용을 올리는 숙제를 내주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살피는 대목이 흥미롭네요.(너무 나간 맥락일 수 있으나)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 가르치는 분들 현실 보면..아직 "예전 방식"에 안주해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로쟈 2010-08-05 15:16   좋아요 0 | URL
고고한 표범들이 많이 계시죠...

쟈니 2010-08-05 14:17   좋아요 0 | URL
축적된 기록과, 기록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로쟈 2010-08-05 15:18   좋아요 0 | URL
국내에서도 주목받은 건 4년 정도밖에 안됐는데, 10년후가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05 22:54   좋아요 0 | URL
킬리만자로 산을 직접 올라가 본 사람들이 그러는데 거기는 표범이 안 산다고 하던데요...

로쟈 2010-08-05 23:00   좋아요 0 | URL
거긴 벌써 다 죽었나 보네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문과 쟁점'을 집약한 책이 출간됐다. <천안함을 묻는다>(창비, 2010). 여전히 조사가 진행중(?)인 이 사건이 어떻게 귀결될지 궁금한데, 짐작엔 머지 않은 장래에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기 전에!)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책은 손 가까이에 둔다고 해놓고 못 찾고 있는데, 일단은 리뷰기사만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08. 04) 천안함에 ?를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  

<천안함을 묻는다, 의문과 쟁점>(창비)은 지난 3월26일 천안함 침몰 이후 시민사회와 과학계·언론계·군사전문가들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제기한 합리적·상식적인 의심과 의문, 과학적 반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책은 1~4부에서 사건의 발생부터 사태 전개과정, 정치·외교·안보 문제까지 두루 짚고 있다. 주목할 만한 곳은 2부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5월20일 조사결과 발표는 ‘중간’조사 결과였다. 하지만 정부와 합조단은 5월15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발견한 어뢰 후미부 추진체 등을 20일 ‘결정적 증거물’로 제시하며 사실상 조사를 마무리했다.

이에 이념·정파와 상관없는 과학자들은 정부 발표에 잇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 측은 묵묵부답하다 겨우 해명의 장에 나오고, 또 기존 발표 결과를 번복하기도 했다. 과학자인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물리학과 교수와 이승헌 버지니아대 물리학과 교수는 ‘결정적 의문, 결정적 증거’란 글을 실었다. 이들은 ‘외부폭발’-‘1번 어뢰’-‘1번 어뢰=북한 어뢰’로 완결된 합조단 논리 중 한 가지라도 입증되지 않으면 논리적 연결고리가 끊어져 북한이 천안함을 파괴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송태호 KAIST 교수는 2일 국방부에서 “어뢰 추진부에서 20도 이상의 온도 상승은 일어나지 않았다. ‘1번’ 글씨 부분은 0.1도의 온도 상승도 없어 글씨 등이 열 손상을 입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1번 어뢰’는 고열로 타버렸을 것”이란 주장과 비교해도 좋을 듯하다. 이 교수는 책에서 “알루미늄 파우더가 프로펠러에 접촉하는 순간 액체 상태로 있어야 하는데 알루미늄 용융점은 660도이므로 폭발 때 프로펠러 인근에 그 이상의 고온이 가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말대로라면 송 교수의 “0.1도의 온도 상승이 없었다”는 주장은 탄두에서 디스크(1번이라 쓰인 부분)보다 멀리 떨어진 프로펠러에 폭약 성분인 알루미늄이 왜 흡착됐는지 설명 못하는 셈이다.

5부 ‘천안함 사건의 출구와 해법’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최문순 민주당 의원, 강태호 한겨레신문 기자가 천안함 사건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정부의 외교 문제를 논의한 좌담이다. 1977년부터 통일 업무를 해온 정 전 장관이 구체적·현실적 진단과 해법을 제시했다. 정 전 장관은 행위 주체가 빠진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거론하며 “결론은 ‘대화로 풀라’는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렇게 요란을 떤 것인가”라며 “천안함 사건 이후 외교는 자해 행위가 됐다. 이 문제를 불러온 것은 이 대통령의 외교안보 인식 결여, 철학 부재”라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는데도 95년 6월 북한에 쌀 15만t을 지원했다”며 인도적 지원도 강조했다. 그는 “소망교회, 순복음교회에서 대북지원을 해야 한다고 나섰다”며 “대통령은 ‘그분들이 하는 일을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식으로 화해협력으로 나갈 토대를 만들고, 6자회담이 열렸을 때 나가는 좋다”고 했다. 또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경제공동체 형성 토대가 허물어졌다”며 “‘북한 경제의 중국화’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적으로 큰 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0.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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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원고 때문에 체스터턴(체스터튼)의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를 들춰보다가(이 책은 현재 절판된 듯싶은데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책이다. 개정본이 다시 나오면 좋겠다. 번역은 좀 부정확한 대목도 있다) 이 독특한 작가이자 언론인, 평론가, 기독교 변증가 G. K. 체스터턴(1874-1936)의 책을 좀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다작의 작가이고 너무 많은 책들을 남겨놓은 게 문제이긴 하지만, 다행히 국내에 번역된 건 그렇게 많지 않다.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대부분이다. 체스터턴은 조지 버나드 쇼, 허버트 조지 웰스, 버트란드 러셀 등과 동시대인으로 100권이 넘는 책을 써낸 걸로 돼 있다. '역설의 대가'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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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악몽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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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ho Was Thursday: A Nightmare (Paperback)
G. K. Chesterton / Penguin Group USA / 2008년 6월
17,250원 → 14,140원(18%할인) / 마일리지 71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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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독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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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Orthodoxy (Paperback)
Chesterton, G. K. / Moody Pub / 2009년 6월
17,230원 → 14,120원(18%할인) / 마일리지 71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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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8-04 15:54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갖는 작가인데, 말씀하신 것처럼 번역이 별로 없네요.
출판사에 문의해 보니 기독교 관련서인데 은 내년 상반기에 번역 출간 된다네요. <목요일이었던 남자>부터 찬찬히 읽어보렵니다.
리스트 정보 고맙습니다^^

로쟈 2010-08-04 16:31   좋아요 0 | URL
제목이 빠졌네요. <이단>이 출간되나요? <정통>과 짝인...

파고세운닥나무 2010-08-17 14:57   좋아요 0 | URL
어떻게 제목만 사라졌는지 모르겠네요^^;
"The Everlasting Man"입니다. <이단>이란 책도 있는가 보군요?

로쟈 2010-08-04 21:48   좋아요 0 | URL
네, 합본된 원서도 있습니다.

2010-08-05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5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이 2010-08-06 00:40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래 두고 관심 갖는 작가인데 로쟈님의 페이퍼로 한번 더 생각하네요.
처음엔 가장 유명한 '브라운 신부'시리즈로 접하고, 필립 얀시의 <내 영혼의 스승들>에서 체스터튼에게 바친 한 챕터를 읽고 <정통>을 알고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그의 대표 저서 중 성 프란체스코 전기문을 꼭 읽고 싶은데 번역이 안되고 있군요.

로쟈 2010-08-06 01:12   좋아요 0 | URL
뭐 워낙에 많이 쓴 작가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