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로 지방에 다녀왔다.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들른 대천휴게소에서 잠시 바람에 실려온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올여름 바다와의 '인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다. 하긴 가뭄과 산불로 '생지옥'이라는 모스크바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는지 모른다. 내일자 리뷰기사들을 보다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오역 지적이 기사화된 걸 읽었다. '인문학 가뭄'으로 편집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출판계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역자와 출판사쪽에서 번역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번역시비'는 일단락짓는다.  

경향신문(10. 08. 14) ‘인문학 가뭄’이 부른 오역 홍수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를 전문으로 내고 있는 한 출판사는 지난해 말쯤 외국 유명 학자의 두툼한 책을 번역해 출간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전문가가 원서와 대조해서 읽고 번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다. 번역자는 대체로 이 지적들을 수긍했다.

일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번역문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책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판을 적게 찍긴 했지만 재고가 꽤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출판사는 재고를 폐기하고 품절시켰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구매자를 파악해 새로 책이 나오면 교환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팔린 경우가 많아 서점을 통해 구매자를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 출판사 관계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그간 쌓아온 출판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인문학 전공자의 층이 엷어지면서 심도 있는 책들을 번역할 사람도, 교정·교열 및 편집 능력을 제대로 갖춘 출판 편집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출판사들이 편집자들에게 전문성보다는 ‘실적’을 강조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편집자들의 이직이 잦아지면서 당연히 걸러졌어야 할 오·탈자나 비문, 오역이 방치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다른 출판사의 편집주간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편집진이 자주 교체되고 젊어지면서 예전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건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가진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번역에 관한 시비가 또 붙었다. 활발한 강연과 저술·번역, 그리고 날선 비평으로 유명한 철학자 강유원씨가 다른 한 명의 공역자와 번역해 최근 출간한 책에 여러가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전부터 오역 사례를 많이 지적했던 서평가 ‘로쟈’는 이 책을 원문대조해 곳곳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며 그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그가 지적한 것 중에서 명백한 오역은 쇄를 거듭할 때 고치려 한다”고 밝혔다. 몇몇 문장은 고치겠다고도 했다. 이 책을 출판한 돌베개출판사 역시 “강씨가 번역문을 재검토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자와 탈자, 비문 등은 책이건 신문이건 활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선 숙명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오·탈자와 비문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굵직한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의역이네, 직역이네, 오역이네 하는 시비가 붙곤한다. 이 또한 번역서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특정인과 특정 출판사를 면박주고 싶은 뜻은 결코 없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나눠질 책임의 무게도 저울질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이야기되고 곱씹어져야 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우려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거 이윤기씨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 개역판을 내도록 만든 ‘고수’인 강씨와 차분하게 질좋은 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돌베개의 만남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안타까움과 우려 말이다.(김재중 기자) 

10. 08. 13.  

P.S. 참고로 기사의 서두에서 언급된 책은 짐작에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길, 2009)일 텐데, 공개적인 리콜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봐야겠다(나는 알라딘을 통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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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10.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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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ai 2010-08-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쪽'에 댓글 달았던 사람입니다. 저쪽 글에는 원래 글에 없던 오타가 생겼기에 비밀 댓글로 제보했죠. 지금은 수정이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기대가 크고요. ^^

로쟈 2010-08-12 21:3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8-1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3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화가 참 흥미진진합니다.고상함보다는 피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레마르크 소설 중에 독일과 소련의 막바지 전투를 다룬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재미있었습니다.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보다 2차대전을 다룬 작품들의 구성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로쟈 2010-08-14 11:12   좋아요 0 | URL
저는 <서부전선>이 더 재미있었는데, 아마 제 또래가 주인공이어서였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8-14 18:3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좋아하는 이들이 참 많군요.저는 레마르크 소설 중에서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실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만 책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나름 지저분한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으면 '독서가'로선 소원을 성취한 게 아닌가 하지만, 사정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이유선 교수의 표현을 빌면, 이런 게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인지도 모른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좀 읽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 "네가 곁에 있어서 나는 네가 그립다"라는 시구절이 있었던가. 고백의 사연은 이렇다.  

"나는 거의 일년내내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책을 읽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 산다. 아마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 책이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책을 읽는 대부분의 상황이 내가 꿈꾸었던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르겠다. 내가 읽는 책들은 강의를 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거나, 거의 아무도 읽지 않을 논문을 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그리고 늘 시간에 쫓겨서 읽는다."(<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16-17쪽) 

새로 나온 <역사가들>(역사비평사, 2010)에서 러시아사가 쉴라 피츠패트릭 편을 들추다가 떠올린 대목이다. 스탈린시대의 일상사 연구로 유명한 피츠패트릭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고 여러 권의 책을 구해놓았지만 정작 읽을 시간이 없는 게 또 현실이다. 찾아보니 국내엔 <러시아혁명>(대왕사, 1990)이 소개된 바 있다. 책은 기억이 나는데, 얇은 책이어서 완역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원서는 현재 3판까지 나와 있다. 간단한 설명은 이렇다.

  

1980년대 초에 피츠패트릭은 볼셰비키혁명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저서 <러시아혁명>을 출간했다. 그녀는 다양한 관점으로 혁명을 두루 관찰하고 1917년 사건의 전체 조건과 함께 볼셰비키 집권 이후의 사회변화를 묘사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중국의 문화혁명에 견줄 만한 소련의 인텔리겐치아 탄압을 스탈린이 아닌 평범한 공산당원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해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스탈린 노선이 사회적 기반에 기초해 있었으며, 이러한 인민의 급진주의가 1930년대 정권과 사회가 부분적으로 합의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주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는 스탈린시대 일상에 대한 면밀한 연구이다. <스탈린의 농민들>, <일상의 스탈린주의> 등이 그녀의 대표적 저작이다. 말하자면, 연구의 초점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사'에 두어졌다.   

   

<일상의 스탈린주의>에 대해 한 서평자는 이렇게 말했다. "피츠패트릭은 독자들에게 스탈린이라는 군주의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서커스 속에서 사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러시아사 연구에서 이러한 입장은 '수정주의'라 불리는데, 쟁점은 이런 것이다. 

보수주의 학파는 소비에트 사회의출현을 '역사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역사의 일탈'로 간주했지만, 피츠패트릭을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보수주의 학파가 사용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비학술적인 용어로 공포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스탈린과 그의 정치국을 사악한 존재로 보면서도, 소비에트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는 "다른 평범한 정부에 존재하는" 상층부와 유사하다고 인식했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려면 아무래도 당시의 일상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요긴하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사가 중 한 사람이 피츠패트릭이지만, 요는 아직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 현재 읽는 책들을 그렇다고 '억지로' 읽는 건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제약을 받는 건 사실이다. 멀리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피츠패트릭의 러시아사 연구에 대한 소개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다시금 떠올라 몇 자 적었다.   

참고로, 피츠패트릭은 1941년 호주 태생으로 주로 시카고대학에서 소련사를 강의했다... 

10.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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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의 글...완전 공감합니다~~ 그나저나 전, 러샤의 문학과 철학에 문외한이라서욤..문학에는 관심이 없구 러샤 철학자들은 관심이 많은데 아는게 하나도 없습니다..작년에 엔날 고려원에서 나온 러샤철학사를 발견해서 기쁜 맘에 데리고 오긴 했지만 역시 아직 읽지는 못한 상태구요..단지 실존철학자 베르자예프는 관심이 많은데, 이 사람 저서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거에요~ 혹시 번역 출간 된 책이 있는지요?

로쟈 2010-08-11 18:41   좋아요 0 | URL
'베르댜에프'로 검색하시면 발췌번역서들이 몇 권 뜹니다. 예전에 <러시아사상사>, <러시아지성사>들이 번역됐었는데, 지금은 구하기 어렵죠.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도 좋은 책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철학자'입니다. '철학' 개념이 서구와 좀 다릅니다...

yamoo 2010-08-11 23:09   좋아요 0 | URL
엔날에 종로서적에서 나온 베르댜예프의 <러샤지성사>를 보고 다른 저서들을 찾고 있는데, 아예 책이 없어서 넘 아쉬워하고 있는 중입니다..벌린의 <러샤 사상가> 입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문학으로 철학을 했군요..러샤는..ㅎ 여튼 넘 감사합니다~

미지 2010-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 철학 개념... 흥미롭네요.

헌내 2010-08-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인 출판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스탈린'과 트로츠키의'배반당한 혁명'이 생각나네요. ^^
(국내 '배반당한 혁명'은 책 번역이 엉망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어 원서가 아예 절판이라는 겁니다.ㅋ)

2010-08-12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무엇을 칼럼의 소재로 삼을까는 언제나 고민거리인데, 그냥 오늘 낮에 떠오른 주제를 적었다. 물론 즉석에서 떠올린 건 아니고 여러 아이템 중의 하나로 머리속에서 궁굴리던 것이긴 하다.  

경향신문(10. 08. 10)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가 따로 있는가? 사회언어학자들에 따르면 그렇다.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의 저자 데보라 태넌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보다 부드러운 감탄사를 사용하며 ‘귀엽다’ 같은 별다른 의미없는 형용사를 더 많이 쓴다. 그리고 자기 주장 끝에다 “그렇지 않니?”라는 질문을 자주 덧붙인다. 남성보다 주장을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며 더 정확한 문법을 구사한다. 밋밋한 표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음역과 억양을 사용하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같은 공손한 표현을 즐겨 쓴다. 이런 것이 말하는 방식의 차이라면 더 중요한 차이는 대화의 목적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남자는 ‘독립’을 원하는 데 반해서 여자는 ‘친교’를 원한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남편 조쉬가 옛날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비즈니스 문제로 조쉬가 사는 도시에 내려올 예정이라는 말에, 조쉬는 대뜸 주말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아내 린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도 출장을 갔다가 주말에 돌아올 예정인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통고해도 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조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친구와 약속을 하면서 마누라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해!”

조쉬를 ‘K씨’로, 린다를 ‘부인 L씨’로만 바꾸면,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는 일을 ‘허락’을 구하는 일로 보아 자신의 ‘독립성’에 대한 침해로 간주한다. 그는 마누라 앞에서 벌벌 떠는 못난 사내란 평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내는 가급적 모든 일은 상의해야 하며 그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란 가장 ‘친밀한’ 관계이기에 그렇다. 태넌의 주장대로, 친교가 “우리는 아주 밀접해서 똑같다”는 뜻이고 독립이 “우리는 떨어져 있는 만큼 각각 다르다”는 뜻이라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문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각각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과연 연대와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장 흔한 대증요법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입장이 돼볼 수 있는 기본적 상상력이 이 경우엔 요구된다. <정의론>의 철학자 존 롤스라면 ‘원초적 입장’이란 걸 대안으로 제시할 법하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각자의 편파적 입장에서 벗어나 ‘성별 없음’이란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즉 각자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합의를 모색한다. 원리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정치철학자 하비 맨스필드는 우리가 자기 성별을 알고 있을 때의 선택과, 알고 있지 못할 때의 선택은 별개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성별 없음’이란 입장은 어떤 결정에서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는데,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 그의 반론이다. 오히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그는 본다. 성별 간의 자연적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쪽이다.

그런 경우 해법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편을 경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혼자서 다 결정하고 통보만 하실 수 있지요? 너무 귀여운 거 아녜요?” “어떻게 모든 걸 당신 허락을 받으라는 거요? 가슴이 떨려서 매번 그렇겐 못하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더운가 보다. 

10. 08. 09.  

P.S. 칼럼에서 언급한 데보라 태넌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한언출판사, 2001)로 번역돼 있다. 처음엔 <남자의 말, 여자의 말>(한언출판사, 1999)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다.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는 알다시피 얼마전에 출간된 책이다. 데보라 태넌에 대해선 이 책에서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를 다룬 대목에서 알게 됐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 실린 그의 인터뷰도 참고했다. 칼럼에서 언급한 내용이 역시나 부정확하게 번역돼 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다룰 기회가 생기면 지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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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8-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토요일에 많은 알라디너들(모두 여자였지만)과 만나서 이 주제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 읽으면서 고개 많이 끄덕였습니다.^^

로쟈 2010-08-09 23:35   좋아요 0 | URL
맨스필드의 말대로 '스테레오타입'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2010-08-10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0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8-1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 읽으면 연애할 수 있나요? ㅜ.ㅜ 저 차였거든요.ㅜ.ㅜ

로쟈 2010-08-10 08:06   좋아요 0 | URL
왜 차였는지는 말해줍니다.^^;

穀雨(곡우) 2010-08-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옆지기랑 소통이 탁 막히면 화성인, 금성인 이야기로 윤을 굴리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군요. 전 동굴로 기어들어가고 무엇보다 여자의 상황을 지배하는 무기, 눈물이..ㅠ.ㅠ
분명 잘 못한 일이 아닌데, 어느새 나쁜넘으로 상황돌변...켁
관점과 상황을 인식하는 지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만 많아집니다. 여자는 말로 호응하고 인정받고 남자는 풀어 나열하고 앞뒤를 가리는 것에 있다는 차이가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멀게 느껴집니다. 고로 남자는 눈치라도 빨라야 생존하며 가정의 평화가....^^

로쟈 2010-08-10 11: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디폴트값을 소통불가능에 두고 시작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어요. 기대를 좀 낮추는 것이죠.^^;

yamoo 2010-08-1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책을 부지기수로 읽었는데요...첨엔 재밌어서 읽었는데, 좀 읽다 보니 식상하더라구요..근데, 최근에 사람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니 새롭게 보이더군요~ 인간을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비슷비슷 한 책들이 주는 공통적인 사항을 추릴 수 있고, 그게 바로 알고 실천해야할 인간에 대한 공부같습니다..<남자다움에관하여>는 아직 못봤지만 비스무리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류의 책들을 독파해 봐야 겠습니다~^^

헌내 2010-08-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에 칼럼도 쓰시는군요 ^^

자꾸때리다 2010-08-1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여자한테 지젝, 데리다 이런 이야기하면 '일반적으로' 싫어하나요?

yamoo 2010-08-10 20:52   좋아요 0 | URL
어렵게 얘기하면 아주~ 싫어합니다...시큰둥하구요..상황에 따라서 아주~ 쉽게 얘기해야 합니다..그럼 좀 듣는 거 같습니다. 근데, 지젝 데리다..먼저 관심을 보이기 전에는 저얼대 먼저 얘기하지 않는 게 좋아보입니다 ^^

빵가게재습격 2010-08-10 22:54   좋아요 0 | URL
남자들도 싫어하지 않을까요?^^ 전에 술자리에서 정치철학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낸적이 있는데, 친구들 반응이 이렇더군요.

'너 왜 그래', '슬럼프냐? 왜 철학책을 읽어?' '집사람이랑 싸웠니?' '살다 보면 다 그럴때 있어 자식아, 자, 술 받아!'
........
'야, 쟤 다음부터 부르지마. 술 맛 떨어져'

로 마무리 되었답니다. 친구 다 끊어집니다. 인문학. 댓가가 크죠...

Anton 2010-08-11 00:55   좋아요 0 | URL
지젝과 데리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말고 여부를 학력도 아니고 성별로 따진다는 게 어쩐지.. '여자'는 '어려운' 이야기 듣는 거 싫어하나요? 이렇게 읽히네요. 하하. 제 생각은 그냥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싫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뭐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공통 관심사가 아닌데 일방적으로 자기 지식/생각을 전달하려하는 태도는.. '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환영받기 어렵지 않을까요..

송연 2010-08-10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서 로그인하고 글 남깁니다.
지젝, 데리다 이런거 이야기한다고 싫어하거나 차이지는 않는것같습니다...^^
진실된 사람이라 느낄때,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가 느껴질 때... 그땐 오히려 여성쪽에서 적극적일 것 같아요...^^

2010-08-11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를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후반부에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번역서에서 가장 무난하게 읽히는 장은 존 롤스와 더쇼비츠의 인터뷰이다(이 두 인터뷰는 원서와 대조하지 않아도 읽는 데 별로 무리가 없다).  

 

나는 원서의 배열대로 차라리 존 롤스 편이 맨앞에 나왔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롤스에 이어서 퍼트남, 에코, 맨스필드 순이다). 일단 한 동료철학자에 따르면 롤스는 "우리 시대에 둘도 없을 훌륭한 사람"이다. 인터뷰에서도 그의 겸손한 인품이 확인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건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다. 

"혹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제가 학생들에게 철학에 뛰어들라고 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철학의 결점을 더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래도 강렬히 하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철학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철학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철학을 잘하는 사람은 적어도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서 얻는 진정한 보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155쪽) 

이 얼마나 훌륭한 충고인가! 학생들이 철학을 하겠다고 하면 최대한 말리겠다는 철학교수가 사실 우리 주변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롤스 정도 되는 철학자의 말인지라 감동적이다.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이다. 그리고 두번째 교훈은 더쇼비츠가 전해준다. 이번엔 사회적이고 공적인 교훈이다. 변호사계에서는 '성자 유다'로도 불릴 만큼 패소한 소송을 뒤집기로도 유명한 변호사 겸 법학자인데 미국의 사법체제에서 개선이 필요한 측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판사와 사법부입니다. 정의를 믿지 않고 속임수를 쓰며 거짓말을 일삼는 냉소적인 판사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그들을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선출되고 재선출되며, 임명되고 승진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결합은 재앙의 징조입니다."(211쪽) 

아무리 짐작은 하더라도 이 역시 미국 최고의 변호사이자 법학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 감동적이다. 아마도 우리의 검찰을 미국의 사법부에 견줄 만하겠다. 그렇다면 왜 부적적할 판사가 선출되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 더쇼비츠가 드는 이유는 '인맥'이다(우리의 사법부는 미국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다. '인맥'에 좌우되는 검찰과는 달리 말이다).  

"이 나라의 많은 지역에서 연방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상원의원 친구를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주지사를 친구로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판사를 뽑는 과정을 보면 혐오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문명화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최악의 과정 중 하나일 겁니다."(211쪽) 

미국의 판사들은 아마도 상원의원의나 주지사 같은 이들이 추천하는 모양이다. 하니 그런 인맥을 탄 '질 낮은' 판사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고,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른다는 얘기. 왠지 좀 안쓰러우면서도 고소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 두 대목이 내가 읽은 이 책의 '건더기'다... 

나머지 장들을 읽으면서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대목이 많았는데, 잘 읽히지 않는 대목들이 불편의 출처라면 어이없는 오역들은 불쾌의 원인이다. 굳이 불쾌하다고까지 한 건 너무도 부주의하거나 불성하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공역자의 지명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데, 그가 <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2010) 같은 수준급 교양서의 저자라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나로선 <인문 고전 강의>의 저자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역자가 동일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건 마치 '인지적 모순'처럼 여겨진다(합리적인 설명은 그가 일부 번역과 감수 정도에 관여했을 거라는 것이다). 롤스의 유명한 제안대로 '무지의 베일'을 쓰고서 이 두 책을 냉정하게 읽고 판단해본다면, 과연 두 사람이 동일인이란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지난번의 오역 지적에서 나는 이러한 인상을 충분히 피력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에 따라선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어설픈 번역비평가' 행세로도 비친 모양이다('번역비평'이란 말이 고깝다면 '번역시비'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인터넷 서평꾼'에 덧붙여 '번역시비꾼'이다). '공개적인' 비판에 유감을 표한 분들도 계신데, 이것도 '논쟁'이라고 한다면 굳이 비공개로 진행할 이유가 없다. 또 <장미의 이름> 번역 교정과 관련한 미담 사례를 제외하면 강유원씨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번역서의 오역에 대해서 공개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역자가 아니라 독자다(나는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판을 '소비자 권리운동'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유감의 사유를 적시했고, 그에 대한 이견이나 반박은 역자나 출판사쪽에서 또한 알아서 제시하면 될 것이다(쇄를 다시 찍을 때 교정할 수도 있고, 정오표를 만들어 온라인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판단은 이 책에 관심을 둔 독자들이 알아서 할일이고. 하지만 공연한 '침소봉대'로 독자를 선동한다는 비난도 없지 않아서 유감의 근거를 조금만 더 들추도록 한다. "강의와 글쓰기, 번역을 통해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쓰고" 있는 역자에게 누를 끼치는 게 돼 유감이지만, 나는 '하버드'와 '강유원', 그리고 '철학'의 이름값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오류들은 충분히 지적되고 교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솔직한 생각은 전공자의 감수하에 개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쪽이다). 길게 늘어놓을 것 없이 바로 몇 가지만 추가로 지적한다(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눈이 침침하군. 공연한 '공명심'은 너무 많은 걸 희생하게 만든다). 코넬 웨스트까진 넘어간 걸로 하고, 스탠리 카벨에 대한 소개를 보자.   

"스탠리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전념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75쪽) 

이 번역문이 말해주는 건 무엇인가? 일단 (1)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2)카벨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맞는가? 이렇게밖에 읽을 수 없다면 두 명제 사이의 관계는 역접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이러했다, 하지만 카벨은 저러저러했다. 하지만 당장 이어지는 문장은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한 일에서 해방의 의미를 찾으면서, 그를 철학의 거품을 빼 종말에 이르게 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를 펼친 매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철학자로 읽는다." 그런데, 어떻게 비트겐슈타인과는 정반대의 작업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건 자연스런 의문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대부분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A guiding theme in Stanley Cavell's work is Wittgenstein's commitment to replacing metaphysical or philosophical problems with our own ordinary needs."  

그러니까 'A guiding theme'의 보어가 Wittgenstein's commitment'인 문장을 번역문은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를 보어로 잘못 옮긴 것이다(결과적으론 정반대의 뜻으로 옮긴 게 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콰인의 주장을 빌자면 '번역의 불확정성'을 이유로 이런 경우에도 오역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분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복잡하면 다 생략하고, "카벨의 주요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하던 문제들이다."라고만 해도 됐을 것이다. 독자를 그렇게 고려한다면 말이다.   

카벨에게 주어진 첫번째 질문의 화제는 그가 정년을 앞두고 신참 교수와 함께 자신의 첫번째 책 <이성의 주장>을 강의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과의 결정적인 만남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라는 게 질문이다. 이에 대해 카벨은 그 책의 프랑스어 번역본(1996)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책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은퇴 전 마지막 학기를 기념하고 싶었다는 이유를 댄다.  

"<이성의 주장>은 저의 박사논문으로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제가 가장 나중에 한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의 텍스트만 해야 한다면 그 책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고요."(79-80쪽)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번역이 얼마나 부주의한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서 인용했다. 원문은 가정법으로 하나의 텍스트만 골라야 했다면 그 책이어야 했다고 얘기한 후에 "I'm grateful it happened."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돼서 감사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었으면"이 아니다. 강의는 1996년에, 이 인터뷰는 1997년에 이루어졌다. 

이 답변 이후에 연이어 질문자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해선 언급하면서 다른 후기 저작들은 업급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카벨은 이렇게 답한다.   

"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성의 주장>에 대한 강의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저의 텍스트가 <철학적 탐구>에 나온 구절들에 대한 주석이라는 한계 때문이었고, 그것 때문에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어떤 점에서는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글에서 정말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80쪽)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관계였는지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읽을 수 있어야겠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항상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런 스토리라인인가? 카벨의 경우 여기서 맞는 건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뿐이다. 나머지는 다 엉터리 번역이다. 원문과 대조해본다.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 I don't find that teaching the course on The Claim of Reason, for all the extent to which tht text of mine is a commentary on passages from the Investigations, is taking me back Witttgenstein. Probably the reason is that in a sense I've never really left Wittgenstein's writing.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란 첫문장을 번역문은"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옮겼는데, 왜 그렇게 시제를 안 맞춰주는가. 이건 앞서의 첫 번째 질문(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에 대해서 대답을 다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여전히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카벨은 자신의 책 <이성의 요청>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 책이 <철학적 탐구>에 대한 주석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라고 한 건 거꾸로 옮긴 것이다.  

왜 되돌아간 게 아닌가?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논리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이게 어떻게 해서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란 뜻이 되는가? 어이없는 일이다. 주어 'It'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온 'Wittgenstein's writing'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항상 가까이에 있었어요, 언제나 폭발 직전이었죠." '폭발 직전이었다'는 말을 나대로 의역하면, "언제나 내게 엄청난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정도다. 요컨대, 번역문은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 특별히 영화와 오페라에도 많은 관심을 내보인 카벨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해선 어떤가. 오페라의 어떤 면에 철학적으로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에 카벨은 오페라가 철학의 초점을 이동시킨다며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페라가 철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페라가 이전보다 더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는 주요하게는 니체와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데카르트 이전 세대가 일상 언어의 의미를,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들이 출현한 10년 동안에 오페라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90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 fact of opera and the celebration of the human voice, so one could say, in the call for opera during the decade which saw the appearance of the great tragedies of Shakespeare, a generation before Decartes expressed his sense of ordinary language as falsifying our relation to the world, means that my own sense of philosophy, in tracing the exiling of the human voice in philosophy, is something I have thought that fact of opera might bear on." 

강조한 문장의 주어를 번역문은 '데카르트 이전 세대'라고 했지만 내가 읽기엔 그냥 데카르트다. 세익스피어(1564-1616)의 주요 비극은 데카르트(1596-1650)의 저작들보다 한 세대쯤 전에 발표되었다. 그래서 이 삽입절은 "일상언어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오도한다는 생각을 데카르트가 발표하기 한 세대 전이죠" 정도의 뜻이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목소리'는 (근대)철학에서 배제되었는데, 근대철학보다 한 세대 전에 출현한 오페라는 그 인간의 목소리를 보존하고 있는 예술장르다. 오페라와 철학의 문제적 관계가 성립되는 지점이다. 더불어, 카벨이 오페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오페라는 미합중국만이 창조할 수 있는 높은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급한 대중예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뮤지컬코미디, 재즈, 영화 같은 것에 대해 저에게 묻는 것은 미합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으며, 그런 물음은 저의 현재 저작 전반에 관한 물음인 것입니다."(91쪽) 

오역만 지적하는 건 소모적이므로 이런 대목도 읽어둔다. 여느 '직업적'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카벨의 독특한 문제의식과 관심영역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카벨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 범주에 들어간다. 에머슨과 소로에서 시작된 미국 철학의 전통에 대한 의견도 참고할 만하다.  

"저는 미합중국에서 철학과 문학이 제가 잘 알고 있는 현대의 어떤 문화에서보다 서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를 기대합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미합중국적인 차이를 동시적으로 고안하려 했던 에머슨이 필요로 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미합중국의 철학과 문학이, 특히 미합중국의 문학이 얼마나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에머슨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94쪽)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만약 -한다면, -할 것이다' 구문인데, 뒷부분은 "then you must be struck by the remoteness of literature, especially of Americn literature, from American philosophy since then."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충격을 받은 건 'you' 곧 '당신'이나 '우리'다. '에머슨'이 아니라. 이것도 고차원적인 '의역'인가.   

여느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카벨이 로티처럼 분석철학계를 박차고 나온 것은 아니다. 카벨과 분석철학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작, 특히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서나, 그 시야에서 철학을 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은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91쪽) 

요는 그가 분석철학의 관심이냐 시야를 넘어서는 자신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might seem a last and perverse place to look for it."이라고 카벨은 고백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하기엔 가장 어렵거나 도착적인 장소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카벨은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다! 그러니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는 삐뚤어진 번역이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란 마지막 문장은 "For me, for various reasons, in various ways, it has been inspiring."을 '풀어서' 옮긴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절했다면,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라고 해주는 게 더 좋았겠다. 핀트는 '분석철학 내에서'에 가 있으니까. 취향의 차이겠지만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는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로 옮기고 싶다...  

이런 식으로 지적하자면, 며칠이 소요될지 모르겠다(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게 무슨 신나고 재미나는 일이라고 몸바쳐 하겠는가. 나대로 해야 할일은 따로 있기에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일단 마무리한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이런 류의 오역 지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식은 죽먹기'다. 그러니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각은 거꾸로다. 식은 죽먹기므로 좀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번역 수준을 좀 높이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독자들이 입 다물고 있으면 또 이런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게 우리가 경험해본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물론 아무래도 철학자들 인터뷰여서 구어체 대담치곤 어려운 대목이 드물지 않지만 영어문장을 좀 볼 줄 아는 독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대한 약간의 소양만 있다면, 이 번역서의 허다한 오류를 찾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Anglo-American philosophy'(영미철학)를 번역본은 한 군데인가를 빼고는 '북아메리카 철학'이라고 옮겼다. 영국과 미국을 가리키는 단어가 '북아메리카'인가? 'modern logic'을 '현대논리학'이 아니라 '근대논리학'이라고 옮긴 건 '관례'에 대한 무지라 쳐도 'priceless'(아주 귀한)을 '가치 없는'이란 식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가치 없는 번역이다. 경제 숙어인 'freedom from want'(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요로부터의 자유'로 옮긴 것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까? 'neural'(신경계)를 '중립적'(neutral'로 봤겠지)으로 착각하고,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people who have a belief in the Last Judgment)을 '최후의 심판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옮기고, '우선성'(priority)을 '선험성'으로 옮기는 수준이라면 수준 이하의 번역 아닌가?  

이런 오역에 대해서 지적한다고 동료 번역자들이 같이 분개하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는다면 대단한 자기비하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이런 게 '남의 일'이 아니며 한국의 인문서 번역 수준이 다 이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번역에 대한 비판을 자주 제기한 바 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이라고 판단하진 않는다. 공역자인 강유원씨도 제대로 맘먹고 책을 다시 정독한다면, 나보다 더 많은 오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곧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박사가 아닌가. '동아시아학'을 전공한 역자와는 뭔가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게 될 것이다.  

'인문철학자' 강유원을 아끼고 존경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도 그의 책을 다수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강유원은 우리가 아는 강유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올려놓은 이상, 이 책에서 뭔가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관한 조언'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쉽게 묻히는 다른 인문서와는 달리 이 책은 역자의 지명도와 '하버드'란 간판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짐작에 초판 정도는 소화가 되었을 듯싶다. 돌베개 출판사나 강유원씨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10. 08. 08.

P.S. 오래전 일이지만 지난 2004년 강유원씨가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2003)을 일간지 북리뷰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린비출판사의 유재건 사장이 반론을 제기하지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작을 비난하는 것이 저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까요? 저작을 비난하면 저작이 상처받는 것이지 저자가 상처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작이 상처받는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필자의 자존심’을 거론한 것은, 그것이 설혹 고미숙이라는 필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 해도 명시된 필자가 자기 저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규칙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출판계에 새로운 관행이 생겼다면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오리아나 팔라치의 ‘한남자’에나오는 글귀들이 떠올랐다. “영웅의 전설은 그 영웅을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화에 있어서나 현실에 있어서 위대한 공훈이란 모험의 시작, 사명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망각, 가중되는 고독, 고통의 무미건조한 반복만이 있을 뿐인 시련. 그러나 영웅이 이 두번째의 시련에 못 견딘다면 그에게 화가 미치리니.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사명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부디 ‘두번째 시련’을 견뎌내고 진정한 영웅들이 되시길.(문화일보) 

그에게도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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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8-0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 그대가 역자가 아니라면 그만두시오. 로쟈의 지적을 살펴보니 대체로 정당한 것들이오. 한국처럼 번역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사소한 번역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물론 사소한 실수마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걸음 양보할 수 있다오. 그러나 로쟈가 지적한 부분들의 번역은 그 내용의 경중과 빈도로 볼 때 사소한 실수가 아니며, 중대한 과오의 수준에 이르고 있소이다. 그대가 맞다고 생각하는 번역을 영어로 back-translation 하면 내 주변의 미국 친구들이 웃을 일이오.

그리고 역자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지면에 적극 발언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로쟈와 번역자들의 문제를 벗어나 독자들의 돈과, 시간과, 땀의 손실에 관한 사항이니 그러하다.


penny1 2010-08-0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에도 로쟈님이 지적하신 번역 오류는 타당해 보입니다.

푸른바다 2010-08-0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번역 오류에 대한 지적은 적절합니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지적들을 참고하여 개정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만들고 별로 빛은 나지 않는 이런 일에 용기있게 발언해 주시는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0-08-08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10-08-0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지켜보기만 하다가, 아무도 지적하는 분이 없기에, 할 수 없이 제가 딱 한 가지만 지적합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지만...)

["A guiding theme in Stanley Carvell's work is Wittgenstein's commitment to replacing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 with our own ordinary needs."]

위 번역비평문의 첫 인용 원문에 오타가 두 개나 있습니다. 당근주스 님도 그 오타 문장을 그대로 재인용하여 반론을 펴고 계셔서, 할 수 없이 이참에 알려드립니다. (이하는 평서문으로).

ⓛ “Stanley Carvell's work”에서 스탠리 카벨의 이름을 잘못 적었다.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중요한 항목을 차지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름 올바로 적기와 올바로 음역하기〉다. 수다한 한국어 번역판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오류가 바로 이 인명 표기 오류와 그 음역 오류이다 보니 로쟈 선생은 번역비평 작업 때마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꼭 약방의 감초격으로 수다하게 등장하는 지적 사항이 이 인명 표기 오류와 음역 오류다. 그만큼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인명의 올바른 표기와 올바른 음역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 점에서 볼 때, 로쟈 선생은 자기 원칙의 하나를 스스로 배반한 결과가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Stanley Cavell은 콩글리쉬식 음역인 “스탠리 카벨”과 현지의 실제 발음인 “스탠리 카벨”이 행복하게 맞아떨어지는 드문 예 중의 하나다. 현지인들도 “스탠리 커벨”이라고 발음하지는 않는다.)

② 위 인용문에서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을 보고 잠깐 헤맸다. 아무런 관사도 없는 형용사 “metaphysical”이 ‘of-구’의 수식을 받는 구문이라니??? 혹시 중복되는 용어를 생략한 구문일까? 이런 (사이비) 문법스런 고급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metaphysical or philosophical problems”라는 쉬운 구문의 단순한 오타였다. 이런 글자 하나의 사소한 오타/오류가 쓸데없이 독자를 고급스런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글자 하나의 오타/오기가 왼갖 문법적 해독 작업으로 골치를 싸매게 만들었다가, 결국은 허망한 단순 결론으로 맥이 빠지게 만드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요즘 로쟈 선생의 글들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엉뚱한 오타/오기가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식인들보다 더 많이 오타/오기를 저지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 어느 지식인보다 문장을 정확하게 쓰시는 분 가운데 한 분이다.) 아마도 폭주하는 숱한 청탁 원고와 번역 일거리와 블로그 글쓰기를 동시다발로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블로그 글에 종종 드러나는 책읽기/원고쓰기/번역하기/강의하기의 폭주 속에서 이분이 이렇게 짬을 내어 위와 같은 번역비평글을 써낸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솔직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10-08-08 13:25)

로쟈 2010-08-08 13:32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다른 곳에 쓴 걸 옮겨오는 게 아니라 직접 페이퍼에 타이핑을 하기 때문에 오타가 잦습니다. 보이는 대로 수정하고 있습니다...

yamoo 2010-08-0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 관심분야가 분석철학인데, 로자님은 별 관심이 없으시군요^^ 허기사 라캉이나 지젝 들뢰즈 쪽을 공부하시는 분들과 분석철학은 별로 친해 보이지 않더군요~ㅎ 그나저나 번역이 아니라 해석이라 좀 짜증나는 군요...인문 사회 고전을 읽어가면서 확신이 든 것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역이 너무 많고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잠깐 덧붙일께요..
가장 심각한 번역은 로자님이 지적하셨다시피 우리나라 역자들이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는 것입니다. "스탠리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전념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지적하신 부분은 어청난 오역이구요...사실 이 문장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도대체가 국어 공부를 전혀 안한 분들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이런 문장은 누군가가 말한 썩은 문장입니다..그리고 다음 부분..
"우리는 데카르트 이전 세대가 일상 언어의 의미를,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들이 출현한 10년 동안에 오페라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단문으로 잘라야 겠지요. 목적어가 3개 연달아 나오는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계속 역자는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식의 ~~하는 것으로라는 이상한 표현을 남발하는데 정말 거슬리는 군요.. 계속 이사람은 짜증나는 표현으로 문장을 구성합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미합중국적인 차이를 동시적으로 고안하려 했던 에머슨이 필요로 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미합중국의 철학과 문학이, 특히 미합중국의 문학이 얼마나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에머슨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 번역하신 분은 이게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번역을 했겠지요.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해석한 작업을 번역이라고 내놓으니 한심할 뿐입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때문에 이해하기위해 현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빠르게 읽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번역하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번역 사업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서 번역을 하기 전에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 공부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거슬리는 표현이 지적해 놓으신 부분마다 산재해 있지만 이쯤해서 그만 두렵니다..에휴~

로쟈 2010-08-08 13:53   좋아요 0 | URL
거기까지 바라시는 건 아직까진 과도한 기대이십니다.^^; 추천할 만한 분석철학서가 있으면 이 참에 추천해주시죠. 저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분석철학에 대해선 학부때나 관심을 좀 갖다가(이명현, 엄정식 교수 등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잘 맞지 않아서 접었습니다. 로티는 당연히 아주 흥미로웠죠...

yamoo 2010-08-08 16:53   좋아요 0 | URL
그냥 관심을 갖고 읽어나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거의 피상적인 수준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책들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학부때는 그렇게도 논리학분야가 싫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분석철학 책들을 모으고 있으니...참으로 아이러니컬 합니다~ㅎㅎ 가장 괜찮은 책이 엔날에 고려원에서 나왔던 사무엘 고로비츠의 <철학적 분석>입니다. 분석철학 전공하신 안건훈 교수가 번역했기 때문에 그나마 믿음을 갖고 볼 수 있는 책이에요..최고의 입문서 같다는^^ 그리고 콰인과 울리안의 공저인 <인식론>이 있습니다. 콰인의 <논리적 관점>에서 보다 <인식론>이 훨씬 쉽고 범위도 넓습니다. 분석철학의 입장에서 인식론과 과학철학 언어철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절판되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도서관에 비치 되어 있기 때문에 구해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로쟈 2010-08-08 17:03   좋아요 0 | URL
콰인의 책은 읽었습니다. 믿음의 거미줄 얘기 나오는 책이죠? <철학적 분석>은 구해놓기만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좋은 책인 줄은 몰랐네요. 뮤니츠의 <현대분석철학> 같은 건 어떤가요? 사실 이 분야도 생각만큼 책이 많이 나오진 않았네요. 전공자들은 꽤 많은데...

yamoo 2010-08-09 00:04   좋아요 0 | URL
아, 뮤니츠의 책이요~ 그건 경제학에서 슘페터의 <10대경제학자>와 비슷한 성격의 책입니다. 입문서긴 한데요, 언어분석, 설명, 추론에 대한 심도있는 내용을 접할 수 없는 게 약점입니다. 아, 그리고 종로서적에서 나온 믿음의 거미줄 그 책 맞아요! 그 책을 보셨다면 하레의 <과학철학>이나 폰 리히트의 <설명과 이해>가 훨씬 좋아보입니다~ 특히 하레의 저서는 실재론의 입장에서 과학적 추론의 형태와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퍼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데요, 번역이 매우 잘된 편입니다. 역시 논리학 전공하신 민찬홍 교수가 번역해서 읽을 맛이 나는 책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뮤니츠의 책보다는 하레와 폰리히트의 책을 보심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구보 2010-08-0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못하는 제가 봐도 로쟈님의 번역이 잘 읽히고 명료하게 이해됩니다.
영어원문은 차치하고 원번역문 문장들은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읽히질 않네요.
저처럼 평균적인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바람직한 번역 아닐까요.
여러번 공들여 읽고 본인의 이해력 탓만 하다가 깔끔한 번역으로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해 보니 -최근에 읽은 <경제 인류학을 생각한다> 홍기빈씨가 새로 번역한 <거대한 전환>-새삼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하는 절로 들었습니다.
일단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면 내용이 어려운 부분은 단어에 대한 개념이해 문제인데 이 또한 친절한 각주로 해결해주더군요.



로쟈 2010-08-08 15:33   좋아요 0 | URL
네, 모범적인 번역 사례죠. 요는 번역문화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독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비로그인 2010-08-0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작, 특히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서나, 그 시야에서 철학을 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은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91쪽)

저는 번역과 관련하여 출발어와 도착어란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영어가 출발어고 우리말인 한글이 도착어인 셈이겠네요. 그런데 위의 문장 같은 경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직 도착되지 않은 문장 같습니다. 말하자면 영어에서 출발하여 우리말로 오고 있는 중이랄까요(이럴 때는 제가 꼭 항구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원주민 같아 씁쓸해집니다).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은 무슨 말인가요? 술어를 고려하면 "제가 애초에 철학에 전념했던 것은(혹은 이유는)"이란 뜻이겠죠.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어느 정도는,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시야 내에 머물다? 저작이?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 고민을 쓰다? 저에게--- 저를 분발하게 만든다?

번역을 하시는 분들이나 번역에 대해 논하시는 분들이 늘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직역이든 의역이든 심지어 오역이든 모두 '역'자가 붙은 말이니 일단은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전제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요? 일단은 우리말 어법에 맞게 옮겨진 상태에서 지나치게 출발어의 입장만 고려했다든가 반대로 도착어를 읽는 독자의 구미에 맞추려다 보니 의미가 왜곡되었다거나 아니면 영 엉뚱한 의미로 옮겨졌다는 지적이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말 어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을 지적하면 직역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들을 하시곤 합니다(참고로 저는 그런 문장을 교정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운이 빠지곤 하죠. 그분들의 노고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 이렇게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우리말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원주민의 말이 아닙니다. 표현법을 익히기가 쉬운 말도 아니고요. 해당 외국어를 익힐 때처럼 우리말의 어법과 표현법을 익히려고 애쓴다면 모든 번역자들이 미처 도착되지도 않은 문장에 쉽게 마침표를 찍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로쟈 2010-08-08 15:35   좋아요 0 | URL
네, 지적 감사합니다. 번역에 대한 시비도 좀더 섬세하게 우리말 번역문의 자연스러움과 유려함에 대한 논의로까지 가면 좋겠는데, 아직은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려와 채찍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울프심 2010-08-0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기 리플들을 보면서 인문학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 책 뿐만 아니라 경제,경영서도 많은 오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 더주고 영어본 혹은 일어본을 보게 됩니다. 어쨋든, 로쟈님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글과 다양한 분들의 리플 및 의견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들 무림의 숨은 고수 이시던데요!!^^

로쟈 2010-08-08 22:51   좋아요 0 | URL
집단지성이 다른 게 아니죠...

biosculp 2010-08-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나은 번역으로 고칠수 있으면 좋을것 같구요.
감정이라는것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저도 잘 조절이 안되는 부분이고,
갑작스럽게 어떤것에 의해 촉발되어서, 감정에 의해 논리가 요구되는 부분들도 있고.
참 말이라는게 아다르고 어다른데요.

로쟈 2010-08-08 22:52   좋아요 0 | URL
더 나은 번역이 나오려면 '대폭적인' 결단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지 2010-08-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정말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로쟈님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08 22:53   좋아요 0 | URL
복잡한 얘기가 아닌데도,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분들이 계신 듯해요...

Kitty 2010-08-0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

콩세알 2010-08-09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언급된 고미숙의 '열하일기'나 진은영의 순수이성비판, 김은주의 데카르트에 대한 책 같은 '쉽게 읽는 고전'의 용도가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런저런 계기에 읽게 된 저런 책들에 대한 저의 경험은 그들의 목적과는 달리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 저런 책을 읽을 시간과 돈으로 무식하게 원전이라도 몇십페이지 읽는 것이 나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더라구요. 원전을 접하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그에 대해 읽어보았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죠. 핵심을 알려면 개론서를 읽으면 되고 원전의 분위기를 알고 싶으면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 나으니까요.

맑스의 '자본론'을 세번째 시도에서 150페이지를 드디어 넘기고 심지어 이해까지 되는 것 같아 자축(^^;;)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 주어 읽고 주어 들은 것들로 형성된 이미지가 확 깨지는 중이고 또한 그 주어들은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들인지가 감이 오기 시작했거든요. 원전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그걸 읽기 위해 공부의 바탕이 필요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로쟈 2010-08-09 09:52   좋아요 0 | URL
어떤 고전해설서도 고전 대신에 이걸 읽으라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저는 읽지 않았지만 고미숙씨의 <열하일기>에 대해선 호오가 갈리던데,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공로는 있지요. 이후에 정본 번역서까지 나오게 됐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나쁜 책'이 나쁜 영향만 끼치진 않습니다. <하버드>도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영어공부도 시켜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콩세알 2010-08-0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어슬픈 들뢰즈론과의 합체인데요. 제가 그 책으로 하는 독서토론회에 참가해 보았는데 들뢰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쟁기계니, 노마드니 그런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들뢰즈 책이라도 좀 뒤적여 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새로운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정작 들뢰즈가 낯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쓴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 책의 목적처럼 쉽게 풀어주어야 할 시간에 자신이 열하일기를 읽으며 얼마나 포복절도했는지 깔깔댔는지 같은 느낌표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거든요. 그러니 이 책의 들뢰즈 합체는 '노마드니까 노마드'라는 동어반복만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어요. 차라리 들뢰즈 용어들로 범벅하지 않고 그 말을 '열하일기'를 풀어쓰듯이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풀어 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론 로쟈님이 의도하는 맥락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고미숙의 책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과 번역감수를 비교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로쟈 2010-08-09 09:49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대목의 핵심은 "저작을 비난하는 것이 저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까요? 저작을 비난하면 저작이 상처받는 것이지 저자가 상처받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대목입니다. 번역에 대한 비판이 번역자에 대한 비난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취지고, 강유원씨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고미숙씨의 책이 이렇다저렇다하는 건 부수적입니다. 강유원씨가 보기에 '나쁜 책'일 뿐이고, 제가 보기엔 <하버드>도 '나쁜 번역서'일 뿐입니다...

2010-08-09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9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8-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있습니다. '로쟈님이 의도하는 맥락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라고 써놓고도 저는 할 말을 했고 로쟈님도 그걸 알면서도 또 답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그게 감정인거죠.

빙빙 돌려말하기는 약자의 수단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서재가 저로서는 유용하고 책을 좋아하는 이상 이래저래 덧글 달고 싶은 유혹도 느낄 것이라 서로 감정이 상하면 안될 것 같은데 이 포스트에 대한 불편함 어쩌지 못해 저렇게 쓴 겁니다.



고미숙의 책에 호오가 갈린다는 말은 좀 이해가 안됩니다. 특히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은데..저는 강유원씨가 고미숙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여기 말고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인문고전강의를 제외한 아무것도 모릅니다.

구보 2010-08-09 15:22   좋아요 0 | URL
<문화일보-"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이 사서 읽은 책">이란 기사에서 발췌했습니다.-[연암의 웃음과 역설은 흉내내고 있으나 불온한 사회 비평 정신은 온데간데 없다. 외려 프랑스의 얼치기 유목주의자 - 프랑스는 들판이 아주 넓어서 유목에 적절한 환경을 갖췄다고 할 만하다 - 에게 빌린 상투어 두어 개와 이상야릇하게 재해석된 마르크스의 언어가 ‘열하일기’ 해석에 동원되면서 연암은 졸지에 18세기 판 개그 작가로 전락한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고미숙이 가담하고 있는 집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듯하다. 그 집단은 이진경이라는 사람이 이끌고 있다. 그 사람이 쓴 어떤 책에 나온 저자 소개는 이렇다: “자본주의적 질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외부를 꿈꾸는 저자는, 현재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세미나와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온갖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심지어 ‘수학의 몽상’이라는 책까지 써서 직업적 수학자에게 비웃음을 받기도 했던, 왕년에는 잘 나가던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택한 방법은 탈주니 유목이나 하는 언어들뿐이다.-

구보 2010-08-09 17:53   좋아요 0 | URL
-어쨌든 연암의 ‘열하일기’는 왕까지도 서늘케 했겠으나, 수유의 전도에 앞장서고 있는 고미숙판 ‘열하일기’의 장난글은 밥맛만 떨어지게 했다. 연암에게는 금기시한 것을 말한다고 하는 분명한 전선이 있었으나 고미숙의 염두에는 전혀 불온하지 않은, 유쾌한 글을 원하는 타깃 독자만 있었을 뿐이다. 덧붙여,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독한 뒤 내다 버

-저도 고미숙씨 책에 몹시 실망한 터라 공감하며 읽은 기사입니다.




미지 2010-08-09 15:40   좋아요 0 | URL
콩세알님, 제 생각에는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사감의 연루와 어조에 너무 신경 쓰다 보면 공론의 의의가 쇠퇴할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문제제기에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 문제 제기의 의의를 인정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로서의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
이 번역 오류의 문제는 취향의 호오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기본 문법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을 두고 다들 너무 열정적으로 회의하시는 듯하네요. 날씨 탓인가요? 기본적인 영단어와 영문법 독해 문제인데 말이죠...

로쟈 2010-08-09 16:00   좋아요 0 | URL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 이후로 나오는 모든 글이 저 문장을 반증하는 것으로만 쓰여져" 있는 건 보시는 대로입니다. 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책을 펴들었지만 너무나도 실망스럽다는 게 제 결론이니까요. 그게 어떻게 해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지요? 강유원씨에 대한 제 '사감'이 굳이 궁금하시다면, 제 서재 전체에서 '강유원'을 검색해보시길.,,

당근주스 2010-08-1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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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8-09 15:52   좋아요 0 | URL
댓글을 지우셨다니 애석하네요... 방문자들이 보며 뭐가 문제인지 나름 판단할 수 있게 그냥 두셨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책읽는아저씨 2010-08-10 00:07   좋아요 0 | URL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방문자들이 판단할 수 있게 놔둬야 하는데, 댓글을 지웠다는 건 자신의 말에 책임을 다 하지 않는 행위라고 밖에는... 그래놓고 누굴 지적하시는건지..

콩세알 2010-08-10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적하신 부분은 지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덧글이 있는데 지우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만 제가 해서는 안될 얘기가 인터넷에 배설물처럼 둥둥 떠 있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서요. 블로그는 가끔 사람을 예가 아닌 것을 말하게 몰아가는 뭔가가 있는 듯 하다는 것이 제 변명입니다. ^^;;

로쟈 2010-08-10 09:23   좋아요 0 | URL
과하기보다는 뭔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강유원씨와 안면도 없지만 특별한 사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을 저는 자주 해왔구요. 그 의도에 대해선 다른 페이퍼들에서 자세히 적은 바 있습니다...